세 사람의 히키가야 21 - 카와사키 사키는 부끄러운 비밀을 폭로당한다.
카와사키 사키는 부끄러운 비밀을 폭로당한다.
자정의 심야
하치만과 이로하의 라인
「선배, 주무세요?」
「아니, 왜?」
「우왓, 깜짝이야. 어째서 즉답하시는 거에요? 답장 너무 빠르잖아요.
아, 혹시 귀여운 후배의 연락을 기다리고 계셨다던가?」
「바보냐. 외톨이에게 있어 휴대폰은 시계같은 거라고. 소리내며 떨리는데 들여다 보는게 당연하지. 일부러 바쁜 척 몇 분 있다 답장하는 짓은 못 한 단 말이다.」
「네네, 그러시겠죠. 보나마나 유키노시타 선배를 기다리고 계셨겠지만요.」
「이만 잔다. 너도 잘 자라.」
「우와앗! 죄송해요! 잠깐만요! 가지 말아주세요, 선배!」
「대체 뭔데······.」
「업무 상담이에요.」
「아직 붙잡고 있었냐?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서툴러서 늦어진 거구, 부장이라 도망칠 수도 없구,
저희 부서의 일정이 저 때문에 늦어지는건 싫단 말이에요.」
「에휴, 알았다. 혹시 집에 컴퓨터 있니?」
「아, 네. 노트북이라면 있는데요.」
「카메라 달려있을테니 잘 됐네. 나머지는 영상통화로 이야기하자. 스카이프 쓸 수 있냐? 디스코드도 상관없다만.」
「뭐, 뭐에요, 갑자기?! 목소리만으론 안 되나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건가요? 너무 대담하잖아요! 저 지금 무지 편한 차림인데······.」
「됐으니까 빨리 켜. 라인은 메신저로만 쓰고, 사진 자료같은 건 그쪽으로 보낼 테니까. 지금부터 시작하면 2시 전에는 끝낼 수 있을 거야. 얼른 자야지.」
「······감사합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부장님이 고생하시는데 부원이 놀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죠? 그럼 부담없이 업혀 가도록 할까요?」
「그래그래, 각오하는 게 좋아. 시간제한이 있는만큼 속성으로 때려박아줄 테니까.」
「으아앙, 선배!!!」
xxx
문화제를 한 달 앞둔 학교는 어수선했다.
오늘부터 문화제 준비를 위한 방과 후 교실 잔류가 허용된다. 예년에 비해 늦어진 일정이 기대감을 부추겼는지 어느 반 할 것 없이 달아올랐고, 교실에 넣지 못한 상자들은 복도까지 밀려나 어지러이 쌓여있었다. 덕분에 학생들은 묘기를 부리듯 비좁은 틈새를 지나다녀야 했다.
무얼 만드려 하는지는 재료만 봐도 아는 법, 컨셉이 겹치는지 벌써부터 옆반과 기싸움을 벌이는 학급도 나타났다. 하긴 카페 같은게 붙어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시너지 효과는 커녕 공멸이다. 상호확증 파괴다.
그러나 때로는 독보적인 컨셉이 해가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여기는 2학년 F반, 교탁 앞에 선 하야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스태프와 배역을 정하도록 하자. 각본은 히나가 맡는 걸로 하고, 나머지는······.”
필요한 역할을 칠판에 써내려간다.
감독 : 에비나 히나
연출 : 에비나 히나
각본 : 에비나 히나
나머지는 무슨······, 1인 제작사냐? 에비나 양의 특기는 분신술이었습니까?
제작 진행 : 유이가하마 유이
제작 진행이라······, 제작 진행이란 뭘까? 연기에 관한 부분은 에비나 양이 전담할 거 같고, 중재나 매니지먼트에 관련된 일이려나? 그런 거라면 유이가하마가 적격이긴 하지. 인맥으로 뽑은 인선은 아닌 셈이다.
광고 홍보 : 히키가야 유미코
······그래, 뭐. 누나는 언제나 친구가 많았으니까.
거창한 홍보도 필요 없다. 그저 반에서 연극을 한다고 말 한 마디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래, 그저 한 마디만으로도.
출연진이 전부 남자이다 보니 각종 지원 업무는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배치된다. 연극은 시각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는 예술. 의상 코디나 메이크는 여자 쪽이 맡아주는게 믿음직스럽겠지. 소품 제작 정도는 남자들도 돕겠지만, ······아니, 이번만큼은 도와주고 싶다가 정답일지도.
“자, 그럼, 맡고 싶은 배역이 있는 사람?”
그래,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배우다. 여자는 쓰지 않겠다는 기이한 작품론을 가지신 감독님 덕분에, 반의 모든 남학생이 후보에 올라버렸다. 카부키냐고.
교실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에비나 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부(腐)후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지옥의 캐스팅 권을 거머쥔 독재자, 에비나 양은 왕년의 삭제 성애자같은 손놀림으로 분필을 놀려나가기 시작했다. 오오, 통재라. 오세느=트리니.
칠판에 이름이 적혀질 때마다 터져나오는 비명소리, 아직 40초 안 지났다고? 사신도 사과도 노트도 없지만 그 무엇보다 강한 저주가 그곳에 있었다.
조연이 채워지고 곧이어 메인 캐스팅 발표가 이어졌다.
어린 왕자 : 하야마 하야토
“꺄아아~!!!”
얼어붙은 하야마와 대조적으로 여자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메이크업 담당을 미리 정해놔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경쟁이 엄청 치열했겠는걸? 이 정도라면 다른 반의 반응은 볼 것도 없겠군.
자아, 그럼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
강 건너 불구경처럼 쳐다보는데 에비나 양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멈춘다.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랐다.
비행사(나) : 히키가(比企)
“꺄아······!”
“잠깐 스토옵!!!”
마지막 글자가 새겨지기 전 에비나 양의 손에서 분필을 빼았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내게 놀랐는지 몇몇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은 긴급상황이니까!
“칫, 그냥 이름만 적을걸 그랬나, 그 쪽이 빨랐을텐데······.”
“역시 제 이름을 적으려 한 거였군요?”
“맞아. 아, 딱히 사가미 양 때문은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히키가야 군이 적격이었을 뿐이니까.”
“하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훔치며 부정해 보았지만 에비나 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빛이 반사된 안경이 눈을 가리니 히죽히죽 웃는 입이 더욱 위험하게 보인다. 주위를 둘러싼 여학생들의 반응도 미묘, 불안한 듯 칠판을 곁눈질하며, 드문드문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아하, 그거군. 그녀들이 생각한 히키가야比企谷는 유미코였던 게 틀림없다. 어릴 때부터 남녀 가릴 것 없이 인기가 좋았던 누나다. 2학년 F반, 아니, 전교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인 하야마와 유미코, 두 사람이 주연을 맡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흥행은 보장되겠지. 모름지기 주인공은 관객 동원력이 있는 사람을 캐스팅해야 하는 법이다. 원래 맡기로 했던 ‘홍보’ 또한 누나가 출연했다면 자연히 달성되었을 것이다.
흥행을 위해서라면 다소의 고증은 희생할 수 있는 법. 아멜리아 에어하트 컨셉으로 20세기 여자 조종사를 내세운다면 그 또한 수요가 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파격적인 재해석을 가미한다면 금발에 더해 다소 멍한 구석이 있는 누나는 어린 왕자 역할도 소화할 수 있었다.
즉, 저 아이들은 유미코가 주연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왕과 여왕을 도와 그들을 꾸미고 돋보이는 역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환호했고, 에비나 양이 지목한 사람이 나란 걸 알았을 때 실망했다. 그리고 내가 그 역할을 거부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들이 보고 싶었던 건 언제나 빛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
상상하자니 소름이 돋았다.
그런 미래가 실현되지 않았음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저는 못 해요.”
“뭐? 어째서?! 그치만 그치만, 하야x하치는 얇은 책에선 머스트 바이라고?! 아니, 머스트 게이라고!”
대체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은? 문화제에서 사욕을 채우는 건 안 된다구요?
“아니, 그게······ 저는 실행 위원이니까요······.”
“그, 그래. 연습도 해야하니 히키가야는 힘들 것 같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전체적인 구성을 재검토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야마의 시선은 그런 뜻을 포함하고 있는 듯 했다. 바란 적 없는 도움이지만 이미 받아 버렸으니 써먹을 수 밖에. 입을 다물고 부정하지만 않으면 되니, 까짓거 간단한 일이다.
일리 있는 변론에 에비나 양도 수긍한듯 했다. 그러나 무언가 아쉬운듯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옆에 있던 분필을 집어 들었다.
“할 수 없지.”
고개를 돌리기 전 잠깐 마주친 눈동자는 지극히 평온했다.
어린 왕자 : 토츠카
비행사(나) : 하야마
“응? 내, 내가 주인공 역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토츠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자신이 뽑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몹시도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여운 모습에 나는 위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미안, 토츠카! 이번만은 에비나 양의 선택에 찬성이야!
“엄청 어려워 보이는데······. 내가 해도 괜찮을까?”
“무슨 소리야! 토츠카야 말로 적임자라고 생각해!”
“그, 그래······? 연극은 해본 적 없어서, 그다지 자신은 없는데······.”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문화제고, 진지한 연기가 필요한 자리도 아니니까. 괜찮다면 원작을 읽어볼래? 원한다면 빌려줄 수 있는데.”
“정말? 고마워.”
취미가 독서여서 다행이다.
토츠카의 눈부신 미소를 바라보며, 인생에서 두 번째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책 읽을 시간도 없을테고 말이지.
“내쪽이 오히려 고맙지. 토츠카의 연극이라니 돈 주고도 못 누릴 호사라고.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좀! 하치만은 과장이 심하다니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정말 그대로다. 만일 이 연극이 토츠카 사이카의 단독주연이었다면 엑스트라라도 기꺼이 맡았을텐데······. 애매한 입장은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았다.
그 때 하야마가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아, 배우들 모이래. 나 가볼게, 하치만!”
“그래, 수고해라.”
미팅 장소는 칠판 앞이었다. 손수 선발한 출연진 앞에 우뚝 버티고 선 에비나 양은 작품 방향성에 대한 열정적인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데, 그거 굳이 칠판에 적을 필요가 있는 겁니까? 뭐 부끄러움은 배우들 몫이겠지만요!
“토츠카에겐 미안하지만, 실행 위원회로 도망친 건 신의 한수였단 말이지······.”
“그것 때문이었냐!”
“컥, 유이가하마?!”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싶더라니 바로 뒤에 유이가하마가 서 있었다. 손에 쥔 노트로 보아 진행 스케줄을 짜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로 사람을 때려도 되니?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야? 가하마 스파이 진짜 무섭다니까.
“참~, 그럼 안 되잖아, 힛키! 실행 위원회는 유키농을 도와주러 들어갔던 거 아니였어?”
“엄밀히 말하면 시로메구리 선배를 위해서지. 의뢰를 받았잖냐.”
“또 말 돌린다니까~.”
양손을 허리에 얹고 한숨을 내쉬는 유이가하마는 아이를 혼내는 엄마를 연상케 했다. 때묻지 않은 성격에 너무 어린 나이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꾹 참고, 유이가하마의 귀에 입을 갖다댔다.
“좀 봐주라. 안 그래도 유키노시타가 주목받고 있는데, 도와주러 들어갔다고 어떻게 말하냐?”
“앗, 그런 거였어?! 미, 미안해!”
어머, 이 아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 버렸잖아? 물론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진실이 섞인 거짓말이란 역시 무섭네. 죄책감이 들 정도야.
“우우······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미안해, 힛키······.”
“이 정도 가지고 뭘. 이제부터라도 조심해 주면 됐어. 부실에서라면 몰라도, 교실에선 때리지 말기. 큰 소리 치는 것도 금지. 주목받는 건 싫으니까.”
“아, 알았어! ······뭔가 나, 어린애 취급 받고 있지 않아?”
“아, 들켰다.”
“좀! 힛키!”
방금 한 말이 무색하게도 우아앙 달려든 유이가하마는 그 작은 주먹을 연신 내 어깨에 두드려댔다. 매번 느끼는건데 유이가하마는 힘이 약하구나. 사브레에게 휘둘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응?”
파닥파닥 허공을 가로지르던 손이 멈춘다.
“그럼 지금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왜 아직 여기 있어?”
“회의 시작까지는 시간이 있어서.”
“항상 빨리 가더니 웬일루? 유키농이 보구 싶지 않아?”
“네 안에서 나는 어떤 이미지냐······.”
“그야······, 이거 말해도 돼?”
“······아니, 무서우니까 그만 둬.”
뭔지는 몰라도 공공장소에서 하면 안 될 말이 나올 것 같으니까.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얼른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유이가하마, 내 얼굴 어때?”
“엣?! 어, 어떠냐니······.”
기분 나쁘다니 눈이 썩었다는 즉답이 나올거라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유이가하마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아 그러고보니 썩었다는 말을 듣지 않은 지도 꽤 됐구나. 이 경우 단순히 유이가하마가 착할 뿐이겠지만.
“부담없이 말해줘도 돼. 그냥 어떻게 보이는지 듣고 싶을 뿐이니까.”
“가, 갑자기 말해도 당황스럽다구······ 그, 잘 생겼다구 생각하는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뒷부분은 확실히 들렸다. 고개를 홱 돌린 유이가하마가 흘끗흘끗 이쪽을 곁눈질했다. 당황스러운 건 이쪽이라고, 갑자기 웬 칭찬이야? 그렇게까지 배려해줄 필요는 없는데.
“······고마워. 그래도 내가 물어본 건 그런 게 아니라, 평소랑 다른 게 있느냐는 의미였는데.”
“어? ······으읏?! 그, 그런 건 빨리 말하라구! 이 바보야!”
“크헉!”
짧고 빠르게 명치를 치고 빠지는 일격. 둥그런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거리를 좁혀 왔다. 유이가하마 양, 무의식 상태에선 굉장한 펀치를 구사하시는군요. 히라츠카 선생님의 영향인가······. 주목받기 싫댔지, 완전범죄를 하란 말은 아니었는데······.
“어, 그러구 보니······ 힛키, 눈이 좀 퀭하지 않아? 거의 예전과 비슷할지두.”
“이 경우엔 방금 전 네게 맞은 충격 탓이 크다고 본다만.”
“아, 아냐! 잘 생각해 보니 때리기 전에두 그랬는걸! ······아, 혹시 몸이 안 좋아? 어떡해? 많이 아팠어?!”
화내다 걱정하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가하마 양이다. 그대로 화난 척 밀고 나가도 됐을텐데, 정말 손해보고 사는 녀석이라니까. 이 이상 걱정 시키기도 뭐하니, 잽싸게 털어놔 버리자.
“실은 말야, 내가 속한 부서에 잇시키도 들어와 있는데, 그 녀석이 그만 부장이 되어버렸지 뭐야. 못 하겠다고 징징대는걸 어르고 달래주던게 상담이 되어버렸고, 도와주겠다고 약속까지 해 버려서······. 어제도 밤늦게까지 통화하다보니 힘들어 죽겠다. 와이파이 만세, 라인은 좋은 문명······.”
마지막은 뭐야? 다잉 메세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도 적잖이 놀란듯 했다.
“이로하 짱, 어느새······.”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놀랐어. 1학년이 부장이라니 뭐가 뭔지······.”
“힛키랑 라인을 교환하다니, 이건 신기록일지두!”
“그 쪽이냐!”
나랑 연락 튼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이야? 신비주의 아이돌이냐고.
부릅 뜬 눈으로 항의를 보내자 유이가하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치만 힛키는 은근히 둔하달까, 이런 데는 무심한 구석이 있으니까. 힛키 쪽에서 나서진 않았을 거 아냐. 연락처 교환, 이로하 짱이 먼저 꺼낸 말이지?”
“잇시키가 부장이 되었으니, 부서 동료들과 연락망을 만들었을 뿐이야.”
“푸흡, 이번에도 그랬구나~.”
“······이번에도?”
무엇을 납득했는지, 팔짱을 낀 유이가하마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괜찮을 지두 모르겠어. 조건이 좋아!”
“조건?”
“응! 연락처두 알구, 같은 부서 동료라면 따로 만나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잘 됐네, 힛키! 열심히 해!”
“어, 어어······. 뭐 그렇지······.”
유이가하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시선은 자연히 교실 앞을 비추었다. 에비나 양의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야마 하야토의 특징적인 금발은 너무도 쉽게 시야에 들어왔다.
보이는 것 뒤통수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북했다.
아니, 어떤 의미로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이쪽을 쳐다보았다면 나는 또다시 고개를 돌렸거나,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을 테니.
“아무튼, 이런 얼굴로 유키노시타를 보려니 껄끄러워서. 보나마나 엄청 잔소리 들을 게 뻔하니······.”
“하긴, 유키농이라면 분명 걱정할 거야. 힛키 엄청 좋아하니까.”
“······뒷말은 필요없는데.”
킥킥 웃음을 참던 유이가하마가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 이로하 짱, 부장이라구 했지?”
“엉? 어어······, 부장이야. 잡무부지만.”
“그건 높은 사람?”
“글쎄다. 가위바위보로 뽑힌거라 애매한데.”
하필 거기서 져버리다니 운도 없지. 실행 위원회에서도 유일한 1학년 부장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임시 기구, 그 중에서도 잡무부 부장이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명목상 상급자일 뿐 새파란 1학년이 선배들을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고, 잇시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두 대단하다. 나라면 진작에 그만뒀을 텐데.”
“단순히 거부권이 없었을 뿐이야. 네가 그 녀석 우는 소리를 들어봤어야 하는데, 받아주는 입장에서는 엄청 고역이라고?”
“그, 그 정도야?”
“어. 차라리 내가 부장을 할 걸 후회할 정도로.”
“푸훗.”
“······뭐야, 왜 웃어?”
“아니, 힛키는 다정하구나 싶어서. 이로하 짱두 그걸 아니까 의지하는 거 아닐까?”
“설마.”
잇시키에게 있어 푸념을 늘어놓을 사람이 나밖에 없었을 뿐이다.
아무리 느슨한 조직이라도 암묵적인 규칙은 존재한다. 어쩌면 결속력이 약할수록 원칙에 기댄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파편화된 개인이 같은 공간에 모였을 뿐이기에, 신뢰는 커녕 소속감조차 희미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전장, 그것이 현재 실행 위원회의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른 행동은 오해를 사기 쉽다. 권위는 어쨌든 잇시키는 한 부서의 부장이었고 유키노시타는 부위원장이다. 살갑게 대화하는 순간 공적인 자리에서 친목질을 하는 걸로 비춰질 위험이 있다. 업무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사소한 불평조차 아웃이겠지.
“그보다 너, 일해야 하는 거 아냐?”
“아, 맞다! 유미코랑 같이 있었는데······, 아.”
생각하기도 전에 눈이 가고 마는 건 슬픈 본능이다. 설령 휴일의 라라포트 광장이라도 할지라도 한 눈에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니까.
“어, 그게, 으아아······.”
입을 가린채 우왕좌왕하는 유이가하마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금발의 세로 롤이 보였다.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 유미코는 멍하니 입을 벌린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하네.”
“······응, 너도.”
생각해보면 누나와 이렇게 마주본게 얼마만일까? 언젠가 코마치가 말하길,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설령 인사를 나눈다 한들 ‘대화’를 하는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 우리는 대화를 한 게 아니다. 대화는 커녕 이제는 마주보는 것 조차 어설프기만 하다.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아하하······, 미안, 유미코, 갑자기 뛰쳐나가서······. 지금 갈 테니까!”
상황을 수습한 유이가하마가 나와 유미코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게서 유미코를 가리는 건지, 혹은 유미코에게서 나를 가리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유이가하마가 떠나자 또다시 혼자가 된 나, 스스로도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언제는 안 그랬나? 훈련받은 외톨이는 어디 간 거야? 친구 몇 명 생겼다고 이제와서 외로움이라니, 답지 않은 짓에도 정도가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담당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비품 상자를 들고오는 학생도 눈에 띄였고, 자리를 펴고 앉아 무언가 만들기 시작한 그룹도 있었다. 왁자지껄 시끄럽고, 바보같은 일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교실, 그야말로 청춘의 한 장면이다.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피식 나오는 웃음을 눌러삼킨채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이르긴 해도 설렁설렁 걸어가면 회의 시작에 맞춰 들어갈 수 있겠지. 누구에게도 의식되지 않도록 소리죽여 교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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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인지 모를 정례 미팅이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처음엔 우왕좌왕 어색한 업무에 혼란스러워 했던 실행 위원회도 며칠이 지난 사이 가닥을 잡은 느낌이었다. 집행부로서도 문화제 준비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오늘부터 시작해 주에 한 번, 정례 미팅이 있는 월요일에는 부서별 진척 상황 보고를 시행하게 되었다.
“말씀드렸던 예정의 70%를 소화했고, 포스터 제작도 반쯤 완료된 상태입니다.”
첫 번째 타자로 지명된 홍보부장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발표를 마쳤다. 대략적인 수치를 제시했으니 할 말은 다했다는 생각이겠지. 그러나 유키노시타의 표정은 냉담했다.
“그래서는 너무 늦습니다. 문화제까지는 한 달, 손님들이 스케줄을 조정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 시점에서 이미 준비가 끝났어야 합니다. 게시 장소 확보와 홈페이지 공고는 끝났나요?”
“아직입니다만······.”
“서둘러 주세요. 우리 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과 그 학부형들은 홈페이지를 자주 체크할 테니까요.”
“네, 네에.”
홍보부장이 기죽은 표정으로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다음, 서클 통제는요?”
“······네. 현재까지 참가 의사를 밝힌 서클은 열 곳입니다.”
“그건 교내 서클 수만을 말하는 건가요? 지역 내의 다른 단체에 의사를 타진해 보았습니까? 과거에 참여했던 단체에 연락을 취해보세요. 스테이지 할당, 관객 추산과 스태프 내역, 공연 시간표 제출도 아직입니다.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네.”
서클 통제부의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진다. 적당히 넘어가려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는 부위원장 덕에, 보고와 지시는 명백히 서로의 비중이 역전되어 있었다. 잇따른 순서에도 그러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기록 잡무.”
유키노시타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태도는 지극히 사무적이었고 딱딱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한껏 들뜬 듯 하늘하늘한 기록 부장(잡무 부장은 폼이 안 살기에,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의 목소리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스케줄 표는 오늘 중으로 제출하도록 할게요. 기자재 신청은 조금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교외 서클 등에서 촬영 장비 지원을 요청할 경우도 대비해야 하거든요. 서클 통제부 쪽에서 참가 명단이 확보되는 즉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무색하게도, 책상 아래로 내린 잇시키의 손을 떨리고 있었다. 양손 가득 꼬옥 붙잡은 대본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과연, 알겠습니다.”
여태까지와 다른 반응에 유키노시타도 뜻밖인 듯 했다. 잇시키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찬찬히 움직여 나를 향하더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한눈에 간파하다니, 역시 유키노시타.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 쑥스럽구만.
“이상으로 각 부서별 보고는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생각에 주위의 긴장도 다소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키노시타는 회의를 끝낼 마음이 없었다.
“······만.”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가미 위원장?”
회의 시작 선언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위원장, 사가미는 내내 들여다보던 손톱에서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응? 좋지 않나요? 그대로 진행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아니, 하지만······.”
“이야, 역시 유키노시타 양이네요~. 부위원장을 맡아줘서 살았다니까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회의실을 돌아보며 건넨 말이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미묘하기만 했다.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을 뿐 호응하는 기색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가미는 꿋꿋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위원장······.”
“어떻게, 이제 마무리를 지으면 될까요?”
“······아직, 방문객 접수 업무를 할당하지 못 했습니다만······.”
“아, 그건 우리가 할게. 유키노시타 양.”
보다못한 시로메구리 선배가 구원의 손길을 건넸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이 건은 학생회에 일임하도록 할게요. 일반 방문객 접수는 보건 위생부 담당이군요······. 사전에 리스트를 업데이트해, 위생부와 협력해서 처리해 주십시오.”
“응, 알았어.”
시로메구리 선배가 수락하자 유키노시타도 안심한 기색이었다. 말없이 사가미를 향해 눈짓을 보낸다.
“그럼, 마무리를 할게요. 각자 유키노시타 양의 말대로 열심히 해 주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형식적인 멘트에 형식적인 박수가 울려퍼지려던 찰나, 그것을 자르듯 사가미가 덧붙였다.
“아, 그래도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너무 빡빡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 지금까지 유키노시타가 한 말을 뭘로 들었니?
“사가미 양,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일정을 앞당겨 진행해온 건 여유를 두기 위해서······.”
유키노시타도 당황했는지 반박하는 목소리에는 다급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사가미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녀의 두 눈은 바로 옆자리의 유키노시타가 아닌, 회의실에 둘러앉은 실행 위원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이면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부위원장의 걱정은 알겠지만 올해는 체육 대회도 없구, 일정을 다소 넉넉하게 진행하셔도 문제 없다고 봐요. 실행 위원도 결국 학생, 저희들부터 즐거워야 남들도 즐거운 문화제를 만들 수 있을 테구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만······, 미심쩍은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잇는다.
“문화제라 하면 역시 학급 행사죠! 방문객들의 관심사도 그쪽에 집중되어 있을테고, 여러분들의 반도 지금쯤 준비가 한창일 거라 생각해요. 우리만 끼지 못하는 거, 아쉽지 않나요? 실행 위원회 업무는 지금 페이스로 유지하되 양쪽 모두 참가한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어떠신지?”
시로메구리 선배의 표정은 복잡했다. 나와 유키노시타, 사가미를 바라보더니, 교실 구석에 앉아있는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시선을 보냈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있는 히라츠카 선생님도 지금의 상황에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닌 듯 했다.
한편 실행 위원들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보았지만, 애초부터 그들에게 있어 사가미의 제안은 고민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터져나온 박수소리가 이윽고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것으로 오늘 미팅은 종료되었다.
실행 위원들이 저마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리를 떴다.
일시에 풀린 긴장과 거기서 비롯된 소란이, 담아두었던 속내를 새어나가게 한다.
모두들 하나같이 유키노시타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호의적인 반응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형식만을 빌린 반어법.
누가 위원장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양반이다. 적어도 칭찬으로 해석할 여지라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너무 깐깐하다느니 고압적이라느니, 일거리만 잔뜩 늘었다라는 말은, 변명의 여지없는 불만이었다.
개인의 악의가 집단 속에 가려지면 희석될거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폐쇄된 관계 속에서 모두가 조금씩 내뿜는 독기는 결국 그 농도만 짙어질 뿐이다.
유키노시타도 알고 있겠지. 아니, 대놓고 들으라는듯 떠벌리는데 눈치채지 못 하는 게 이상할 것이다. 공식적인 항의도 아닌 단순한 중얼거림은, 거꾸로 공식적인 수단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빈정거림 따위, 당사자가 부정하면 증거조차 남지 않는다.
설령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공개적인 비난이어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받는 피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더욱 질이 나빴다.
사가미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회의실을 나섰다.
그에 반해 유키노시타는 처리해야할 서류들 속에 파묻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쪽에 눈살이 찌푸렸는지는 뻔한 일이다.
“다들 너무들 하시네요.”
“······ 그러게나 말이다.”
기록 부장, 잇시키 이로하가 속삭였다.
어중이떠중이 잡무 부서에, 1학년 부장이다. 애매하게 많은 인원수에 비해 업무 내용은 불분명하고,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유키노시타의 질책을 듣지 않은 부서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해 유키노시타에게 가세해 봤자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겠지.
힘을 보태주긴 커녕 역효과만 났을 게 분명하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맡은 일을 차질없이 진행해 그 어깨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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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사가미의 선언이 이어진 지 며칠 후, 하나둘씩 위원회를 빼먹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30분 정도 지각하거나 사전에 연락한 결석이라 큰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도 부서에 따라 사정이 다르다. 일거리 대부분이 문화제 당일에 편중된 보건 위생과 기록 잡무부는 결석자가 늘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서클, 홍보, 회계부는 바쁜 시기에 구멍에 생겨 난감한 기색이었다.
가끔은 난감함을 넘어서, 무언가 불만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올 때도 있었다.
이해한다. 지금의 상황은 나조차 이해가 안 가니까. 어째서 기록 잡무부는 결석자가 한 명도 없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다들 이렇게까지 의욕적인 거야? 배부른 고민처럼 들리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히키가야 군은 어디 중학교 출신이야? 나는 근처의 공립인데.”
“하하, 우연이네. 이런데서 동창을 만날 줄은. ······그래서 말인데, 부탁한 포스터 복사는······.”
“실레합니다! 히키가야 선배, 비품실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모르겠는데,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거 아까도 설명해 줬잖아.”
“에헤헤, 까먹었어요. 천천~히 설명해 주세요.”
“아니 너······.”
“잠깐 실례할게, 히키가야 군. 대여한 장비의 검수를 해두고 싶어. 창고까지 동행해 줄 수 있을까?”
“어, 제가 지금 자리를 비우기 힘든 상황이라······.”
“선배로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히키가야 군이 꼭 같이 가 줬으면 해. 안 될까?”
“아니, 저기······.”
“히키가야 군,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는데?!”
“그게······.”
“히키가야 선배!”
“아······.”
탕.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나를 둘러싼 여자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회의실 안, 얼마 남지않은 실행 위원들의 시선이 기록 잡무부의 부장석에 집중된다. 화제의 당사자 잇시키 이로하는 어디선가 날라온 무거운 서류철 더미를 앞에 둔 채 차가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어지러이 흩어진 모양새는 얌전히 내려놓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차라리 집어던졌다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사토 선배?”
“응? 나, 나?! ······왜?”
“포스터 사본은 제 앞으로 제출해 주시겠어요? 마침 제 일이 끝난 참이니, 분류 작업은 이쪽에서 하도록 할게요.”
“아, 그, 그게 아직 작업이 안 끝나서······.”
“아하~ 그러시구나~. 괜찮아요, 오늘까지만 제출해주시면 되니까. 열심히 해 주세요?”
“그, 그래······.”
“그리고, 사사키 양?”
“왜, 왜 불러, 잇시키 양?”
“비품실 담당자 전화번호라면 홈페이지에 나와 있을 거에요~. 뿐만 아니라 교내 내선 전화라면 기기 옆에 연락처 리스트가 붙여져 있을 거랍니다~. 참고해 주세요?”
“으, 으응. 알았어······.”
“그리고······ 키노시타 선배였던가요?”
“그, 그래. 무슨 일일까?”
“장비 검수라면 어제 끝내뒀습니다. 다른 쪽 일을 도와주시겠어요?”
“어? 어제?”
“네~!”
“······분명 인수받은 시간은 꽤 늦은 오후 였을텐데?”
“받은 시점에서 검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문제가 생겨도 저희쪽 책임이 될 지 모르고, 저와 선배가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선배?”
“네, 거기계신 히키가야 선배요!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 아무것도.”
“그렇군요. 자, 좀 더 힘내도록 하죠! 빨리 끝낼수록 퇴근도 빨라지니까요! 잡담은 나중에 부탁드려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엔 힘이 있었고 막힘없는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다. 아쉬운 듯 자리를 뜨는 부원을 향해 생글생글 미소를 보내는 잇시키. 그야말로 승자의 여유, 원 턴 쓰리 킬이다. 낯빛 하나 안 바뀌고 전학년을 격침시키다니, 대단하구만.
“······뭘 그렇게 보세요?”
“아니, 잇시키도 성장했구나 싶어서.”
팔자에도 없는 부장직을 떠맡아 울상으로 매달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 진짜로 엊그제였지 참. 아무튼, 그랬던 잇시키가 어느새 이런 어엿한 부장이 되다니, 묘한 감동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잇시키는 차가운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뭐에요, 선배 노릇인가요? 방금전까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헤벌레 하던 남자에게 듣고 싶지는 않은데다 애초에 선배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으니 이제 와서 그러셔도 전혀 기쁘지 않아요 하다못해 때와 장소는 가려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선배에게 악의는 없는데다 여러모로 도와주시는 건 사실이니 일방적으로 화낼 수 없는 것도 짜증나구요 죄송합니다!”
“그, 그래. 뭔가 미안하다······.”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더니 헉헉 숨을 고르는 잇시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말빨 하나는 타고난 후배님이다. 혀가 꼬일만도 하건만 또박또박한 발음하며 의외로 정확한 인터네이션, 의외로 부장직에 걸맞는 인재일지도 모르겠는걸.
“정말이지, 선배가 똑부러지게 거절하지 않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요. 좀 더 행동에 주의해 주세요.”
“야, 거절하라니······. 같은 부서끼리 어떻게 그러냐? 귀찮아도 일인데······.”
“일? 선배, 방금 저분들이 건넨 말이 업무상 대화였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어? 어, 그런데······. 뭐야, 아냐?”
“······남친분이 이래서야, 유키노시타 선배도 큰일이겠네요.”
“그러니까 남자친구 아니라고.”
“네네, 그러시겠죠.”
최근 잇시키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까칠해져가는 기분이 든다. 잘못 생각했나? 권력을 잡으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잇시키도 그런 아이였을지도······. 다르게 보면 선후배간의 거리감이 좁혀져, 허물없는 사이로 변화하고 있는 증거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됐으니까 선배도 일하세요.”
“일? 무슨 일? 시키는 일은 다 했는데?”
“그러니 저 좀 도와달라는 말씀이죠. 확인해 주셨으면 하는게 있어요.”
결심하자마자 이렇게 나오기냐. 조금만 더 너를 믿을 수 있게 해줘.
“하아······. 이번엔 뭔데?”
“스케줄 표에요. 일단 인원별 체크는 다 마쳤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내민 종이에는 기록 잡무부 인원의 이름과 업무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알아보기 쉬운 도표 형식에, 수정한 자국 없는 깔끔한 글씨. 비워둔 칸은 있을지언정 지금 단계에서 적을 수 있는 내용은 빠뜨림없이 모두 적었다. 잇시키는 이 한 장의 완성본을 위해 몇 장이나 되는 초고를 다듬었을까?
“군데군데 빈틈이 너무 많아요. 제출 기한을 미루면 안 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내로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잘했어.”
“그러니까요~. 정말 제가 봐도, ······네?”
“힘냈구나.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업무 초기는 일도 일이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어려운 시기거든. 개시 초기의 혼란에 다른 부서의 협조도 미적지근했을텐데, 용케도 이만큼 정리해 냈구나. 내가 부장이었어도 이렇게는 못 했을 거야.”
“서, 선배 뭐 잘 못 먹었어요? 갑자기 웬 칭찬이래?”
얘도 참 칭찬 받을 줄을 몰라요. 순수한 의미로 말하는 건줄 아니? 너를 구워삶아 부장직을 유지시켜 잡음없이 문화제를 끝내기 위함이지. 나도 참 칭찬할 줄 모르는구나. 솔직하지 못한 건 피차일반인가.
“아무튼 걱정 마라. 나머진 내가 어떻게든 해 보마.”
“아뇨, 그건 좀. 안그래도 저, 선배에게 엄청 의지하고 있는데······.”
“오오, 기특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선배 안에서 전 도대체 어떤 이미지에요?”
“글쎄다, 남자 이용해먹는 귀신 부장일까. 은근슬쩍 내게 떠넘기고 잽싸게 퇴근하려는 속셈인줄 알았거든.”
“이 선배가 진짜!”
오늘도 이어지는 후배 놀리기, 최근 시작한 새로운 취미 활동을 즐기던 중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방금의 대화에서 보듯 나와 잇시키는 종종 허물없는 농담(?)까지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우리 두 사람이 알게 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작해야 몇 일, 방금 전 나를 찾아왔던 여학생들과도 큰 차이는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히키가야 하치만은 낯가림이 심하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서툰데다 자연스럽게 끼어들지도 못 하고, 리얼충들의 사고방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혐오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그러던 내가 잇시키에게만은 무르다.
거리낌없이 다가오는 잇시키에게 가까운 거리감을 허락하고 있었다.
첫만남부터 꺼리낌 없이 속내를 파헤쳤고, 가식이며 낯가림따윈 일찌감치 벗어던졌던 우리다. 어쩌면 은연중에 그것을 강요했기에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발견해 반가웠던 건지도 모른다.
귀납논증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확실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괜찮겠어? 본의 아니게 깐깐한 부장 역을 시켜버린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잡무부가 배정받은 구역은 회의실 문 바로 앞 좌석이었다. 조금 전 잇시키에게 쫓겨난 여학생 몇 명이 한쪽 끝 모퉁이에 모여 있었다. 얼핏 머리를 맞대고 회의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도할 정도로 낮춘 목소리 하며 흘끗흘끗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됐어요. 딱히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당한 업무지시 였다구요?”
“그래도 그 뭐냐, 여자들 사이는 좀 복잡하잖냐······. 1학년도 있었다고? 혹시라도 걔가 너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어차피 모르는 사이인데요 뭘. 잃을 인망도 없구요.”
“아서라, 지나고 보면 그렇지도 않아.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거든.”
“선배, 말투가 늙은이 같아요.”
“너 그거 자충수인 거 알지? 너랑 나는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우와, 유치해라~.”
별 수 없지. 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히키가야 하치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숫기없는 외톨이였고 주변의 인식을 바꿀만한 힘이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일 뿐이다. 그래, 일이나 하자, 마차 끄는 말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스케줄 표를 들여다 보았을 때였다. 잠깐, 스케줄?
“그러고 보니 축구부는? 얼굴 안 비춰도 괜찮아?”
“그게 말이죠. 시간 조정에 대해 하야마 선배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시더라고요? 문화제 기간 동안은 연습 빈도도 줄일테니 실행 위원을 우선하라고.”
“허어, 그렇다 해도 일이 없지는 않을텐데······. 다른 매니저들이 뭐라 안 하던?”
“에이~, 그 반대죠. 축구부 매니저라 해 봐야 하야마 선배를 노리고 들어온 사람들밖에 없는걸요. 경쟁자는 줄어들 수록 유리하잖아요.”
“아······ 하긴, 그렇군.”
여전하구만. 초등학교 때부터 사람들을 몰고다녔던 하야마다.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 패거리들이, 서로를 얼마나 견제했는지 알았을 것 같진 않지만.
그건 그렇고 곤란하게 되었네. 잇시키가 축구부 업무에서 손을 떼버리면 하야마의 일을 상담하기 어려워지는데······.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좋을까?
“저기말야, 잇시키.”
“네?”
“딱히 오늘이 아니어도 되는데, 너 혹시 시간······.”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던 잇시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깨닫기도 전,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즐거워 보이는 모양이구나, 히키가야 군.”
불쑥 나타난 유키노시타가 잡무부 책상에 서류더미를 내려놓았다. 길다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가 싶더니 칠흑 속에 드러난 환한 미소가 눈앞에 다가온다. 아, 이건 그거다. 지금의 ‘히키가야 군’은, 눈속임이니 애칭이니 평소에 부르던 것과는 달라. 유키노시타, 지금 굉장히 언짢아하고 있어.
“업무 공간인 회의실에서 시덥잖은 농담은 그만두렴. 당신이 연하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조금은 절도를 지키는 게 어떻겠니?”
이게 무슨······, 말만 들으면 쓰레기잖아. 유키노시타가 가리키는게 내가 아니었더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맞장구 쳤을 것이다.
“억울하다, 유키노시타. 난 일 하고 있어. 슬프게도 말이지.”
“연하를 좋아하는 건 부정하지 않는구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유키노시타답지 않은걸. 무슨 근거로 내가 연하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거야 간단해. 당신은 평소 나를 여동생 취급하잖니? 그거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야.”
의기양양한 얼굴로 단언하는 유키노시타. 그러니까 즉, 내가 널 여동생 취급(취급이 아니라, 정말로 생일이 빠른 거지만)하는 이유가 정말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논리 비약이잖아. 귀납논증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라고.
얼른 대꾸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유키노시타는 기분좋은 얼굴로 쿡쿡 웃었다. 그 미소를 깨고 싶지 않아, 반박할 마음도 사라지고 말았다. 방긋방긋 웃는 유키노시타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나, 묘한 대치 상태는 기다리다 지친 잇시키가 끼어들 때까지 이어졌다.
“어······ 저기, 유키노시타 선배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볼 일이 있어서 나가려던 참에 잡무부가 소란스러워 와 봤단다. 생각보다는 잘 해나가는 모양이구나. 안심했어.”
미소를 거두지 않은채 잇시키를 돌아보는 유키노시타. 나와 마찬가지로 유키노시타 또한 요 며칠 사이 잇시키와의 거리감을 몰라보게 좁혀왔다. 친근한데다 솔직하고, 가르치는 대로 쏙쏙 배우는 후배를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위치가 위치다보니 회의실에서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유키노시타가 가지고 온 서류 덕에 언뜻 봐서는 높으신 분들이 일정을 논의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유키노시타가 가져온 일감, 혹시 내가 맡아야 하는 걸까? 슬슬 쉬고 싶은데······.
“아뇨 그렇지는······. 솔직히 제가 한 일은 딱히 없어요. 업무 분담도 일정 조정도 전부 선배가 맡아 주셨고, 전 그저 부원들에게 전달만 했을 뿐인걸요.”
“자신감을 가지렴. 잇시키 양은 1학년이고 경험도 부족하잖니. 히키가야 군이 선배로서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야.”
여자들끼리의 대화가 시작된 것 같아, 무심코 유키노시타가 가져온 서류 하나를 꺼내 읽어보았다. 우와, 뭐야 이거, 각 부서별 업무 내용과 대응 메뉴얼? 참고 기록이 5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런걸 고작 며칠 사이에?
“게다가 이미 부장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고 있는걸.”
“네? 제가요?”
“그래. 부원들을 통제하고 지시를 내리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다. 대신 해 줄 수도 없고 대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야. 기록 잡무부는 업무의 범위가 불분명하다는 특성상 정확하게 일감을 배분하기 어려운 부서이기도 해. 잇시키 양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어.”
“······선배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후후, 우리는 사촌이니까.”
“어떠려나요~? 선배는 종종 친구라고 하시던데. 애초에 사촌끼리 친구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요?”
“그런 사촌도 있는 거야.”
두 번째 서류엔 지역 내 사설 동아리와 각 단체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연락처와 접촉 일자, 교섭 내용까지 첨부 된 상태로. 치바 시내를 다 뒤진 수준이잖아, 이런 건 서클 통제부의 관할 아니었어? 어째서 이걸 유키노시타가······. 결원이 생긴 부서는 집행부가 메꿔줬다고 들었지만, 이건 혼자 다 한 수준이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주렴. 당분간은 하치만을 부탁할게.”
“묘하게 물건을 맡기는 듯한 말투시네요. 저는 물품보관소가 아니라구요?”
“어머,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구나. 어떤 의미로 하치만은 내 거라고 할 수 있으니까.”
“우와, 이젠 숨기지도 않으셔~.”
“당신도 동생이 있다면 알게 될 거란다. 모든 남동생은 누나의 소유물이거든.”
“네네, 그러시겠죠~. ······그나저나 선배는 뭐 하세요?”
세 번째 서류, 고급스러운 감색 서류철에 싸인 그것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물건이었다. 가죽 커버를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선배?”
“히키가야 군?”
고개를 들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옅은 우유색 파우더에 가볍게 바른 립글로즈, 그러나 그늘진 눈과 푸석푸석한 입술을 숨길 수는 없었다. 수면부족인건 나나 잇시키도 마찬가지지만, 유키노시타의 얼굴은 질적으로 달랐다. 이 녀석, 잠을 자기는 한 건가?
애초에 유키노시타가 화장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타고난 피부를 꾸준한 세안과 케어용품으로 유지해왔을 뿐, 꾸미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유키노시타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그런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수없이 봐 왔던 네 얼굴을, 이제와서 착각할 거 같냐고?
“유키노시타, 너, 언제부터 이런 일을······?”
들고있던 서류를 상대가 볼 수 있게끔 거꾸로 돌려 내밀었다. 학교 지정 양식을 철저히 준수한 문서는 ‘하계 체육대회 기획서’라는 제목이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유키노시타가 흠칫 숨을 들이키더니, 비밀을 파헤쳐진 아이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멋대로 본 건 미안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 기획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건, 유키노시타 너도 마찬가지니까.
“······열람해도 좋다고, 말한 적 없는데.”
투명한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끝내 유키노시타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여기까지 와서도 화제를 피하는 그녀에게 울컥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니, 그렇지만, 기획서라니······.”
최대한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다른 사람도 있는 회의실이다. 가뜩이나 민감한 화제인 체육 대회를 큰 소리로 떠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 눈치빠른 잇시키가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서, 서류더미를 만지는 척 우리를 가려주었다.
“이런 건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안 그래도 일이 많았을 텐데, 어째서······.”
“아니야, 그건 틀렸어.”
“뭐?”
단호히 말을 끊은 유키노시타가 심호흡을 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타이르는 것 같았다.
“물론 체육 대회는 모두가 함께 진행해야 마땅해.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알릴 수는 없었어. 개최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가능성도 높지 않아. 문화제 준비로 바쁜 학교를 이런 일로 동요시킬 수는 없는걸.”
일리 있는 말이었다. 문화제 실행 위원회란 말 그대로 문화제를 위한 임시 기구다. 학생회라면 모를까 체육 대회를 의제로 올리기에는 장소도, 시기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런게 아니다.
“그래, 그건 이해해. 하지만 유키노시타는 부위원장이잖아. 이렇게 많은 일을 병행하면서 체육 대회까지 준비하는건 무리라고.”
“상관없어. 무리라 할지라도 해야하는 일이니까.”
“어째서?”
“······당신도 알잖아. 대회가 취소된 건 어머니 탓이야. 우리 집안의 일로 학교에 폐를 끼쳤으니, 내게도 책임이 있어. 이 일은 나 혼자 짊어지지 않으면 안 돼”
응어리를 토해내느라 상처입은 목은 감정을 추스리려는 듯 떨렸고 양팔에 감싸인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하게 보였다.
“그런, ······설령 그렇다 해도, 널 돕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못 돼. 유키노시타가 말만 해 줬더라면 내가······.”
“그래서야.”
그러나 결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확실한 부정을 전해왔다.
“내가 도와 달라고 했으면 하치만은 두말않고 도와줬겠지. 그래선 안 돼. 난 다르잖아. 나는 후배가 아니잖아.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게 옳은 일이야.”
“유키노시타······.”
“걱정해준 건 고마워. 그치만 이번엔 마음만 받을게. 걱정 마. 나는 누나잖아. 혼자서도 할 수 있어. 폐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린 나를 유키노시타는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살짝 내민 손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중간에서 멈춘다. 스르르 내려가던 손은 내가 아닌 서류 뭉치를 집어들었다.
“그럼 이만, 용건이 있어서 먼저 실례할게.”
“장소라도······ 알려주면 안 돼?”
겨우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간신히 얼굴을 들자, 옅은 미소를 띈 유키노시타와 눈이 마주쳤다.
“교무실이야. 늦어질 경우 거기서 귀가할 생각이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돌아가도록 하렴.”
“······그래.”
“아, 그리고, 잇시키 양?”
“네, 네!”
“혹시 나를 찾는 사람이 있거든 외근으로 설명해 주지 않을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휴대폰을 쓸 수 없을 것 같거든..”
“네······, 그거야 쉽지만요······.”
“후후, 고마워.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이, 나머지 서류들을 사가미 양에게 전해줬음 하는데······.”
드르륵 소리와 함께 유키노시타의 말도 끊겼다. 어쩌면 눈이 먼저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이랑 나간 뒤 줄곧 자리를 비웠던 사가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절묘한 타이밍에 회의실로 들어섰다.
“응? 왜 그래? 빤히 쳐다보구······, 아, 혹시 내가 방해한 거야? 미안해서 어쩌지? 모처럼 사촌끼리 이야기 하구 있는데 끼어들었네~. 잡무부 자리를 창가 쪽으로 옮기는 게 좋을려나~?”
두서없는 이야기는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본인도 딱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이야기 도중에도 쉴새없이 깨물어 먹는 하드 바와, 건들건들 흔들리는 비닐봉투가 눈에 띄였다. 오래도 자릴 비우더니, 매점이라도 갔다 온 건가? 거참 태평한 녀석일세.
“사가미 양, 마침 잘 왔어.”
유키노시타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나는 지금부터 일이 있어 교무실에 가려고 해. 늦어지면 거기서 귀가할 예정이야.”
“그렇구나~, 수고해~.”
성의없는 대답이었지만 유키노시타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잡무부 자리에 올려둔 서류더미를 가리켰다.
“저번의 회의를 참고해 만든 피드백 자료야. 기존 문화제의 기록을 참조해, 내가 생각한 문제점과 나름대로의 개선사항을 정리해 두었어. 가장 시급했던 지역 단체와의 접촉도 일단락 되었으니, 앞으로의 업무에 반영해 주었으면 해.”
“역시 유키노시타 양은 대단하구나~! 고마워! 각 부서에는 내가 전달해 줄게~!”
“······그래, 부탁해.”
응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사가미는 방금 한 말이 무색하게도 곧장 위원장석으로 달려가 버렸다. 조용하던 회의실에 돌을 던진 듯한 파문이 일었다. 얼마 없는 인원이 하나 둘 교실 앞으로 모이더니, 사가미가 건네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눈을 흘기는데 옆에 있던 유키노시타가 중얼거렸다.
“······하긴, 빠진 사람도 많으니, 모두가 함께 있을 때 전달하는 게 낫겠지.”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과연 언제쯤 전달되려나?
그렇게 맞장구 칠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을 유키노시타다.
부위원장으로서 항상 사가미의 곁을 지켰던 그녀가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면,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겠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준다면 그것을 입으로 내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심코 건드린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 뿐이다.
문득 아까 들춰보았던 체육 대회 기획서가 떠올랐다.
유키노시타가 설명해준 이유는 구구절절 옳았고, 논리에 어긋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유키노시타였어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뭔가가 걸렸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턱 막힌 답답함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놓치고 있는게 있다는 불안감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두 사람도 수고하렴.”
“아, 유키노시타 선배두요······. 힘내세요.”
“······잘 가라.”
고개를 까딱인 유키노시타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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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날의 심야
하치만과 이로하의 영상 통화
「안녕.」
「아, 안녕하세요. 오늘도 먼저 들어와 계셨네요.」
「우리 집 컴퓨터는 연식이 있거든. 부팅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 먼저 켜놨을 뿐이야. 밤에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유키노시타 선배는 아직도 연락 안 하시나요?」
「왜 거기서 유키노시타가 나오는건데.」
「그야, 선배가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 아냐. 개학하고 나서 부터는 뜸해지기도 했고, 매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어. 그저 조금 친한 사촌인 거지.」
「선배.」
「왜?」
「유키노시타 선배 말이죠, 조금 아이같은 구석이 있죠?」
「엉?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뜬금없네.」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끔 진실을 숨길 때는 있지만요.」
「듣는 입장에선 어느 쪽이든 슬플 것 같다만.」
「뭘 모르시네요. 반대로 형태가 같아도 의미가 다른 말도 있다구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잘 아실 텐데요. 예를 들어 볼까요? 유키노시타 선배가 선배를 부를 때 어떤 말로 부르나요? 성이나 이름이 아닌 2인칭으로요.」
「······당신貴方, 이지. 그치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잖아.」
「푸훕.」
「왜 웃어?」
「그거 알아요? 유키노시타 선배가 선배를 부를 때는 말투부터 달라요. 선배를 부르는 ‘당신’은 특별하다구요. 분명, 저나 다른 사람을 부를 때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을 거에요.」
「너무 억지스러운데······. 그냥 친하다 보니 그렇게 들리는 게 아닐까?」
「틀린 말은 아니죠. 그만큼 선배가 소중하니까 대화를 할 때도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걸 테니까요. 조금 솔직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요.」
「······일이나 하자.」
「거봐요, 선배도 똑같아. 누가 사촌 아니랄까봐, 둘이 참 닮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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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가 지난 첫날, 종례를 마치고 교실을 나서려던 때 휴대폰이 울렸다 요즘 내 시계는 쉬는 날이 없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바일 게임 알람 정도가 전부였는데. 아마존의 배송 알림인가, 그게 아니면 광고 문자? 그러나 화면에 표시된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라인 메세지였다.
「선배, 오늘부터는 회의 시작 직전까지 기다렸다 들어오세요. 1분이라도 빨리 오시면 안 돼요? 꼭이요!」
이름보다 내용을 먼저 확인하는 건 외톨이의 슬픈 버릇이다. 연락이 올만한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효율을 중시하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최근에는 좀 달라졌만, 몸에 밴 습관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건 무슨 말일까?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이야 한 명 뿐이지만, 어줍잖은 스팸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
「선배가 빨리 올수록 저희 부서에 민폐가 됩니다. 부장 명령이에요.」
「우와~, 우리 부장님 가차 없구만.」
「아, 그렇다고 지각하시진 마시구요. 마음 같아서는 제 선에서 감싸 드리고 싶지만 유키노시타 선배도 있으니까요.」
「······우리 부장님 가차 없구만. 일단 알았다.」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기록 잡무부는 언제부터 하치만 금지 구역이 된 걸까? 평일 아침 소부선의 여성전용칸도 아니고······. 그러나 법은 멀고 상사는 가까운 법. 장작더미를 짊어진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라 한들 부장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소스는 나, 그리고 훌륭한 사축이 될 거라 예언해 준 하루 짱.
그래도 짚이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잇시키는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고약한 후배지만 괜한 말을 할 아이는 아니다. 언뜻 보기에 불합리한 이 명령도 분명 그녀 나름대로의 계획이 숨겨져 있겠지. 그래, 나는 착한 선배니까, 결코 권력이 무서워서는 아니라고? 잇시키가 읽은 것을 확인한 후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잔뜩 낀 구름 탓에 교실은 평소보다 어둡게 보였다. 하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밝았고 십대 특유의 열정은 어제와 다름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게 아냐~! 사업가가 넥타이를 풀 때는 좀 더 고뇌에 찬 느낌으로! 도대체 뭘 위한 정장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정. 저건 열정이 아냐, 발정이지. 에비나 양은 도대체 무슨 연극을 만들고 싶은 걸까?
에비나 양의 연기 지도는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박력이 있었다. 뭣하면 구름이 피뢰침을 피해 2학년 F반에 직접 링크될 정도. 학원도시로 치면 레벨 3 정도는 될 것이다. 에비나는 에비나는······, 그만두자, 진심으로 소름끼쳤다.
그러나 모든 남자가 그런 식으로 구박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극진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기,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아직 멀었어!”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하야마 옆에 달라붙은 여자들은 메이크업이 한창이었다. 이름도 모를 화장품들을 종류별로 늘어놓은게 흡사 뷰티샵을 연상케 했다. 이마부터 입술에 이르기까지 연신 보드라운 터치가 이어지는 그 모습은 흡사 얼굴 위에서 두더지 잡기 게임이 펼쳐진 형국이었다.
어라, 사가미도 있네. 쟤는 또 언제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대? 뭐 실행 위원회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만······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구만. 저 열정을 본업에서도 발휘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나참, 남자 얼굴이 뭐가 그리 좋다고 야단들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토츠카, 피부 진짜 곱다.”
“그러게, 분장하는 보람이 있다니까.”
옳소! 누구야 너, 말 잘했어! 이야~, 토츠스킨의 진가를 알아보다니 안목이 높은걸? 이런 인재가 우리 반에 있다니 소부고의 미래는 밝구나!
“저, 저기······ 연습이니까 너무 공들일 필요는······.”
토츠카가 조심스럽게 난색을 표했지만 그 귀여움은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메이크도 연습해야 된다고!”
“맞아! 문화제 당일까지! 매일매일!”
바로 그거야! 하루하루 조금씩 다른 기법을 시도해! 모든 건 문화제 당일을 위해서, 최고의 토츠카를 만드는 거야! 너희들의 손으로!
“으, 으응······. 하, 하긴. 연습은 중요하니까.”
인형 신세가 되어 꼼짝없이 몸을 맡긴 토츠카는 이따금 그 갸냘픈 눈길로 동료 배우들을 훔쳐보았다. 아, 맞다. 토베와 오오오카는 달랑 5분만에 끝내버렸지. 자기만 대우받는게 미안해 움츠러든 모양이다. 우리 토츠카 진짜 착하다니까~.
괜시리 콧등이 시큰해져 고개를 돌리는데, 뜻밖에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유미코가 서 있었다. 분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에비나, 잠깐만 와 봐!”
“네엥~!”
어라? 출연진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토츠카와 하야마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고, 심지어 엑스트라 중에선 예를 표하듯 유미코를 향해 합장을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니들도 고생이 많구나······.
“사진은 어쩔 거야? 포스터라도 만들어야 되는 거 아냐?””
에비나 양이 성큼성큼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좋은 생각이야, 유미코! 이런 꽃미남 뮤지컬은 배우 사진을 올리고 나서부터가 가장 빠르게 입소문이 도니까. 꾸준히 캐스팅 정보를 흘려주는 게 중요해. 포스터는 물론 인터넷까지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동원해 버리자고! 아무렴, 어린뮤의 캐스팅은 완벽! 치바인들에게도 틀림없이 먹힐 거야!”
그놈의 어린뮤······. 아직 포기하지 않았구나. 그리고 치바인을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부녀자가 그렇게 많을 리 없어. ······그렇겠지?
“그럼 교내용 포스터 몇 장 뽑구, 인터넷이라······. SNS 정도면 되려나?”
“글쎄, 조금 부족한데 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홍보용 사이트도 만들었음 하는 욕심이 있어. 어떻게 안 될까?”
“뭐어?! 갑자기? 곤란해. 나아, 그런 쪽으론 젬병이니까······.”
하긴 우리 누나는 컴맹이랄까, 스마트폰은 이외의 전자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학생 시절, 드물게도 정시 퇴근에 성공한 아빠는 집에 돌아올 무렵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내용물은 최신식 컴퓨터 한 대였고, 놓을 위치는 우리 남매가 정하게 했다. 늘 그랬듯이 누이들에게 양보할 생각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휴대폰이 있는데 이런 걸 왜 써.’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묻던 누나와 코마치. 그 때의 나는 여러모로 암울했던 시기였기에, 만일 무안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아빠를 보지 못 했더라면 아무말 없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나름 필사적으로 항변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IT시대고, 컴퓨터를 다루는 것도 스펙이 되는 세상이니까, 후일을 대비해 워드 프로세서 정도는 배워두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몰라몰라, 오빠가 해주면 되잖아. 코마치 책상은 지금도 좁다구. 저거 놓을 자리는 없어.’
‘그래, 하치만. 누나는 동생을 믿고 있다고? 저건 네 방에 놓도록 해.’
······언제나 곁에 있어줄 수는 없다고, 혹시 모르니 배워 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때도 누나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떠맡은 컴퓨터는 지금도 내 책상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누이들 나름대로의 양보였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의미없는 일이다.
믿음 같은 거, 일방적인 강요일 뿐인데.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그 때 에비나 양이 느닷없는 폭탄을 투하했다.
“아, 히키타니 군도 있었구나! 마침 잘 됐네, 유미코! 남동생 씨에게 부탁해보는 건 어때? 이런 거 빠삭할 거 같은데?”
“뭣······!”
갑작스럽게 무슨······. 그러나 에비나 양은 반론할 틈을 주지 않았다. 유미코의 팔을 꼬옥 붙들고는 거리를 좁혀왔다.
“안녕하신가, 남동생 군! 실행 위원회가 많이 한가한가 봐? 사가미 양도 있는 걸 보니.”
“아직 시간이 남았을 뿐이에요. 빨리 가 봤자 일해야 하니까요. 조기출근은 하지 않는게 신념이라서.”
“하하! 여전히 재밌네~! 난 또, 자네가 드디어 BL의 세계에 관심이 생겼나 했지!”
이 여자 서슴없이 BL이라고 말했어! 이젠 이 연극의 정체성에 대해 숨길 생각도 없구나!
“허나 배우는 확정 되었다네. 아쉽게도 말이야. 그대 오늘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찾는다면 내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줌세. 그대의 누나를 도와 내 작품을 널리 알릴 기회를 주겠다 이 말이지. 어떤가? 구미가 당기지 않은가?”
뜬금없는 셰익스피어 말투가 시작되었다. 왜 이래, 당신의 어린뮤 뭐시기는 정통이라곤 한 톨도 없는 사심 덩어리잖아. 아무리 꼬드겨도 넘어갈 생각은 없다고.
“아뇨, 저는 지금······.”
“안 돼, 에비나. 하치만은 지금 실행 위원을 맡고 있으니까.”
그 말에 에비나 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나도 놀랐다.
태연한 사람은 누나 뿐이었다.
“어지간히 바쁜가 보더라구. 유키노도 거기서 일하는데, 실행 위원이 된 뒤로는 얼굴 한 번 못 봤지 뭐야. 매일밤 둘이서 일 하느라 엄청 늦게까지 깨어있곤 해. 유키노도 그렇지만, 내 동생도 엄청 똑똑하거든? 그런 두 사람이 끙끙대는 거 보면,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미묘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하치만에게는 시키지 마. 숨돌릴 틈도 없이 일하는 건 불쌍하잖아.”
말을 마친 유미코는 대화를 끝낼 제스처를 취했다. 한 걸음 물러서더니 짤막하게 덧붙였다.
“열심히 해, 하치만. 그래도 잠을 꼭 챙겨 자고.”
“어, 응······. 그래······.”
“그리구 홍보용 사이트, 랬나? 한 번 알아는 볼게. 우리 반 남자애들에게 물어보면 되려나? 배우들은 빼고 말이야.”
“그래주면 좋겠지만······, 알았어. 고마워, 유미코.”
“뭘.”
길다란 금발은 흐릿한 전등 아래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유미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에비나 양이 팔을 콕콕 찔러왔다.
“아쉬워라. 너희 남매의 듀오, 꽤나 기대했는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죠.”
“그치만 그런 건 재미없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팔짱을 낀 에비나 양이 한숨을 쉬었다. 아래위로 훑고 지나가는 시선에 나무라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이제 어떡할 거야? 진짜 안 도와줄 생각?”
“뭐,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만······.”
이쪽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구요, 도와준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요.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따지셔도 곤란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꿍시렁 거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보내오는 러브콜 뒤에 숨겨진 의도를 짐작 못할 바도 아니다. 쓸데없는 오지랖에, 손발을 맞출 수 없는 애드립, 원인도 과정도 엉망진창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 마음만은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넘어가는 것도 그렇죠? 몇 번이고 권해 주셨는데 조금쯤은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응? 성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에비나 양은 얼떨떨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마음속은 온통 이 만만치 않은 독재자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생각 뿐이었다.
“비어있는 자리가 있을까요? 배우가 아닌, 지원팀 쪽에.”
“빈 자리? 빈 자리라면······ 어디 보자.”
어느새 옮겨 적었는지 에비나 양은 칠판에 써진 역할분담표와 똑같은 내용의 종이를 들고 있었다. 거침없이 훑는 듯 하면서도 드문드문 원본을 쳐다보는게, 혹시라도 있을 오차를 점검하는 기색이었다. 일처리 솜씨만큼은 빈틈 없다니까.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지만 않았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각본은 이미 완성, 예산 분배도 유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구, 연기 지도는 내가 볼 테니 남은 건 소품 제작 정도네. 이거라면 원래부터 남자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는데······.”
펜대를 돌리며 중얼거리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온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겁니까? 왜 자꾸 내 이름을 적으려는 거야, 그 종이는 죽음의 노트에서 찢어왔나요?
“헤에, 생각보다 본격적이네요. 예산은 괜찮으신지?”
“아마도? 메이크나 의상은 여자들이 맡아줄 테니 있는 걸로 채우면 되고······.”
여기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
확신을 가지고 승부수를 던졌다.
“아뇨,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응? 어째서?”
“메이크 쪽이야 문제 없겠죠. 특수한 분장이 필요한 연극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의상은 어떨런지, ‘왕자’와 ‘비행사’의 옷을 사복으로 충당하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만.”
손가락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던 펜이 멈추더니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라? 생각해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왕자는 대체할 수 없는데? 이왕 토츠카 군이 맡아줬으니, 최고의 비주얼을 준비하지 않으면······.”
호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걸?
남은 건 시간과 예산, 그리고 기술자의 여부인가. 딱히 동굴에서 원자로를 만들지는 않을 거지만.
퍼뜩 고개를 든 에비나 양이 교실 가운데를 돌아보았다.
“유이!”
“응? 왜 그래, 히나?”
“의상 말인데, 대여할 수 있을까?”
“뭐어? 엄청 빠듯할 거 같은데······. 우리 예산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라구. 가능함 의상보단 다른 데다 돈을 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랄까······.”
유이가하마가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공책에 뭔가를 써넣었다. 호오, 신은 그녀에게 요리의 재능을 앗아간 대신 계산의 재능을 주셨단 말인가. 계량컵 놔두고 밀가루 들이붓던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역시 에비나 양이 믿고 맡길만 하구나.
“안 되겠어. 아무리 계산해두 적자야. 마이너스라구.”
오옷! 적자라는 단어까지 알다니, 주부로서의 가하마 양은 레벨이 높은 건지도 모른다. 요리는 빼고, 그건 글렀어. 중요하니까 두 번 말했다.
“주연 배우만이라도 안 돼?”
“한 두 벌 빌리는 게 더 손해일걸? 더럽히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끄응, 하긴 그렇지······. 옷에 신경 쓰는 순간 내가 꿈꾸는 자연스러운 BL이······.”
어이, 에비나 양. 방금 뭐랬어요? 전연령 등급은 포기한 거에요?
“이렇게 된 이상, 있는 걸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치만 그래선 내 어린뮤가!”
제발 문화제 출품작에 이상한 약칭 만들지 마세요. 그런 건 이케부쿠로에나 있는 거지, 여긴 치바라구요?
그래도 지금까지는 예상대로다. 이 일을 해결하기에 딱 어울리는 사람을 알고 있거든. 여기까지 온 이상, 그 녀석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에비나 양, 에비나 양.”
“응? 뭔데, 히키타니 군?”
“사키사키 어때요? 제가 보증하건데 믿을만 할걸요?”
“호오, 사키사키라?”
고등학생이 부르기에는 유치한 이름, 그 점이 오히려 모종의 암호처럼 느껴졌다. 내 의도를 이해한 에비나 양은 계속해 보라는 양 귀를 쫑긋 세웠다. 순조로운 협조에 힘입어, 길고 긴 협상은 철통같은 보안 속 막을 내렸다.
턱을 괜 포즈로 창밖을 바라보던 사 짱은 우리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갑작스런 불청객에 당황했는지, 미간을 좁힌 사 짱이 나와 에비나 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뭐야?”
“어때요? 제 말이 맞죠?”
“호오호오, 확실히. 이 머리끈, 봉제선도 깔끔하고 색 배합도 괜찮은걸? 이게 정말 수재라고?”
“몇 개 더 있어요. 입고 있는 교복도 보기와 다르게 개조가 들어간 물건이랍니다?”
“이런 인재가 곁에 있을 줄이야. 이거야 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이렸다?”
끈적한 시선에 겁먹었는지 사 짱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어깨를 붙잡아 도로 앉혔다.
“사 짱.”
“뭐, 뭔데?”
우리들만의 호칭으로 불러 버렸지만, 누나 친구 앞에서까지 숨길 필요는 없겠지.
허리를 굽혀 앉아있는 사 짱과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부터 할 말은 퍼져나가서 좋을 게 없으니, 될 수 있는 한 밀착한 상태에서 전하는게 바람직하다. 나와 사 짱, 에비나 양의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입가에 손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솔직히 말해. 가면라이더 코스프레, 해본 적 있지?”
“뭣?! 너, 그, 그걸 어떻게?!”
급하게 거리를 벌린 탓에 푸른빛 감도는 포니테일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더 볼 것도 없군. 사 짱의 이런 솔직한 성격, 나는 참 좋아해.
“누군진 말 못 하겠지만 믿을 만한 정보원이 그러더라고. 중학교 진학할 때쯤 누나가 재봉 용품에 손대기 시작했다고 말야.”
“타이시, 집에 가면 죽었어······.”
“뭐, 나쁜 취미도 아니고, 잠자코 있으면 장갑이나 목도리라도 떨어질 테니 탓 짱도 괜찮다고 생각했대. 실제로도 섭섭지 않게 챙겨준 모양이지만······.”
“우와앗! 그만해!”
붉게 물든 얼굴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손사래 치는 사 짱은 정말 귀여웠다. 듬직한 맏누나라 티가 안 날 뿐이지, 이 녀석도 은근히 방어력이 약하단 말이지. 곁에 앉은 에비나 양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사복 코스프레야 그렇다 쳐도, 라이더 수트를 직접 만드는 건 난이도가 높지 않아? 탓 짱도 그건 좀 깼다는 모양인데······.”
“핫 짱!”
“아무리 그래도 FRP까지 건드리다니 너무 심했어······.”
“히키타니 군, FRP가 뭐야?”
“섬유강화 플라스틱의 약자에요. 촬영용으로 쓰이는 수트는 보통 그걸로 만들거든요.”
“헤에, 엄청 대단해 보이는데?”
“대단한 거 맞죠. 가격으로 보나 난이도로 보나 집에서 다룰만한 물건은 절대 아니에요. 겉모양 만이라면 라에더 자켓을 사서 개조하는 게 싸게 먹힐걸요? 오토바이도 없으니 낭비인건 마찬가지지만요.”
“이젠 몰라······.”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숨겨버린 사 짱, 그 머리에서 김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과연, 히키타니 군이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손뼉을 친 에비나 양이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양팔 사이로 눈만 빼꼼 내민 사 짱이 미심쩍은 눈길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죠? 어지간한 건 만들 수 있을 거에요. 수제라면 원하는 디자인도 반영할 수 있을테니 완성도도 높아지겠죠.”
“내구성은 어떨까? 격렬하게 움직인다던지, 얼룩이 묻는다던지 하는 경우는?”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이 사람······. 괜찮아요. 특촬물이란 건 그 특성상 격렬한 움직임이 많아서, 튼튼함은 생명이라고요.”
제작자 성격상 360도 발차기는 기본 옵션이나 다름없다. 그거야말로 전문분야인 셈이다.
“좋아, 카와사키 양! 너로 정했다! 의상, 잘 부탁해용!”
“뭐, 뭣? 잠깐만, 이게 무슨······.”
“아, 에비나 양. 분필 여기요.”
“땡큐, 히키타니 군~!”
“잠깐······!”
고맙긴 뭘요. 며칠 전 그쪽한테서 뺏은 분필인데·····. 요근래 바빠서 정신이 없다보니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잊고 살았다. 빨래 담당이던 코마치가 발견해주지 못 했다면 내 교복은 얄짤없이 표백당했을 것이다. 후에엥~, 이게 고등학생이 할 말이야? 소부고는 노동법을 준수하라!
에비나 양은 붙잡을 새도 없이 칠판으로 달려가 버렸다. ‘의상 담당’ 칸의 가장 높은 곳에 사 짱의 이름이 새겨진다. 한순간 취업이 결정 되어버린 내 친구, 카와사키 사키는 블랙기업에 팔려간 집요정같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무슨 속셈이야?”
“좀 해 줘, 사 짱. 나중에 갚을 테니까.”
“갚고 자시고, 남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왜 해.”
“에비나 양은 괜찮아. 부녀자는 비밀 엄수에 민감하거든.”
“뭐야, 그게.”
어처구니 없다는 듯 툴툴댄 사 짱이 꿈지럭거리며 자세를 바꾸었다. 고개를 돌려 한쪽 얼굴을 드러내더니 책상 위에 올려둔 팔을 베개 삼아 뺨을 기댔다.
“너 말야, 은근히 사람을 동생 취급하는 거 알아?”
“금시초문인데.”
“지금도 봐. 내가 혼자 있는게 안쓰러우니까 도와준 거잖아. 답지 않는 짓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의상 때문에 곤란하다길래 사 짱 생각이 났을 뿐이야. 그럴 생각은 없었어.”
“어떠려나~.”
딴청을 피우듯 중얼거리고는 머리카락 한 올을 붙잡아 손가락에 꼬았다. 창문 밖 먼 곳을 바라보던 사 짱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뭐, 이번에는 넘어가 줄게. 핫 짱 치고는 괜찮았거든.”
“고마워.”
“······저기 말야, 고맙다고 할 사람은 니가 아니거든?”
“그럼 누군데?”
“몰라, 내 알 바야?”
“하긴 그렇지?”
사 짱이 미소지었다. 나도 웃고 말았다. 누군가 듣고 있다면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지 못한 사과와 감사.
그러나 우리는 소꿉친구였다.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기에, 말하지 않아도, 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럼, 난 가 볼게.”
“어, 수고해라.”
“사 짱도. 의상팀 애들 너무 겁주지 말고.”
“신경 꺼.”
사 짱이 재봉을 시작한 중학교 시기. 그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탓 짱도 짐작가는 바가 있기에 말해줬을 것이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사람은 무언가에 몰두하는 동안 다른 일을 잊을 수 있으니까.
언제나 나를 지켜봐주고 남몰래 지켜줬던 사 짱은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동생 취급한다고 했지만 그건 틀렸어.
어떤 의미로 나는 널 누나처럼 생각했을 지도 몰라.
과거에 잃어버린 누군가를 대신해, 너에게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감사를 전하며, 뒤돌아보는 일 없이 교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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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한다. 빛이 비춰지지 않는 어둠, 습도로 인해 상승하는 불쾌지수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피해는 역시 야외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사실 아닐까
비가 오는 날은 외출을 삼가게 된다. 약속을 취소하거나 장보기를 단념한다, 그리고 저녁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거지. 목욕을 한 뒤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옷하며 찰박거리는 신발,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없을 테니까.
요컨대, 자유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무엇보다 싫은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한 때 신세졌던 베스트 플레이스는 무리, 같은 이유로 옥상도 제외된다. 실내를 떠돌아다녀도 문화제 준비가 한창인 학교에서 비어 있는 교실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 봉사부 부실은 처음부터 논외다. 회의실과 정반대 방향인 것도 있지만, 부실의 열쇠는 부장인 유키노시타만이 다룰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바쁜 내 사촌을 이런 일로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1층으로 내려와 안뜰로 이어지는 통로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뽑은 맥스커피를 홀짝이며 비 내리는 교정을 감상하는데 문득 그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여학생인 듯 했다.
“아, 하치만!”
“토츠카?”
어이쿠 이런 실례. 여학생보다 피부가 고우신 토츠카였습니다! 어린 왕자님은 치바에서 무엇을 찾고 계시는가요?
“어라? 실행 위원회는 어떻게 됐어? 슬슬 시작할 때 아냐?”
“맞긴 한데 아직 5분 남았거든. 빨리 가면 혼나. 귀신 부장에게.”
“그, 그래? 특이하네······.”
참고로 늦게 가도 혼난다. 얼음의 여왕인 봉사부 부장에게. 어느 쪽 부장도 거스를 수 없기에 아슬아슬한 곳에서 밸런스를 지켜야 하는 처량한 신세다. 뭐야 이건.
“토츠카는 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라고는 차마 묻지 못 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메이크업에 어깨에 살짝 걸친 망토, 그것도 모자라 머리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작은 왕관까지 씌워져 있었다. 그만 둬! 소부고 학생들을 전멸시킬 셈이냐! 홍보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아, 그게 말이지. 에비나 양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으니 배우들도 조금 쉬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 다들 더워하는 것 같아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왔어.”
그렇다면 내가 사 짱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쯤 교실을 나서고 있었겠구나. 토츠카가 손목에 걸친 매점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아아, 아이의 첫 심부름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린뮤 따위 때려치우고 토츠카의 일상 비디오를 촬영하는건 어떨까? BL보다는 건전할 것 같은데······. 트루먼 쇼의 표절 논란에 휩싸이겠지만.
“그러냐, 배우들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네.”
“응. 하치만 덕분이야, 고마워.”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에비나 양을 부른 건 누나였다. 친구와 친구 동생 사이 애매한 입장에 끼어버린 에비나 양이 오지랖 넓은 부녀자를 연기했을 뿐이다. 나 스스로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심지어 토츠카가 맡고 있는 역할조차 내가 떠넘긴 거나 다름없었다.
토츠카도 부장이고, 정말 좋아하는 테니스를 할 시간도 줄었을텐데······. 연극 연습이 아니었더라면 테니스 스쿨에서 뜨거운 땀방울을 흘리고 있을 터였다. 서운한게 당연했고, 미움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전혀 안 그래. 우리반 남자애들이랑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야. 연극은 정말 대단해!”
그러나 토츠카의 얼굴에서 그런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아 그리구 나, 연기도 칭찬받았어. 하치만이 빌려준 책 덕분에.”
“······아, 그랬지 참. 하지만 그건······.”
“잘 읽고 있어.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빌릴 수 있을까? 틈나는대로 보고 있지만, 에비나 양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조금 더 연구해봐야 될 것 같아.”
“······물론이지.”
몇 번을 읽는다 해도 에비나 양의 기대에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내가 빌려준 책은 ‘어린 왕자’지 ‘어린뮤’가 아니다. 분류로 치면 서양 고전과 오토메 문학 정도의 차이. 애초에 저 연극은 문학 역사에 대한 도전이라고.
그래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어려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은 토츠카다. 자신이 우대 받는 만큼 조연 배우들이 소외받고 있음을 알아차린 거겠지. 배려하고, 이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들과 나아가려고 한다. 단체 생활의 분위기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단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표현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덤으로 손에 쥔 봉투가 2개인 것도.
“그나저나 혼자 나온 거야?”
“아니, 하야마 군도 같이 와 줬는데······.”
9월이라곤 해도 아직은 무더운 날씨다. 그 녀석 성격상 이런 종류의 심부름을 토츠카 혼자 보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걸까? 먼저 돌아갔을 리는 없는데.
“실은 사가미 양도 같이 왔거든.”
“사가미가?”
문득 실행 위원회가 발족된 날의 회의실에서 사가미와 친구들이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응.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먼저 나왔어.”
동급생들은 업무에 바빠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다. 더군다나 이 비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목이 말라도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나갈 마음 따위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주연 배우 두 사람이 심부름을 자처한다?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 따라 나온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가미가 하야마를 좋아하는 거라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사가미도 10대고, 연애에 꿈이 많은 청소년이다. 일과 사랑 중에 사랑을 고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해해 줄 수 밖에, ‘이제 곧 회의 시작인데 위원장이 뭘 하고 있는 거야?’ 라던지, ‘하기사 지각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티도 안 날걸? 아무도 눈치 못 챈 상태로 회의 끝나 버릴지도?’ 라던가, 그런 쫌생이같은 뒷담은 안 할 것이다.
“아, 같이 가려고 그러는 거야? 두 사람이라면 매점 쪽에 있는데.”
설마. 나는 너처럼 착한 사람이 못 돼. 친해질 수 없다고 못 박은 사람과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친해지지 못 하지.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 사탕 무더기에서 처음 꺼낸 사탕이 쓴 맛이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탕도 쓸 거라 지레짐작해 아무 것도 붙잡지 못 하는 어리석은 어린애거든.
“아니,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사가미도 회의 시작 시간은 숙지하고 있을테니 지금쯤 올라가 있을 거야.”
정말로 그랬다면 사가미와 헤어진 하야마가 모습을 드러냈겠지만 말이야.
“붙잡아서 미안하다. 아이스크림 녹을라, 얼른 가 봐.”
“그렇네. 안녕, 하치만. 실행 위원회 열심히 해!”
토츠카가 떠나가는 걸 확인하고, 손에 쥔 커피캔을 움켜쥐었다.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는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습기를 먹은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목덜미에 맺힌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비가 싫었다.
체육 대회를 앗아간 비가 싫었다. 짊어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안겨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 비가 싫었다.
덥기만 한 데다 불쾌지수도 높아, 괜시리 짜증이 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런 날은 일찌감치 집에 가, 에어컨 켜진 방에서 책이나 읽었으면.
차라리 눈이 왔더라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연스레 미소지을 수 있는 눈이 내렸더라면. 그러나 잔설내린 눈밭에서의 기억은 잊을 만 하면 떠올라 나를 괴롭혔고,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올 겨울이 와도 웃을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져 층계참에 멈추어 섰다. 한 줄짜리 짤막한 메세지였기에 오래된 버릇이 나왔음을 다 읽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 했다. 그러나 이번의 발신인은 잇시키가 아니었다.
「부부장, 급한 일이. 지금 당장 회의실로. 」
인사도 설명도 없는,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 그것도 그거지만, 나를 ‘부부장’으로 부르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우리 부서는 잇시키 부장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고 그렇게나 말했거늘, 참으로 말을 들어먹지 않는 후배님이시다.
그런 녀석이 나를 불렀다는 건, 필시 보통 일은 아니겠지.
멈춘 다리를 놀려 계단을 뛰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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