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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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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 거리에서 히키가야 유미코는 겉돌고 있다.



  이튿날 아침 봉사부 회의가 소집되었다. 

  장소는 지난밤 만났던 자판기 코너. 조식이 시작되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있어 1층에 내려오는 학생이 없다는 이유였다. 아침준비로 분주한 틈을 타 남몰래 빠져나올 수 있다는 부가적인 효과도 있었다.

 

  무리를 해서까지 서두르는 까닭은,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반이 다른 유키노로서는 개입할 기회가 없었고 타이밍이 맞았을 때는 히라츠카 선생님께 걸려버렸다. 라인을 통한 접촉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다. 의사소통에 제한이 걸리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유이가 가장 요주의인 인물과 같은방을 쓴다는 게 문제다.

 

  무언가를 꾸민다는 걸 들켜버린다면, 어느 쪽이든 큰일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이제부터 가게 될 곳을 생각한다면, 그 전에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방침을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한 번 더 확인할게. 토베 군과 에비나 양을 하치만이 생각해둔 포인트로 유도, 거리를 유지한 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동행하며, 변수가 발생할 경우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것. 이 정도로 되겠니?”

  “어. 그래주면 고맙겠어.”

 

  솔직히 그 이상은 뭘 더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눈에 띄지 않던 내가 괜히 참견해봐야 역효과겠지. 계획을 세우고 점검하는 일이야말로 적성에 맞는다. 남은 건 어떤 유도책을 사용하느냐인데.

 

  “그걸루 될까?”

  

  봉사부의 최종병기, 만능 커뮤니케이터 가하마 씨께서는 어쩐지 낮은 신음을 끙끙 흘리고 계셨다.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은데······.”

  “불안한 건 이해해. 그래도 이건 연애 문제니까, 결국 당사자들에게 달린 문제잖아? 제삼자인 우리가 나서기에는 위험부담이 커. 자칫하면 에비나 양이 눈치챌 지도 모르고. 안타깝지만 여기서는······.”

  “토베 군에게 맡기는 게 최선일 거야.”

 

  뜸을 들인 틈을 놓치지 않고 유키노가 말을 받았다. 확신이 가득한 어조였지만 유이는 안심이 되지 않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토베도 생각이 있으면 섣부른 짓은 안 하겠지.”

  “그래. 봉사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립을 보조하는 거니까. 그건 우리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현 시점에서 생각해야할 과제는 어떻게 그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떼어놓느냐겠지.”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달리 믿을 사람이 없어서······. 부탁할게. 누나랑 하야마를 어떻게든 데려와줬으면 해.”

  “으응······, 그거야 뭐, 할 수 있겠는데······.

 

  한쪽으로 꺾인 당고머리가 반대편으로 젖혀지기를 수차례, 새초름한 눈초리가 이쪽을 응시한다.

 

  “힛키가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나? 뭐가?”

  “으으응, 아니. 암것두 아냐~.”

 

  알 수 없는 소리를 남기고는 소파에 앉은채 상체를 폈다. 내 어깨 뒤 계단이 위치한 방향을 훑어보던 유이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손바닥을 쳤다.

 

  “아참, 근데 그럼 유키농네 조원들에게두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리끼리만 정해두 괜찮아?”

 

  느슨하긴 해도 엄연히 단체활동, 갈등이 생기기 쉬운 여행지 선택을 독단적으로 정해도 되느냐는 물음이다. 집단의 안정을 추구하는 유이다운 발언이었다. 유키노는 부드럽게 웃으며 빠뜨린 설명을 보충했다.

 

  “문제 없어. 오늘의 행선지에 관해서 전권을 위임 받았거든. 어디를 가든 뒤따라갈테니, 느긋한 시간 보내라고 격려해 주더구나.”

  “어? 그건 즉······.”

  “그래. 가이드를 부탁받았단다.”

 

  가이드는 좀 아닌 것 같은데······. 하긴, 관광지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풀어놓은 뒤 어물쩍 사라졌다 돌아갈때 쯤 나타나는 건 비슷한가? 어찌나 배려심이 깊은지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다.

 

  “느긋하게라니 좀 그런데? 이쪽은 일하는 중인데 말이야.”

  “어쩔 수 없잖니. 의뢰 내용에 대해서 발설할 수는 없었는걸.”

  “그야 그렇지만, 유키노네 급우들에게 오해를 산 것 같아 껄끄러워서.”

  “후후,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라? 유키노가 어쩐지, 굉장히 귀엽고도 가슴 철렁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덧붙이자면, 오늘 우리 반의 절반 이상이 동행하기로 했어.”

  “뭐, 뭐라고?!”

  “안심해. 아는 체는 하지 않을 거야. 어디까지나 J반 차원에서의 단체행동이라고 입을 맞출 거니까.”

 

  기차 내에서 만난 얼굴들이 스쳐지나간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질문공세를 퍼붓던 소녀들. 그 소악마들이 우리를 따라온다고?

 

  “자, 잠깐 기다려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눈에 띄는게 아닐까?”

  “오히려 좋지 않겠니? 수학여행 중에 동선이 겹치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야. 같은 소부고 학생들이 주변에 보일수록 위화감도 옅어질 거라 보는데?”

  “그, 그건······.”

 

  분하지만 일리가 있다. 오전 중에 들러야할 포인트는 분명 유명 관광지지만 10대 학생의 비율은 적은 곳이다. 수학여행 중에 들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한 장소, 그러나 J반 학생들이 함께해 준다면 구실을 만들기 쉽다. 유키노의 노림수는 이것이겠지.

 

  “우리쪽에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는게 내 의견이야. 유이가하마 양, 당신은 어떠니?”

  “엇, 나, 나?!”

  “그래. 그들을 데려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똑같이 입을 벌린채 멍해있던 유이도 화들짝 놀라며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유이가하마 양은 탐탁치 않은 모양이구나.”

  “아니아니, 충분해!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근데 말야, 유키농.”

 

  말을 끊고 힐끔, 이쪽을 곁눈질한다. 그 동작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얼 도와줬으면 하는지 깨닫는다.

 

  “이제와서랄까, 조금 새삼스럽긴 한데······.”

  “부담 가지기 말고 말해 주렴. 나와 유이가하마 양 사이잖니.”

  “······응. 고마워.”

 

  유키노는 알고 있을까? 

  자각없이 내뱉은 티끌없는 격려가, 이후의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지어 버렸다는 것을.

 

  “있지. 이제 슬슬,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해.”

  “······.”

 

  경청하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유키노. 입술은 떨어지지 않고, 갈곳 잃은 눈동자만이 방금 들은 말을 해석하려 움직인다. 

 

  순간이 일생처럼 느리고 지척에 있는 그녀가 밤하늘의 달처럼 멀어, 이대로 영영 닿지 못한 채 비껴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나뿐만 아닌, 하치만도 함께야.”

 

  그 거리에 매듭을 묶듯, 유키노는 떨리는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유이가하마 양과 나, 하치만은 동등한 관계잖니. 우리 세 사람에게는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가 존재해. 같은 부활동을 하는 동료만이 아닌 등을 맞길 수 있는 친구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일지언정 수줍게 물든 뺨은 가리지 않는다. 꼿꼿이 얼굴은 든 유키노는 언제나와 같이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먼저 말을 꺼내줘서 고마워. 정말로 기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당신에게도 내가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나는 이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고 싶어.”

 

  우리는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풉. 푸하하하! 너무 귀엽잖아 유키농~.”

  “그치? 귀엽지? 누구 사촌인데~.”

  “무, 무슨······!”

 

    갈피를 잡지 못 하는 유키노를 보자 더욱 참을 수 없다. 어떻게 웃지 않는단 말인가. 꾸밈없는 올곧음은 더없이 한결같아 그 진실됨이 감탄하고 만다.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을 보여주는 너에게, 언제나 그랬듯 다시금 반한 내가 있다.

 

  좀 봐 줘, 유키노. 얼마나 나를 흔들어야 성이 풀리는 거야?

 

  “내가 말했지? 유이유이가 말하면 단칼이라고.”

  “에이, 그거랑 이건 다르지. 나는 있는 그대루 말했다 뭐.”

  “세세한 건 넘어가.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는 건 사실이잖아.”

  “그건 그래. 힛키 말대루야. 역시 유키농에 대한 건 제일 잘 알아.”

 

 소꿉친구란 이름은 폼이 아니니까 말이지. 몇 년을 봐왔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다. 유키농 검정이 있다면 출제위원을 맡는것도 가능한 수준일걸?

 

  “······설명을 요구해도 될까?”

 

 그러니 지금은 장난을 쳐서는 안 되겠지.

 권위자로써 난이도를 매긴다면 최하다. 낮게 내려깐 저음은 누가 들어도 심통이 난 목소리니까. 대화에서 소외되어 따돌려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완고한 모습조차 사랑스럽지만, 좌우지간 지금은 진지하게 임해야 할 때였다.

 

  “걱정할 필요없어.”

 

  시선을 맞추고 말한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마치 어제는 비가 내렸어 따위의 사소한 잡담을 건네는 어조로.

 

  “이쪽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거든.”

  “끝내다니, 무엇을?”
  “유키노가 했던 말 그대로. 사실, 우리도 기다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설마.”

 

  내 사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라움이 가득한 그 웅덩이에는 서서히 차오르는 기쁨만이 가득해, 멋대로 앞선나간 행위에의 배신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치, 유이?”

  “응. 에헤헤, 나는 힛키라는 별명이 입에 맞지만 말야. 그래서, 유키농도 그대로 부르고 싶은데······.”

  

  힐끗거리는 시선이 오래된 추억을 상기시켰다. 지난 봄 부실을 방문했을 무렵의, ‘누나의 친구’로 다시 만났던 유이가하마를. 주위에 맞추는 버릇을 고치라고 일갈했던 유키노시타를 말이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도망치려 했던 모습은 이제 없다. 차가운 달빛에 벼려지고 따뜻한 햇살 아래 담금질된 소녀는 눈부신 성장을 보여주었다. 모나지도 엇나가지도 않은채 한결같은 호의를 전해준다.

 

  지나온 과거와의 재회이자 선택할 수 있었던 현재, 나와 유키노에게 유이가하마 유이는 그렇게 비춰졌다. 익숙하지 않은 거리감에 당황하면서도 밀어내지 못 했고, 때로는 한 번 포기해버린 미래를 꿈꾸기도 하면서. 우리들은 털어놓을 수 없는 기억을 투영해 왔다. 

 

  서서히, ‘친구’로서 동화된 것이다.

 

  “그렇게 하렴.”

 

  사람은 이기적이다. 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면서도,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지 못 한다. 관심도 없을뿐더러 두려워하기까지 해, 주어야 할 때 주지 못하고 후회한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니 상처받을 일도 없을 거라 되뇌이면서.

 

  “저, 정말로? 정말, 그래도 돼?”

  “물론이야. 나는 허언은 하지 않아. 그건 당신······ 유이도 잘 아는 사실이잖니?”

  “유키농!”

 

  궤변이지.

  외톨이이기에 떳떳한 게 아니라, 외톨이이기에 잘못을 지적해줄 사람이 없는 것 뿐이니까.

  비판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몸을 숨긴다. 이기적인 사람만이 타인을 배려하는 척 가면을 쓴다.

 

  둘이 되고, 셋이 되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면.

  느릴지언정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도 알지 못 한채.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작렬하는 태양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여름은 끝났다.

  쓰라린 교훈도 소중한 인연도, 서늘함 속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xxx

 

  둘째 날은 그룹별 행동이 진행된다. 교사가 동행하는 단체관광과는 달리 정해진 조와 함께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부푼 기대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 학생들이 속출, 밤늦게까지 소란스럽던 복도는 부스스한 머리의 꼬맹이들이 가득 채웠다.

 

  다만 야근에 찌든 부모님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젊은 피가 피로를 몰아준 덕분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밝은 얼굴로 뛰어다닌다. 왁자지껄한 단체식당은 행선지를 향한 정보가 날아다녔고 세면장은 샴푸 cf를 방불케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초등학생이냐고. 다들 너무 흥분했잖아.

 

  그 틈바구니 속에서 스텔스 힛키를 발동. 후딱후딱 준비를 끝마치고, 친구들과 합류해 1층으로 내려온 것이 지금에 이른다.

 

  “아직은 한산하네.”

  “모두가 준비되야 출발할 수 있을 테니까.”

  “저쪽에서 기다리자구.”

 

  회담 장소로 썼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사키와 사이카에게 양해를 구한 뒤 상황을 살피자, 잠시 뒤 예정대로 J반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안면이 익은 여학생이 이쪽을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

 

  “히키가야 씨, 빨려 나오셨네요?”

  “이 정도는 보통이죠.”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대답을 들은 소녀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입을 가리는데······?

 

  “그렇구나. 보통이시구나~.”

  “히키가야 씨도 참, 솔직하시다니까.”

  “오늘 하루, 두분 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네? 저기, 잠깐······.”

 

  붙잡을 새도 없이 몸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 장소로 이동한다. 무리에 합류한 뒤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는 모습은 거대한 물고기떼 연상케 했다. 거대한 단일개체가 짓는 능글맞은 미소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설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눈치챈 건가?

  유키노가 의뢰 내용을 발설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협력자를 포섭한 이상 일정 부분의 정보 공유는 불가피하다. 대략적인 스케줄과 함께 하야마 그룹과 동행한다는 사실도 전달되었을 터. 남녀 한 쌍을 특정 장소로 데려가는 일을 연애에 민감한 여고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했다. 

 

  하는 수 없군. 나중에 따로 주의를 주는 수밖에.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 정중히 부탁한다면 알아줄 것이다.

 

  “누구야? 아는 사람?”

  “그 정도는 아니고. 유키노네 조원들이야.”

  “아하.”

 

  그것보다도 즐거운 시간은 뭐야? 두분이면 나랑 유키노를 말하는 거 맞지? 그야 물론 유키노와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지만, 오늘은 동행인이 많다구.

 

  응? 잠깐,

  ······동행인?

 

  “아차, 그러고보니 깜빡하고 있었네. 오늘 어디로 갈지에 대해, 사키랑 사이카에게는 말해주지 않았지.”

  “응. 물어볼까 했는데 하치만이 너무 바쁜 것 같아서.”

  “언제 말해주나 기다리고 있었지. 참 빨리도 알아차린다.”

  “미안미안.”

  

  면목이 없네. 이 두 사람에게 가장 먼저 말했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의뢰 수행에 말려들게 하고, 거짓을 섞은 걸로 모자라 잠시 잊어버리기까지. 이래저래 업보가 쌓여가는구나.

 

  “괜찮아. 오늘도 다른 조랑 동행하는 거지? 우리 걱정은 말고 하치만이 가고 싶은데로 해.”

  “나야 뭐 여행에 대해 문외한이고, 이런 건 핫 짱이 더 잘 알겠지.”

  “고마워.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어디로 갈지 설명할게.”

 

  오늘의 목적지는 두 곳.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군데씩 들르게 되며, 그 가운데 최소 반나절 동안은 J반 학생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전달했다. 상황을 보아 유키노가 합류할 것이며 사실상 같은 조처럼 움직인다는 것도 함께.

 

  첫 번째 목적지에 대해 설명할 때 묵묵히 듣고 있던 사키가 제동을 걸었다.

 

  “쿠라마 산을 오른다고? 힘들지 않겠어? 이틀 연속으로 등산이라니, 유키 짱이 무리하는 것 같은데.”

  

  동감이야, 사 짱.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도 살짝 걷는 코스인데, 체력이 없는 유키노는 두 말할 것도 없겠지. 매력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마지막까지 고민했었다. 덕분에 나조차도 찜찜한 구실을 몇 가지 준비할 수 있었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나름의 장점도 있어. 초입까지는 전철로 이동할 수 있는 점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등산로가 낮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편하다는 모양이야. 어차피 정상까지 가기 전 키부네 신사 쪽으로 빠질 거라 그리 오래 걸을 일도 없을 거고.

  “그래? 어느 정도 걸리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여행기에 따르면 사진 찍으며 느긋하게 돌아다녀도 두 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댔어. 거기에 생각해 봐. 지금 막 단풍철이니 경치도 끝내주겠지? 우거진 단풍 사이로 교토를 내려다보면 분명 이나리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멋진 풍경이 나올거라고. 높은 곳일수록 관광객도 적을 테니 오히려 유키노에게 딱 맞는 여행지가 아닐까?”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완벽한 논리였다. 어째 거래처 앞에서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비지니스맨이 된 것 같군. 안 돼. 점점 아빠의 테크를 타고 있잖아? 정녕 사축의 늪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건가?

 

  “일리 있네. 확실히 유키노는 좋아하겠어. 그래, 좋아는 하겠는데······.”

  “응? 뭔가 문제 있어?”

  “문제라고 할까, 토츠카는 알지?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

  “으응, 아마 나와 같다고 생각해.”

 

  쓴웃음을 짓는 사이카가 고개를 돌리던 그 때, 날카로운 공격이 파고들었다.

 

  “그거 말야, ‘핫 짱이 가고싶은 곳’이 아니라, ‘유키 짱이 좋아할 곳’ 이잖아.”

  “윽?! 아, 아니야! 그냥 우연히 겹쳤을 뿐이고, 유키노가 좋은 곳은 나도 좋으니까······.

  “가고 싶은데로 고르랬더니 데이트 코스를 정해놨네, 아아~. 그래서 아까, 유키 짱네 조원들이 그런 말을 한 거구나.”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결론을 내린 사 짱이 흠흠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로비를 둘러보며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인영을 하나하나 시야에 넣었다.

 

  “과연, J반이 모인 것도 그 때문이었군. ······다행이네. 유키 짱, 사랑받고 있구나.”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따뜻한 눈빛이었다. 누군가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대개 험악한 분위기가 뒤따랐으니까. 책속에 적힌 글귀는 정체되어 있었고 얄팍한 지식은 도움이 되지 못 했다. 캄캄한 어둠이 늪처럼 조여왔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우리를 끌어당겨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게 해준 것이 사키였다. 사람 사귀는 게 서툰 건 마찬가지였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우리와 달랐던 친구.

 

   불의에 맞설 수 있을만큼 상냥했고,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만큼 용감했다. 목을 긁으며 으르렁대 우리가 받을 적의를 되받아쳐주었다. 그림자들 사이에 안전지대를 만들어 줬다. 

 

  “응. 다들 괜찮은 사람들이더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얘는. 나는 유키 짱 걱정은 안 해. 문제를 일으키는 건 항상 핫 짱이지.”
  “그도 그렇네.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걱정해주라.”

  “아니, 거기서 긍정하면 안 되지. 언제나 삐딱하게 굴던 심보는 어디 갔어?”

  기가 막힌 듯 혀를 찬 소리가,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웃음소리가 되었다. 그런 나와 사키를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던 사이카가 이윽고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흠흠, 두 사람 다 이제 진정해..”

  “그래야겠네. 마지막 손님들도 도착한 것 같으니.”

 

  통로 쪽에 소란이 일고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야마와 토베, 누나와 에비나 양. 남남여여 네 사람을 선두로한 행렬의 끝에는 의외의 조합이 눈에 띄였다.

 

  반듯하게 빗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유키노와, 그런 유키노가 사랑스럽다는 듯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유이. 한눈에 봐도 명백히 평소보다 가까워진 거리였다.

 

  “유이가하마, 뭔가 엄청 신나 보인다만.”

  “뭐, 뭐어. 유키노시타 양은 다른 반이니까, 어색하지 않도록 풀어주는 게 아닐까?”

 

  아니야. 틀렸어, 사이카. 저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게 맞아. 유키노랑 호칭을 변경한 것 때문에 평소 이상으로 텐션이 올라간 게 분명해. 

 

  “······괜찮으려나?”

 

  그러게. 아니, 좋은 게 좋은 거지만 말이야. 유키노와 친하게 지내주는 건 더할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다. 토베와 에비나 양을 무사히 데려온 걸로 보아 내가 알려준 구실도 잘 먹힌 모양이고. 방금 전 내가 둘러댔던 핑계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내용이었으니, 사키가 설득당한 시점에서 저쪽의 성공률도 높다고는 생각했었다.

 

  “왜 그래, 핫 짱? 질투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는 그저 조금만 더 남들 눈을 신경 써줬음 싶음 것 뿐이라고.”

  “아니 그건 이쪽이······. 됐다, 말을 말래.”
  

  신음을 흘리며 눈을 흘기더니 한숨을 내쉰다. 끊긴 뒷말이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보지는 말자. 뭔지는 몰라도 맞는 것보단 나을 테니.

 

  “그나저나,”

 

  합류하러 가는 길에, 사 짱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

 

  담담히 바라본 시선이 기념품 가게를 가리킨 채 고개를 돌린 유미코와, 그 뒤를 따라가는 유키노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 될 건 없지.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유이와는 친구, 누나와는 사촌 관계다. 뿐만 아니라 문화제 시기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은 경험도 있다. 당시 F반의 연극이 무사히 상영된 데에는 유키노의 힘이 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귀빈 대접까지는 아니어도 호의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

 

  물론, 내 친구의 질문이 어떤 의도였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잘 알기에, 지금은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도, 사키에게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도.

  여하간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xxx

 

  출발시간이 늦어진 게 오히려 호조였을까. 직접 타 본 교토 시민의 발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한산했다. 버스는 지난밤 히라츠카 선생님과 택시로 이동했던 길을 그대로 달려 타카라가이케 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정말로 카오리와 만났다는 말이니?”

  “응! 아마두 유키농네랑 아슬아슬하게 엇갈린 것 같아. 입장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출구 쪽에서 나오더라구! ”

 

  개찰구에서 표를 사 나오는데 먼저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의 표정이 어둡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키노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 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그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눈 앞에서 놓쳐버리고 말았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는 유키노를 유이가 달랜다.

 

  “유키농의 잘못이 아니야. 우리두 운이 좋아서 발견하게 된 거구.”

  “그렇겠지. 그래도 카 짱, 만나고 싶었는데······.”

 

  아쉬울 만도 하지. 오리모토 카오리는 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중에서도 나와 유키노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였으니까.

 

  어쩔 줄 몰라하는 유이가 구조를 요청했다. 유키노의 손을 꼬옥 쥐고, 찌릿찌릿 눈빛을 전파삼아 장문의 메세지를 보내온다. 할 수 없네. 장소가 좀 걸리긴 해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되는 거겠지.

 

  “유키노, 기운내.”

  “하치만······.”

  “전화번호도 받아놨으니 유키노에게도 알려줄게. 치바에 가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돌아가면 바로 약속을 잡을 테니까.”

 

  살며시 놓아준 유이에게서 유키노를 건네받아, 비어있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의 수학여행을 즐기자구. 어때?”

 

  전화를 해볼까도 싶었지만 카이힌 고등학교가 오늘을 쉬는지 확실치 않다. 카오리도 하루쯤 피로를 풀 시간이 필요할 테지. 기쁜 얼굴로 재회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좋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유키노 또한 굳세게 아쉬움을 눌러삼켰다. 표정을 가다듬고, 언제나와 같은 당당한 눈빛을 던져온다.

 

  “단지, 즐기는 것만으로는 안 돼. 할 일은 제대로 할 것, 알고 있지?”

  “물론이지.”

  “그래.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아졌을지도 모르겠구나.”

 

  응. 역시 이해하고 있어. 역시 내 사촌.

  흠흠 고개를 끄덕이던 유키노가 문득 감싸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눈썹이 일순 가늘게 휘었다.

  어라?

 

  “왜 그래?”

  “아니, 좀······.”

  왠일인지 분명히 말을 하지 않고 얼버무린다. 입을 꾹 다물고 깍지 낀 손가락만을 내려본 채. 이런 적은 거의 없는데······.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우악스런 손길이 등을 팍 쳤다.

 

  “아파?! 무슨 짓이야!”

  “그쯤 해라. 아침으로 먹은 빵이 소화되기도 전에 올라오겠어.”

  “내가 뭘 어쨌다고!”

  “잘못을 모른다는 게 더 열받아.”

 

  한 대 더 맞았다. 사 짱 진짜 나빠. 왜 나만 때리는 건데? 그야 유키노에게 그랬더라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맞서 싸웠겠지만.

 

  “그,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사키 짱?”

  “맞아. 다른 사람들도 이동한 것 같고, 우리도 슬슬 들어가야 해.”

 

 그러고보니 하야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개찰구 너머 저멀리에 몇 명의 J반 학생들이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다. 이런, 열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

 

  “서두르자.”
  

  전광판에 새겨진 숫자에 쫓겨 우리는 개찰구를 통과했다. 승강장에 들어섰을 무렵 선로를 타고 흘러드는 굉음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그 속에서 이쪽을 또렷이 응시하는 유미코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벌리고 있던 입이 질끈 닫히고, 이윽고 머리카락이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전철에 타는 누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쫓았다.

 

  “힛키, 우리도 가야지!”

  “엇, 그, 그래!”

  

  한 칸 떨어진 문으로 들어서 문가 옆자리에 앉았다. 전과 비슷하게 유이가 중심이 되어 하야마네와 우리가 양 옆에 자리한 구도다. 끄트머리에 앉은 누나를 시작으로 에비나 양과 하야마, 토베네가 줄지어 앉았고 이쪽은 유키노와 나, 사키와 사이카 순으로 위치해 있다. 맞은편과 주위엔 J반 학생들로 채워져 얼추 수학여행의 분위기를 갖춰져 있었다.

 

  “근데 넌 이쪽에 있어도 되냐?”

 

  누나를 곁눈질하며 물어보자 유이도 목소리를 낮춰 응수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일단은 같이 앉아 있구, 또 사키 짱두 여기 있으니까.”

 

  요컨대 전담마크란 건가. 같은 조원이라곤 해도 원래부터 친구였던 세 명과 달리 사 짱은 아무래도 어색함이 있을 테니까. 붕 뜨지 않게 챙겨주려면 지금같은 상황에선 유이가 제격이긴 하다. 

 

  흠흠 고개를 끄덕이는데 별안간 가운데 앉아있던 유키노가 내 옷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왜?”
  “하치만, 저기 봐봐.”

 

  진지한 눈빛으로 출입구 위에 붙어 있는 전철 노선도를 가리킨다.

 

  “여기, 타카라가이케구나.”

  

  역명을 기억하려는듯 또박또박 중얼거린 유키노가 말을 이었다.

 

  “에이잔 전철은 이 역을 기점으로 두 개의 노선으로 갈라지는 거네.”

  “맞아. 우리가 가야할 곳은 쿠라마 선. 빨간색 라인을 따라가면 돼.”

  “빨간색이란 말이지?”

 

  종착역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려는지 팔을 드는 유키노. 소매에서 뻗어나온 손이 차내에 부착된 그림을 가리키다, 멈췄다.

  

  “다음 역이······, 하치만마에(八幡前)?”

  

  ······뭐, 예상은 했지만.

 

  “본선을 따라 갔어도 미야케하치만(三宅八幡) 역이구나. 후후, 어디를 선택해도 하치만이야.”

  “유, 유키노?”

  심상치 않다. 조용히 입을 가리지만 얼마 못 가 새어나오는 웃음소리. 쿡쿡 즐겁게 미소지은 유키노가 허공에 뻗은 손을 거둬들였다. 품이 아닌 내 얼굴 위로.

 

  한쪽 뺨을 부여잡아 가볍게 돌려, 정면으로 마주본다.

 

  “말 그대로구나. 나는 지금, 하치만의 앞(八幡の前하치만노마에)에 있어.”

 

  ······우와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응, 그렇지.

  ······사 짱이 했던 말, 이젠 좀 알 것 같기도.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유키노!

 

  사위가 침묵했다. 이제는 익숙해졌을 유이조차도, 충격에 물든 동공이 쌀알처럼 작아져 있다. 옆과 뒤는 볼 필요도 없겠지만, 얼어붙은 정적에도 아랑곳없이 유키노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 맞춰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럼 난······.”

  뺨을 문지르는 조그마한 손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살며시 머리 위로 가져온다.

 

  “유키(짱)의 아래(雪の下유키노시타).”

 

  돌아오는 건 잠깐의 고요.

  잠깐 뒤에 터져나오는 소리없는 아우성.

  유이나 사 짱, 혹은 사이카조차 무어라 말한 느낌이 들지만 들리지 않는다.

  내리꽂히는 시선이 희미해짐과 동시에 의식이 붕 떠, 오로지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후후. 뭐니 그게? 어설픈 말장난이구나. 당연하지만.”

  

  정말로 그 말대로다.

  이유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정말로 당연한 일이니까.

 

  xxx

 

  그런 의미(?)에서 장난은 여기까지. 비교적, 아니 100% 정도는 진심이었지만 말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본 목적을 잊지도, 잊을 생각도 없으니까. 일 하자. 이것 참 의욕이 팍팍 떨어지는 울림이로고.

 

  선로는 깜깜한 터널을 지나 골짜기 사이로 진입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풍경도 변했지만 그것은 울창한 수목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와······.”
  “심한데.”

  “엉망진창이구나.”

 

  2년 전 전국을 강타한 태풍이 남기고 간 상흔은 여전히 깊어, 사방 천지의 잡목 중 성한 나무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여기만이면 몰라도 전 일본이 요 모양이잖냐. 수 년 내에 수습하는 건 어려울 거야.”

  “어쩌면 일부러 수습하지 않는 걸지도. 이렇게 많은 나무 하나하나를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잖니. 어쩌면 자연 그대로 놔두는게 정답일지도 모르지. 앞으로 십여 년은 쭈욱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이런 때에도 분석을 하다니 역시 유키노답다. 

  그 때 아리송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유이가 손을 들었다.

 

  “엇, 그럼 치바 마을은? 8월에 갔을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당연하잖아. 치바는 무적이니까.”

  “그런 이유로?!”

  “그보다 치바 마을은 군마현에 있었는데······.”

  “농담은 그만 두렴, 하치만. 정말, 짓궂다니까.”

 

  두 번째로 말하는 거지만 비교적, 아니 100% 정도는 진심이다.

 

  “아마 산맥 사이에 끼여있던 덕분에 영향을 덜 받은 걸 거야. 캠핑장이니만큼 재난 상황에서의 메뉴얼도 갖춰져 있을 테고. 그렇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부분 뿐, 조금만 길을 벗어나면 여기랑 다를 것도 없었단다.”

  “에? 유키농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 그건······.”

 

  예리한 가하마 씨의 일격에 당황하는 유키노는, 얼른 받아채지 못한채 자꾸만 이쪽을 바라보며 시간을 끌었다.

  길을 잃어버렸다고 솔직히 말하자니 걱정을 끼치게 되고, 핑계를 대며 물러나자니 오래된 성격이 발목을 잡는다. 실언은 할지언정 허언은 내뱉지 않는 내 사촌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태. 그야말로 진퇴양난.

  

  “아, 그거? 별 거 아냐. 담력시험 코스를 점검하러 돌아다니다 만났는데, 그 때 유키노가 샛길을 발견했거든.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는게 아무래도 버려진 등산로 같더라고. 폐쇄작업을 거들어 줬어.”

  “앗, 글쿠나! 둘 다 고생 많았네~.”

 

  유키노를 발견한 곳은 폐쇄된 금줄 너머였고 그 뒤 곧장 헤어졌다. 내가 막은 곳은 샛길이 아니라 예정되었던 올바른 길이다. 거짓투성이 증언이었지만 당시 그 곳에 있었던 사람은 우리 둘 뿐, 의구심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아, 한 명 있군. 우리 고집쟁이 아가씨 말이지.

 

  “고생은. 나는 그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인걸. 직접 걸어다니며 샛길을 찾아낸 건 유키노였어. 그렇지?”
  “그건, 맞지만······.”

  

  무릎 위에서 움켜쥔 손에 힘을 주더니, 악력이 모자라다 싶었는지 이번엔 손톱을 세워 콕콕 찌른다. 한탄과 원망, 한 방 먹었다는 분함을 한가득 담은 눈을 치켜떠, 아래쪽에서 지그시 노려보았다.

 

  후후, 어때? 거짓이 섞인 진실도 제법 쓸만한 구석이 있지?

 

  그 때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던 하야마가 불쑥 중얼거렸다.

 

  “치바마을, 인가.”

  

  초목의 흔적이 터널처럼 드리운 그늘 속에 그 음성은 또렷이 울려퍼졌다.

  그러자 마치 자다 깬듯 갈라진 목소리로 토베가 외쳤다.

 

  “엇, 글치! 그러고보니 전에도 산에 간 적이 있었구나. 이야~, 시간 참 빠르네. 벌써 두 달이나 지나부렸어~.”

  “나도 기억나. 그 때는 참 더웠지~. 지금은 아침저녁은 제법 쌀쌀하지만!”

 

  에비나 양이 호응하자 토베의 입은 귀에 걸렸고, 오오오카와 야마토처럼 사정을 모르는 멤버들도 호기심을 보였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우리의 의뢰인. 그 옆에서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에비나 양이 뭔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 그 때 유미코가 쓰고 있던 밀짚 모자, 그거 참 잘 어울렸는데 말이야~.”

  “어?”

  “그 왜, 전날에 쇼핑가서 산 물건 있잖아?”

  가슴 앞에 든 두 손을 크기를 묘사하려는 것처럼 넓게 벌렸다.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신난 듯 말을 이어나가지만, 걸쳐진 안경 사이로 한순간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아아, 그거?”
  “응. 평소랑은 스타일이 달라서,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어.”
  “별 건 아냐. 그냥······, 분위기 좀 내보려고 한 거지.”

 

  머리카락 한줌을 꼬아 뱅뱅 돌리던 누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모로 보나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가 없는 모습에 에비나 양도 멋쩍은듯 입맛을 다셨다.

  

  따분한 듯 보이기도 했고, 이틀 연속 이어진 등산에 진절머리가 난 듯 비춰지기도 했다. 어쩌면 단순히 심심해서 였는지도 모르지만 어느쪽이 됐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왕의 기분은 아랫방향으로 스며들기 마련이다.

 

  티를 내지 않는건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쌓아온 눈치 덕분이겠지. 평소보다는 조금 목소리를 낮춘 토베는 소재를 짜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거리가 있는데다 누나가 앉은 곳이 끄트머리인 덕에 여기서 봤을 때는 얼핏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사키는 그렇다치고 사이카조차도 아무런 위화감을 못 느끼고 있었으니까.

 

  한쪽은 가라앉고, 한쪽은 상승한다. 이질적인 두 그룹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본질과 다른 형태를 취했다.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깨져버릴 듯 아슬아슬 한 균형 속에, 작은 산골마을에 접어든 전철이 종착지를 알렸다.

  

 

  xxx

 

  쿠라마 산의 초입은 역으로부터 시작된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인상깊은 텐구상을 지난 뒤 작은 상점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출발점에 다다른다. 이끼 묻은 돌계단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줄지어 선 등불들이 붉은색 실처럼 길을 구분짓는다.

 

  “설마하니 입장료를 받을 줄은 몰랐는걸.”

  “뭐, 명소니까 말이지.”

 

  명승지의 이름값도 있지만, 이 근방은 예로부터 교토 귀족들의 유서깊은 피서지였다. 지금 걷고 있는 발판도 수없이 많은 발자취를 아로새긴 반석이겠지. 틈새에 깃든 옛날 이야기들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발이 편하다는 사실만이 마음에 들 따름이다.

 

  구경에 심취하면서도 J반 아이들은 본분을 잊지 않았다.앞장서서 걷는 하야마 그룹의 주위로 자연스레 거리를 벌리며 포진한다. 그 틈바구니에 섞여 나와 유키노도 각자의 조원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불상과 분사, 비석들을 지나치자 풍경이 일변했다.

  쿠라마가 자랑하는 첫 번째 장소, 유키由岐 신사의 3그루 거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핫 짱, 여긴 뭐야?”
  “유키 신사.”
  “······설마, 아니지?”

  “절대 아냐, 안심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목적지를 고를 리 없잖아. 내게 있어 유키 짱은 하나뿐인걸.

  그보다 방금 구체적인 언급은 하나도 없었는데도 사 짱이랑 말이 통했지? 그건 좀 기분 좋네.

 

  “히야~.”

  “엄청 커~.”

 

  하나하나  남자 고교생 3명이 팔을 이어도 끌어안을 수 없는 둘레였다. 어느 것 하나 모자람없이 수직으로 뻗은 기둥이 만들어내는 응달, 초가지붕처럼 엮여진 단풍잎과 오랜 기억을 간직한 산들바람이 옛 도시의 정취를 재현한다. 

 

  “하야토 군! 사진 한 번 찍고 가자!”

  “그럴까? 어디, 통행에 방해가 안 되려면 이쪽이 좋겠군.”
  “허어, 나무가 너무 커서 카메라에 안 들어오는데? 다같이 찍을 수 있으려나?”
  “정 안 되면 몇 명씩 나눠 찍지 뭐.”

 

  정말이지 리얼충들이란 금방 소란을 피워댄다니까. 모처럼 정갈한 장소에 왔으니 조금 더 분위기를 즐겨주면 좋으련만. 신역이 번화가처럼 시끄러워져 버렸다.

 

  하기사, 저런 것도 본인들 나름의 즐기는 방식이라면 간섭할 권리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조용히 묻혀가는 것 외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니까. 본질은 단순하다. 수년간 익은 버릇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니, 다들 그렇게 타협하며 사는 것이겠지.

 

  그건 제쳐두고, 우리 의뢰인은 뭘 하고 있으려나? 엇? 토베가 결심에 가득찬 눈으로 에비나 양에게 다가가는데?

 

  “에, 에비나 양! 괜찮으면 같이······.”

 

  오오! 잘한다! 조금 성급한 감이 있지만 타이밍적으로는 아주 좋아! 그래, 조금만 더 어색함을 빼고 천천히 다가가면······!


  “왔습니다!”

 

  ······뇌내꽃밭인 BL녀가 오시겠지.

  망했네.

 

  “유이도 참, 웬일로 산 같은 델 가자고 강권하더니, 이런 야릇한 명소를 알고 있었던 거네!”
  “나, 나?!”

 

  화들짝 놀란 유이가 이쪽을 돌아본다. 억울함을 피력하는 절박한 표정과 더불어, 혹여라도 저 말이 진짜냐며 진위를 촉구하는 눈빛.

  어떡해,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왜냐하면 나도 딱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거든.

 

  “우뚝 솟은 세 개의 나무, 그것은 삼라만상의 상징. 남성 여성 중성의 모든 성性향을 포괄하고, 공, 수, 역전도 허용되는 이상세계. 하지만 그 굵고 기운찬 자태는 그야말로 세계의 뿌리이기도 하지.”

 

  ······네?

 

  “그 크기를 가늠해보려 하나의 기둥을 둘러싼 셋이라, 둘러싸? 과연. 전세와 내세의 가운데에 있는 이곳 현세에서, 우리는 그저 쾌락이 이끄는 데로 끌려갈 뿐이란 건가······. 깨달음도 없이, 아니, 바로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좁고 불가사의한 진리의 문을 기운이 넘치는 튼튼한 독고저(바주라)로 오입하는 고행길! 우햐! 그 격렬함에 내 태장세계가 만다라해버려!”

 

  급진적이다 못해 파격적인 교의해석이다. 아니 파계다. 이단이다. 전국시대였으면 엔랴쿠지 절기둥에 묶여 화형당했을 거라고? 무슨 창의적인 음담패설을 하는 거야, 이 여자는!

 

  “에비나, 그만.”

  “우갹?!”

  “나 참, 또 남들에게 폐 끼 치고 있었니? 못 쓰겠네 증말.”

 

  그 한마디에 제석천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육욕이 꺼졌다. 해탈이니 열반같은 고상한 수단이 아닌,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폭력 앞에서.

 

  “너는 입다물고 있는 편이 귀엽다니까.”

 

  통통 머리를 두드린 손날을 거두어들여 손수건을 꺼냈다. 번뇌가 흘러넘치다 못해(?) 강을 이룬 얼굴을 닦아주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말리는게 늦었네.”

  “······엇? 나, 나?!”
  “그럼 너 말고 누가 있는데? 아, 잠깐, 에비나 가만 있어 봐.”

 

  뜻밖의 사과에 당황한 토베에도 아랑곳없이 꼼꼼하게 손을 놀린다. 토베 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의 시선이 쏠린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기색으로.

 

  안경을 벗은 채 얌전히 얼굴을 맡기고 있던 에비나 양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고마워. 유미코도 찍을래? 기념 사진.”

  “찍지 뭐. 여기까지 왔는데. 못 할 것도 없구.”

 

  접은 손수건을 넣고 머리를 넘긴다. 안경을 고쳐쓴 에비나 양이 어깨를 으쓱하며 발을 맞췄다. 

 

  “하야토, 찍었어?”
  “아니, 아직.”
  “그럼 좀 기다릴게.”
  “······그래.”

 

  수긍한 하야마가 카메라를 들자, 뒤쳐져 있던 토베도 헐레벌떡 합류한다. 사진 촬영이 재개되자 유미코는 휴대전화를 꺼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걸 보니 아마도 전면카메라를 거울삼아 비춰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래.”

 

  유려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에 찔러놓고, 이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유이는 어떡할래?”

  “웅? 나, 나?!”

  가하마 씨, 당황하는 건 이해하지만, 좀 더 반응의 레퍼토리를 늘려주세요. 방금 전에도 똑같이 했던 말이잖아. 토베랑 마찬가지라고.

 

  “으음, 좀만 이따 가두 돼? 아! 싫은 건 아니구! 따로 몇 장 찍구 싶어서······.”

  “얘는. 뭘 그리 허둥대니?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 거지.”
  “허, 허둥대기는! 좀만 기다려 줘! 빨리 갈 테니까!”

  “괜찮아. 어차피 하야토가 끝날 때까진 대기구, 천천히 하고 와도 돼.”

  “으, 응······.”

 

  손사래를 친 누나가 근처의 그늘로 이동했다. 밑동과 허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뒷짐을 진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숨을 내쉴때마다 움직이는 목 아래, 타고 흘러내린 금발이 새어들어온 햇빛을 반사했다.

 

  에비나 양도 뒤를 따랐다. 그늘 아래에 발을 디디다가 마지막으로 주변 경치를 둘러보려는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금새 멈췄고 숨길 생각도 없는 노골적인 눈이 이쪽을 바라보며 씰룩거린다. 잠시 뒤, 가늘어진 눈꺼풀이 차츰차츰 가늘어지더니 이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얼버무렸다.

 

  역시 알고 있었나.

 

  유치한 치킨 게임이 시작된 마냥 한동안 눈을 떼지 못 했다. 그러는 사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유이가 슬그머니 내 곁에 다가왔다.

 

  “······힛키, 내가 너무 티냈던 걸까?”

  “아니, 평범했는데.”

 

  애초에 싸운 것도 아니고, 목적지가 겹치는 정도의 우연에 까칠하게 반응할 것도 못 된다. 유이가 가고 싶어한 장소에 친구인 유키노가 동행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치만! 아, 유이가하마 양도 왔네! 우리도 같이 사진 찍자!”
  “어어······. 뭐, 너무 신경쓰지 마. 진척이 없는 건 아쉽지만, 토베에게도 기회가 있겠지.”

  “우웅, 힛키가 그렇다면야······. 지금 갈게, 사이 짱!”

 

  이상할 것도, 트집잡을 거리도 없다.

  분명 그럴 터였다.

 

  xxx

 

  빽빽한 삼림은 강한 재해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단단한 뿌리는 지면을 고정시키고 한데모인 가지는 거센 비바람을 분산시킨다. 살아남은 거목은 떳떳이 고개를 든채 하늘을 떠받쳤고 쓰러진 잔해는 게으른 아침안개에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순환하는 숲길을 붉은 단풍이 물들이는 풍경.

  그 가운데로 뻗은 정돈된 등산로를 걸어나간다.

  자연과 섞이지 않는 인간의 길에서, 우리는 쇠퇴의 계절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예쁘다~!”

  “그 말대로야. 시기를 잘 맞춰 왔어.”
  “적당히 시원하니 덥지도 않구, 돌아다니기 딱 좋아.”
  “원래는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말이지. 여름이었으면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거야.”

 

  덥고 습한 계곡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동한다라,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수학여행이 늦춰져서 참 다행이야. 모기도 없고.

 

  탁 트인 본전의 정원같은 마당을 거닐며 가을바람을 만끽했다. 속세를 떠난 것만으로 이렇게 텐션이 오르다니 외톨이 성향 어디 안 간다니까. 자연에서도 먹히는 스텔스 힛키, 나조차도 두려울 지경이로군.

  

  무시무시한 존재감 지우기를 통해 정원을 가로질렀다. 제아무리 마음을 씻어낸다 해도 근심걱정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건 현황 파악을 위해서다. 그래, 그건 좋은데, 기껏 살펴보러 왔건만 토베는 여전히 죽을 쑤고 있는 중이었다.

 

  “에, 에비······.”  

  “앗, 유미코, 거기 앉으면 안 돼! 그 난간 허술해서 위험하다구!”

  “진짜네. 고마워, 히나.”

  “괜찮아? 힘들면 좀 더 쉬었다 갈래?”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항상 붙어다니던 세 사람 중 유이가 빠져버리니 에비나 양과 누나가 떨어지질 않는다. 위험한데. 저래서야 끼어들 틈이 없잖아.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고.

 

  “뭐 하냐, 토베! 빨리 오라고!”
  “이거 봐, 진짜 종이야! 얼른 쳐보자!”

  “으, 응······.”

 

  어쩔 수 없이. 작전 변경이다. 그렇게 결심을 굳힌채 뒤돌아섰다.

  본전으로 복귀해 손짓을 해, 쪼르르 달려온 유이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니 아무래도 토베 혼자서는 역부족일 것 같아. 유이가 좀 힘을 써줬으면 하는데.”

  “웅, 완벽히 이해했어!
  

  완벽히 이해했다는 건 플래그잖아. 지금 상황에선 가장 불안한 말이라고.

 

  “유미코랑 히나를 떨어뜨려 놓음 되는거지?”

  “일단은 그래. 너무 티나게는 하지 말고.”

  “알았어. 조심할게!”

  

  고개를 끄덕인 유이가 붕붕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굉장히 자신만만한 모습이지만, 영 불안이 가시질 않는 건 어째서일까······.

 

  “어머, 인왕님이 여기 계시네.”

  “우왓, 깜짝이야.”

 

  유키노가 바로 옆에 있었다. 언제 온 거래?

 

  “후후, 너무 긴장했잖니.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면 새들도 놀라 달아나겠구나.”

  “유, 유키노?”

  “당신은 조금 진정하는 편이 좋겠어.”

 

  그, 그렇게 다가오시면 진정은 커녕 역효과입니다만?!

  좋은 향기 위험해! 가슴팍에 닿는 손가락이 아득해!

 

  “걱정 마, 핫 짱.”

 

  꿈을 꾸듯 몽환적인 목소리와 눈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조급해하면 될 일도 안 돼. 그건 충분히 알고 있지?”
  “그야, 알지만······.”

  “그렇다면 믿어 주렴. 유이는 우리들의 친구잖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적어도 이쪽보다는 나을 거란다.”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신뢰가 거기 있었다.

 

  “······나는 딱히 믿지 못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오히려 반대라고? 기요미즈데라에서의 일도 큰 도움이 됬고, 솔직히 감탄하고 있어.”

  “그럼 됐잖니. 아니면, 뭔가 다른 걱정거리라도 있는걸까?’

  “······아뇨, 없습니다.”

  “그래?”

 

  은은한 미소를 띤 유키노는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웃으렴.”

  “······네?”

  “웃으렴. 이건 명령이야.”

 

  양 손으로 뺨을 부여잡고 쭉쭉 늘려댄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얼굴을, 찌푸리지 말아 줘.”

 

  ······이런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가을을 타나? 봄을 탄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애초에 고작 계절의 변화에 이렇게까지 들뜰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환절기에 얼굴이 빨개져봤자 감기 정도고, 그 정도로 어수룩할 유키노도 아닐 터인데.

 

  ······그래도, 이런 뜨거움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마는 나는, 이미 어찌할 수도 없이 옳아버린 것이겠지.

 

  “이러면 돼?”
  “응, 완벽해.”
  “그렇게까지야. 슬슬 돌아갈까?”

  “먼저 가 있으렴. 나는 잠시 조원들에게 돌아가 볼게.”

 

  그런가. 지금의 유키노는 어디까지나 J반에 소속으로서 동행하는 거니까 그쪽도 신경써 줘야 하겠지. 의심을 피한다는 목적도 분명 있지만, 하나의 집단에 소속된 이상 동료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니까. 오빠로서도 바라마지않는 일이다.

 

  “후후, 뭐니 그 얼굴은? 누나랑 떨어지는게 불안하다는 표정이구나. ”
  “우연이네. 나도 딱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체력이라던지 붙임성이라던지 이것저것 떠오르는게 많아서, 유키노를 혼자 보내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하치만, 내가······.”

  “동생이지?”

  “누나야.”

 

  지긋이 노려보기도 잠시, 부풀린 뺨에 바람이 빠지더니 쿡쿡 웃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자. 물론 질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이런 것도 승부로 치는 거냐고. 뭐, 알았어. 그래도 정말 조심해. 오늘은 꽤나 걸어야 되니까.”

  “걱정 고마워. 당신도 조심하렴. 그럼······.”

 

  이만, 고개를 끄덕인 유키노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조원들과 합류했다.

  어디, 그럼 나도 돌아가 보실까?

 

    “오셨구만. 이 상습 꽁냥범.”

  

  딱히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돌아오자마자 이런 대접은 너무하지 않아?

  그보다 보고 있었던 거야?

 

  “알고 있었으면 말을 걸지 그랬어?”

  “됐네요. 데이트 중에 방해했다가 무슨 소릴 들으려고.”

  “안 했거든?”
  “했어. 누가봐도 확실해.”

 

  능글맞은 미소를 띄우며 비꼬기도 잠시, 표정을 굳힌 사키가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 신경도 좀 써라. 명색이 같은 조원인데, 토츠카가 얼마나 널 기다렸는지 알아?”
  “알지. 그 점에 대해선 반성하고 있어. 그래서 사이카는 지금 어디에?”
  “하아, 그게 말야······.”

 

  고개를 돌리며 질렸다는 투로 한숨을 쉰다. 반쯤 감은 시선이 맞은편으로 이어진 정원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 녀석이 데려갔어.”

  “그 녀석?”

  “······하야마. 웬일인지 혼자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라고. 말 섞기 싫어서 떨어져 있었는데, 둘이 잠시 이야기를 하더니 동행하겠다고 하더라. 거절할 명분도 없어서 보내줬어.”

  명분 문제보다는 말섞기가 싫었던 게 아닌가 하는데······. 생각으로만 삼키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말자. 또 맞기는 싫으니까. 쓸데없는 분란은 피하는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그래, 그건 분명 그 녀석도 잘 알 텐데 말이야. 하야마 쪽에서 먼저 동행을 제안했다라? 흐음, 이건 어쩌면······.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네가 방치하니까 토츠카가 심심해하는 거 아냐.”

  

  한심하다는 투로 매섭게 흘겨본다. 이것 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그렇네. 뭐 어차피 같이 움직이게 될 텐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모처럼의 여행인데 그쪽이랑 어울리는게 사이카 입장에서는 즐거울 수도 있고.”

  “웬일이래?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거 아냐?”

  “그렇다기 보단, 음······. 유이 같은 타입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려나? 사이카도 누구든지 잘 어울리는 타입이잖아?”

  “거야 그렇지만.”

 

  눈치도 빠르고, 항상 주변을 배려하고 있다. 그 마음씀씀이에 몇 번이고 의지해왔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당분간은 둘이서 다녀야겠네.”
  “그러게.”

  “우리도 움직일까? 저쪽도 대충 정리하는 모양새고.”
  “응, 가자.”

 

  느슨하게 이어진 행렬의 맨끝을 사키와 나란히 걸었다. 담벼락을 따라 걷고 공터를 지나 원초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오랜 숲속에 놓여진 새하얀 돌계단이 지기 시작한 잎사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요하고 고고한, 고즈넉한 분위기에 흠뻑 빠지며

  신기하게 드러난 뿌리길을 지나, 사라져버린 잔해에 발을 디뎠다.

 

  “심각하구만.”
  “그러게.”

 

  잘라진 나무 밑둥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그곳은 공사판을 방불케 했다. 지난 태풍에 완파되어버린 신사가 남겨놓은 건 썩어가는 울타리와 바닥석 일부, 그리고 사용될 일 없는 우물이 전부였다. 약식으로 쳐놓은 금줄로 다가가, 이제는 실체를 잃어버린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오스기 권현사大杉権現社라.”
  “삼杉나무로 유명한 곳이었나 본데, 아이러니 하구만.”

 

  허리가 부러지는 건 예사에 숫제 뿌리까지 뽑혀버린 잔해를 둘러본다. 

  본디 일본이 원산지인 이 나무는 곧고 울창하게 뻗는 성질 덕분에 사랑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화로웠고, 영원토록 푸르를 숲처럼 보였겠지. 

 

  하늘을 가려버릴 만큼 높았기에 그 아래에는 햇볕이 들지 않는 것도,

  거대한 기둥을 받치는 뿌리가 터무니없을만큼 약한 것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기대하고만 얕은 매듭에, 현재와 미래를 함께 묶어버린 것이다.

 

  못 본 척 지나치려 했던 균열은, 너무도 확실한 형태로서 과거가 되었다.

 

  “사 짱, 여기서 특촬물을 찍는다면 어떨 것 같아?"

  “갑자기? 뜬금없네.”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던 사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것 같은데? 조금 좁긴 해도 길도 험하지 않고 시야도 좋아. 근처에 계곡도 있어 다양한 구도가 가능할 것 같아."

  “아, 알겠다. 튕겨져 나간다던가 해서 화면이 전환될 때 말이지?” 

  “응. 그런 건 접근성이 좋은 편이 품이 덜 드니까. 다만 먼저 이 나무들부터 치워야겠지."

 

  발치에 놓인 잔가지를 툭툭 차며 한 곳으로 정리한다. 카메라를 놓을 위치와 촬영 구도, 그로 인해 요구될 공간을 가늠해 보듯이.

 

  “그렇네. 배경이 이래서야 몰입을 유지하기는 힘들테니."

  "잘만 이용하면 그렇지도 않지만. 캐릭터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반작용이 필요하거든. 훌륭한 액션에는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리액션도 중요한 법이니까.”

  “예를 들면?”

  “음, 어디 보자······.”

 

  지면에 드러누운 거목에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이건 어떨까? 주인공에게 라이벌이 있는데, 그 녀석에게는 누구라도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는 강한 필살기가 있는 거야. 극의 긴장감을 위해서라면 그 기술을 임팩트있게 묘사할 필요가 있겠지.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효과적으로.”

 

  갈등과 다툼, 주인공을 가로막는 시련으로 압도적인 강적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요는 그것을 얼마만큼 구체적인 형태로서 표현할 수 있는가에 달렸겠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한 방에 끝내선 안 돼. 클리이막스에서 싱겁게 끝내는 것만큼 기대를 배신하는 전개도 없으니까.치고받는 난타전 속에서 긴장감을 끌어낼 수 있어야 실력있는 제작자라 할 수 있어.”

  “어려운 일이네. 한 방만 맞아도 KO이니 유효타를 허용할 수는 없고, 그러면서도 개연성을 챙겨야 하다니.”

 

  쫓는 쪽은 정말로 맞춰선 안 되고, 피하는 쪽은 절대적인 열세에서도 과정에 대한 설득력을 나타내야 한다. 모순투성이의 장기전에, 안일하게 임해서는 이도저도 살리지 못할 게 뻔한 불공정 난제다.

 

  “그 지루함을 중화시키는게 연출이지.”

 

  지면에 누운 기둥 위에 폴짝 올라선다. 시원하게 뻗은 두 다리는 울퉁불퉁한 발판 위에서도 흔들림 없이 멋지게 주인을 뽐내주었다.

 

  “연출?”

  “주먹을 내지른 충격에 주위 환경이 파괴된다던지, 직격만은 피했지만 충격파에 휘말려 날아가 버린다던지. 특히나 이런 환경에서는 잘만 이용한다면 CG 없이도 그럴듯한 시각적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시각적 효과라, 잘 이해가 가지 않는걸?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키는 볼을 긁으며 쓴웃음을 짓더니 수평으로 놓인 뿌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예를 들면 말이지.”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외나무 다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뿐한 스텝으로 전진했다. 끄트머리 옆에 놓인 작은 나무 옆에 서 왼발의 뒤꿈치를 올리는가 싶더니ㅡ,

 

  “이런 것 처럼.”

 

  다음 순간, 족히 갑절은 살았을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동작이 보이지 않았어. 시작과 끝의 발동작, 거기에 잘려진 단면을 참고삼아 휘둘러졌을 궤적을 상상했을 뿐. 한 발 늦은 파쇄음이 이제서야 들려왔고, 황갈색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와중에도 사 짱의 발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나무란 말이지, 속이 썩으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죽은 거나 다름 없거든.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살짝 치는 것만으로 화려하게 부숴져. 안전에 조금만 유의한다면 슈트 액터가 다칠 일은 없을 거야. 펀치력이 어떻니 킥력이 몇 톤이니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눈으로 보여주는게 확 와닿지 않아?”

 

  어, 응. 엄청 와닿네.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멀쩡한 나무를 박살나는 사 짱의 물리력에. 평소엔 정말, 어어어엄청 힘조절을 해 주는 거였구나······. 맨몸으로도 이 정도라니, 내 소꿉친구는 사실 괴인이나 개조인간이 아닐까? 

 

  “아무래도 나와 사 짱은 가치기준이 다른 것 같아······.”

  “뭔 소리래?”
  “아, 아무 것도······.”

 

  이쪽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무섭다. 흡사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한 기분. 사 짱이랑 친구여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이 쌓이고 쌓여 시청자의 몰입을 돕는다는 이야기구나. 싸움의 초반은 다소 정리된 등산로에서 찍고, 격화되기 시작한 뒤부턴 이런 곳으로 옮기면 되고.”

  “바로 그거야. 역시 핫 짱은 이해가 빨라서 좋다니까.”

 

  사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내 어깨를 쳤다. 조금 얼얼하지만 괜찮아.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것이 애정표현이란걸 실감할 수 있으니까.

 

  “엇차.”

 

  훌쩍 지면에 착지한 사키가 무릎을 툭툭 털고는, 저멀리 사진찍기에 한창인 하야마 그룹에 시선을 던졌다.

 

  “핫 짱도 사진 찍을래?”
  “됐어. 귀찮아.”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사라져버린 터는 흔해빠진 숲속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내부가 썩어버린 나무는 돌이킬 수 없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언제 갈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젠가나 마찬가지다. 한 달, 두 달, 운이 좋으면 몇 년 정도는 버틸지 몰라도, 결국엔 쓰러져 박살나버릴 운명.

 

  하지만 흉물스럽지는 않았다.

  썩어 문드러져, 원본을 알 수 없을만큼 풍화되어도 이곳에 있을 테니까. 먼저 쓰러진 고목은 대지의 양분이 되어 비바람이 할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상흔이 아물 때까지, 다시금 서로의 일부로서 함께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뒷짐을 진 사키가 앞서거니 걸어가기 시작했다.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는게 아무래도 오랜만에 주고받은 특촬물 대화에 제법 흥이 오른 기색이었다. 

 

  “이 다음은 하산이야?”
  “그래. 쭉 내려가는 일만 남았어.”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약간 아쉬운걸?”
  “나중이 되면 그렇지도 않을거야.”

  “왜?”

 

  흔히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말한다. 기억이란 불안정해서 나아간 세월에 반비례해 퇴색되는 거라고. 시간의 흐름을 되짚어나갈 때 참고로 할 표지판을 만들어두는 거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반만.

  정말로 강렬한 사건은 몸에 익힌 자전거와 같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쳐둔다면 말이다.

  이정표가 아닌,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나’를 시간의 길목에 남겨두고 오는 거니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성숙해져도, 기억을 마주하게 된 순간 그 때처럼 유치해지고 만다.

 

  좋든 싫든 그렇게 되는 것이다.

 

  “두고 보면 알 거야.”

 

  그러니 모쪼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xxx



  시냇물과 단풍, 찻집의 청명함이 어우러진 거리를 둘러본 우리는 키부네구치 역으로 돌아갔다. 이곳까지 데려다준 에이잔 전철을 타고 종점 데마치야나기까지 이동한다. 흐음, 뭔가 낯이 익은 이름인걸? 야나기, 야나기라? 모르겠네.

 

  거기서 케이한 본선으로 환승, 산조 역까지 이동 후 다시 토자이선으로 갈아탄다. 

  버스 쪽이 조금 더 싸게 먹히지만 환승이 번거로운데다 길이 막힐 경우의 이동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많은 인원, 그중에서도 J반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는 만큼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게 바람직할 것이다.

 

  종착지 우즈마사텐진가와 역에서 내린 뒤에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란덴에 탑승한다. 두 정거장 뿐이지만 공도의 자동차와 나란히 달리는 노면전차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유키노와 유이에게 신호를 보낸다. 엇박자로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J반 아이들이 바람잡이를 하는 틈에, 하야마 그룹을 무사히 하차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즈마사쿄류지?” 

  “핫 짱, 여긴 뭐가 있어?”

 

  가늘게 눈을 뜬 사키가 물었다. 곁에 선 사이카도 알쏭달쏭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크흑, 뭐야 저 귀여움. 그야말로 외계에 불시착한 어린 왕자다.

 

  “거의 다 왔으니까 일단 출발하자. 궁금한 건 그 때까지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구.”  

  “뭐야, 그게? 수상한데.”

  “엄청 즐거운 곳이야. 믿어 줘.”

  “난 믿어. 하치만이 말한 거라면.”

 

  사이카의 선의가 눈부시다. 어찌나 밝은지 사키조차도 어깨를 으쓱하며 수긍의 뜻을 보였다. ‘재미없기만 해봐라. 그냥-’ 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들린 것도 같지만 못 들은 걸로 하자. 아니,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위치 정보가 그려진 약도를 전송하자, 유키노의 조원 중 가장 활달했던 안경 소녀가 반응을 보였다.

 

  “좋아! 이 쪽이야! 나만 믿고 따라오라구!”

  과하리만치 큰 소리로 외치고는 척척 걸음을 옮긴다. 나머지 일행도 꺄아꺄아 흥을 돋구며 뒤를 쫓았다. 언뜻 난잡하게 뒤따라가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뒤쫓는 이가 놓칠 일 없도록 치밀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리를 지은 여고생은 무섭지. 어디서 저런 가공할 만한 행동력이 나오는 걸까?

 

  “뭐가 있긴 있나 본데?”

  “유이, 정말 여기야?

  “웅! 엄청 유명한 데야! 우리두 빨리 가자!”

 

  혼자서도 잘하는 우리 가하마 씨는 더 대단해!

  역시 전직 스파이 가하마스 양이다. 천연덕 스러운 얼굴로 친구들을 이끄는 폼이 예사롭지 않아. 마치 돈까스를 미끼삼아 아이를 치과로 데려가는 부모 그 자체. 저 처세술만큼은 몇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겠지. 마음 속으로 찬사를 보내며 이번에도 후미를 자청했다. 

 

  선두에는 J반과 동행하는 유키노, 중간에는 유이. 봉사부 세 명이 일행의 전체를 감싸는 포지션이다. 서로의 사각을 빈틈없이 메꾸며 마침내 큰길가로 접어들었다.

 

  교토의 건축물은 높이가 낮다. 뿐만 아니라 가게의 간판도 색상이 통일돼 있다. 전통보존의 차원에서 이런저런 제한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거를 재현한 거대한 관문도, 널찍하고 각진 입구도 지척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그야말로 느닷없이 나타난 모양새가 되었다.

 

  “토에이, 우즈마사 영화마을?”
  “영화 마을이면 세트장 같은 건가?”

  “맞아. 어서 들어가자. 표는 내가 사올게.”

 

  매표소를 향해 나아가자 눈치빠른 토베가 따라붙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왠지 모르게 이런 역할은 도맡아 할 이미지지만. 

 

  “어때? 잘 되가는 느낌이 들어?”

 

  인접한 창구에서 계산을 하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건다. 왕년의 첩보물 주인공이 된 느낌. 

  그리고 대개 극의 중반에 나오는 이런 장면은 꼬여가는 상황을 알려주는 클리셰였지.

 

  “으윽, 그게 말여~, 나름대로 노력해 보고는 있는데, 어째 평소보다 더 얘기를 못 하는 느낌이 들걸랑? 어떡하지?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나?””

 

  고민을 거듭해봐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흔히 저지르는 악수悪手. 이건 말려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해. 여기서 실수했다간 되돌릴 수 없어. 누나 쪽은 유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자연스럽게, 재밌는 추억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가도록 해.”

  “말은 쉽단 말이지······. 스승님, 뭔가 임팩트있는 방법은 없어? 단숨에 여심을 사로잡는다던지, 뭐 그런거!”

 

  있겠냐, 그런 게?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이 세상 누구도 사랑 문제 따위로 고민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물어볼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나라고 해본 줄 알아? 연애 경험 제로인 하치만에게 더 이상의 조언은 무리입니다!

 

  “······귀신의 집 같은 건 있다만.”

  “오옷! 그거 좋네! 어제의 그 태내 체험관? 에서도 제법 진전이 있었거든~. 깜깜한 곳을 단둘이 걷다 보면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좋아, 그걸로 하자!”

 

  아무리봐도 헛물 들이키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마음의 거리란게 뭔지는 몰라도 그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에비나 양이 누나랑 붙어다닐 리가 없지. 이성으로서의 호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티켓 구매 정도는 따라와주지 않아으려나? 뭐, 난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힘내라!

 

  학생 요금으로 계산을 마친 뒤 토베와 갈라졌다. 표를 나눠받은 하야마 일행이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 사키와 사이카에게 돌아갔다.

 

  “고마워, 하치만.”

  “빨리 갔다 왔네. 얼마였어?”

  “얼마 안 했어. 어서 들어가자.”

 

  잽싸게 발을 돌렸지만, 한 발 앞선 사키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얼마였냐니까?”

 

  아아,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인터넷 예약을 하지 않은 게 발목을 잡다니. 이런 건 눈치채지 못 하게 해치웠어야 했는데.

  

  “핫 짱, 빨리 말해.”

  “······1400엔.”

  “뭐어?!”

 

  사실대로 실토하자 사키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덤으로 사이카도. 허겁지겁 지갑을 꺼내려는건 간신히 저지했지만 다음 순간 단단한 두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말이 돼?! 엄청 비싸잖아! 1400엔이 뭐가 ‘얼마 안 했어’야?!”
  “서, 성인 요금보단 1000엔 싸. 1인분 기준으로는 2끼 분 식사값이라구.”

  “장난해? 천 엔이면 이틀은 먹을 수 있거든?” 

  “어? 그게 문제야?”
  

  동생들 반찬은 성대하게 만들면서 본인은 얼마나 절식하고 계신 겁니까, 카와사키 양? 이 건에 대해서는 추후에 진중히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내 친구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 그만 해. 두 사람 다.”

  

  사이카가 끼어들어 중재한 덕분에 나와 사 짱의 물리적 충돌은 막을 내렸다. ‘물리적’으로만. 가차없이 쏘아지는 안광이 오금을 저리게 했지만, 지지 않으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한 두푼도 아닌 티켓값을 어물쩍 넘어가려 하다니, 용서 못 해.”

  “오해야. 내가 쏘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한 적 없어. 잘 기억해뒀다가 다같이 계산할 생각이었다고.”

  “흥, 또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이번에도 말도 없이 죄다 떠맡으려고?”

  “아니라니까!”

  “모두 그만!”

  작지만 또렷한 사자후가 내리꽂혔다. 

 

  “정말, 다 같이 놀러왔는데 싸우면 못 써.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매너 위반이야.”

  “아니, 그치만 이 녀석이······.”

  “카와사키 양은 하치만을 믿지 않아?”
  “그,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신뢰한다면 먼저 해명할 기회를 줘. 잘잘못은 그 때 가려도 늦지 않아.”

 

  순진하고 앳되보이던 평소와는 다르다. 점심 시간의 테니스 코트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힘찬 함성이었다. 갈등을 중재하는 것은 익숙한 듯 늠름하게 대처하는 사이카에게 사키도 한 발 물러서 주었다.

 

  “하치만.”

  운동부 주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이카는 내가 알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말이지. 사실대로 말하면 안 들어가겠다고 할 까봐 걱정이 됐어. 보다시피 가격이 좀 나가니까, 그렇다고 사 짱만 빼고 가는 건 절대로 싫었거든. 어제 아침 아빠한테 용돈을 좀 받았는데, 나야 뭐 쓸 데도 없잖아? 그래서 그 뭐냐, ······보태주고 싶었어.”

  

  거짓말이 들킨 건 괜찮다. 구질구질한 변명도 상관없다. 그러나 금전적인 문제에서 동정받았다는 생각만큼은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 아닌, 돈과 친구 사이에서 친구를 고른 내 이기심이, 허술한 거짓말과 함께 숨겨지기를 빌었을 뿐이다.

 

  “뭐야,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됐잖아. 이 정도는 알아서 낼 수 있는데······.”

  “내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니까. 나에게도 공돈이구, 다같이 시간을 보내는 데 쓸 수 있다면 아깝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니? 진짜로 핫 짱은, 잠시만 방심해도 믿을 수 없는 짓을 한다니까.”

  “응, 미안해.”

  한숨을 내쉰 사키가 이마를 쓸어넘겼다.

 

  “됐어. 더 말해서 뭐해. 이미 화도 다 풀렸는걸.”

  “사 짱······!”
  “그러니 나중에 계산하자. 1400엔이랬지? 치바에 가서 갚을 테니까.”

  “아니 그건 좀 넘어가 주라고.”

 

  하다못해 ‘다음에는 내가 쏠게~!’ 정도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구. 두루뭉술한 기약 뿐이라면 여차저차하는 틈에 잊게 만들 수 있으니까. 아, 틀렸어.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해 버렸어. 분명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져 있을 거야.

 

  “진짜 못 말린다니까.”
  “누가 할 소린데.”

 

  한동안 서로를 쏘아본 우리는 거의 동시에 실소를 머금었다. 어깨에 힘을 빼고, 화해의 초석이 되어준 친구에게 고개를 돌린다.

 

  “고마워 사이카. 이번에는 여러모로 신세를 지네.”

  “그러게 말야. 넌 좀 반성해야 해. 나도 나지만 토츠카에게도 민폐라고.”

  “아니, 거기선 같이 사과해 줘야지, 사 짱.”

  “어림 없네요. 괜한 짓 한 건 너야, 핫 짱.”

  “푸흡, 이제야 평소의 두 사람으로 돌아왔구나.”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다투지는 않는데, 뭐, 사이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한차례의 위기를 넘긴 우리는 곧장 영화 마을로 입장했다. 들어서자마자 최근 유행하는 모 다이쇼 시대 캐릭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거 시작부터 강렬한 환영식이군요.

 

  “잠깐, 어디로 가는 거야?”

  “하치만, 세트장은 요 앞쪽인데?”
  “후후후.”

 

  사이카는 티켓에 동봉된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는 타입, 사키는 무작정 부딪쳐보는 타입이로군. 어느 쪽이 좋다고 딱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후자 쪽이 편했다.

 

  “내가 언제 세트장에 간다고 말했지?”
  “뭐, 뭐라고?!”

 

  AIBO도 울고 갈 훌륭한 리액션이다. 하지만 사 짱, 너는 모르고 있어. 이 다음 시작될 깜짝 쇼를 알게 되면, 분명 지금처럼 장난스러운 태도는 못 하게 될걸?

 

  “일단 따라와 보라구!”

  입구 바로 앞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심드렁하던 사키의 눈이 점점 커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소리친다.

 

  “하, 하하하, 햣?!”

  놀라던지 이름을 부르던지 둘 중 하나만 해 줘. 그야말로 학교 앞 구멍가게의 막과자 아이스크림만 먹던 아이가, 처음으로 베스킨 라빈스에 들어간 듯한 반응이었다.

 

  그럴 만 한지. 왜냐하면, 그도 그럴게 사 짱은,

 

  “이, 이게 뭐야?! 어? 여기 있는 거 전부······ 이래도 돼? 라이더잖아! 슈퍼전대잖아! 어떡해! 꺄아아아아아!”

 

  자타가 공인하는, 치바 제일의 특촬물 덕후니까.

  

  “나이트! 사소드! 제로노스! 하하하! 2호 라이더만 갖다 놓은 거야? 그럼 카리스가 2호인걸 인정했다는 거네! 역시 토에이야!”

 

  헤이세이 라이더는 전부 섭렵. 심지어 태어나기 전에 방영되었던 것도 꿰고 있다. 높은 CG로 구성된 최신 시리즈를 먼저 접한 나로서는 솔직히 잘도 옛날 화면에 몰입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사 짱은 진심이었다.

  

  “엄청 커! 역시 쇼와 라이더는 대접이 다르구나. 이것도 시간내서 봐야 하려나? 거대 흉상도 있어! 끝내준다!”

 

  그뿐이랴. 철지난 염가 DVD부터 DX드라이버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싸게 나온 물건은 악착같이 수집해왔지. 사키의 방 사진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30대 독신남의 서재인줄 알 정도. 얼마 전에도 변신완구를 두른 케이카가 깜찍하게 손을 치켜든 사진이 전송됐는데······. 카와사키 가의 영재교육은 무시무시하구만.

 

  “우, 우와······.”
  “사이카는 처음 보지? 사 짱의 저런 모습.”

  “으응, ······좀 의외야.”

  

  차마 부정하지는 못한 사이카가 멋쩍은듯 그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데려온 나조차도 얼떨떨하다.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 표현은 보기 드문데, 거의 산책 나온 비글 수준의 에너지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나?

 

  어라? 지금 이쪽을 봤어.

  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데?

  사, 사 짱?

 

  “핫 짱, 사랑해!”

  “크허억!”

 

  베어허그, 통칭 곰 껴안기를 알고 있는가.

  곰이 사냥감을 조이듯이 상대를 끌어안아 허리를 압박하는 기술이다.

  물론 현실의 곰은 강하다. 절대적이 물리력이 있는 한 잡기술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리고 그건 사키에게도 통용되는 법칙이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나 보여주려구 데려온 거야? 아아, 이제 알겠어. 그래서 쿠라마에서의 일이 아쉽지 않을 거라구 한 거구나? 정말 고마워! 나 너무 기뻐서 죽을 것 같아!”

 

  사, 사 짱, 나도 죽을 것 같아. 갈비뼈 골절이나 질식사 같은걸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끼여들어도 아랑곳없이 꼬옥 껴안은 채 뺨을 비벼온다. 잘 재봉된 헤어 슈슈가 시야에 흔들렸고 어깨 위로 올려진 얼굴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귓가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아까 너무 심하게 말했지?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힘껏 밀어내는 노력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잔혹하리만치 순수한 호의였다.

  하는 수 없이,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 사키의 등을 감싸안았다.

 

  “생일 축하해, 사 짱.”
  “······어?”
  “조금 늦었지만, 내 나름대로의 서프라이즈 선물이야.”

 

  조금 더 가까워진 얼굴에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걸 느낄 수 있다. 자그마한 틈에 숨통이 트인 것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를 말을 전부 내뱉는다.

 

  “사 짱의 생일은 월요일이었잖아. 중간고사가 시작된 날이라 전후로 시간을 잡을 수 없었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마침 이 곳을 발견해서 와 봤는데,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그럼, 용돈을 쓰겠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지.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사 짱이 갚을 필요는 없어.”

  “······뭐야, 그게.”

 

  어깨에 얼굴을 묻더니 또다시 끌어안는다. 끄아악, 하치만 죽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고, 그저 사키의 등을 토닥이는게 고작이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주마등 탓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뒤 나를 붙잡는 팔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 짱, 저기 봐.”

 

  약간이지만 빨갛게 물든 눈동자가 올라오더니, 구름 속에 숨듯 황급히 소매에 비벼댔다. 그거 제 교복입니다만?

  손짓으로 가리킨 곳을 곁눈질한 눈이 또다시 급변했다.

 

  “저건······.”

  “특촬 히어로 연표. 그 말인 즉슨, 쇼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작품에 이 안에 전시되어 있다는 뜻이지.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응응, 엄청 재밌을 것 같아.”
  “그럼 가 봐.”

  “하치만은?”
  “물론 나도 가지. 그래도 이런 감상에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니까. 시간도 많고, 느긋하게 둘러보자.” 

  “······고마워.”

 

  한 걸음 물러서 매무새를 정돈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이쪽을 돌아본 사키는 한쪽 눈을 찡긋 깜빡인 빠른 걸음으로 입구에 들어갔다.

 

  살았어. 살아남았어······. 반갑다 산소야! 오랜만이야 세상아!

 

  “하치만은 여전하구나.”

 

  일상과의 재회에 기뻐하는 나를 내내 지켜보던 사이카가 반겨주었다.

 

  “하핫, 그렇지도 않아. 항상 이런 식이면 내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해. 지금도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구.”

  “표 한 장 사준 거 가지고 뭘.”

  “그것말고도, 전부 다.”

 

  특이할 것 없는 미소였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진지했다.

 

  “······미안하네. 이번 여행에서는 이래저래 폐만 끼치고.”
  “신경 쓰지 마. 내가 원해서 돕는건데 뭐.”

  

  말로 하지 않아도 알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표현해야 하는 것이 있다.

  아니, 아마도 반대일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전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빠짐없이 말해야만 한다.

 

  “······그렇구나. 그럼, 끝까지 폐를 끼쳐도 될까?”

 

  미안함과 고마움, 호의와 동경, 그 이상의 모든 것들이,

 

  “응! 마음껏 의지해 줘!”

  전부,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둘 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으앗, 깜짝이야.”

  “어서 와, 유키노시타 양.”

 

  유키농 언제 왔농? 요즘 너무 신출귀몰한 거 아니니? 오빠의 심장이 요즘 여러 방면에서 수난이란다? 그나저나 여기에는 왜?

 

  “세트장을 둘러보다 떨어져 나왔어. 뒤따라오던 급우가 내게, 하치만이 2층으로 올라갔다고 알려주었거든.”

 

  마음을 읽혔다는 사실보다도 찾아온 경위에 공포를 느낀다.

  마치 바람피는 남편을 추적하는 듯한 광범위 네트워크.

  딱히 켕기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다, 다른 조원들은?”

  “같이 가자고 권해도 사양했어. 아마 다들 특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야.”

  

  그, 그런가? 하긴 이쪽 계열은 마이너랄까, 어렸을 때 거쳐가는 관문같은 느낌이고, 진짜로 인기 있는 건 세트장 쪽에 있을 테니까. 말하고 나니 슬프네. 히라츠카 선생님이 있었더라면 좋은 동료가 되어줬을텐데.

 

  “유키노시타 양은 좋아해?”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좋아해. 어렸을 때는 다같이 모여서 보고는 했단다. 항상 주말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어.”
  “근사하네. 그렇구나~. 아, 하치만, 나도 먼저 가도 될까?”
  

  뭐, 뭐라고?!

 

  “어째서?!”
  “으응, 아마 유키노시타 양네 조원들이랑 같은 이유일거라 생각하는데······.”

  “여, 역시 내키지 않았던 거야?”
  “아냐아냐, 그렇진 않아. 음~, 아!”

  

  대답을 망설이던 사이카가 손에 쥔 지도를 내밀었다. 순서가 반대 아닌가?

 

  “여기, 귀신의 집! 나 이런 거 좋아하거든!”

  “그런 거라면, 이후에 함께 이동해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카와사키 양은 이런 거 무서워하잖아. 여기서는 각자 따로 즐기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

  “그건, 맞는 말이지만.”

 

  사 짱이라면 폐장 시간까지 여기에 둬도 안 질리겠지. 어차피 동행할 수 없다면 여유가 있을 때 나눠서 행동하자는 거구나. 아무렴,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건 중요한 문제니까.

 

  “알았어. 조금 있다 만나자, 사이카.”

  “응. 나중에 만나. 유키노시타 양도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고마워.”

 

  손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키노가 말했다.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응, 분명 알고 있어. 유키노처럼.”

  “어머, 눈치채고 있었니?”
  “그렇게 티나게 도와주는데 모를 리가.”

 

  쿠라마에서는 굉장했었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나간 느낌이 들었지만 장단을 맞춰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100%는 진심이었다고 해도. 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하치만의 계획대로 흘러갔을까?”
  “글쎄. 아직은 몰라.”

  “그래,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겠구나.”

  “기다려야지.”

 

  떠들썩한 아랫층과 대비되는 적막이 사위를 물들인다.

  할 일은 잊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 온 수학여행을 전부 반납할 기세로 임할 생각은 없다. 자기희생은 더 이상 안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래, 그건 유키노도 안다. 알 터인데······.

 

  “유키노.”
  “뭐니?”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별로.”

 

  그럼 왜 제 소매를 잡고 계시는 건가요?

 

  팁 한 가지. 여자아이가 ‘별로’라고 말할 때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죽을 각오로 머리를 굴려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사키가 하치만을 껴안고, 하치만이 등을 토닥여 줄 때부터?”
  “아아, 그건 그거다. 레슬링 경기에서의 탭 같은 거야. 숨을 쉴 수가 없었거든.”
  “알아. 사 짱, 힘 세니까.”

 

  어라? 이게 아닌가? 아니, 하지만 분명······.”

  “유키노.”

  “뭐니?”

  “혹시······ 부러웠던 거야?”

 

  움찔하는 유키노. 한쪽 팔을 부여잡고는 숨을 고른다.

  

  “그런 거 아냐.”

  “딱히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방식이 좀 과격해서 그렇지 사키 나름의 애정 표현이니까. 안아 달라고 하면 해줄걸? 유키노니까 조금 더 힘조절을 해서······.”

  “아니라니까.”

 

  엥? 아니면 대체 뭐야?

 

  “그런 게 아니야. 사 짱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건 잘 아는걸. 우리 사이의 약속도 아직 유효하고······.”

  “무슨 말이야?”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깨닫지 못 했니?”

 

  갈피를 못 잡는 내게, 애달픈 시선을 보내던 유키노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억지로 끌어안으면, 받아주는 건가 싶어서······.”

 

  ······유키노시타 씨, 제대로 들렸다구요?

 

  아아, 그런가.

  그런 뜻이었나.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겠구나.”

  “······응.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너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나쳐왔던 무수히 많은 신호들을,

  애매한 상태로 지나쳐버린, 우리들의 거리감을.

 

  “후후후, 또 표정이 굳어버렸구나. 오늘은 좋은 날이잖니? 웃어 주렴.”

  “이렇게?”

  “그래. 자, 얼른 가자. 오랜만이라 그런지 나도 기대되기 시작했단다.”

 

  미루지 않고 확실히, 매듭을 지을 테니까.



  xxx

 

  식사를 마친 직후 밖으로 나섰다. 이른 저녁의 호텔은 식지 않은 열기가 들끓어 어디를 가든 사람과 마주친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며 사진을 공유하는 학생들은 평안한 헤이안의 숲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게 시무룩한 토베를 보자마자 한낮의 전말을 알아버렸다고, 거북해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밤공기도 쐴겸 거리를 걷다 시야에 들어온 편의점에 들어갔다.

  용무는, 그렇군. 밥도 먹었으니 카페인을 채워볼까. 식후 커피는 불로장생약이니까.

  진열대 사이를 지나 냉장고 문고리로 손을 뻗는데, 불쑥 튀어나온 손과 부딪치고 말았다.

 

  “앗.”

 

  아무래도 히키가야 가는 죠스타 가문 뺨치는 혈연인 모양이었다.

  무슨 우연인지 유미코가 거기 있었다.

 

  “누나?

  “······하치만?”

 

  그새 갈아입었는지 허술하다 싶을 만큼 단촐한 차림새였다. 방금 말린 머리카락이 얇은 가디건 위로 흘러내린 앞에 반사적으로 거두어들인 손이 허공을 방황했다.

 

  “머, 먼저 사.”

  “아니, 누나 먼저.”
  “나아는, 괜찮으니까······.”

  “아니, 나도 딱히······.”

 

  말을 이어갈 수 없어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한 걸음 물러선 유미코가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천천히 진열장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무슨 말을 꺼냈어야 했을까?

 

  “없더라, ······맥스 커피.”

  “어어.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 알고 있었구나.”

 

  꾹 다문 입술이, 기분 탓인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하치만은 예전부터 똑똑했으니까. 챙겨주지 않아도, 사실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아이였지.”

 

  혼잣말처럼 되뇌이고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맥캔은 없지만, 다른 거라도 괜찮다면 하나 사 줄게.”
  “아냐, 그렇게까지 마시고 싶은 건 아니구.”

  “여기까지 왔으면서? 됐으니까 기다려 봐.”

  “······나는,”

 

  입에 담으려는 그 때, 덜컹거리는 쇳소리가 뒷말을 막았다.

 

  “응, 이거라면 괜찮을 거야.”

  

  파이프를 문 인상적인 아저씨가 그려진 척 봐도 강렬한 디자인의 음료수를 건네받았다. 카페모카라면 확실히 이중에서는 가장 달달한 커피일 것이다. 커피맛 음료가 아닌, 진짜 커피.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계산부터 해야지.”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눈으로 좆았다. 휘황찬란한 브랜드 로고와 태평한 BGM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시장바닥 한가운데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가늠할 수 없는 공포에 몸이 굳었다.

 

  “자, 받아.”

  “······고마워.”

  “이 정도 가지고 뭘.”

 

  갈색의 액체를 머금었지만, 그 맛은 대뇌까지 올라오지 못 했다.

 

  “누나.”

  “응?”

  “오늘은 즐거웠어?”

  

  가게 구석에서 들려오는 전자레인지의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응, 즐거웠어.”

  “그래?”

  “하치만은?”
  “뭐, 나도.”

 

  그리 크지도 않은 병을 홀짝이며, 나란히 선 자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이 없는 깜깜한 밤거리를.

  알루미늄이 구겨지는 소리가 자명종처럼 깨우기 전까지.

 

  “먼저 돌아갈게.”

  “바래다 줄까?”
  “얘는, 바로 코앞인데.”

 

  씨익 웃어보인 누나가 돌아섰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자동문이 열렸을 때, 마지막으로 이쪽에 시선을 던졌다.

 

  “잘 자.”

  “······누나도 잘 자.”

 

  어둠 속에 멀어져가는 그 등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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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의 만남에도 히키가야 하치만은 여유롭다.



  오래된 철길을 달리자 수많은 풍경을 지나쳐갔다.

 

  차체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팬터그래프도 객실에서 보이는 건 일부분이다. 거리를 두고 세웠을 터인 철기둥들이 오밀조밀 밀착한 것처럼 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울타리들 사이로 이름모를 역이 스쳐지나갈 때면 간간이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얼굴도 이름도, 살아온 시간도 알 수 없는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유리로 나뉘어진 두 세계에 차이점이 있다면 소리일 것이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 덕에 전력질주할 기회를 잡지 못 하는 신칸센이지만 그 소음은 무시할 만한 게 못 된다. 230km/h에 달하는 평균시속은 폼이 아니어서, 승강장에 선 군중들 중엔 큼지막한 헤드셋을 걸친 사람이 적지 않았고 몇몇 아이들은 귀를 틀어막기도 했다. 

 

  그에 반해 객실 내부는 조용했다. 이따금 홀더에 끼워둔 음료수병에 잔물결이 일어날 뿐, 진동도 소음도 차내방송에 지장이 없을만큼 억제되어 있다. 겉으로는 사나우면서 속내는 따뜻하다니, 이 현대문명의 상징은 이상한 곳에서 청개구리 심보를 발휘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사 짱을 닮았거나.

 

  이런 환경에서는 자그마한 소리도 크게 들린다.

  공공장소에서는 정숙하는게 에티켓이지만, 혈기왕성한 10대들이 지킬 리가 만무.

  한껏 낮춘게 분명한 목소리들은,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또렷이 들려왔다.

 

  “정말 비슷하네. 얼굴도 분위기도 유키노시타 양 판박이잖아?”

  “신학기 첫날에 찾아왔었다는게 저 사람이야?”

  “확실해. 점심시간에 찾아와서 유키노시타 양을 불러냈어.”

  “그것도 무려 도시락을 나눠먹자는 이유로!”

  “수, 수제 도시락?! 대단해······.”

  “거기에 소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같은 부활동이구, 저번 문화제 때도 같이 행동했다고 해서······.”

  “심상치 않은걸.”

  “그치?”

  “어떤 관계인 걸까? 저 두 사람은.”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소곤거림.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당황하는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저음이 끼어들었다.

 

  “여, 어서와.” 

  “······대체 무슨 상황이야?”

 

  J반의 유일한 남학생인 혼모쿠는 문가에 위치한 3인석에 앉아 있었다. 넓따란 좌석을 홀로 독차지했지만 여학생들이 가득한 이 객실에서는 격리구역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본인도 익숙한지 혼모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갈까?”

  “어?”

 

  객실 통로를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한다. 한 칸씩 이동할 때마다 삐져나와있던 얼굴이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데 흡사 지하철 개찰구의 가림막을 연상케 했다. 따라오라는 뉘앙스였지만 쏟아지는 시선들을 마주하자 쉬이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거북하다. 문 앞에서는 그렇게 허세를 부려놓고도 아직도 요 모양이다. 어떡하지, 이대로는 유키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는데.

 

  그런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듯 유키노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객차의 중간에 위치한 대면좌석이었다. 유키노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창가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옆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아무래도 앉으라는 뜻인가 보다.

 

  얼떨결에 착석하자, 수많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번뜩인다. 뭐, 뭔데, 대체······. 본능적으로 퇴로를 찾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일한 통로조차 막혀버리고 말았다.

 

  “실례할게.”

 

  통로쪽 좌석에 앉은 혼모쿠가 팔걸이에 올려둔 손에 턱을 얹었다. 

  꼼짝없이 포위당한 셈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양옆에 앉은 이 두사람은 J반에서의 유이한 지인들로 문화제 때도 호흡을 맞춘 동료들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보다는 낫고, 인과야 어쨌든간에 손 하나가 아쉬운 건 내 쪽이니까.

 

  그나저나 3인석에 앉게 될 줄은 몰랐는걸. 여기는 리얼충들이나 앉는 곳인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다소 큰 속삭임이 튀어나왔다.

 

  “혼모쿠 군도 아는 사이인 걸까?”
  “글쎄, 실행 위원이긴 했는데······.”

 

  반사적으로 쳐다보자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사라지는 소녀들. 워낙 순식간이었는데다 꺄르륵 거리는 고음이 비슷해 보여 누가 한 말인지 특정할 수 없었다. 

 

  “나 있지. 예전부터 혼모쿠 군을 괜찮게 봤거든? 다른 반 남학생, 아니 전교생과 비교해봐도 뒤지지 않는다구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까······.”

  “얘, 얘좀 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쉿! 너무 커!”

 

  이번에는 확실했다. 등받이 너머 바로 뒷자석이다.

  허둥지둥 새된 숨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정적에, 처음 말을 꺼낸 소녀의 입이 틀어막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말하는구나······. 하긴, 그럴만도 한가.

  함께 지낸 기간이 오래되지 않은 나라도 혼모쿠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는 안다. 성실한데다 배려심 깊은 미남이다. 인기가 없을 리 없지. 

 

  그렇다 해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남과 견줄 생각도 없고 견줄만큼 잘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건 대미지가 달랐다. 본의 아니게 비교대상이 된 혼모쿠도 씁쓸했는지 굳어진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유키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분노 중. 한껏 찌푸린 두 눈이 투시라도 하는 것처럼 등받이 너머를 노려보고 있다. 화난 얼굴도 귀엽다니, 내 사촌은 얼마나 완벽한 걸까?

 

  “하아······, 이래서 데려오기 싫었는데······.”

  “응?”

 

  무슨 의미인지 되물으려는 그 때 명랑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네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먼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어디선가 나타난 여자 세 명이 맞은편 좌석에 줄지어 들어섰다. 무릎이 부딪치지 않게끔 절도있는 자세로 착석하더니 영업사원을 연상케 하는 미소를 만들어낸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히키가야 군이죠?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J반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대표격으로 보이는 장발안경소녀가 운을 띄웠다. 차량 세칸 정도를 건너는 수고치곤 극진한 대접이로군. 역시 선두칸에는 뭐가 있는 걸까? 잘하면 미디엄 레어로 구운 스테이크도 나올 법한 분위기다.

 

  “어, 저기,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당연한 의문을 던져보았지만 눈 앞의 소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별 것 아니에요~. 지난번 방문 때는 겨를이 없어 대접하지 못 했잖아요? 그래서, 라는 느낌으로?”

  “대접이라니, 저는 그저 볼일이 있었을 뿐이에요. 유키노··· 시타에게······.”

 

  어색하게 바꿀 바에야 처음부터 이름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러웠으리라는,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에 후회하려는 찰나, 소녀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었다.

 

  “그래요, 유키노시타 양!”

 

  유키노가 잠자코 있는걸 보니 이름을 호명한 건 아닌 모양이지만, 그 점이 더더욱 진의를 유추하려는 시도를 미궁에 빠지게 했다. 힌트를 조금만 더 주셨으면 하는데요······.

 

  “혹시 저를 초대한 게 여러분들인가요? 좀 전에 하신 말씀도 그렇고, 유키노시타도 그런 태도였는데······.”

 

  소녀는 생글생글 웃던 미소를 거둔 뒤 자세를 가다듬었다. 간절한 바램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먹이를 앞둔 사마귀가 앞다리를 접는 것처럼.

 

  “그 전에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히키가야 군은 저희 유키노시타 양이랑 어떤 관계이시죠?”

 

  처음부터 직구잖아. 그것도 명치 한가운데를 노리는 데드볼 스트라이크다. 

  박은 쐐기를 넓히려는 심산인지 양쪽에 앉은 소녀들도 가세했다.

 

  “개학식 날 저희 반에 찾아오셨죠? 유키노시타 양에게 점심식사를 권하러.”

  “분명 그 때, 휴대폰이 꺼져 있어 연락할 수 없었다고도 하셨구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귀하께서 전날밤 유키노시타 양을 재워주지 않은 게 원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네에?! 무슨, 엥?”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가설을 시사하고 있었다. 삐끗했다가는 한없이 떨어지게될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을 깨닫자 무심코 꿀걱 침을 삼켰다. 

  

  “미안해, 히키가야 군.”

 

  고개를 떨군 유키노가 슬며시 속삭였다.

 

  “내 말실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사촌이라고 말해 보았지만 도무지 믿어주지 않아서······. 당신을 데려오기 전에도 귀띔을 줬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어.”

 

  아아, 그렇구나. 그 날도 유키노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지. 유키 짱은 자주 충전기를 꼽는걸 깜빡하곤 했었으니까. 그 사실이 부끄러워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이렇게 되돌아온 거구나. 

 

  통로에 멈추어서 머뭇거리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줄도 모르고 허세를 부린 자신에게 쓴웃음이 나온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면 돼. 어차피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도 없을 테니까.”

 

  동시에,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사과하는 올곧음에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응, 그럴게. 유키 짱.”

  “······어?”

 

  주위의 반응을 무시한채 나를 바라보는 소녀에게 몸을 붙였다. 움켜쥔 손목에는 뜨겁고도 빠른 맥박이 요동쳤다. 심장을 대변하는 온기를 얼버무리지 못 하도록, 팔걸이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유키노의 사촌오빠인 히키가야 하치만이라고 해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고,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왔어요.”

 

  지극히 간단한 진실을 전한다. 이 선제 타격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알 바 아니고, 설령 오해를 사더라도 상관없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사이에서 합의가 끝난 문제였으니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둘도없이 소중한 제 가족이에요.”

 

  멍하니 굳어있던 유키노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게 그 증거다.

 

  “하치만, 틀렸잖니.”

  “난 인정 안 할 거니까 말이야.”

  “안돼,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내가 당신의 누나야.”

  “그럴 줄 알았어.”

 

  완벽하게 예상하지는 못 했어도 반쯤은 기대했을 것이다. 우리의 관계를 드러내기를, 내 사촌인 유키노라고 말해주기를 말이다. 원하는 바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유키노는 그 선택지를 온전히 내게 맡겼다. 말없이 믿어주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준다.

 

  그러니 이쪽도 그 기대에 부응할 수 밖에.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앉아있는 소녀들의 멍한 표정이 그 너머에도 쭉, 거울과 거울을 맞닿은 것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다. 객실 내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지만, 마주잡은 손의 감촉 덕분에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쪽분들은 유키노의 친구이신가요?”
  “네? 아, 그, 저희는······.”

 

  우물쭈물하는 소녀들의 대답은 유키노가 대신했다.

 

  “수학여행에서 같이 다니게 된 조원들이야.”

  “아하, 그렇군.”

 

  묻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이런 문제에 한해서는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친구’라는 단어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좀처럼 사용하지 못하는 건 나와 유키노가 똑같이 공유하는 결점이니까.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 분류법이다. 만일 이들이 생각하는 유키노와의 관계가 단순한 조원 이상이었다면 방금의 대화는 그 관계성을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키노는 어떤가요? J반에서는 잘 지내고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 올린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과가 다르다 보니, 명색이 동급생인데도 유키노가 어떤 학창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몰라요. 제가 아는 건 오로지 저랑 있을 때의 유키노 뿐이죠. 수업시간에는 어떤지, 여러분들과는 뭘 하며 지내는지 알고 싶네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게 부끄러운지 유키노는 창밖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카락 사이 두 뺨은 계절에 맞지 않은 열기에 물들어 있다. 유키 짱 내성이 충만한 나조차도 때때로 넋을 잃고 마는 그 모습은 J반 소녀들에게도 충분히 유효했다.

 

  “그, 아마 알고 계시는 그대로라 생각되는데요······.”

  “항상 의젓하고, 문제가 생기면 솔선수범해요. 모두에게 공평하게 대해주시죠.”

  “많은 학생들이 유키노시타 양을 동경하고 있어요.”

 

  뭔가 자식의 친구를 만난 엄마가 된 기분이군. 언젠가 후배님이 내렸던 우스꽝스러운 평가는 정확했을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말이야.

 

  “예상대로네요. 확실히, 저같은 사람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대단한 사촌이죠.”

  “앗, 아뇨. 그렇지는······.”

  “그게 무슨 소리니, 하치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읏?!”

  “하지만 말이죠, 그거 아세요?”
 

  너무 꽉 쥐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참아줘, 유키 짱? 오빠가 지금 할 말이 있으니까.

  

  “이 완벽한 아가씨에게도 약점이 있답니다?”

  “······읏?!”

 

  갑작스러운 기습에 굳어버린 유키노는, 다음 순간 내가 하려는 말의 진의를 깨닫고 경악했다. 황급히 입을 막으려 해도 양 손은 단단히 붙잡힌 상태. 원망 가득 쏘아보내는 눈길에 아랑곳없이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유키노는 말이죠, 엄청 지기 싫어해요.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곧잘 진지해지곤 해서 예전부터 꽤나 애를 먹었어요. 여러분 앞에서는 자제하는 모양이지만 덕분에 그 쌓인 만큼의 몫도 제가 감당하고 있구요. 정말이지 어려서부터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몰라요.”

  “정말요?”

  “그 유키노시타 양이?”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우리 주변에 몰려와 벽을 세우고 있었다. 선두칸이라 천만다행이다. 검표원이 봤다면 통행을 방해했다며 주의를 줬을 게 분명해. 그만큼 관중들의 호응이 좋다는 반증이겠지만.

 

  “그렇지만 그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기도 해요.”

 

  이왕 시작한 일을 끝내기엔 최적의 타이밍이기도 했다.

 

  “이기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건 맞지만, 승패를 떠나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타입이니까요. 부딪친 난관이 얼마나 어렵든간에 그만두지 않았어요. 누구나가 인정할만큼 극한 상황에 몰려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죠. 그렇게 얻은 것들이 지금의 유키노가 되었구요. 능력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하치만······.”

  “이런 대단한 사촌을 두었으니 저도 더욱 노력할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가족으로서도, 또 한 사람의 오빠로서도. 유키노에게 어울리는, 최소한 흠은 되지 않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이야기따위 궁금하지 않으실텐데,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해버리고 말았네요.”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한 호흡 쉬고, 

  이번에야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토해냈다.

 

  “실컷 칭찬한 주제에 모순적이라 느끼실지도 모르지만, 요컨대 제 사촌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말이에요. 눈 앞의 목표에만 집중하다보면 혼자서만 무리하는 경우도 잦구요. 그렇지만 그건 결코 여러분을 싫어하거나 거리를 두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 모쪼록 어렵게 대하지 마시고 잘 지내 주신다면 기쁠 거에요.”

 

  마지막쯤 급격히 페이스가 흐트러졌기에 인사를 하는 척 얼버무렸다.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차라리 웅크림에 더 가까울 지경이다. 

 

  잘 부탁한다니 뭐냐고······. 니가 엄마야, 하치만? 사촌오빠고 뭐고 너무 오버했잖아!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 수 없어 굳어있는데, 새어나가는 잔열 사이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뭐, 뭐야 이 신사력?”  

  “소문 이상이잖아······.”

  “유키노시타 양이 웃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이거야 검증할 필요도 없었겠네.”

 

  여기저기서 말하는 소리가 뒤섞여 잘 들리지 않지만, 어쨌든 딱히 나쁜 반응은 아닌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야. 유키노에게 폐가 되면 어쩌나 했는데.

 

  “이야기는 끝났나 보구나.”

  “응. 어떻게든 말이지.”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가린채 등받이의 머리를 기댔다. 좋아, 어떻게든 진정됐다. 이제 칭찬받을 일만 남았군. 기대하며 돌아보는데, 웬일인지 유키노는 흡사 먹이를 발견한 고양이와도 같은 미소를 내게 향했다.

 

  “잘도 말해주었구나. 하치만.”

  “유키······, 읍?!”

 

  몹시도 익숙한 표정에 조금 전의 자신이 겹쳐보인 찰나, 한 발 앞서 유키노가 내 입을 막았다.

 

  “후후후, 가만히 있으렴.”

  

  아뿔싸.

  유키노, 엄청 히죽거리고 있어. 이건 100% 조금 전의 복수를 하겠다는 눈빛이야.

 

  “흠흠,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보충하도록 할게. 우선, 하치만이 방금 했던 말은 대부분 맞아. 누구보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왔으니 그가 내리는 평가는 타당할 거야. 단지 딱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자연스럽게 나를 여동생 취급한다는 것.”

  “읍읍?! 으읍!”

  

  몸부림쳐도 놔주지 않고 더욱 가까이 밀어붙인다. 더없이 아찔하고도 익숙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만큼 작은 음성이 속삭였다.

 

  “각인 시켜 두려 하다니 불공평해, 핫 짱. 나와의 승부를 벌써 끝낼 생각이니?”

  “읍으이오?(유키노?)”

  “당신이 앞서나가려는 만큼 나도 나아갈 거야. 당신의 곁에서 말이야. 그래야 나란히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알겠지? 눈짓으로 다짐을 준 유키노가 내게서 떨어졌다. 밀폐된 객실의 공기가 어느때보다 상쾌하게 밀려든다. 여유를 되찾은 유키노가 다음에 할 말을 고르려 턱을 매만지는데, 이번에는 보브컷 소녀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괘, 괜찮아, 유키노시타 양? 히키가야 군 엄청 괴로워 보이는데······?”

  “문제 없단다.”

  

  당연하다는듯이 대꾸한 유키노가 내 팔에 손을 얹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휘감아져 들어온다. 

 

  “하치만은 지금 기뻐하고 있는 거니까.”

  “저, 정말?”

  “물론이야. 누나이기에 알 수 있어. 동생이 정말로 싫어하는 짓은 안 하는걸.”

 

  머리칼을 헤집는 부드러운 감촉. 구부러진 손끝이 마치 인형을 손질하는 것처럼 쓸어내린다.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에는 불합리한 소꿉장난을 강요하는 아이같은 이기심도 섞여 있었다.

 

  내가 원했고 그녀가 바랬던 소중한 이기심.

  이 유치한 싸움을 재개한 건 나였으니 불만이 있을 리 없다.

 

  “네네~, 기뻐. 마음대로 하세요, 유키노 누나.”

 

  심드렁한 대꾸에도 유키노는 기뻐했다. 반듯한 이목구비를 수놓는 예쁜 미소가 J반 학생들을 홀린다. 아름다운 꽃이 으레 그렇듯이 내 사촌에게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우리집안에서는 동생은 누나꺼라고 정해져 있거든.”

  “가풍이야?”

  “가풍이야, 내 대에서 정한.”

  “신기하네.”

 

  한쪽 팔과 머리를 유키노에게 잡혀 있었기에 도망칠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 비틀어도 뒤에서 안기듯이 기대는 것이 고작이다. 딱히 싫지도 않고, 기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깰 수도 없어 힘을 빼고 몸을 맡기는데, 줄곧 옆자리에 앉아있던 혼모쿠와 눈이 마주쳤다.

 

  “고맙다. 너라도 있어서 살았어.”

 

  혼모쿠마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아마존 한가운데 떨어진 조난자 신세였겠지. 일부러 자리를 옮겨준 것도 통로쪽 자리를 막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과연 청일점,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아니, 음. ······그래.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쑥쓰러웠는지 혼모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으음, 감사의 표시가 과했나? 조금 부담을 끼쳐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팍팍 첨가한 존경심이 문제였던지.

 

  국제교양과의 담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부분의 화제는 나, 히키가야 하치만.

  취미나 특기에 잘하는 과목, 나아가 함께 겪었던 추억들도 하나하나 꺼내 늘어놓는다. 동급생들에게 나를 보여주며 이야기하는 유키노는 품에 안은 인형을 자랑하는 어린아이같았다.

 

  둘이서만 있을때도 보기 드문 높은 텐션에 좌중이 놀란 것도 당연지사. 

  아까전의 반응으로 보건대, J반에서의 유키노는 다소 다가가기 어려운 아가씨같은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었을 테지. 이처럼 소탈하고 장난기 가득한 면모는 알지 못 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적지 않은 학생들이 눈을 꿈뻑거리며 색다른 갭에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주의깊게 관찰했지만 다행히 부정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겉과 속이 다르다며 오해받았던 예전과 달리, 순수함은 긍정적인 매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용기를 낸 보람이 있는 가치있는 승리였다.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도착 방송이 흘러나왔다. 출입구 위에 설치된 전광판이 정차역을 알린다. 운집해 있던 학생들도 저마다의 자리로 흩어져 이야기도 자연스레 막을 내렸다.

  

  “도착했네, 핫 짱.”

  

  창틀에 몸을 붙인 유키노가 바깥을 가리켰다. 어깨에 기대어 바라보자, 선두칸의 창문 너머로 막 들어서기 시작한 교토역이 보였다. 지나쳐왔던 역과는 다른 우리들의 진정한 종착지, 지금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바다도 맥스커피도 없는 옛 도시.

  모든 게 치바와 반대지만 그럼에도 묘한 향수가 느껴지는 땅이다.

  그 그리움을, 잡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xxx

 

  “자, 핫 짱, 니 짐.”

  “고, 고마워, 사 짱······.”

 

  신칸센에 타기 전만 해도 가벼웠던 가방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교토는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 걸까?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데다 다리까지 떨리는게 제법 그럴듯한 가설일지도 모른다. 결코 내가 운동부족이라던가, 전동차 세 칸 거리를 뛰어왔다고 탈진해 버려서가 아니다. 

 

  앉아서 쉬고싶었지만 마땅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언뜻 도쿄와 그리 다르지 않은 승강장은 시간에 떠밀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잘도 이 고중력 속을 뛰어다니는군. 다들 초교토인이라도 되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캐리어로 들고 오는 건데. 바퀴가 달린데다 튼튼해서 아무데나 설치 가능한 임시의자로 사용할 수 있거든. 뭐든 경험해봐야 아는 법이구나.

 

  “왜 이렇게 늦었어?”

  “아, 그게 좀······.”

 

  팔짱을 낀 사 짱이 묻지 말아줬음 싶던 화제를 꺼냈다. 형식만은 질문이지만 히죽 휘어지는 입꼬리가 심상치않다.

 

  “제법 재미있었나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놀다 올 정도면?”
  “놀기는 무슨, 유키노의 장단에 농락당한 것 뿐이야. 하도 당연하다는 듯이 놀려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J반 차량에서 내렸지 뭐야? 엄청 식겁했다고······.”
  “오버하기는. 설마하니 내가 네 짐을 놓고 내렸을까봐?”

  “그건 고마워.”

 

  사실 막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았다. 종착역에 도착한 이상 어차피 신칸센은 멈추어 있을 테고 가방을 회수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도카이도 신칸센의 종점은 교토가 아닌 오사카라는 것이다. 유키노에게 그 사실을 들었을 땐 정말이지······.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는 게 그런 감각이었을 줄이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긴장으로 굳어버린 몸을 풀고자 쭈욱 뻗는데 무언가가 손끝을 간질였다.

  반사적으로 붙잡자, 보들보들한 감촉이 손바닥을 덮었다.

 

  “닦을래, 하치만?”

  “아, 고마워. 토······.”

 

  아차 싶어 멈추었을 땐 늦은 뒤였다. 찰나의 순간 눈동자를 스쳐지간 실망감이 또렷이 보였으니까. 기껏 말을 놓기로 했으면서 또다시 성으로 부르려 하다니, 버릇이란 참 무섭다니까.

 

  “······아니, 사이카.”

  “응! 자, 여기.”

 

  금새 표정을 바꾼 사이카가 스포츠 타올을 건넸기에 얌전히 받아 이마를 문질렀다. 잠깐 식은땀이 난 정도라 타올까지 쓸 필요는 없지만, 성의룰 무시하는것도 미안한 일이겠지. 젖은 머리칼을 닦아내자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옛 도시의 가을바람이다.

  계절을 생각하면 점점 더 추워지겠지. 한 달쯤 지나면 겨울이 올 테니까.

 

  막연한 시간도 금방이다. 하루 이틀 흘려보내다보면 모든 게 끝나는 계절이 오고 만다. 살을 에는 칼바람은 대비하지 않은 자를, 지나가버릴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를 에워싸 난도질할 것이다.

 

  그 때 가서 후회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슬슬 출발하려나 본데?”
  “응, 학생들이 모이고 있어.”

  “우리도 가자.”

 

  일정표에 따르면 이제부터는 반별로 준비된 버스에 탑승해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게 된다. 사위를 둘러보니 학생들은 일찌감치 제 반을 찾아 모이는 중이었다. 출발하기 전에는 인원점검이 필수지. 나야 출석번호 끝자락이니 상관없지만 사 짱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빠르게 발을 놀려 F반 행렬의 끝에 따라붙었을 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대합실에 울려퍼졌다.

 

  “아아, 잠시 주목해 주겠나?”

 

  히라츠카 선생님???

  문화제 고문도 모자라 인솔교사까지 맡으셨던 거에요? 시험문제 만들 시간이 있긴 했어요? 

 

  안쓰러움과 존경심, 두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무척이나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기요미즈데라와 그 인근을 방문할 예정이었다만, 조금 변동사항이 생겨서 말이다.”

 

  두 어번 헛기침을 하며 손에 쥔 종이를 들어올렸다.

 

  “3박 4일 중 교사가 대동하는 일정은 오늘 하루 뿐인데,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부족하지 않냐는 의견이 나왔거든. 아무렴, 수학여행도 학교 공부의 일환이지. 이왕 오게 된 교토, 교과서로만 보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며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일정을 조금 타이트하게 수정하고 싶은데······.”

 

  우우 에엑 이잉 히잉 같은 다종다양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태도의 차이라고 말해두겠다. 

  하기사 학생들이 반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수학여행의 정의가 어떻든간에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이벤트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통제는 한껏 여행 기분으로 달아오른 10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당사자 또한 모르지는 않을 터, 이러한 일처리 방식은 어느모로보나 히라츠카 선생님 답지 않다.

 

  빤히 보고있는걸 눈치챘는지 히라츠카 선생님이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장난스러운 미소에는 걱정일랑 접어두라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뭐, 진정하거라. 대신이라긴 뭣하지만 이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메리트를 제공할 생각이니까.”

 

  웅성거림을 멈춘 학생들이 호기심과 미심쩍음이 뒤섞인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 조금 아래, 기요미즈데라의 반대편으로 가면 후시미이나리가 있다. 그 유명한 센본도리이 신사가 말이지. 그쪽 주차장에 자리가 있는 모양이라 지금부터 거기로 갈 생각이다만······.”

 

  생각할 시간을 주듯 뜸을 들인 뒤, 히라츠카 선생님은 말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떻지?”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기보다는 그 형식에 의문을 가진 모양새였다. 일견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뉘앙스로 들렸지만 결국 일방적인 통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그렇다면 부정해야하나? 아니, 학교측이 강행하려는 시점에서 부정에 의미가 있을까?

 

  서로의 눈치만 보며 시간이 흘러가자 하야마가 총대를 맸다.

 

  “그건 즉, 기존 일정은 취소라는 건가요?”

  

  기요미즈데라가 공식 일정에서 배제된 것이냐는 확인이었다. 그렇게 되면 희망자들은 나머지 날의 시간을 쪼개 개인 단위로 방문하게 되겠지. 교토의 대표적인 관광지인만큼 마다할 사람은 없겠지만 바로 그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도로가 좁기로 소문난 교토에서도 기요미즈데라의 접근성은 좋지 못 하다. 철도 역에서 한참을 떨어져 있는 걸로 모자라 참배길까지 이어진 좁은 골목길 탓에 자동차가 드나드는것도 어렵다. 그렇다고 거리가 가깝냐 하면 그것도 아닌지라 둘째날까지 묵게 될 숙소에서는 거의 1시간 가량을 걸어가게 된다. 심지어 셋째 날 숙소인 아라시야마와는 완전히 극과 극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선선한 가을 날씨에 조금 걷는 것 정도는 문제 없고, 평지에서 하차해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기요미즈데라를 즐기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경우 절 구경이 끝난 다음의 동선이 애매해진다. 아래로 내려가자니 후시미이나리와 토후쿠지 정도인데, 그마저도 오늘 방문하는 이상 선택지에서 제외된다. 대부분의 주요 관광지가 북서쪽에 몰려 있으니만큼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니, 결국 쓸데없는 발걸음을 강요받는 셈이었다. 

 

  차라리 첫날을 자유행동일로 부여했더라면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이곳 교토역에는 시내의 각 관광지로 연결된 버스 터미널이 있으니까. 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니시혼간지도 있으니 거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었을 테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훨씬 나은 대안이 떠오를 정도니, 알뜰하게 여행해야하는 학생 입장에서는 낭비라고 생각되는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착각을 해버렸으니까.

 

  “아니, 그래서야 아깝지. 버스대절도 공짜가 아닌데 아깝지 않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두 군데 모두 간다. 먼 곳부터 공략하는 건 여행의 기본이기도 하고.”

 

  그래, 히라츠카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기존일정을 취소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변동’과 ‘변경’의 차이로 학생들을 낚다니 과연 현대국어 교사. 

 

  “아직 오전이니 서두른다면 정오를 지날때쯤 후시미이나리 구경을 마칠 수 있을 거다. 점심식사가 조금 늦어질 수도 있지만 그 부분에서는 양해를 구하고 싶구나. 그 대신 토후쿠지를 포함해 기요미즈데라 주변까지도 확실히 에스코트 해주도록 하마. 좁디좁은 시내버스 안에서 다른 승객들과 부대낄 바에야 우리끼리 편하게 다니는게 낫지 않겠니?”

 

  능수능란한 말솜씨에 어느덧 학생들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괜찮은걸요? 저는 찬성입니다.”

 

  하야마의 맞장구에 힘입어 히라츠카 선생님이 마무리를 지었다.

 

  “결정이군. 그럼 이제 버스를 타러 가 볼까? 너무 소란피우지 말고 따라오도록.”

 

  이야기가 잘 되어 다행이군. 다른 곳은 몰라도 기요미즈데라는 빠뜨릴 수 없는 스폿이었거든. 미뤄지면 다른 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개별로 가기에는 목적이 너무 뻔한 곳이기도 하고.

 

  출발신호가 떨어지자 J반을 시작으로한 무리들이 차례차례 줄을 지었다. 뒤따르는 얼굴들은 여행의 기대감과 흥분으로 충만하다. 행렬의 선두, 순백의 가운자락을 나부끼는 두 어깨도 평소와 다를바없이 당당하게 비춰졌다.

 

  어쩌면, 평소보다 훨씬.

  승강장 한 켠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머지 교사들이 웃으면서 잡담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후미에서 천천히 뒤따라오려는 듯 했지만 학생들을 챙기기 위함은 아니다. 그럴 의도였다면 저렇게 떼로 모여있을 필요가 없지. 인솔교사라는 이름의 욕받이는 한 명으로 충분할 테니까.

 

  결정권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다니······. 히라츠카 선생님이 재치있게 대처해서 망정이지, 학생들이 반발하기라도 했다면 뒷감당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던 걸까?

 

  도리질을 쳐 상념을 지웠다. 지금은 일에 집중할 시간이다. 어줍잖게 나설 자리도 아님은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도 내게는 중요한 목적이 있으니까.

  흥분을 가라앉히고 타겟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시미이나리면 이나리 산이지? 하아, 로퍼 신고 걷기는 싫은데······.”
  “괜찮을 거야. 산이라고 해도 작은 언덕 수준이니까.”

  “고럼고럼! 산책 수준도 안 되지!”

 

  낯빛이 어두워진 유미코를 에비나 양이 격려하자 그 틈을 놓칠세라 토베가 거들었다. 아무래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모양이군. 방금의 허세가 좋은 인상을 줬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야.

 

  “사이카, 부탁이 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기억해 이름을 불렀다. 아직은 입에 익지 않은 발음 탓에 낯선 감각이 혀끝을 맴돈다. 어쩌면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 친근한 척 굴려 한다는 불쾌감일지도 모른다.

 

  “응, 뭐든 말해 줘.”
  “······고마워. 그게 말야.”

 

  그래도 언제나 두말없이 내 말을 들어준 사이카이기에, 염치불구하지만 이번에도 의지해보기도 했다.

  그게 바로 친구일 테니까.

 

  “그것만 하면 돼?”
  “응. 충분해.”

  “알았어. 그럼 잠깐 이별이구나, 하치만.”

  “고작 20분 정도일텐데 그정도까지야.”

 

  피식 새어나온 웃음을 참으며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좀 있다 보자.”

  “응, 수고해 줘.”

 

  인파를 거슬러가는 사이카를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소록 스크롤을 내리는데 옆에 서 있던 사 짱이 불쑥 끼어든다.

 

  “토츠카는? 다른 친구랑 같이 간대?” 

  “뭐, 비슷해.”

 

  미리 저장해둔 내용을 확인한 뒤 종이비행기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마치 자기가 눌리기라도 한 양 움찔거리는 당고머리. 누구보다도 여고생다운 현역 여고생 유이가하마는 몸을 반쯤 옆으로 틀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가슴팍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라앉힌뒤, 슬쩍 이쪽을 곁눈질한다. 첩보영화에서나 볼법한 비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아니, 너무 긴장했잖아, 유이가하마. 진정하라구!

 

  “유미코, 히나, 나는 사키 짱이랑 같이 앉을게!”

 

  지시한 입장에서 이런 말은 뭣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티나게 행동하지 않았나 싶다. 하다못해 몇 초 정도는 뜸을 들여줬으면 했는데······. 뭐, 됐나. 아슬아슬하게 허용범위다.

 

  “사키사키랑?”

  “응! 오늘부터 같은 방을 쓰기루 했잖아! 버스에서두 두 명씩 앉아 가면 딱일 것 같아서~.”

  “······그래?”

 

  거리가 먼 탓인지 어떤 대답이 나왔는지는 듣지 못 했지만, 쪼르르 뛰어오는 유이가하마의 밝은 얼굴로 보아 무사히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사키 짱! 같이 앉아서 가자!”

  “어? 나랑? 아니, 난······.”

  “됐으니까~.”

 

  차마 뿌리치지 못 하고 주춤거리던 사 짱이 이쪽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그럼 핫 짱은······.”

  “힛키는 괜찮으니까! 자, 빨리!”

  “자, 잠깐!”

 

  걱정인지 부러움인지 알 수 없는 애절한 단말마만을 남긴 채 내 친구는 F반의 여성진 속으로 질질 끌려갔다.

 

  걱정 마, 사 짱. 이쪽도 무진장 껄끄러운 사람과 동행할 예정이니까. 나도 가능하면 너랑 같이 앉고 싶었어.

 

  “이게 무슨 일이여? 히키가야 스승님이 부르신다길래 오긴 했는데.”

 

  유이가하마가 남기, 아니 두고 간 토베가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처럼 가벼운 모습이지만 목소리를 낮춘걸로 보아 대강의 사태는 짐작한 듯 했다. 그건 그렇고 스승님이라니, 그 낯간지러운 호칭은 언제까지 쓸 생각인데?

  

  “교토에 도착했으니 슬슬 시작해야지 싶어서.”

  “시작하다니, 뭘?”

 

  이 녀석, 진심인가?

 

  “너 말이다······, 에비나 양이랑 잘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잖냐. 지금부터 밑준비를 해놔야지.”

  “뜨헉, 지, 지금부터?! ”
  “3박 4일이래봤자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적어. 특히나 너네 그룹은 더 까다롭지. 여러 사람이 함께할수록 둘만 떼어둘 구실을 만들기도 어렵잖냐. 이런 때일수록 빠르게 계획을 세워둬야 해”

  “그, 그렇군. 이해했어. 내 일인데 내가 우왕좌왕해서야 안 되겠지. 그럼 난 이제 뭘 하면 될까?”
  “우선 버스에 타고난 뒤 얘기하자. 적당히 뒷자리에 앉을테니 자연스럽게 따라와.”

  “오케이~.”

 

  단순하기에 회복이 빠른걸까? 망설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말끔한 상태로 부활했다. 딱히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다. 막연히 기다려왔던 일이 눈앞에 닥쳤을 때 긴장되는 것은 당연하고, 짝사랑이면 더더욱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쓸만한 구석이 다 있군 그래.

 

  버스에 오르자 바로 앞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중간 통로를 사이에 두고 문화제 연극의 주역과 실무진들이 앉아 있었다. 잡담을 나누는 사이카와 하야마의 뒤엔 엑스트라였던 야마토와 오오오카가 있었고, 에비나 양과 누나 뒤에는 유이가하마와 사키가 자리한 구조다. 단지 성별에 맞춰 나눠앉았을 뿐 별다른 의도는 없었을텐데도 절묘하리만치 직급순처럼 보이는 배치도였다.

 

  어느쪽 할 것 없이 시선이 몰렸지만 빈자리를 찾는 척 무시했다.

 

  슬쩍 둘러보니 뒷좌석은 대부분 비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저출산으로 인한 학생 감소가 원인, 정원을 채우다못해 다른 반 버스에 업혀가던 시절은 지난지 오래다. 장시간 주행이 아닌이상 교사의 눈을 피해 숨어있을 이유도 없고. 공연히 하차시간만 길어질 뿐이니까.

 

  즉,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소리다.

  적당한 자리에 들어가 자세를 낮춘다. 입구에 서 있던 교사가 들어오자 이윽고 가벼운 진동이 내부를 휘감았다. 덜덜 떨리는 엔진소리에 맞추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토베, 만약 네가 에비나 양과 데이트를 한다면 어딜 가고 싶어?”

  “가, 갑자기? 너무 갑작스러운데”

  “꼭 짚고 넘어가고 싶거든. 고민하지 말고 당장 떠오르는걸 말해주면 돼.”

  

  요점은 서로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겠지. 가고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뒤 서로의 니즈가 합치되는 곳을 찾는다. 누구든 자신과 비슷한 사람, 닮았다고 느끼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공통점을 찾아 말문을 트고 동시에 타협점을 조율해낸다. 

  연애상담이라기보다는 경영 컨설팅에 가까운 방식이로군. 

  단순한 감은 있어도 부족한 경험으로는 이것이 한계였고, 그 이상은 내가 조언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지금 던진 질문은 일종의 성격 테스트인 셈이다. 자, 과연 토베는 어떤 식으로 나오려나?

 

  “어, 음, ······수영장?”

  “······바보냐?”

 

  사귀기도 전부터 큰 꿈을 꾸고 있잖아, 이거 꽤나 힘들겠는걸?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야. 첫 데이트로 가기에는 엄청 부담스러운 곳이라고.”

 

  에비나 양이 리얼충 그룹이긴 해도 쉽사리 맨살을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본인의 성향만으로 따지자면 음지 쪽에 가갑다. 반에 한둘쯤 있는 독특한 취향을 팍팍 어필하는 여고생. 누나만 아니었다면 실제로도 그러했을 테지.

 

  “다른 곳은 없어? 왜 하필 수영장이야?”
  “이유는 딱히 없지만······, 그 뭐냐, 노래방이나 카페 같은 곳은 항상 다같이 놀러가니까, 둘이서 있을 땐 프라이빗하게 놀고 싶달까?”

 

  물러, 너무 무르다고 토베.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수영장은 꽝이야. 돌이킬 수도 없는 나락의 함정 속으로 떨어지는 거라고.

 

  데이트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의식이다. 짬을 내어 약속을 잡고, 공동의 시간을 보냄으로써 호감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맛집이나 가게, 동선 따위를 며칠에 걸쳐 조사하고, 입고갈 옷이나 머리 모양 따위를 아침부터 고민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기애愛의 표현이며, 동시에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함일 것이다.

 

  첫 데이트라고 한다면 그 기대치도 배가 될 터. 부담과 걱정도 비례해서 올라간다. 안 그래도 신경쓸 게 많은 여자들인데 안경이나 화장, 공들여 준비한 옷을 전부 벗고 만나달라니. 갑옷과 방패 없이 전쟁터로 몰아넣는 것과 다름없었다.

 

  계절상으로도 넌센스인데다 의도도 불순.

  인생에 한 번 뿐인 소중한 추억울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선 안 돼.”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정말로 사귀고 싶다면 먼저 에비나 양을 제대로 봐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곳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 떠들썩한 곳보다는 뭐랄까, 좀 더 조용한 곳도 많을 거잖아?”

  “그, 그런가? 엄청 어렵네. ······예를 들면?”

  “이케부쿠로를 가 봐라. 분명 좋아할 거다.”

  “이케부쿠로면 도쿄잖아? 거기가 조용한 동네야?”

  “어······, 좀 다른 의미론 시끄럽기는 하지만, 에비나 양에게는 딱이지.”

 

  이유는 묻지 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몸을 일으킨 토베가 버스 앞쪽에 눈길을 주었기에 나도 고개를 내밀었다. 흐음, 역시 멀어서 잘 안 보이네. 중간에 앉은 학생이 너무 많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르겠다. 유이가하마가 알아서 하겠지. 사 짱이 잘 버티기를 바랄 뿐이다.

 

  버스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인파가 늘어난 것을 보니 근처까지 도달한 듯 했다. 잠시 정차한 뒤 차례에 맞추어 주차장에 들어섰다.

 

  앞좌석에 올린 손을 거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데, 슬슬 앞자리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토베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걱정 마라. 이케부쿠로는 아니지만, 여기도 제법 좋은 포인트가 많거든. 힘 닿는데까지는 서포트해 주마.”

  “어어······ 뭐, 딱히 그걸 걱정하는 건 아닌데······.”

  “엥? 그럼 뭔데?”

 

  답지않은 망설임에 묘한 이질감이 스며든다.

 

  “에비나 양에 대해 잘 아는구나 싶어서.”

 

   불안이라기보다는 초조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사뭇 진지해보이는 어조에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토베 너도 알다시피 우리 누나랑 에비나 양은 절친이잖아? 같이 살다보니 이것저것 주워들은게 많아서.”

 

  왜냐하면, 나도 그랬었으니까.

 

  “엉?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하치만 스승님은 유미코 양이랑 남매였지~. 아하하, 그래, 그랬던 거구나.”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는 모습은 완전히 평소대로의 토베였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해 열이 올랐던 모양인지 공연히 셔츠 앞섶을 잡고 펄럭인다.

 

  분위기가 어색해져 버렸네. 우리 F반이 하차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하는데 말이야.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엉? 뭔데뭔데?”

 

  시간을 때운다는 핑계로 짓궂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제법 열심인 것 같은데, 어쩌다 에비나 양을 좋아하게 된 거야?”

  “왜냐니, 그야······.”

 

  보일 리 없는 먼 곳을 바라본 토베는, 들릴 리 없는 비밀을 감추듯 좌석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쩌다보니, 랄까?”

  “······그래.”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우연과 모호함이 있으니까. 한 번 좋아져 버리면 그 사람의 모든점을 긍정하게 된다. 얼굴이나 목소리,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게 보이기에, 이유도 시기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운이 좋아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이고.

 

  “헉, 우리 반도 내리나 보다. 먼저 가 볼게, 하치만 스승님!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네.”

 

  이제는 부정하기도 지쳐, 쓴웃음을 지으며 의뢰인을 배웅했다.

  우당탕탕 기세좋게 달려가는 토베였지만 역시나 담임의 눈에 띄이고 말았다. 차 문이 열리기 전에는 일어나지 말라는 교과서적인 훈계. 꾸지람을 받은 토베가 시무룩해지자 차안에는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문이 열리고 후끈히 달아오른 열기는 우주공간으로 분출하듯 빠져나갔다.

 

  주차장에 내리자 높은 하늘 아래 붉게 물들어 가는 이나리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완연히 가을에 접어드는 시기. 그 중에서도 교토 단풍의 고즈넉함은 지나간 시대의 유산과 잘 어울린다. 낙엽 지는 계절과 맞추기 위해 중간고사를 앞당기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도 탁 트인 공터에는 학교의 이름이 적힌 수많은 버스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에 맞추듯 각양각색의 교복무리가 이나리 신사 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흐음, 그나저나 이쪽 학교 교복들은 영 구분이 안 되네. 디자인도 비슷한데다 춘추복의 특성 때문인지 어두운 색이 많다. 교토라고 하면 좀 더 고풍스러운 이미지였는데 말야.

 

  혼잡을 방지하기 위해 한 반씩 거리를 두고 출발했다. 학생들 뿐만 아닌 일반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드는 곳이다. 출구에서 나오는 인파 중에는 마치 들으라는 듯 스포일러성 발언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지만 애써 무시한채 발걸음을 옮겼다. 성역의 입구는 좌우로 늘어선 여우상 사이에 뚫려 있었고, 길게 늘어선 붉은색 터널 끝에는 회색빛 돌계단이 하늘로 뻗어 있었다.

 

  위쪽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리저리 꺾이는 길은 쉽사리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쯤 정상에 도착했겠지. 이동순서로 생각해보면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만나기 힘들 것이다. 

 

  괜찮을까? 

  가파른 경사는 아니지만 제대로 쉬지 못한 건 유키노도 마찬가지일 텐데······. 신칸센에서 만났을 때는 괜찮아 보였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한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유키 짱이 들으면, 분명히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구 화를 내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알면서도 걱정되는게 오빠인걸.

                                                

  신에게로 향하는 엄숙한 참배길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번뇌를 되풀이했다. 

 

xxx

 

  올라간 길로 내려올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정상에 올라가기까지 유키노를 만날 수 없었다. 어쩌면 지름길로 간 것일지도, 유키노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니까. 희미한 가설을 이정표 삼아 요쓰쓰지 갈림길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인적 드문 산길을 쭉 내려가다보면 토후쿠지로 이어지는 주택가가 나온다.

 

  한달음에 도착했지만,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절에서도 유키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교토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천통교의 한창 때 단풍만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간을 죽이다 산에서 내려온 F반과 합류했다. 느슨해진 여행 분위기 덕분인지 다행스럽게도 내가 사라진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스텔스 힛키가 제대로 발동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하기사 고등학교 수학여행에 이래저래 통제를 가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하다.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때 J반이 탄 버스는 출발한 뒤였다. 출구로 이어지는 긴 행렬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생긴 빈 자리를 연이어 들어오는 버스들이 채워넣는다. 로테이션이 참 칼같이 진행되는군. 주차장에서 시작해 주차장으로 끝나고, 기념사진을 마친 후 다음 주차장으로 간다. 패키지 관광이란게 대부분 그런거지만.

 

  교사들의 독촉에 버스에 오른 우리는 또다시 관광버스가 가득찬 주차장에 몸을 내렸다. 여기서 산넨자카(三年坂)를 오르면 기요미즈데라다. 인기 관광지다운 인산인해를 헤치고 나아가자 높게 솟은 붉은색 문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치만, 단체사진 찍는다는데?”

  “으엑.”

 

  올 것이 왔군. 구시대적인 집단주의의 잔재, 수학여행의 대표적인 폐해인 단체 촬영이. 사진을 받는다고 어디에 쓰겠는가? 기껏해야 몇 년쯤 묵힌 뒤 방청소나 하다 발견하게 되고, 딴짓을 할 구실로 펼쳐보는게 고작이겠지. 친한 친구끼리 짝을 지어 서는 것도 그 때가서 찾을 수고를 덜기 위함일 것이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찍고싶은 사람끼리 찍는게 좋지 않을까? 청춘의 한 페이지라는 명목하에 단체사진을 끼워파는 상술은 지긋지긋하고, 어차피 졸업하면 남이 될 사람들이 내 사진을 갖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 초상권은 어쩔 거냐고? 추억을 박제할 수 있다니 부두의식이냐?

 

  “아, 그 저기, 난 좀 뒤쪽에······.”

  “힛키 찾았다! 일루 와!”

  “유, 유이가하마?!”

  

  키 큰 남자들 가운데 숨을 예정이었지만, 앞줄에서 튀어나온 손이 나를 낚아챘다.

 

  “자, 힛키는 여기야! 사이 짱은 그 옆!”

  “아니, 난 좀 볼일이······.”

  “사키사키는 여기! 그럼 난 가 볼게!”

  “자, 잠깐!”

 

  호쾌하게 나타난 유이가하마는 그야말로 제 할말만 하고 떠나갔다. 바로 앞, 허리를 숙인 여자줄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사 짱만을 남긴 채.

 

  “······사키사키 아니라니까.”
  “······고생하네.”

 

  쓴웃음을 지으며 위로하자 사 짱이 한숨을 내쉬고는 툭툭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옆자리 비었어?”
  “응, 이리 와.”

  “실례할게.”

 

  사 짱의 키는 나와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다년간의 운동으로 다져져 웬만한 남자들보다 다부진 몸을 갖고 있다. 흠이 되진 않을거라 판단했는지 혹은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었는지 사진사도 못 본 척 촬영에 임했다.

 

  “자, 찍습니다!”

  “유미코! 치즈야 치즈! 좀 더 밝게 웃어야지!”

  “이, 이렇게?”

  “응! 셋에 포즈 잡는거야!”

  여태까지 함께 있었던 모양이군. 사 짱이 원래 있던 자리 옆으로 에비나 양과 누나, 유이가하마가 나란히 모여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걸. 저쪽에서도 보이려나······.

 

  그리고 그 뒤쪽에 위치한 하야마 그룹에선, 끄트머리에 서 있던 토베가 이쪽을 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띈 채 손을 들고······.

 

  “히키가야 스승님, 같이 사진, ······헉!”

 

  흔들기 전에, 그 자세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해석 : 무슨 볼 일 이라도?)
  “히, 히익!” (해석 : 살려주세요!)

 

  그러고는 고양이를 만난 생쥐처럼 뒷걸음질친다. 키가 큰 야마토의 그늘에 숨어 사 짱을 훔쳐보는데······. 제2의 피해자가 여기 있었구만.

 

  몇 차례의 셔터음을 끝으로 기념촬영이 끝나고, 드디어 기요미즈데라 관람이 시작된다. ······만, 입장순서는 여전했기에 이번에도 여지없이 F반의 관람은 지체되었다.

 

  “역순으로 가면 좀 좋아? 이나리 신사에서도 늦게 들여놓구선.”
  “거기까지 생각할 시간은 없었던 거겠지. 우리 말고도 관광객이 많고 말이야.”

  

  투덜대는 친구에게 어른스러운 사이카가 위로를 건넸다. 아무래도 좋지만 사 짱? 자연스럽게 우리 쪽에 합류한 거 아니니? 뭐 여태까지는 누나네 조에 끼여 있었을 뿐이고, 본래의 조로 복귀한 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멍하니 차례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내게 손짓했다.

 

  “사키, 사이카, 잠시만 기다려 줄래?”

  “엉.”

  “다녀와~.”

 

  양해를 구한 뒤 토베에게 다가갔다. 흡사 껍질 속에 숨은 게처럼 연신 뒤쪽을 흘끔거리는 것이 혹여 사 짱을 데려오지 않았나 경계하는 눈치였다. 이런이런, 제대로 겁먹었구만.

 

  “왜?”

  “아니 그냥, 준비 됐는가 해서······.”

  “문제없어. 안쪽으로 들어간 뒤 적당한 틈을 보아 포인트로 유도할 거야. 여자쪽은 유이가하마가 맡아줄 테니 남자 쪽은 토베가 맡아 줘.”

  “으엥? 모두 다? 둘이서만 가는 거 아니였어?”

  “때가 되면 노력해 보겠지만, 당장은 구실이 없잖냐.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황을 만들어 볼테니, 우선은 에비나 양과 대화를 계속할 것.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오, 오케이······.”

 

  별로 여유가 있어 보이진 않네. 긍정적인 사고 방식은 어디 놔두고 왔니? 얼마 없는 어필 포인트였는데 말야.

 

  “긴장 풀어. 그냥 평소처럼 행동해도 괜찮아. 괜히 오버하다가는 쓸데없는 경계심만 심어줄 뿐이니까. 장기전이 된다 생각하고 넓게 생각하는게 좋아.”

  “그렇긴 하지······. 고마워, 스승님. 말로 듣게 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아.”

  “뭘 이 정도로. 참, 100엔 동전은 챙겨뒀지?”

  “엉. 여러 개 남겨뒀어.”

  “잘 했어. 계속 가지고 있다가 지갑을 꺼내기 전에 건네주면 돼. 부담이 되는 액수도 아니니만큼 에비나 양도 받아들일 거야.”

  “알았어. 그런데 정말로 이런게 도움이 될까?”

  “당장의 성과를 바라고 하는 행동은 아니야. 그냥 넌지시 전하는 거지.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호의를 가지고 있어요.’라고. 그렇게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어필해나가면 되는 거야.”

  “흐음, 그렇게 쉽게 풀리려나?”
  “무작정 들이대는 것보단 나아. 생각해 봐.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며 눈치 없이 끼어드는 사람과 생각할 시간을 주고 사정을 배려해주는 사람 중 어느쪽에서 진정성이 느껴질 것 같아? 당연히 후자일 수 밖에 없어. 대신에 그만큼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전부터 에비나 양 근처에 머물 필요가 있겠지. 그 부분은 주의해서 진행해 줘.”

  “과연, 이해했어. 정말 고마워 스승님. 나 힘낼게!”

 

  조언을 새기듯 주먹을 쥐어보인 토베가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슬슬 들어가나 보다. 안에서 봐!”

  “그래, 수고해라.”

 

  힘 닿는데까지는 도와주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게 달렸으니까.

  하야마와 합류하는 뒷모습을 지켜본 뒤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합류했다.

 

  “핫 짱, 벌써 두 번째 친구를 사귄거야?”

  “그건 아닐걸. 원체 붙임성 좋은 녀석이다보니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 것 뿐이야.”

 

  실제로도 그랬다. 연애상담이니 뭐니 잘난듯이 떠들고는 있지만 이게 정말 옳은 내용인지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 한다. 유키노가 내게 보여준 헌신, 그리고 유이가하마와 잇시키에게서 들은 이상적인 남자상에 적당히 살을 붙여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흐응.”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사 짱의 성격, 나는 정말 좋아해.

 

  “그것보다, 좋은 명소를 하나 추천받았는데 어때?”

  “명소?”
  “나도 잘 모르겠지만 유이가하마네는 거기로 간다더라. 뭔가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던데?”

  “나쁘지 않네. 한 번 가 볼까?”

  “응, 나도 찬성이야.”

  “결정이로군.”

 

  계획한 대로 저쪽에서는 유이가하마가 선두에 선 모양이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나아가는 하야마 그룹을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랐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관람객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담한 불당이었다.

 

  태내 체험관. 계단을 내려가 어둠을 뚫고 사당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관광지에 으레 딸려있는 흔한 오락거리다. 여름학교 담력체험의 유료버전이라고나 할까, 말하고보니 더더욱 의미를 모르겠군.

 

  누나와 하야마가 직원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있는 틈에 토베가 잽싸게 동전을 돌렸다. 입장료를 따로 받는줄 몰랐던 일행들이 반색을 하며 받아들였다. 뭐야, 제법 잘하잖아? 실전에 강한 남자다 이건가?

 

  “그, 그럼 이제 어떡할까? 그, 들어가는 순서라던가······.”

 

  ······정정. 왜 마지막에 가서 일을 망치냐고. 대놓고 에비나 양을 쳐다보며 말하는 건 그만둬!

 

  “그렇네. 그럼 유미코랑 하야토 군이 제일 먼저 들어가. 우리는 맨 끝에 들어갈 테니까.”

 

  보다못한 유이가하마가 거들고 나섰다. 과장스럽게 두리번 거리더니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아앗! 사키사키, 언제 또 그리루 갔어! 빨리 와!”

  “그렇다네. 잘 가, 사 짱.”

  “뭐를······, 으앗?!”

 

  타이밍을 맞춰 사 짱의 등을 떠밀었다. 이래봬도 전력을 다해 부딪친 거지만 역시 사 짱, 단련한 다리는 허세가 아니라는 듯 금새 균형을 잡고는 뒤돌아본다. 배신감에 떨리는 시선을 옆에서 끼어든 유이가하마가 차단했다.

 

  “얼른얼른! 같이 입장하자!”

  “자, 잠깐만!”

 

  그러고는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힘차게 끌고갔다. 케 짱에게는 그렇게 휘둘렸으면서 사 짱은 간단히 제어다니 신기하군. 힘이 약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약자에게 약한 대신 강자에게 강한 게 유이가하마의 본모습이란 거겠지. 어머, 멋지잖아. 역시 우리 부원은 대단해!

 

  사 짱을 데려간 유이가하마가 일행의 후미에 섰다. 야마토와 오오오카는 각자의 조원들과 함께 섰으므로 토베는 자연스럽게 에비나 양과 엮이게 된다.

 

  “먼저 출발해!”

  “시간이 별로 없으니 다같이 들어가는게 낫지 않을까?”

  하야마의 반문에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 얼마 안 걸려! 그리구 여럿이 함께면 긴장감두 없어질 거라구 봐. 소원을 비는 건데 너무 쉬운 것도 그렇지 않을까?”

  “흐음, 그건 그렇지.”

 

  역시 유이가하마, 줄여서 사스가하마다. 이런 종류의 처세에는 따라올 사람이 없구만. 하야마도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을 구했다.

 

  “어떡할래? 유미코.”

  “나아는······.”

 

  끝에서 끝, 마치 기요미즈데라의 전경을 조망하는듯한 시선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비스듬히 한 바퀴를 돌아 심연의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괜찮다고 생각해. 여기도 꽤 재밌어 보이고, 들어가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 박자 늦게 반응한 하야마가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그 뒤를 따랐다. 황금빛으로 나부끼던 머리카락이 칠흑 속에서 빛을 잃자 한순간 검은색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먼저 갈게. 나중에 보자, 유이.”

  “······어엇, 아, 알았어! 조심해!”

 

  뒤늦게 대답했지만, 어깨 위로 들어올린 손은 완전히 사라진 후여서 유이가하마의 대답이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텀을 두고 남자들 조도 출발하자, 어느덧 길었던 줄도 세 팀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 순서가 된 토베는 긴장을 떨쳐내려는 듯이 격양된 억양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대박, 이렇게 어두우면 오히려 기분이 업되지~. 그치, 에비나 양?”
  “그런가? 으음······. 어둠, 어둠이라······.”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나와 유이가하마의 귀가 지향성 마이크처럼 쫑긋 세워진 순간,

 

  “이거, 하야토와 히키타니가 함께 들어갔어야 하는 게······.”

 

  에비나 양은 단 한 마디 말로 우리들을 침몰시켰다.

 

  그렇지요~.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지~. 보이즈 러브에 뇌를 지배당한 부녀자께서는 주변 동료들의 고민은 꿈에도 모른채 딴생각을 하고 계셨다.

 

  특정 주제를 던지는 선택이 역효과가 날 줄이야. 토베의 얼빠진 표정으로 봤을 떄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글렀다. 이렇게 된 이상 원초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러자면 또다시 친구들의 힘을 빌려야겠는데······.

 

  “다음 분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우! 가, 가볼 까, 에비나 양?”

  “그러자. 우리 먼저 가 볼게~.”

  “웅! 잘 갔다 와!”

 

  타겟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 말을 꺼냈다.

 

  “사 짱, 잠깐 괜찮을······. 사 짱?”

  

  콕콕 건드려보았지만 웬일인지 사 짱이 돌아보지 않는다. 아직도 삐져있는 거야? 그만 화 좀 풀어줘~.

 

  “사 짱~, 내가 잘못한 건 알겠는데, 그보다 지금 할 이야기가······.”

  “어, 어두워. 빛이 하나도 없잖아. 뭐야,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거야? 저길 들어가라고?”

  “······사 짱?”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자 사 짱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 핫 짱. 나 못해. 못 들어가겠어······.”

 

  돌아본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고, 두 팔로 감싸쥔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발작적이라 해도 좋을만큼 도리질을 친 사 짱이 슬금슬금 뒷걸음질했다. 몸통을 감싸안은 두 팔이 유난히도 연약하게 느껴졌다.

 

  아, 맞다. 사 짱은 이런 거 싫어했었지. 공포 계열의 연출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약해서, 어렸을 때도 타이시나 코마치를 끌어안고 자고는 했었다. 내 기억속의 사 짱은 5년 전이 마지막이었기에 그 동안 나아졌겠거니 했는데······. 신체를 단련한다고 해서 심리적인 부분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 짱, 이건 딱히 귀신의 집같은 게 아니야. 무서운 건 하나도 없는데?”

  “그, 그건 알지만, 그래도······.”

  “어두운건 잠깐 뿐이고, 앞으로 걷기만 하면 끝나. 봐, 사이카도 하나도 안 무서워 하잖아.”

  “으음, 난 원래부터 좋아하지만 말이야. 호러 영화같은 것도 자주 보고 있고.”

 

  정정해줘서 고마워, 사이카. 근데 지금 상황에서는 역효과거든!

 

  물론 원인을 따지자면 사전에 물어보지 않은 내 잘못이다. 작전의 진행에만 몰두한 나머지 뻔히 알고 있었던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 했으니까. 

 

  “사 짱, 일단 심호흡. 천천히 들이켜.”

  “으읏······.”

 

  안심할 수 있도록 양팔을 붙납는다. 움찔움찔 거리던 사 짱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게 느껴졌다. 호흡은 제법 안정되었지만 불안함은 여전한지 계단 아래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아졌어?”

  “······응. 그치만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같이 가면? 나랑 같이 들어가도 안 되겠어?”
  “그건······.”

 

  우물쭈물하던 사 짱이 입구를 돌아보더니, 다시 나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안 되···지는 않아. 하아, 눈 딱 감고 가지 뭐.” 

  

  조금 더 망설였더라면 만류했을 것이다. 망설임은 체념이고,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징조니까. 사 짱의 그런 변함없는 신뢰감, 나는 정말 좋아해.

 

  “힛키는 진짜루 사키사키를 잘 다룬다니까~.”

  “······그런 거 아니야.”

  

  부정한 건 어느쪽일까? 유이가하마의 짓궂은 농담에 사 짱이 얼버무렸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사이카가 정리했다.

 

  “그럼 조를 바꿔야겠네. 하치만과 카와사키 양이 먼저, 나와 유이가하마 양이 나중에 뒤따라가는 걸로 괜찮을까?”

  “그래주면 고맙겠어. 유이가하마는 어때?”
  “물론 괜찮지~.”

 

  후방을 지켜준다면 이 둘만큼 든든한 사람도 없을 테지. 교대하듯이 자리를 바꾸어 한 칸 앞으로 이동한다.

 

  “어라?”

 

  그 때, 사이카 옆에 선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힛키, 저기······.”

 

  계단 앞을 오가는 인파 중 하나를 가리킨다. 저쪽도 수학여행차 방문했는지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출구 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저게 왜? 관광객이라면 몇 번이나 봤잖아? 그러면서도 군청색 교복 디자인이 묘하게 눈에 밟혔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자켓과 굵은 선으로 포인트를 준 하늘색 조끼, 묘하게 시원해 보이는 V넥 속에 묶여있는 붉은 넥타이.

  그리고, 그 위에서 흔들거리는, 컬이 굽슬굽슬 들어간 보브컷 사이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까지.

 

  “핫 짱, 혹시 저 애······.”
  “아니, 설마······.”

  “아? 다들 눈치챘어? 있지있지, 저 교복말인데······.”

 

  불현듯 내리꽂힌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 또한 이쪽을 응시했다.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치자 설명할 수 없는 찌릿함이 등줄기를 타고 솟아올랐다. 

 

  “혹시 카······.”

  “카 짱?!”

 

  짧은 시차 탓에 마치 이어지는 말처럼 연결되었다. 소녀의 짧은 단말마같은 비명도 자연스레 꼬리를 물고 섞여든다.

 

  “하치만?! 사키?!”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유이가하마가 하려고 했던 말은 이것이었을테지.

  ‘카이힌 종합고교’의 재학생 오리모토 카오리.

  어린 시절 「카 짱」이라 불렸던 소녀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들을 기억했고, 이 낯선 땅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xxx

 

  “처음 뵙겠습니다. 토츠카 사이카라고 해요.”

  “유이가하마 유이야. 잘 부탁해!”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해. 오리모토 카오리. 편한대로 불러주면 돼~.”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카오리는 마치 키만 훌쩍 큰 것처럼 그대로였다. 싹싹한 태도하며 구김살없는 미소, 교실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내게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주곤 했던 옛 친구는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해 매끄럽게 일행 사이로 녹아들었다. 

 

  통성명을 마친 유이가하마가 자그맣게 탄성을 내지른다.

 

  “정말이다. 정말루 있었어······. 「카 짱」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마치 유명 아이돌을 만난 것처럼 위아래로 훑어본다. 얘도 참, 실례잖니.

 

  “으아~ 그 별명도 오랜만에 듣네~. 범인은 뻔하지만 말야.”

 

  째릿 눈초리를 흘긴 카 짱, 아니 카오리의 눈매가 휘었다. 흐흥~ 의미심장한 숨을 들이쉬더니 팔짱을 끼며 돌아선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여전하네, 하치만은? 주변에 온통 여자들뿐인걸?”

  “따지고 싶은 말은 많지만, 우선 가장 중요한 부분이 틀렸어.”

 

  이쪽도 소악당스러운 미소로 응수한다.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한껏 거들먹거리는 어조로 뜸을 들인 뒤 당당하게 선언했다.

 

  “사이카는 남자야.”

  “에이, 그런 뻔한 거짓말을~. ······정말로?”
  “으, 응. 남자인데······.”

 

  사이카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붉혔다. 그 너무도 아름다운(?) 자태에 카오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우리 모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 미안해. 하치만이니까, 남자인 친구가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 해서······.”

  “어이, 지금 그 말은 웃어넘길 수 없는데. 카 짱의 머릿속에서 나는 대체 무슨 이미지인 거야?”
  “그치만, 그렇잖아? ······그치?”

  “그치는 무슨······.”

  “틀린 말도 아닌걸 뭐.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또 있어? 내가 알기로는 토츠카 뿐인걸로 아는데?”

  “이, 있어! ······아마도!”

 

  날카로운 지적에 무심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몇몇 이름들이 떠올랐지만 솔직히 저쪽에서도 친구로 생각해줄지는 확실치 않다. 하타노는 후배고 혼모쿠는 직장 동료같은 관계다. 하야마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설령 그렇다 한들 사키나 카오리에게 납득시키기도 어렵겠지. 아참, 토베도 있구나. 그건 더더욱 아웃이고.


  “그, 그만 둬, 카와사키 양. 하치만이 곤란해 하잖아.”

 

  사이카는 사이카대로 문제다. 곤혹스러워 하고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도 함께 묻어났다. 채찍질 다음엔 당근이라니 이 무슨 진퇴양난이란 말인가.

 

  “유이가하마!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힛키?”

 

  마지막 아군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돌아온 건 뼛속까지 시릴만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왜 나만 성이야?”

  “······엥?”

 

  정적이 흐르는 몇 초 남짓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사이 짱이랑두 이름으로 부르는데 나는 아직 성이구, ······내가 먼저 만났는데.”

  

  그저 고개를 숙인 유이가하마의 쓸쓸한 음성만이 귓가를 때렸다.

 

  “그, 그렇지 않아!  단지 그 뭐냐, 섣불리 부르기 꺼려졌다고 할까, 아직 허락도 못 받았고······.”

  “말해줬으면, 나는 분명 괜찮다구 했을 거야.”

  “그, 그게,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내 번호두 알고 있으면서?”

  “아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줘, 유이!”

  “응! 고마워, 하치만!”

 

  응?

 

  유이가하마 씨? 그 멋진 미소는 뭐에요? 방금전까지 금방이라도 울것같이 침울하던 모습, 어디로 갔어요?

 

  “너, 너!”

  “이름으루 불러두 낯설지는 않네. 주변에서 워낙에 자주 들어서 그런가?”

  “나를 속였어······.”

  “에헤헤, 미안미안. 그래도 응. 역시 난 힛키가 좋아. 유키농이랑 세트같구, 나만의 호칭이란 느낌이 드니까. 힛키로 부를래.”

  

  내게는 이름으로 부를 것을 강요했던 주제에 본인은 별명을 고수하다니, 약삭빠름도 정도가 과하다. 빼꼼 혀를 내민 친구의 얼굴에서 낯익은 후배의 모습이 비춰보이는건 기분 탓일까? 이 이상 늘어나도 곤란하니 그만둬 줬으면 하는데.

 

  “하아, 맘대로 해.”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고, 모종의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언젠가는 넘어야지 하면서도 줄곧 선을 건드리지 못 하던 내게 손을 내밀어준 거니까.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있지있지, 힛키? 한 번만 더 불러볼래?”
  “싫어.”
  “왜에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유키농을 위해서라두 응? 좀 더 불러주라!”
  “여기서 유키노가 왜 나와. 이름으로 부르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치만! 그치만, 그치만!”

 

  쫙 펼친 두 주먹을 날개처럼 파닥거리던 유이는 그간에 담아두었던 고민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힛키가 자연스럽게 불러 줘야 유키농두 꼬실 수 있단 말이야! 아직도 유키농에겐 ‘유이가하마 양’이라 불리는걸! 슬슬 좀 난감해.”

  “유이가······, 아니 유이. 그건······.”

  “알아. 유키농의 생각두, 거리를 두려는게 아니란것두 알고 있어. 그래두, ······친근하게 불러줬음 하는걸.”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다.

  친구니까.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단지 그것을 전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운 것이다.

  혹시라도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봐, 그래서 거절당할까봐.

 

  “그러니까, ······부탁해도 될까?”

 

  이번만큼은 연기가 아닐 테지. 전레를 차치하고서라도, 저 진솔한 눈동자를 의심할만큼 모진 성격도 못 된다. 이미 형성된 친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고,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조심스러운 아이니까. 이번만은 믿어보기로 하자.

 

  “글쎄,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엣?"

 

  그러니, 이 정도는 복수 축에도 못 낄 테지. 이를테면 사소한 장난이며, 받은만큼 되갚아주는 것 뿐.

 

  “방금처럼만 하면 깜빡 속아넘어올걸? 그야 유이유이잖아? 유키노도 소중한 친구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할 거야~.”

  “우아앙! 잘못했어! 속여서 미안해! 그러니까 유이유이는 그만 둬!”

  “큭큭큭, 그렇겐 안 되지. 이제까지 쌓아온 사 짱의 원한, 전부 갚을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니까!”

  “힛키이이이이!”

  

  그럼그럼, 이래야 유이가하마 유이지. 남을 놀리고 속여먹는건 너답지 않아. 참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그만 해, 핫 짱.”

  “으악?!”

 

  뒤통수에 별이 튀는가 싶더니 몸이 앞쪽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억센 팔이 목을 휘감으며 얽혀 들어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꽈악 붙든다.

 

  “사, 사 짱, 나 숨 막혀······.”

  “그러라고 하는거니까. 넌 좀 맞아야 해. 뭣하러 착한 애를 괴롭히니?”
  “그치만 틀린 말은 안 했······.”

  “하아?”

  “끄아악!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다고!”

 

  한순간 의식이 붕 떴다가 되돌아왔다. 위험해. 상대는 프로야. 고통만 극대화되는 지점에서 절묘한 힘조절로 경동맥을 조이고 있어······. 뭐야 그거, 무서워.

 

  “사, 사키 짱?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 안 죽어.”

  “그,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카와사키 양. 하치만도 반성한 것 같고, 이제 놔주는게 어떨까?”

 

  절박하게 두드린 탭을 사이카가 알아준 모양이다. 사 짱이 굳히고 있던 쵸크를 느슨히 했다. 고개를 숙인채 귓가 바로 옆에서 속삭여온다.

 

  “거봐, 좋은 친구들이잖아?”
  “누가 아니래?”
  “그럼 그쯤하고 들어 줘. 나쁜 부탁도 아닌걸 뭐. 나는 좋다고 생각해.”

  “안 그래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고······. 사 짱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버릇 좀 고쳐주라. 우린 친구잖아.”

  “걱정 마. 내가 이러는 건 너뿐이거든.”

 

   뭔데 그건? 안 속거든? 그렇게 쑥쓰러운듯 볼을 붉혀도 안 넘어갈 거거든?

 

  “그럼 뭐, 하치만도 반성하고 있는 듯 하니, 슬슬 용서해 줄까?”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떤 사 짱이 헤드락을 풀어주었다. 시야를 가리던 머리칼이 사라지자 밝은 빛이 눈을 찌른다. 하마터면 다시는 못 볼 뻔 했군. 매일같이 내리쬐던 가을 햇살이 오늘따라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걸?

 

  그 빛의 방향을 따라가다, 지그시 이쪽을 바라보는 카오리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해, 카 짱.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우리끼리만 이야기했네.”
  “아냐아냐~. 나는 괜찮아. 응, 괜찮고말고.”

 

  카오리 역시 눈이 부신지 치켜올린 팔로 눈썹을 덮었다. 머리카락 한 줄기를 빙빙 꼬아 돌리더니, 오물거리는 입술이 말을 잇는다.

 

  “하치만은, 결국 화해할 수 있었던 거구나.”

 

  또박또박 토해내는 어조는 담담했으나 그 속에는 오래된 감정들이 복잡하게 엉겨 있었다.

 

  “유이 짱이 말한 유키농 말야, 유키 짱을 말하는 거지?”

  “뭐 그렇지.”

  “역시 그렇구나~. 그런가, 하치만과 사키도 소부고에 진학했구나.”

  “‘도’? 카오리, 유키노가 소부고라는 건 알고 있었어?”

  “아니, 최근까지는 몰랐어. 유학 간 이후로는 나도 소식이 끊어졌었거든. 그런데 얼마 전에 너네 학교에서 문화제를 열었었잖아? 거기 갔다 온 친구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 무대에서 인사했다고 하더라고. 유키노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너희들을 만나서 확실해진 거지.”

 

  당시의 유키노는 위원장 대리의 자격으로 문화제 전반을 총괄했다. 개회식과 폐회식은 물론이고 교내 순찰과 관리 업무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녔지.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외부인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로 기억된 모양이구나.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유이가하마 양은 오리모토 양에 대해서 알고 있어? 뭔가 하치만에 대해 잘 아는 분위기인걸?”

  “앗, 글쿠나. 사이 짱은 모르겠네. 그게 말이지······.”

 

  사이카가 의문을 표하자 유이는 잽싸게 행동을 취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한다. 배려심 깊은 친구가 자리를 비켜준 덕분에 옛 친구는 진솔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당당하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다고 했어. 그래서 혹시나, 혹시나 싶었는데······.”

  “카오리······.”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잘됐네, 하치만!”

 

  잦아들던 목소리가 솟구쳤다. 물기를 머금은 날숨이 뜨겁게 공기를 달군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한 것은 카오리 또한 마찬가지인듯, 우리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멋쩍음을 견디며, 분위기를 바꾸고자 운을 띄웠다.

 

  “번호라도 바꿀래? 라인도 괜찮아.”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카오리에게 내민다. 태연한 척 했지만 숨기지 못한 어색함을 증명하듯 비스듬히 쥐어져 있다. 그게 아니면 유이에게 했던 것처럼 통째로 넘겨주는 버릇이 도진 것인지도 모른다.

 

  “풉, 푸하하하하!”

 

  눈치챈 카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무슨 흉내야? 아내를 놔두고 헌팅이라니 대담한걸~.”

  “헌팅은 무슨, 그런 거 아냐. 아, 아내는 더더욱 아니고. 유키노는 아직······.”

  “어머, 나는 유키 짱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으윽?! 카오리!”

 

  그렇게나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웃어대는 카오리가 연신 눈물을 훔쳤다. 짐짓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아도 요지부동이다. 이야기가 평행선을 달리자 사 짱이 중재에 나섰다.

 

  “네네, 거기까지. 핫 짱이 놀리기 좋은 건 인정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피차 돌아가야할 곳이 있잖아?”

  

  중재가 아니라 중상모략이잖아. 누가 뭘 하기 좋다고? 사 짱 정말 이러기야?

 

  “음~, 그건 그렇네.”

  “카 짱은 괜찮아? 친구들이 기다리는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잠깐 이야기 좀 하는 건데 뭐.”

 

  거기서 납득하는 카오리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설득이 먹힌 포인트는 시간이 없다는 부분이겠지만, 최소한 앞부분은 부정해달라고.

 

  통통 옆구리를 두드리던 카오리가 이쪽을 흘깃 훔쳐보더니, 빼꼼 혀를 내밀며 미소지었다.

 

  “아이구, 배아파라~. 이렇게까지 웃는것도 오랜만이야. 하치만 덕분이네.”

  “네네, 그러시겠죠.”

  “삐졌어? 에이, 화 풀어~. 자, 번호 교환하자!”

 

  품에서 꺼낸 휴대폰을 이쪽으로 갖다댄다. 거의 동시에 사 짱도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둥글게 선 세 사람 사이 기종이 다른 세 기기가 끝을 맞댄 채 이어져 있었다.

 

  ······뭔가 이거, 특촬물에서 본 것 같은데? 서로의 변신기를 부딪치며 투지를 다지는 연출이잖아?

 

  “신기한 기분이네. 어릴 때는 우리 셋 다 휴대전화가 없었는데.”

  “그랬지. 유키 짱 말고는 없었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구나~. 감회가 새로운걸?” 

  “그만 둬. 할머니 같잖아. 카 짱은 카 짱이라고.”

  “······방금 그 말은 이상하지 않아?”

 

  라인과 전화번호 교환이 끝나자 멀리서 지켜보던 유이가 돌아왔다. 무슨 설명을 해준건지 어째 사이카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데······.

 

  “그런데 유키 짱은 어디 있어? 같이 다니는 거 아니야?”

 

  문득 떠올랐는지 카오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이 달라서 말이야. 들어 간지 꽤 됐는데 혹시 안에서 못 봤어?”

  “으음, 기억에 없네. 하긴 조금 전에 들어간 거라면 이상하지는 않겠다. 우리 조도 절 구경은 애저녁에 끝났는데, 오토와 폭포에 사람이 많아서 한참을 줄 서 있다 나온 거거든.”

 

  학업, 연애, 장수를 관장하는 오토와 폭포는 기요미즈데라의 마지막 부근에 위치해 있다. 치바 굴지의 진학교에서도 그 수준이 높다고 평가받는 국제교양과 학생들이 미신 따위에 성적을 기원하지는 않을 터.  장수를 빌기에는 이른 나이고, 연애라면 더욱 직관적인 지슈 신사가 존재한다. 어느모로 보나 매력적인 장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다니 큰일인걸. 지금부터 거기로 가야 하는데 말이지.

 

  “반이 다르구나. 하치만이 쓸쓸하겠네. 초등학교 때도 유키 짱이 없을 땐 축 늘어져 있었구, 다른 반이 됐을 때는 참 볼만했었지~.”

  “카오리,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

  “응응, 알 것 같아. 유키농이랑 화해하기 전의 힛키는 분위기가 엄청 어두웠으니까. 그치, 사이 짱?”

  “으응, 생기를 잃은 느낌이었지.”

  “······.”

 

  유이는 그렇다 치고 사이카마저 동조한다면 승산이 없다. 이럴 때는 무시가 최선이지. 입을 꾹 다문채 시선을 피하는데 킥킥거리며 웃는 카 짱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다네요, 핫 짱~. 솔직히 말해 보셔~. 지금 무진장 아쉽지?”

  “아니, 전혀.”

 

  앗, 실수. 대답해 버렸어.

  미끼를 문 카 짱이 더더욱 대담하게 들이댔다.


  “또 그러기는~. 하긴, 사랑점 치는 돌 같은 건 시시하지? 하치만에게는 이미 인생의 반려가 있으니까. 아니면 아쉬운 건 다른 쪽이려나? 이 누님께서 쭉 둘러봤는데 풍경이 절경이더라고~. 단풍 아래의 기요미즈데라를 함께 걷는 것도 제법 좋은 데이트가 됐을 텐데 말야~.”

 

  왠지 카 짱, 장난기가 늘지 않았어? 그런가, 카오리도 이제 고등학생이구나. 별것 아닌 연애 이야기에 불타오르고, 한참 누나 행세하고 싶은 나이지. 심지어 생일도 내쪽이 빠른게 딱 유키노랑 비슷하다. 말 그대로 세월이 무상하구만.

 

  “과장은 그만 둬, 카오리. 나랑 유키노는 그런 관계는 아니야. 반이 다르다 보니 학교에서도 거의 만나지 못해. 떨어져 있는 것도 익숙하다고.”

  “그렇다네요, 사 짱~. 진실은?”
  “앞부분은 노코멘트. 그래도 뒷부분은 사실이야. 쉬는 시간에도 핫 짱이 유키 짱을 찾아가지는 않거든. 뭐, 어차피 방과 후에 만날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맞아. 세 사람은 부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부활동? 뭘 하는데?”

  “봉사부를 하구 있어. 부장은 유키농이구.”

  

  이름만 들으면 환경미화, 혹은 외부 활동에 머릿수 채우기로 섭외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는 애매하지만, 여하튼 최초로 부원이 된 나조차도 이 특이한 부의 활동내용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봉사부, 봉사부라······.”

 

  카오리가 몇 차례 그 이름을 되뇌었다.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짧은 한 마디로 매듭지었다.

 

  “유키 짱 답네.”

  

  그리고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였어? 작년? 아니면 입학 전부터?”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화해 시점’을 묻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장난기가 가신 목소리에 더없이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니, 다시 만난 건 올해 봄이였어. 이런저런 사정으로 강제 입부를 당했는데, 끌려간 부실에 유키노가 있더라고.”

  “반년 정도인가. 응, 그 정도면 충분하지. 핫 짱이랑 유키 짱인걸.”

 

  히죽히죽 웃는 게 아닌, 천에 물감이 배어나오는 듯한 따사로운 미소.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친구를 바라보자 잃었던 물건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고마움을 고이 접어 간직하고, 조금은 위태로워진 배려를 이어받는다.

 

  “덧붙여 유이나 사이카도 부활동을 통해 알게 된 거야. 의뢰인으로 만나 이야기를 트게 됐거든.”

  “정말? 재밌었을 것 같아! 핫 짱과 유키 짱은 예전부터 그런 거 잘했잖아~.”

  “그 말대로야, 오리모토 양. 나도 유이가하마 양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 카와사키 양도 마찬가지고.”

  “그때까지만 해두 나나 사이 짱은 힛키네 주변 관계를 몰랐어. 사키 짱이 친구인 것두 유키농이랑 사촌인 것두. 같은 반이면서도, 유미코가 힛키의 쌍둥이 누나인 것두 처음 알았어.”

  “긴 이야기가 있었구나. ······응? 어라?”

 

  나와 사 짱, 카오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미 짱도 소부고야?”
  “그게······.”

  “수험공부, 열심히 했었거든.”

 

  요점을 빗겨나갔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둘러댔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체험관 입장을 깜빡했어. 슬슬 먼저 들어간 일행들이 나올 시간인데······.

 

  모두의 시선에 불당 쪽을 향한 그 때, 기념품을 사러 갔던 카오리의 조원들이 반대편 길목에서 소리쳤다.

 

  “카오리~! 이제 버스타러 가야 돼!”

  “으엑, 미안! 곧 갈게!”

 

  황급히 손을 들어 응답한 카오리는 예의 밝은 미소를 우리에게 되돌렸다.

 

  “그렇다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같이 구경하지는 못 하겠구나. 모처럼 만났는데 아쉬운걸.”

  “어쩔 수 없지 뭐. 이렇게 만난 것만 해도 어디야? 충분히 기뻐.”

 

  가슴팍에 모은 양손에 휴대전화를 꼬옥 쥔다. 재회에 기뻐하며, 이별에 슬퍼한다. 어쩌면 희미한 안도감도 섞여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여기서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카오리 짱네 학교는 이 다음에 어디루 가? 쭉 교토라면 함께 다니지 않을래? 우리두 내일부턴 자유행동이거든!”

  “다음? 이걸로 끝인데?”
  “엥?”
  “······엥?”

 

  쩌적, 유이와 카오리가 동시에 정지한다.

 

  “······잠깐 기다려 봐. 하치만, 너 지금 수학여행 몇 일 째야?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동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한다.

 

  “첫날이다만.”

  “엑?! 어째서?!  내일’부터’라니 모레는 주말이잖아? 설마 토요일까지 끼워서 수학여행 인거야?”
  “아니, 그렇진 않아. 치바 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은 기본 3박 4일이니까, 정확히는 일요일까지 교토에 있을 예정이야.”

  “······우와아.”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카 짱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 해.

 

  “이제 알겠네. 어쩐지 예년보다 일정을 앞당기더라니 겹치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구나.”

  “앞당겨? 너희도 그랬어? ”
  “응. ······핫 짱, 어쩌면 우리가 오늘 만난 거, 완전히 우연은 아닐지도 몰라.”

  “그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재차 커다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카오리! 진짜 가야된대두! 늦었단 말야!”

  “미안! 지금 가!”

 

  이제는 정말 지체할 수 없는지 카오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상반신만 이쪽으로 돌린 채 게걸음을 하며 치며 외친다.

 

  “하치만! 사키! 유이 짱에 사이카 군도! 만나서 반가왔어! 치바에서 만나!”

  “알았으니까 앞을 보고 걸어, 카 짱!”

  “응! 고마워! 나중에 연락할게!”

 

  힘차게 손을 흔든 카오리가 일행에 합류했다. 친구로 보이는 소녀들이 에워싸고 말을 건다.

 

  “엄청 재미있었나 보네. 시간 없다고 몇 번이나 사인을 보냈는데 정말이지······.”

  “미안미안, 좀 봐주라~.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거라서 말야~. 좀 들떠 버렸어.”

  “흐음, 동창이라······.”

  “수상한데? 카오리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내, 내가 언제······.”

  “그것보다 분명 엄마母ちゃん라고 불렸지? 그건 대체 뭐였어?”

  “그그그, 그건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아앗, 벌써 시간이?! 빨리 가자!”

 

  거리가 멀어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저쪽 여고생도 J반 학생들과 비슷한 분위기다. 톡톡 튀는 웃음소리도 서서히 잦아져, 이윽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응시하는데 사 짱이 스윽 다가왔다.

 

  “오늘이 돌아가는 날이라면, 카오리네가 여기 도착한 건 월요일이었겠구나.”

  “조금 특이하긴 해도 나쁜 선택은 아냐. 금요일쯤 귀가해 주말을 쉬는 학교가 대부분이니까. 적어도 그런 학교들과는 경쟁을 피할 수 있어.”

  “그렇지. 이상한 건 우리 쪽이지. 예약이 겹치지 않기 위해 일정을 미뤘다는데, 보통 일반인 관광객들은 주말에 더 몰려들잖아.”

  “께름칙하긴 하네······. 근데 그럼 카이힌은 우리보다 일찍 중간고사를 쳤단 말인가? 저쪽도 제법 급하게 돌아가는걸?”

  카오리는 분명 일정을 앞당겼다고 말했다. 수학여행을 가기에는 예년보다 이른 시기. 두 학교가 동시에 일을 서두르는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유이, 카이힌 고등학교의 문화제는 언제였어?”

  “웅? 문화제?”

 

  10대에 대한 정보 수집이라면 퀸 엘리자베스지. 곰곰이 생각하던 유이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나가며 대답했다.


  “우리랑 비슷했을걸? 저쪽이 한 주 빨랐던 걸루 기억해.”

  “문화제도 시험기간도 일주일씩 빨랐다는 거구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시험이야 어찌됐든 문화제가 겹치면 손해니까.”

 

  거리도 멀지 않은 두 학교가 동시에 행사를 진행해봐야 결과는 뻔하다. 잠정 고객층을 반토막 내느니 알아서 피해가는게 이득이 될 터. 이웃간의 상권(?)을 침해하지 않는 규약, 일종의 공생전략인 셈이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카 짱의 말대로 ‘우연’이 아닌 게 맞아. 다만······.”

 

  의문은 해소되었어도 여전히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남아있었다.

 

  “다만?”

  “아직은 가설이야. 하지만 아마도······.”

 

  그 때,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뒷말을 잘랐다.

  

  “뭐야? 안 들어오고 뭐 해? 한참이 지났는데.”

 

  태내 체험관에 입장한 관람객들은 순례를 마친 뒤 들어갔던 입구의 정면에 위치한 복도로 나오게 된다. 출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파, 그 선두에 선 유미코가 미심쩍은 시선을 이쪽으로 보냈다. 

 

  “아, 그, 그게······.”

  “······.”

  “아하하, 지, 지금 막 들어가려구 했는데 말이지······.”

  

  나와 사 짱은 입을 다물었고 유이가 나섰지만 변명이 되지는 못 했다. 우물쭈물한 반응에 유미코의 눈썹이 꿈틀였다.

  잠시 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찰나일텐데도 아득히 길게만 느껴지는 불편한 침묵.

  그 분위기를 바꿔준 건 뒤따라 나온 일행들이었다.

 

  “안이 생각보다 어둡더라고. 유미코가 걱정된다 해서 끝 부근에서 기다렸거든. 다른 손님들이 먼저 도착하길래 혹시나 싶어 올라온 거야.”

  

  사람좋은 미소로 누나가 생략한 말을 보충해주는 하야마.

 

  “너무 그러지 마, 유미코. 동생 군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 어쩌면 무서운 거에 쥐약이라던가······. 헛! 어둠속에 남겨진 두 남자. 공포에 질려 눈물맺힌 얼굴로 왕자님에게 안기는 유혹수. 이, 이건 된다! 크하아~!”

 

  뭐가 된다는 것인지, 코피를 뿜으며 환호하는 에비나 양.

 

  “그, 그려. 무서운 건 무서운 거지, 사실은 나도 좀 긴장했걸랑~.”

  “뭐야, 밑에서는 아무렇지 않다고 큰소리 치더라니.”

  “어쩐지 식은땀 흘린다 했어~.”

 

  그리고 여전히 떠들썩한 토베와 그 친구들이 있었다. 그나저나 방금, 두둔해주던 토베가 찡긋 윙크를 보낸 느낌이 드는데······. 단단히 오해하고 있구만. 그래도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없는 것 보단 낫다. 얌전히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그렇지. 미안.”

  “사과할 것 까지야. 하치만이 들어갈 거라 말한 적은 없잖아? 멋대로 기다린 건 우리니까.”

 

  눈썰미 좋은 하야마가 토스하자 에비나 양과 토베가 맞장구 쳤다. 야마토와 오오오카는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며 반사적으로 동조했다. 대표격으로 사과한 내게 의식이 집중되었고, 또 사키와 사이카도 함께 있어준 덕분에 유이의 이탈 또한 자연스레 묻혀졌다.

 

  결론이 내려지자 하야마는 고갯짓으로 단체 입장구 쪽을 가리켰다.

 

  “시간도 딱 맞췄군. 이제 우리가 들어갈 차례야.”

  

  본당으로 이어진 길목에는 짙은 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꾸물꾸물 모여들고 있었다. 몸이 달아오른 토베가 외쳤다.

 

  “정말이네? 뛰어가야 하는 거 아냐?”
  “서두르긴 해야겠지.”

 

  운동부 남자들을 시작으로 줄줄이 걸음을 옮긴다. 선두가 하야마라면 최후미는 우리. 거리가 벌어진 두 그룹을 잇듯 중간에는 유미코가 끼여 있었다. 에비나 양이 합류했을 때, 잠시 멈칫한 누나는 딱 한 번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도 가자.”

  “그래. 먼저 갈게, 동생 군. 다음에 만나~.”

 

  바이바이 손을 흔드는 에비나 양과, 다급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누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도 출발했다.

  귓가를 스치는 가을바람과,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말소리.

  부산스러운 소음 속에 유이가 살짝 속삭였다.

 

  “그 때랑은 반대네.”

  “······.”

 

  어깨만 으쓱한 채, 앞서 나아간 발자취를 쫓았다.

 

  xxx

 

  “그럼 스승님, 오늘은 감사했어. 수고혀~!”

  “그래, 너도.”

 

  인사를 마친 토베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양손 가득 음료수를 껴안은 탓에 계단을 오를때마다 위태롭게 휘청인다. 멀거니 지켜보며 손 안에 든 캔을 또로록 굴렸다.

 

  지금 서 있는 곳은 1층 한켠에 마련된 휴게 공간.

  취침 시간 전이라면 여기까지는 출입이 허용된다. 그러나 볼 것도 없는 로비에 구태여 내려오는 학생은 드물다. 기껏해야 벌칙 게임에 져서 심부름을 하러 오는 녀석 정도. 토베가 그러했지만, 동행을 자처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수고하라니, 감사 다음에 할 말이 아니잖아.”

 

  아무래도 토베는 내가 뒤따라가지 않은 이유를 자신과 에비나 양 둘만 있을 수 있게끔 배려해준 것이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그 때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징그럽게 촉촉하더라니.

 

  피식 웃으며 캔을 땄다. 넘실거리는 갈색 액채는 늘 마시던 빛깔과 달랐다. 당연한 일이다. 교토에는 맥스 커피가 없으니까. 그러나 진열된 음료 중 가장 달콤한 카페오레를 구입한 걸로 봤을 때 선물할 사람의 취향을 헤아린 건 확실해 보였다. 

 

  어떻게 안 거래? 교실에서 맥스 커피를 마신 적은 없을 텐데?

 

  얼마 전까지는 이름도 모르던 동급생이 자신의 커피 취향을 알고 있다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하하하, 나도 참 무슨 농담을. 우연이겠지.

 

  불길한 상상을 은은한 단맛이 도는 커피와 함께 들이켰다. 순식간에 비워진 캔을 쥐고 한 숨을 돌리는데 로비 한쪽에서 낯익은 인물이 나타났다.

  

  유난히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타난 사람은, 종일 떨어져 있었던 유키노시타 유키노.

  목욕하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채였고, 가벼운 점퍼만 걸친 소탈한 차림새였다.

  그리운 마음에 저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한달음에 달려가자, 유키노는 호텔에 딸린 선물 가게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서며 말을 걸었다.

 

  “유키 짱이 살 건 없을걸?”

  “어머, 그러니?”

 

  말투는 담담했지만 얼굴에는 꽃이 핀다는 표현도 부족할 만큼 화색이 깃든다.

  만면에 미소를 채운 유키 짱이 내게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라, 이상한다? 어깨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데.

 

  “이런 곳에서는 지역 한정 상품을 파는 경우도 있단다.”

  “타당하지만, 작은 가게다 보니 종류가 많이 없더라고. 좀 전에 둘러봤는데 전부 치바에서도 봤던 거였어. 저기도 봐. 예전에 인형뽑기 기계에 들어있던 물건이지?”

  “정말이구나. 당신이 뽑아줬던 인형도 저기 있어.”

  “한정품을 구할 거라면 조금 더 큰 가게에 가야겠는데, 시간을 내서 시내 쪽에 가 볼까?”

 

  여기서 남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카와라마치다. 대형백화점이 모여있는 교토의 쇼핑거리인데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품 샵 따위도 운집해 있다. 오락실이나 서브컬쳐 가게도 몇 군데 있으니 선택의 폭도 넓다. 분명 판 씨 인형도 구할 수 있겠지.

 

  그러나 유키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일정이 촉박하잖니?”
  “어차피 숙소 근처고, 계획대로만 하면 저녁쯤에는 시간이 비어. 쇼핑이나 야경 구경으로 가기엔 자연스럽잖아? 그런 구실로 유도하고, 그 뒤엔······.”

  “그 뒤엔, 최선을 다해 의뢰인을 도와야겠지. 당신은 그걸 위해 고민해왔으니까.”

 

  빙그레 미소짓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팔을 잡았다.

 

  “나에 대한 건 신경쓰지 마렴. 그렇게까지 인형에 몰두하는 여자는 아니란다.”

  “엇,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후후, 그러니? 그게 아니면, 남을 배려하는 당신의 상냥한 본성이 튀어나온 걸까? 정말이지 곤란한 버릇, 곤란한 남자로구나.”

  “유키노······.”

 

  어깨에 기댄채 눈을 감는 내 사촌. 가슴팍에 가져간 팔을 꼭 끌어안고 손바닥을 조물거린다. 온기를 갈구하는 그 모습은 흡사 방전된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유키 짱에게 있어 나는 충전기인 것일까? 그거 멋진데? 

  

  격조했던 건 마찬가지였기에 나도 말없이 그 온기를 받아들였다.

  잠시 뒤, 머리를 기대고 있던 유키노가 빼꼼 눈을 떴다.

 

  “그것보다도······.”

 

  한 걸음 물러나 주위를 살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내려오지는 않았겠지? 보여져서 큰일날 만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방금까지 멀쩡하던 가슴이 괜시리 쿵쾅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서늘한 로비에 있는 건 우리 두 사람 뿐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키노가 내 팔을 잡고 자판기 옆에 놓여진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가운데에 앉아 옆자리를 탁탁 두들긴다. 의미는 알고 있다. 곁에 앉으라는 말이지?

 

  “의뢰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니?”
  “글쎄.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내 대답에 유키노가 면목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 반이 달라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목소리와 같이 늘어지는 어깨. 외로워 하는 줄 알았더니 미안함도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불안했던 거구나. 본인이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없이 그저 걱정만 해야하는 자신에게.

 

  “신경 쓸 거 없어.”

 

  손등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유키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건······?”

  “토베에게 받은 커피.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보답이라나? 본의 아니게 어시스트를 해버렸거든.”
  “본의 아니게는 뭐니? 똑바로 해야지.”

  “네네. 면목 없습니다.”

 

  선선히 수긍하자 유키노는 쿡쿡 웃었고, 마주보는 나도 웃고 말았다.

  적막이 감도는 공간도 유키노와 있으면 외롭지 않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사소한 장난에도 웃음이 나와.

 

  “내일부터는 함께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반 아이들이 협조해주기로 했거든. 걱정이 많았는데 한시름 놓았어.”

  “좋은 친구들을 뒀구나. 오빠로써 흐뭇한데?”

  “그런 꼼수는 안 통해, 핫 짱.”

  “알면 좀 넘어가 주라구. 한 마디도 안 져주는 거야, 유키 짱?”

 

  어린 시절의 장난처럼, 발을 까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 때,

 

  “······칫.”

 

  현관을 나서던 히라츠카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보다, 방금 혀 찼지?

  “어째서 너희들이 여기 있는 거냐.”

  “음료수를 사러 온 것뿐인데요. 선생님이야말로 이런 시간에 웬일로······.”

 

  자세히 살펴보니 거동이 수상했다. 정장 위에 걸친 코트는 그렇다 치고, 밤인데도 뭣 때문인지 선글라스를 낀 상태다. 이리저리 눈길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더욱 의심을 부채질했다.

 

  “으, 으음······. 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 절대 비밀이다?”

 

  연거푸 주의를 주는 모습이 심히 비장하다. 첩보물의 요원처럼 코트 깃을 세운 히라츠카 선생님이 사위를 한 번 돌아본 후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지금부터······ 라면을 먹으러 가려 한다만······.”

 

  사춘기 남고생이냐구요. 근무지 이탈을 감행하는 이유가 고작 그거였습니까? 

 

  우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히라츠카 선생님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훨씬 낫네. 변장이랍시고 걸친 모양이지만, 저런 차림으로 밖에 나갔다가는 빼도박도 못하고 불심검문이다. 이거야 원, 선생님은 가끔 아이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흐음, 뭐 너희 둘이라면 마침 잘된 건지도 모르겠군.”

  “네?”

  그 아이같은 선생님이 저런 말을 꺼내면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어느 면에선 고등학생보다도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린 히라츠카 선생님이 야릇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침 잘 됐다. 입막음 대가도 지불할 겸, 너희도 같이 먹으러 가지 않겠나?”
  “엥? 저희도요?”
  “하지만 지금 시간은······.”

 

  유키노의 난처한 기색에 히라츠카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흡사 머리 위에 느낌표 마크를 띄운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입고있던 코트를 훌훌 벗어 유키노에게 휙 던져주었다.

 

  “하긴 그 차림으로는 추울 테지. 입도록 해라.”
  “엇, 아뇨. 그런게 아니······.”

  "나는 걱정 말도록. 어차피 차로 이동할 거라 밤거리를 걷는 시간은 길지 않아.”

 

  무단 외출을 권유하는 교사와 그걸 말리는 학생이라······. 서로의 역할이 뒤바뀐 느낌이 들지만, 저 기세로 봐선 멈추지 않겠지. 체념한 유키노도 얌전히 빌린 코트를 걸쳤다.

 

  “자아, 가자.”

 

  위풍당당히 구두굽 소리를 울리며 우리는 교토의 밤거리로 나섰다.

 

  xxx

 

  시라카와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던 택시는 교토예술대학을 지나 멈췄다. 그다지 높지 않은 멘션과 단독주택이 늘어져 있는 밤거리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가게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이, 이곳이 바로 그, 천하일품 총본점······!”

  “큭큭, 감동받을 만도 하지. 여기는 일일 승차권으로는 올 수 없으니 말이다. 어때? 이만하면 입막음으로는 충분하지?”
  “충분하고 말고요! 감사합니다, 히라츠카 선생님!”

 

  오히려 거스름돈이 나올 수준이다. 은사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감동에 전율하는데 뒤어 있던 유키노가 물었다.

 

  “유명한 가게니?”
  “그래. 거의 전국적인 체인점이지.”
  “그렇다면 굳이 여기가 아니더라도······.”

  

  치바에서도 먹을 수 있잖니? 유키노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 이유는 히라츠카 선생님이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맞는 말이다만, 어째서인지 치바에서는 딱 한군데 밖에 없어서 말이다. 더군다나 카시와라서 접근성도 좋지 않아. 점포 확대에 대해 본사에서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지.”

 

  카시와 시는 치바현 북서부 뿔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시작되는 곳이다. 워낙에 끄트머리에 위치해 치바 시내보다는 사이타마나 이바라키로 넘어가는게 가까울 정도. 바다를 낀 우리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도쿄를 방문하는게 싸게 먹혔다.

 

  “방문해본 결과 실제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고로 지금까지는 도쿄에 있는 직영점에 만족했었지. 허나 이곳 총본점은 천하일품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곳이지 않나. 한 번쯤은 꼭 먹어보고 싶었거든.”

  “과연, 이해했습니다.”

 

  깔끔한 설명에 유키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자.”

 

  다행히 가게 안은 한산했다.

  카운터 자리에 앉은 히라츠카 선생님은 메뉴를 보지도 않고 주문했다.

 

  “진한 맛으로.”

  “저도 진한 맛이요.”

 

  모름지기 이럴 때는 전문가의 선택을 따르는게 최선이다. 

  두 사람분의 오더를 기입한 직원분이 다음 주문을 기다리는데, 정작 유키노는 잠자코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키노?”
  “······핫 짱, 저게 국물 맞지?”

 

  고사리같은 손이 소매를 잡아당겼고, 마치 이국의 문물을 처음 경험한 외국인처럼 뒷좌석 손님이 비우고 간 그릇을 가리켰다.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무심코 애칭까지 튀어나온 상태. 초심자의 귀여운 반응에 하라츠카 선생님이 쿡쿡 웃었다.

 

  “선생님······.”

  “미안미안. 히키가야, 메뉴판을 보여주거라.”

  “네. 자, 같이 보자, 유키노.”

  “······그래.”

 

  새초롬히 고개를 돌린 유키 짱이 내 쪽으로 바싹 붙었다. 메뉴판에 나와있는 사진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하자 진중한 얼굴로 경청한다. 

 

  “······해서, 이 조합이라면 부담없이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괜찮겠구나. 그럼 이걸로 할게.”

  “너무 쉽게 결정하는 거 아냐?”

  “당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잖니.”

 

  당사자가 보증한 유키농 검정 자격증인가. 최고의 칭찬이로군.

 

  주문을 받은 직원이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남은 건 음식이 나오기 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군. 말을 많이 해서인지 목이 말라, 유리컵 세 개에 물을 채워 나와 유키노, 그리고 히라츠카 선생님의 앞에 내려놓았다. 쭉 뻗은 팔을 거두던 와중 능글능글한 시선과 맞닥뜨렸다.

 

  “······왜 그러시죠?”
  “조금 재미있어서.”

 

  히라츠카 선생님이 짓궂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정말로 남매 같구나.”

  “의외네요. 보통은 반대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남매 같지 않다고들 말하던데······.”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며 유키노가 대꾸했다. 그러자 히라츠카 선생님의 눈빛이 더욱 은근해졌다.

 

  “호오, 그 유키노시타도 세간의 풍문에는 신경이 쓰이나 보군.”

  “저에 대한 건 상관없지만 하치만이 엮여 있으니까요. 누나로서 동생의 평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누가 누냐나고, 누가.”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란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같은 방 아이들에게 ‘동생’을 만나러 가는 거냐고 질문 받았는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 아니니?”

 

  그거야 유키 짱이 한 정보 조작 때문이겠지. 그렇게나 강렬히 선수를 쳤는데 J반 학생들이 의심할 리가 없잖아. 완전히 동생으로 굳어져 버렸군. 외출=나라는 공식이 당연하다는 듯이 성립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큭큭, 여전하구만.”

 

  잔을 비운 히라츠카 선생님이 물통을 기울였다. 살짝 적실 정도로만 입술을 축이고는 살짝 진해진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 왔다는 고양감 때문일까, 혹은 이후에 대한 기대감 탓일까.

 

  “그래서, 어떤가요? 지금의 저희 모습은?”

 

  반쯤은 무심코, 그렇게 물어보았다.

 

  “응? 무슨 의미냐?”
  “‘시 짱’의 눈에는 아직도 ‘재미있는 남매’로 보이는가 해서요.”

  “······히키가야, 너.”

 

  경악에 물든 시선이 향하는 가운데 유키노가 끼어들었다.

 

  “하치만,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언제부터라고 할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1학년부터 말이냐? 어떻게······.”

  “선생님처럼 특이한 말투가 또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크헉?!”

  그렇게 이상하다고? 라며 중얼거린 히라츠카 선생님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만 웃음이 나와 어물쩍 한 발 물러섰다.

 

  “농담이에요. 물론 말투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선생님의 외양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기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그, 그래? 후후, 하긴 내가 좀 젊어 보이긴 하지. 캐주얼하게 코디한 날에는 고등학생으로 착각당하기도 하니까.”

  “아뇨, 그건 그냥 비지니스 멘트같은데······.”

  “뭐라고 했나?”

  “아, 아무 말도······.”

 

  크흠 헛기침 소리가 맹수의 포효마냥 위협적이다. 무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사촌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반응을 봐선 유키노도 마찬가지였나 보네. 언제부터야? 선생님이 ‘시 짱’이란 걸 눈치챈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단다. 두 달도 채 못 넘겼으니.”

  “신학기가 시작될 무렵인가. 미안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본의아니게 숨긴 것처럼 되버렸네.”

 

  유키노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알리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잖니. 똑같았던 거야, 우리는.”

  “그래?”

  “그래.”

 

  행위만 놓고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 어째서 그러했는가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나저나 오래도 숨겼군. 입이 근질근질 하지는 않았나? 나한테까지 말을 안 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턱을 괜 히라츠카 선생님이 물었다. 손에 쥔 물컵이 작게 흔들려, 거기서 발생한 소용돌이가 누런 조명을 반사한다.

 

  “특별한 이유는 아닌데요.”

  “상관없으니 말해 보거라. 라면이 나올 때까지 시간도 죽일 겸.”

  “······그저.”

  “그저?”

  “방금 말했듯이, ‘시 짱’이 기억하는 저희는 남매였으니까요.”

 

  히라츠카 선생님은 조용히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저희의 관계라고 해봐야 10년 전 잠깐 이야기 한 게 전부니까요. 선생님 쪽에서 저를 기억하리라는 확신이 없었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기억하실까 두려웠죠.”

  “유키노시타 때문에?”

  “유키노와, 또 한 사람의 누나 때문이에요.”

 

  히키타니라 착각하는 다른 교사야 어찌됐든, 히라츠카 선생님은 알아 차렸을 테니까. 나와 유미코가 남매란 사실을, 과거와 달리,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지금의 하치만을.

 

  “이해했다.”

 

  탁 소리와 함께 컵을 내리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들이 표면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말인 즉슨,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이구나. 그게 아니면 뭔가 계획이 있다는 말이겠고.”

  “둘 다에요. 삼 분의 이 정도는 도달했구요.”

  “호오, 제법 구체적인 수치인걸? 절반을 넘겼다 단언하는 근거가 뭐지?”
  “그건······.”

  “저와 하치만은 바뀌었기 때문이겠죠.”

 

  뒷말을 받은 유키노가 확인을 구했다.

 

  “그렇지?”
  “응, 그 말 대로야.”

 

  틀릴 리가 없지. 우리 모두 오래 전부터 알던 사실이니까.

 

  “저희 두 사람에 유미코를 합쳐 세 명이에요. 같은 나이 또래에서 가장 먼저 뭉쳤던 멤버, 하치만에게도 저에게도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죠. 유이가하마 양과 사키처럼 지금 저희들 곁에 있는 인연들도 유미코 덕분에 맺게 된 거나 다름없어요.”

  “미숙했던 저희를 챙겨주고, 항상 지켜주던 든든한 누나였으니까요.”

  “하치만과 제가 바뀌었으니, 이제는 미 짱 차례.”

  “타인의 평판 같은 건 모르겠고, 자존심같은 건 진작에 버렸어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가갈 겁니다. 반드시······.”

  

  움켜쥔 주먹에 힘을 주고, 가슴 속에 품어왔던 생각을 언어로 표현했다.

 

  “누나와, 부딪칠 거에요.”

 

  정적이 희미해지고 소음이 되살아났다. 부산하게 부딪치는 젓가락 소리, 펄펄 끓는 국물이 뜨거운 증기를 만들어내고, 거리를 내달리는 자동차가 선명하게 머리에 재생된다. 민감해진 감각은 시간의 흐름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침묵을 지키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쩐지 싸우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거의 그렇게 되겠죠. 혹시 말리실 생각인가요?”
  “아니, 전혀.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오히려 바라던 바니까.”
  

  익살 가득한 울림이 사위를 메우던 긴장감을 깨뜨렸다. 전신의 팔다리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며, 짐짓 찌푸린 얼굴로 쏘아보았다.

 

  “너무 대충이신데요, 교사가 싸움을 부추기다니 과연 어떨런지······.”

  “교사니까 그런 거다. 학생도 사람이니까.”

 

  그러나 히라츠카 선생님은 꿈쩍하지 않았다. 여유롭다 못해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을 허공에 건 채로. 낡은 목재에 새겨진 무늬처럼 원래부터 일부였던 마냥 오랜 가게의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사람은 제어할 수 없어. 제어해서도 안 되지. 나는 그저 관찰자일 뿐이야. 너희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엇나갔을 때 꾸짖어주는 거지. 하지만 싸우는 건 괜찮다. 그건 엇나간 게 아니니까. 오히려 지금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지. 싸우고, 화해······.”

  “······하고, 협력해서 새로운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예로부터 3은 가장 완전한 수였으니까. ······그렇죠? 히라츠카 선생님.”

  “······아아, 정답이다.”

 

  미소를 띈 히라츠카 선생님이 유키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은사의 가르침이니까요.”

  “이거 영광인데. 너희들에게 그렇게 비춰졌다면 이런 생활도 할 맛이 나지.”
  “과찬이십니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몇몇 손님들이 힐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교사 일이 힘드신가 보네요.”

  “말도 마라. 하루 종일 무슨 업무를 그렇게 떠넘기는지 원. 괜시리 숙소에 쳐박혀 있다가는 또 뭘 시킬 것 같아 도망 나온 거야.” 

  “불쌍하게도······, 나는 어른이 되도 절대 일하지 않을 테야.”

  “요 너석이! 교사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자, 잠깐!”

 

  화난 시늉을 하며 팔을 뻗지만 유키노가 중간에 낀 탓에 묘하게 끌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두 사람분의 머리칼이 한데 모여 넘실거린다.

  응, 어렸을 때도 생각했지만, 두 사람 정말 닮았어. 마치 자매처럼.

 

  흐뭇한 미소를 감추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모처럼이니 더 큰 일탈을 해보는 건 어때요?”

  “그게 무슨 소리냐, 일탈이라니?”
  “라면이랑 같이 먹는 맥주, 그렇게 끝내준다던데?”

 

  기세등등하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멈칫한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느냐? 교사와 학생간에는 정도란 게······.”

  “저희만 입을 다물면 아무 문제 없어요. 그치, 유키노?”

  “그렇구나. 히라츠카 선생님은 어엿한 성인. 우연히 밤거리에서 우리들을 만나 합석을 했고, 그 과정에서 가벼운 반주를 곁들였을 뿐인걸. 그리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유, 유키노시타마저······.

 

  말로는 사양해도 눈동자는 솔직했다. 정처없이 흔들리는 시선은 명백히 메뉴판을 향해 있었다. 조건 반사라고밖에 할 수 없는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 거기에 결정타를 넣었다.

 

  “늦었어요. 선생님.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아웃인걸요. 뭐 어때요? 맥주 한 캔 정도는. 어차피 식사값은 선생님이 계산하실 건데, 한배를 탄 입장에서 눈감아 드리지 못할 것도 없죠~. ”
  “크윽, 약삭빠른 녀석······. 그, 그럼, 정말로 딱 한 잔만, 마셔볼까······?”

 

  주먹을 들어보이지만 입꼬리는 올라가고 계셨다. 들뜬 목소리로 주문을 넣자 직원은 점포명이 적힌 커다란 맥주잔을 꺼내왔다. 투명한 글라스 끝에 하얀 거품이 도달할 무렵 타이밍 좋게 주방에서 라면이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음, 나왔군. 어서 먹도록 하자.”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집어 들고 가볍게 합장을 했다.

 

  “크으! 술술 넘어가는구만~.”

  “다행이네요. 유키노는 어때? 입에 맞아?”
  “색다른 맛이지만, 나쁘지 않구나. 비교를 위해 당신 것도 먹어봐도 되겠니?”
  “물론이지. 어디보자, 여기······.”

  “자, 히키가야. 앞접시다.”

  “아, 감사합니다.”

 

  젓가락에 휘감아 후후 불고 입에 넣는다. 걸쭉한 국물을 머금은 면이 입안에 들어가자 기름 냄새가 코를 타고 올라왔다. 크윽, 이 혈관에 직접 꽂히는 자극적인 맛~. 이 맛에 라면을 먹지.

 

 익숙한 행복을 음미하는데,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분이 말을 걸었다.

 

  “도쿄에서 오셨나봐요?”

  “치바입니다. 도쿄가 근처에 있긴 하죠.”
  “그, 그렇군요.”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는 거다. 용서 못해. 치바가 수도권인게 아니라, 도쿄가 치바권인 거라고요. 관동 지방이라고 다 같은 게 아냐!

 

  한 마디 더 해줄까 마음먹었지만 손등을 꼬집는 손길에 그만두었다. 실례되는 행동은 그만두라는 뜻이다. 후에엥, 유키농 너무 엄격해.  

 

  “즐거워하시는 목소리가 주방까지 들리더군요. 남매지간에 제법 사이좋으신가 봅니다.”

  “푸흡!”

  “그렇게 보입니까? 크큭, 어떡하냐 하치만? 들켜버렸는걸?”

 

  동시에 뿜어버린 유키농과 나, 그리고 태연자약히 정보조작을 시도하는 소부고 교사를 보라.

 

  “아니, 무슨······.”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동생들이라니까요~. 교토에 오면 총본점의 라면을 먹어야 한다고 어찌나 떼를 쓰는지, 오늘이 아니면 안된다는 통에 데려오고 말았답니다.” 

  “큰누님 분께서 동생들을 많이 아끼시나 보네요. 요즘 세상에는 드문 일이죠. 부럽습니다.”

  “하하하, 이 정도 가지고 뭘!”  

 

  넉살 좋아 보이는 주방장의 말에 더욱 신이 난 히라츠카 선생님이 외쳤다.

  이거 설마 교토어語인가? 반대로 해석해야 하는 거 아냐?  

 

  “히라츠카 선생님, 취하신 게······.”

  기세 좋게 때려박는 모습이 걱정됐는지 유키노가 제지에 나섰다. 

 

  “응? 뭐냐? 너희도 마시고 싶은 거냐?”

 

  어떡한대니, 완전히 분위기 타버렸네······.

 

  “아뇨, 저는 아직 미성년자라······.”

  “딱딱하기는. 너는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다. 듣자하니 하치만 앞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던데, 자신은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라며 제법 놀려댄 모양이다만?”

  “어, 어떻게 그걸?! 대체 어디서 들으셨나요?!”
  “하루노가 말해주더군. 불꽃축제 당일 제법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이야. 뭐야, 유키노시타도 귀여운 구석이 있잖아? 자자, 어디 이야기를 풀어보실까?”

  “무슨! 다, 다가오지 마세요!”

 

  주정뱅이는 좀비와 같다. 옆자리에 있는 사람을 덮쳐 혼돈을 전염시키기 떄문에.

  유키노 기준으로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지만 즐기자 모드의 히라츠카 선생님은 막강했다. 어깨를 끌어안고 얼굴을 대며 능글맞게 추궁하는 모습이 흡사 하루 짱을 연상케 한다. 그렇지, 선생님은 하루 짱의 절친이였지. 닮은 사람끼리 어울리는 법이구나.

 

  겁에 질린 유키노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하치만, 도와줘!”
  “미안해, 유키 짱. 나, 라면을 먹을 땐 집중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렇다는구나. 유감스럽게도 도망칠 곳이 사라져 버렸군. 자아, 영업 시간은 길다고?”

  “핫 짱!!!”

 

  절규를 외면하며 젓가락을 잡았다. 살짝 손을 대보았지만 다행히 그릇은 뜨거운 채다. 식어버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잠시나마 지고의 맛을 두고 한 눈을 판 사실을 반성했다. 마음 한켠에 미뤄두었던 기대가 다시금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건져낸 면발은, 찰나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사실은 길었음을 증명하듯 불어 있었다. 기름기를 잔뜩 흡수해 묵직해진 그것은 처음 맛본 순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찐득찐득해진 맛과 물컹거리는 식감, 억지로 씹자 즙을 짜듯 국물을 토한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여도 최선의 맛 또한 아니었다.

 

  순수했던 시간이 지난 뒤엔, 거추장스러운 찌꺼기가 늘어날 뿐이다.

 

  “누나가 한 분 더 계시나 봅니다.”

 

  직원이 말을 건넸다. 히라츠카 선생님과 유키 짱을 지켜보는 두 눈엔 흐뭇함이 가득하다. 이 사람의 호의는 진짜였건만, 그걸 믿지 못한 건 나 자신이다. 유치하고 고약한 아집이었다.

  

  “네, 한 사람 더 있어요.”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쉬워라. 동생분이 이렇게 잘생기셨으니, 보나마나 아름다운 분이겠지요?”

 

  냅킨을 통해 쓴맛을 닦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최고의 누나죠.”



  xxx 

 

  “미안하다. 교사인 내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괜찮느냐, 유키노시타?”

  “괜찮습니다. 단지, 조금만 더 빨리 알아주셨다면 좋았다고는 생각합니다.”

  “크윽, 면목이 없구나.”

  

   가슴을 콕콕 찌르는 지적에 히라츠카 선생님이 시선을 피했다. 항상 내세우던 당당함은 온데간데 없이 제자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이 새로웠다. 낯설면서도 신선하고, 또한 자연스럽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다 푸셨는지요?”

  “아아, 말끔히 해소됐다.”

 

  붉게 물든 뺨을 가리듯 턱을 매만지며 히라츠카 선생님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도록 해라. 나는 편의점에 들러서 다른 선생님들과 마실 술을 좀 사 갈테니.”

  “또 술인가요?”

  “뭐라도 들고가야 체면이 설 것 아니냐. 공범으로 만들어두면 후환이 없지.”

 

  맞는 말씀입니다. 죄악감을 더는데는 소속감 만한게 없는 법이죠.

 

  “남들의 이목도 있어 조금 먼 곳에 내렸다만, 너희 둘이라면 괜찮겠지?”

  “오히려 선생님 쪽이 걱정되는데요?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맥주 한잔 가지고 뭘. 앞가림도 못 할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이까짓 밤거리쯤 가뿐하지. 치바에서도 곧잘 술을 사러 나갔었으니.”

 

  독신여성으로 살아온 세월은 폼이 아니라 이건가. 역시 히라츠카 선생님. 본인앞에서는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지.

 

  선생님과 헤어진 후 나와 유키노는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교사도 힘든 직업이구만.”

  “그러니? 나는 꽤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일반화하기는 힘들지. 히라츠카 선생님은 워낙 특이 케이스니까. 저렇게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주는 사람은 드물거든.”

  “후후, 교사의 고충을 헤아려주는 학생도 제법 드물다고 생각하는데?”

 

  저 미소는 익숙하다. 케 짱을 칭찬해줄 떄의 사 짱의 표정이 딱 저렇거든.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건 그렇고 직원분이 했던 말 재밌지 않아? 남매라니, 히라츠카 선생님과 우리는 띠동갑인데 말야.”
  “사 짱과 케 짱도 그 정도 터울이니 그렇게까지 이상할 일은 아니야. 그것보다도 어째서 타인일 가능성을 배제했는지 쪽이 더 궁금한데.”
  “보통 이런 시간에 교사와 학생이 라면집을 방문하지는 않을 테니까.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그만큼 특이하다는 거야, 히라츠카 선생님은. 아까도 봤지? 자연스럽게 큰누나 행세하는 거? 직원 분은 우리를 4남매로 알고 있더라고.”

  “하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한숨을 쉰 유키노가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다. 그 동작에 사이즈가 큰 코트에 가려져 있던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달빛이 손가락 끝에 걸려 시리도록 차가운 빛을 뿜었다.

 

  “코트를 돌려주는 걸 깜빡했구나.”

  “돌려줘도 안 받으셨을걸? 꽤나 열이 오르셨던데.”

 

  가게에 있을 때는 한 술 더 떠 정장 겉옷까지 벗고 계셨지. 10월 하순이니 난방을 틀었을 리는 없고, 멀쩡히 먹던 도중에 옷소매를 걱정했을 리도 없다. 과음은 하지 말자구요? 다음 날이 무서우니까. 

 

  “춥지 않아?”
  “조금은.”

 

  소매를 여미던 손이 멈춘다.

  살짝 고개를 돌린 유키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선선한 가을밤 탓인지 두 뺨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업어줄까?”

  “됐어.”

 

  보기좋게 격추당했다. 업어주는건 오답이로군. 반쯤 진심이었는데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당신이란 사람은 가끔씩 엉큼한 구석이 있다니까.”

  “엉큼하다니 실례잖아. 나는 단지 유키노를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도와? 신체를 빈틈없이 밀착한 뒤, 균형을 잡기 위해 당신을 끌어안아야만 하는 내 입장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업어주는 걸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유키노밖에 없을 거야.”

 

  그야말로 단어의 정의를 뒤바꾸는 국문학의 혁명이라고 칭할 만하다. 엉큼한 건 유키농 아냐? 이 오빠는 그렇게 키운 기억이 없단다?

  “들어 봐. 오늘은 제법 힘든 스케줄이었잖아? 예정에도 없는 변동이 생긴데다 하필 추가된 행선지가 후시미이나리였어. 오늘 우리가 걸은 걸음 수를 합치면 가벼운 등산 수준이라구.”

 

  지금 버티는 것도 토베가 주고간 커피 덕이지, 솔직히 숙소에 돌아가서도 참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갓 목욕을 하고 나왔을 무렵에는 맹렬한 기세로 눈꺼풀이 감겼었지. 로비에 나오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잘 참았어, 하치만! 굿잡!

 

  “나조차도 몸이 뻐근한데 유키노야 오죽하겠어? 예전부터 체력이 없었잖아. 제대로 쉬지도 못 했을 텐데, 나 때문에 괜히 라면집까지 끌려가서 힘들지 않을까 싶었거든.”

  “억지로 간 건 아니야. 나도 즐거웠으니까. 그래도 이건 다른 문제.”

 

  다른 문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유키노는 웃으며 말했다.

 

  “기억해, 핫 짱? 어렸을 적 당신이 나를 업어주었던 일을.”

  “물론 기억하지.”

  “그 때가 딱 이 계절이었단다.”

 

  확실히. 얼굴을 스치는 냉기에 기억이 뚜렷해졌다. 늦가을 바람이 유키노의 몸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분주히 발을 놀렸었지.

 

  “눈을 감으면 아직도 당신의 모습이 선명해. 따뜻했어. 춥지 않냐며 살펴주고, 행여나 미안해할까 배려해주는 마음씨가. 무엇보다도 나를 돕는게 당연하다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해주는 목소리에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몰라. 하치만이랑 떨어진 이래로도 잊을 수 없었어. 그 날 해준 말 하나하나가 내 삶의 전부였어. ······그렇게 어리광쟁이가 되어버렸지.”

  

  호흡을 가다듬으려 유키노가 턱을 들었다. 투명한 눈동자 속에 푸른색 달이 일렁인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야. 어느덧 정말로 하치만이라면 뭐든 해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의지하는 걸 당연시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환멸했고, 그렇게 당신과 거리를 뒀어. 돌이켜 보면 참 유치한 이유지만, 그 때는 최선이라고 믿었지. 마음은 함께 있을 때 이어지는 거니까. 적지 않은 시간을 떨어져 살았으니, 이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운 것도 당연할 수 밖에.”

 

  발소리가 멈춘다. 늦게 반응한 나는 몇 발짝 앞에서 멈추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치룬 대가는 값싼 편이었다고 생각해. 사실은 아직도 애매하지만, 어디까지 의지해도 될 지, 지금의 자신이 부담이 되지는 않는지 하루하루 불안하지만, 상처입는 것조차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그렇지?”

  “······응, 그 말대로야.”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상처, 그리고, 함께 살아가며 세상으로 받을 상처. 그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후회 했으니까.

 

  상처를 줄까 두려워 도망치고만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응.”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여유가 넘치는 표정치고는 두 손이 산만했다. 공연히 머리를 쓸어넘기는가 싶더니 분주하게 차림새를 정돈한다. 탁탁 소리나게 옷을 편 유키노가 양 팔을 넓게 펼쳐보였다.

 

  어디보자, 업어주는 건 오답이였지? 이번에도 틀렸다간 경을 칠 게 뻔하고······. 난감하네.

 

  “이거려나?”

 

  잠깐의 고민 끝에 앞으로 뻗어나온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점수는?”

  “일단은 물어볼게. 무슨 생각으로 손을 잡은 거니?”
  “내가 잡고 싶었어. 그걸론 부족해?”
  “······치사해.”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더욱 깊숙이 손가락을 얽혀온다.

 

  “80점.”

  “너무 후하게 주는 거 아냐?”
  “하치만이기 때문이야. 바꿔 말하면 기본점수밖에 얻지 못 했어. 좀 더 분발해서 나를 기쁘게 해주도록 하렴.”

  

  있는 힘껏 심술을 부리면서도 배시시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기지 못 한다.

  기본 80점이라니 사기잖아······. 일반 시험이었으면 영락없는 부정행위라구. 호의를 전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순간에 삐딱해지는 건 유키노시타 가문의 특성인 걸까?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그거면 돼.”

 

  잡은 손은 놓는 일 없이, 어깨가 닿을 만한 간격을 유지한 채로 우리는 밤길을 걸어갔다.

 

  호텔 근처에 도착했을 때 불쑥 유키노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미 짱은 다를 거야.” 

 

  로비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우리는 합의했지만, 유미코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미안함과는 별개로 자신도 모르게 쌓인 감정이 있어. 당신도 유미코도, 그리고 나에게도.”

  “5년동안 축적된 업보라는 건가.”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세월이니까. 자칫하다간 감정의 골이 더욱 깊게 패여버릴지도 몰라.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할 지도 짐작되지 않아.”

 

  한 번 틀어져버린 관계를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을 하고, 어디까지 각오해야 되돌릴 수 있을까?

 

  “그래도 할 거지?”

  

  정답은 없다. 설령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또다시 어디선가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했을 테니까.

 

  “물론이지.”

  “그럴 줄 알았어. 정말 못 말리겠다니까.”

 

  유키노는 작은 소리로 웃으며 허리춤에 손을 댔다. 주머니 입구를 비집던 손이 돌연 멈춘다. 길을 잘못 들은 귀여운 방문객은 어색한 동작으로 등을 돌렸다.

 

  “입가심으로 사탕은 어떠니?”
  “좋네. 하나만 줄래?”

 

  품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점퍼 주머니에 넣어온 건가. 저 옷은 숙소에서 만났을 때부터 입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겠군. 밤에 먹는 간식은 좋지 않다며 잔소리를 할까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손바닥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수북히 쌓인 레몬맛 사탕이었다.

  새하얀 빛무리 아래, 샛노란 알맹이들이 빛을 뿜었다. 

 

  “최근에는 미 짱에게 건네주지 못 했거든.”

 

  떨리는 손을 의식하며 하나를 집었다.

 

  “잘 먹을게.”

  “양치질은 잊지 마렴. 그럼 잘 자.”

 

  인사를 건넨 유키노가 자기 방으로 향했다. 틀어 올린 머리에 히라츠카 선생님의 코트가 합쳐진 그 모습은 사뭇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때까지 지켜본 뒤 그녀가 준 사탕을 입에 넣었다.

 

  처음에 느껴지는 건 견딜 수 없는 신맛이다.

  혓바닥은 마비되고 입안 곳곳에 쓰라려, 뱉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폭력적이라고 해도 좋을 강렬한 자극.

  꾹 참고 혀를 굴렸다. 

  

  변화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담스러웠던 자극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숨겨진 단맛이 드러난다.

  오랜만에 맛보는, 잊고 있었던 추억.

  익숙해진 혀는 만족을 모르건만 짧은 쾌락은 녹아버린 뒤였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 이 맛에 길들여져 있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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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古都로 가는 길은 멋과 운치, 그리고 누군가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시간은 제멋대로다. 즐거운 추억은 봄날의 꽃처럼 사그라들고 지나간 자리엔 쓸쓸함만을 남긴다. ‘청춘’이 추억으로 기억되는 까닭은 기나긴 인생에서 행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적다는 반증일 것이다. 숨 돌릴 틈 없이 밀려드는 시련 속에서 사람은 점점 더 여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주변에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만큼 흔한 일이다. 

  흔한 나머지 무뎌지고, 그러다 보면 긴장이 풀려 실수를 범하게 된다.

  대부분은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불쑥 불행이 아는 체를 할 때가 있다.

 

  휴일 뒤에 찾아오는 월요병 정도면 다행이다. 그건 적어도 우스갯소리는 되니까. 조금 더 심각한 사례라면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을 들 수 있겠지. 기나긴 수험기간을 청산하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긴장이 풀려,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 졸업해 버리는 사례는 21세기 청춘들의 단골 실패담이다.

 

  요컨대 중요한 건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 정신을 붙잡을 수 있느냐다. 

 

  뻔한 결론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멀리 돌아왔다는 자각은 있었다. 머릿속에 생각할 거리가 던져지면 쓸데없는 부분까지 끌고 나가는 게 외톨이의 버릇이다. 다만 주변을 둘러싼 광경을 보자니 내가 생각한 미래의 축소판 정도는 펼쳐져 있는 듯 했다.

 

  “뜨어어~, 망했어! 이번 성적 완전 죽 쒔다고!”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 난 이미 포기했다.”

  “그것보다도 토베가 내신관리를 한다는 말이 더 웃긴데.”

  “너무하네!”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지적에 토베가 쓰러지자, 야마토가 껄껄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워워, 진정해. 나도 망했으니까.”

  “성적이 떨어진 건 우리만이 아닐 거야. 주위를 보라고, 다들 벌레씹은 표정 하고 있잖아?”
  “그렇지? 그런 거겠지?”

 

  짠! 하고 부활한 토베가 교실을 둘러보며 동조를 구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내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 줘!’ 라는 의도가 대부분이다. 떨어지는 자존감을 채워넣기 위해 관심을 구걸하는 얄팍한 행위. 남발할수록 역효과가 나니 속된말로 가성비가 좋지 않아, 중학교 시절 졸업하거나 친한 친구들끼리만 주고받는게 보통이다. 교실 전체에 우렁차게 소리지르는 건 이제는 천연기념물 수준이라 봐도 된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타이밍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교실에 남은 동급생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맞장구를 쳤다. 너도나도 입을 모아 이번 시험 어려웠다느니 너무한 거 아니냐느니 불만을 쏟아냈다. 그 가운데 누군가가 던진 말이 내 귀에 쏙 박혔다.

 

  “애초에 시험기간이 너무 짧았어.”

 

  글쎄, 2주 정도면 적당히 줬다고 생각한다만.

  신학기가 시작한 지도 거진 2달에 가까우니만큼 오히려 조금 늦은 감도 있었다. ‘시험은 평소 실력대로 치는 거야~.’ 라는 단골 멘트는 아니나 다를까 망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였던 걸로. 역시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본색이 드러나는구만!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학생들을 배려하지 않는 스케줄이다.

 

  문화제가 끝난 뒤 주말이 지나자마자 시작된 시험기간은 지난주 금요일까지 계속되었다. 월요일이 시험이었으니 이틀 쉬고 연달아 삼일을 달린 셈이다. 뭐가 그리 급한지 성적도 재깍재깍 배부되었고, 남은 한 과목도 채점에 돌입해 오늘 밤 중으로 개별 전송된다는 모양이다.

 

  사정이 이래서야 불만이 나올 만도 하다.

  긴장이 풀리자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던 불만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저마다의 입에서 토해내는 말들이 또다른 바다가 되어 수면을 이루었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

  조금씩 험악해져가는 분위기에 제동을 건 사람은 하야마 하야토였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화장실이라도 갔다 왔는지 앞문에서 나타난 하야마는 교실을 둘러싼 기류를 민감하게 감지했다. 그 때, 미간을 좁히고 교실을 둘러보는 녀석의 등 뒤로 에비나 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쭉 뻗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눈동자가 가늘게 휜다.

 

  “헉, 에, 에비나 양?!” 

 

  그 모습을 발견한 토베가 숨을 턱 들이마셨다. 평소 같으면 하야마에게 곧장 대답했을텐데, 허둥지둥 몸을 뒤트는 꼴이 예사롭지 않았다.

 

  눈치없는 오오오카가 냉큼 대답했다.

 

  “토베가 말이지, 성적이 떨어졌다는 모양이야.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위로해주고 있었어.”

 

  음음 고개를 끄덕이는 청중들. 그 반응에 하야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토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거 아냐? 시험 기간 중에 연락해도 항상 밖에 있던데, 그저께도 노래방 갔었지?”

  “뜨어어, 그걸 여기서 말하면 안 되지! 하야토 군, 너무하네!”

  “뭐가 너무한데. 자업자득이라고.”

 

  하야마의 내부고발에 오오오카는 ‘뭐야, 토베. 시험 당일에도 놀러 갔던 거야?’ 라며 정색을 했고 야마토 또한 ‘이거 순 도둑놈 심보였네.’ 라며 한심을 눈으로 쳐다보았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하는 토베에게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유미코.”

 

  이제 날벼락이 떨어지겠구나.

  교실에 있는 학생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호명된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석양이 내리쬐는 교실은 평온하기만 했다.

 

  “유미코?”

  “응······. 어? 어어? 방금 무슨 말 했어?”

  “아니, 방금이랄까, 꽤나 전부터 말하고 있었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유미코의 표정은 멍했다. 살짝 풀린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반응이나 대답도 한 박자 느렸다. 옆에 앉은 유이가하마는 진작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눈치였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라니.

 

  난처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던 하야마가 흘긋 이쪽을 곁눈질했다. 도와달라는 SOS 신호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갔던 건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야속한 건 마찬가지지만. 거기서 날 보면 어떡해. 날더러 무슨 말을 하라고.

 

  그 행동이 의문스러웠는지 유미코 또한 고개를 돌리다······, 시선이 마주쳤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이, 불과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깐의 침묵 후 유미코가 입을 열었다.

 

  “아아, 성적 이야기구나. 그건 토베가 잘못한 게 맞아.”

  “허거걱! 유미코마저!”

  “왜냐하면 나아의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는걸. 하야토도 그대로라고 했고.”

  “정말이야, 하야토 군? 이래서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은 안 된다니까! 우리같은 밑바닥의 고통을 몰라요!”

 

  ‘누가 밑바닥이냐!’ 며 항의하는 오오오카와 헤드락을 거는 야마토. 그리고 살려달라며 필사적으로 탭을 치는 토베.

  우스꽝스러운 바보 3인조의 모습에 웃음꽃이 터져나왔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 웃지 않는 것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쓴웃음을 지은 하야마가 토베의 어깨를 툭 쳤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수학여행은 어디로 갈지 정했어?

 

  시험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수학여행 이야기라니, 리얼충들도 어지간히 대화소재가 궁핍하다니까~. 평소같으면 그렇게 뒷담을 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당면한 모든 과제 중에서도 저것만큼 중요한 주제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학여행은 바로 내일이니까.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날 바로 교토로 떠난다니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일까? 심지어는 시험 첫날 홈룸시간엔 뜬금없이 조편성을 하게 했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더니, 높으신 분들은 자신들이 보는 세계관에 우리 고등학생들이 맞춰주기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어이쿠, 그만 삐딱한 말이 나오고 말았군.  딱히 우리 학교에 악의를 가진 건 아니다. 그저 약간의 불만이 있을 뿐이다. 그게 그거냐고 물으신다면 노코멘트로 해 두지.

 

  그러나 사람은 간교한 동물이라 했던가, 일방적인 통보인건 마찬가지였건만 학생들의 반응은 이전에 비해 훨씬 호의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고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도 받는 양 들떠 보이기까지 하다.

 

  “당근 정했지! 교토하면 USJ잖아!”

  “아니, 거긴 오사카인데.”

  “엥? 저, 정말?!”

  “뭐야, 토베 혼자 오사카 가는 거야? 진짜 웃기는데?”
  “조용한 여행이 되겠는걸?”
  “진짜 너무들 하는구만! 뭐야, 이거 왕따야? 지금 나 왕따시키는 거냐고?”

 

  오버액션이 잔뜩 들어간 절규에 교실의 분위기도 한껏 돋구어졌다. 킥킥대며 적당히 맞장구를 친 하야마가 흘끗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어때? 가고 싶은 곳 있어?”

  그 질문은 흡사 대화에 끼지 못한 여성진에게 발언권을 주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비춰졌지만, 안타깝게도 당사자들은 그러지 못 했다.

 

  “나아는 딱히······.”

 

  유미코가 얼버무리자 유이가하마가 얼른 뒷말을 받았다.

 

  “그, 그치만 유미코! 교토잖아! 평소엔 갈 수 없는 곳이니까, 분명 재밌을 거야!”

  “맞아. 이 시기면 딱 단풍도 들어서 엄청 예쁘다구. 창작 소재가 마구마구 떠오를게 분명해!”

  에비나 양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로 동조해 주었지만, 유미코는 여전히 시큰둥한 눈치였다.

 

  “단풍은 여기도 있잖아. 그래도 뭐······. 예쁘긴 하겠네. 문화재도 많고, 어딜 돌아다녀도 볼거리는 있을 거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반복되자 기껏 열이 올랐던 교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맴돌았다. 공연한 헛기침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고, 모두들 말없이 눈치만 살폈다. 개중에는 간절한 구조 신호를 보내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유이가하마는 물론 에비나 양마저 뾰족한 시선으로 나를 찔렀다. 그만 두세요. 토베까지 덩달아 이쪽을 보고 있잖아.

 

  거북한 분위기에 못 이겨 책가방을 싸들고 일어섰다. 복도쪽 자리인 게 이럴때는 고맙게 느껴진다. 큰 소란 없이, 저들의 곁을 지나치지 않아도 나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뒤통수에서 따갑게 느껴지는 한 사람의 시선을, 모르는 척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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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왜 또 여기있니?”

 

  ‘너는’ ‘왜’ ‘또’, 문전박대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단어선택이었지만 눈앞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종이컵에 담긴 홍차를 호로록 들이마시는 후배, 잇시키 이로하는 가을 석양만큼이나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며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그치만~, 오늘은 시험날잖아요~?”

  “미안, 그게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는데. 부활동은 어쨌냐? 드디어 축구부에서 짤린 거야?”

  “드디어는 뭐에요 드디어는! 안 짤렸어요! 일할 때의 제가 얼마나 착실한지는 선배도 잘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한달을 넘게 한솥밥을 먹었는데 그리 쉽게 잊혀질 리가 있나. 2주나 지난 과거임에도 실행 위원회에서 보낸 날들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오늘이 시험날이라고! 그것도 마지막날!”

  “아, 그래. 수고했다. 시험은 잘 봤니? 혹시 성적 자랑하러 온 거야?”
  “선배, 싸울래요?”
  “미안, 그만할게.”

 

  양손을 들고 항복의사를 표하자, 잇시키는 어휴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진작 그랬으면 좀 좋아요? 다 아시면서. 원래 시험기간 동안은 부활동 중지가 상식이라구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바로 달려왔는데 이런 기특한 후배가 어디 있······, 제 말 듣고 계세요?” 

  “어어. 듣고는 있는데, 잠시만.”

 

  반 정도 남아있던 내용물을 들이켰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찻물을 음미하며 빈 찻잔을 받쳐들자, 맑은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었는데.”

 

  유키노는 난처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자신이 다가온 것이, 유이가하마에게 따라준 주전자를 나에게 내민 것이 채근하는 것처럼 전해졌을까 걱정되는 눈치로.

 

  너를 대하는데에 타의는 있을 수 없다고 몇 번을 말 해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게만 느껴지는 나도 어지간히 심각한 고집불통이겠지.

 

  “유키노의 차인걸.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신경쓸 필요 없어.”

 

  고급 찻집에서나 맛볼 수 있는 세련된 맛이다. 공짜로 마시는 걸로도 모자라 리필까지 가능한 특권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가능하다면 평생 이것만 마시고 싶을 정도.

 

  핀잔을 주면서도 내심 기쁜지 홍차를 따르는 유키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찻주전자를 기울일 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한 쌍의 리본이 불그스레한 뺨을 가리듯 나풀거렸다.

 

  한 폭의 그림이라는 말도 아깝지 않은 자랑스러운 내 사촌.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찻주전자를 한쪽에 슥 밀고는 눈짓으로 차를 권했다. 컵을 잡자 딱 마시기 좋을만큼 알맞은 온도가 전해져 왔다. 한 모금 입에 대고, 만족스럽게 웃어보인다. 백 마디 칭찬보다도 기뻐하는 내 모습을 더 좋아하는 유키농이니까.

 

  “고마워.”

  “뭘 이정도로.”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에 앉은 잇시키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잇시키 양, 조금 신경쓰이는 점이 있는데, 시험 기간 중에 부활동 중지가 상식이라는 건 무슨 의미니?”

  “······에? 네, 네에?”

 

  무슨 영문인지 한 박자 늦게 반응한 잇시키가 길게 늘인 입술을 오물거렸다.

 

  “부활동이라면 시험기간 중에는 중지되는 게 맞아. 하지만 그건 운영비를 지원받는 정식 부활동해 한해. 자율적으로 운용되는 클럽 활동의 경우에는 강제되지 않아. 부실을 닫는것도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일 뿐이고.”

  “에에에에에에? 그쪽인가요······?”

 

  어라? 그쪽 이야기 아니었어? 아니면 그건가? 잇시키가 물어본 건 나인데 어째서 유키노가 대신 대답하는가를 지적하고 있는건가? 그치만 그건 상관 없잖아. 유키농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인걸.

 

  충분히 답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를 감싸쥐고 끙끙 신음소리를 내던 잇시키가 유이가하마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유이 선배······.”

  “응, 이로하 짱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전에 왔을 때에 비해 거리도 가까워졌고······. 사이에 껴서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아하하. 뭐, 이제 익숙하니까······.”

 

  고생이라느니 익숙하냐느니 암호같은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뭔가 우리는 모르는 둘 만의 이야기가 있나본데······. 똑똑한 내 사촌도 영 감을 잡지 못한 눈치였다.

 

  고민해봤자 의미없다고 여겼는지, 유키노는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바꿨다.

 

  “잇시키 양도 마시겠니?”
  “네네, 주세요. 마시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으니까······.”

  “······이건 홍차인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나와 유이가하마를 거쳐 나아가는 동선이 커다란 호를 그린다. 부장석을 축으로 책상을 한 바퀴 돈 유키노는 종이컵 하나를 꺼내 홍차를 따라주었다. 

 

  웬일인지 한동안 찻물을 바라보던 잇시키는······, 다음 순간, 단숨에 목을 뒤로 젖히며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왠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 같은데······.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유키노 또한 포기했는지 얌전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홍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흐음, 이유는 모르겠만 제법 스트레스가 쌓인 모양인데, 성적이 잘 안 나왔나?

 

  “잇시키, 혹시 이번 중간고사······. 잘 안 됐어?”

  “아앙?”

 

  맹수가 포효하듯 째릿 눈을 흘기는 잇시키는 참으로 여장부스러웠다.

  후에엥, 왜 그래. 무섭단 말야.

 

  “그, 그냥 궁금해서······. 문화제가 끝나자마자 바로 시험 기간이었잖아. 그 뭐냐, 괜찮아. 컨디션이 나쁘면 실수할 수도 있는거고. 나머지는 기말에서 만회하면 되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에요, 선배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자른 잇시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컵을 물었다. 까딱까딱 위아래로 흔들던 몸이 우뚝 멈춘다.

 

  “아, 혹시 성적 얘기에요? 그거라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애초에 시험기간도 널널했으니 따라가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잖아요? 왜요? 선배는 떨어졌나요?”
  “아니, 학년 3위인데.”

  “엥? 거짓말! 선배가 그렇게 머리가 좋다고?”
  “최소한 ‘성실한 사람이었나요?’ 라고 물어봐주지 않을래?”
  “그치만, 그렇잖아요. 그렇죠, 유이 선배?”

 

  지시어가 너무 많아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유이가하마라면 문제 없겠지. 그러나 유이가하마는 뉘엿뉘엿 해지는 도쿄만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아, 아하하, 그렇지······. 시험기간, 짧은 게 아니었지. ······성적 떨어지는 게 이상한 거지.”

 

  ······으음. 아무래도 걱정해야 할 사람은 바로 옆에 있었던 모양이다.

 

  여느 학교가 그렇듯이 소부고에서도 시험성적은 본인에게만 통지되는 걸 원칙으로 한다. 개별성적과 등수 정도는 알 수 있어도 자신의 위에 누가 있는지는 모른다. 누구에게 앞질러졌는지 모르는 이상 결국 시험은 자기자신과의 싸움. 노력 그대로 나온 성적표를 들고 다음 기회를 노릴 수 밖에 없다.

 

  물론 여기까지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

  세상에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대도 묵묵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사람이 존재한다.

  전과목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내 사촌, 유키노가 그랬다.

  

  “기운 내렴, 유이가하마 양. 당신만 괜찮다면 기말 시험때는 함께 스터디를 하도록 하자.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성심껏 도와줄 테니까.”

  “그, 그러지 않아두 되는데······. 유키농두 바쁠 거 아냐!”
  “남에게 가르쳐주는 건 내가 배운 부분을 복습하는 효과가 있어. 게다가, 친구의 곤란함을 모른 척해서야 봉사부라 할 수 없잖니.”

  “유키농~!!!”

 

  수줍게 전한 유키노의 고백이 유이가하마를 감동시킨 듯 했다.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밝은 얼굴로 친구를 끌어안는 모습은 그야말로 만개한 백합꽃이다.

 

  “오늘도 뜨겁네요. 질투 안 나세요, 전교 3등씨?”
  “도발하지 마라. 오히려 응원하는 입장이라고.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전교 3등은 국어 한정이야.” 

  “다행이다~. 하마터면 좀 우러러볼 뻔 했잖아요~.”

  “빈말을 할 거면 시늉이라도 내보는게 어떠니?”

 

  잇시키의 딴죽을 요리조리 맞받아치고 있는데, 유키노가 갑자기 옛 추억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스터디라면 저번 학기에도 했던 적이 있구나. 그 때는 사람이 더 있었지. 토츠카 군, 그리고······.”

 

  경쾌한 목소리가 선율이라면 부둥켜안는 팔은 마치 기계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아름답게 부실을 채우던 모든 음성과 움직임이, 고장난 오르골처럼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그와 동시에 눈에 띄게 동요한 유이가하마의 팔꿈치가 유키노의 앞에 놓여있던 찻주전자를 건드렸다.

 

  “앗······.”

 

  책상 위로 전해지는 진동은 묵직했다. 부실 안에 앉아있는 네 명에 리필 한 번이 더해졌지만 아직도 반 정도 채워진 채다. 아마도 한 사람 몫이 더 남아있을 찻주전자를 바라보며 유이가하마가 중얼거렸다.

 

  “그 때는, 유미코두 있었어.”

 

  명백히 어색한 타이밍에 끊어져버린 대화를 나도 유키노도 잇지 못 했다. 

  찻잔 속 수면은 고요했다. 그 지독스러운 평온함에 목구멍 깊은 곳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그, 그러고 보니, 오늘은 사키 선배도 안 보이네요?”

  분위기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건 잇시키 뿐이었다.

 

  “사 짱은 먼저 돌아갔어. 문화제날 저녁 당번을 타이시가 바꿔줬잖아? 그 보답도 겸해 반찬 거리를 만든다더라고.”

  “반찬이요? 왜요? 어디 가요?”
  “내일부터 수학여행이잖냐.”

  “엥? ······진짜요?”

  잇시키는 한 손을 들어 크게 벌어진 입을 가렸고, 나머지 손으로는 옆자리에 놔둔 가방을 인형처럼 끌어안았다. 하긴, 세상 어느 학교가 중간고사 다음날 수학여행을 가겠어? 내년이면 잇시키도 2학년이고 당연히 수학여행도 간다. 되풀이되지 말란 법 없는 미래를 목도했을 때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대답했다.

 

  “타이시도 수험생이니 최대한 부담을 줄어주려 하는 거겠지. 며칠 동안은 케 짱을 혼자 봐야 하니까.”

  “그, 그렇구나~.”

 

  간신히 이은 소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잇시키는 거의 쥐어짜내는 기세로 내게 말했다.

 

  “아참! 선배도 여동생이 있잖아요. 선배네 집은 괜찮으시겠어요?”

 

  신경이 날카로워진 걸까? 잇시키의 물음은 마치 나를 다그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괜찮으냐고.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여기서 꾸물대며 죽치고 있을 게 아니라, 너도 얼른 자리를 박차고 가야하지 않느냐고.

 

  맞장구쳐야 할 내가 침묵해버리자 이번만은 잇시키도 어쩔 수 없었다.

 

  “힛키는 말야.”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을 유이가하마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최근에 유미코랑 대화한 적 있어?”

  “거의 없네. 시험공부로 바쁘기도 했고······, 누나는, 친구들이랑 공부한다고 자주 외출해서······.”

 

  말하는 도중 답을 깨닫게 되면, 그 말은 어떻게 매듭지어야 하는 걸까?

  틀려도 좋으니 원래의 의도대로 마무리를 지어야할까? 그렇지 않으면 어색한 문장이 될 걸 감수하고서라도 진실을 말해야 할까?

 

  “으음, 나는 만난 적 없는데 말야, ······유미코랑.”

 

  이미 정답이 나온 문제였다. 어느모로 보나 명백하게.

 

  “힛키, 유키농이랑 대화할 때는 정말 즐거워 보여. 교실에서 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걸. 아까두 그렇구······.”

 

  고개를 수그린 유이가하마가 나직이 읊조렸다. 치맛자락을 꼬옥 움켜쥔 손은 처연하게 떨렸지만, 그럼에도 목소리만은 담담했다.

 

  확실한 진심을 분명히 표현했다.

 

  “조금 섭섭할지두······.”

 

  역설적이게도 나는 유이가하마의 이 불평아닌 불평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먹먹했던 가슴 속이 맑게 개이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안심해. 유이가하마.”

 

  한때는 누나의 친구였으나 이제는 우리 모두와 엮이게 된,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를 제대로 마주보았다.

  

  “생각해둔 거라고 할까, 계획이 있으니까.”

  “정말?”

  “물론이지.”

 

  주저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가하마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 나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고, 유키노에게도 상담했어. 확실히 말할게.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에게 다가갈 테니까. 나를······, 아니, 우리를 믿어 줘.”

 

  마음속을 비추듯이 투명한 눈동자가 서서히 옆으로 옮겨갔다.

  무언이지만, 무수히 많은 말을 하는 그 행동에 유키노는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렴. 하치만에게 생각이 있는 모양이니. 거기에, 그를 믿고 있는 건 유이가하마 양도 마찬가지잖니?”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나두 힛키를 믿어.”

  “안 그래도 털어놓으려고 했었어. 내가 구상한 계획에는 유키노 뿐만 아니라 유이가하마의 힘도 필요하거든.”

  “알았어. 뭐든지 말만 해! 뭐부터 하면 될까?”

 

  절실하게 기다리는 말이었는지 유이가하마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발을 굴렀다. 덜커덩 의자가 밀리는 소리하며 활기가 넘치는 모습은 언젠가 만났던 사브레를 연상시켰다. 생각이 곧장 행동으로 나타나는 성급한 성격은 제 주인을 쏙 빼닮은 모양이다. 침착하게 손을 들어 유이가하마를 제지했다.

 

  “그 전에, ······슬슬 올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그 녀석이 오면 하기로 하자.

  “응? 누가 와?”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챈 듯 싶었다. 조금 전부터 들려오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얇은 벽 너머 전해지던 인기척이 느려지더니 부실 문 앞에서 멎었다. 조금 뒤, 차분한 노크소리가 울려퍼졌다.

 

  “들어오세요.”

 

  유키노의 대답에 문이 열렸다.

 

  “조금 상담하고 싶은게 있어 찾아왔는데······.”

 

  썩 좋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변명이다. 공적 대화를 구실로 접촉했던 문화제와는 달리 이번 만남은 지극히 사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일이니까. 재학생을 돕는 동아리, 봉사부를 방문하는 목적으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이유였다. 

  

  옥의 티라면 그 핑계가 어울리지 않는 방문객 본인이었다.

 

  “어? 하야마 선배?!”

  “하야토 군?”
  “······안녕.”

 

  물론 그는 하야마 하야토다. 사가미의 사보타주로 실행 위원회가 곤경에 쳐했을 때, 귀중한 10분을 벌어준 남자. 나와 유키노에게는 복잡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애매한 지인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하루 짱의 보증이 있다 해도 내키는 일은 아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주저없이 그쪽을 골랐을 테지.

 

  그래도 지금은 수단 하나가 아쉬울 때고,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어야 한다.

  갈증이 이는 목을 남은 홍차로 적시고, 문이 열린 이래 줄곧 나를 응시하는 유키노에게 고개를 돌렸다.

 

  “······.”

 

  천천히, 이쪽에서만 보일만큼 미세하게 끄덕이는 얼굴.

  눈빛으로 전한 의지를 접수한 유키노는, 놀라우리만치 시원스레 허락해 주었다.

  이해하고, 수긍하고, 그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나를 믿어준다.

  정말로 내게는 과분한 사촌이다.

 

  “그러냐. 적당히 아무데나 앉아라. 의자는 뒤쪽에······.”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선 유키노의 의사를 묻는게 먼저였기에 나는 그때까지 하야마를 돌아보지 않았다. 부실에 들어온 뒤 조금 늦게 닫힌 문도, 가벼운 발소리에 드문드문 섞여드는 잡음도 신경쓰지 못 했다.

 

  그제서야 문 쪽을 쳐다보고 깨달았다.

 

  하야마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어라? 유이랑 이로하스도 있잖아? 다들 같은 부였어? 허걱~, 게다가 히키타니 군도? 뭐야뭐야? 이거 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쩔어~.”

 

  낯선 곳에 왔다는 긴장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야마를 뒤따라 부실에 들어온 토베는 긴 장발을 요란스럽게 넘기며 목청을 돋우었다.

 

  

  xxx

 

  10초 정도는 말이다.

 

  한바탕 부실을 휩쓴 호들갑이 가라앉는 낌새가 보이자 유키노는 다소 큰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도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매너 위반이란 것쯤은 안다. 언제나 몸가짐을 신경쓰는 유키노라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예의를 차릴 가치조차 없다는 선전포고다.

  그 무시무시한 분노가 멈출 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 했다.

 

  ‘부탁을 하러 왔으면 그에 걸맞는 태도를 보였으면 해. 손님에게는 손님으로서 갖춰야할 예의가 있어. 그는 우리 봉사부의 소중한 부원이야. 어째서 이름을 똑바로 부르지 않는 거니? 거기에 불쾌한 억측도 그래. 히키가야 군은 그쪽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벼운 사람이 아니야.’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뼛속까지 얼어붙을 한기가 서려 있었다. 목줄 풀린 강아지처럼 촐랑대던 토베는 양 어깨에 목을 파묻은 채 움츠러들었고, 하야마는 딴청을 피우는 척 나를 곁눈질했다. 이쪽 보지 마.

 

  “유, 유키농. 그건 그냥 별명같은 거니까······. 그 왜, 나도 힛키를 힛키라구 부르잖아?”

  “당신은 친구니까 상관없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야. 지난번에 들은 적이 있어. 히키가야 군은 동급생은 물론 교사들에게도 제대로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고. 안 그래도 짚고 넘어가려 했는데,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을 줄은······.”

  “우, 우와아, 이건 좀 다른 의미로 존경스러운데······.”

 

  이번에는 잇시키와 유이가하마 두 명이 이쪽을 돌아본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지만 이번만큼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복잡미묘한 동정은 그만둬 줬으면 하는데······. 심지어 눈치 보는데 있어서라면 누구보다 뛰어난 토베조차도 간절한 눈빛을 내게 보내왔다. 

 

 어떡하지, 신뢰가 전혀 기쁘지 않아······.

 

  “유키노시타, 조금 진정해.”

  “······히키가야 군.”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그렇지만, 거기서 바로 진정하는 유키노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뭐야? 어째서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양 토라진 얼굴도 그만둬! 방금까지 화를 내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토베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별명이랄까, 이름 일부를 바꿔 부르는 건 흔히 쓰이는 방식이니까.”

  

  그렇지? 하며 돌아보자 토베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고말고~! 하야토 군과 에비나 양도 그렇게 불렀거덩~. 유미코 양도 딱히 별 말 안 해서, 그,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함께 따라온 하야마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찌됐든간에 거짓은 아니었기에 하야마는 반론하지 않았다.

 

  유키노 또한 침묵했다. 알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토베의 항변 속에 언급된 ‘유미코’는 지금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진정제였다. 여전히 불만스러워하는 유키노를 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긴 한숨을 내쉰 유키노가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는 주의해 주길 바랄게.”

  “으, 응······.”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니? 하야마 하야토 군.”

 

  오늘’은’ 이라는 조사에는 네가 찾아온 사실이 달갑지 않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지만, 방금전까지 쏟아내던 노기가 남아 있던 탓인지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들렸다.

 

  “내 용건은 아니고, 토베의 일인데······.”

 

  어느새 교실 뒤편까지 간 하야마가 의자 두개를 가져와 토베에게 건넸다. 얌전히 자리에 앉은 토베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흐음. 보아하니 꽤나 개인적인 고민인 모양이군. 하긴 여러 사람 앞에서 느닷없이 털어놓으라고 한들 무리겠지. 실제로도 토베는 쏟아지는 시선이 거북한지 몸을 뒤틀었다. 

 

  그러고는 손님석을 양보하고 내 옆에 앉은 잇시키를 향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부원이라고 해도, 이로하스 앞에선 말하기 어려운데······.”

  “네? 저요?”
  “히익! 아, 아무것도 아냐!”

 

  뜨거운 국에 입을 데면 생선회도 불어보고 먹는다고 했던가. 단지 되묻기만 한 잇시키에게 토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서리쳤다. 더울 시기는 지났건만 이마에 배어드는 땀을 훔치는 손이 적잖이 안쓰럽게 보였다.

 

  이대로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토베에게 향한 시선을 하나라도 줄여줄 겸, 옆자리의 잇시키에게 소곤거렸다.

 

  “저게 무슨 말이야? 이로하스라니?”

 

  그래, 저 두 사람이 들어왔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 것. 자고로 이로하스란 이로하 스토커의 줄임말로, 어째서인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잇시키에게 내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명명자의 스텔스성이 워낙 뛰어난 나머지 여태껏 혼자서 쓰고 있는 하치만 전용 애칭이기도 했다.

 

  그럴 텐데 어째서 토베가 같은 이름으로 잇시키를 부르고 있는 걸까?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너 혹시 토베도 스토킹했니?”

  “선배, 진짜 죽을래요?”

 

  짧고 강한 충격이 발등을 강타한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는 잇시키의 얼굴이 가로막았다.

 

  “아, 아니면 그건가. 이 경우엔 하야마를······.”
  “조용히 하세요.”

  “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절묘한 각도로 갖다댄 주먹을 꾸욱꾸욱 눌러온다. 작다고 얕봐선 안 된다. 상대는 잇시키니까. 내 깜찍한 후배님의 매콤 주먹은 맞아본 내가 가장 잘 안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아니 그럼 도대체 무슨 뜻이람?

 

  “생수에요······.”

  “응?”

 

  흉기(?)를 갖다댄 옆구리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맞다. 그래도 헛것을 들을만큼 한눈을 팔고 있지는 않았는데?

 

  무슨 말이야? 라고 눈짓으로 전하자 째릿 흘겨본 잇시키가 작은 입술을 내 귓가에 가져다댔다.

 

  “생수라구요! 편의점에서 파는 물! 몰라요?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멋대로 부르는 것 뿐이라구요! 애초에 스토커를 떠올리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 뭔가요, 선배는 귀축인가요? 꽃다운 소녀에게 무슨 말을 하게 하는 건가요?”

  “그, 그렇구나. ······뭔가 미안.”

  “됐어요. 센스 없기는.”

 

  툭 쏘아붙인 잇시키가 고개를 돌렸다. 으음, 생수는 잘 모르겠지만 꽃다운 소녀 운운은 그럴듯하네. 악덕상사라고 불리던 모습(주로 하타노가)은 온데간데없이, 새빨갛게 물든 뺨을 연신 부채질하는 잇시키는 나이에 맞는 풋풋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픈 발등을 슥슥 문지르며 신음을 흘리는데, 멍해 보이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허어, 이로하스랑도 친하구나. 역시······.”

 

  역시?

  어떠한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직감이 왔다. 그러나 잇시키에게 향한 시선을 거두는 짧은 찰나에 선수를 뺏겨버리고 말았다.

 

  “토, 토벳치, 그건······.”

  “당연하잖니. 히키가야 군인걸.”

 

  어째서인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키노시타가, 이건 또 어째서인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유이가하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그러니, 유이가하마 양?”

  “아, 아니······. 의외로 기뻐하는 것 같아서.”

  “의외라니, 이해가 잘 되지 않는구나. 히키가야 군이잖니?”

 

  그러니까 그거 대답이 되지 않는대도.

  알쏭달쏭한 선문답에 유이가하마 또한 난감해하는 눈치였지만 그것도 잠시 뿐. 또다시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아, 그거라면 그렇겠네. 힛키, 오빠 속성이 있으니까.”

  “그래. 본의가 아닌데다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내게도 자주 오빠 행세를 하고 있고.”

  “이로하 짱 말구두 후배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 아이들에겐 더 그랬고.”

  “이상할 것도 없구나. 예전부터 여성을 대하는 데에는 익숙했으니까.”

 

  잠깐잠깐잠깐! 

  뭐야, 그 위험해 보이는 남자는 대체 누군데? 설마 나야? 그럴 리가! 숫기는 많지 사람 많은 곳 싫어하지, 임간학교 때만 해도 치바 마을 괴담의 주역이 되어버린 나라고? 무엇보다도 오빠 행세를 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아. 왜냐하면 진짜로 내쪽이 오빠니까!

 

  이러는 와중에도 두 아가씨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내 이미지도 점점 왜곡되어 갔다. 짜잔~, 학교 최하위 카스트 스텔스 힛키가 하루 아침에 카사노바 힛키로? 농담이 아니라고 정말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나를 좋게 봐주는(그렇다고 치자) 건 좋아도 히키가야 하치만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 더이상의 왜곡을 막기 위해 이 한 몸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역시 그랬구만! 오길 잘했어!”

 

  두 손을 책상에 짚은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토베가 나를 향해 외쳤다.

  평소와 달리 힘이 팍팍 들어간, 묘한 기대가 담긴 눈동자가 빛난다.

 

  “히키가야 군, 아니 스승님! 부디 제게,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뭐?



xxx

 

  토베의 의뢰는 간단했다.

 

  예전부터 에비나 양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는데, 이번 수학여행을 계기로 그 결착을 짓고 싶다는 것.

  2학기에 들어 숨돌릴 틈 없이 휘몰아치는 학급생활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더더욱 바빠질 것이며, 지금처럼 하하호호 웃는 철없는 학창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떨어진 시험점수도 만회해야 하고, 이후의 진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수학여행이 끝나면 이렇다할 행사도 없으니 자연스레 면학 분위기가 조성된다. 자연히, 친구들과의 거리도 지금과 같을 수는 없다.

 

  아쉽다면 아쉽고 최대한 늦춰보고 싶지만, 결국 맞닥뜨릴 미래라면 하다못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충족하게 보내고 싶다.

  진지한 연애 한 번 못 해본 청춘을 마지막으로 불사를 수 있기를 원한다.

 

  솔직히 놀라웠다. 언제나 바보같은 촉새 역할을 도맡던  토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토베 또한 그런 자신의 이미지를, 그것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서먹해질 거라면 용기를 내자.

  그러나 승산도 없이 돌진하는 건 싫다.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건 진짜로 바보같은 짓이며 에비나 양에게도 실례가 되니까. 축구와 마찬가지로 상대와 나를 제대로 파악하고, 최대한 가능성 있는 곳을 공략한다. 그런 식으로 방향성을 잡자 부족한 부분도 확연해졌다. 여지껏 도전해본 적 없는 분야에서 자신이 보고 배울만한 존재. 이른바 연애에 대한 코칭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야마에게 상담을 신청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하야마와 토베는 출발선부터 다르다. 잘생긴 얼굴에 출중한 능력,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매너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항상 앞에서 사람을 이끄는 하야마와 중간쯤에서 적당히 맴도는 토베는 성격에서도 차이가 컸다. 

 

  조금 더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필요했다. 선천적인 신체조건이 아닌 기술로서의 연애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

  외모만으로 여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미남이 아니라, 되도록 쑥맥에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면 더 좋다.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여고생에게 있어 연애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 남자여야 했다. 

 

  인기가 없을만한 이미지면서 동시에 인기있는 남자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던 차에 생각난 게 나. 아니, 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한다.

 

 ······욕이야 칭찬이야?

 

  까놓고 말해 그런 기준에 지목당했다는 사실 자체에 부아가 치민다. 쑥맥이 어쩌구 존재감 운운하던 순간에는 이녀석이 설마 시험 스트레스를 풀러 왔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를 향한 토베의 눈은 그야말로 구세주를 보는 듯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솔직히 그게 더 짜증난다만, 전말을 들었을 때는 기가막힌 나머지 화낼 기운도 잃고 말았다.

 

  문화제 당일 뒤풀이장으로 쓰이는 체육관을 들락거렸을 때 나와 내 지인들의 관계를 유심히 봤다나? 여성 비율이 압도적인데다 거리감도 가깝고, 심지어 끌어안기까지 하는게 제법 인상깊었다 한다.  물론 터무니 없는 오해였지만 사촌과 여동생, 부활동 및 실행 위원회 동료, 소꿉친구, 사촌누나의 친구였다고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도 번거로웠고, 이런 긴 변명을 믿어줄 눈치도 아니였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 잘 부탁해.”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시원스럽게 인사를 건넨 하야마가 문간에 섰다. ‘가긴 어딜 가. 니가 책임져야지. 중간에서 막아도 모자랄 판에 여길 데려와?’ 라는 장문의 히트 비전을 쏘아 보냈지만 어지간히 두꺼운 철판을 깔았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망할!

 

  “잘 부탁한다, 히키가야 군!”

 

  호되게 데인 것이 뼈아팠는지 마지막 말에 힘을 준 토베는 요상한 경례포즈를 취한 뒤 부실을 나갔다. 하야마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는 모습은 경박스러움 그 자체다. 템포를 끌어올리던 녀석이 사라지자 부실은 활기가 사라진 가을 숲처럼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어······. 뭔가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가버렸네요.”

  “토벳치······.”

 

  잇시키가 조심스레 말문을 트자, 유이가하마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기가 막히다고나 할까, 짜증이 이는 듯이 보이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한 줌의 걱정이 뚜렷이 배어나온다. 굳게 닫힌 문을 한참을 쳐다보더니 책상 밑으로 손을 뻗어 내 소매를 움켜쥐었다.

 

  “미안해, 힛키. 말이 심했네.”

 

  힘없이 늘어뜨린 어깨 위로 당고 머리가 떨어진다. 뭐라고 덧붙이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유이가하마는 작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미안해 할 것 없어.”

 

  소매를 붙든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치만······.”

  “따지고보면 틀린 말도 아니잖아? 뭐,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부분은 이해 못 하겠지만 말이야.”

  

  짐짓 태평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그렇게 사과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더니, 본인 잘못도 아닌 일에 고개 숙이는 가하마 양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펴자 유이가하마는 얌전히 손을 빼주었다.

 

  “······오히려 거기만 맞았다고 생각하는데.”

  “응? 뭐라고 했어?”

 

  잘 들리지 않아 되묻자, 유이가하마는 뾰루퉁한 얼굴을 홱 돌렸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는 손바닥을 한 번 쥐었다 펴고는 슬그머니 거두어 들였다.

 

  고집스러움의 차이가 천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봉사부와 하야마 그룹, 두 집단 사이에 낀 유이가하마로서는 쉽게 나설 수 없었을 테지. 조금 무례한 손님이긴 해도 토베는 정식 의뢰인이다. 채찍 역할은 유키노가 했으니, 자신은 당근이 될 수 밖에. 항상 주변을 먼저 생각하던 유이가하마다운 행동이었다. 

 

  사람의 본질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건 확실하다.

  그러나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작은 부분은 낯이 익었다. 시간이 흐르며 신체의 세포가 새로이 덮어씌워지듯이 유이가하마도 주변의 영향을 받고 변화해 간다.

 

  어느덧 우리와 닮아가는 친구를 바라보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맞아. 유이가하마 양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유키노 또한 밝은 미소로 두둔해주었다. 한결 누그러진 친구의 태도에 유이가하마도 마음이 놓인 듯 했다.

 

  “유키농,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차분히 뒷말을 재촉하자 유이가하마는 한 호흡 정도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이 의뢰 할 거야? 아니, 어째서 수락한 거야?”

 

  누가 들어도 유이가하마답지 않다고 할만큼 직설적인 말투였다. 더욱이 그 상대가 그녀 자신의 친구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다소 강경하더라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판단한 거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설립 이념 자체를 흔들만한 결정이었으니.

 

  봉사부는 어디까지나 자립을 돕는 곳이지 열매를 따다 주지는 않는다. 정답이 없는 문제라면 더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더군다나 노력한다고 성취할 수 없는 연애 문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반 이상은 운이 먹고 들어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존재하니까. 감성이 이성을 밀어내고 합리성을 부정하는 종목이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일컬어지지만 확고한 취향이 모든걸 결정짓는 불공정 게임이기도 했다.

 

  토베가 에비나 양을 좋아하는 건 토베의 취향이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에비나 양의 취향은 어떨까?

  맞아 떨어진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요행을 바라긴 어렵다. 만에 하나 틀릴 경우 거기서부터 골치가 아파진다. 상대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기준에 들게끔 자신을 가꿔야하는데, 열에 아홉은 한쪽이 희생하는 관계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내가 아는 한 유키노는 그런 거짓된 관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연애에 무턱대고 끼어들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선뜻 받아들일 문제가 아님은 확실했고, 본인 또한 이해하고 있었을 터였지만,

  그럼에도 수락한 이유는 역시 그것밖에 없었다.

 

  “사 짱이 없어서 다행이구나.”

  “엣?”

 

  엉뚱한 대답에 유이가하마가 당황했지만, 나는 담담히 그 말을 받았다.

 

  “그렇지. 있었더라면 하야마는 발도 붙이기 전에 쫓겨났을 테니.”

  “애초에 그걸 노리고 부른 게 아니니?”

  “맞아. 토베를 데리고 온 건 의외였지만.”

 

  적당한 구실을 만들고 입을 맞추려 했지,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가지고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다. 통보나 다름없는 행위였지만 앞뒤 정황을 따져봤을 때 저만한 방법이 없다는 게 또 문제다.

 

  “어? 응? 어라······?”

 

  여전히 실마리를 잡지 못 하는 친구에게 설명해 주었다.

 

  “하야마를 부른 건 나야. 내가 생각한 계획에는 유이가하마 뿐만 아니라 저 녀석의 힘도 필요하거든.”

  “하야마 군이?”

  “응. 아마 저쪽도 눈치챘을 거라 생각하지만.”

 

  무거운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토해냈다.

 

  “나는 누나랑 싸울 생각이거든.”

  “네에?”

  “힛키, 그건······.”

 

  화해한다고 했잖아? 유이가하마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잇시키의 입술이 의문부호를 삼켰다.

  그녀들이 인내해 주는 건 그만큼 나를 믿고 있으니까.

 

  “싸움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어. 사람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나랑 유키노도 마찬가지고.”

  “두 분이 싸운 적도 있어요?”

  “얼마 전에 한바탕 크게 저질렀잖냐. 뭐, 진짜 싸움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같은 걸지도 모르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잇시키 또한 감을 잡은 눈치였다. 방심하면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뜨거움이 올라올 것 같아 무심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 거야. 언성을 높이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 하고싶은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체념하고 마는 그런 싸움 말이야.”

 

  그리고, 그런 관계도.

 

  “미 짱은 어떻니?”
  

  다시 한 번 유키노가 확인을 구했다.

 

  “똑같아. 집에서도 멍하니 언제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웃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주변과도 거리를 두려 해. ······정말로 똑같아.”

 

  일순간 반듯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를 말하고 있으며 누구에 빗대고 있는지 내 사촌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면 모를까, 저런 식으로 나오는게 가장 힘들지. 대화 자체를 아예 거부하는 거니까. 미안해. 이제야 유키노의 기분을 알 것 같아. 힘들게 해버렸구나.”

  “하치만······.”

 

  분명 유키노는 이런 이야기를 꺼낼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다. 의뢰를 거절하지 않은 것도 납득했기 때문이겠지. 우리 둘이서 지난 5년간 밟아왔던 길이니까.

 

  그렇기에, 이런 종류의 관계는 우리가 전문가다. 쓰라린 경험이야말로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려갈 힘이 된다.

  잊지 않은 과거에서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다른 분신과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수학여행은 3박 4일. 그렇다 쳐도 첫날은 학급별 단체 관광이라 이쪽에서 움직이기 힘들어. 그렇다면 남은 건 이틀 정도지. 명확한 행선지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이기도 쉬울 테고.”

 

  둘째 날은 조별로, 셋째 날은 완전 자유행동이다. 교토의 관광코스라 해봐야 거기서 거기니 동선이 겹쳐도 어색하지는 않다. 고즈넉한 절도 많아 남들의 이목을 피해 담판을 짓기에도 알맞다.

 

  그러자 설명을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그럼 힛키가 우리를 따라와야 하잖아. 조원이랑은 얘기가 된 거야?”
  “아직이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해. 토츠카랑 사 짱이거든.”

 

  이런 걸 보면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걸 느낀다니까. 예전과 달리 단체활동을 강제하는 분위기가 옅어진 덕분에 순전히 교사 편의로 조를 나누던 풍습도 사라졌다. 인수 자유, 선택권 보장, 심지어 이성끼리 조를 짜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숙소에서까지 한방을 쓸 수는 없으니 적당히 다른 조와 맞교환을 하지만 말이지. 

 

  거기에 외톨이에 대한 배려까지 완벽해서, 단독행동을 금지하는 대신 다른 조에 끼여들어가거나 선생님과 동행할 수 있는 특권까지 제공할 정도다. 말하고보니 달라진 게 없구나. 빌어먹을 집단주의 같으니라구.

 

  “그럼 문제 없겠구나~.”

 

  음음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이가하마에게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적어도 수학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사 짱에게서 이 계획을 숨겨야 하니까. 사 짱의 성격과 이제까지 보여준 애정을 고려하건데 이런 과격한 계획에 찬성할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저런 큰 변수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할 수도 없으니 한 조가 되어 감시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수단은······. 아마 괜찮겠지. 거절할 수 없는 미끼도 준비해 뒀으니까.

 

  “즉, 하야마 군은 ‘접촉 명분’인 셈이지.”

  

  한숨과도 같은 무거운 목소리가 유키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같은 위치에 서야 하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해. 아무리 생각해도 3박이나 되는 일정을 헛되게 쓰는 건 아깝더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접촉하려면 내부의 협력자가 필요해서 말야.”

 

  또다른 골칫거리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냐만.

 

  유키노는 턱에 손을 괴고 눈을 감았다. 이제까지 설명한 제안을 머릿속에서 검토해 보는 듯 했다. 

 

  “당위성이 있는 건 이해했어. 하지만······.”

 

  다시 뜬 눈은 여전히 올곧았지만, 미간은 여전히 찡그린 채였다.

 

  “이 계획대로라면 내 쪽에서 도움을 주기는 어렵겠구나.”  

  “그럴 지도. 유키노네 조와 운좋게 마주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조금······.”

  “너무 그렇게 풀 죽지 마. 자유행동 시간에 도와주는 걸로 충분해. 거기에 이번 여행에서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고, 어쩌면 기회 한 번 못 잡고 흘려보낼지도 모르지.”

  “힛키······.”

 

  으음, 방금 건 농담이었는데 말이야. 자학 개그도 먹히지 않는다니 꽤나 심각한걸?

 

  “뭐,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해 봐야 의미없겠지. 지금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따로 있으니까. 하야마 녀석도 참, 어쩌자고 저런 의뢰를 가져온 건지. 나같은 게 연애상담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스레를 떨며 유이가하마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렇게 됐으니 조금 이르지만, 부탁한다, 유이가하마.”

  “어어? 나? 뭐, 뭐를?”
  “뭐긴, 연애 노하우를 알려달라는 말이지. 리얼충인데다 미인인 유이가하마라면 그쪽 심리에 대해서도 빠삭할 거잖아? 내친김에 교토에서 갈 만한 데이트 코스도 추천해주면 고맙겠는데.”

 

  부스럭 소리를 크게 낸 뒤 가방 속에서 꺼낸 물건을 탁자 위에 내밀었다. 이 물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서실에 한 권 밖에 없는 교토 여행 안내책자다. 시중에 판매되는 최신간에 비해 3년 정도 뒤쳐진 물건이지만, 대략적인 정보가 비슷한데다 무엇보다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는 점이 고평가 요소다. 괜한 돈 쓰기 싫은 학생들이 진작부터 노리고 있어 생각보다 경쟁률도 심했다. 뿌리부터 도서실 토박이인 나조차도 특별한 인연 덕분에 입수할 수 있었을 정도로.

 

  장비는 갖춰졌다. 이제는 유이가하마가 불러주는 좌표와 행동지침을 메모한 뒤 실전에 맞게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첩보물을 찍는듯한 흥분에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정작 당사자인 유이가하마는 안내책자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

 

  응? 유이가하마의 상태가?

  뭐야? 왜 그렇게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보는 거야? 혹시 이런 질문은 여성에게 실례였나?

 

  유이가하마는 반쯤 뜬 눈으로 나와 유키노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돌연 잇시키를 돌아보았다. 어라? 웬 데자뷰가?

 

  “이로하 짱, 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어······.”

  “그 맘 알아요, 유이 선배.”

  

  팔짱을 낀 잇시키가 비장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선배가 의지한 건 유이 선배잖아요? 저는 모르겠네요~ 연애랑은 인연이 없어서~. 순수한 소녀의 마음을 부디 잘 전수해 주시길~!”

  “이로하 짱까지 왜 이래! 나보고 어떡하라고~!”

 

  우아앙 우는소리와 함께 책상에 엎드리는 유이가하마와, 히죽히죽 웃으며 딴청을 피우는 잇시키. 그, 그 정도야? 진짜로 하면 안 될 말이였어?

 

  으음, 하긴. 사교성이 좋은 것과 그걸 남에게 가르치는 건 다른 문제지. 따지고보면 나와 하야마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다. 연애 조언이든 데이트 코스든, 당장 내일 써먹게끔 전수해달라는 건 부담이 될 만도 했다.

 

  “미, 미안해. 딱히 무리하지 않아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뻗은 손은 유이가하마에게 닿기 전 허공에서 멈추었다.

 

  “유키노?”

 

  어느새 일어섰는지 유키노는 내 손을 꼬옥 붙든채 고개를 수그렸다. 지그시 내려보는 눈동자에는 꺼진 줄 알았던 화火의 잔불이 조용히 타올랐다.

 

  “아직 화났어?”

  “그래. 화났어.”


  뜨거운 물체에 손을 댈 때, 순간적으로 차갑게 느껴지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유키노가 화를 내는 일은 드물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동안은 물론, 심지어는 지난번 싸움에서도 보지 못 했다. 언제나 침착하고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워 문제를 해결하는 내 사촌이 이번만은 예외를 보여주었다.

 

  고작 내 이름을 잘못 불렀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마음같아서는 이 작은 몸을 들쳐업고 온동네를 뛰며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부끄러워할 게 뻔하기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정답은 아닐 터.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겨 버린다고 하루 짱이 그랬다.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전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어도 역시 어렵다. 모두 전하고 싶은데, 아직도 서툴기만 하다.

 

  “기분 풀어.”

  “······정말이지.”

 

  위로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못난 친구에게도, 유키노는 서운한 내색 없이 웃어 주었다.

  항상 보기 좋았고, 언제나 그리워했던 예쁜 미소.

 

  넋을 잃을만한 아름다움에 방심했기 때문일까, 훤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키노의 속마음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연애상담이라니, 웃기지도 않구나.”

  “······응?”

  “기술이라니 말도 안 되지. 하치만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걸. 잘생긴 얼굴도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야. 그저 진실되고,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 나는 그 점에 반해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유키노?!”

 

  시야 가장자리에는 유이가하마가 움찔하고, 잇시키의 한숨소리가 뒤통수에 닿는다. 그러나 유키노는 마치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내 손을 끌어당겼다.

 

  “복잡한 기분이구나. 당신의 가치를 몰라주고 한낱 놀림거리로 삼는 부류가 싫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해.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 가운데 내가 처음이라는 사실이.”

  “무, 무슨?!”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냐. 이건 그저 내 이기심이자 어리광. 하치만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니까.”

 

  말 그대로 유치한 어리광이다. 어린 시절 친구에게 다른 친한 친구가 생겼을 때 보이는 독점욕과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것.

  친구와는 다른 감정을 상대와 공유한다는 점이다.

 

  “터무니없는 고평가라고.”

 

  맞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어. 설령 있다고 해도 바라지 않아. 이미 손 안에 있으니까.”

 

  하나하나, 빈틈없이 맞물린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사랑해주고, 그래서 마음 졸였던 유키노에게 전했다. 

 

  나는 여기에 있고, 어디로도 가지 않아. 이제는 네 마음을 마주볼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실망시키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까.”

 

  유키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의 심통과 의기소침했던 모습이 연기였던 것처럼. 오만할 정도로 당찬 미소로 대답했다.

 

  “당연하잖니? 누나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준다는 거니?”

  “이 상황에서도 그러기야?”
  “그래. 왜냐하면, 하치만인걸.”

 

  세상 모든 사람과 마음이 연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약없는 답장을 기다리며 조급해하지 않아도 될텐데. 읽음표시가 뜨는지 확인하려 모니터를 붙잡는 일도 없을 텐데.

 

  이토록 충만한 행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들뜬 나머지 밤을 지새워도 그 자체만으로 미소지어지는 그런 기쁨을. 잃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그러니 찾으러 가자. 우리가 되찾은 것을 아직도 거부하고 있는 사람을.

  한 때는 한몸이었던 누이, 히키가야 유미코를.

  끊어졌던 마음을 이을 수 있다면, 이제 더는 바랄 게 없으니까.

 

 

  “저러면서도 꿋꿋이 부정한단 말이죠. 하야마 선배가 나가자마자 호칭도 돌아왔구, 엄청 기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 뭐어. ······힛키니까?”

  “뭐에요, 그거. 유행어?”

  xxx

 

  “그러니까 말이지, 이건 조금 경우가 다른 문제라구나 할까? 여자는 주변의 상황을 살필 때가 있단 말야? 고백을 받을 때조차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남자 입장에서야 용기라고 생각해도 고백을 받는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겠지. 주위에 사람까지 많으면 거절하기도 미안할 테고.”

  “바로 그거에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꽃미남 왕자님께 고백받는다! 라는 건 분명 로망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순정만화틱하죠. 진지하게 생각해준다면 둘만 있는 자리를 만드는게 맞다고 봐요.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서로에게 가는 리스크도 최소화될 테구요.”
  “일리 있네. 요컨대 화려하거나 로맨틱한 이벤트가 아닌 진심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라는 거구나.”

  “응. 그러니까 무작정 고백하는 것두 안 돼. 나를 좋아하지두 않는 사람에게 고백한다는 건 그만큼 제대로 보지 않았단 거잖아? 아무리 진심이구 호의라구 해두, 그거 꽤나 부담스러워.”

  “즉 어디까지나 상대도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걸 확인하는 절차에 가깝다는 거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고백 받아봐야 솔직히 기분 나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사람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확률성 뽑기인 줄 아나? 뭐 그런 느낌?”

  “아하하······. 그, 그럴 지도. 나는 그냥 ‘좋은 사람’이구나 싶거든.”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좋은 사람이란 ‘어찌되든 좋은’, 혹은 ‘이용해먹기 좋은’ 사람을 의미한다. 상냥한 여자아이는 으레 만만한 목표로 여겨지기도 하니까. 친절함을 가벼움이라 착각한 인간은 간단히 거리를 좁히고 만다. 상대방의 사유지에 침입한 주제에 어째서 거부당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 겉과 속이 다른 어장녀라 욕하고는 뒤돌아섰겠지. 구태여 물어보지 않아도 유이가하마의 씁쓸한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좋은 사람······. 그것만은 피해야겠네. 상대방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또 생각되는 것도.”

 

  나야 소인배 근성에 찌든 소시민이니 상관없지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곤란하다. 워낙에 강단있는 성격들이다 보니 그럴 걱정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느 간 큰 인간이 사 짱이나 하루 짱을 건들겠어? 코마치도 제법 약삭빠른 구석이 있으니 알아서 잘 할테고. 지금 시점에서 걱정해야할 건 타이시랑 토츠카, 그리고 유이가하마 정도인가.

 

  얼마 없는 지인들의 특성을 하나하나 분류하는데 유이가하마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후아~, 힛키. 엄청 잘 아네?”
  “엥? 그런 거야?”
  “그렇다구요~. 보통은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 해요. 역시 선배는 평범한 남자들이랑은 다르다니까요~..”
  “네가 말하면 절대 좋은 뜻으로 안 들리거든? 그만둬 줄래?

 

  여자들이 말하는 ‘특이한 사람’은 ‘좋은 사람’보다도 나쁜 이미지니까 말이지. 스페셜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특별함은 곧 다르다는 것이며 거부감이 든다는 우회표현이니까.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는 당연한 명제도 실제 현실에서는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누나와 동생이 있었으니까 이래저래 물든 거겠지.”

  “시스콘과 친구없는 외톨이 중 뭐가 더 좋으세요?”
  “둘 다 싫어······.”

 

  귀여운 얼굴로 서슴없이 정곡을 찌르는구만. 약삭빨라, 이로하스!

  입을 삐죽 내밀고 화났다는 어필을 해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잇시키는 얄밉게도 재잘거렸다.

 

  “이런 것까지도 닮는 걸까요? 유키노 선배도 평범한 여자와는 다른 것 같네요~.”

 

  소악마같은 미소가 부장석을 가리킨다.

 

  “주변 상황? 어째서 그런걸 신경쓸 필요가 있는 걸까? 호의를 전하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니? 그야 조금 성가신 부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란 건 또 뭘까?”

 

  찡그린 미간하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눈, 연신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심상치 않다.. 턱에 손을 얹은 유키노는 자뭇 진지한 표정으로 방금 대화에 의문점을 던지는 중이었다.

 

  “저걸 보면 말이죠.”

  “······그렇네. 사 짱도 이런 데는 둔감하니까.”

 

  10년도 넘은  남동생의 짝사랑을 아직도 눈치채지 못 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장녀와 여동생, 가정환경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이 연애지식이 없는 건 무엇 때문일까? 참고할만한 대상은 있었을 터다. 사 짱의 생각과는 달리 타이시는 코마치를 한 사람의 여자로써 좋아하고, 하루 짱도 대외관계가 넓은 편이었으니.

 

  ······아니, 조금 다르군. 어쩌면 아주 간단한 부분에서 실수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 보자. 한집에서 부대끼는 사키네와 달리 유키노는 홀로 자취 중이다. 부모의 부재가 잦은 카와사키 가에서 실질적 가장은 사키였겠지. 두 살 차이밖에 되지 않는 동생도 보호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사 짱이다. 올해가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도 그 눈에는 어리게만 보일 터. 연애적인 의미로 참고가 될 리 없다.

 

  유키노 쪽은 더더욱 그렇다. 어린 시절 내내 집안에 거리감을 느껴왔고, 겨우 친해진 언니와 교대하듯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도 고등학교에 진학함과 동시에 자취를 시작했으니, 성격형성에 있어 가장 민감한 사춘기를 홀로 진애노 셈이다. 제아무리 모르는 게 없는 유키피디아라 할지라도 도리가 없지. 사람과 사귀는 법은 책에 나와있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 번역(?)해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해답은 유이가하마에게서 튀어나왔다.

 

  “그, 유키농이 한 번에 이해할만한 예시가 있긴 한데······.”

  “궁금하구나. 들려줄 수 있겠니, 유이가하마 양?”
  “아니, 그,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다구나 할까? 힛키랑 관련된 거라서······.”

  “하치만이?”

 

  운을 띄운 유이가하마가 쭈뼛쭈뼛 눈치를 살폈다. 아항, 대충 알겠군. 유이가하마가 말한 ‘예시’에서 고백하는 역할에 나를 빗대려는 구나. 눈치도 인기도 없는 외톨이는 어느모로 보나 비호감이고, 이런 나에게 고백받아봐야 좋아할 여성은 없을 테니까. 과연 전직 연극부 총무, 배우를 보는 안목이 높으시군요? 

 

  “나는 딱히 상관없다만.”

 

  개의치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이가하마는 배려심이 강한 아이니까. 예시로나마 나를 이용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품고도 남는다.

 

  “그, 그렇다면야······.”

 

  크게 심호흡한 유이가하마가 입술을 뗐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는 걸, 너무도 늦게 깨닫고 말았다.

 

  “저번에 말해줬잖아. 그, 공원에서 힛키가 고백했다고······. 조금 상황이 다르긴 해두, 기분은 비슷할 거라 생각해······.”

  “······.”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확실히 알맞은 예시였고, 당시의 내가 바보였던 것도 맞다. 유키노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한 주제에 그저 옳다고 믿은 독선을 배려라고 포장했다. 

  분명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둘이서 머리를 맞대면 최소한 그렇게 모두가 상처입는 결말은 나지 않았을 터인데. 

 

  소통하기를 포기한 대가는 나 혼자 받아들여야 마땅했음에도 모두에게 떠넘겨 버린채 도망쳤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자신의 업보다.

 

  “······과연, 주변 상황을 신경 쓰라는 건 그런 의미구나.”

 

  그러나 유키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이가하마 양, 그 예시에는 틀린 점이 있어.”

  “틀린 점?”

  “하치만이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는 부분이야. 말 자체는 분명 그런 의미였지만, 그런 건 고백이라고 하지 않아. 나도 그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유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이가하마를 향해 뜻모를 한숨을 내쉰 뒤,

 

  “나는 아직, 고백받지 않았어.”

 

  장난스러우며 동시에 날카로운 눈초리를 이쪽에 쏘아붙였다.

 

  “그, 그렇구나. 아직, 응, 아직 안 했어. 힛키가 잘못했네.”

 

  아니 내가 뭘······. 한 마디 반박해주고 싶었지만 유이가하마가 꽁무니를 뺐다.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훔치며 딴청을 피우는 모습, 그걸 보고서도 강하게 나갈만큼 강심장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분위기는 어쩔거냐고······. 유키노나 유이가하마나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 때 잇시키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더니 소곤소곤 귓속말을 건넸다.

 

  “선배, 유키노 선배에게 고백했어요?”

  “얘기하자면 길어.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의 내가 유키노에게 잘못한 게 있다고만 말해둘게.”

  “흐음~?”

 

  알 수 없는 추임새를 넣은 잇시키가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더욱 은근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아, 그래서 사귀지 않는다고 한 거군요. 아.직.은?”

 

  얘가 진짜······. 일부러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맘대로 생각해라.”

 

  어설픈 포커 페이스를 지으며 피하자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뒤따라왔다. 이로하스 짓궂어. 진짜 얄미워!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자각한 유키노가 컷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되돌렸다.

 

  “정리하자면, 되도록 인적이 드문 장소를 물색해 토베 군과 에비나 양을 유도해야겠구나. 승산을 높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호감도를 높일 방법도 강구해야겠고.”

  “그렇지. 그 부분은 토베에게 달렸겠지만.”

  “물론이야. 그래도 의뢰를 받은 이상 이쪽에서도 도움을 제공해야 하니까. 모든 여건을 고려해보면, 고백 시점은 자유행동이 보장되는 셋째 날이 좋겠어.”

  “이틀하고도 최소 한나절인가,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겠네. 두 사람의 관계를 진척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군.”

  “그렇네. 에비나 양의 생각도 확인해둬야 하니까.”

 

  방향성은 정해졌다. 남은 건 나와 유키노가 할 수 없는 일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 뿐이다.

 

  “유이가하마 양, 세부 요소의 조율을 맡겨도 되겠니?”

  “으음, 자신은 없지만······. 알았어. 해볼게, 유키농!”

 

  멋쩍게 웃던 유이가하마는 뺨을 붉히며 혀를 내밀었다. 제가 부탁했을 때랑은 반응이 다른 거 같은데 말이죠? 유키노라서 그런건가? 그럼 당연하지만!

 

  “어디 보자, 그럼 토벳치 말구 다른 애들은 떨어뜨려놔야겠네. 어떻게 하지?”

  “나중에 가서 정해도 되지 않겠냐? 현지에 가면 어떤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고.”

  “앗, 그거 좋다! 그럼 남은건······.”

  “데이트 코스 쪽이네. 유이가하마가 생각했을 때 에비나 양은 어때? 취향이라던지, 좋아하는 타입이라던가 알겠어?”

  “으음······ 히나 말이지?”

 

  가짓수를 헤아보려는 듯이 유이가하마는 손가락을 쫙 펼쳤다. 호기롭게 출발한 것은 좋았으나, 손가락 행진은 첫 엄지손가락을 접자마자 멈추고 말았다.

 

  “남자······들?”

 

  ······그야 멈출 수 밖에 없었겠네.

 

  “들? 유이가하마 양, 그게 무슨······.”

  “커흠! 그건 됐으니 조금 더 평범한 방향으로 가보자구. 취향이 달라도 의외의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고 사귀는 경우도 있으니까.”

 

  황급히 말을 자르자 유키노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돼! 이 심연은 아직 유키노에게는 일러! 오빠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눈치빠른 유이가하마도 재빨리 동조해주었다.

 

  “그, 그렇지~. 히나두 여자니까 남자에게 아주 관심이 없는 것두 아닐 거야! ······그렇겠지?”
  

  동요하지 마! 맞서 싸워, 유이가하마!

 

  “암암~. 장르가 다르니 아주 같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쪽’도 결국 남자와 남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잖아? 최소한 거부감은 없을 거라고!”

 

  백합, 즉 GL을 보는 남자들의 기저 심리에는 자기 취향의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독점욕이 바탕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결국은 가상의 캐릭터인게 현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자기 이외의 남자가 차단된 ‘안전한’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다. 이른바 미소녀 동물원이라 불리는 장르다.

 

  나도 오랫동안 사람들을 관찰하며 살아온 몸이다. 남자인 이상 여성의 심리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으나 부족한 부분은 유미코의 증언으로 보충할 수 있다. 불편한 휴전이 지속되었던 1학기 동안은 이래저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누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으니까.

 

  “어때? 뭔가 생각나는게 있어, 유이가하마?”

  “으음, 히나는 배려심이 있구 남의 이야기두 잘 들어주는 편이거든? 반대루 생각하면 상대방이 그러는것두 좋아하지 않을까? 가아끔 폭주하는 경향두 있지만 그런것두 포함해서 이해해줬음 좋겠구, 놀리지 않구 지켜주는 사람이 좋을거라구 생각하는데······.”

  

   유이가하마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어색한 지점에서 멎었다. 겁먹은 눈망울과 시선이 마주쳤다.

  의식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고의가 아니었음에도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생각에도 귀소본능이 있다면 우리는 같은 대상을 그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별을 제외하면, 유이가하마가 말하는 요소는 하나도 빠짐없이 유미코에 부합했다.

 

  “장르? 남자와 남자? ······거부감?”

 

  소리없이 유키노에게로 눈동자를 굴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사촌은 철지난 고민이 한창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때 터프가이도 울고갈 일침이 날아들었다.

 

  “그보다 이거, 토베 선배랑은 하나도 안 맞지 않나요? 그렇다고 할까 정반대잖아요.”

  “야, 너 우리가 기껏 돌려 말했던걸······.”

  “아하하······. 그래두, 틀린 말은 아닐지두.”

  

  그야 맞는 말이긴 하다만······. 같은 그룹원인 유이가하마에 부활동 후배인 잇시키에게도 이런 이미지라니, 토베 이 녀석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람? 연애 이전에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자각해야 할 거 같은데.

 

  이번 의뢰, 정말로 괜찮은 걸까?

 

 

  xxx

 

  “슬슬 돌아갈 시간이네요.”

 

  짙어진 노을을 바라보던 잇시키가 끙차 기지개를 펴더니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끌었다. 전형적인 부활동 종료 멘트로군. 보통은 나나 유키노가 했는데 말야.

 

  “애초에 너는 왜 온 거냐?”
  “또 그런다~. 언제든지 오라고 한 건 선배였잖아요! 그 멘트도 이제 식상하다구요?”

 

  사람 말을 왜곡하는 기술은 나날이 늘어나는구나. 오라고 한 건 맞는데, 그 전에 하나 빼먹은 말이 있다고? 지적해봐야 반격할 게 뻔하니 그만둘 거지만.

 

  예상했던 반격이 오지 않자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치던 잇시키가 멈칫하더니 뻔히 보이는 도발을 걸어왔다.

 

  “뭐에요. 항복인가요? 하긴~, 이렇게 귀여운 후배가 찾아오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겠죠?”
  “뭐, 귀엽긴 하네. 홍차만 축내지 않았으면 좀 더 예뻐 보였을 텐데 말이야. 우리 후배님은 눈치가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네?”

 

  좋아좋아 당황하는군. 여기서 쐐기를 박아주자.

  

  “잘 들어, 잇시키. 유키노의 홍차는 돈주고도 사먹을 수 없는, 이 세계의 유일무일한 생명수라고. 유이가하마와 내가 전부 나눠먹었을 것을 네 덕분에 1/3로 줄어들었단 말야. 이만큼 말했으면 알겠지? 다음에 올 때는 과자라도 사오도록 하려무나?”
  “우와, 시스콘 나왔다. 그거 진지하게 진심으로 기분 나쁘거든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잇시키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이러면 판정이 애매해지는데. 그래도 도망치지 않았으니 어쨌든 내 승리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후배를 이겨먹은 몹쓸 선배 타이틀이 어디에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구나. 벌써 이런 시간이야.”

  

  창밖을 힐끔 쳐다본 유키노가 자리에서 일어서 부장석 뒤쪽에 마련된 책상에 손을 뻗었다. 집어든 바구니에 찻주전자를 담고는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다. 다쓴 티백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린 뒤, 우리들이 사용한 컵을 회수해 차곡차곡 정리했다.

 

  “씻으려구?”
  “맞아.”

 

  그러고는 가방 속에서 수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다음주까지는 부실에 올 수 없으니, 깨끗이 닦아서 덮개를 씌워놓으려고.”

  

  여기서 말하는 ‘다음주’란 화요일을 의미한다. 목요일부터 시작해 3박 4일 동안 진행되는 수학여행은 당연히 일요일에 끝나게 되니까. 높으신 분들의 성질이 어지간히 급했던 것도 이유지만, 숙소배정이나 교통편에서 다른 학교와 다투지 않아도 되는게 메리트였다는 모양이다. 그야 그렇겠지. 정상적인 학교라면 중간고사가 끝나마자 바로, 그것도 주말을 낀 일정을 잡을 리가 없으니.

 

  거듭 말하지만 딱히 학교의 처우에 악의를 가진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일요일 이후 주어진 대체휴일. 교사들이야 시험기간 동안 수고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측에서 마련한 휴가라고 포장했지만, 어느모로보나 수업일수 때문이라는 건 명백했다. 

 

  일정은 일요일까지, 그렇다면 최소한 그 다음 날은 쉬는게 정상이다. 마침 화요일이 공휴일인지라 징검다리 휴일을 메꾸는 효과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학교 측에서 강수를 던졌다. 이틀을 연달아 쉴 수는 없다며, 학업 긴장도 유지를 명목으로 월요일 출석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겨울 방학을 이틀 앞당겨 준다지만 좋게 받아들이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 융통성이 있다고 해야할지, 복잡한 심경이구만.

 

  “도와줄까?”

  

  유키노 혼자라면 같은 층의 여자화장실을 이용하겠지만, 내가 동행할 경우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본관에 있는 탕비실까지 왕복하게 된다. 유키노도 처음 몇 번은 사양했지만 몇 번이고 밀어붙인 끝에 허가를 얻었다. 역시 억지에는 약한 유키농이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정말로 부담스러웠더라면 딱 잘라 거절했을 터. 무엇이 좋고 싫은지는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촌이니까, 유키노니까!

 

  “됐어. 오늘은 유이가하마 양이랑 갔다 올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치만 쇼크!

 

  “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렇게까지 침울해질 건 없지 않나요?”

  “뭐, 뭔가 내가 잘못한 거 같은 기분이······.”

 

  안심해, 유이가하마. 너에겐 죄가 없어. 잘못한 건 나야. 해질녘 복도를 유키노와 단둘이 걷고싶다고,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했으니까. 후후, 후후후. 그렇네. 딱히 유키노에겐 물어보지 않았지. 하치만 미스!

 

  “후후, 굉장한 얼굴을 하고 있네. 하치만.”

  “유키노······.”

  “그렇게 실망하지 마. 어차피 돌아갈 때는 함께잖니? 자, 받으렴.”

  “응?”

 

  유키노가 손짓하자 허공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것이 부실열쇠란걸 깨닫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어울리지 않는 열기가 남아있는 금속조각. 유키노는 언제부터 이것을 손에 쥐고 있었던 걸까?

 

  “교무실에 가져다 주겠니? 그 후 교문 앞에서 만나도록 하자.”

  

  까슬까슬한 표면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빨리 갔다 오렴. 늦을수록 당신의 마음이 쓸쓸해질 테니까.”

  “그 정도는 아니야. 뭐냐구, 그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말투는?”

  “맞잖니? 누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단다.”

  “······아, 그래.”

 

  뭐가 그리도 좋은지 유키노는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숨기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나아가는 발걸음을 유이가하마가 따라붙는다.

 

  “이로하 짱은 어쩔 거야? 같이 갈래?”
  “으음, 아뇨. 가 봐야 또 방금 전 같은 광경을 볼 것 같아서······.”

  “부, 부정은 못 하겠네······.”

  “그러니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유키노 선배, 유이 선배. 오늘 즐거웠습니다. 수학여행 잘 다녀 오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잇시키를 향해 유키노와 유이가하마도 작별인사를 나눴다.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나와 잇시키도 복도에서 나왔다. 문단속을 하고 돌아서는데 어깨를 툭 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빨리 가죠, 선배.”

  “먼저 가도 되는데.”

  “뭐 어때요. 어차피 신발장은 본관에 있구, 중간까지는 같은 길이니까요.”

 

  그도 그런가.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잠자코 잇시키의 뒤를 걸었다. 무엇보다 섣불리 반박했다가는 무슨 말을 들을지 두렵다. 말빨 하나는 타고난 이로하스 아닌가. 최근에는 더더욱 업그레이드한 나머지 잘못을 하기도 전에 선수를 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잘 생각해보면 결국 생트집 잡힌 거라 억울하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내가 장남이 아니었으면 어떡할 뻔 했냐고.

 

  이번에도 어떤 방식으로 장난을 걸어올까나? 머릿속에 떠오른 패턴을 정리하며 대응책을 세웠지만, 예상 외로 잇시키는 얌전했다. 아무리 진학교라도 해도 시험 마지막날까지 학교에 남는 학생은 없었던 모양으로, 황금색으로 물든 계단에는 두 사람 몫의 발소리만이 나지막히 스며들었다.

 

  딱히 근거는 없고 내 어림짐작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틀려도 내가 틀리는 게 낫다. 헛다리 짚은걸로 놀림받는 정도는 싸게 먹히는 거니까.

 

  이럴 때 손을 내미는게 선배라는 거겠지.

 

  “잇시키.”

 

  내 후배는 돌아서지 않았다.

  부산한 발걸음을 멈춘 채로 몇 발짝 남지 않은 계단을 내려다본다.

  떨어져 걷고 있어서 자연스레 조금 위에 서 있는 나로부터 눈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또한,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챈 자신이 의아한 것처럼 침묵하더니,

  자그마한 어깨를 크게 부풀리고는 옅은 숨소리를 숨죽여 토해냈다.

 

  “뭔가요, 선배?”

 

  어물쩍 빗겨간 시선에 가볍게 웃어주며 대답했다.

 

  “쓴맛苦味은 싫어苦手하니?”

  “······에?”

 

  순수하게 당황하는 이로하스는 드물지. 오늘은 꽤 좋은 구경을 했네.

  마음속에 1 이로하스 포인트를 적립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워낙에 주변을 챙기는 스타일이잖냐.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실 후배님을 위해 기념품 하나 안 사올만큼 야박하지는 않다구. 내가 좀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교토하면 말차라지만 쓴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선물 아니겠어? 남이 준거라 버리지도 못하고 집안 한구석에 던져놓는 일은 사양하고 싶거든.”

 

  커피 파인 히키가야 가에서 차란 이래저래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다. 엄마에게 전문가 뺨치는 다도 지식이 있는 것도 최근에 알았을 정도니까. 원체 피로에 쩔어 계시다보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커피를 마실 수 밖에 없었던 걸까? 새삼 떠올리자니 눈물이 나올 것 같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마음의 이슬을 닦는데 잇시키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본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구나. 그랬더라면 이런 농담도 안 했겠지만.

  한참을 시원하게 웃던 잇시키가 손가락을 들고 때아닌 저녁이슬을 슥슥 문질렀다.

 

  “선배는 진짜 재밌다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빈말이 아니에요. 정말, 정말로 재밌어요. 선배들이 가버리면 저 혼자 어떡해야 할까요?”
  “어떡하기는. 알아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지.”

  

  스토킹은 그만하구 말이야. 사람 놀리는 것만 잘했지 아직도 철부지 후배님이구나. 우리들은 교토로 갈 테니 너나 하타노는 1년 뒤에 천천히 따라오도록 하렴~.

  이상의 메세지를 눈빛으로 쏘아보냈다. 절대로 입 밖에 냈을 때 생길 뒷일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하하, 그건 그렇네요.”

 

  그랬건만 신기하게도 잇시키는 킥킥대던 웃음을 멈췄다. 마치 대 하치만 전용 감지 센서라도 있는 것처럼 확연히 달라진 태도로 올려다본다.

 

  “수학여행, 잘 다녀오세요.”

  “그래.”

 

  항상 주고받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인사다. 언제나처럼 짓궂지만 가식적이지 않은 미소와 함께 잇시키는 손을 흔들었다. 

  

 내일이 아닌, 그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건네며.

 

  “진짜로 좋은 후배님이라니까.”

 

  교문을 향해 멀어지는 잇시키를 배웅했다. 그러면 안 되는걸 알면서도 손을 흔들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조금만 더 나를 기다려 주기를 바라면서.

 

  “아참, 유키노는 쓴맛도 좋아해! 과자는 너무 안 단 걸로 부탁할게!”

  “부끄러우니까 조용히 해요! 이 중증 시스콘!”

 

  이리저리 주변을 확인한 잇시키가 이쪽을 향해 손을 젓더니, 빨개진 뺨을 가리고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래, ‘다음’에 올 때는 말이지. 그 때는 꼭 못 다한 말을 들어주마. 책가방 속에 꼭꼭 집어넣은 것도 봐 줄게. 나도 힘낼테니까.

 

  “······다음에 보자, 인가.”

 

  닿을 리 없는 중얼거림을 뒤로한채 발걸음을 돌렸다.

 

  “시간은······, 좋아. 아직은 괜찮은 것 같네.”

 

  대화라기보다는 조금 긴 작별인사에 가까웠긴 했다. 슬슬 유키노와 유이가하마도 설거지를 끝낼 시간이다. 어차피 그 두 사람도 신발을 가지러 본관에 올테니, 그동안 자전거를 회수해두면 얼추 맞아 떨어지겠군.

 

  터벅터벅 느릿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니 잇시키는 집에 갈 때 뭘 타고 가려나? 하기사 정문 쪽에서는 버스든 지하철이든 가까울테니 상관없지만, 나같은 자전거 파는 매번 옆문까지 이동하는게 제법 귀찮단 말이지. 비오는 날은 더더욱 그렇고 말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먼저 와 있던 선객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양으로부터 숨듯이 웅크리고 있던 인영人影이 일몰의 그림자처럼 솟아올랐다. 아니, 조금 다르군. 인영人影이 아니라 인형人形이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겉모습을 꾸며낸 인형. 그중에서도 특히나 아름다운 히나 인형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할로할로~! 이런데서 마주치다니 우연이구나, 동생 군!”

 

  등줄기에 흐르는 땀은 태양을 등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돋보이는 짙음이 빛으로 걸어왔다.

  먼저 돌아갔을 터인 누나의 친구, 에비나 히나가.  

 

  동급생이긴 해도 에비나 양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 한다. 내가 아는 거라곤 수개월간의 관찰로 얻어낸 단편적인 인적사항에 더해 누나에게서 들은 신변잡기가 고작이다. 코마치와 잡담하는 걸 귀동냥으로 들은 것 뿐이지만, 그 속에서도 꽤나 잦은 빈도로 나왔던 이름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등하교도 같이 할 만큼 친한 친구라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줄곧 전철로 통학했던 누나다. 유이가하마와도 제법 같이 다녔던 모양이지만, 버스파인 친구를 언제까지고 데리고 다닐 수도 없었겠지 봉사부에 입부한 뒤로는 자연스레 하교 시간도 달라졌을테니 정기권도 수지가 맞지 않았을 테고.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면 누나의 등교길 파트너는 에비나 양이 분명했다. 방과 후에도 두 사람은 함께 남아 있었으니, 지금쯤 같이 돌아갔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렇네요.”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시험 마지막날, 최종하교시간의 옆문에 서 있는 에비나 양이 우연일 리는 없다.   시간도 장소도 사람도 무엇 하나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여기 있으면,  

  그럼 우리 누나는······.

 

  “잊고 간 물건이라도?”

 

  꺼림칙할 정도로 에비나 양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헤실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방긋방긋 웃는 인형의 얼굴이다. 휑하니 뚫린 눈구멍 속에 깊이 모를 공허가 넘실거려서, 사실은 정말로 뭔가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철지난 괴담을 연상케 한다.

  그 속에 스쳐 지나간 빛이 의혹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응. 깜빡했어. 내일부터 수학여행인데, 나도 참 정신없지?”

 

  말과는 달리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방을 위아래로 흔들고는 어깨에 고쳐멨다. 얇은 손가락 끝이 천천히 움직여 턱 끝에 닿는다.

 

  “동생 군은 어때?”

 

  대수롭지 않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듯한 말투.

 

  “뭐가 말이죠?”

  “깜빡한 거 없어?”
  “저는 없습니다만.”

  “그래? 그럼 됐구~.”

 

  무던한 척 대꾸했지만 말끝이 조금 갈라진 느낌이다. 꿀꺽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톡톡, 시계초침처럼 손가락을 두드리던 에비나 양이 씨익 웃더니 본론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화제를 던졌다.

 

  “그러고보니 말야, 히키가야 군네는 숙소 배정을 어떻게 할 거야?”

  “네?”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에비나 양은 천연덕스러운 자세를 고수했다. 티나게 지적하지 않고 상대방 스스로 맥락을 되짚어보게끔 기다려주는 대화법이다. 칭찬받아 마땅할 인내심이지만, 그 속에는 뾰족한 가시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다리는게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거라면.

  부동을 유지한채 가식을 포장한다면, 그 거짓을 진실처럼 계속 연기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아, 사키 얘기군요. 글쎄요. 아무래도 저희 쪽 인원수가 적으니 다른 조에 빌붙는 수밖에 없겠죠.”

  “그렇구나. 다른 애들에게 얘기는 해 봤고?”

  “아직요. 내일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내일이라······. 그래선 늦는게 아닐지?”

  “괜찮을 겁니다. 사키는 문화제 이후로 알게 모르게 인기가 늘어났거든요. 어디 사는 누구씨가 도와준 덕분이죠.”

  “하하, 이거 좀 쑥스러운데?”

 

  손으로 입을 가린채 살짝 몸을 뒤튼 에비나 양은 그 야말로 ‘쑥스럽다’ 라는 단어를 온몸을 표현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호호 웃는 웃음이 아닌, 스산하게 깔리는 킥킥거림만 뺐다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연기였을 거다.

 

  컷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뒤, 뒷거래라도 제의하는 양 은밀하게 속삭였다.

 

  “말이 나온 김에,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만.”

  “호오호오.”

 

  다행히 구미가 당기는 모양새였다.

 

  “에비나 양네 조도 3명이죠?”

  “맞아. 유미코랑 유이랑 나.”

  “저희가 묵을 숙소는 4인실이구요?”

  “가장 일반적인 사이즈지.”

 

  저번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어째서 에비나 양과 수싸움을 벌일 때는 번번이 사 짱을 언급하게 되는 걸까? 모종의 인연일지도 몰라. 아님 말고.

 

  “그러면 사키를 그쪽 방에 재워주시면 안될까요? 본인에게는 제가 말해놓을 테니까.”

  “호오······?”

  “유이가하마는 어차피 찬성해 줄 겁니다. 에비나 양은 그저 전해주기만 하면 돼요. 제 누나에게 말이죠.”

 

  에비나 양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일련의 호기심이 가늘게 휜 눈꺼풀을 비집는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한 호흡 뜸을 들인 에비나 양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주면 어떡할 건데?”
  “토츠카를 맡아줄 조를 찾아봐야겠죠.”

  “엥? ······아니아니, 잠깐, 그럼 히키가야 군은?”

  “자리가 남아있다면 좋겠지만, 정 안되면 선생님이랑 같이 잘 수 밖에요. 눈칫밥이야 얻어먹겠지만 메리트도 있다구요? 수학여행에서 그만큼 좋은 방은 없을 테니까.”

 

  교사들은 독실, 혹은 2인실 단위로 방을 배정받기 때문에 기본적인 퀄리티에서 차이가 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들에 비해 과하게 좋은 방을 쓴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직장인인 그들이 수학여행비를 낼 리도 없으니.  공공연한 비밀은 교무실 난초만이 알 것이로고.

 

  “엉망이잖아, 동생 군······.”

 

  쓴웃음을 지으며 에비나 양은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안경다리에 눌려있던 부분을 두어 번 주무르고는 포켓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유리알을 문지른다. 문지르고도 신뢰할 수 없는지, 정말로 투명한가를 의심하는 것처럼 햇볕 아래에 안경을 비추어 보았다.

 

  만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비나 양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유리벽을 씌우고는, 오목한 렌즈를 거치고서 조금 삐딱하게 바라본 세계가 눈이 부시듯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그 틈에 선수를 쳤다.

 

  “내가 말한 건 그런······.”

  “잘 알죠. 그러니까 부탁하는 겁니다.”

 

  차폐막 너머 휘둥그레진 눈에 정면으로 맞섰다.

 

  “방금 말한 사람들은 모두 지난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 한 자리씩을 도맡은 멤버들이죠. 하나하나가 뛰어난 인재들이었던 덕분에 저희 반 연극도 성공할 수 있었구요.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 했어요. 뒤풀이 때도 유이가하마와 사키는 저희 쪽에 있었으니까.”

 

  적지 않은 기간동안 일심동체로 협력했던 그녀들이다. 힘든 역경 끝에 간신히 쟁취해낸 프로젝트 아닌가. 서로의 위치나 관계성이 다를지언정 동질감은 싹텄을 터다.

 

  “말은 안 해도 아쉬운 눈치에요. 표현방식이 서툴 뿐이지 이래저래 잔정이 많은 녀석이거든요. 친구의 친구다보니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키는 단순하달까, 그런 거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나는 에비나 양을 모른다. 내가 아는 거라곤 동급생에, 누나친구, 어디에나 있는 흔한 여고생(+부녀자), 가끔씩 속을 알수없는 언동을 보여주는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자의식이란 참으로 단순해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고 유혹하지만, 겉모습이란 정보가 아닌 단순한 생각에 불과하다.

 

  “사키사키에 대해 잘 아는구나.”

  “뭐, 친구니까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듯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인식도 바뀐다.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봐야 소용없다. 얕은 식견으로는 세상은 커녕 한 사람의 인간(세계)조차 직시할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그럴 자격이 내게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수천 겹의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건드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돌아갈지언정 관찰하기를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일지언정 인정하고, 모순일지라도 부정하지 않고,

  삐져나온 부산물을 눈여겨두었다 운좋게 써먹을 수 있다면 그뿐이다.

 

  “친구 동생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어떻게 안 될까요? 이런 걸 부탁할 수 있는 건 에비나 양밖에 없거든요.”

  “이런이런, 한 방 먹어버렸네. 이렇게까지 기대받아버리면 할 수 밖에 없잖아?”

 

  콧소리를 높이지만, 그 입은 웃고 있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무표정에는 빛바랜 쓸쓸함조차 묻어나왔다.

 

  “알았어. 유미코에게는 내가 말해둘게.”

  “감사합니다. 그럼······.”

 

  냉큼 돌아서려고 했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는김에 나머지 고민도 해결해 줄까? “

 

  한 번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재차 도전하는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상대에게 빚더미를 씌워 옭아매려는 의도만 아니었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을 거다.

 

  “아뇨. 토츠카는 어딜가도 환영받을 테고, 딱히······.”

  “에이~, 사양할 거 없어. 하야토 군에게 부탁하면 틀림없이 같은 방을 써줄거야. 그도 그럴게, 두 사람은 친구잖아?”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하야마가 짜냈던 묘수는, 아이러니한 자충수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하여간 그 녀석의 계획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피해를 내가 뒤집어쓴다는 점이 더욱 그렇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하야···토도 미리 짜둔 조가 있을테고, 이제와서 제가 끼어들어봐야 민폐밖에 안 되겠죠.”

  “에이~, ‘친구’ 사이에 민폐는 무슨~. 그렇게 치면 하야토 군도 마찬가지잖아~. 이 기회에 남자들끼리 으쌰으쌰해 보라구! 그래, 남자들끼리, 으샤으쌰······ 푸헥!”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이 사람······.”

 

  이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기를 빨리는 것 같단 말이지. 드레인 라이프던가 판타지스러운 기술에 걸려 실시간으로 생명력이 줄어드는 기분. 누나는 잘도 이런 성격을 받아주고 있구나.

 

  “그래, 마침 토츠카 군도 있으니 잘 됐네. 토벳치도 끼워다가 임간학교 멤버를 재현하자구! 금발미남 왕자님에 가벼운 인상의 운동부원, 순수하지만 때때로 다부진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 왕자님, 가지각색의 공들이 소심한 유혹수를 공략하는 거야! 크으으, 참을 수 없어!”

  “여보세요? 에비나 양, 제 말 듣고 있어요?”

  “핫! 이런 좋은 아이디어를 썩혀둘 수 없지! 조원이 확정되기 전에 얼른 말하지 않으면! 난 이만 가볼게! 좋은 소식 기대하라구!”

  “가긴 어딜······, 잠깐, 에비나 양!”

 

  제지하려는 손길을 요리조리 피한 에비나 양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문학(?)소녀인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빠르잖아?!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거람?

  순식간에 입구까지 도달하고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채 이쪽을 되돌아보았다.

 

  “걱정 마! 반드시 같은 방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예예, 그러시겠죠. 대꾸할 기력도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는데, 너무도 차가운 목소리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히키가야 군이 하도록 해.”

 

  고개를 들었지만, 텅빈 교정에는 낙엽 한 장만이 굴러다닐 뿐, 에비나 양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xxx



  사르르 내려앉던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흐릿한 시야에 색채가 옅은 풍경이 들어왔다. 10월 하순은 완연한 가을 날씨다. 한낮은 여전히 덥지만 아침 저녁은 반팔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쌀쌀했다. 기온이 내려가면 신체는 떨어진 체온을 높이기 위해 뇌로 가는 혈류를 줄인다. 추울수록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햇님도 같은 심정인지 발코니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햇살은 온기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 했다.

 

  체공하는 먼지를 시선을 건 채 아랫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코마치, 갔다올게. 친구가 기다리고 있거든.”

  “앗, 잠깐만! 유미코 언니!”

  

  대화(그것을 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현관문이 닫혔다. 잠시 뒤 계단을 올라오는 힘없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실문을 연 코마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 일어나 있었어?”

  “슬슬 출발해야하거든.”

 

  수학여행의 아침은 빠르다. 출근길 직장인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고, 이동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는 첫날 되도록 많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조용히 나가려 했는데 코마치가 먼저 깨어 있었을 줄이야. 수험생은 컨디션 관리가 생명이거늘. 뭐,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나도 가볼게.”

 

  탁자 옆에 놓아둔 가방을 들어올렸다. 3박이나 되어도 고등학교 수학여행이다. 대부분의 활동은 교복을 착용한 상태로 이루어지기에 내용물이라고는 속옷에 세면도구 정도가 다였다.

 

  그리 무겁지 않은 짐을 짊어지고, 그리 가볍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는데 코마치가 반대편 가방끈을 붙잡았다.

 

  뭐야? 같이 가고 싶어? 곤란한걸. 작고 귀여운 코마치라도 가방에 넣기는 힘들텐데.

  농이라도 걸어볼까 했지만, 불안한 눈동자에 장난을 칠 수 없었다.

 

  “코마치는 쓴맛이 싫어?”

  “······어?”

 

  그러니까, 이건 장난이 아닌 진심.

 

  “싫어하는구나. 좋아, 이번에는 야츠하시八つ橋를 사올게.”

  “잠깐, 오빠?”

  “최근의 화과자는 다양한 맛이 있거든. 코마치가 좋아하는 달콤한 맛으로, 넉넉하게 사와야겠네.”

  “······오빠?”

  

  머리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셋이서 먹기에 한 상자는 너무 적잖아?”

 

  셋이라고밖에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뿐,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을 터다.

  부모님과 코마치일수도 있고, 봉사부에 가져가 나눠먹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항상 신세를 지고 있는 카와사키네를 가리키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똑똑한 내 동생은 알아채 주었다.

 

  “응. 꼭 사와 줘. 그래도······.”

 

  내 손을 꼬옥 붙잡더니, 가슴께로 가져가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마디를 조물거리던 코마치가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코마치에게 있어 가장 큰 선물은, 오빠와 언니의 멋진 추억이야.”

  

  약삭빠르지만, 그렇기에 소중한 진심을 코마치는 말하고 있었다.

  서툴게 표현해도 알아주고, 기꺼이 응석 부려주는 내 동생. 

  그런 너를 위해서라도, 언제까지고 못난 오빠여서는 안 되겠지.

 

  “반찬도 못 만들어줘서 미안하다. 갔다 와서 만회할테니까 봐 줘. 혼자라고 배달음식만 시켜먹지 말구, 카마쿠라도 신경써 주라. 안 그래 보여도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 타는 녀석이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한 번뿐인 수학여행에 그런 엄마같은 이야기 그만해.”

  

  쓰레기를 버리듯 손을 뿌리치더니, 내 뒤로 돌아가 탁탁 등을 떠민다. 복도로 나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등 뒤에 얹은 손은 떨어지지 않아 마치 업혀있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조심히 다녀와, 오빠.”

  “응. 집 잘 보고 있어, 코마치.”

 

  힘차게 손을 흔드는 코마치를 뒤로한채 집을 나섰다.

 

  거리는 한적했다. 일출이 대지를 비추자 새하얀 입김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아 후우 내쉬기를 반복하다보니 금새 역앞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가축수송으로 유명한 소부선도 제법 좌석이 비어있었지만, 어차피 한 정거장 뒤에 내릴 몸이다. 손잡이를 타고 전해져 오는 느긋한 진동도 머지않아 가라앉았다. 

 

  환승역 츠다누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쾌속선 환승을 하기 전 거쳐가야하는 관문이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목적이 있다.

 

  “일찍 왔네, 사 짱.”

 

  예상대로 사 짱은 승강장 한구석에 있는 자판기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고개만 까딱여 인사한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사 짱 나름대로의 환영 방식이다.

 

  “응. 눈이 떠지더라고.”

  “케 짱에게 들킬까봐 헐레벌떡 나온게 아니고?”
  “그런 것도 있지만.”

 

  사 짱네와 우리 집은 직선 거리로는 전철 한 정거장 분밖에 안 될 만큼 가까웠지만, 주변 교통 상황은 좀 다르다. 소부선에 인접한 히키가야 가와 달리 사 짱은 오쿠보 역 근처에 산다. 나리타 공항으로부터 이어진 케이세이 본선도 치바와 도쿄를 잇는 가교임은 틀림없지만 종착역이 우에노라는게 문제였다. 아침부터 진을 빼며 야마노테선에 몸을 싣거나, 그렇지 않으면 후나바시 역에서 소부선으로 갈아타게 되는데, 어차피 같은 쾌속선을 탈 바에야 비교적 한적한 치바에서 미리 환승하는 게 낫다는 모양이다.

 

  뭐, 츠다누마 역 환승도 번거롭긴 마찬가지지만, 친구랑 같이 가면 좋은 거니까.

 

  “토츠카는?”

 

  투입구에 동전을 넣으며 물어보자 사 짱은 팔짱을 낀 채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못 봤는데.”

  “흐음, 슬슬 출발해야 할 시간인데······.”

 

  역 내부를 훑어보며 버튼을 눌렀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아래쪽에서 충격음이 들려온다. 음료배출구가 아닌, 힘차게 뛰는 심장으로부터.

 

  “하치만!”

 

  가을에 뒤덮인 츠다누마 역에서, 토츠카 사이카는 한여름 초목같은 파릇파릇함으로 세상을 물들였다. 세상에, 수학여행에까지 체육복을 입고 올 줄이야. 물론 체육복도 교복이고 교칙에도 위반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자켓을 입은 토츠카의 의젓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뭐, 토츠카 답고, 원체 잘 어울리니 상관없지만.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카와사키 양도 반가워. 이번 여행 잘 부탁할게.”

  “딱 맞춰 왔는걸 뭐. 그치, 사 짱?”

  “응. 나야말로 잘 부탁해.”

 

  전광판이 쾌속선 도착을 알렸기에 우리는 서둘러 홈에 올랐다. 전철이 움직이자 차창을 통해 치바의 도심이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신칸센은 이것보다 빠르게 지나가겠지. 사랑하는 고향에서 조금이라도 빠르게 나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말야.

 

  스마트폰을 열어 지도를 펼쳤다. 구글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도쿄 역까지는 30분이 소요될 예정이란다. 사 짱 뿐이라면 문제 없지만, 지금은 토츠카도 있으니 화젯거리를 가려야겠지. 특촬물, 혹은 여아용 마법소녀물은 상대가 동류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꺼내지 말 것!

 

  “하치만, 잠은 제대로 잤어? 뭔가 피곤해 보이는걸.”

 

  우물쭈물하는 사이 화두가 던져졌다. 망설이면 늦는다는 교훈을 아로새기며 즉답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눈이 조금 뻑뻑한 정도야. 햇볕 좀 쬐면 나아지겠지 뭐.”

  “니가 무슨 식물이야?”

  “하다못해 크립톤인이라고 해줘.”

  “그, 그렇구나. 난 또, 시험기간에 쌓인 피로가 아직 안 풀렸나 했어.”

 

  그거라면 유이가하마가 더 걱정인데. 아무리 봐도 평소부터 꾸준히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란 말이지. 자고로 한가한 시간은 친구수에 반비례하는 법이다. 모두들 나의 외톨이력을 본받아줬음 싶구만. 아니면 인도어 파인 친구만 사귀던지.

 

  흡족한 기분을 만끽하며 커피를 든 손의 검지를 세웠다. 나처럼 숙련된 커피캔 마이스터는 한 손만으로도 캔을 딸 수 있다. 쌓인 압력이 빠져나가는 푸슉 소리를 듣는데, 문득 토츠카와 사 짱이 뚫어져라 맥캔을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 시선의 의도를 깨닫고 손사래를 쳤다.

 

  “아, 이건 틀려. 딱히 피곤해서 마시는 게 아니야.”

 

  사 짱과 토츠카는 지금 문화제 역할분담을 정하던 날을 떠올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뻔히 보이는 정답을 외면한채 고민을 거듭하던 당시의 나는, 사촌 누나의 응석을 받아주느라 잠이 깨버렸다는 핑계로 날밤을 새버리고 말았다. 학급회의를 땡땡이 쳤을 때 써먹었던 핑계가 유키노에게 받았던 홍차였으니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한심을 짓을 했구나.

 

  “지금 가는 곳은 교토잖아? 맥스커피는 치바를 중심으로 동일본에서만 전개되는 상품이라 간사이에서는 찾기 힘들어. 앞으로 3일 정도는 못 마실테니 마지막으로 하나 산 거라고.”

  “무슨 알콜중독자 같은 소릴 하는 거야······. 핫 짱은 나이 먹고도 술은 안 마시는 게 좋겠어.”

  “걱정은 접어 둬. 내 입맛은 순수하니까. 거저 줘도 사양이라고.”

 

  쓰기만 한데다 건강에도 안 좋은걸 어째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종류는 또 어찌나 많은지, 바로 어젯밤 들었던 브랜드명도 긴가민가한걸. 그런고로  아버지, 내려주신 금일봉은 유용한데 쓰겠습니다. 이게 다 부모의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씀씀이라 생각해주십쇼. 애초에 미성년자는 술을 못 산다구요?

 

  “헤에, 맥스 커피는 교토에서 안 파는구나.”

  “엉. 몇 개 더 챙겨올까 하다 관뒀어. 버스같은 걸 탈 때는 짐칸에 던져놓잖아? 자칫 가방 안에서 터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고.”

  “그렇구나. 아마도 아이스박스에 담으면 괜찮을거라 생각하지만······. 미리 말해줬다면 갖고 왔을 텐데. 테니스부용 비품이 몇 개 있거든.”

  “아니······, 그럴 것 까지는 없는데.”

 

  갖고 오는 것도 일이고, 그 부피 때문에라도 스포츠용 대형 가방을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런 신세를 져가면서까지 맥스 커피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봐야 커피고 정 안 되면 다른 걸 마셔도 돼. 하루종일 걸어다닐텐데 아이스박스는 너무 불편하잖아? 생각해준 건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 고마워, 토츠카.”

  “응. 알았어. 그래도 너무 마시지는 마?”

  

  분명하면서도 부드럽게 거절을 표하자, 토츠카 또한 깔끔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문화제 때도 무리했구, 시험 기간에도 열심히 했으니까, 푹 자서 피로를 풀어야 한다구 생각해. 하치만은 항상 노력하고 있으니까.”

  “달리 하는 게 없으니 여유가 있을 뿐이야. 시험공부에 더해 부활동까지 병행하는 토츠카야말로 대단한 사람이지.”

  “그, 그렇게 들으니 쑥스럽네. 그래도 하치만이 말한 거니까······. 고마워.”

 

  아아, 이것이 만병통치약이라 일컬어지는 토츠카 성분인가. 쏟아져 나오는 후광이 눈부셔 눈을 가리고 있는데, 내내 조용하던 사 짱이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마치 업히는 것처럼 꾸욱꾸욱 얹은 손을 누른다.

 

  “이제야 알겠네. 핫 짱이 왜 그렇게 좋아 죽는지를.”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사 짱······.”

  “시치미 떼기는. 입이 귀에 걸린 게 훤히 보이는걸.”

 

  손가락으로 뺨을 콕콕 찌르며 희롱한 사 짱이, 토츠카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그도 그럴게, 핫 짱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귄 ‘남자’친구잖아.”

 

  보통 이런 말은 둘이 있을 때, 최소한 당사자인 토츠카가 없는 자리에서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더욱이 나조차 확신하지 못한 ‘친구’를 그리 쉽게 입에 담는 건 그만해 줬음 한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바라본 토츠카의 눈은 더할나위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 내가? 정말이야, 하치만? 나 너무 기뻐!”

  “어, 그, 그게······.”

 

  망설이는 내게 사 짱이 결정타를 꽂았다.

 

  “잘됐잖아. 이제와서 뭘 망설여, 당사자가 좋다는데? 이런 거 하나하나 고민하지 마. 받아들인대도 아무도 욕하지 않으니까.”

 

  판을 뒤집듯, 혹은 벽을 허물듯 사 짱은 우리의 관계를 정의해 버렸다.

  그저 동급생이 아닌 친구로서 인정해 줬다.

  대등한 관계임을 인정하고 울타리를 내린 것이다. 자칫 오만해보일 수 있는 행동이였으나 사 짱은 망설이지 않았다.

 

  거절하지 않을 것을, 토츠카가 그것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 또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잘 부탁해, 토츠카. 아니, ······사이카.”

  “이런 녀석이지만 친하게 지내 줘. 잘 부탁한다.”

  “이쪽이야말로!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하치만! 카와사키 양!”

 

  외면하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솔직함.

  기다려주고, 함께해 주며, 때로는 등을 밀어주는 상냥함.

  전부 내게는 없는 것들이다. 

  부족한 나를 지탱해주고 손을 내미길 주저하지 않는,

  그런 그들과 친구라는 사실에 더없는 기쁨을 느꼈다.



  xxx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되었건만 도쿄 역은 북적였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무표정한 회사원들의 홍수 속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아, 하기사 여기는 도쿄였지. 치바에 사는 학생들에게 케이요선이 통학철도이듯 도쿄 도민은 매일 아침 도쿄 메트로로 등교하겠구나.

 

  “우리는 어디로 가면 돼?”
  “신칸센. 분명히 14번 승강장이라고 했는데······.”

 

  이런 큰 역은 한 번에 길을 찾기가 어렵단 말이지. 신주쿠 던전만큼은 아니어도 초행길인 사람은 헛돌기 십상이다. 역 곳곳에 비치된 표지판을 읽어 나가는데, 익숙한 교복차림이 눈에 띄었다.

 

  “저 쪽인가 보다.”

  “응, 가자.”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소부고 교복이 도쿄에서도 먹히는 디자인이란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잡담을 나누며 그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신칸센 승강장에 도착했다. 크흑,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표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군. 잃어버리면 집에 못 가.

 

  간단한 인원점검 후 반별로 배치된 차량에 올라탔다. 두 줄로 나뉘어진 좌석 중 맨 뒷자리에 있는 3인석에 몸을 싣는다. 가장 안쪽에 토츠카, 중간은 나, 바깥쪽은 사 짱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은 우리와 달리 다른 학생들은 제법 지지부진한 모양새였다. 가장 큰 문제는 어중간한 4인 1조. 한정된 2인석이 치열한 경쟁 끝에 매진되어 버리자 남은 녀석들은 희생양을 정하는 눈치싸움에 돌입했다. 그런 암묵적인 경쟁에 하야마 그룹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객실 중앙에 위치한 마주보는 형태의 3인 좌석은 학급 제일의 리얼충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였다. 여성진이야 문제없지만 하야마가 속한 남자 조는 4명이다. 하야마를 뺄 수는 없으니 필연적으로 나머지 셋 중 하나가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남모르게 노력한 유이가하마 덕분에 그 확률은 1/2로 줄어들었다.

  

  이번에는 오오오카가 탈락인가. 통로 건너편 자리를 차지했으니 형태는 유지하고 있지만, 저렇게 되면 옆에 앉은 사람이 고역이겠군. 돌아오는 길에는 야마토와 교대하겠지만, 저들의 거리감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쪼록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유이가하마가 문득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어떻게 안 거지? 당고머리 속에 레이더라도 숨겨져 있니?

 

  ‘수고했어.’

 

   주변에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입술만 뻐끔거려 격려를 전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유이가하마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더니 어깨 높이로 들어올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 바보!

 

  그런 친구의 행동이 의아했는지 시선을 따라온 유미코와······ 눈이 마주쳤다.

  한순간에 굳어버린 나와 사 짱. 의아한 토츠카가 우리 남매를 번갈아 흘깃거렸다.

  어쩔 수 없네, 나설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고······.

 

  어색하게 손을 들고, 유이가하마가 그랬던 것처럼 살짝 흔들었다.

 

  ‘안녕.’

 

  안녕이라니 뭐냐고. 가족이랑 인사하냐?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 한 번 안 마주치고 나온게 자랑이니? 성급했던 실수에 슬그머니 손을 내리려는데, 뜻밖의 답신이 도착했다.

 

  ‘조심히 놀아.’

 

  멋쩍게 미소짓더니, 그대로 손을 내려 턱을 괜다. 창밖을 바라보는 유미코가 의아했는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하야마가 고개를 돌렸다. 원인을 알자 미묘하게 웃으며 돌아앉는다. 도미노야? 다음은 토베 차례니?

 

  그건 그렇고 누나도 참, 나이가 몇인데 ‘조심히’ 놀라는 거야. 우린 동갑이라고. 한낱 한시도 모자라 태어나기도 전부터 같이 있었으면서.

 

  “저쪽은 오늘도 시끄럽구나.”

  “그건 활기차다고 하는 거야, 사 짱.”

  

  가볍게 핀잔을 주자 사 짱이 정색했다. 마치 못 볼 것 봤다는 듯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너 정말 하치만이니? 내가 아는 핫 짱은 그런 소릴 할 애가 아닌데.”
  “사 짱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심한 말을 하더라.”

  “하치만, 역시 피곤한 거야? 눈 좀 붙일래?”

  “토츠카마저!”

 

  단호히 이의를 제기하려한 그 때, 때마침 흘러나온 음악소리에 소리가 묻혀버렸다. 발차를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잠들어있던 신칸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차체가 움직이자 우왕좌왕하던 학생들도 자리에 앉아 조금씩 멀어져가는 플랫폼을 지켜보았다.

 

  도란도란 피어나는 이야기꽃은, 그야말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잡담들.

  아침에 먹었던 메뉴, 예전에 갔던 여행지의 추억, 야심차게 세운 교토 여행 계획 등.

  주제도 시점도 중구난방이지만 모두의 가슴 속을 들뜨게 한 흥분은 확실히 전해져왔다.

  

  즐거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xxx

 

  “핫 짱.”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귓가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의식을 깨우고 무거운 눈꺼풀을 녹였다. 뺨에 닿인 손은 부드러웠고, 이따금 장난스럽게 주무르기도 했다. 몽롱한 의식 속에 무심코 손을 대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유키 짱.”  

  “일어났니? 잠꾸러기 씨.”

 

  손목을 돌려 마주잡자, 깍지낀 손을 꼬옥 겹쳐온다. 의자의 머리 부분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인 유키 짱이 나를 내려다본다. 곱게 가꿔온 흑발이 가슴팍에 드리웠다.

 

  “보렴, 후지산이야.”

 

  돌아보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곱게 잠든 토츠카의 얼굴.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아름다운 비경이었다.

 

  八島 最高

  일본 최고로 일컬어지는 후지산이 근엄한 자태를 드러냈다. 

                                              八百万                   万年雪

  이 땅의 모든 산 중 으뜸이라는 봉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함께해온 만년설이 쌓여있다. 

                                   雪の下

  즉 하늘 아래의 인간은 모두 눈의 아래쪽에 살고 있는 셈이다.

 

  “예쁘네.”

  “후후. 하마터면 놓칠 뻔 했구나?”
  “그러게. 고마워, 유키노.”

 

  유키노는 더없이 기쁜 얼굴로 웃고는, 잡고 있던 손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잠깐 와 보겠니?”

  “응.”

 

  어째서 여기 있는지, 어디로 데려가려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 속에서도 손에 쥔 감촉만은 확실했고,

  꿈을 꾸듯 몽롱하면서도 세차게 뛰는 가슴을 놓아주지 않는 미소가,

  그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좋았으니까.

 

  “아, 그전에, 사 짱이 자고 있어서······.”

  “안 잔다.”

  “으앗 깜짝이야.”

 

  예상치 못한 기습에 잠이 확 깼다. 팔짱을 낀채 앉아있던 사 짱이 한쪽 눈을 빼꼼 뜨는데, 뭔가 집에 있을 때의 엄마 같네. 한 대 맞을 것 같으니 본인 앞에선 못 말하겠지만.

 

  “계속 일어나 있었어?”

  “그건 아니고,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깼지. 자리를 피하라는 위화감이 들었거든.”

 

  무슨 살쾡이도 아니고······. 사 짱과는 소꿉친구로써 오랜 세월을 보내왔지만, 이런 범인을 초월한 능력을 보여줄 때는 아직도 무섭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하게 된달까, 사실은 쇼커에 납치된 개조인간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단 말이지. 

 

  “토츠카는 아직 자네.”

  “토츠카 뿐만이 아니야. 앞을 봐.”

  “어이쿠, 다들 꿈나라에 가 계시는구만.”

 

  푹신한 시트에 기분 좋은 진동, 거기에 꼭두새벽부터 서두른 몸을 누이면 이렇게 되는 법이지. 새근새근 잠든 토츠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사 짱이 훠이훠이 손짓을 했다.

 

  “나갈거면 빨리 가. 자.”

 

  지나가기 편하도록 통로쪽으로 다리를 내려준다. 예이예이 분부대로 해야죠. 좌석을 벗어나자 유키노가 입을 열었다.

 

  “핫 짱을 잠시 빌려가도 될까?”
  “빌려가고 자시고, 애초에 유키 짱 거잖아?”

 

  저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마치 제가 팔려가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유키노가 원한다면 공짜로도 줄 수 있지만 말이야. 장난가득한 친구의 심통에 고개를 끄덕여준 유키 짱이 발그레 물든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쥐고있는 손을 가볍게 끌며 속삭였다.

 

  “가자.”

 

  그러고는 거침없이 앞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머 멋있잖아 유키농.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면 더 강한 힘으로 되돌려주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유치한 힘싸움을 하면서도 우리는 마치 한몸처럼 보폭을 맞추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다 자고 있구나. 하야마도 에비나 양도 유이가하마도, 그리고 누나도. 그 덕에 유키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침일찍 나섰으니 잠도 제대로 못 잤겠지. 부디 편안한 숙면이 되기를.

  

  다른 반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두어 칸을 가로지르는 동안 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적습인가? 칼은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기도 없이 선두 차량에 가도 되는 걸까?

 

  잠깐, 선두차량?

 

  “유키노, 설마.”

  “······우선 사과해둘게, 핫 짱.”

 

  통로 중간에 서,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는 유키노. 투명한 눈동자에는 서글프달지, 묘하게 지친 기색이 배어 있었다.

 

  “너무 놀라지 말아 줘.” 

 

  머뭇머뭇 눈치를 살피며 손아귀에 힘을 푼다. 마치 손을 놓아도 곁에 있어줄지 불안해하는 것처럼. 정말로 유키노답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뭐야, 왜 웃니?”
  “아니, 반대구나 싶어서.”

  “반대?”

 

  고개를 갸웃하는 유키노에게 가슴을 탁 치며 대답했다.

 

  “뭘 걱정하는 거야, 유키노. 오빠가 곁에 있잖아.”

 

  한껏 긴장한 얼굴이 풀어지고, 다시금 유치한 유키 짱으로 돌아온다.

 

  “하치만, 내가······.”

  “먼저 갈게.”

 

  하고 싶은 말만 전한 뒤 주저없이 이탈하는 전개. 어린아이도 분개할만큼 비겁한 수단이지만, 받은 걸 되갚아주는 거라면 정당성은 충분했다.

  일부러 천천히 발을 놀렸다. 맹렬히 돌진하는 신칸센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처럼. 멈춰서 있다고 멈출 수 없는 추월해버린 시간을 뒤쫓듯이 작은 구두굽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림자처럼 밀착한 유키 짱의 기척을 확인한 후, 보여주지 않은 미소를 속으로 삼켰다.

 

  무엇이 두렵고 어떤게 미안한지는 모른다.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발소리에서, 곁에 있을 때 들리는 체온과 숨소리에서 느껴지는 신뢰 뿐이다.

 

  끌어주던 손을 거두고 역할을 바꾸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주는 유키 짱.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오빠 역할을 해내야 하겠지.

 

  결심을 굳히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자동문이 매끄럽게 열릴 때 우연인지 열차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그 속에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호기심의 편린을 목격했다.

 

  “아, 도착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선언과 부자연스러운 침묵.

  그 자체만으로도 기이했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분위기였다.

 

  화사하게 꾸민 여성진들이 팔걸이며 의자의 머리부분에 손을 짚고 일어서 있었다.

  지나쳐온 다른 반과 달리 자는 사람은 없었고, 불청객의 방문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양 미동조차 않은 채,

 

  어문학 계열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준 금남구역 취급인 국제교양과.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나를, J반 학생들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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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주연은 막이 내린 무대 뒤에서 빛난다.  

 

   

  폐회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커튼 뒤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을 일반 관객들이 알 리 만무했고, 시로메구리 선배와 하야마도 제법 좋은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었다.

 

  가을도 완연한 시기에 접어든 시기다. 축제의 열기가 사그라든 무대는 이별을 고하기 적합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예정에 없던 깜짝 토크쇼는, 다행스럽게도 3년간 학생회를 이끌어온 학생회장을 예우하는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벼락치기로 만든 문화제 영상 또한 썩 잘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을 추억으로 새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선물로 비춰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고, 군중들 속에는 새로운 기대감이 샘솟았다.

 

  그 후 유키노가 무대에 올랐다.

 

  완장은 여전히 부위원장 몫이었지만 눈치챈 사람은 없었겠지. 소부고 학생들에게 있어 이번 문화제의 시작과 끝은 유키노였으니까. 차분하면서도 힘이 있는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은 또다시 힘찬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고양감에 몸을 떠는 유키노. 밑바닥부터 고생해 숱한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원하던 결실을 이루어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었고, 그 감정은 손님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말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겐 짧았던 축제, 소부고 문화제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xxx

 

  전교생이 퇴장한 체육관에 실행 위원들이 집합했다. 무대와 대기실을 정리하고 음향 및 영상 기자재를 회수하기 위함이다. 땡땡이를 일삼던 상습범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있는 걸 보니 그들도 대강의 사정을 눈치챈 모양이다. 직접 봤든 사람을 통해 들었든 좌우지간 실행 위원장 얼굴도 모를만큼 바보는 아닐테니까.

 

  “자자, 더 빨리 움직여 주세요. 후딱 해치우자구요. 아, 거기! 막 집어넣지 마세요, 차곡차곡 쌓지 않으면 창고에 못 넣으니까! 그쪽도! 앰프연결선은 말아서 집어넣어야죠! 어디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난다구요?”

  그리고 그 총지휘를 맡은게, 내 자랑스러운 후배 잇시키 이로하.

 

  이번 행사의 대표가 유키노라면 현장 실무를 총괄한 건 잇시키였다. 죽이지 못한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던 말처럼, 실행 위원회를 괴롭혀왔던 일손부족은 역으로 구성원들을 단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잇시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었고, 각종 기자재의 현황따위는 눈감고도 외울 정도다. 사실상의 서열 2위, 잇시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딱 한 명만 빼고 말이다.

 

  “피곤해, 눈이 감겨, 그런데 잠은 안 와······. 젠장, 카페인을 퍼붓는 게 아니었는데······. ”

 

  책상을 이어붙여 만든 간이 침대 위에서 연신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가 벗어준 교복 자켓을 덮은 모습은 마치 영안실의 시체와도 같았다. 언데드는 빛에 약하다던데, 정말로 눈이 부신지 한쪽 팔로 눈을 가린채,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머리아파, 속 쓰려, 뇌랑 위장을 꺼내서 샤워기로 세척하고 싶어······.”

  “······얘 맛이 간 거 같은데?”

  “불쌍하게도······.”

 

   이 아이의 이름은 하타노. 우리 위원회 팀의 제반니이기도 하다.  

  계속된 과로에 지칠대로 지친 녀석은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급하게 편집한 영상을 전송하자마자 전원이 끊기든 쓰러졌다고 한다. 다급한 SOS를 받고 출동해 간신히 데려온 것이 지금에 이른다. 부실 문을 열었을 때 언뜻 보였던 한 무더기의 맥스 커피는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고전소설 마지막 잎새를 묘사한 듯한 그 광경에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수고 많았다. 푹 쉬어. 마지막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건 모두 네 덕분이야.”
  “부부장······.”

  “이 보답은 꼭 하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사이제 전 메뉴를 다 시켜줄 수도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오오! 뭔데?”

  귀를 기울이자, 하타노는 힘겨운 숨을 토해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저, 그렇게까지 사이제를 좋아하진 않아요······. 이왕 한턱낼 거면, 고기집으로······.”

  “그, 그렇구나! 미안! 생각이 짧았어! 그러니까 그런 다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같은 말은 하지 마!”

 

  뜨거워진 눈시울을 슥슥 닦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와주는 건데!

  후배에게 느끼는 죄책감 5할과, 고기집에서 거덜날 지갑에 대한 걱정 1할, 그리고, 사이제 동지를 잃었다는 처연함이 8할. 총합 140%의 슬픔이 나를 짓눌렀다.

 

  “······죄송합니다.”

 

  옆에 서 있던 사가미가 불쑥 내뱉었다. 기분 탓인지 책상 위에 올려둔 주먹이 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타노가 이렇게 된 건 누나 탓이에요. 여러분들께도 폐를 끼치고 말았어요.”

  “맞는 말이다만,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사과를 받아야할 사람도 내가 아니고.”

  “어떻게 그래요? 사람이 이 꼴이 됐는데? 이 녀석만 그런게 아니잖아요. 선배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했는데······.”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사가미는 입을 다물었다. 낮게 깔린 호흡에 드문드문 이 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한쪽 눈을 빼꼼 뜬 하타노가 친구를 올려다보았지만, 위로는 커녕 눈꺼풀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운 듯 했다.

 

  “죄책감을 느낄 사람이 잘못됐어.”

 

  하고자 했던 말이 그대로 나왔기에, 순간 정말로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인 줄 알았다. 뻐끔대는 입을 가리고 뒤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히라츠카 선생님이 서 있었다.

 

  “잘못을 한 사람은 누나지 네가 아냐. 학생들이나 교사들이 그걸 모를 만큼 바보도 아니고. 사가미에 대해서는 차후 적합한 논의가 이루어질 거다.”

  “역시 그냥 넘어가긴 힘들겠죠?”

  “수습할 수 있는 선은 넘어 버렸으니 말이다. 징계는 피할 수 없겠지.”

 

  교내 방송을 사용한 시점에서 교사들 또한 사태의 전말을 알아챘을 터이다. 만약 사가미가 그저 무능하기만 한 위원장으로 남았다면 결말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 앞에 서는 부담감을 10대 소녀가 짊어지기에는 무리였다는, 그럴싸하게 왜곡된 실패담으로 포장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집계 결과를 빼돌린 것도 모자라 데이터를 삭제한 행위는 의심할 여지없는 사보타주다. 무능함을 심판하기란 참으로 까다롭지만 무리수를 둔 사가미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노파심에 말해 두지만 네게는 어떤 불이익도 없을 거라 보장하마. 뭐,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렇게 처리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럼그럼, 너는 ‘사가미’지 ‘사가미의 동생'이 아니잖아? 사가미 시스터가 잘못한 걸 브라더에게 따질 수는 없는 거야. 거기에, 하타노가 보내준 영상은 너도 같이 만들었다고 들었고.”

 

  사가미는 흠칫 놀라며 발을 빼더니 무언가 신기한 걸 봤다는 얼굴로 이쪽을 응시했다.

 

  “그건······,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냥 막판에 숟가락 얹은거나 다름없는데······. 어째서 화를 안 내는 거야? 본인이 가장 고생했으면서, 설마 역으로 위로받을 줄은······. 이래서야 누나랑 다를 바 없잖아······.”

 

  삐질삐질 중얼거리는 말은 중간부터는 애매한 혼잣말로 바뀐듯 보였다. 흘깃 시선을 보내자 하타노는 말할 힘도 없다는 듯이 얼굴을 가렸다. 으음, 친구 아니랄까봐 말 안 듣는 것 똑같네. 얘들을 어쩌면 좋을꼬?

 

  머릿속에서 적당한 대답을 고르는데 히라츠카 선생님이 한 걸음 앞서나왔다. 길고 다부진 손이 사가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고민해라, 소년. 고민한다는 건 좋은 거니까. 나이가 들면 하고 싶어도 못 한다. 시간이 기다려주는 건 10대 시절 뿐이니까.”

  “네?”

 

  아마 이번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었을 것이다. 이 사람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흘겨보았지만 히라츠카 선생님은 껄껄 웃을 뿐이었다.


  “깊은 뜻은 없었다. 적당히 흘려두도록.”

 

  헛기침을 한 히라츠카 선생님이 어깨에 짚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자리를 옮기려는 기색을 보였기에 우리들도 한 걸음 물러났다. 휘날리는 백색 가운이 평행을 이루었을 때, 장난기를 거둔 진지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호의는 흘려보내는 게 아니야. 예의상 던진 인사치레일수도 있지만 꾸밈없는 진실일 때도 있지. 하나하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받아들이고 싶은 것도 답하고 싶은 것도 본능이니까.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밀고 나가거라.”

 

  그러고는 한쪽 손을 든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버렸다.

  하고싶은 말만 하고 가버리다니, 심지어 멋지기까지 하다. 저렇게 멋져서야 또 무슨 애니를 보고 따라한 거냐고 놀릴 수도 없잖아.

 

  그 의젓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가미도 적잖이 감동한 듯 보였다.

 

  “선배, 저 사람······.”

  “아아, 그렇지.”

  “설마 저 나이에 중2병이에요?”
  “아니라고.”

 

  세상에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니? 취향이 조금 독특할 뿐이지. 그리고 나이는 상관없잖아!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거야!

 

  “행동이 조금 깨긴 하지만, 저것도 히라츠카 선생님 나름대로의 배려일 거다. 말이야 맞는 말이잖냐. 좀 깨서 그렇지.”

  “옹호해주려는 거 맞아요? 뭐, ······맞는 말이긴 하지만요.”

 

  제자들의 복잡미묘한 평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거침없이 체육관 가운데로 나아간 히라츠카 선생님이 쾌활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자! 실행 위원들, 잠깐 주목해주겠나?”

 

  열기가 식은 체육관에 낮고 묵직한 박수소리가 퍼져나갔다. 하나둘 몰려드는 학생들을 한 사람씩 응시하며 히라츠카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수고 많았다. 내가 봐온 것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훌륭한 문화제였어. 아직 정리가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잠깐 휴식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방금 들어온 출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가다 깨달았다. 아하, 방금 친 박수소리는 저쪽에 보낸 신호였군.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학생들이 모여든 것도 무엇이 도착했는지 보았기 때문이고.

 

  “이쪽으로 놓아주면 된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테이블 하나를 고르고는 올려져 있던 짐들을 툭툭 내렸다. 그러자 선두에 선 토베며 하야마며 토츠카가 영차영차 옮겨온 짐을 히라츠카 선생님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손에 든 것은 과자나 초콜릿에 각종 음료수.

 

  “여, 수고가 많네.”

  “하하, 하치만이야말로 고생했지.”

 

  슬쩍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토츠카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볼까?

 

  “이게 다 뭐야?”

  “뒤풀이용 간식이라더라. 히라츠카 선생님이 사오신 모양이야. 좀전에 우리 반에 찾아와서 운반을 부탁받았어.”

  “호오.”

 

  척 보기에도 보통 양이 아닌데 이걸 다 자비부담 하신걸까? 역시 히라츠카 선생님. 제자들을 위해서는 손해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는군요. 그 넘치는 배려심이 여러 일을 떠맡는 원인이 되는 것 같지만요.

 

 그건 그렇고 왜 다 우리 반이야?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히라츠카 선생님은 묘하게 우리 반을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잡일꾼으로 동원한 것도 사랑일지는 모르겠지만.

 

  하기야 육체노동이니만큼 체육 동아리 인원들을 동원했다면 말은 된다. 학급 행사가 끝난 후 급하게 섭외되었는지 하야마는 화장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고 심지어 토츠카는 왕관까지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서로 다른 종류의 화사함은 피곤에 찌들어 있던 사람들에게 활기를 전해 주었다.

 

  “뒤풀이 자리라고 들떠서 사고치지는 말도록. 다시 한 번, 모두들 정말 수고 많았다.”

 

  환호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터져나온다. 모두들 입을 모아 서로의 노고와 노력을 칭찬하는 클라이막스 부분이다. 자축할 만한 자격이 얼마나 있는지는 고사하고 그저 공짜로 생긴 간식에 신이 났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의식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시로메구리 선배가 옆에 서 있는 유키노의 등을 툭 쳤다.

  

  “인사 해야지?”

  “하지만······.”

 

  있어야 할 사람을 제쳐두는게 내키지 않는지 유키노는 머뭇거리는 얼굴로 출입구를 응시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그 모습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는 성녀와 같았다. 

 

  그러니 유키노는 사람이다.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고민을 하는,

  아득히 높은 곳에서 굽어 살피는, 모두를 용서하는 신이 될 필요는 없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눈을 맞추는걸로 충분하다.

 

  “넌 그럴 자격이 있어.”

 

  시로메구리 선배의 격려에 결심을 굳힌 유키노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는다. 가슴을 편 유키노가 모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6주, 짧은 기간은 아니었고 실제로도 여러 일이 있었죠. 부위원장으로써 부족했던 탓에 여러 아쉬움을 남겼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이참!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너무 낮춘다구, 유키노시타 양!”

  “맞아요! 유키노 선배 덕분에 해낼 수 있었는걸요! 부위원장님 사랑해요!”

 

  시로메구리 선배는 넉살좋게 유키노의 어깨를 주물렀고, 잇시키는 한 술 더 떠 품에 안기기까지 했다. 일심동체가 된 선후배의 모습에 고생해왔던 실행 위원들도 눈시울을 닦았다.

 

  그러나 대다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유키노의 고별사가 자신들을 향한 게 아님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 약삭빠른 후배님은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는 와중에도 ‘부’를 강조해 발음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마다 주전부리를 받아들고는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삼삼오오 흩어진다. 예전 같으면 걱정했겠지만 굳이 나서서 저들을 끌고 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히라츠카 선생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받아들이는 것도 답하는 것도 본인의 자유라고. 영광과 공로는 줄 수 없으니, 저들이 목구멍으로 삼켜야할 건 좌절과 후회 뿐이었다.

 

  우리는 우리 앞에서 떳떳하다면 그걸로 족했다.

 

  xxx

 

  처음에는 다함께 모여 떠들썩한 분위기를 돋구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정한 포지션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럴 경우 편한 건 역시 같은 나이대의 또래들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유키노와 잇시키, 유이가하마의 조합은 그야말로 한창 때의 꽃과도 같은 싱그러움이 묻어나왔다.

 

  “그건 그렇고 유키노 선배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평범한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에요. 전에도 이런 걸 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지는 않단다. 아빠가 일하는 방식을 참고했을 뿐이야.”

  “아버님을?”
  “이로하 짱, 유키농의 아버지는 엄청난 분이라고? 무려 현역 의원이야!”

  “헉, 설마 봄에 있었던 선거에 나온 그분? 항상 신세지고 있어요!”

  “신세는 이쪽이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그 때문에 이런저런 자리에 불려간 경험이 있으니까. 아직은 흉내내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여름축제에도 불려 나왔던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그 엄격한 자기평가는 뭐냐고. 지금까지 보여준 유능함이 흉내 수준이라니, 장래에는 어떻게 성장할지 두려울 정도다.

 

  아, 그래도 견본은 있을지도. 

  

  유키노의 미래는 유키노 자신조차 모르지만, 내 사촌이 걸어가야할 길을 먼저 걸어나간 사람이 있으니까. 수평으로 시선을 옮기자 시간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뒤돌아본 그곳에는 앳된 시절의 껍질을 깨고 완숙함을 찾아가는 청춘들이 도열해 있었다. 어른의 문턱에 발을 걸친 시로메구리 선배와 어른이 되어버린 하루 짱, 이미 어른인 히라츠카 선생님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온다. 교복과 사복, 가운을 걸친 정장은 언밸런스했지만, 각자가 뿜어내는 매력 덕분에 세 사람은 마치 와인잔을 든 아가씨처럼 우아했다. 사 짱을 찾아갔을 때 잠깐 발을 들였던 어른의 세계, 흉내만 냈던 우리와 달리 그들은 분명 진짜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히라츠카 선생님이, 혈기와 연륜의 가운데에 위치한 멋들어진 아가씨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음, 빨리 왔군.”

 

  이 패턴은 익숙하다. 귀를 기울이자 출입구 모퉁이 너머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단연코 카와사키였다.

 

  “와아! 먹을 게 가득 있어!”

  “잠깐, 케 짱!”

 

  물론 작은 카와사키 쪽 이야기다. 한숨 잔 덕분에 체력을 회복했는지 그 맹렬한 기세에 타이시도 버거운 듯 했다. 제 오빠를 붙잡고 달음박질을 하는 동생의 모습에 사 짱은 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아직 부족했던 거야? 정말 케 짱은······..”

  “애들이 그렇죠 뭐~. 사키 언니도 저랬는걸요?”
  “내가 언제 그랬어, 맛 짱?”

 

  티격태격대면서도 나란히 걸어오는 두 사람. 그에 맞추듯 히라츠카 선생님도 걸음을 옮겼다.  아하, 그런 거였군. 어쩐지 인원수에 비해 양이 많다 싶더라니, 뒤풀이는 우리만 참석하는 게 아니었구나.

 

  “선생님이 부르신 거군요?”
  “아아. 오늘은 모두가 즐기는 날이니까 말이지. 앞으로도 몇 명 더 올 거다.”

 

  씨익 웃은 히라츠카 선생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하아먀, 손님이다. 저쪽에도 간식을 나눠주도록.”

 

  그 말에 사키와 코마치의 움직임이 멎었다. 타이시도 그러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케 짱은 아랑곳없이 오빠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슬아슬하게 휘청거리던 타이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식 테이블 앞에서 멈추고야 말았다.

 

  “······하야마, 씨.”

  “······안녕.”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 타이시는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켰고, 어색한 인사를 건넨 하야마 또한 긴장한 듯 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여자들이 부산스럽게 다가올 때,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케이카였다.

 

  “안녕! 오빠가 과자를 주는 사람이야?”

  하야마가 눈치있게 대답했다.

 

  “맞아. 꼬마 아가씨는 어떤 과자를 좋아하니?”
  “아무거나 좋아! 케 짱은 편식하지 않는걸!”

  “착한 아이구나. 그럼 전부 하나씩 나눠줄게.”

  “와아! 고마워!”

 

  케 짱은 마치 보물상자나 되듯이 껴안은 간식 바구니를 탓 짱을 향해 보여주었다. 어린 동생의 자랑에 맞장구를 쳐준 탓 짱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자리에 남겨진 하야마가 다음 손님을 돌아보았다.

 

  “카와사키 양은······.”

  “됐어. 배 안 고파.”

 

  딱 잘라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린다. 냉랭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책상을 걷어차지는 않았으니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케 짱이 보는 앞에서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던 거겠지. 그게 아니면, ······때리는건 나뿐이라는 말을 지키고 있는걸지도 모르지.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걸까?

 

  “핫 짱, 많이 받아 왔어!”

  “잘했어, 케 짱. 언니오빠랑 나눠먹을래?”
  “응!”

  “······배 안 고프다니까.”

  “하하하. 수고 많았습니다, 형님.”

  

  케 짱은 자그마한 손으로 간식을 덜어준 뒤 그중 하나를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하다는 듯 볼을 굴리는 케 짱과 달리 받은 선물을 뜯지 못 했다. 사키가 한 말처럼 배가 고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손에 배어든 땀을 움켜쥔 채,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데 모은다.

 

  “······.”

 

  팔짱을 낀 코마치가 하야마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려 나와 사키, 유키노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일그러뜨린 얼굴이 아주 조금 틀어져, 얼굴은 가만히 둔 채 시선만 뒤로 돌렸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깊은 한숨을 내쉰 코마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별 수 없지. 하루노 언니가 괜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조금은 부드러워진 눈동자였다. 호출을 받은 하루 짱이 시원스레 발을 뻗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맛 짱.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확실히 언질을 주었으니까.”

  “알았어. 하루노 언니를 봐서 이번은 넘어갈게. 그래도 개인적으로 싫은 건 어쩔 수 없어. 본인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후후, 그렇구나. 그치만 하야토는 하치만과 얘기해봤다고 하던걸?”

  “······오빠랑?”

 

  미심쩍은 눈초리를 내게 향한다. 으음, 말하자면 긴 이야기인데. 그래도 엄밀히 따지자면 코마치도 피해자였고, 사키나 타이시에게도 설명을 해야겠지.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깨 너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키노?”

  “가자.”

 

  작게 속삭인 유키노는 내 소매를 툭 건드린 뒤 앞장섰다. 순순히 따라가 간식 테이블 앞에서 멈춘다. 히키가야 둘과 유키노시타 둘에 둘러싸인 형세가 되자 하야마도 초조해 보였지만, 도망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채 기다렸다.

 

  “하치만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운을 뗐지만 유키노는 한동안 침묵했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은 먼 옛날의 추억을 헤아리는 듯 보였다.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감정을 추스리는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유난을 떨만한 일도 아니야. 하치만이 말한 것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하야마 군의 대응도 틀린 방법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자.”

  “······정말 그래도 되겠어?”

  “그래. 아무래도 좋아.”

 

  유키노는 훗하고 웃는 듯한 숨소리를 내며,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게 맞는 것 같거든.”

 

  하야마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유키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조금 변했구나.”

  “사람은 누구나 변해. 그밖에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고. ······변하지 않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힐끗 주위를 돌아본 유키노가 내게로 주의를 돌렸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강렬했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은은한 달빛처럼 따스하게 나를 비추는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수면에 비친 밤하늘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져 나간다.

 

  “그럼 코마치도 됐어.”

 

  어휴 한숨을 쉰 코마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확연히 누그러져 있었다.

 

  “당사자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조금 불안하긴 해도 하루노 언니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맞아. 앞으로는 언제나 곁에 있을 거야. 영원히.”

  “응. 하루노 언니가 잘 챙겨 줘. 못난이 오빠랑 착해빠진 유키노 언니가, 이제 더는 바보같은 짓 못 하도록.”

 

  두 번 세 번 강조하며 다짐을 받은 코마치는 그제야 안심하며 자리를 떠났다.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돌아온 언니가 걱정되었는지 케 짱이 아껴둔 카스테라를 내밀었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은 코마치는 두 손으로 빵을 갈라 큰 쪽을 돌려주었다.

 

  “맛 짱이 착해서 다행이야.”

  

  하루 짱이 흐뭇한 미소로 말했다.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저렇게 진지한 얼굴도 오랜만에 봤어.”

  “그러게. 못난 오빠 때문에 코마치가 고생이 많았지. 이제는 제 인생을 살 때도 되었어.”

  “그건 걱정 마렴. 오빠랑 달리 똑부러진 동생이니까.”

  “잘 아는구나. 역시 유키노야.”
  “······방금 그 말은 긍정해도 곤란한데.”

 

  그치만 사실인걸. 딱히 내가 시스콘이라 그런 게 아니라, 코마치는 모든 면에서 오빠보다 나은 여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함께 지냈던 가족을 갈라서게 만든 오빠를 용서해 주었다. 작은 가슴을 찢은 상처가 결코 얕을 리 없건만, 내색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왔다. 나와 유키노, 유미코의 관계를 되돌리려고 애썼고,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시켜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한 시간만큼, 코마치는 남들보다 빠르게 어른이 되어버렸다.

 

  미안하고, 고맙고, 자랑스러운 내 동생.

  평생에 걸쳐 갚아나가도 무리겠지.

  잇시키가 말했던, 머리 위에 짊어진 무게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받았던 것을 돌려주기에 일생一生은 너무나 짧아.

 

  “용서 받은 거려나?”

 

  하야마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뇌까리자, 하루 짱이 고개를 저었다.

 

  “용서고 뭐고 애초에 그런 문제가 아니었던 거지. 피해를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애매한 문제였으니까. 맛 짱이나 탓 짱, 그리고 사 짱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 하루 짱이 쓴웃음을 지었다. 동생들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숨기기라도 하는 것 처럼 눈을 감는다.

 

  덧없는 목소리가 공허한 허공 속에 사라져갔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미워할 아이들이 아니였던 거야.” 

 

  xxx

 

  “그럼 코마치는 가 볼게.”

  “벌써? 조금 더 있다가지 않고.”

  “충분히 놀았는걸 뭐.”

 

  보란듯이 코마치는 창밖을 가리켰다. 조금은 높아진 가을 하늘은 몰라보게 짧아져 있어, 하늘은 어느덧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일렁이는 태양이 도쿄만에 발을 담구자 마지막으로 뿜어낸 금빛 섬광이 타이시의 품에 안긴 케 짱의 얼굴을 비추었다. 연신 고개를 까딱거리는 걸로 보아 한창 꿈나라인 모양이다.

 

  “케 짱도 피곤해 하구, 슬슬 저녁 준비도 해야 하니까.”

  “아! 맞다, 저녁! 타이시, 잠깐만 기다려 줄래?”

 

  오늘 당번은 사 짱이었나 보군.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사 짱을 향해 타이시가 척 손을 들었다.

  

  “내가 할게, 누나.”

  “아냐. 가방만 챙겨오면 되니까······.”

  “괜찮으니까 좀 더 있다 와.  모처럼의 행사고, 누나도 무척 공들인 자리잖아. 마지막까지 어울려야지.”

  “타이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 짱은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케 짱 일은 걱정 마. 이만큼 먹었으니 저녁은 안 먹여도 될 거고, 씻고 바로 재울게.”

  “너는 어떡하고?”
  “있는걸로 간단히 해결하지 뭐. 어차피 밤에도 공부할 거라 많이 먹기도 그래.”

  

  커다란 눈망울이 변명거리를 찾듯 깜빡였지만 타이시는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사 짱은 잠시 고민했지만 곧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기특함이 섞인 밝은 미소로 동생을 배웅했다.

 

  “조심해서 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나도 곧 갈 테니까.”

  “알았어. 누나도 조심해.”

  “푸훗, 진심으로 하는 소리니?”

  “아니, 그냥 인사지.”

 

  마주보고 웃는 다정한 오누이처럼 보이지만, 어째 하는 말이 좀 무서운뎁쇼? 그야 사 짱은 치바 최강의 여고생이고, 저 다리에 맞을 바에야 달려오는 트럭에 몸을 던진다는 말도 있지만······. 뭐야, 그거. 내 친구 정말 멋있잖아?

 

  그 때 코마치가 내게 다가왔다. 조심스레 죽인 발소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감이 왔다. 비스듬히 사선으로 비껴 서 다른 사람의 시야에서 코마치를 가리고, 입에 담기 전에 이쪽에서 선수를 쳤다.

 

  “정말 괜찮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누나를 안 보고 가도?”

 

  뒤풀이를 하는 건 여기만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남아, 혹은 치바 시내로 나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축제의 잔열을 즐기는 중이다. 우리 F반도 교실 정리가 끝나는대로 치바 시내의 펍에 집합한다고 들었다. 정보제공자인 가하마스파이, 아니 유이가하마가 체육관에 있으니 유미코도 아직 학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마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까치발을 들고 귓속말을 건넸다.

 

  “아니, 먼저 갈게. 유미코 언니는 집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그래?”
  “그래.”

 

  맞는 말이다. 언제나 봐왔고, 항상 함께였다. 분명 코마치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코마치는 걱정하지 말고 오빠 일에나 신경 써.”

  “어이쿠야, 갑자기 확 들어오네?”
  “따끔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말을 안 들으니까. 가끔은 그렇게 해도 무시하지만.”

  “코마치의 안에서 나는 어떤 오빠야?”
  “말 안 듣는 애물단지 오레기. 사키 언니보다 걱정되는 사람 사귈 줄 모르는 히키코모리.”

  “정신이 번쩍 드는구만.”

  “······긍정하지 마. 농담이였으니까.”

 

  농담이어서 다행이야. 진심이었으면 마음이 꺾일 뻔 했거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코마치가 불쑥 셔츠깃을 움켜잡고는 슬며시 몸을 기댔다. 가슴팍에 닿는 숨결에 뜨뜻한 미열이 느껴진다.

 

  “반대야, 반대라구. 삐지지 마. 오레기.”

  “오레기는 반대가 아니구나?”
  “진짜, 다 알면서 그러는거 엄청 짓궂은 거 알아? 진짜 쏙 빼닮았다니까.”

  “코마치도 그러면서 뭘.”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지만.”

  수그린 머리 위로 추욱 늘어진 바보털이 인상 깊었다.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그 위에 이마를 갖다댄다.

 

  “알아, 다 안다고. 코마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말?”

  “어. 거기에 대해선 확실히 생각하고 있어. 조만간 모두에게도 털어놓을 생각이야. 여럿이서 힘을 합치면 같은 실수는 안 할 테니. 내가 잘못하더라도, 잡아줄 사람이 있을 테고.”

 

  품속에 닿은 코마치가 몸을 움찔하더니, 빼꼼 고개를 들었다. 두 눈동자는 경악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오빠, 정말 오빠 맞아?”
  “나같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는데.”

  “그건 맞지만, 그런 말을 할 줄은······. 평소의 오빠랑은 정 반대잖아.”
  “사람은 변하는 거야.”

 

  어설픈 표절이지만 코마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곱씹었다. 몇 번이고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이젠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다행이네.”

  “코마치, 이제 진짜로 갈게. 오빠도 수고해.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고 와.”

  “고마워. 조심해서 가.”

 

  품에서 떨어진 코마치가 표정을 바꾸었다. 언제나처럼 높은 텐션으로 타이시를 부르고는 능청스레 경례하는 시늉을 한다. 곤히 잠든 케 짱을 안고 잡담을 나누며 걷는 뒷모습에서 희망찬 미래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미래는 아직 조금 멀리 있지만.

 

  “코마치 짱, 갔네.”

  “가버렸네요, 쌀 짱.”

  “쌀은 뭐냐고, 쌀은. 저녁 준비를 해야하는 건 맞지만.”

 

  어깨 뒤에서 익숙한 당고머리가 튀어나온 탓에 뜨악했지만 잇시키 덕분에 핀잔을 주는 척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쌀이야? 없어선 안 될 존재라는 뜻인가? 그럼 맞지만.

 

  “아깝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인사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뇨, 있기야 아까 전부터 있었는데 말이죠······.”

  “뭔가 끼어들기가 힘들어서······.”

  “힘들긴 뭐가? 남매 사이엔 당연한 거잖아?”

  “우와······. 어떻게 생각하시죠, 유이 선배?
  “나, 나는 외동이라 잘 모르겠어~.”

 

  다른 집들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봐온 남매들이 전부 사이가 좋았으니 아마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히키가야와 카와사키, 유키노시타를 합하면 표본 수로도 적당하고. 엄마랑 이모는 예외. 그건 자매니까. 하루 짱도 가끔, 아니 지금도 짓궂을 때가 있고.

 

  “그래두, 아마 힛키네가 특별한 거라 생각해. 잘은 모르겠지만.”

 

  유이가하마는 코마치가 나간 출입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잘 모르는 거야? 뭐, 상관은 없는데. 

 

  “유이가하마도 슬슬 가 봐야 되지?”

  “응. 교실 정리두 끝났을 것 같구. 원래라면 나두 도왔어야 했는데 어쩌다보니 여기에 끼어 버렸네.”

  “상관없지 않나요? 저나 하타노 군도 여기 있는데.”

  “아니, 그건 좀 다르지. 심지어 하타노는 환자고.”

  “맞다, 그랬었죠~.”

  “너 말이다······. 아니, 됐다. 아무튼 잇시키의 말에는 나도 찬성이야. 하야마나 토츠카가 잡혀온 거 보면 일손이 달릴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거야 그렇지만······. 근데 토벳치는 왜 빼?”

  “아 맞다.”

  “힛키······.”

 

  나무라는 시선이 뺨을 콕콕 찌른다. 크윽, 그만 둬, 유이가하마! 상냥한 아이로부터 받는 경멸은 노멀 공격의 3배 데미지라고?! 이로하스처럼 쿨하게 넘길 수 있는 낯짝 따위 내게는 없다구!

 

  키득키득 웃던 잇시키가 내 어깨를 탁탁 쳤다.

 

  “선배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네요~.”

  “조용히 해······. 아무튼, 갈 거라면 데려다 주마. 나도 어차피 가방을 가지러 교실에 한 번 돌아가야 하니까.”

  “아, 그럼 저도 같이 가죠. 제 가방도 아직 교실에 있어서.”

  “싫어. 1학년 반은 최상층이잖아. 오늘은 더 이상 계단 오르고 싶지 않다고.”

  “으엑, 짠돌이.”

  “아하하, 그럼 같이 갈래? 하긴, 뒷풀이두 길어지는 거 같구, 힛키는 우리 반 뒷풀이 안 올 거 같구.”

  “당연하지. 내가 거길 왜 가. 보통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은 열에 아홉 리얼충이라고. 교실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나 막막했는데 네 덕분에 살았다.”

  “그러려고 나 기다렸던 거야?! 이상한 데서 소심해!”

 

  시끄럽네. 원래 나같은 외톨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 하나하나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법이라고. 움츠러들기를 거듭하다 땅을 뚫고 들어갈 자신도 있다. 교실 문을 열 때 쏟아지는 주목이 무서워 등교 시간도 앞당길 정도라고. 유이가하마 양은 절대로 모르겠지만 말야!

 

  “아, 그럼 유키노 선배도 가방 가지러 간 걸까요?”

  “그럴지두. 유키농두 반 뒤풀이같은 건 안 갈 것 같으니까. 부위원장이기두 하구.”

 

  잇시키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하자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어디서 본 거 같은 동작인데?

 

  “뭐야? 어디 갔어?”

 

  두 사람의 말에 체육관을 죽 둘러보니 과연 유키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사라진 거람?

 

  “히라츠카 선생님하구 얘기하더니 좀 전에 나갔어. 어디 가냐구 물어봐도 금방 돌아오겠다고만 했구.”

  “허어.”

 

  목적지를 밝히지 않은 게 의아하긴 했지만, 잇시키의 추측에도 일리가 있었다. 가방 회수정도야 사소한 일이고, 괜히 말했다가 혹여라도 유이가하마가 따라오지는 않을까 걱정한 거겠지. 돌아오는 길에 J반에도 들러봐야겠구만.

 

  그 때 조금 떨어진 곳을 지나가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히키가야, 돌아가는 거냐?”

  양손에 든 종이컵을 커다란 비닐봉투에 던져놓고는, 손을 털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뇨. 저는 가방만 가지러 갑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퇴근, ······이 아니라 하교해야 할 것 같아서요. 겸사겸사 유이가하마랑 잇시키도 데려다주고요.”

 

  현장 퇴근이냐고, 진짜 직장인이 다 됐구만. 히라츠카 선생님도 어이가 없는지 애잔한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유이가하마도 수고했다. 조심해서 가라.”

  “아, 네. 다음에 뵈어요, 히라츠카 선생님.”

  “잇시키도, 1학년인데도 선배들 사이에서 수고 많았다. 아주 훌륭했어.”

  “감사합니다~.”

 

  유이가하마와 잇시키는 꾸벅 고개를 숙인뒤 출입구 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 뒤를 따르려다······ 잊어버릴 뻔한 의문을 물어보았다.

 

  “마침 여쭤볼 게 있는데 잘 됐네요. 가는 길에 유키노도 찾아보려 하는데 혹시 아시는게 있으신가요?  유이가하마 말로는 선생님이랑 이야기한 뒤 나갔다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구나.”

 

  턱을 매만지며 애매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뭐, 그 유키노시타고, 오늘 하루 고생했지 않느냐. 어딘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역시 그쪽의 가능성이 높겠지. 내 사촌의 체력을 생각해보건데 꽤나 지쳐 있을게 분명하니까.
  흠흠 납득하며 뒤돌아서려는데 히라츠카 선생님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쪽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마침 잘 됐군. 교실로 간다고 했지?”
  “네? 어어, 그런데요? 갑자기 왜······.”

 

  뒷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가온 히라츠카 선생님 때문에 막혀버렸다.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이 넘실대며 춤을 추더니 차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러나 그토록 인상깊던 향기는 귓가에 속삭인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내가 허언을 하는 것 본 적 있나?”

  “아니, 없지만요. 그래도 이건······.”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기한은 오늘까지. 절대로 넘기지 말도록.”

  

  제멋대로 다짐을 준 히라츠카 선생님은 멋드러지게 손을 흔들고는 원래 일행에 합류했다. 움직일때마다 휘날리는 가운자락이 저녁노을의 빛무리 속에 빛난다. 뒤통수를 맞은 충격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주는 시로메구리 선배덕에 참을 수 있었다. 으으으, 치유의 천사 메구리엘. 정말 최고야.

 

  “핫 짱, 느긋~하게 갔다오렴!”

  “······응.”

 

  하루 짱, 이 악마.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힛키, 거기서 뭐해?”
  “빨리 오세요, 선배~!”

  “네네······.”

 

  인정하기는 싫지만,

  상사와 동기와 후배에 치이고도, 사소한 일 하나에 감동해 다시 힘을 내는 나는,

  역시, 사축이 적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다.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온 자동차는 바다를 끼고 남동쪽으로 달려나갔다. 누구에게나 조금씩 불편한 자리였지만 운전자의 실력 덕분에 승차감만은 쾌적했다. 약간 빠른 속도도 적절한 감속과 핸들 조작에 묻혀, 조금의 덜컹거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생들 앞에서 한 말이라 어느 정도는 과장이 들어갔을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무슨 생각이야?”

  “뭐가?”

 

  순순히 대답해줄 것 같진 않았지만, 역시 예상대로다. 서쪽으로부터 뻗어나온 햇빛이 운전석을 찔렀지만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즐기는 기색마저 묻어나왔다. 케이스 홀더에는 선글라스가 들어있을 테지만 그녀는 마치 태양과 대결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눈을 치떴다. 그것은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 배우처럼 무척이나 떳떳하게 비춰졌다.

 

  그것이 부러웠다.

 

  뭐든지 마음내키는 대로 해도 미움받지 않는다. 자리에 없어도 누군가의 의지가 되어준다. 설령 본인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그녀와 친한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 그녀가 나타나 구해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맹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과가 뒤바뀐 신뢰다.

 

  나는 그것이 부러웠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했다.

 

  체인 메일을 접했을 때 나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유키노는 승부욕이 강한 타입이다. 적대적인 스탠스는 벗어날 수 없겠지만 난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우정, 최소한의 옛정 정도는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유키노는 그러지 않았고, 늘 그랬듯이 그에게 의지했다.

 

  언제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예리코의 성벽 아래에서.

 

  어째서 유키노는 나를 의지해주지 않는 걸까? 유소년기를 지배왔던 의문은 정답이자 또다른 의문인 한 이름을 제시했다. 

  히키가야 하치만. 

  그와 나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와 나의 행동은 어디가 달랐는가?

 

  순수한 호기심이기도 했고 사상을 부정당한 자의 질투이기도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분명 그들의 본질은 같았다. 그들이 말했던 대로, 둘이서 하나다.

  유키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치만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거부당할 것은 알고 있었고, 때로는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과 엮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받아든 성적표는 분명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얻은 것이 있었다.

 

  임간학교에서 츠루미 양을 만났을 때 나는 종전의 방식을 고수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친해질 수 있다’는 명제는 내 좌우명이자 철학이고, 어떤 의미로는 이념이었다. 그것이 풋내나는 이상론이자 자기만족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날 밤, 하치만의 곁에 앉은 츠루미 양은 전에 없던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때와 똑같은 질문이니 변명할 수도 없다. 내가 억지로 밀어붙였기에 예정된 사건이 일어났고, 하치만이 당연하다는 듯 내세운 해결책이 츠루미 양을 구원했다.

  

  그가 정답이고, 나는 오답이다.

  참을 수 없는 죄책감과, 죄악감이 솟아올랐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써넣는 수식이 정답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혹여라도 상대가 다칠까 배려하며, 정성을 다해 공들인 계획. 나는 그저 초조한 나머지 떼를 썼을 뿐이다.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니까. 의지하고 마는게 두려우니까. 내가 뒤집어썼어야 할 진흙을, 또다시 짊어지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차라리 나를 비난해 주었으면 했다.

  욕을 하든 주먹을 날리든, 모든 게 나의 잘못이라고 비난받고 싶었다.

  그에게서 훔친 것이나 다름없는 ‘모두의 하야마’는 거짓이라고 부정당하길 바랬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그러지 않았다.

 

  울긋불긋한 조명 아래, 손에 쥔 불꽃의 은은한 빛무리에 비치는 얼굴들.

  한 때는 나도 저곳에 있었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자 굴러온 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내치지 않았고, 무례한 언동에도 인내해왔다.

 

  얄팍한 용서보다도 더욱 쓰라린 거절.

  이제 다시는 저 따뜻한 곳으로 갈 수 없겠구나.

  그것이 내가 받아든 마지막 성적표였다.

 

  “미 짱은 잘 들어갔을까?”

  

  돌아보지 않은채 하루노 누나가 질문했다. 본인이 내려줬으니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 그 묘하게 걱정스런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집앞에 데려다 준 사람이 다른 길로 샐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니까.

 

  “······그렇겠지.”

  “흐음~.”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는지 적당히 맞장구를 친 하루노 누나가 콧노래를 불렀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에 고정된 상태. 

  

  치바마을에서의 이동경로를 따지자면 토베와 히나를 따라 치바역 앞에서 내리는 게 나았다. 그러나 하루노 누나는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조수석 문을 잠궜다. 평정을 가장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차는 바늘방석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히키가야 가로 간다는 사실보다, 우리 두 사람을 차에 남긴 하루노가 무슨 말을 꺼낼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룸미러를 통해 본 유미코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그러나 하루노 누나는 아무말 없이 히키가야 가 앞에 유미코를 내려주고는 잘 가라며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만개한 장미처럼 아름답던 얼굴이, 차가 출발한 순간 무기질적인 인형으로 변모했다. 운전하는 내내 그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알려주지 않았기에 목적지는 모른다. 거기에 나를 가장 마지막에 내려주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다가올 파국을 예감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기다리던 때가 왔다는 모종의 기쁨마저 들던 찰나,

  자동차는 그런 내 예상과 한참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으윽, 뻐근해라. 운전을 오래하면 어깨가 뭉친다니까~.”

 

  차에서 내린 하루노 누나가 기지개를 폈다. 낯선 이국 땅에 온 것처럼 주위를 살피며 나도 차에서 내렸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다 내음과 신도심의 풍경에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다리 위, 매년 2월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반환점으로 사용되는 장소다.

  

  어째서 여기에······, 그 의문에 대답하듯 다리 난간에 다가간 하루노 누나가 입을 열었다.

 

  “이쁘지? 시즈카 짱이 좋아하는 곳이야. 차를 얻어타던 시절에는 종종 같이 놀러오곤 했어.”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루노 누나가 ‘그들’이 아닌 누군가와의 추억을 말하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의외였던 건 감상이다.

   

  물론 이 주변의 경치는 객관적으로도 아름답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는 햇살을 받아 넘실거렸고 남북으로 이어진 도로는 시야의 끝까지 뻗어 있었다. 가리는 것 하나 없이 쭉 펼쳐진 하늘은 계절을 망각한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결국 아스팔트로 포장된 가교와 다리일 뿐이다. 무기질적인 석조 장식물에는 군데군데 새똥이 가득했고,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도쿄만의 공장지대는 벌건 대낮에도 보란듯이 회색 구름을 내뿜는다. 우중충한 여름 하늘 아래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전신을 끈적하게 훑고 지나갔다.

 

  5년 전의 하루노 누나라면 관심조차 주지 않았겠지.

  하지만 난간에 기대 바닷바람을 쐬며, 은은한 콧노래를 부르는 하루노 누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즐거워 보였다.

 

  무엇이 그녀를 바꾸게 했을까?

 

  “뭘 생각하고 있는지 맞춰 볼까?”

 

  돌아보지 않고 비수를 날렸다.

 

  “하고 싶은게 있는데 잘 안 됐어. 만회하려 했지만 실패했지. 여태까지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기분이 괴로워, 그걸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그 아이들은 더 이상 나를 봐주지 않아.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 아이들은 마음을 닫아버렸으니까. 몇 번을 다가가고, 사과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아.”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귀를 막는다 해서 들리지 않는 게 아니었고, 도망칠 곳도 없었다.

  또 다른 내가, 가슴속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하루노 누나의 목소리에 겹쳐진다.

 

  “웃기지 않아? 이 지경까지 와서도 자기 생각밖에 못 하는 자신이?”

 

  킥킥대는 웃음소리는 참을 수 없는 조소와 역겨움, 그리고 후회를 품고 있었다.

 

  “사과하고 싶다, 잘못을 빌고 싶다는 미명하에 잘도 그리 뻔뻔하게 다가갔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싹 닫고 말이야. 명백히 거부당하고 있단 걸 알면서도, 오지 말라고 밀어내는 걸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어. 가슴속 깊은 곳에 품고 살아온 죄악감이 지겨우니까. 흑역사를 지우고 앙금을 털어버리고 싶으니까. 고개숙인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할 아이가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 용서 받았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었던 거지. 이제 겨우 딱지가 덮인 해묵은 상처를 들쑤시면서.”

 

  그 질타가 스스로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도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한동안 묵묵히 노기를 식히던 하루노 누나가 빙글 몸을 돌렸다.

 

  "있지 하야토, 네가 정말 사과하고 싶다면, 나에게 협력하지 않을래?"

 

  어때? 라고 말하는 것처럼 으쓱해 보이는 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따귀라면 몰라도 그 하루노 누나가 나 따위에게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건 그 다음 말이었다.

 

  “사실은 그 아이들도 알고 있어. 너희가 겪었던 일은 어린 아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실수였단걸. 별 것도 아닌, 정말로 사소한 일들이 얼키고설킨 결과일 뿐이니까.”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에는, 그럼에도 확실한 꾸짖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 시점에서만 유효해. 설령 그 아이들이 부정한다 한들 우리는 죄인이야. 우리의 잘못은 그 시점에서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아주지 않고 그저 수단만을 그르다 비판했었지. 차가운 길바닥에 내팽겨쳐진 11살 어린아이에게······.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고.”

 

  우악스럽게 움켜잡아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5년 전 겨울, 잔설내린 공원에서 하치만을 밀쳤던 손이다. 축축하고 더러운 대지에 엉덩방아를 찍던 그 모습이 내가 그와 마주보았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유키노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녀의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이 있었고, 사용인이 있었고, 많은 친구들이 그녀를 위로했으며, 나 혼자 ‘친구’라고 생각한 수많은 동급생들이 동정을 표했다.

 

  하지만 하치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밀어버렸으니까.

  모두의 적이 되었으니까.

  시간이 멈춘 지옥 속에서 5년을 갇혀있었던 것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해.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그러나 용서는 바라지 마. 평생을 뉘우치고 자책하며, 죗값을 온전히 끌어안고 사는 거야. 네가 직접적으로 나설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니까.”

 

  거기까지 하는 것도 사치다. 나는 그들 앞에 설 자격이 없다. 하루노 누나의 말은 구태여 되짚을 필요조차 없는 진실이고,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외면했던 허물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낯짝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을까?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이기에 이해와 용서를 논했던 걸까?

 

  거절해야 한다. 

  수락해서는 안 되는 제안이다.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인간이라면, 더 이상 그들 곁에 있어서는 안 됐다.

 

  그러나  하루노 누나는 내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대신, 항상 곁에서 지켜봐줬으면 해. 그 아이들 곁에서 배우고, 그 아이들을 도와줘.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해해 줄 거야. 자신들에게 향하는 선의를 거절할 정도로 매몰찬 아이들은 아니니까.”

 

  자식을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힘겹게 말을 잇는다.

  대답이 아닌 의문을 겨우 내뱉었다.

 

  “하루노 누나는······,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누나는 가족의 행복이 제일이거든. 지켜주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투로 잘라 말하고는, 하루노 누나는 다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많은 걸 의지했어.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면서, 내가 해결했어야 할 문제를 떠넘겨 왔지. ······어쩌면 지금도 그러고 있는건지도 모르고.”

 

  아련한 그 시선은 바다보다 멀리 있는 과거를 더듬는다. 어스름 속에 가려져 있지만, 바로 어제 일 처럼 생생한 추억들을 되짚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내게 있어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어. 타산적인 계산과 가식 뿐이었지.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꿍꿍이가 있었고, 내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만 했어. 재벌집 아가씨란 건, 유키노시타 가의 장녀란 건 그런거니까. 내 진정한 모습 따윈 누구도 봐주지 않으니, 진실된 관계 같은건 없거나 적어도 나와는 인연이 없는 거라고 체념했어.”

 

  초등학생 시절 하루노 누나는 바빴다. 사장 영애에 명문가, 정치가의 장녀. 그 모든 걸 물려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 나이대에 이룰 수 없는 성취를 요구받았다. 얼굴을 볼 수 없는 날이 늘어났고, 개인 시간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 순진한 동생과 달리 세상의 풍파를 먼저 맞았던 그녀가 이토록 짓궂은 성격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의지할 곳도 없이 의지받기만 했던 하루노 누나.

  자칫 어긋날 수도 있었던 그녀를 지탱해주고, 동생들의 보호자로 거듭나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목이 메인 목소리에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그 순수하고 착한 아이는, 단 한 마디 말로 나를, 유키노를 구원해 줬으면서, 한 번도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어. 대가는 커녕 스스로 진흙을 덮어쓰더니 미움받으려고 가면을 썼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유키노의 행복이라 믿으면서 말이야······. 믿어져? 초등학생이, 나보다 어렸던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믿어지냐고?”

 

  마치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벅차다는 듯이, 그러나 하염없이 되뇌였다.

 

  “내게 있어서 그 아이는 빛이야.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태양이자 어두운 밤길을 비추는 달빛이기도 해. 내가 방황할 때, 내 마음을 붙잡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버팀목······. 지난 10년간, 핫 짱은 내게 그런 존재였어.”

 

  뜨거운 숨결을 토해낸 하루노 누나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고쳐쓴 가면의 눈구멍 속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빛을 뿜는다.

 

  “그러니까 난 그 아이를 지킬 거야. 그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바꿔 말하면, 그 이외에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어.

  그것만이, 내가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속죄할 수 있는 길일 테니까.”



  오늘 지는 태양이 내일도 뜰 거라 믿으며.

 

  “어머, 어쩐 일이니?”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거든.”
  “문이 잠겼으면 어쩌려고?”
  “다 알면서 그러기야?”

 

  가방속에 넣어둔 종이를 냉큼 꺼내 눈앞에 흔들었다. 유키노는 쿡쿡 즐거운듯이 웃고는 들고있던 펜을 살짝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 반응으로 보건데 방금 전까지 쓰고 있던 내용도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당신도 진로 조사서구나?”

  “나는 그게 암호인줄 알았지. 진짜로 제출하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체가 거짓말이지만 말이야. 이중 암호라니 뭔가요, 선생님? 급하게 써낼 필요는 없다면서 문화제 뒤풀이에 이야기를 꺼내다니요. 이렇게 어설픈 연기도 없을 것이다.

 

  “배려해 주는 건 알지만, 이정도로 노골적이면 부담스럽다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용무로 작업을 한다. 석양이 지는 특별동 부실은 어딘가 신비로운 푼위기를 풍겼다. 흡사 세계에서 분리된 자그마한 공간에 나와 유키노 둘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 소년만화만 챙겨보시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수비범위가 넓으셨던 모양이다.

 

  “동감이야.”

 

  깊은 한숨을 내쉰 유키노가 말했다.

 

  “학교를 쉬었던 날도 그랬어. 내가 결석했다는 걸 당신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히라츠카 선생님이 멋대로 발설해 버려서······.”

  “아니, 그건 잘 하신 일 같은데. 왜 그랬던 거야, 유키노?”
  “결과적으로 본다면 맞아. 당신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때는 컨디션도 안 좋았고, 무엇보다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

  “유키노.”

 

  교실 뒷편에 놓여있던 의자를 평소와 다른 위치로 옮겼다. 본래 손님이 왔을 때 내어주는 유이가하마의 맞은편 좌석이다. 한 때는 의뢰인으로서 한 번 앉아본 자리이기도 했다.

 

  “실언을 했구나. 철회할게.”

 

  순순한 대답에 만족하고, 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사과는 하게 해주렴.”

  “어이······.”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했건만 다 끝난 이야기를 되돌리다니, 이 고집불통.

  불만을 담아 흘겨보았지만, 그럼에도 유키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틀려. 이건 조금 다른 문제야, 핫 짱.”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말을 잇는다.

 

  “우리가 겪었던 일들은, 어쩌면 내게도 책임이 있을 지 몰라. 사가미 양의 폭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건 그녀가 실행 위원장이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 만약 내가 시로메구리 선배의 제안을 수락했더라면 좀 더 진중한 분위기에서 위원회를 이끌 수 있었겠지. 당신이랑 함께한다는 사실에 들떠서······.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던 거야.”

 

  고백하는 목소리에 후회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마음 속 응어리를 털어놓은 자리엔 기분좋은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잘잘못을 가리기 애매한 문제라면 전적으로 본인의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 우리가 엇나간 이유도 거기에 있겠지.”

 

  단 하나의 진실은, 유키노가 무척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 기대만큼 나 또한 진심으로 되돌려준다.

 

  “나도 사과할게. 유키노를 마주보지 못 하고 또다시 어물쩍 도망치려고 했어. 누나의 일을 핑계로 거리를 뒀고 답해야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너를 상처 입히기 싫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그날과 같은 선택을 할 뻔 했어.”

 

  유키노시타가 건네준 실을 내가 받아주지 않았기에, 갈 곳 잃은 타래는 허공에서 꼬여 버렸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을만큼 엉켜버린 감정들이 막막했다. 우리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제였건만, 나 혼자 짊어지겠다며 멋대로 들고 도망쳐 버렸다. 수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실타래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지기를 바라며······. 선의의 탈을 쓴 이기심을 내세운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너에게 상담할게. 고민도 아픔도 모두 나누고 싶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풀 수 밖에 없다.

  응어리를 풀고, 엇갈린 마음을 마주봐, 우리 두 사람의 형태로 엮어 나가는 것이다.

  유키노는 기다려 주니까.

  폭풍우 치던 그 날 처럼, 아직도 나를 기다려 주니까.

 

  “그래줄 수 있을까?”
  “물론이야. 나는 언제나 그러고 싶었는걸.”

 

  유키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맞춰왔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이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렇네.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의자를 끌고 거리를 좁힌다. 어깨가 맞닿을만큼 가까이 앉은 우리는 서로의 진로 조사서를 나란히 펼쳐놓았다. 무엇이든 함께 고민하며 나란히 걸어간다는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 

 

  무형이나 무한하며, 기한은 무제한인, 변하지 않을 신뢰였다.

 

  “역시 유키노시타 건설 쪽을 지망할 거야?”
  “확정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래.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분야이기도 하고.”

  “하긴, 유키노는 재능이 있으니까.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도 잘할 거야.”

  “칭찬이 과하구나. 언니에 비하면 재능이랄 것도 없어. 내게는 고등학교 문화제조차 벅찼는걸. 놀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얼굴을 돌린 유키 짱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쑥스러운걸까, 그것도 아니면 석양 탓일까. 적어도 그 두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무슨 말이니?”

  의아한듯 고개를 기울이는 유키노를 향해 자세를 바로했다.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망설여졌지만, 지금이라면 분위기를 탔다는 좋은 핑계도 있다. 어차피 후회할 거면 전하는게 낫다.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 정 안되면 우리 집에 와도 된다고······.”

  “······뭐?”
  “오, 오해는 하지 마! 나는 그저 천천히 생각하는게 좋지 않나 싶을 뿐이니까! 진로는 중요한 거잖아? 먼 미래의 일을 지금부터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고교생의 미래계획이라고 해 봐야 대학 정도가 적당하겠지. 앞날은 어찌될지 알 수 없고, 공부를 하다보면 새로운 분야에도 흥미가 생길 수 있어. 유키노는 뭘 해도 될 테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정 안 되면 내가 나가면 되니까······, 그, 어차피 대학에 진학하면 쫓겨날 거 같고, 그럼 내 방이 비고······.”

 

  틀렸다. 첫단추부터 글러먹으면 손을 대봐야 어긋나기만 할 뿐이다. 알맹이가 없는 말은 중간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고 이제는 나조차도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엄마나 아빠도 좋아할 거구, 누나나 코마치도 환영해 줄 거야······. 아무도 네게 뭐라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이 흐름에 맞출 수 밖에.

 

  “거기라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유키노는 휘둥그레진 눈을 껌뻑거리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구나.”

  “응······. 학부모회에 그만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그 사람밖에 없으니까.”

 

  진학교라고 해서 학부모회에 특별한 권한이 있는 건 아니다. 명성에 걸맞는 교육서비스와 제 자식의 성적만 보장된다면 대체로 만족한다. 고작 한 달 남짓한 축제따위는 지나가는 이벤트일 뿐 관심대상이 못 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은 걸 요구하는 부모도 있는 법이다.

  성적은 학년 톱, 인성은 흠잡을 데 없고, 문무를 섭렵한 그 능력은 조직을 이끌어나갈 역량까지 갖췄건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기대치를 높여 잡는다.

 

  학교까지 찾아와 압박을 줄 수 있고, 그 사실 자체가 영향을 끼칠만큼 높으신 분.

  재학생들의 부모 중에서 유키노시타 이모만큼 적임자는 없었다.

 

  “그 말대로야. 아마 내게도 언니와 같은 성과를 기대한 거겠지.”

 

  체념한 표정으로 유키노가 뇌까렸다.

 

  “언니가 개최한 문화제는 유명했으니까. 고교 문화제 정도로는 스펙으로 써먹긴 애매하지만, 상류층 집안의 아이가 돋보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알아주는 진학교니만큼 외부인에게도 눈도장을 찍을 수 있어. 기업이나 정치권에서 요구하는 ‘리더십’ 분야에서도 그럴듯한 경력이 되어줄 테고.”

  “유키노가 위원장일 거라 생각한 거구나.”

  “응. 엄마는 ‘나’에게는 관심이 없으니까.”

 

  사가미가 제 노릇을 못 했으니 대외적으로는 유키노가 위원장으로 알려져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교를 몇 차례나 드나든 어머니에게 변명이 되어주지는 못 한다. 자기 딸의 기초적인 생활조차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분명 정상적인 교류도 오래 전에 끊겼을 터. 그러니 이런 번거롭고도 간접적인 간섭방식을 택한 걸 테고.

 

  “이름있는 대회나 외부 행사에 참가한 적도 없어. 봉사부라는 자유 동아리의 회장자리는 스펙이 되지 못 해. 기업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대가없는 봉사활동 자체를 이해하지 못 할 거야. 엄마에게는 내가 시간만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얼른 대꾸하지 못 하자, 유키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피더니 일부러 크게 목을 가다듬었다.

 

  “실행 위원장을 맡을 수 없었던 건 그런 이유도 있었어. 언니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처럼 보이잖니? 시로메구리 선배도 언니의 후배니까, 유키노시타라는 이유만으로 특혜를 받는 것처럼 여겨졌을 거야. 실제로도 그런 불만이 나오기도 했고.”

 

  명백히 나를 위로하려는 밝은 목소리였다.

  역시, 좀 더 일찍 서둘러야 했는데..

 

  “유키노.”

  “응, 듣고 있어.”

 

  거리를 더욱 좁힌 뒤 유키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제는 필요없어진 진로 조사서는 저 멀리 밀어둔 채.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할 미래는, 대학보다 더 가까이 있으니까.

 

  “정말 미안한데, 내가······.”

  “후후, 왜 사과하는 거니, 핫 짱?”

  허공을 한 번 휘저은 유키노의 손이 무릎 위에 놓인 내 주먹을 감싸쥐었다.

 

  “미 짱 이야기지?”
  “······어.”

  “순서가 반대가 되어버렸구나.”

  “그러게.”

  “계획은 있어?”
  “생각 중이야.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또렷한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뒷말을 재촉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면, 유키노는 화낼 거야?”
  “후후, 그렇게 말하면 화내지 말라는 걸로 들리잖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황급히 반박하려고 한 순간,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에 포옥 얹혔다.

 

  “농담이야. 당신이 얼마나 나를 아껴주는지 알고 있는걸. 또 그만큼 유미코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어렸을 때 부터 쭈욱 봐온 당신이니까.”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마음이 녹아간다.

 

  “그래도 말이지, 한 가지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 나는 하치만을 좋아하는 만큼, 하치만이 좋아하는 만큼 유미코도 좋아해.”

  “유키노······.”

  “같이 하자.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혼자서 불가능하다면 둘이 하면 되는 거야. 거기에, 우리私達는 더 이상 혼자一つ가 아니잖아?”

 

  둘이서 하나二人で一つ.

  어렸을 적 즐겨본 특촬물에서 나온 대사이자 좌우명, 또는, 우리들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문자 그대로 서로만 있으면 좋았던 우리는, 둘이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무모하리만치 치기어린 자신감이었다.

  우리는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았고, 세상의 풍파 앞에선 촛불처럼 미약했다.

  그런 우리가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 뒤풀이장을 빠져나와 단둘이 앉아있을 수 있는 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손을 보태주는 친구가 이토록 많이 있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나를 놓지 마.”

 

  찬란하게 저무는 태양 아래,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끝을 고했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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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말할 것도 없이, 히키가야 하치만은 시스콘이다.



  첫째 날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이번 문화제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기록 잡무.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게 사진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셔터를 눌렀지만, 그날 저녁 카메라를 건네받은 잇시키의 표정은 미묘했다. 초점이 어긋났다느니, 구도가 어색하다느니, 졸업 앨범 따위에 넣기 위해선 어떤 상황인지 한 눈에 들어와야 한다며 퇴짜를 놓기 일쑤. 내게 남은 건 너덜너덜해진 마음과 팽팽하게 당기는 종아리 뿐이었다. 엄마 아빠도 이랬으려나, 그건 참 슬픈데.

 

  그래도 잇시키는 악마는 아니었다. 시무룩한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대책을 마련해주었다. 지나가던 하타노를 낚아채 단기속성 강좌를 개설한 것이다. 잇시키 식式 여고생 셀카촬영법과 인터넷 업로드용 사진 편집, 목적은 다르지만 어쩐지 잘 맞물리는 두 기술을 습득했다. 덕분에 카메라 조작법에도 익숙해졌고, 자신감도 붙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지······.”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했다는 걸, 너무도 늦게 깨닫고 말았다.

 

  “너무 많잖아, 우리 학교는 얼마나 유명한 거냐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인근의 한가한 주민은 죄다 모였는지 복도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오늘은 문화제 둘째 날. 외부인들이 찾아오는 일반 공개일이다. 주축이 되는 건 중고등학생들이지만, 그 외에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나이대도 각양각색. 여기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니, 그것도 생면부지인 사람에게 말을 걸면서······? 마음같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마음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어른은 아니지만, 무책임한 어리광이 통할 나이도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로 도망친다면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어. 유키노도 잇시키도 하타노도, 다른 모두도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 그들을 배신하는 건 나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정신차리고, 강하게 나가자, 할 수 있다, 하치만!

 

  “저기······.”

 

  몇 차례의 실패를 발판삼아, 좋은 분위기의 여고생들에게 말을 거는데 성공했다. 사실은 눈이 마주친김에 질러봤을 뿐이다. 좋은 분위기냐니 뭐냐고, 한 물 간 양아치 대사잖냐······.

 

  “저희들이요?”

  “네.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만.”

 

  팔에 매단 완장을 보여주며 덧붙였다. 대문짝만하게 적힌 부서명 덕분에 여고생들의 경계심도 낮아진 듯 했다. 다행이군. 내 말솜씨로는 설명은 커녕 무조건 오해를 사리란 확신이 있었거든. 중요한 건 이 다음이다.

 

  “실례가 안된다면,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 숙였다. 어떻게 대응하려나? 역시 거절할까? 내 입장에서야 거절해주는게 마음 편하지만 마감은 코앞이고, 부장님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은데······.

 

  슬쩍 훑어보았지만, 역시라고 해야할지 여고생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니, 당황했다는 쪽이 가까울까? 머리를 맞대고 이쪽을 힐끔힐끔, 갑작스러운 권유를 어떻게 거절해야할지 난감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실패로구나. 하긴, 나같이 수상해보이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허락이 떨어질 리가 없지.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웠죠? 방문객 촬영 일이 처음이라 마음이 급해, 민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아무쪼록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즐겨 주세요. 모두가 열심히 준비했으니 분명 재밌을 거예요. 바쁜 시간을 뺏은 점 다시 한 번 사과 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기껏 기대하고 와주신 손님들을 나 때문에 발길을 돌리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더 기분 상하기 전에 비켜드리자, 그렇게 철수하려던 때였다.

   

  “잠깐만요!”

 

  처억 한 손을 치켜든 여고생이 내가 가려던 방향을 가로막았다.

  뭐, 뭐지?

 

  “기다려 주세요! 방문객 촬영을 하고 있다구요?”

  “네, 네에······. 그렇습니다만?”

  “그말인 즉슨?”
  “즉슨?”

  “저희를 찍으신다는 건가요?” 

  “그렇죠?”
  “그쪽분이?”

  “네, 제가······.”

  “저, 정말로요?!”
  “그, 그런데요?”
  “다시 말해, 제 사진을 원하신다는 거군요?”

  “마, 맞는 말씀이긴 한데, 개인의 사진이라기보다 주변과 어우러지는, 말 그대로 문화제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거라서······.”

 

  질문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한 걸음씩, 서로 다른 여고생이 튀어나왔다. 정체 모를 압박에 압도당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벽에 몰려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한심했는지 가장 활발하게 말을 꺼냈던 여고생 A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좋아요.”

  “네? ······지, 지금 뭐라고?”

  “찍으셔도 좋다는 말씀이에요.”

 

  눈짓을 주고받은 여고생들이 뒤로 물러났다. 압박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사고는 정리되지 않은 채. 수락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대체?

 

  “예쁘게 찍어주세요~.”

  “아! 자, 잠시만요!”

 

  느닷없이 취한 포즈에 당황해 카메라를 잡은 손이 마구 떨렸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그럴듯한 사진을 건져내는 데는 성공했다. 개인적인 판단만은 아니다. 우르르 달려온 여고생들도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웃어 주었으니까. 

 

  고마워요, 잇시키 사부님. 당신의 가르침은 헛되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여고생 A가 불쑥 말을 꺼냈다.

 

  “촬영된 사진들은 어떻게 되나요?”

  “홈페이지에 업로드 될 예정이에요. 내년 문화제를 방문해주시는 분들께 참고가 될 수 있도록요. 매년 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진 자료가 있는 편이 도움이 될 테니까요.”

 “아아, 그런 거였군요. ······혹시나 했는데.”

 

  동시에 한숨쉬는 세 사람.  왠지 모르게 시무룩한 얼굴인데? ······아, 혹시 그건가?

 

  “그, 너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당사자의 동의 없이 사진을 게재하지는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눈앞에서 지워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아뇨, 그건 아니구요! 오히려 더 찍어줬음 하는데!”

  “엥?”

  “나도 찬성. 모처럼 추억인데 지우면 아깝잖아요. 대신 그쪽분도 같이 찍어요.”

  “저, 저랑요?”
  “오빠도 여기 재학생이고, 외부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진은 그림이 되잖아요? 분명 괜찮을 거에요!”

 

  그렇구나! 이제 알았다. 이 사람들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공적인 업무란걸 이해해주고 있어. 사람에게 말도 제대로 못 거는 외톨이란 건 처음 몇 마디로 들통났지만,  그걸 비웃긴 커녕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해. 정말 좋은 사람들이구나.

 

  “고맙습니다. 그럼 얼른 촬영을!”

  “아, 사진은 제 휴대폰으로 찍을게요.”

  “네? 그치만, 그래선 기록이······.”

  “나중에 보내드리면 되잖아요? 자, 이쪽 보고 치-즈!”

  “헉, 어느새?! 아니 그보다 가깝지 않나요?”

  “에이, 이 정도는 보통이죠. 포즈는 어떤 걸로? 팔짱이라도 껴 볼까요?”

  “아니아니, 그건 안 되죠! 그보다 제 카메라로 찍지 않으면 안 되는데요?!”

  “어차피 오빠 카메라도 디카고, 요즘은 휴대폰에 내장된 카메라도 성능이 좋다구요. 업로드만 가능하다면 촬영 기기는 상관 없잖아요?”

  “어, 어라? 그런가? ······아니, 하지만······.”

  “자자, 그렇게 됐으니, 그쪽 라인 좀 알려주시겠어요? 아, 하는 김에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시면 좋을텐데!”

   “잠시만요,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좀······.”

  여고생이란 왜 이렇게 활발한 거야? 내가 아는 여고생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큰일이야 눈앞에서 손가락들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려. 휴, 휴대폰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 뭘 하고 있는걸까?”

  “유키노시타!”

 

  강림한 천사, 혹은 구세주.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혼잡하던 인파가 두 갈래로 나뉘어진 곳에서 내 사촌은 위풍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으로 부른 내 판단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치만 유키농이 그랬는걸. 형평성 문제도 있으니 업무 중에는 성으로 호칭하자고. 그 편이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니 말이야. 나 잘했지?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유키노의 시선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유키노시타······? 갑자기 왜 성으로 부르는 거니? 나와 당신 사이잖아.”

  “엥? 무슨 말이야, 일하는 중에는 그렇게 부르라고······.”

  “일, 이란 말이지.”

 

   심연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듯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반쯤 감은 눈을 한껏 찡그린 유키노시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 눈에는 노닥거리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걸?”

  “오해야! 나는 그저, 홈페이지에 게재할 사진을 찍기 위해······!”

  “손님 분들의 카메라로?”

  “아, 아니, 이건 이 분들이 멋대로!”

 

  여기 증거 사진도 있다고! ······라며 카메라를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한 발 앞서 유키노시타가 내 손을 낚아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변명은 됐어. 얼른 이리 와, 하치만.”

 

  꼬인 스텝에 몸이 휘청였지만, 유키노시타는 아랑곳없이 거리를 좁혔다. 한순간에 가까워진 예쁜 얼굴에 부딪칠세라 필사적으로 발을 뺐다.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엇갈리자, 스쳐 지나간 뺨에서 아찔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기껏 도망친 보람도 없이 그녀의 어깨에 턱이 닿았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목덜미와, 그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검은 머리카락.

  반쯤 안긴듯한 모양새였지만 유키노시타는 괘념치 않았다. 평소처럼 빳빳이 허리를 세운 채, 끌어당긴 내 손을 꼬옥 붙잡고 서 있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 부원이 민폐를 끼쳐버렸군요.”

 

  또렷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엉거주춤 서 있던 몸을 바로했다. 유키노시타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한 뒷모습은 모종의 투지마저 느껴졌다.

 

  “저······ 그쪽 분은?”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유키노시타 유키노, 이번 문화제의 실행 위원장 대리입니다.”

  “유, 유키노시타?!”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는 여고생들. 겁에 질린 고슴도치가 원진을 짠 듯한 태도는 방금 전의 기세와 전혀 다르다.

 

  “실행 위원의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은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손님 분들께서도 조금 과했던 게 아닌가 사료되네요. 엄연히 업무 중인 것도 사실. 관심을 가져주시는 건 좋지만, 학교측의 통제에도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야, 알고 있었잖아. 전부 봤으면서 왜 화를 냈던 거람?

 

  “하치만?”

  “죄송합니다. 저도 반성하고 있어요.”

  “응, 그거면 돼.”

 

  어깨 너머로 째릿 노려보는 시선에 잽싸게 고개숙였다. 어떻게 안 거야? 뒤에서 생각했는데, 입으로 말한 적도 없는데?!

 

  “저희는 이만 업무에 복귀하려고 하는데, 더 하실 말씀이라도?”
  “어, 없어요! 아무것도!”

  “맞아요! 이만 가볼테니까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 복도에서 뛰시면······!”

 

  서둘러 지적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우당탕 쿵쾅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발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곤란한 사람들이네······.”

  “정말이야, 무서워서 혼났다구. 도와줘서 고마워, 유키노.”

 

  감사를 겸해 위로를 전하려 했지만, 유키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 정도는 별 것 아냐. 애초에 당신이 좀 더 똑부러지게 말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된 거 아니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면 거절했어야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해야할 일은 많은데 반해 우리는 소수야. 한 명이라도 뒤쳐졌다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없어. 피곤한 건 알지만 조금 더 힘써줬으면 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구구절절 맞는 지적에 무슨 말을 하랴? 옛말에 이르길 상대방을 지적하는 건 그만큼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 하루 종일도 들을 수 있어.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자 유키노의 태도 또한 누그러졌다. 목을 가다듬고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제안해왔다.

 

  “이렇게 된 이상 나를 따라다니렴. 우리들의 업무는 이동 동선도 겹치고, 인원이 많을수록 효율도 늘 거야. 나는 당신의 촬영을 돕고, 당신은 내 눈이 되어 혹시라도 내가 보지 못한 곳을 지적해 줘.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마지막 말은 이전보다 훨씬 작게 들렸지만, 듣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과대평가야, 유키노.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적이 없는걸.

  하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부정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뿐이야.

 

  “······그래줄 수 있겠니?”  

  “물론이지.”

 

  재차 되묻는 유키노에게 힘차게 대답했다. 불안함을 날려버릴 수 있게, 더 이상 가슴 아파하지 않도록.

 

  “고마워, 하치만.”

 

  그런 내게 유키노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나중에 보답할테니까······. 당장은 힘들더라도, 지금 일이 정리된 이후라도.”

  “보답이라······.”

 

  딱히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유키노의 얼굴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작게 벌린 입과, 가슴팍을 꼬옥 움켜쥔 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어. 거절을 입에 담는 순간 바로 반격해 올 거야. 우리는 서로가 다음에 할 말을 훤히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다면, 구태여 부정해봐야 의미없는 일이겠지. 헛된 말싸움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할 뿐. 유키노도 나름대로 고민해서 꺼낸 제안일 것이다. 그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럼 받아볼까?”

  

  예상과 다른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진 유키노였지만,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행복한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기쁨이 흘러넘친다.

  

  “응! 기대해도 좋단다?”

  “그럴게. 기다릴테니까.”

  “후후. 뭐가 좋을까~.”

 

  지금 보여주는 미소만으로도 피로 따위는 말끔히 사라져버렸지만 말이야.

  방긋방긋 웃는 유키노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나.

  몇 번이고 반복해왔던 풍경이지만 분명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벽에 지레 겁먹었던 우리들. 기대지 않는 것이야말로 애정이라 믿으며, 배려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밀어냈던 나와 유키노.

  사람人은 혼자서는 설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족함이 맞물려 서로를 채워줄 때, 그제야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손익을 따질 수 없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마음을 품는다.

  의지나 강요가 아닌, 어디까지나 독립적이며 대등한 관계.

  이 세상에 태어나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행운이었다.

 

  xxx

 

  “괜찮아?”

  “괜찮······ 지는 않을지도, 조금 지쳤어.”

 

  단번에 인정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로군. 물어보기도 전부터 피곤해 보이긴 했다. 쉴 만한 곳을 찾아 보았지만, 현재 서 있는 계단 근처는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하는 수 없이 모퉁이에서 떨어진 반대쪽 벽까지 유키노를 데리고 갔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게 한 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자신이 준 선물이 올바르게 쓰인다는 사실에 유키노는 미소지었다. 살짝 기울여준 몸을 받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준다.

 

  “얼추 다 둘러본 것 같은데?
  “맞아. 3학년 학급의 점검은 모두 끝났어.”

 

  손수건을 접으며 반대편 복도를 둘러보았다. 출발했던 곳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고작해야 학교 건물이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길게 느껴졌던 것은,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에.

 

  호객행위에 휘말리는가 하면, 신청서와 실제 전시 내용이 다른 학급도 있었다.

  의욕이 앞서 손님을 통제하지 못 해 갈등이 생긴 경우도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해결책을 제시한 유키노였지만, 그것이 역효과였을까.

  눈앞의 성과에 방심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방문객들의 질문공세였다.

 

  낯설고 두려운 곳에서도 자신들을 이끌어줄 거라 믿기에, 사람들은 유키노를 의지한다.

  그리고 그런 유키노가 의지하는 것은 바로 나.

  힘이 부칠 때마다 유키노는 나를 불렀다.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최선을 다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 했던 네가, 그 작은 어깨로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게 건네준 게 너무도 기뻤으니까.

 

  나란히 겹쳐진 발자국이 짧고도 길었던 복도를 지나 우리의 발 밑에 이어져 있었다.

 

  “어떡할래? 좀 더 쉴래?”
  “아냐, 이젠 충분해.”

 

  가쁜 숨도 잦아들었고, 눈동자도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거짓을 말해봐야 금방 들통날 거란 것쯤은 유키노도 안다.

  경쾌한 스텝으로 몸을 일으킨 유키노가 위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가자.”

  “다음은 2학년 교실인가, 동급생들은 조금 낯간지러운데······.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니? 누나만 믿으렴, 하치만.”

 

  입꼬리를 올리자 불그스레 물든 두 뺨에 보조개가 생겼다. 유키노는 장난가득한 미소로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진짜 개구쟁이라니까.

 

  “유키노, 지금은 내가 오······.”

  “먼저 갈게.”

 

  그러나 끝까지 듣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내 사촌. 순간적으로 멍해졌지만, 곧 자신이 당했음을 깨달았다. 변칙 패턴이라니 이거 한 방 먹었는걸. 유키노도 성장했구나, 유치함도 약삭빠름도.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한 뒤 그 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멀리 가기 전에 따라잡을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유키노는 층계참에서 우뚝 멈춘 채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아, 역시 유키노 언니랑 같이 있었네!”

 

  무어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한 발 빨랐다.

  이 목소리는······.

  “코마치?”

  “탓 짱, 내가 뭐랬어. 둘이 같이 있을 거라구 했지? 케 짱도 얼른······, 어? 어어? 케 짱?!”

  “케이카!”

 

  윗층이 소란스러운데, 꺾어 올라간 난간에 가려져 보이지가 않는다. 뭐야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두 칸씩 건너뛰어 한달음에 계단을 올랐다. 층계참에 발을 딛고 몸을 돌렸을 때, 내가 본 것은 윗층 계단 앞에서 내려다보는 코마치와 타이시.

 

  그리고, 허공을 날고 있는 카와사키 케이카였다.

 

  “하 짱~!!!!!!!”

  “우와앗!!!”

 

  품속에 날아드는 케이카를 황급히 안아들었다. 뒷발을 축으로 삼아 낙하 충격을 분산한다. 각도가 애매해 한 바퀴 돌고 말았지만, 어찌어찌 넘어지지 않고 받아드는데 성공했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케이카가 뺨을 비벼온 탓에 양갈래로 묶인 꽁지머리가 내 가슴을 좌우로 때렸다.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조금 길어졌네. 훨씬 근사한 미인이 됐는걸?

 

  ······아니 이게 아니라, 카메라!

 

  “케 짱, 괜찮아? 부딪친 거 아니야?”
  “응? 난 괜찮은데?”

  

  천진난만하게 대꾸한 케이카가 몸을 비틀더니 조그마한 양 손을 쑥 들어올렸다. 목덜미를 붙잡고 영차영차 올라와서는 안아달라는 듯이 매달린다. 

 

  기울어지지 않게 받쳐주려고 팔을 들자 손목에서 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행방이 묘연했던 카메라는 손목 사이에 걸린 채, 까딱까딱 허공을 휘젓는 케이카의 무릎 옆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하, 안기 직전에 무의식적으로 쳐낸 모양이군. 다행이야, 정말로······.

 

  긴장이 풀리자 주위의 소리도 선명해졌다. 타박타박 내려오는 두 사람분의 발소리도 확실히 들렸다.

 

  “케이카, 괜찮아? 갑자기 뛰어나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코마치 숨 넘어갈 것 같아······. 방금은 정말 잘못되는 줄 알았어.”

 

  가슴을 쓸어내리는 코마치와 타이시를 향해 케 짱은 손가락으로 만든 브이를 쑥 내밀었다.

 

  “괜찮아! 하 짱이 받아줬는걸!”

  “아니, 그렇다 해도······.”

  “뛰었을 땐 아직 하치만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말이지······.”

 

  확실히 시간상으로 보면 그렇게 됐겠군. 조금만 늦었어도 유키노가 대신 받았으려나? 어린아이 하나쯤은 들 수 있을 테지만, 방금같이 기습을 당할 때는 장담할 수 없다. 자칫하면 사고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헤헤, 다들 걱정두 팔자라니까~. 그 때는 유키 짱이 받아주면 되지~!”

  “케이카.”

  “응? 왜 그래, 하 짱?”

  케이카가 부벼댄 뺨에는 아직도 말랑말랑한 촉감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안고 있던 케이카를 내려놓았다.

 

  “떽!”

  “으앗?”

  푹신푹신한 마시멜로우 같은 머리를 손날로 두드리자, 날벼락을 맞은 케이카는 겁먹은 얼굴로 거리를 벌렸다. 소리만 크게 냈지 건드린 수준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때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게 다가온다. 자신이 좋아하고 믿었던 사람이 보여주는 쌀쌀맞은 모습에 겁을 먹는다.

 

  “그럼 안 돼지, 케이카. 언니 오빠들이 얼마나 걱정했겠어?”

 

  그렇기에 차분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어째서 자신이 혼나고 있는지를.

 

  “외출할 때는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 아는 사람의 손을 꼭 붙잡고 있을 것. 보육원에서 배우지 않았니?”

  “배, 배웠어······.”
  “그렇지? 그런데 케이카는 왜 뛰어내린 거야? 코마치 언니랑 타이시 오빠를 내버려 두고?”

  “그건, 하 짱의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반가워서······.”

  “응, 나도 반가워 케 짱. 보고 싶었어.”

  “하 짱······.”

 

  애칭으로 부르자 케 짱도 안심한 듯 했다. 가까이 다가가도 경계하지 않음을 확인하 뒤, 살며시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우리 약속 하나 하지 않을래?”
  “약속?”
  “응. 앞으론 이런 위험한 일 하지 않겠다는 약속. 복도는 뛰는 곳이 아니야. 계단에서 점프하는 것도 안 돼. 케 짱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언제나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는 거야. 약속해줄 수 있어?”
  “응! 할게! 약속할게!”

 

  내밀어진 손은 내 손가락 하나를 겨우 감싸쥘만큼 작았다. 그러나 케 짱은 전혀 개의치 않고 조그만 새끼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여 내 손가락에 감아왔다.

 

  “잘 했어. 자 그럼 이제 사과할까?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했습니다~, 하고 말이야.”

  “알았어. 미안해, 탓 짱, 맛 짱.”

 

  보호자들은 얌전히 고개숙인 케 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렴, 케 짱처럼 어린 아이가 이렇게 훌륭한 사과를 할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겠지. 

 

  “잘 했어, 케 짱.”

 

  우리는 그제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이따금 끼어들곤 하던 케 짱은 이내 싫증이 났는지 내 손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늘어졌다. 쓰다듬어 달라는 건가 싶어 손을 올리자 간지러운지 몸을 뒤튼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아빠같네, 하 짱.”

  “그런가? 그건 칭찬이지?”

  “응! 엄청 멋있구 든든해! 안아주는 것두 잘하구!”

  “케 짱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말만 하라구, 언제든지 안아줄 테니까.”

  

  꺄르르 웃는 케이카를 향해 가슴을 탕탕치며 선언했다. 그 다음 한껏 낮춘 목소리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인다.

 

  “그러니까, 방금처럼 뛰어들면 안 된다? 유키노 언니는 힘이 없거든. 케 짱을 안다가 다칠지도 몰라.”

  “하치만?”

 

  낮아진 시야에 우뚝 버티고 선 실내화가 들어왔다. 역시 들렸던 건가. 하기야 내 마음도 읽어대는 유키 짱인데, 입으로 낸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지. 다 예상하고 있었다 이거야. 

 

  케이카 옆에 꼬옥 붙은채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 이제 어떡할 거야, 유키노? 이쪽에는 아이가 있다구? 혼낼 때는 매몰차기로 정평이 난 너라도, 케 짱의 미소 앞에서 화를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유키노는 전혀 다른 화제에 불을 붙였다.

 

  “방금, 유키노 누나お姉ちゃん랬지?”

  

  ······엥? 설마, 그쪽?

 

  “아, 아니, 내 말은, 케 짱에게 있어 유키노 언니お姉ちゃん라고······.”

  “그래, 케 짱에게 있어 나는 언니지. 하지만 우린 모두 가족같은 사이니까, 당신에게 있어서도 나는 누나야.”

  

  ······유키 짱. 나, 이럴 때는 뭐라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유치한 싸움이 좋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해져도 곤란한데······.

 

  “어휴, 또 시작이네.”

  “내버려 두자, 맛 짱. 그동안 많이 못 했잖아.”

 

  봐, 우리 동생들도 어이없어 하고 있잖아. 그리고 탓 짱 네가 더 나빠. 말릴 거면 확실히 말려 달라고.

 

  “말이 없는 걸 보니 내 말을 인정했다고 봐도 되겠구나?”

  “네네. ······이제는 대꾸할 기력도 없어.”

  “후후, 좋아.”

 

  주변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키노는 승리에 기쁨을 만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요염하게 가린 입술 위로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꽃피운다. 나머지 한 손을 아래쪽으로 뻗으며 그 이름을 불렀다.

 

  “이리 온, 케 짱.”

  “유키 짱!”

  

  쪼르르 달려간 케 짱이 유키노의 다리를 껴안았다. 

 

  “아, 그러구 보니, 유키 짱은 처음이구나!”

  “안아주는 거 말이니? 그러고보니 그렇구나. 머리도 꽤 길었구.”

  “그치그치? 내년이면 나두 초등학생인걸!”

  “벌써 그렇게 됐니? 이제 다 컸네~. 어엿한 아가씨가 됬는걸.”

  “헤헤헤, 고마워, 유키 짱!”

 

   앙증맞게 웃으며 유키노에게 안기는 케이카와, 그런 케이카의 머리를 자애롭게 쓰다듬는 유키노. 겨를이 없던 불꽃축제에서는 그다지 대화하지 못 했기에, 이런 느긋한 해후는 케 짱이 아기였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흐뭇한 광경을 지켜보는데 시야 구석에서 코마치가 손짓했다.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타이시였다.

 

  “이런 광경 무척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형님?”

  “그러게. ······그나저나 형님은 뭐냐고,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임시로 부르는 호칭 아니었냐고. 형아 형아 하며 따라다니던게 엊그제 같거늘,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렸담?

 

  딱 잘라 거절할 셈이었지만, 뜻밖에도 타이시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치만, 언젠가는 꼭 형님이 되어줬으면 하는걸요······.”

  “······그건 그때 가서 말해.”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널 인정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우리는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지만, 코마치는 무슨 말을 하냐는 투로 좌우를 번갈아볼 뿐이었다.

 

  아직 멀었나. 탓 짱도 참 고생이 많아.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반갑다. 둘이 같이 놀러온 거야?”
  “케이카도 함께지만 말이죠.”

  “이야~, 설마하니 케 짱에게 선수를 뺏길 줄은 몰랐는걸? 감동적인 재회는 허그로 장식할 계획이었는데······. 아, 이거 코마치 기준으로 포인트 높을지도 몰라.”

  “뭣하면 지금이라도 괜찮은데? 귀여운 여동생의 허그는 질리지 않거든. 음, 하치만 기준으로 포인트 높아.”

  “으엑, 기분 나빠.”

 

  어째서! 코마치가 한 말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잖아! 항의의 의도를 담아 노려보았지만, 코마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옆에 서 있던 탓 짱을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징그러운 거 하나만큼은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다니까? 그치, 탓 짱?”

  “으, 으응······. 그래도 그만큼 맛 짱을 좋아한다는 게 아닐까?”

  “에에~, 그런 애정 필요없는데.”

 

  졸지에 남매 싸움에 끼어버린 타이시가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코마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미안해, 우리 여동생이 눈치가 없어서. 그리고 고맙다, 내 생각도 해 줘서.

 

  “잘 된 모양이네요.”

  “응?”

 

  벅차오르는 감동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타이시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아련한 시선은 케 짱의 재롱을 받아주며 활짝 웃는 유키노에게 머물러 있었다.

 

  “걱정 많이 했거든요. 유키노 누님이랑 화해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뭐, 그렇지. 꽤나 멀리 돌아왔지만 말야. 운이 좋았어.”

  “정말이라구, 이 고집쟁이 오빠. 그냥 사과 한 마디 콱 박구 안아주면 됐을 텐데.”

  “되겠냐? 우린 그런 스타일 아닌 거 알잖아.”

  “알지, 잘 알고말고. 오레기도 오레기지만 유키노 언니도 마찬가지니까. 어쩌면 둘이 이렇게까지 똑같은 거람?”

  

  쓴웃음만 짓는데 타이시가 슬쩍 속삭였다.

 

  “칭찬하는 거에요. 진심으로 불평할 때는 목소리 톤부터 다르니까요. 불꽃 축제 이전의 맛 짱은······,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요.”

  “그래, 나도 잘 알지. 너도 코마치도 수고 많았다. 고마워.”

  “저는 딱히 한 것도 없는걸요. 오히려 누나 일로 도움 받은 입장이고.”

  “둘이 뭔 얘기를 그렇게 해?”

 

  이야기가 길어지는게 이상했는지 코마치는 뾰족한 눈초리로 추궁해 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수상한데······.”

 

  야단났는걸. 딱히 나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타이시가 자기 얘기를 한 걸 코마치가 알았다간 무슨 말을 할 지 모르니 말이야.

  딴청을 피우려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앞으로 뻗은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윗층에서 내려오는 걸 보니 우리 반은 벌써 둘러본 모양이네?”

  나나 누나가 반의 위치를 코마치에게 알려준 적은 없다. 짐작컨대 사 짱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방문객 접수시 간단한 약도가 그려진 팜플렛은 제공하게 되어 있으니 2학년 교실이 몇 층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동생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도 막 올라가던 참이야. 케 짱도 있으니까 천천히 둘러보면서 찾을 생각이었거든.”

  “그 때 목소리가 들렸다는 거죠.”

  “그렇구만.”

  

  케 짱 때문만은 아닐 것 같지만 말이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코마치와 타이시는 교복 차림이었다. 외출 복장을 고민할 필요도 없고 이래저래 편리한 선택인 건 확실하다. 그러나 내게는 조금 다른 이유가 포함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래봬도 코마치와 타이시는 어엿한 수험생이다. 케이카를 데려 오긴 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신분을 잊지 않으려 한 거겠지. 지망하고 있는 학교를 느긋하게 구경해볼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 진학 희망자들을 맞이하는 건 문화제의 본래 취지에도 부합한다. 개최자의 입장에서는 모종의 보람마저 느껴졌다. 

 

  오빠로서는 말할 것도 없다.

 

  단지 조금 아쉽다고 할지, 애매한 감정은 남아 있었다. 어리게만 보였던 동생들이 어느덧 자신들의 미래를 그려나갈 나이가 된 것이다. 챙겨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모습이 대견했지만, 동시에 섭섭하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안내해 줄까?”

 

  낯선 풍경이 신기해서인지 코마치와 타이시는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폈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이따금 자그마한 탄성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훌쩍 커버린 동생들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앳된 모습에 남몰래 안심하며 물어보았다.


  “그래도 돼? 일은 어쩌고?”
  “우리도 슬슬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어. 이렇게 된 거 같이 다니자. 반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그러자 유키노의 품에 안겨 있던 케이카가 고개를 들더니 이쪽을 향해 냉큼 소리를 질렀다.

 

  “핫 짱의 반? 사 짱도 거기 있어?”

  “물론. 사 짱도 거기 있지.”

  “와! 그럼 갈래! 데려다 줘, 하 짱!”

  “네네, 분부대로 합죠.”

 

  쪼르르 달려온 케 짱을 받아주자, 유키노는 인형을 뺏긴 아이같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물론 농담, 방금은 내 실수다. 허락을 구한다는 걸 깜빡했다.

 

  “······그렇게 진행하려 합니다만. 괜찮을까요, 부위원장님?”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유키노는 턱에 손을 얹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괜찮겠구나. 손님을 맞는 것도 위원회의 업무니까. 당신이 정신을 바짝 차리면 문제없겠지.”

 

  뒷말이 좀 걸리긴 하지만, 이로써 필요한 절차는 마친 셈이다. 유키노도 참 딱딱한 구석이 있다니까. 아무리 일이라 해도 오늘같은 날 정도는 설렁설렁 해도 될텐데. 우린 아직 고등학생이고, 모처럼 놀러온 동생들과 잠깐 어울린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어? 

 

  뭐, 자신에게 엄격한 점도 유키노시타답긴 하지. 아직 어린 케 짱은 이해하지 못 했지만 말이다.

  

  “우웅, 유키 짱이 하는 말 모르겠어. 너무 어려워.”

 

  꼴똘히 생각하는 케 짱의 모습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당사자인 유키노는 얼굴을 붉힌 채 입을 다물었지만. 할 수 없네. 이럴 땐 오빠가 도와줘야지.

 

  “케 짱, 방금 한 말은 말이지. 유키노 언니도 케 짱과 함께 다니고 싶다는 뜻이야.”

  “정말?”

 

  소곤소곤 귓속말을 건네자, 이 귀여운 아이는 놀랄만큼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고는 박력있게 끌기 시작한다. 어머, 멋있잖아.

 

  어라? 그런데 어디로? ······응?

 

  “케, 케 짱?!”
  “어?”

 

  아장아장 걸어간 케 짱이 반대쪽 손으로 유키노를 붙잡고는 명랑한 어조로 외쳤다.

 

  “출발!”

  “······이건 무슨 의미일까, 하치만?”
  “왜 나한테 묻는데······.”

 

  유키노는 꽤 자주 나를 동생 취급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왼손에는 유키노, 오른손에는 나, 한 손에 하나씩 언니오빠를 거머쥔 케 짱은 마치 오랜 인연처럼 우리를 이어주었다. 이건 마치······.

 

  생각이 미친 순간, 정답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여기까진 맛 짱과 탓 짱이 잡아줬으니까, 지금부터는 하 짱이랑 유키 짱이 잡아 줘!”

 

  나와 유키노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놀란 눈망울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논리도 뭣도 아닌 단순한 바램이었다. 코마치와 타이시가 ‘여기까지’ 잡아줬으니, ‘앞으로’는 우리가 잡아줄 거라고 확신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수한 믿음에 기쁨보다도 먼저 미안함이 앞섰다.

  이런 마음을 받을 정도로 무언가 해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리고 유키노도.

 

  “······그럴까? 꼭 잡아야 해, 케 짱?”

  “방금 전처럼 뛰쳐나가면 안 된다?”

 

  그렇지만, 못난 언니오빠라도 분위기 정도는 읽어줘야겠지.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얽매이지 않되, 잊지만 않으면 된다. 모자란 분은 앞으로 함께 채워나가면 되니까.

 

  “응! 얼른 가자!”

    

  내밀어준 손을, 이제는 놓지 않을 것이다.



  xxx

  

  “케 짱, 저기 봐.”

  “아, 사 짱!”

 

  카와사키 사키는 출입구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위치로 봐선 접수역인 듯 했지만, 짜증이 역력한 얼굴은 공손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차라리 길목을 지키는 파수꾼에 가까워 보였다. 이런 날 정도는 표정 좀 피라구, 손님들이 무서워하잖아.

 

  마침 새로운 손님들이 입장하는 시간이었는지 교실 앞에는 새로운 소란이 일었다. 한 무리의 인파가 우루루 사라지자 거기에 가려져 있던 책상 끝단에서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구 유이유이도 있어!”
  “정말이네?”

 

  사키유이라니, 이건 또 신기한 조합이로군. 마침 잘 됐어. 교실 안에 있었으면 꼼짝없이 밖에서 기다려야 했을 테니까. 거기에······, 지금은 문을 열고 싶지도 않고.

 

  또다시 뛰쳐나가려던 케 짱이 멈칫했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본다. 용케 잊어버리지 않았구나.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줘야겠지?

 

  무릎을 굽혀 케 짱과 눈높이를 맞췄다. 

 

  “가 봐, 케 짱.”

  “그래도 돼?”

  “응. 지켜봐 줄 테니까.”

  “헤헤. 고마워, 하 짱!”

 

  어린아이는 솔직해서 좋다. 마음속 감정이 겉으로도 꾸밈없이 드러난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작은 카와사키는 다섯 걸음 남짓한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가 큰 카와사키의 무릎에 뛰어들었다.

 

  “사 짱!”

  “케 짱?”

 

  오가는 사람이 많은 복도에서 케 짱의 작은 키가 보이지 않았던 거겠지. 갑작스런 동생의 등장에 사키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험상궂던 표정이 사라진 자리엔 케 짱의 언니만이 남아 있었다.

 

  “연락 못 받았는데, 언제 왔어?”

  “방금! 하 짱이 데려다 줬어!”

  “힛키가?”

  “하치만이?”

 

  사람은 셋인데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로군. 사 짱과 유이가하마는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인사해야하나 싶어 어정쩡하게 굳어있는 사이, 먼저 손을 든 것은 유이가하마였다.

 

  “어서와, 힛키.”

  “그래, 뭔가 드문 광경이네.”

  “그런가? 힛키두 마찬가지인데 뭘.”

  “그럴지도.”

 

  적당히 말을 주고받은 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발 주자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장 먼저 앞서 나온 것은 코마치였다.

 

  “사키 언니, 얏하로! 유이 씨도 오랜만이에요!”

 

  코마치는 사 짱이 턱을 괜 책상을 향해 넘어지듯 몸을 기울이고는 양쪽 손을 쑥 내밀었다. 그 귀여운 동작에 사 짱과 유이가하마도 흔쾌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짜악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안녕 맛 짱, ······그 바보같은 인사, 너도 하니?”

  “바, 바보같은 인사?!”

  “말이 심하네~, 유이 씨의 역작이라구! 은근히 중독성 있다니까?”
  “그래그래. 많이 하렴. 어린애 다워서 좋네.”

  “그거 무슨 의미야?! 진짜로 무슨 의미?”

   유이가하마는 우아앙 울부짖으며 사 짱의 팔을 통통 때렸다. 딱히 유이가하마가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저래서야 데미지가 들어갈 리가 없는데. 실제로도 맞는 이의 표정은 태연했다. 냥냥 펀치도 호랑이급은 되야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귀찮은 듯이 매무새를 바로잡은 사 짱은 시선을 자신의 동생, 중간 카와사키에게로 옮겼다.

 

  “타이시, 올 거면 연락 달라고 했잖아?”

  “미안해, 누나. 전화 하려던 참에 형님과 유키노 누님을 만나서, 그만 잊어버렸어.”

  “너도 참.”

 

  입으로는 탓하고 있지만 그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사 짱은 저래보여도 치바에서 알아주는 브라콘이다. 동시에 시스콘이기도 하다. 가끔 채우지 못해 넘치는 애정을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베푸는게 무서울 정도다. 지금도 유키노를 돌아본 두 눈은 이 이상 없을만큼 따뜻했다.

 

  “어제는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개회식 멋졌어, 유키 짱.”

  “고마워, 사 짱.”

  “······뭔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야.”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기에, 우리는 말없이 미소지을 뿐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련한 눈빛으로 훝던 사 짱이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행 위원장 걸로 달아도 됐을 텐데.”

 

  그 시선은 유키노의 한쪽 팔에 매달린 완장에 머물러 있었다. 소매를 고쳐 맨 유키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는 이걸로 만족하니까.”

  “뭐, 그것도 어울리니 상관없지만.”

  “그래. ······사가미 양은 어떻니? 뭔가 특이한 점이라던가.”

  “글쎄? 애초에 개회식 이후로 본 적이 없는걸. 너는 봤니, 유이가하마?” 

  “나두 못 봤어. 사가밍, 왠진 몰라두 교실에는 코빼기두 비치지 않아.”

  “······그래?”

 

  무엇이 걸리는지 유키노는 턱에 손을 얹고는 출입구를 응시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새어나오는 소리와 언뜻언뜻 비쳐보이는 조명을 보아하니 슬슬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모양이었다.

 

  “호황이구나.”

  “응. 인터넷으로 홍보를 한 게 정답이었어. 홈페이지를 보고 왔다는 사람이 많았거든. ”

  “코마치도 봤어요. 내용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요.”

  “이해해. 나도 그러니까.”

  

  안그래도 물어보려 했는데, 마침 잘 됐군. 티가 나지 않도록, 평소와 같은 어조를 의식하며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누나는?”

  “미 짱? 글쎄······?”

 

  고개를 갸웃거린 사키는 이번에도 옆자리에 앉은 유이가하마를 돌아보았다.

 

  “유미코라면 좀 전에 나갔어. 뭔가 문제가 생겼다구 하던데 뭐라더라? 서······, 서벌?”

  “서버겠지······.”

  “아아! 그거다! ······뭐, 뭐야! 사람이 좀 실수할 수도 있지!”

 

  혹시 농담인가? 휴대전화는 그렇게 잘 쓰면서 설마 서버가 뭔지 모르는 거야? 대단해~, 유이가하마 양은 언어를 재창조하는 프렌즈구나~!

 

  “아무튼!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위험한 모양이야. 이대로면 폭발한댔어. 컴퓨터가 펑~! 하구.”

  “펑은 또 뭐람······.”
  “그럴 리가 없잖아.”

  “펑~, 펑~!”

  “케 짱, 따라하면 안 돼요.”

 

  컴퓨터가 폭발한다니,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니?

  알쏭달쏭한 유이가하마의 말을 해석하려고 끙끙대는데, 곁에 있던 유키노가 가설을 제시했다.

 

  “어쩌면 이용자가 너무 많아서 홈페이지가 마비된 걸지도 몰라.”

  “일리가 있네. 서버가 문제라면 그쪽밖에 없지. 폭발한다는 표현도 어울리고. 다만······.”

  “다만?”

 

  휴대전화를 꺼내 조작한 뒤, 화면에 띄운 웹페이지를 유키노에게 보여주었다.

 

  “역시. 보다시피 지금은 들어가진단 말이지. 애초에 고작 문화제 정도로 그렇게까지 사람이 몰릴까? 접속자 수가 많아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교실을 나간 건 조금 전이라고 했으니 방금 막 고쳐졌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미 짱은 지금 컴퓨터실에 있을 거야. 문화제 기간 중에는 각 학급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개방해 놨거든.”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검은색 위주로 꾸며진 탓에 액정 화면에는 우리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화상 속 유키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가 봐도 돼? 바로 아랫층인데······.”
  

  가고야 싶지, 가고는 싶은데.

 

  “지금은 안 되겠어.”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 만나러 갈 만큼 얼굴이 두껍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떼어놓고 나 혼자 만나러 갈만한 구실도 생각나지 않았다. 동생들이야 그렇다 쳐도 케 짱이 문제다. 이런 복잡한 사정을 이해할 만한 나이는 아니니까.

 

  “안 그래도 바쁜데 여러 사람이 우루루 몰려가는 것도 민폐일 거야. 아쉽지만 오늘은······.”

  “엣? 하 짱, 미 짱은 안 만나?”  

 

  역시나······. 어떻게 알아챘는지 맏언니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케 짱이 발을 동동 굴렀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에 사 짱은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미안해, 케 짱. 미 짱은 지금 많이 바쁜 모양이라서. 다음에 만나야 될 것 같은데?”

  “우우, 보고 싶었는데······.”
  “앞으로도 기회는 있잖니. 굳이 여기가 아니라도 만날 수 있어. 조금만 참자, 응?”

  “······알았어.”

 

  다행히도 납득해준 모양이었다. 얌전히 사 짱의 품에 머리를 기대는 모습에 나와 유키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미 짱, 불쌍해. 다들 여기 있는데, 혼자만 바쁘구.”

 

  아아, 이 말을 누나가 들었어야 했는데······.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면, 우리 누나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동시에 바로 지금 듣지 못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거야말로 아이를 인질로 삼는 비겁한 행위니까. 협박이나 다름없는 강요를 누나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짐짓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사 짱을 지목했다.

 

  “그러게. 사 짱이랑은 완전 딴판이지? 여기는 근무 시간에 휴대전화를 볼 정도로 한가한데 말이야.”

  “응! 사 짱은 한가해! 그래서 좋아!”

  “근무는 무슨, 에비나가 억지로 떠넘긴 것 뿐이야. 내가 할 일은 다 마쳤다고.”

 

  하긴 의상 담당자는 준비 기간이 바쁘지 당일은 한가하니까. 그래도 옷이 찢어진다던가 하는 비상 사태가 생길 수 있으니 교실 근처에서 대기하려는 거겠지. 저 미묘한 거리감이 그야말로 사 짱다웠다.  

 

  “아하하······, 그래두 난 사키사키가 있어줘서 든든한걸. 처음엔 나 혼자 하고 있었거든. 접수 일은 한가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사람이 몰리더라구.”

  “딱히, 난 아무것도 안했어. 그리고 사키사키 아니라고.”

  “히히, 미안미안.”

 

  흐음, 어쩌다 이 조합이 탄생됐는지 머릿속에 그려지는군. 입장 시간이나 공연 안내는 입구에 써 붙여놓았으니 인원수가 필요한 일은 아니였을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몰렸다면 이유는 하나다. 유이가하마는 귀여우니까, 문의를 핑계삼아 말이라도 한 마디 붙여볼 심산이겠지. 사 짱이 살기를 내뿜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지켜주는 거구나.

 

  “······뭘 그렇게 봐?”

  “사 짱은 진짜 언니구나 싶어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사 짱의 귀는 조금 빨개져 있었다.

  오늘은 이래저래 좋은 구경을 많이 하는구나.

 

  사방을 채운 떠들썩함이, 점점 더 소리를 높여 간다.

 

  “당신은 친구라면 누구에게나 누나라고 부르는 모양이구나. 모든 사람이 그 호칭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야.”

  “그렇지? 그럼 유키노에게도 안 쓸게.”

  “그, 그건 안 돼! 애초에 내 쪽이 누나인 건 당연······!”

  “아, 또 시작했다. 힛키랑 유키농의 사랑 싸움.”

  “유이가하마 양!”

  “말도 마세요. 아까 만났을 때도 어찌나 알콩달콩하던지.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였어요.”

  “······타이시, 정말이야?”

  “응, 누나가 생각하는 그대로.”

  “아하하, 부끄러워~! 부끄러워~!”

 

  확실히 부끄럽긴 하지만, 사 짱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어긋나있던 세상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마지막 한 조각이 맞춰지지 않은 것도 실감했다.

 

  포기하지 않고 맞춰나가자고, 다시금 다짐한다.



  xxx

  

  좋은 정보 하나.

  케 짱은 정말 잘 먹는다.

  유이가하마가 사온 통식빵을 오물거리기도 잠시, 금새 먹어치우고는 더 없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모습조차 귀여운 탓에 점심을 날려버린 유이가하마가 죄책감을 느꼈을 정도다. 매점에 달려갔다 오겠다는 걸 말린다고 고생했다. 주로 사 짱이.

 

  “미안해. 얘가 성장기라······.”

 

  무안한 기색으로 머리를 수그리는 사 짱이지만, 원래 어린아이들이란 잠시만 움직여도 배가 꺼지는 법이다. 허니 토스트 정도로 떼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지? 맥캔이라도 사올까? 너무 단 걸 줬다고 사 짱에게 혼나지 않으려나? 그보다 왜 떠오른 게 맥캔 뿐인걸까, 새삼 단맛에 중독되었다고 실감하는 찰나에 주머니를 뒤지던 유키노가 쓰윽 뭔가를 내밀었다.

 

  “케 짱, 사탕 먹을래?”

  “사탕? 먹을래! 먹을래!”

 

  포장지를 벗겨주자 케 짱은 조그마한 두 손으로 사탕을 받아 입안에 쏘옥 집어넣었다. 다람쥐처럼 데굴데굴 볼을 굴리며 행복하게 미소짓는다. 크흑, 너무 귀여워.

 

  “웬 거야?”

  “당분 보충용이야.”

 

  하긴, 10월 초라고 해도 아직은 살짝 더운 시기지. 거기에 북적이는 복도를 뚫고 교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가 체력이 약하다는 걸 알기에 대책도 확실히 마련한 거구나.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유키노는 곧잘 사탕을 가지고 다니며 나누어 주곤 했다. 친구들의 기호에 맞추어 다양한 맛을 구비했었지. 정말 다정하다니까.

 

  “하치만.”

  “아, 응.”

 

  그리고 나는, 그런 유키노와 누구보다 같이 지냈던 사촌.

  무엇을 전하려 하는지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다.

  헛기침으로 주목을 모은 뒤, 목에 건 카메라를 들어보였다.

 

  “우린 이만 가볼까 하는데.”

  그래, 잊을 뻔 했지만 우린 아직 일하는 중이었지. 동생들을 안내하는 것도 좋지만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마감을 맞추기 힘들다. 주로 내가.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야?”

 

  복수형을 쓰긴 했지만 실상 한 명에게 물어본 거나 마찬가지다. 나머지 한 명은 전적으로 상대방의 선택에 따를 테니. 타이시가 어깨를 으쓱하자 결정권을 쥔 코마치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코마치는 여기 좀 더 있으려구.” 

  “더 둘러보지 왜?”

  “유이 씨랑 얘기 좀 하다 가지 뭐. 오빠 얼굴도 봤으니 됐어. 아, 이거 코마치 기준으로 포인트 높아.”

  “네네, 높다, 높아.”

 

  정말 하늘만큼 높아서 눈물이 나올 정도야. 이렇게 기특한 여동생을 두고 가려니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는군. 매일 아침 출근하는 부모님의 심정이 이랬을까? 어른은 못 해먹을 짓이다.

 

  게다가 가장 가슴아픈 아이는 따로 있었다.

 

  “어? 하 짱이랑 유키 짱도 가는 거야? 미 짱처럼?”

 

  간절해보이는 눈망울이 나와 유키노를 붙잡는다. 가슴이 먹먹해 바로 대꾸하지 못 하자, 사 짱이 케이카를 살살 달랬다.

 

  “케 짱, 언니랑 오빠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해요. 자, 웃는 얼굴로 보내줘야지?”

  “그치만······.”

  “끝나고 또 만나면 되잖아. 케 짱이 떼쓰면 두 사람이 갈 수 없어.”

  “······알았어.”

 

  시무룩한 얼굴로 마지못해 손을 흔든다. 나와 유키노도 손을 흔들었다. 이제 남은 건 유이가하마 뿐이다. 사 짱을 위해서라도 얼른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싶어 인사를 건넸지만, 어째서인지 유이가하마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힛키, 저-기.”

 

  뒤돌아보자, 유이가하마가 가리킨 사람들은 의외로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다. 하나하나의 얼굴들은 낯이 익지만 한데 모인 조합은 특이했다. 나이도 소속도 다른 세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츠루미 선생님이었다.

 

  “진짜 여기 있었잖아?”

  “그렇다구요. 히키가야 군을 찾으려면 여기로 오는 게 제일 빨라요.”

  “그렇네. 시로메구리 덕에 살았어.”

  

  츠루미 선생님의 칭찬에 시로메구리 선배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대화의 내용을 추측하건데 내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지만, 내 의식은 그 뒤에 있는 작은 꼬마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루미루미?”
  “아니라니까······.”

 

  입을 삐죽인 작은 츠루미가 고개를 홱 젖혔다. 그러자 큰 츠루미 선생님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정말로 아는 사이였어? 설마설마했더니.”

  “그렇다고 했잖아. 하치만이라는 이름이 또 있을 리도 없구.”

 

  특이한 이름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반응할 타이밍을 놓쳐 굳어 있는데, 루미가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손에 쥔 물건을 쑥 내민다.

 

  “뭐 하고 있어? 얼른 받아.”

  “아니, 그렇게 말 해도······.”

 

  받아도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만······. 영문을 몰라 고개만 갸웃거리는데 루미가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박력있게 내 팔을 붙잡아 휴대폰을 쥐어주었다.

 

  “번호.”

  “엥?”

  “······혹시 전화번호를 달라는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세상 어떤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을 헌팅하냐구, 그것도 앞뒤 맥락도 없는 단문으로.

  이번만은 유키노의 가설이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루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맞아. 엄마한테 졸라서 샀어. 전화번호 적어 줘.”

  “봐, 맞지?”
  “진짜냐······.”

 

  시선으로 의견을 구했지만, 츠루미 선생님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보호자가 허락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에 얌전히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이 녀석도 비밀번호 따위 안 거는 주의구만. 하긴, 내 이름 한자는 초등학생이 기억하기에는 어렵지. 괜시리 시도했다 실수하느니 본인에게 맡기는 쪽이 현명할 것이다. 그렇게 납득하며 번호를 입력하는데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쟤, 누구?”
  “임간학교에서 만났던 루미 짱이야.”

  “헤에, 형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꽤나 친해보이는걸요?”

  “그, 글쎄? 그래두 처음부터 잘 맞긴 했어. 뭐랄까 서로 비슷하다구 해야하나? 성격두 닮았구, 나두 힛키랑 번호 교환했을 때는 저런 느낌이었거든.”

  “저 아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하니 오빠의 매너가 초등학생과 동급이었을 줄이야. 여동생 입장에서는 좀 부끄럽네요.”

  “뭐, 뭐어. 지금은 안 그러니까!”

  

  무시하자. 무념무상이다. 나는 그저 화면을 터치하는 기계인 거야.

 

  “후훗. 유이가하마 양, 의외로 가차없이 말하는구나.”

  “너까지 웃지 말아줘, 유키노······.”

 

  째릿 노려보았지만 내 사촌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유키노의 미소니까 말이지.

 

  그러자 아래쪽에서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루미는 개미를 관찰하는 초등학생과도 같이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친해보인다 싶어서.”

  “당연하잖아. 사촌인데.”

  “그럼 됐고.”

  

  관심이 사라졌다는 투로 고개를 돌린다. 흐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입력을 마친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마치 서류를 검토하듯이 꼼꼼이 읽어나가던 루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치만, 왜 기타로 설정했어?”

 

   이래봬도 그 부분에서 무진장 고민했다만······. 아직 초등학생이고, 이렇게나 귀여운 아이다. 분명 나보다는 많은 친구가 생길 게 틀림없다. 친구목록을 펼쳤을 때 내 이름이 있으면 얼마나 부끄럽겠어? 스팸번호로 등록되느니 그쪽이 낫다 싶어 내린 결정인데.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틀렸어.”
  “뭔데 그럼, 나랑 루미는 무슨 관계인데?”
  “그것도 몰라? 친구잖아.”

  “그랬나?”

  “그래.”

 

  여전히 짧게 대꾸하고는 다시 휴대전화를 내민다.

  그랬군요. 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죠. 여기서 부정하는 것도 멋없고, 시키는 대로 하는게 무난하겠지.

  

  “그렇구나.”

 

  제대로 ‘친구’ 등록을 마친 휴대전화를 돌려주자, 밝은 얼굴로 받아든다. 연신 화면을 들여다보는 루미의 얼굴에는 오늘 처음으로 본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루미라고 부르고 있네. 반쯤은 츠루미 선생님 때문이지만.

 

  “놀랐어. 루미에게 들었을 땐 설마했는데, 정말로 시즈카네 아이였을 줄이야.”

  “저도 선생님이 한 아이의 엄마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어, 엄마라니! 실례야, 히키가야 군! 루미는 내 조카라구!”

  “아, 그랬습니까? 그럼 이모おばさん군요?”

  “맞긴 한데 그냥 친척이라고 해 줘. 이 나이에 아줌마おばさん 소리 듣기는 좀,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그, 그렇군요······.”

 

  츠루미 선생님이 빨랫줄에 달린 건어물처럼 추욱 늘어졌다. 으으음, 뭐랄까 제가 알고 있는 분들과 이미지가 겹치는군요. 호칭 문제에 민감한 건 엄마, 결혼에 민감한 건 히라츠카 선생님. 이것 참 어마어마한 혼종이구만.

 

  “이만 돌아가볼게. 축제, 재밌게 즐기렴. 히키가야 군도 수고해 주고.”

  “네, 네에. ······그럼.”

  “그렇지 참, 유키노시타 양도 힘내. 개회식 연설 멋졌단다.”

  “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힘내라, 쇼와 태생 여성들! 이쪽이 더 데미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가버렸네.”

  “가버렸네요.”

  “가버렸구나.”

  “응, 가버렸어.”

 

  어라? 마지막 한 명은 누구?

  어라? 어째서 루미루미가 여기에?

 

  “츠루미 양, 당신은 안 가니?”

 

  유키노가 물어보았지만, 루미는 이상한 질문도 다 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가야 하는데?”

 

  왜라니, 그야, ······딱히 이유는 없지만.

 

  “츠루미 선생님을 따라가지 않고?”

  “하치만의 반이 어디인지 몰라서 안내를 부탁했을 뿐이야. 설마 모를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지만.”

  “아, 그래서 나에게 온 거구나.” 

  “응. 게다가 교사잖아.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도 없지.”

  “또, 똑똑한 아이네······.”

  

  똑부러진 대답에 시로메구리 선배가 감탄했지만, 나는 그보다 내 스텔스 힛키의 우수한 성능에 복잡한 기분을 맛보는 중이었다. 츠루미 선생님, 우리는 자랑스런 땡땡이 동지 아니었나요? 양호실 명부 작성하는 것도 몇 번 보셨잖아요!

 

  그 때 소매를 붙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바로 옆까지 다가온 루미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하치만이 안내해 줘. 나, 이 학교를 좀 더 구경하고 싶어.”

 

  당돌한 제안은 부탁이라기보다 지시에 가까운 어조였다. 하지만 이쪽도 그리 여유로운 입장은 아니다. 출입구 앞에 모여있는 사 짱 일행으로부터 떨어진 세 사람, 시로메구리 선배와 나, 그리고 유키노는 이제부터 업무현장에 복귀해야할 실행 위원이였으니까. 아마 시로메구리 선배도 우리와 합류할 목적으로 츠루미 선생님과 동행했을 테지.

 

  거절의 뜻을 밝히려 입을 여는데, 벼락같은 괴성이 말문을 막았다.

 

  “뭐어?! 안 돼!”

  “잠깐, 케 짱?!”
 

  언니의 품을 박차고 나와서는 쪼르르 이쪽으로 달려오는 케 짱. 도착하기가 무섭게 내 팔을 끌어안더니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하 짱이 바쁘다구 해서 참은 거란 말이야! 둘이서만 놀러가는 건 싫어!”

  “케, 케 짱? 오빠는 놀러갈 생각이 없······.”

  “하 짱은 가만있어! 이건 우리들 문제니까!”

 

  무서워! 케 짱 무서워! 이게 정말 유치원생의 박력이야? 완전 어린 시절의 사 짱을 보는 것 같잖아. 유전자란 대단해······.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시로메구리 선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유키노 또한 당장은 개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 수 없군, 일단은 지켜보는 수 밖에.

 

  “하치만, 얘는 뭐야?”
  “얘가 아냐! 케이카야! 카와사키 케이카!”

  “그래? 나는 츠루미 루미라고 해. 하치만의 친구야.”

  “루미 짱이구나! 응, 완전 기억했어!”

 

  또박또박 받아치는 케 짱을 향해 루미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말이야? 케이카도 하치만의 친구?”
  “아니, 동생. 하 짱은 케이카의 오빠라구!”

  “오빠? 그치만 성이 다르잖아.”
  “그런 건 상관없어. 타이시 오빠가 태어나기두 전부터, 하 짱은 우리랑 같이 있었으니까.”

  “우리?”

 

  가늘게 뜬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과연, 이해했어. 저기 있는 언니가 하치만의 친구구나?”

  “응. 그것두 엄청 친한 친구. 하 짱을 만나기 전에두 하 짱 얘기밖에 안했는걸.”

  “케 짱?!”

 

  뭔가를 말하려던 사키의 입이 주변에서 튀어나온 손에 틀어막혔다. 동생들과 유이가하마 또한 조금 더 지켜보자는 입장인 듯 했다. 이익이익 거친 호흡을 내뿜던 사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붉게 물든 얼굴을 감추듯 책상 위에 엎드렸다.

 

  말 몇마디로 격침시키다니, 역시 사 짱의 동생. 카와사키는 같은 카와사키에게 약하다는 건가.

 

  “한 마디로 가족이란 거네.”

  “바로 그거야!”

 

  루미의 결론이 마음에 들었는지 케 짱은 꼬옥 쥐고 있던 내 손을 풀고 한 걸음 다가갔다. 사방을 찌르던 적의는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즐거운 분위기가 감돈다. 애들은 애들이라니까. 루미가 굽혀준다면 이쪽도 수고도 덜게 되겠지. 결론이 났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츠루미 루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 똑똑한 아이는 맞받아치는 대신, 오히려 상대방을 끌어당겼다.

 

  “그럼 케이카도 같이 가자.”

  “엉? 나도?”
  “그래. 케이카도 가고 싶다고 했잖아? 여동생을 오빠에게서 떼어놓는 짓은 나도 하고싶지 않아. 조금 본의 아니긴 해도 케이카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으음, 어려운 말이 많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같이 가자는 거지?”

  “그래.”

  “그치만, 하 짱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둘이서 나란히 나를 올려보았다.

 

  “하치만, 많이 바빠? 도저히 시간 안 돼?”
  “하 짱······, 나,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다 같이 놀고 싶어.”

  “아, 그, 저기, ······아으으.”

 

  어떡하지? 이 순수한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거야? 거절하라고? 난 못해, 절대로 못해. 그렇지만 내가 안 가면 다른 사람들이······. 어떡해야 좋은 거야!

 

  일생일대의 난제에 머리를 감싸쥐는데 누군가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넉살 좋게 웃고있는 시로메구리 선배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갔다 오렴, 히키가야 군.”

  “잠깐, 시로메구리 선배! 큰 소리로 말하시면······!”

  “가도 돼? 정말로 정말로 가도 돼?”

  “물론이지. 자, 언니오빠들에게 인사하고 올래?”

  “응! 고마워 메구 짱!”

  “잘 됐네, 케이카.”

 

  수습할 새도 없이 케 짱과 루미는 사 짱네 방향으로 뛰어가 버렸다. 총총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로메구리 선배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방금 들었어? 메구 짱이래!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보다 어쩔 거에요? 간신히 달래놨는데,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잖아요.”

  “무를 필요가 뭐 있어. 동생들 데리구 놀러 갔다 오면 되지.”

  “그럼 제 일은 누가 하구요?”

  “음, 그건 말이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시로메구리 선배가 두 뺨을 받치려는듯 손을 뻗더니, 그대로 목덜미를 감싸쥐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나도 유키노도 굳어버렸지만, 곧 그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걸린 줄을 들어올린 시로메구리 선배가 카메라를 가져갔다.

 

  “내가 맡을게. 히키가야 군과 유키노시타 양은 이제 쉬도록 해.”

 

  찍어둔 사진들을 훑으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시로메구리 선배, 그럴 수는 없어요.”

  “맞아요. 선배 일은 어쩌구요?”

  “이제 방문객이 몰릴 시간이 지났고, 교내 순찰은 집행부의 공동 업무야. 내빈 접객 쪽에도 여유가 생겼으니 괜찮아.”

  “폐회식 준비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아하하, 그렇긴 하지만. 뭐, 인생은 대본대로 되지 않는 법 아니겠어? 정 안되면 임기응변을 부려 보는 수밖에. 애드리브는 자신 있으니까.”

  “하지만······.”

 

  카메라를 목에 건 시로메구리 선배가 두 손을 뻗어 어깨동무를 걸어왔다.

  컷흠 목을 가다듬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걱정말고 다녀 와! 문화제는 모두의 축제잖아. 가장 큰 공로자인 너희들이 문화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러니까 문화한다는 게 도대체 뭔데요. 정말 정체불명의 슬로건이라니까.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어. 

  어째서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괜찮아! 사실 지금 찍어둔 것만 해도 최소 분량은 되거든. 이번 실행 위원회에는 유능한 사람이 많잖니? 어차피 중요한 건 편집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촬영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그래도 입 밖에 내진 말아야지.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편집 탓을 할 수 있을 테니. 유능한 사람이 많긴 하죠. 하타노라던가 하타노라던가, 또 하타노라던가. 분명 완벽한 결과물을 내 줄 겁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시로메구리 선배도 제법 화끈한 구석이 있었군요?

 

  “잠시나마 감동했던 제 마음을 돌려주세요. 학생회장이 그래도 돼요?”

  “뭐 어때~. 그런 말도 있잖아? 우리가 즐겨야 진짜 즐거운 문화제라구.”

  “······시로메구리 선배, 그건.”

 

  말을 꺼냈지만 이어나가기엔 거북한 듯, 유키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리란걸 알았는지 시로메구리 선배는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확실히 사가미 양은 여러 잘못을 했어.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고, 거짓말도 많이 했지. 그래도 이 말 하나만큼은 공감이 가. 올바르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꽈악 끌어당겼다.

 

  “유키노시타 양이 없었더라면 이번 문화제도 없었어. 히키가야 군이 아니었다면 마지막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겠지. 미안해. 학생회장인 내가 제대로 처신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고마워. 두 사람이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시로메구리 선배······.”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좋으니 선배 노릇하게 해주지 않을래? 나에게도 만회할 기회를 줄 수 있을까?”

 

  저렇게까지 말하면 거부할 수가 없다. 원인과 결과,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부탁 드립니다.”

  “응! 맡겨만 줘!”

  “폐회식 전에는 준비를 마쳐두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뭔가 일이 있다면 연락 주십시오.”

  “또 그런다~, 이쪽은 신경쓰지 말라니까! 천~천히 놀다 오세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유키노가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케 짱, 이리 온? 츠루미 양도 가자꾸나.”

  “응! 가자!”

  “자, 잠깐! 천천히 가!”

 

  어느새 친해졌는지 케 짱은 루미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루미도 내심 싫지만은 않은지 몸을 휘청거리면 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잘 됐구나, 좋은 친구가 생겨서.

 

  출발하기 전에 우리도 친구들에게 인사를 고했다.

 

  “코마치, 우린 이만 가볼게. 폐 끼치면 안 된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오빠나 잘 하라구. 유키노 언니랑 있다고 들뜨지 말고!”

  “후후, 걱정 마, 맛 짱. 내가 옆에서 잘 지켜볼 테니까.”
  “아니, 그게 더 걱정인데요······.”

  “하하, 잘 다녀오세요. 유키노 누님. 형님도.”

  “그래. 사 짱이랑 유이가하마도 수고해라.”

  “어, 너도.”

  “잘 놀구 와, 힛키, 유키농!”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시로메구리 선배도 무리하지 마세요.”

  “응! 다녀오세요~.”

 

  낯간지러운 인사는 그만둬 주세요, 꼭 가족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잖아? 뭐, 크게 다를 건 없나.

 

  키가 작은 일행들이 부딪치지 않도록 우리는 선두에서 인파를 헤쳐나갔다. 

 

  “거기지?”

  “응. 배도 고프다 했고, 거기가 좋을 것 같아.”

  실질적 위원장이었던 유키노라면 더 좋은 곳을 알까 싶어 물어보았지만, 역시 필요없는 질문이었다. 명확한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우리는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사촌이니까.

 

  “우리 어디 가?”
  “위로 갈 거야. 맛있는 간식이 있는 곳이란다.”

  “간식?”

  “쿠키나 케이크를 먹을 수 있어. 어느 쪽을 좋아하니?”

  “둘 다 좋아!”

  “다행이네.”

 

  고개를 끄덕인 유키노가 루미를 돌아보았다.

 

  “츠루미 양은 어떠니? 달콤한 과자로 괜찮을까?”
  “괜찮아.”

  “원한다면 커피도 있단다.”

  “그것도 좋고. ······그보다.”

 

  말끝을 흐린 루미가 층계참에 우뚝 멈춰섰다.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유키노를 올려다 본다.

 

  “왜 나만 성이야?”

  “어?”
  “하치만이나 케이카는 이름으로 부르잖아. 나, 나도 괜찮아······. 딱히 배려해주지 않아도.”

 

  휘둥그레진 눈을 내게 향한다. 놀랐을 때, 혹은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를 때 나오는 유키노의 버릇이다. 신뢰하기에, 내게 의견을 구한다. 

 

  그래서 대답해 주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라고.

 

  “괜찮지 않아? 다들 이름으로 부르는데 한 사람만 성인 것도 불편하잖냐. 해 버려, 유키노.”

  “해 버려, 해 버려!”

  “뭣하면 루미루미로 부르던지.”

  “그건 내가 싫어, 하치만.”

 

  초등학생 두 명과 고등학생 한 명의 유치한 투닥임은 의외로 듣기좋은 합창처럼 어우러졌다. 턱을 매만지는 유키노의 입가에도 옅은 웃음이 번진다.

 

  “그럼······, 루미 양으로 될까?”

  “‘양’도 빼. 초등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그, 그럼 루미······ 군은?”

  “그걸로 좋다면 상관없지만. 괜찮겠어?”

  “······미안해. 아직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조금만 시간을 주렴.”
  “알았어.”

 

  피차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툰 아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루미와 유키노는 자매처럼 닮아 있었다. 이 정도 타협이면 꽤나 순조롭게 성사된 셈이다. 남은 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우리가 계속 함께 있는 한 말이야.

  

  “슬슬 가자구. 늦으면 다 팔릴지도 몰라.”

  “그렇네. 그 때는 하치만이 수고해 줘야겠어. 학교 근처 편의점까진 몇 분 거리지?”
  “계산하지 마! 무서운 말 하지 마!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후후후, 과연, 어떨런지.”

 

  짓궂게 웃는 유키노를 외면한 채 계단을 올랐다. 인파를 헤치며, 나아갈 길을 만들어준다. 세 사람분의 발소리를 귓가에 새긴 채 앞으로 나아갔다.

 

  서두르자. 

  달콤한 과자, 정말 먹고 싶어!



  Interlude I

 

  “갔네요.”

  “응, 갔어.”

  “괜찮으려나, 저 두 사람.”

  “뭐 어때, 보기 좋잖아?”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감상을 말한다. 새삼 이 그룹에 있어 힛키랑 유키농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 실감했다. 저쪽도 이쪽도 똑같은 네 명일 텐데, 절반이 빠진 것 만으로도 이곳을 메우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 인가······.

  루미 짱이 빠진 지금 이 중에서 가장 관계성이 옅은 건 나겠지. 항상 화제를 이끌고 나가는 편이지만, 이런 경우는 역시 좀 부담스럽다. 언젠가 지적받았던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또다시 튀어나온다. 그러다 코마치 짱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을 닮은 두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유이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 뭐, 뭐를?”

  “우리 오빠랑 유키노 언니 말이에요.”

  

  뭔가 이 질문, 예전에도 들어본 것 같은데······. 물어보는 건 어느쪽? 이라고 생각한 순간, 결국 같은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시시 웃는 코마치 짱이 말을 잇는다.

 

  “오래 산 부부같지 않나요? 서로의 기분을 완벽하게 파악한다던가, 이런저런 사소한 건 말로 안 해도 통하는 점 말이에요.”

  “응, 확실히 그래. 암만 사촌이래두 가끔은 놀라울 정도야.”

  “그렇죠? 옛날에도 그랬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투닥이구, 그러면서 꽁냥대구,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죠. 어쩌면 오빠와 유키노 언니는 어린 시절 못 한 싸움을 지금에야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조금 우습긴 하지만요.”

 

  혀를 빼꼼 내민 코마치 짱에게 타이시 군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안심했어. 형님도 누님도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까. 케 짱을 대하는 모습도 옛날 그대로인걸. 누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 그대로이다 못해 과할 정도야. 나잇값 못 하고 어린애처럼 구는 것도 똑같아.”

  “누나가 이해해 줘. 그만큼 그리웠다는 걸 테니.”

  “아니까 하는 말이야. 그만큼 서로 좋아하는데 5년이나 떨어져 지낸 거잖아. 그 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강제로라도 붙여서 화해시켰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거든. ······헛되이 보낸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짙은 후회가 묻어나온 말에 타이시 군도 입을 다물었다.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건네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들이 함께 쌓아온 시간에 어떤 말을 얹을 수 있을까? 긍정도 부정도, 어떤 평가도 주제넘는 짓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코마치 짱은 달랐다.

 

  “아뇨,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요.”

 

  서슴없이 부정해, 그들 두 사람을 긍정해 주었다.

  

  “그대로 갔더라면 둘 중 하나 아니었을까요? 너무 가까이 지내다 사고치거나, 대판 싸우고 틀어지거나. 질풍노도의 시기를 떨어져 지낸 덕에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할 기회를 얻은 건지도 모르죠.”

 

  뭔가 알 것 같네. 확실히 중학교 즈음해서는 이런저런 변화가 생기니까. 사춘기에 연애를 시작한 친구들 중에 여태까지 이어져온 사례를 보지 못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데 분명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싹트기 시작한 호기심과 충동을 상대에게 밀어붙였을 뿐. 단지 그뿐이다.

 

  “코마치 짱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렇죠? 그래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다행이에요. 틀어진 원인이 본인들에게 있었다면, 저 두사람은 절대 화해하지 못 했을 테니까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코마치 짱이 힛키와 유키농이 사라진 모퉁이를 응시했다. 위아래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계단으로 이어진 곳. 문득, 지금 코마치 짱이 바라본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우리 집안은 싸워도 말로 안 싸우고 묵혀두는 특성이 있거든요. 한 번 틀어지면 절대로 쉽게 끝나지 않아요. 유이 씨도 알 거에요. 유미코 언니가 오빠를 피하고 있다는 걸. 오빠 말대로 고작 문화제 정도로 홈페이지가 터질 리는 없으니까요.”

  “엥? 그, 그랬어?!”

  “······네?”

 

  끼긱끼긱 인형처럼 목을 돌린 코마치 짱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유이 씨, 설마······.”

  “그치만! 컴퓨터 용어는 잘 모르는걸! 나한테는 영어랑 마찬가지란 말야!
  “······사키 언니, 여기 진학교죠?”

  “진학교지. 유이가하마의 영어 성적이 특이한 거고.”

  “갑자기 힘이 빠지네요. 수험생 입장에선 뭐랄까, 동기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그만 둬, 코마치 짱! 사키 짱!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말아 줘! 나는 그저 유미코의 말을 믿은 죄밖에 없단 말이야. 그게 거짓말일 줄 누가 알았겠냐구!

 

  “에······, 그럴 수도 있는거죠 뭐~. 저도 컴퓨터는 잘 모르니까요~. 그래서 이야기를 돌리자면요~.”

 

  목을 가다듬은 코마치 짱이 화제를 돌려 주었다. 그 배려가 더욱 가슴 아팠지만, 아까 전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제 남은 건 오빠랑 유미코 언니 뿐이에요.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만 하면 다시 예전같은 히키가야 가로 돌아올 수 있어요. 물론 인원수는 조금 늘었지만 말이에요.”

 

  마지막 말을 끝맺을 때 이쪽을 향해 살짝 윙크를 날렸다. 코마치 짱, 정말 천사.

 

  “그러니 일단은 지켜 봅시다. 오빠한테도 뭔가 생각이 있는 듯 하니까요.”

  “괜찮을까?”

  “물론이죠.코마치는 깨달았거든요. 괜히 중간에서 참견해봐야 악화되기만 할 뿐이란 걸. 유키노 언니가 그랬듯이, 유미코 언니 자신의 의지로 마주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잘잘못을 따지는 건 그 다음 일이죠.”

 

  가슴을 쭉 펴고 재잘거리던 코마치 짱이 갑자기 고개를 쭉 들었다.

 

  “······뭐, 둘 다 과하다 싶을만큼 남을 배려하는 구석이 있으니, 쉽지만은 않겠지만,”

 

 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모양새는, 왠지 모르게 눈물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괜찮을 거에요. 오빠나 유키노 언니처럼, 유미코 언니도 코마치보다 훨씬 똑똑하거든요.”
  “코마치 짱······.”

  “아까 전에 제가 부부같다는 말을 했었죠? 맞아요, 부부에요. 엄마 아빠를 대신해, 어린 코마치를 키워줬던 부모님이 저기 있어요. 제게는 오빠가 아빠였고, 유키노 언니와 유미코 언니가 엄마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분명,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에요.”

 

  타이시 군은 말없이 티슈를 뽑아 코마치 짱에게 건네주었다. 코마치 짱은 조금 쑥스러운듯 볼을 붉히며 받아들였다. 방금 들었던 말 때문인가, 정말로 다정한 오누이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평범한 오누이면 저렇게까지는 안 하겠지. 나는 외동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보통 형제가 있는 집은 허구한날 싸운다고 들었다. 부모로부터의 애정이 나눠지니까, 독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게 일상이라고.

 

  나이 차이라고 해봐야 두 살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힛키는, 유키농은, 유미코는, 그리고 사키 짱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부모 역할을 떠맡았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도 그러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동생들을 키웠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멋진 언니 오빠를 보며 자랐으니, 자연스레 동생들도 배려심이 싹틀 수 밖에.

  이토록 끈끈한 유대감은 어린 시절 뿌린 씨앗의 결실이 것이다.

  정말로 아름답고, 눈부신 꽃을 피웠다.

 

  “맛 짱 말이 맞아. 형님도 유미코 누님도 상냥하니까, 분명 화해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누나였어 봐. 같은 상황에선 주먹부터 나갔을걸? 모르긴 몰라도 쭉 같이 지냈더라면 어지간히도 싸워댔을 거야.”

  “타이시, 넌 나중에 나 좀 보자.”

  “헉.”

  “하하하, 심하게는 하지 마세요, 사키 언니.”

  “마, 맛 짱?!”

 

  코마치 짱과 사키 짱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타이시 군의 행동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아, 그런 거였구나. 힛키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바보 취급 당하고, 응징당했던 건, 모두 친구들을 웃게 하기 위함이었어. 코마치 짱도 사키 짱도, 유키농도 모두 알고 있었던 거야. 

 

  유치하지만 따뜻한, 모두가 행복한 역할극을 연기하고 있었던 거구나.

 

  “······저기, 유이가하마 씨였나요?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무심코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얼굴을 붉힌 타이시 군이 거북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코마치 짱과 사키 짱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이런, 큰일이야. 또 칠칠맞지 못한 모습을 보였어. 이 이상은 바보처럼 굴고 싶지 않았는데.

 

  “아, 아무것두 아냐! 그냥 좀, 멍 때려서······.”

 

  두 손으로 쨕 뺨을 때렸다. 부산스럽게 문지르며 아픈 시늉을 했다. 통증과는 다른 뜨거움이 얼굴에 달아올라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달아오른 열기는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유이 선배?”

  

  정말, 지금은 안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응? 잠깐, 선배?

 

  “여기서 뭐하세요? 그런 얼굴로?”

  “······아, 이로하 짱.”

 

  고개를 드니 오랜만에 보는 이로하 짱이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보다 아직 얼굴이 빨간 거구나!

  다급한 마음에 휙휙 화제를 돌렸다.

 

  “별 거 아냐! 이로하 짱은 일하는 중?

  “네. 조금 볼일이 있어서······. 사키 선배도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안녕. 수고 많다.”

  “별말씀을요. 뭔가 못 보던 분들이 많이 계시네요?”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선이 한 점에서 멈춘다. 코마치 짱을 바라본 이로하 짱이 미간을 좁혔다.

 

  아, 그렇지. 이로하 짱,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겠구나. 얼른 소개해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혹시, 선배의 여동생?”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로하 짱은 정답을 맞춰버렸다.

 

  “맞아. 힛키의 여동생, 코마치 짱이야.”

  “히키가야 코마치에요! 저, 그쪽 분은······.”

  “선배의 후배 잇시키 이로하에요. 잘 부탁합니다.”

  “이쪽이야 말로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로하 짱이 먼저 고개 숙이자 코마치 짱도 손사래를 치며 맞절했다. 그러고는 내심 궁금했는지 다소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저를 알고 계신 것도 그렇고, 저희 오빠랑 아는 사이이신가요?”

  “아는 사이긴 한데, 비지니스적인 관계라고 할까, 직속상관이거든요. 제가.”

  “아, 아하~, ······아?”

 

  미심쩍은 눈동자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코마치 짱. 실례라구! 

 

  “그, 그러면 평소에도 자주 만나시겠네요? 혹시, 오빠가 학교에서도 제 얘기를 한다던가······?”

  “글쎄요. 그렇게 자주 하진 않아요. ······아닌가? 만날 때마다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으앗, 역시! 부끄러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저 시스콘은······.”

 

  못 말리겠다는 듯 한 손을 이마에 짚고 고개를 젓는다. 공통의 지인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의사표현이다. 평소대로라면 맞장구를 쳐줄 타이밍인데, 어째서인지 이로하 짱은 그러지 않았다.

 

  “음······, 그건 아니라고 봐요. 선배에게 들은 거라곤 이름 뿐이라서.”

  “엇? 그럼 어떻게 저라고 바로 아셨어요?”

  “그건······, 그냥 느낌? 척 봤을 때부터 어딘가 닮아보였거든요. 이목구비랄까, 특히 눈매가. 아, 그러고보니 남자인 선배라고 사키 선배도 말씀하셨죠? 정말 그대로네요.”

  “내가 말한 건 어린 시절의 하치만이었지만 말이야.”

  “으엑, 하필 닮아도 눈매라니, 코마치 기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혀를 빼꼼 내밀고 불만을 쏟아내는 코마치 짱, 그래도 내심 싫은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그야 힛키, 유키농이랑 화해한 이후에는 눈도 맑아졌는걸. 최근에는 이래저래 일이 바빠 다소 돌아가긴 했지만, 아까 전 케 짱과 놀아줄 때는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마치 가족 아파트의 CM 모델처럼 멋있게 보였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밝아질 거야. 점점 밝아져서, 코마치 짱과 똑같았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지.

  

  타이시 군과도 통성명을 마치고 이로하 짱은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선배는 여기에 없나요?”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끔거리며 물어온다. 아직도 일하는 중이었구나.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붙잡아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이 아이도 누군가와 닮아 굉장히 고집이 강한 아이니까. 히나의 연극이 통과된 것도 반은 이로하 짱 덕분이라고 들었고.

 

  “힛키는 좀 전에 유키농이랑 같이 갔어. 엇갈린 모양이네.”

  “그런가요? 곤란하네요.”

  “급한 일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요, 사진은 이제 됐으니 슬슬 편집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짬이 날 때 해치워두고 싶달까요? 문화제가 끝나고 난 뒤 부탁드리는 것도 송구스럽고.”

 

  하긴 그렇네. 큰 축제가 끝나고 나면 긴장도 풀리구, 축 늘어져 버리니까. 기한이 많이 남을수록 문제다. 나중에 해도 된다며 미뤄버리다 마감이 닥치고서야 허둥지둥 붙잡게 된다.

 

  “응? ······잠깐.”

 

  곰곰이 생각하던 이로하 짱이 뭔가가 걸린다는 듯 턱을 짚었다.

 

  “누구랑 갔다구요?”
  “웅? 유키농이랑 같는데?

  “장소는?”
  “아, 아마 윗층? 언뜻 들은 거긴 하지만······.”
  “그럴 리가. 윗층은 1학년 교실이잖아요. 방금 전송된 사진은 전혀 다른 곳이었는데요?”

  “그, 그게 말야. 메구리 선배가 대신 맡아주셨거든. 힛키랑 유키농은 고생했으니까, 잠깐만이라도 쉬라구. 그, 그렇다구 놀러 간 건 아냐! 아이 돌보기랄까, 그런 걸 하고 있어서! 그 왜, 보육원 교사두 직업이잖아?”
  “어어, 엥? ······그, 그렇죠?”

 

  넌지시 사키 짱을 향하는 시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죠?”

  “음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실은 내 동생도 같이 왔거든. 학교 구경도 시켜줄겸 데리고 갔어. 여름방학 때 만났다던 츠루미 선생님의 조카도 같이.”

  “과연, 그렇군요.”

 

  조리있는 설명에 이로하 짱이 흠흠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사키사키 대단해! 동갑인데도 훨씬 어른스럽잖아? 심지어 생일도 내가 더 빠른데!

 

  “혹시 1학년 학급에 먹을 걸 파는 데가 있어? 케이카가 배가 고프다고 했는데.”

  “아마도 저희 반일 거에요. 전교에서 유일하게 카페를 하고 있거든요.”

  “호오, 잘도 허가가 났다? 식품위생이다 뭐다해서 요즘은 꽤나 깐깐하게 굴텐데?”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느 유능하신 분들이 힘써준 덕분이죠.”

 

  콧노래를 부르며 휴대폰을 꺼낸 이로하 짱이 빠른 리듬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그럼 이 일은 하타노 군에게 맡겨야 겠네요.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마침 거기 계시니까, 문자 정도는 괜찮겠죠?”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배경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화면 위에 미끄러졌다. 혼잣말을 하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이로하 짱이 종이비행기 모양 아이콘을 꾸욱 눌렀다.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볼게요. 동생 분들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 네. 이쪽이야말로······.”

  “좀 더 있다 안 가고?”
  “말씀은 감사하지만, 역시 좀. 그래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럼 이만, 하고 손을 흔들며 이로하 짱은 자리를 떴다. 1학년인데도 대단하구나.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의젓해 보이는 그 모습은, 처음 부실에서 만났을 때와는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로하 짱 또한 영향을 받고, 닮아간다.

 

  “저 사람, 혹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코마치 짱이 눈을 가늘게 떴다. 타이시 군이 그 말을 받았다.

 

  “꽤나 스스럼없는 태도였어.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을까?”
   

  대답은 사키 짱에게서 나왔다.

 

  “그건 아냐. 새학기 이후 처음 만난 사이거든.”

  “맞다, 그 때는 사키 짱도 있었지.”

  “정말이야, 누나? 의외인데?”

  “사실이야. 말은 안하지만, 하치만은 은근히 쟤를 동생 취급하거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로하도 응석을 부리는 스타일이니, 상성이 좋았다는 거겠지.” 

 

  잠자코 있던 코마치 짱이 푸욱 한숨을 쉬더니, 한껏 찡그린 얼굴로 푸념을 내뱉었다.

 

  “에에, 여동생이라니, 그게 뭐야? 코마치는 싫은데······.”

  “마, 맛 짱?”
  “지금만 해도 충분히 많다구. 하나같이 특색있는 미인들 뿐인데, 이제는 여동생 포지션까지 위협받는 거야? 코마치의 개성이 묻히고 있어······.”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내 어깨를 사키 짱이 두드리더니, 입가에 손을 대고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케 짱이 태어나기 전까진 우리 중에선 코마치가 막내였거든. 질투 비슷한 거랄까, 남매 사이에선 흔한 일이야.”

  “저, 정말로 그래?”

  “어. 케 짱이야 워낙 귀여우니 맛 짱도 신경쓰지 않지만, 갑자기 자기 또래의 경쟁자가 생긴 것 같아 불안해하는 거겠지. 맛 짱도 참 응석꾸러기니까.”

 

  자기 입으루 동생을 자랑하는 사 짱두 어떤 의미론 중증이라구 생각해······. 

 

  “뭐, 이런 일이 한 두 번도 아니긴 하지. 오빠도 별 생각 없었을 테고.”

  “하, 한 두번이 아니구나······.”

  “말도 마세요. 우리 오빠는 배배 꼬인 성격에 사과밖에 할 줄 모르는 소심남이지만, 안타깝게도 얼굴만은 좋으니까요. 덤으로 쓸데없이 배려심도 좋고..”

 

  아하하 쓴웃음으로 얼버무리자 코마치 짱은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어조로 불만을 늘어놓았다.  

 

  “옛날부터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어요.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내내 남자인 친구는 한 명도 없었죠. 본인은 죽어도 눈치채지 못 하는데다 의식조차 하지 않으니 문제였지만.”

  “어쩔 수 없지. 그도 그럴게 유키노 누님이 너무도 확고하게 형님 곁을 지키고 있었잖아. 같이 놀아도 선은 넘지 않는다는 게 암묵적인 룰 같은 거였고.”

  “그, 그랬어? 나는 몰랐는데?”

  “누나······.”

 

  지, 지금이랑 별로 다를 게 없었구나. 왠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긴, 그게 우리 오빠의 장점이긴 해.”

  “장점?”

  “어머, 유이 씨도 아실텐데요? 같은 여자니까~.”

 

  한쪽 눈을 깜빡인 코마치 짱이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한 여자만 바라본다는 건 여자에게 있어 더할나위 없는 매력이니까요! 그만큼 안심이 되는 남자도 없죠. 하아, 유키노 언니만 아니었더라면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을 텐데······. 코마치에게는 어디 그런 남자 없으려나?”

 

  으음, 이 아이도 조금, 아니 꽤나 브라콘 기질이 있구나. 불만이 아니었던 걸까, 코마치 짱 나름의 칭찬방식일지도.

 

  “괘, 괜찮지 않을까? 맛 짱에게도 분명 그런 남자가 있을 거야!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잘 찾아보면 주변에도 있을 수 있고······!”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탓 짱 더워? 엄청 땀 흘리고 있는데?”

  “아, 아냐! 괜찮아! 지금 닦을 테니까!”

  “됐고, 이리와 봐. 어휴, 더우면 덥다고 말을 하지.”

 

  손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낸 코마치 짱이 타이시 군에게 다가갔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걸 끌어당겨, 이마를 휙 들춘다. 닦아주는 쪽도, 받는 쪽도 묘하게 자연스러우면서도 알콩달콩한 분위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설마 얘네도야? 

  ······아하하, 그렇구나~. 요즘은 이 정도가 보통인 거구나. 하긴, 힛키랑 유키농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꽁냥댔다고 했지. 시대에 뒤쳐진 건 유이유이였네~.

 

  ······남자친구, 갖고 싶어라~.

 

  

  Interlude II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여러 선택을 한다. 그것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어느 쪽도 놓치고 싶지 않을만큼 중대한 문제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무엇을 고르든 그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매 순간마다 의도치 않은 기로에 서는 것이 인생이니까.

 

  말이 길었다. 원래 몸이 힘들 때는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다.

  교실 문 앞에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비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자 주변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멀찍이 거리를 두어 피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친절한 사람들이다.

 

  「하타노, 긴급사태다. 빨리 와라.」

 

  꺼내든 휴대폰에서, 좀 전에 온 문자를 재확인했다. 뭐가 됐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다른 선택지는 사라져 버렸다. 친구와 일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친구를 고르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비지니스적인 관계는 개인적인 위기 상황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 요즘은 생각이 바뀔 것 같기도 하지만.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뒷문에 다가가 섰다. 출입을 통제하는 사람은 다행히도 같은반 동급생. 친하긴 커녕 정반대에 가깝지만, 지금은 그 무관심도 고맙기만 했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눈을 갖다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나를 부른 걸까?

  불안감밖에 포함되지 않은 두근거림을 억누르면서.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미지의 공포였다.

 

  “케 짱, 맛있니?”

  “응! 있지있지, 하 짱! 나 이거 더 먹고 싶어!”

  “좋아. 하나 더 시킬까? 루미루미는 어때?”

  “루미루미라고 하지 마! 나는 딱히······.”

  “거짓말은 좋지 않단다, 루미 양. 아까부터 계속 메뉴판을 쳐다보고 있었잖니?”

  “읏?! 이, 이건 그냥······!”

  “꼬르륵 소리도 다 들렸으니 포기해. 그치, 케 짱?”
  “응! 확실히 들렸어! 엄청 크게!”

  “으으······.”

  “그렇다는 구나. 어떡할래?”

  “······주세요.”

  “알았어.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렴. 여기, 주문을 추가해도 될까요?”

  

  그들은 교실 한구석 창가자리에 앉아 있었다. 볕이 내리쪄 주위보다 밝아 보이는 그곳은 그들을 위해 안배된 특등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격리구역처럼 보이기도 했다. 화창한 여름 하늘처럼 밝게 빛나는 그곳에 비하면 교실에 늘어진 다른 테이블들은 장마처럼 흐려 보였다.

 

  하지만 결코 우울한 분위기는 아니였다.

  마치 빛을 쫓는 해바라기처럼 객석에 앉은 손님들의 시선이 쏠려 있다.

 

  주문한 음식이 서빙되자 두 사람분의 손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마치 사전에 합을 맞춘 듯 조금도 겹치지 않는 동선으로.

 

  “모카번은 제법 크기가 되니까 잘라서 먹도록 하자.”

  “알았어. 카페인은 괜찮을까? 밤에 잠 못 잔다고 사 짱에게 잔소리 듣긴 싫은데.”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게다가 이후에도 돌아다닐 예정이잖니?”

  “그건 그렇군. 케 짱, 루미. 너네들 몫이야.”

  “고마워, 하 짱!”

  “잘 먹을게.”

  “유키노시타, 나는 이제 리필은 됐어. 너는 어때?”

  “나도 됐다고 생각하지만, 의외구나. 역시 맥캔이 아닌 커피는 입에 안 맞는걸까?”
  “얼마나 당분 중독이라 생각하는 거야? 아니라고. 얼마 전에 조절에 실패해서 밤을 새 적이 있었거든. 이쯤에서 멈추는게 적당하지 싶어서.”

  “생각해 보니 당신, 오늘은 커피밖에 마시지 않았구나. 카페인은 이뇨작용이 있고, 게다가 땀도 많이 흘렸어. 목 마르지 않니? 커피 외에 다른 음료수를 시키는 건 어떨까?”
  “흐음, 그럼 시켜볼까? 레모네이드 정도라면 괜찮겠지.”

  “하 짱, 레모네이드가 뭐야?”
  “엄청 신 음료수야.”

  “맛있어?”

  “글쎄, 마셔볼래?”

  “마실래!”

  “알았어. 실례합니다. 레모네이드 하나에 빨대 두 개를 추가해서 주시겠어요?”

  “······하치만, 왜 두 개야?”

  “아니, 루미도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아니거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덜어준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이미 쓴 컵에 부으면 맛이 섞여버리잖아. 됐어. 정 꺼림칙하면 첫입은 루미에게 줄게. 됬지?”

  “되긴 뭐가······, 됐어. 마음대로 해.”

  “히키가야 군, 음료가 나오기 전에 입을 닦으려 하는데, 티슈 필요하니?”

  “오, 그럼 사양않고.”

  “자, 여기. 케 짱도 이 쪽 볼래?”
  “응!”

  “······왜 날 쳐다 봐?”

  “아니, 티슈 주려고 한 건데. 뭐야, 닦아주길 바래?”

  “당장 내놔. 혼자서 할 테니까.”

  “네네. 분부대로 합죠.”

  

  ······뭘까 저건? 

  가족놀이? 아니 양갈래 머리 소녀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한 쪽은 어딜 어떻게 봐도 초등학생이잖아. 저 나이대의 딸이 있으려면 몇 살에 낳아야 하는건데? 젠장, 생각이 꼬이기 시작하니 저질스런 방향으로 튀는군. 자중하자, 하타노.

 

  “티슈 잘 썼다. 고마워, 유키노시타.”

  “이 정도 가지고 뭘.”

  “하 짱, 하 짱!”
  “응? 왜 그러니, 케 짱?”

 

  그건 그렇고 진짜 적응 안 되네 저거. 생각해 보라고. 얼마 전에 알게 된 선배이자 상사가 유치원생 나이대의 어린아이에게 혀짧은 발음으로 불리고, 본인도 한껏 혀를 굴린 목소리로 대답해주고 있어. 평소 이미지랑 딴판인 게 이쯤되면 코미디야. 에스프레소보다 진한 블랙 코미디. 

 

  “나, 궁금한 게 있어! 방금 생각난 건데~.”

  “뭔데?”
  “왜 유키 짱이라구 안 해? 항상 그렇게 불렀잖아. 여기선 안 하는 거야?”

  “자, 잠깐, 케 짱!”

 

  얼씨구? 

  항상? 여기선?

  뭔가 무시무시한 편린을 엿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연은 자각없이 주변을 휩쓸었다. 두 사람이 황급히 소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엎어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윗층, 정확히는 사람들이 많아진 뒤로는 서로를 성으로 부르고 있어. 타인 앞에서 부르는게 부끄러운가 생각해봤지만, 그렇다면 여름방학 때의 일이 설명되지 않아.”

  “야, 루미! 지금 그런말을 해버리면!”

  “있지, 왜 그러는 거야 하 짱? 유키 짱이 싫어진 거야? 유키 짱도?” 

  “성으로 부르면 불편하다고, 분명 하치만이 그랬었지?”

 

  아무래도 힘의 우열은 나이와 비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이에게 곤란한 질문을 받은 부부같기도 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부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말이지, 케 짱, 오빠랑 언니는 사촌이기 이전에 위원이랄까······.”

  “위원? ”

  “반장, 이라고 말하면 알려나? 아무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단다. 일하는 곳에서는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어서······.”

  “자제?”

 

 어린아이에게는 조금 어려운 단어였는지 소녀는 번갈아 설명하는 두 사람을 향해 연신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참고로 나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다. 사전적인 정의가 아닌, 단어의 활용에 대해서.

  

  ······와, 그게 자제한 거였다니. 안하면 어떤 수준이길래? 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흘깃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되다만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던 서빙 점원의 철벽같던 비즈니스 미소도 무너져 내렸다.

 

  “저기, 주문하신 레모네이드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왔다! 레몬 주스!”

 

  그녀-물론 우리 반 학생이다-가 용기를 내준 덕분에 부부장도 정신을 차렸다. 군중들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 멈춰있던 시간이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음료를 대접받은 선배가 살짝 고개 숙였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폐를 끼쳐 버렸네요.”

  

  함께 지내는 동안 알게 된 성격을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의 부부장은 턱끝까지 차오른 쪽팔림은 억누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담담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책임감 있는 자세가 어우러지니, 붉게 상기된 뺨도 완벽한 미술품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 증거로, 분명 사과를 받는 측인 점원 양이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힌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게 아니라! 아무튼 괜찮아요! 그럼요! 부디 오래오래 있어주세요! 아니, 느긋하게!”

  “잘 가, 예쁜 언니!”

  “크, 크헉?!”

  

  횡설수설하더니, 빨갛게 물든 얼굴을 쟁반으로 가린 채 줄행랑을 쳤다. 칫, 이래서 미남은 불공평하다니까. 나였으면 손해배상까지 받아냈을 녀석들이라고. 게다가 아이까지 데려오다니, 추가 데미지마저 엄청나구만.

 

  “후우. 그래도 잘 끝났으니 다행이네.”

  “하, 히키가야 군, 당신······.”

  “응? 나 불렀어? 유키노시타? 아, 혹시 걱정해주는 거야? 난 괜찮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부위원장인 널 고개 숙이게 할 수도 없으니까.”

  

  아냐! 부부장 이 멍청이! 그게 아니라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둔감할 수 있는 거야? 부위원장의 심기가 불편한 건 절대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니잖아! 게다가 마지막에 은근슬쩍 끼워넣은 멘트는 뭔데? 혹시 일부러야? 알면서 그러는 거냐고! 거 참 죄많은 남자일세!

 

  이래서야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다. 조용히 타오르던 부위원장의 화도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아냐, 그냥 고마워서. 나도 같이 사과했어야 하는데.”

  “신경쓰지 마.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니 기쁜걸.”

  

  아 네네, 몇 초 지났다고 다시 꽁냥 모드입니까. 자제할 생각따윈 전혀 없군요? 성으로 부르는 보람이 사라지고 있다구요?

 

  “하 짱! 빨리빨리! 나 이거 마셔보고 싶어!”

  “아참,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 케 짱. 빨대 꽂아줄 테니까.”

  “응!”

  “루미루미도 마실래?”

  “조, 조금이라면······. 아니 그보다, 루미루미라고 하지 말라니까.”

  

  능숙한 솜씨로 빨대를 꽂아, 두 사람 앞에 내미는 모습은 오빠라기보다 아빠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던 부부장이 문득 아래쪽으로 시선을 낮춘다. 문자가 왔는지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카운터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더니 그림자 하나가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소, 손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이 카페 언제부터 주문을 테이블 서비스로 받았던 거야?

  심지어 그새 사람이 바뀐 걸 보니 모종의 경쟁까지 벌인 모양이었다. 

 

  “아, 주문은 아니구요. 사람을 찾고 있어서······. 혹시 하타노가 여기에 있나요?”

  “······하타노 군?”

  달아올랐던 음성이, 거짓말처럼 식었다. 흡사 삼 일 지난 바게뜨처럼 거칠고 딱딱한 목소리로. 나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이유는 몰라도 나를 찾는 걸 안 이상, 이 이상 엿보는 것도 실례겠지. 아니, 원래 엿보는 건 실례구나. 뭐가 됐든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섰다. 찾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다. 절대 동급생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워서가 아니다.

 

  “안녕, 하타노 군.”

  “안녕하세요, 부위원장.”

  “어라, 딱 좋을 때 왔네.”

  “뭔가 우리반이 시끄럽길래 와봤거든요. 그런데······.”

  쏟아지는 시선을 가로질러 테이블 앞에 섰다. 잘도 도망치지 않았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목을 모으는 건 껄끄럽고, ‘너는 뭐야? 누구야?’라는 눈빛을 읽어내는 것도 그만하고 싶으니까. 작은 불만을 담아 부부장을 질책했다.

 

  “누구는 일하는데 선배는 염장이나 지르고 있는 겁니까? 어쩐지 저희 반 행사에 관심이 많으시더니, 이상하게 열심일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말이죠.”

  “실례네. 트러블이 없는지 순찰왔을 뿐이야. 유키노시타도 같이 온 거 보면 모르겠니?”

  “꼬마 아가씨 두 분이 없다면 믿을 뻔 했네요.”

  “시로메구리 선배의 지시야. 꼬우면 출세해라.”

  “젠장!”

 

  그렇군! 믿는 구석이 학생회장이었으니 이토록 당당했던 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지금은 굽히고 들어갈 수 밖에.

 

  “그래서, 왜요? 저희 반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 별 건 아니고. 이건······ 직속상관으로부터의 전언인데.”

  “직속상관?”

 

  그건 또 무슨 이상한 호칭이람······ 라고 생각한 순간, 부부장의 진의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앉아 있었더라면 무릎을 탁 쳤을 정도.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부부장은 이곳에서 잇시키 이로하의 이미지가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 알고 있는게 틀림없다. 공개적으로 언급되 좋을 게 없고, 하물며 그 잘나가는 행적이 선배의 입을 통해 나온다면 여러모로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있다.

  일반 학생들이야 실행 위원회 같은 거에 무관심하니 조직 계보도 따위 알 턱이 없고, 나 같은 말단 위로는 여러 상사가 있을 터. 그 중에서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게끔, ‘기록부장’ 대신 일부러 두루뭉술한 호칭을 고른 것이다. 

 

  이럴 때는 눈치가 있는건지 없는건지 모르겠다니까. 

 

  “헤에, 뭐라던가요?”

  “일이다. 지금 당장 실행 위원회 회의실로 내려오래. 너의 능력을 높이 사 새로운 중책을 맡기고 싶다는구나.”

  “······뭐요?”

  “별 건 아니고, 이번 문화제의 기록 자료를 편집하는 일이야. 자료 수가 많지 않으니 2시간이면 충분하죠······ 라는데? 아, 참고로 이 2시간은 내가 문자를 받은 직후부터야.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줄어들고 있어.”

  “아니 무슨, 이렇게 갑자기 시키는게 어딨어요. 저도 지금 바쁘······.”

  “잠깐, 뒤에 추신이 있네. ······ ‘빨리 와서 노트북 수령해 가주세요. 직접 넘겨줘야 하는 물건이니까,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야, 하타노. 이거 얼른······.”

  “수고하십쇼.”

 

  전언 철회다······. 좋은 사람은 커녕 지금 당장 노동부에 신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악덕 종자들이다. 본인은 노는 주제에 일을 맡기는 부부장, 안 봐도 뻔한 그 특유의 악마같은 미소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기록 부장, 거기에, 이 모든 일을 묵인해준 학생회장까지.

 

  출세욕을 마구마구 불태우며 돌아서는 찰나, 앙증맞은 음성이 뒤따라왔다.

 

  “하 짱! 잘 가!”

  “그, 그래. 잘 놀다 가렴.”

 

  그 부끄러운 이름이 나를 지칭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린아이를 나무랄 수는 없는 법이다.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재차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손을 흔들어주던 부위원장이 한 소리 했다.

 

  “케 짱, 그래선 하치만과 헷갈리잖니?”
  “헷갈리지 않는걸! 나는 제대로 구분할 수 있어!”

  “정말······. 당신은 또 왜 그러니?”
  “아니, 뭐랄까, 내 전용 호칭이라 생각했는데, 뺏겨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애구나. 애가 셋이야······.”

  

  크윽, 뭐냐고 대체! 저 청춘을 넘어 황혼에 진입한 듯한 대화는! 누구는 일하러 가는데 아주 깨가 쏟아지고 말이야! 에잇, 행복해라!

  서러움을 꾹 참고 복도를 나서는데 불쑥 튀어나온 손에 목덜미를 붙잡혔다.

 

  “켁! 뭐, 뭐야!”

 

  사레들린 목을 부여잡고 간신히 대답했지만, 어느새 한 무리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복도 한 구석에 몰려버렸다. 이, 이건 또 뭔데!

 

  “하타노 군, 저 선배랑 아는 사이?”

  “엥? 갑자기 무슨······.”

  “대답해! 아는 사이야?”
  “그, 그냥 실행 위원회에서 만났을 뿐이야. ······그게 왜?”

 

  살기등등한 기세가 무서워 꼴사납게 실토하자, 나를 둘러싼 녀석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한다.

 

  “아아, 아깝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실행 위원회에 들 걸 그랬어~.”

  “그치그치? 뭔가 좋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저 정도로 좋은 남자일 줄이야~.”

  “처음에는 하야마 선배가 들어온 줄 알았다니~?. 금발이 아니어서 알아봤지만.”

  “그래도 그 소문, 뒤에는 뭔가 이상하게 바뀌지 않았어? 뭐라더라, 회의실에서 치정 싸움을 벌였다던가?”

  “에이, 그런 건 다 뻥이지. 이런 소문이 다 그렇잖아? 보나마나 저 선배에게 차인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퍼뜨렸을 거야~.”

  “그러려나~? 하긴 남 앞에서 싸울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지.”

  “같이 있는 아이들도 잘 따르구~,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저 아이들도 엄청 귀엽지 않아? 언니라고 불렸을 땐 기절할 뻔 했다니까?”
  “맞아맞아, 그거 진짜 부러웠지~.”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굴까?”
  “유키노시타 선배 아냐? 그 왜, 2학년 J반에 그 사람!”

  “분명 아까 듣기로는 사촌이라고······, 그치만, 뭔가 더 있는 것 같지?”
  “응, 그 분위기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재밌을 것 같고, 지켜볼 가치가 있을지도?”
  “뭣하면 중간에 뺏어버릴 지도 모르구~.”

  “진심이야? 대담해~!”
  “농담이야. 아.직.은, 그렇게 됐으니 하타노 군, 당신의 협력이······ 어? 뭐야? 얘 어디갔어?”

  “하타노?!”

 

  멀리서 들려오는 부름을 무시하고 내달린다. 평소 희박했던 존재감에 이렇게 감사한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뭐? 부부장을 뺏어? 꿈도 참 야무지네. 저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는 건 불가능해. 그런짓을 했다간 가만히 안 있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그야말로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셈이지.

 

  말이 길었다.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할 때가 아니지. 회의실까지는 멀고 시간은 꽤나 지나버렸다. 계단을 내려가려 모퉁이를 도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녀석은 거기에 서 있었다.

 

  사가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

 

  “여.”

  “사람을 불러놓고 여기 숨어 있었냐?”

  “괜시리 엮이긴 싫어서 말야. 뭔가 위험한 냄새도 났고.”

  “하긴, 그건 맞는 말이다만.”

 

  내가 니 입장이었어도 우리 반 근처에도 안 갔겠다만.

  계단을 내려가자 사가미도 따라왔다. 그야 이대로는 교실로 돌아가기도 껄끄럽고, 딱히 있을 곳도 없을 테니. 잠자코 걸어가며 말을 맞춘다.

 

  “그래서, 뭐야 저 사람은?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저 정도로 리얼충일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일하던 도중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어쩌면 억눌려있던 게 터져 나온 걸지도.”

  “알다가도 모르겠구만. 저러면서도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본인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냐? 혹시 모르지, 그런 과정 따위는 건너 뛰었다는 의미일지도.”

  “가능성은 높네.”

 

  불만 아닌 불만에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혹시 저 두 사람을 쫓아내 달라고 부른 거였냐?”

  “그런 건 아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매출에는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그림이 되는 광경이긴 하지. 그걸로 이익을 낼 생각을 하는 너도 너지만.”

  “내가 걱정했던 건 일부 여자애들이야. 뭔가 쑥덕이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나로써는 접근할 수 없으니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지만.”

  “······요컨대 나를 팔아먹었다는 의미?”
  “설마.”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는 사이 회의실이 있는 층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이 녀석?

 

  “괜찮겠냐?”
  “뭐, ······그건 아니지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회의실에선 노트북만 가지고 나올 거니까. 어차피 사람이 오가는 곳이라 작업하기도 글렀고, 지금 시간이면 유희부 부실에 가는 게 나아.”

  “알아, 안다고. 잇시키 양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잊었나 본데 나도 같은 반이거든? 반년이나 지냈는데 견적 파악은 끝났다고.”

  “아, 그러셔. 그럼 간다?”

 

  고작 반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냐, 사가미. 너는 잇시키 양을 잘 몰라. 고작 같은 반에서 함께 지낸 정도로는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지. 마주보아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부딪치고, 고생하고, 감정을 나눌 때야 비로소, 개인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가 드러날 뿐이다. 우리가 지낸 시간은 한 달 남짓이지만 그동안 수없이 많은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운이 좋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분명 지금 알고 있는 사실조차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시간 외 잔업은 사양이라고.



  xxx

 

  폐회식은 체육관에서 진행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이틀간의 문화제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전 공지를 잘했는지 줄지어 늘어놓은 의자는 이미 만석이었다. 넘실거리는 인파가 출입구까지 뻗어있는 것은 무대 뒤에서도 확실하게 잘 보였다.

 

  “후와, 엄청 후끈후끈해~.”

 

  커튼 틈새로 지켜보던 시로메구리 선배가 탄성을 질렀다.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며 무대 이곳저곳을 훑어본다.

 

  “에어컨을 켰는데도 덥네. 역시 대형 선풍기도 빌리는 편이 좋았으려나?”
  “아니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기기를 배치하면 관객석의 배열이 흐트러질 수 있어요. 무대에서의 소리가 소음에 가려질 가능성도 있고요.”

 

  유키노의 설명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했지만, 시로메구리 선배는 그래도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하는 수 없이 답지 않은 말로 손을 보탰다.

 

  “조금은 더운게 축제 분위기가 날 겁니다. 관객들도 즐거워 보이니까요.”

 

  어둡고, 시끄럽고,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어느 것 하나 싫고 인연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나의 집단 속에서 열심히 노력해 결과물을 내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미소로 이어지는 데에서는 외톨이였던 나조차도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이런 게 보람일지도 모른다.

 

  고작 이틀이었지만, 분명 개막식 때와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흠흠, 과연과연.”

 

  시로메구리 선배 또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 선배의 동생들이구나. 듣던대로 대단해. 정말로,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또 그런 말씀을······.”
  “맞아요. 이미 끝난 이야기잖아요. 게다가 하루 짱이랑 엮이는 것도 좀 그래서······.”
  “응? 히키가야 군, 그건 무슨 소리야?”

 

  역시 말할 수 밖에 없나. 조금 쑥스러운데. 유치하달까, 속좁은 어린애처럼 보일 것 같단 말이지.

 

  “하루 짱은 확실히 저희를 아껴주는 누나이긴 했어요. 하지만 그 방식이 좀 거칠어서······. 장난도 심했고,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가곤 했거든요. 게다가 저는 유키노와 달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잖아요? 제 기억속 하루 짱이 시로메구리 선배가 말씀하시는 이미지와 맞물리지 않아서 말이죠. 솔직히 말해 짓궂은 사람이었다는 인상밖에 없어서······.”

  “헤에······, 그랬구나~. 핫 짱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구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뇌리에 울렸고, 후텁지근한 체육관에서 여기만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뒤돌아보자, 하루 짱은 시릴듯한 냉소를 지으며 이쪽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민소매 블라우스에 업스커트, 분명 캐주얼한 코디일텐데도 어딘가 묘하게 정장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한 손에 든 미니선풍기에서 나온 바람에 잘 손질된 세미롱 헤어가 춤을 추었다. 그러나 내게는 지옥에서 찾아온 귀신이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을 가르는 팬이, 스스로의 몸뚱이로 공간을 가른다.

 

  “요놈! 누나가 없다고 뒷담을 하다니!”

  “아, 아파?!”

 

  꾸욱꾸욱 눌러오는 창살 너머로 느껴지는 진동. 아직도 돌아가는 날개 너머로, 삐져 들어간 머리카락이 투다다다 부딪힌다. 머리는 그만 둬! 하루 짱은 잘 모르겠지만, 이쪽은 유키노시타에는 없는 유전자가 있다고!!! 

 

  “하루 짱, 그만!” 

  “오오, 반격하는 거야? 좋아, 그래야 내 동생이지!”

  손목을 거머쥐고 머리에서 떼어낸다. 잽싸게 뒷걸음질해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역시 누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한순간에 어깨를 붙든 하루 짱이 내 힘을 역이용해 거리를 좁혔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두 팔을 둘러, 자신의 품에 꼬옥 껴안는다.

 

  “오랜만이야, 핫 짱! 보고 싶었어!”

  “하, 하루 짱?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싫습니다! 누나는 남동생 성분이 필요해요! 채워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아!”

  “무슨 그런 억지가······!”

 

  아무리 바둥거려도 하루 짱은 놓아주지 않았다. 헝클어뜨리듯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이래서는 못 말리겠구나.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체념하려 한 때에 밀착한 틈새로 유키노가 파고들었다.

 

  “언니, 떨어져.”

  

  역시 유키 짱! 내가 곤란할 땐 언제든 구하러 와준다니까! 구세주! 천사! 유키농!

  

  “여긴 학교야. 본디라면 외부인이 들어와선 안 될 장소고. 졸업생에 전임 실행 위원장인 점을 고려해 허가됐을 뿐, 여기 있을 거라면 언동에는 주의해 줬으면 해. 우리 일을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하루 짱 앞에 버티고 서 나를 지켜주는 작은 등은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태어난 이래 언제나 존재해왔던 우열은 사라지고, 처음으로 저 두 자매가 대등하게 비춰졌다. 그것은 아마 하루 짱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우리’의 일, 인가. 그렇구나······.”

 

  무대 뒤편을 둘러본 하루 짱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렇네. 내가 위원장일 때만큼, 아니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잘했어. 역시 둘이서 하나이기 때문일까?”
  

  하루 짱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순한 수긍이었다. 다만 유키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나랑 하치만이 함께 노력했는걸. 누구에게도 질 리가 없어.”

 

  2:1인 시점에서 대등한 승부일 리가 없건만, 유키노는 여태까지 보여준 겸손이 무색하게도 오만할 정도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유키노의 기준에서는 대등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떨어질 수 없으니 한 몸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앞으로 닥쳐올 시련에도 함께 싸워나갈 것이라 선언하는 것이다.

 

  그 속뜻을 모를리 없는 하루 짱이 호전적인 미소로 응수했다.

 

  “실례했구나. 손님으로 온 이상 책임자의 말에는 따라야겠지. 사과할게, 유키노.”
  “알아준다면 됐어. 이쪽의 통제를 따라준다면 불만은 없으니까. 환영할게, 언니.”

 

  일종의 의식인지 하루 짱이 멋들어진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니, 정상회담이냐고. 장소를 착각한 듯한 행동에 기가 막혔지만, 유키노는 밝은 미소로 맞잡아 주었다. 

  

  아마 하루 짱 나름대로의 타협일 테지.

  별다른 직책이 없는 나야 상관없지만, 명목상 부위원장에 실질적 리더인 유키노를 남들이 보는 앞에서 끌어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하루 짱은 우리들의 맏언니고, 나를 사랑하는 만큼 유키노 또한 사랑한다. 최소한의 스킨십으로 악수를 택했고, 유키노 또한 이해한 것이었으리라.

 

  위태롭고, 따뜻하며, 조금은 솔직하지 못한 두 자매의 대립은 막을 내렸다. 

  훈훈한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슬며시 다가온 불청객이 산통을 깼다.

 

  “정말이었네요. 유키노시타 선배랑 똑같이 생겼어! 엄청난 미인!”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건 잇시키 이로하였다. 얘는 갑자기 튀어나와서 무슨 소리래?

 

  “뭐냐 잇시키, 언제부터 있었어?”
  “선배가 유키노 선배의 언니분께 맞고 있을 때부터?”
  “한참 전부터잖아······.”

 

  보고 있었으면 말려 달라고······.

 

  “준비 상황은 어때?”
  “막 끝난 참이에요. 장비들도 이상없고 각 파트별 인원배치도 끝. 이벤트 공연이 끝날때까지는 대기하라고 일러두었어요.”

  “생각보다 빨리 끝났구나. ······어라? 그런데 넌 여기 왜 있어?”

  “왜냐하면, 음향실은 코앞이잖아요~.”

  답이 되지 않는 답변을 남긴 채, 잇시키 이로하는 휑하니 뛰어가 버렸다.

 

  “안녕하세요, 유키노시타 선배! 유키노 선배님의 언니분이시라구요?”
  “맞아. 나를 아니? 혹시 유키노와 하치만의 지인?”

  “그러고보니 소개를 안 드렸네요, 하루 선배. 히키가야 군과 같은 부서였던 아이에요.”

  “잇시키 이로하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공통의 지인이 있는 것이 잘 먹혔는지 세 사람은 순식간에 꺄아꺄아 걸즈 토크에 빠져들었다. 시로메구리 선배야 그렇다 쳐도 하루 짱과 잇시키는 처음일텐데, 어느새 전화번호까지 교환하는군. 여자들은 대단해.

 

  싹싹한 후배에, 짓궂은 선배, 장난기 많은 학생회장인가. 이건 또 무서운 조합이 탄생했을지도.

 

  “금방 친하지네.”

  “하루 짱도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잖냐. 유키 짱은 안 가도 돼?”

  “응. 전화번호는 다 알고 있으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어떻게 해야 전해질지 고민하기도 잠시, 출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고개를 돌렸다. 내심 안심했던 것은 비밀이다.

 

  “아, 오빠야! 유키노 언니!”

  

  오오! 마이 러블리 시스터 코마치! 어서 오렴!

  다른 사람들도 무어라 말한 것 같긴 했지만, 코마치의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잖아. 오빠가 동생을 만나는 거에 비하면.

 

  아까 전 못한 허그를 다시 하려는지 탓탓탓 이쪽으로 대시하는 코마치. 한쪽 무릎을 굽히고 팔을 펼쳐, 받아들 준비를 한다. 거리 양호, 속도 양호, 출력도 양호다. 오빠 포인트는 MAX. 자, 와라!

 

  “그리고 하루 짱!”

  “맛 짱?! 맛 짱이야? 에잇, 비켜 봐, 핫 짱!”

  “와아! 진짜 하루 짱이야! 오랜만이야!”

  “나두나두! 이게 얼마만이니, 맛 짱? 여름 방학 때 연락한 이후 처음이던가?”

  ······하루 짱이 날 밀었어. 코마치도 이 쪽 한 번 안 보고 안겨버렸고.

  

  “괜찮아, 하치만?”
  “아아, ······아마도.”

 

  실은 전혀 괜찮지 않지만, 나를 일으켜주는 유키노의 손길에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툭툭 먼지를 털어나가는데, 토닥이는 손이 늘어났다.

 

  “사 짱······.”

  “아아, 심한 꼴을 당했네. 하루 짱도 너무한다니까.”

  “고마워. 근데 이거 평소에 사 짱에게 맞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뭐라고 했어?”
  “······아뇨, 그럴 리가요.”

 

  지그시 옆구리에 갖다댄 주먹에 마른침을 삼킨다. 지금 내 목숨은 사 짱의 손에 있다. 아주 조금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필시 교통사고보다 험한 꼴을 당하게 되겠지.

 

  “탓 짱, 존경해. 언제나 고생이 많아.”

 

  비밀스럽게 속삭이자, 탓 짱이 아하하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도 별로 다를 게 없는데요 뭘. 그러고보니 아까 그 애는요?”

  “루미루미라면 안내가 끝난 뒤에 돌려보냈어. 츠루미 선생님이 데리러 오셨거든.”

  “아하, ······어라, 그러고보니 케 짱은?”

  “화장실. 카페에서 좀 많이 마신 모양이라서. 유이가하마가 동행해 줬거든.”

 

  걱정말고 일하라는 배려가 절반, 자신도 얼른 케 짱과 친해지고 싶다는게 나머지 절반이겠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우리도 흔쾌히 동생을 맡겼다.

 

  그리고 그림자가 비치듯이 우리의 친구는 돌아왔다.

 

  “얏하로! 또 만나네, 다들!”

 

  쫙 펼친 손바닥이 돛처럼 흔들리는 찰나, 풍랑이라도 만난듯 요동쳤다. 나머지 한쪽 손은 자그마한 팔에 붙들린 채, 질질질 끌려가기 시작한다.

 

  “어, 어라 케 짱? 그 쪽이 아닌······ 으엣?!”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유이가하마는 힘이 약한걸까? 유치원생에게도 질 정도면 유키노보다도 심각한 수준인데······.

 

  제 언니의 완력을 물려받은 작은 카와사키는 멈추지 않았다. 당당한 행군은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멈추었다. 소란에 휩쓸려 눈치를 살피는 두 사람을 제쳐두고, 하루 짱을 향해 달려들었다.

 

  “산타 언니~!”

  “으앗, 케 짱!”

 

  뛰어들 당시 손을 놓지 않은 탓에, 유이가하마도 날듯이 끌려가버렸다. 졸지에 하루 짱과 함께 케 짱을 안게 되어 본인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바로 케 짱. 

 

  방금 전까지의 활기참은 어디로 갔는지 하루 짱의 품속에 안긴 케 짱은, 거짓말처럼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에, 그러니까······. 오랜만이네, 가하마 짱?”

  “아, 안녕하세요······ 산타 언니?”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순 탓에 묘하게 상대를 직접 부르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동시에 유이가하마의 의문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의문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처음이 아니었지? 불꽃 축제에서 만났을 때도 케 짱은 하루 짱을 저렇게 불렀는데?

 

  “아, 그, 그게 말이지. 너희들이랑 만나기 전에 고등학교에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거든······.”

  사방에서 날아드는 시선이 거북한지, 보기 드물게 안절부절 못 하는 하루 짱. 그 불안한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흘깃 이쪽을 곁눈질했다.

 

  “그 때 케 짱이 있는 보육원에도 들렀었어. 마침 당시가 크리스마스였고.”

  “케 짱에게는 듣지 못 했는데······.”

  “산타 컨셉이어서 이름을 가르쳐주지는 못 했으니까······. 거기에 유키노가 먼저 봉사부 얘기를 꺼내서 뭔가 말하기도 어려웠구. 미안해, 사 짱. 숨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듣고 보니 지극히 간단한 이유였다. 아기 때 헤어졌던 아는 아이를 보육원에서 만난 우연, 재회의 이유가 똑같은 ‘봉사’활동이란 걸 밝히자니 동생을 따라하는 것 같아 쑥쓰러웠던 언니의 마음.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품고있는 순수한 모습에 안심한다.

  정말로 내가 알던 하루 짱이라고, 진실된 것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미안할 게 뭐 있어. 딱히 나쁜 의도로 숨긴 것도 아니고, 그냥 말을 안 했을 뿐이잖아.”

  “맞아맞아! 하루 짱, 귀여워! 이상한 데서 꿍해하는 것도 딱 유키노 언니 닮았다니까!”

  “이, 이 녀석들!”

 

  버럭하는 시늉을 하자 품에 안긴 케 짱이 몸을 뒤척였다. 하루 짱이 황급히 안아들자, 유이가마나 사키, 코마치가 일제히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댄다. 하릴없이 손이 묶여버린 하루 짱은 이글거리는 눈빛을 향했지만, 이윽고 거두어 들였다.

 

  소리없이, 다같이 숨죽여 웃었다.

  

  “뭐야~. 이제보니 우리 모두 이곳저곳에서 이어져 있었잖아? 정말이지,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 한 건데······.”

 

  대답하는 이는 없었지만, 반박도 없었다.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후회의 재회의 기쁨, 거기에 일말의 불안과 아쉬움까지 전부 뒤섞어 웃음 속에 흘려보냈다.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커튼 뒤의 어둠 속에 사라져 갔다.



  xxx

 

  “부위원장, 잠깐만 이쪽으로······.”

 

  폐회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후지사와 양이 대기실에 들어왔다. 비 오듯 흘리는 땀에 안경까지 벗은 그녀는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한쪽 구석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유키노의 눈동자도 커져갔다.

  잠시 고민하던 내 사촌이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히키가야 군, 잠시만 와주겠니?”

 

  주저없이 달려갔다. 부른 건 나뿐이었지만, 마치 당연하다는듯,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케 짱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도 조금씩 다가왔다. 유키노 또한 막지 않았다.

 

  “큰일이야. 아무래도 수상자 투표 결과를 분실한 것 같아.”

  “투표 결과? 매일매일 집계했던 그거?”

  “맞아요. 정오까지는 개표가 진행됐거든요. 오늘 회의실 당번이 저여서, 마지막 결과를 산출해 부위원장에게 제출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생겨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져 버렸어요. 늘 보관하던 서랍에 넣어뒀는데······.”

 

  집계는 회의실 당번이 돌아가면서 진행한다. 원체 인원 수가 적다보니 한 사람당 몇 번은 맡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 동안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보관 서랍을 후지사와 양이 착각했을 리가 없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집계 결과를 빼돌리지 않고서는······.

 

  “하치만.”

  “그래, 내가 연락할게. 후지사와 양, 오늘 나온 집계 결과는 기억해요?”

  “네! 그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불행 중 다행이로군.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휴대폰을 꺼냈다. 마음이 급한 탓에 화면을 두드리는 손이 꼬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통화가 걸리는 짧은 시간 동안 축축하게 배어나온 땀이 액정을 적셨다. 제발, 빨리 받아 줘.

 

  「여보세요?」

  “하타노, 지금 어디야?!”

  노트북을 통해 받았는지 목소리는 조금 울리고 있었다. 거기에 놀라우리만치 조용했다. 한창 시끌시끌한 체육관과는 마치 다른 세계처럼.

 

  「까,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부실인데요?」

  

  과연, 거기였나. 관은 달라도, 같은 건물이라면 저쪽이 빠르지.

 

  “마침 잘 됐다! 지금 당장 회의실로 가 줘! 빨리!”

  「엥? 왜요? 저 지금 굉장히 바쁜데.」

  “집계 결과가 사라졌어!”

 

  스피커 너머에서 침묵이 일더니, 지직거리는 잡음에 이어 우당탕 소리가 울려퍼졌다. 뒤이어 가쁜 숨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가고 있어요! 뭘 하면 되는데요!」

 

  너 설마 노트북 들고 뛰고 있는 거냐? 칫, 그치만 기기를 바꿀 시간도 아깝고, 부디 학교 와이파이가 잘 터지길 비는 수밖에.

 

  “회의실에 설치된 PC를 확인해봐. 거기에 나랑 유키노가 입력해둔 엑셀 파일이 있어. 어제까지 결과는 모두 저장되어 있으니, 그것만 확인하면 돼!”

  「과연, 알겠습니다. 부팅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요!」

 

  덜컹 노트북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기다란 비프음이 들려왔다. 익숙한 진동이 넓은 공간을 메우자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지사와 양도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 없는데요?」

  “뭐라고?!”

  「선배가 말한대로 찾아봤는데, 아예 폴더 자체가 없어요. 혹시 백업본이라도 남겨둔 거 없나요?」

  “······없어. 그게 다였어.”

  「······젠장.」

 

  폴더째로 삭제되었다고? 그럴 리가. 회의실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을 텐데? 고문 교사와 집행부장, 그리고 실행 위원장과 부위원장······.

 

  ······그 녀석이다. 그 녀석밖에 없어.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눈앞이 깜깜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오직 유키노만이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방송실에 연락해 볼게.”

 

  교내 방송으로 사가미를 호출했지만,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히라츠카 선생님이었다.

 

  “방송은 들었다. 교사들도 사태를 파악했고, 교내를 돌며 사가미를 찾아주겠지. 좋은 소식이 있다면 연락을 주겠지만······.”

 

  힐끔 시곗바늘을 훔쳐보는 시선이 카운트 다운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대로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건가? 허탈하게 허공을 올려다보는 내게 유이가하마가 물었다.

 

  “힛키. 혹시 사가밍이 잘못한 거야?”

  “······.”

 

  보다못한 유키노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수상자 발표를 해야하는데 자료가 사라져 버렸어. 범인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써는 그녀가 가장 유력해.”

  “그런······.”

  “그 녀석, 그때 두들겨 패줬어야 하는건데······.”

  “사키 언니?!”

  “누, 누나! 진정해!”

 

  험악한 분위기 속에 시로메구리 선배가 입을 열었다.

 

  “최악의 경우엔 수상자 발표를 미루는 수 밖에······.”

  “네에? 그래도 되나요? 반발이 어마어마할 텐데요?”
  “그것도 그렇지만, 처음으로 지역과의 유대를 내건 문화제니까요. 첫 수상자 발표부터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향후 전망이 불투명해집니다. 최소한 이미지 타격은 피할 수 없겠죠.”

 

  잇시키의 지적에 유키노의 추가설명이 곁들여진다. 누군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상상도 하기 싫은 미래가 현실로 다가옴을 실감케 해주었다. 

  

  “······폐막 무대에 한 곡 더 추가하는 건 어떨까?”

  

  유키노가 차선책을 내놓았다. 다만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듯이 작았고, 움츠린 두 어깨를 보아하니 본인조차 확신이 없는 눈치였다.

 

  “다행히 투표 용지는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어. 앵콜 형식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일부 인원은 사가미 양을 찾고, 나머지는 재개표를 실시하는 거야.”

  “······지금으로썬 그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솔직히 말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제안이었다. 투표 용지는 내 사물함에 있고,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체육관에서 교실까지 왕복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을 맞출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는 것, 생각할 시간조차 아까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그렇게 뛰쳐나가려는 찰나,

 

  “무리야, 무리. 실패할 게 뻔해.”

 

  하루 짱의 목소리가 우리를 말렸다.

 

  “당장 무대에서 내려온 애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건데? 사전에 협의되지도 않은 공연으로 언제까지고 시간을 끌 수는 없어. 이제는 너무 늦었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때야.”

  “그치만, 그것말고는 방법이······.”

  “으음, 글쎄? 이 누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하루 짱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날카로웠고, 조용한 분위기에는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다.

 

  “애초에 왜 굳이 찾으려고 하는 거야? 고의로 자취를 감춘 사람이 돌아올 리가 없잖아. 찾는다 해도 자료가 온전하다는 보장도 없어. 그럴 바엔 깔끔하게 무시해버리고 재개표에 힘쓰는게 낫지. 다행히 투표 용지는 남아있으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지금부터 하기에는 시간이······.”

  “에이~,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

 

  하루 짱은 들여다보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마치 그 동작에 맞추기라도 한듯 대기실 통로에서 하야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야토 군?”

  “······저 녀석은 또 왜?”

  “너······.” 

  “······.”

 

  여러가지 반응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적의였다. 하야마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곧장 이유를 밝혔다.

 

  “오라고 해서 왔는데······, 무슨 일이야, 하루노 누나?”

  “하야토, 혹시 토크쇼 잘 하니?”

  “······뭐어?”

 

  생뚱맞은 질문에 하야마가 아연실색했지만, 하루 짱은 아랑곳없이 손가락을 튕기며 시로메구리 선배를 가리켰다.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프로그램은 올릴 수 있지만, 지금 당장 협의해 버리면 문제없어! 메구리, 너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손뼉을 짝 친 시로메구리 선배가 불끈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애드리브로 논스톱 진행인가요? 맡겨주세요, 하루 선배! 어떻게 해서든 5분, 아니 10분은 벌어드릴 테니까!”

  “역시 메구리야! 의지가 된다니까! 아무 말이나 팍팍 해버려! 어차피 후배들은 저 녀석 얼굴밖에 안 볼 테니까!”

  “······끄응.”

 

  반짝거리던 미남 미소가 벌레 씹은 표정처럼 일그러진다. 체념한 하야마는 푹푹 한숨을 내쉰 뒤 시로메구리 선배와 진행 일정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하루 짱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쳤다.

 

  “흐흥~, 누나의 솜씨가 어때? 이만하면 괜찮겠니?”

  “10분······. 없는 것 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조금 부족한데······.”

 

  다른 건 몰라도 왕복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혼모쿠와 하타노가 빠져 일손이 달리는 지금 유키노를 두고 갈 수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럼, 10분 더 벌어준다면 어떨까요?”

  “잇시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곧바로 받은 부분에서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시급히 해주실 일이 있어서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편집본 있잖아요? 10분, 아니 5분 이내에 완성해 이쪽으로 보내세요. 아니요, 기간 연장은 없습니다. 다소의 퀄리티는 희생해도 상관없고,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그럼요, 부장 명령이니까요~☆”

 

  역시 하타노구나······. 뭔가 오늘 여러가지로 고생하네, 나중에 만나면 한턱 내야겠군. 매운 치킨이든 립스테이크든 곱배기로 사줄테니, 부디 살아만 있어다오. 물론 사이제리야에서 말이야.

 

  “끝~. 하타노 군도 흔쾌히 맡아주겠다 하더라구요?”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잇시키가 꺄릉 미소지었다. 그, 그래.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뭘 하려는 건데?”
  “낮 동안 선배와 메구리 선배가 찍은 사진들이 있잖아요? 거기에 적당한 BGM을 깔아 체육관 스크린에 띄워볼까 해요. 원래는 희망자 대상으로 졸업앨범에 끼워팔······ 아니 제공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죠!”

  방금 이 녀석, 끼워판다고 했지? 어쩐지 제대로 된 사진을 찍어오라고 닥달을 해대더니만, 이런 새까만 속셈이 있었을 줄이야. 

 

  “저도 이만 준비해야해서 실례할게요. 송출 준비도 해야하고, 조명 부스에서 기다리는 혼모쿠 선배에게도 변경사항을 알려드려야 하니까요. 아참, 투표 용지를 운반할 거라면 사가미 군도 부르는 게 어떨까요?”

  “누나가 잘못했으니 대신 책임지라는 거야? 너무하구만?”
  “선배는 저를 얼마나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냐구요? 아니에요.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사가미 군은 자기 누나를 엄청 싫어한다고. 분명히 도와줄 거예요.”

  “······고맙다.”

  “뭘요, 그럼 수고하세요.”

 

  인터컴을 귀에 꽂고 멀어져가는 잇시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간과 공간이 허락했다면 큰절을 올렸을 거다. 언제나 소악마처럼 보였던 잇시키가 지금은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치만.”

  “응. 가자.”

 

  심호흡을 한 뒤 돌아섰다.

 

  “미안하지만, 나를······.”

  “네네, 거기까지. 말 안해도 도와줄 거야. 오빠!”

  “이럴 시간도 아까워. 빨리 앞장서.”

  “지망하는 학교에서 일을 해보다니 이런 경험은 돈주고도 못 하죠.”

  “나두 도와줄게! 힘내자, 힛키!”

  “······응.”

 

  목이 메여오는 걸 간신히 눌러참고 출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지 참, 인사하는 걸 깜빡했네.

 

  “혹시라도 본인이 찾아올 수 있으니, 후지사와 양과 히라츠카 선생님은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나머지 작업은 이후에. 아, 케 짱을 부탁합니다.”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잘 부탁드려요!”

  “이쪽도 최선을 다해 찾아 보마. 아무쪼록 건투를 비마.”

  “감사합니다. ······하루 짱은?”
  “난 패스~. 모처럼 축제잖아. 즐길 사람은 즐겨야지. 뭐, 구경하다 발견하면 연락은 해 줄게~.”

  “······알았어. 도와줘서 고마워!”

 

  하루 짱도 참, 폐회식이 코앞인데 어느 반이 학급 행사를 하고 있겠냐고.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서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다. 100% 진실이나 다름없는, 기분좋은 거짓말.

 

  역시, 누나에게는 당할 수 없다.

  산뜻한 패배감을 껴안고, 우리는 마지막 전장으로 내달렸다.



  Interlude III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숨을 들이키자 조금 짠 맛이 났다. 당연한가. 올려다본 하늘은 쓸데없이 맑아서, 가림막 한 점 거치지 않는 햇빛이 직접 내리꽂힌다. 아아, 피부 다 상하겠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걸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다. 지루한 진학교 생활의 몇 없는 이벤트를 홀로 보내는 꼴이라니. 잘 뒤져보면 그럴듯한 장소도 있지 않았을까? 하필 골라도 옥상일 게 뭐람? 내가 무슨 히키타니 군도 아니고.

 

  아참, 그건 아니지. 히키타니 군은 매점 뒤쪽 파였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카와사키 양의 영역이었다. 뭐 때문인지 철저히 모른 척 하는 두 사람의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버렸으니······. 덕분에 여름 축제에서 아주 개망신을 당했고, 교실에서도 제대로 이미지를 구겼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히키타니 군 따위에게 설교 당하다니, 참나, 어이가 없어서.

 

  애초에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유이랑 안 어울린다고 한 게 잘못이야? 음습하고 어둡다고 한 게 틀린 말이야?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잖아? 모두들 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왔던 주제잖아.

  것보다 본인은 가만 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난리냐고? 유이도 유미코도 카와사키도 죄다 정신이 나갔어! 기껏 되갚아주려고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유키노시타까지 방해해대고······. 하, 아주 잘난 사람들 납셨네요!

 

    부아가 치밀어 들고 있던 페트병을 우그러뜨렸다. 패대기쳐 밟아대고, 있는 힘껏 걷어차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너희들만 형제 있니? 너희들만 특별해? 그래, 유키노시타 가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이래서 부잣집 아가씨들은 안 된다니까.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건 어거지를 부려서라도 부숴버린단 말이지. 부수고 다시 만들어서, 결국엔 독차지 하는 거야. 전부 가질 때까지······. 여태까지 그렇게 눈치보지 않고 살아왔을 테니까. 

 

  안뜰 너머로 몇몇 선생님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을 내려다본다는 사실이 오싹오싹한 흥분으로 전신을 뒤덮었다.

  

  그래, 이렇게 끝나는 건 재미없지. 일은 크게 벌려야 재밌는 거 아니겠어? 관중 수가 많아질수록, 역겹고 추악한 너희들의 관계가 세상 천지에 드러날 테니까. 본게임은 그 때부터 시작이야.

 

  자질을 의심받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해 봐.

  이게 얼마나 엿같은 기분인지 니들도 느껴보라고!

 

  “역시 여기 있었구나.”

 

  녹슨 철문의 요란한 소리에 흠칫 몸이 떨렸다. 벌써?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급수탑에 올라가 있을 것을, 여기는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이잖아! 누구지? 카와사키 양일까? 아냐, 하지만 목소리는, ······고민할 시간이 없어. 누가 됐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녹음 준비를 해야······, 앗!

 

  손이 꼬여 품속에서 꺼내려던 휴대폰이 옥상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아! 진짜 왜이래! 한시가 급한데!

 

  그러나 덜덜덜 떨리는 몸은 쉽사리 굽혀지지 않았고, 그리 멀지 않은 출입구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심장을 죄어왔다.

 

  “햣하로~!”

 

  ······어?
  뭐야, 이 바보같은 인사는? 유이······는 아닌데?

  수그린 고개를 들자 세차게 뛰던 맥박이 가라앉았다. 당황과 의문, 그리고 일말의 안도가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간다. 이 사람은, 분명······.

 

  “유키노시타······ 하루노 선배?”  

  “응? 우리 초면 아니었던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

  “아, 그게, 3년 전 선배님이 맡으신 문화제에서 뵌 적이 있거든요. ······먼 발치였지만.”

  “그랬구나~. 이야, 이런 우연도 다 있네. 손님으로 왔던 아이가 후배가 되고, 다시 실행 위원장이 되어 문화제를 이끌다니~, 보람이 느껴지는걸?”

 

  멀리서 볼 때도 그런 이미지가 있었지만, 직접 대화해본 하루노 선배는 예상보다 훨씬 마이페이스적인 사람이었다. 과도하리만치 풍부한 리액션을 쏟아내더니, 아주 살짝 찡그린 미간 옆으로 검지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네. 곧 폐회식이 시작할 시간인데 실행 위원장이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턱을 괜 손끝이 팔에 달려있는 위원장 완장을 화살처럼 겨누었다. 칫, 이걸 먼저 떼어버렸어야 했는데. 축제가 막바지로 치닫는 이 시간에 본관 건물을 어슬렁거리는 건 이상하겠지. 외부인은 그렇다쳐도 졸업생의 눈까지 속일 순 없다. 하물며 실제로도 위원장을 맡아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도박을 해볼 수밖에 없나.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이름뿐인 위원장인걸요~. 개회식 인사도 동생분이 했고, 결재도장도 그쪽이 가지고 있어요. 유키노 양이 어찌나 언니분을 빼닮았는지, 자매가 똑같이 미인에 능력도 좋아서 참 부럽다니까요~.”

 

  여기까지는 진실이다. 설령 거짓이래도 증거가 없다. 어차피 목적은 공멸이고, 시간만 끌면 이쪽의 승리. 동생의 일에 대해 하루노 선배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저도 동생이 있지만 그 녀석은 진짜 써먹을 때가 없거든요~. 그래서······.”

  “하하~, 미안한데,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거든~.”

 

  칫, 장녀로써 공감대를 형성하는 건 실패인가. 역시 목적은 그거였군.

 

  “아~, 혹시 찾으시는게 이거?”

  허리 뒤에 숨기고 있던 집계 결과를 들어올렸다. 적당할만큼 높이, 위태로울만큼 바깥으로.

 

  손에서 아주 조금 힘을 빼는 것만으로, 희망은 자유가 된다. 

 

  “꺄앙~!”

 

  종이는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옥상 쪽으로 날아갔다. 바닥에 닿을듯 하강하는가 싶더니, 두둥실 양력을 받아 건너편 난간을 넘어 사라진다. 운이 좋으면 주울 수도 있겠네. 이 해풍이 멈춘다면 말이지~.

 

  “어떡하죠~? 바람에 날아가 버렸는데~, 아, 괜찮다면 좀 도와주시겠어요? 저랑 같이 내려가서 함께 찾아주시면 좋을 텐데?”

  즉석에서 짜낸것치곤 좋은 작전이라 생각한다. 1층에 내려간 즉시 수색을 핑계로 갈라져 다시 숨어버리면 된다. 화장실 같은 뻔한 곳에 숨어도 이제 더는 시간도 없을 터. 완벽한 승리라구, 유키노시타 양~! 설마 언니를 동원할 줄은 몰랐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어!

 

  “싫은데?”

  “······네?”

 

  거절하리라 예상 못한 건 아니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한 마디 말 정돈 들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내가 놀랐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석재 바닥 위에 리듬을 새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섬뜩하리만치 일정한 간격으로.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내 이름을 팔아먹고, 내가 졸업한 학교를 휘젓고, 사랑스런 후배를 곤란하게 만든 골칫덩어리인데 말이야.”

 

  간드러지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고, 좁혀지는 거리에 비례하듯 온도가 내려간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이르렀을 때, 심연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이 사람 나를 찾고 있던 거 아니었나?

  하이힐을 신고 옥상까지 올라왔는데,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있어······?

 

  “하지만,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는 듯한 아찔함에 반사적으로 물러서자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사방으로 튀는 유리 파편이 데굴데굴 굴러 흩어진다. 마치 단말마의 비명을 즐기듯이, 하루노 선배는 휴대전화를 관통한 하이힐 뒤축을 짓이기듯이 쑤셔박았다.

 

  “아, 아아······.”

 

  그 처참한 광경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 물러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궤뚫렸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에 재생된다. 하지만 등 뒤에 맞닿은 난간은 나를 보호해주기엔 너무 낮았고, 그 뒤로는 중력밖에 없었다. 죽음과 죽음 사이에 끼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게, 하루노 선배는 또다시 거리를 좁혔다.

 

  “니가 내 동생들을 건드렸다는 거야.”

  

  울부짖으며 저항했다.

 

  “그놈의 동생! 그놈의 동생! 뭔데요! 하루노 선배도 똑같은 인간이었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싸울 수도 있는거잖아요! 뒷담 좀 할 수도 있고, 따돌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나만 가지고 이래! 나만 나쁜년이냐고!”

 

  공포를 잊었다던가,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맹수에게 잡히는데로 물건을 집어던지듯 그저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하루노 선배라고 떳떳해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다들 하는 건데, 도대체 걔들이 뭐라고 이 난리에요? 

  “뭐긴, 내 사랑스런 동생들이지.”

  “으읏······! 그러니까, 그런 게 바로 공과 사를······.”

  “그딴 건 상관없어. 그게 내 방식이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말실수를 한 건 내쪽이라는 착각이 일었다. 그 정도로 하루노 선배의 태도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느다란 다리가 다시 한 걸음 이쪽으로 다가온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할 이유따윈 어디에도 없단다.”

  “대체 당신은······.”

  “아, 그래도 딱 하나는 마음에 들지도? 다들 하는 건데 나는 하면 안 되냐는 덜떨어진 자기합리화 말이야~. 응. 바보같지만 솔직한 욕망이야. 이 언니는 그런 거 좋아하거든.”

 

  다시 한 걸음, 이번에는 뒷발을 옮기려 했지만, 깔끔하게 뚫고 들어간 뒤축에 휴대폰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코웃음을 친 하루노 선배가 무릎을 드는가 싶더니 진흙을 털듯 발목을 휘둘렀다. 5분 전만 해도 품속에 있었던 초라한 고철덩어리가 시체에서 뜯겨나온 내장처럼 발치를 뒹군다. 

 

  “공사를 구분한다는 말은 좋지. 하지만 우리 유키노시타 가에선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이거든? 공도 사도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말라고. 무언가를 일구고 성취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결국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거니까. 유키노는 그걸 알고 증명해 보였어. 하치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 왜냐하면, 이건 그 아이가 가르쳐준 진리니까. 본인은 아마 모를 것 같지만.”

  “······.”

  “하지만 언니는 너희들이 쓰는 의미도 좋아해~. 애시당초 뭐가 아쉬워서 너같은 애 하나하나를 배려해 줘야 하니? 적의를 드러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지. 이빨을 드러냈으면, 잡아찢어야 하는거고. ······다들 그렇게 하고 있잖아? 나쁜 일이 아니지?”

 

  단정한 이목구비가 일그러졌지만, 호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무기질적인 미소였다. 

 

  “그러니까, 이건 경고야.”

  

  몸을 기울여 귓가에 다가왔다. 보아뱀에 삼켜진 동물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소화액과도 같이 소름끼치는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족

  “내 동생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독니를 박아넣어 경고를 마친 뒤, 괴물은 웃으며 옥상을 떠났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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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쁜 마음으로, 유이가하마 유이는 특등석에 앉는다.



  회의실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 흩어져 종이 뭉치따위를 쥐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서류가 아닌 교실 앞에 놓인 탁자를 곁눈질했다. 그 시선의 끝에서 히라츠카 선생님은 팔짱을 낀 채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유키노시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에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몸이 안 좋아 결석하겠다더군. 일단 출석부 상에는 병결로 처리했지만, 위원회에는 연락이 가지 않았을 것 같아서 말이다.”

 

  팔짱을 낀 포즈 그대로 턱만 움직여 집행부석을 가리킨다. 텅 빈 자리는 주인 잃은 서류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지키던 유키노시타의 부재가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결석, 그 유키노시타 양이······.”

 

  착잡한 목소리로 되뇌이던 시로메구리 선배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선생님, 그것만 가지고는 쓰러졌다고 판단하기는 이르지 않을까요? 단순한 몸살일 가능성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시간이다.”

  “시간이요?”

  “그래. 전화가 걸려온 건 조금 전, 종례가 시작되기 직전이었거든. 그런데도 유키노시타의 목소리는 마치 막 잠에서 깬 것처럼 쉬어 있더군.”

  “······설마.”

 

  불길한 예감이 치솟았다. 유키노시타는 체력은 바닥이지만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사소한 이유로 학교를 빼먹을 녀석은 더더욱 아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유키노시타가 실수를 했을 거라곤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래. 단순한 결석 보고를 미룰 아이가 아니지.”

 

  히라츠카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너라면 따로 연락을 받았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군.”

 

  정확히 맞췄다.

  실행 위원회에서 유키노시타의 연락처를 가진 사람은 나뿐이다. 

  등록된 라인 계정으로 친구 추가를 건 사람이 있을 수는 있어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유키노시타가 연락을 걸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알았다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그 때 등뒤에서 유이가하마가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떡해······. 유키농, 혼자 사니까 아파도 봐 줄 사람이 없는데······.”

  “정말?! 어떡하지? 그럼 누가······.”

  “제가 갈게요.”

 

  시로메구리 선배의 말이 끝나기 전에 끼어들었다. 당황하는 선배를 진정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사촌이기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도 아니었다.

 

  “제가 유키노시타의 상태를 보러 가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위원회 일은 하루 빠져야 할 것 같네요.”

  “히키가야.”

  “죄송합니다. 가야해요. 말리지 말아주세요.”

 

  나직이 고개를 저은 히라츠카 선생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말릴 생각은 없다. 그저 전할 말이 있을 뿐이야.”

  “전할 말이요?”

  “그래. 너도 유키노시타도 아직 제출하지 않은 모양이더구나.”

 

  품속에서 꺼낸 종이를 눈 앞에 펼쳐들었다.

 

  “진로 희망 조사서. 상황이 허락된다면 유키노시타에게 전해주렴. 급하게 써낼 필요는 없다. 잘 생각해서, 꼼꼼하게 채워오도록 해라.”

 

  따스한 눈빛은 언어로 전하지 않은 수많은 뜻을 품고 있었다. 그 탁월한 유머야말로 이해하는 척 늘어놓은 열 마디 말보다 가슴에 와닿았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게 제일 고마웠다.

 

  “그럼 다녀오너라. 재학생의 주소를 발설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너라면 문제없겠지?”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괜찮겠죠.”

  “아마도? 히키가야, 설마······.”

  “걱정 마세요, 선생님.”

 

  고개를 갸웃하는 선생님을 손을 들어 제지한다. 치켜올린 손바닥을 하늘을 보도록 눕혀, 마술쇼를 하듯 옆으로 내밀었다. 

 

  “경험자가 여기 있으니까요. 유이가하마를 데려가겠습니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당고머리가 춤을 추었다.

  

  “나, 나?!”

  “유이가하마는 유키노시타네 집에 놀러갔던 적이 있거든요. 물론 주소도 알고 있죠. 무엇보다 지금의 유키노시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만큼 최소한 두 명이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잖이 당황한 유이가하마였지만 다행히 납득해준 기색이었다. 히라츠카 선생님도 별말없이 허락해 주셨다.

 

  꾸벅 인사를 한 후 가방을 둘러메고 뒤돌아섰다. 곧장 복도로 나갈 생각이었지만,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얼굴들을 보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잇시키.”
  “네, 선배.”

  “미안하다. 하루만 더 휴가를 줘.”

 

  기다렸다는 듯이 잇시키는 한 쪽 눈을 깜빡이며 응수했다.

 

  “물론이죠. 여긴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땜빵은 하타노 군이 있으니까요.”

  “잠깐?! 왜 또 나야?”

  “닥쳐요, 하타노 군. 분위기 좀 읽으세요.”

  “크헉!”

 

  정확하게 명치에 꽂히는 이로하스 펀치. 우리 똘똘한 후배님은 그새 사 짱에게 여러가지를 배운 모양이다. 너에게도 신세 졌다. 하타노. 조금만 더 힘내다오.

  투닥투닥 잡무부석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배웅한 뒤 고개를 돌렸다.

 

  “시로메구리 선배.”

  “응. 나도 같은 생각이야. 유키노시타 양을 잘 부탁해.”

  “감사합니다. ······전에 제가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죠? 아직 유효하니까요.”

  “그렇구나. 알았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히키가야 군에게도 생각이 있을 테니까.”

 

  포근한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온기에 감사하며 다음 상대에게 당부를 전했다.

 

  “뒷일은 부탁한다, 혼모쿠. 시급히 대응할 일이 있으면 잇시키에게 물어봐 줘.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전체 업무의 흐름에 저 녀석만큼 빠삭한 녀석은 없으니까. 내가 보증할게. 나는 내 후배를 믿어.”

  “알아, 히키가야. 나도 위원회에 있는 동안 내내 잇시키 양을 지켜봤으니까. 너처럼 말이야.”

  “그랬었지. 맞아.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었네.”

 

  우리는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고갯짓 한 번으로 인사를 나누고 유이가하마에게 손짓했다.

 

  “가자.”

  “응!”

 

  문을 열자 복도에는 하야마가 있었다. 창틀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교실 쪽은 부탁하마.”

  “염려 말고 다녀와.”

 

  유이가하마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나도 하야마도 그 말을 끝으로 제 갈길을 갔다.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는 하야마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학급으로 돌아갈 테지. 

 

  나는 반대다.

  가야할 곳은 아래.

  오직 한 사람만을 만나기 위해서.

  이번에야말로 출발이다.



xxx



  역으로 향하는 내내 유이가하마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의 경위를 들려주었다.

 

  유키노시타의 연락을 받은 히라츠카 선생님은 방과 후 우리 교실을 방문했다. 사촌인 나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으려는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당사자는 부재 중. 우연히도 유미코 또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고 한다. 그 때 발견한 사람이 유이가하마. 친구이자 같은 부원인 유이가하마라면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봉사부 고문 히라츠카 선생님의 판단이었다.

 

  물론 전후사정을 알 턱이 없었던 유이가하마는 패닉, 몇 번이고 전화해도 유키노시타는 받지 않는다. 우왕좌왕 하던 와중 부서 동료인 잇시키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그대로 1학년 교실로 난입, 역시나 당황한 잇시키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왔다는, 케이요선 두 정거장 분의 짤막한 이야기였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저 멀리 보이는 맨션을 향해 망설임없이 앞장섰다. 역 앞 광장을 지나갈 때 뒤따라오던 유이가하마가 입을 열었다.

 

  “힛키, 유키농 집 알고 있었네?”

  “어. 처음 들었을 때부터 대강 감은 있었어. 얼마 전까지는 자전거로 태워다 주기로 했고.”

 

  반대방향으로 오느니 이쪽에서 데리러 가는 게 낫다는 핑계로 밀어붙인 결정이었다. 유키노시타도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새벽부터 나와 기다리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아침마다 주고받는 가벼운 실랑이는 신학기가 시작된 이래 반복된 일상이기도 했다. 방금 지나온 길은 유키노시타와 함께 한 통학로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랬었지. 힛키랑 유키농은 같이 등교했으니까······.”

  “문화제 준비가 시작되기 전까진 말이야.”

 

  못 다한 뒷말을 대신하자 유이가하마가 구슬프게 고개를 숙였다.

  아울렛에서 이어진 횡단보도는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럼 왜 그랬어? 딱히 내가 없어두 괜찮았잖아.”

 

  길이 막혔기에 앞으로 나가지 못 한다. 걸음을 재촉하는 척 바람결에 흘려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 안에 남아있을지 모를 비겁함으로부터 도주로를 봉쇄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유이가하마에게는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원래도 컸던 유이가하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에게?”

  “응. 친구끼리는 사과하는 게 아니랬지만, 이번에는 해야할 것 같아. 기껏 유이가하마가 알려준 정답을 허사로 만들었으니까. 도와주겠다고 큰소리 친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물쭈물대느라 시간만 흘려버리고 말았지. 만약 유키노시타가 쓰러진 거라면 그건 모두 내 책임이야.”

 

  고개를 숙이고 싶지만 그랬다간 유이가하마는 거부할 것이다. 자신의 말을 부정해달라고 강요하는 결과가 될 것 같아 차마 그것만은 하지 못 했다. 

 

  “화난 것도 알고, 뭐라 할 처지가 아니란 것도 이해하고 있어. 그래도, 정말 염치 없는 말이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부탁하고 싶어. 유키노시타를 도와 줘.”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건 연락에서 최악의 사태를 비껴갔단 건 유추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유키노시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나머지 전율했고, 또 안도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요행일 뿐이었다. 다시 쓰러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최악을 비껴가리란 확신도 없다. 심신의 안정이 최우선인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내 고집쟁이 사촌이 쉬이 말을 듣지 않으리란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서운했던 건 사실이야.”

 

 유이가하마는 어색한 손길로  당고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힛키두 유키농두 조금 답답한 구석이 있으니까. 누가 봐도 알 만큼 서로를 좋아하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헛돌잖아? 배려해주는 건 알아두 가끔은 친구로서가 아닌 타인처럼 대한달까, 벽이 느껴질 때두 있었구······. 곤란한 일이 있어두 말해주지 않구.”

 

  하나하나가 지당한 말씀이었다. 예전부터 쭉 유이가하마가 지적해왔던 결점들이다. 듣는 척만 잘했지 하나도 이행하지 않았기에 예정된 결말을 맞았다. 이제는 사과조차도 기만처럼 느껴졌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떨구자 시선 끝에는 유이가하마의 단화가 보였다. 뚜벅뚜벅 이쪽을 향해 걸어오더니 두어 발자국 앞에 멈춰섰다. 

 

  “그래두······.”

 

  가지런한 두 발이 불쑥 뒤꿈치를 들어올렸다.

  

  “이제와서 뭘. 그게 힛키랑 유키농이잖아. 오히려 안심이야.”

 

  씨익 미소 지은 유이가하마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저번에두 말했지?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라구. 나라구 해서 다 아는 건 아니야. 친구를 대하는 것두 서툴구, 힛키랑 유키농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두 몰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모르겠는 건 나두 마찬가지인걸.”

  “그래?”

  “응! 정답을 알려줬다니 터무니 없는 소리야! 전교 1등인 유키농, 국어 3등인 힛키가 모르는 답을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나는 바보니까! ”

 

  더없이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외치는 목소리.

  거두어들인 팔로 가방끈을 움켜쥐고는 힘있게 바로잡는다.

 

  “너무 과장했어, 유이가하마. 나도 유키노시타도 똑똑하지 않아. 하고 싶은 말도 똑바로 못 하는 덜 자란 바보들이지.”

  “그럼, 우리 모두 같은 바보네?”

  “어. 그러니까······.”
  “같이 생각하자. 바보들끼리.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까.”

 

  뒷말을 빼앗겼지만 신기하게도 분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자학도, 상대방의 생각을 예측해 놀려먹기 좋아하는 성미도 똑같다.

  서로를 친구로 여겼던 우리는 어느새 방식마저 닮아 있었다.

 

  “그래야지.”

 

  신호가 바뀌자 도로를 쌩쌩 달리던 자동차들이 멈춰섰다.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갈까?”

  “응!”

 

  내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어.

  절대로 망치지 않을 거야.

 

  xxx

 

  유키노시타가 사는 건물은 이 근방에서도 호화로운 고층 맨션이다. 출입구 도어락이야 이제는 웬만한 연립주택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지만 홀이 있는 건 예상 밖이었다. 유리벽 너머에 늘어선 소파며 액자, 화분들은 웬만한 호텔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품이었다.

 

  이런 곳은 고층일수록 비쌀텐데······. 하긴, 혼자 사는 딸을 위한 일에 그깟 돈이 대수랴. 생활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전망에 방범대책까지 고려한 거겠지. 유키노시타 이모부 작품이란 건 안 봐도 비디오다.

 

  “어라?”

 

  번호판을 두드리던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대답이 없어.”

 

  그러고보니 호출음밖에 안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못 들은 건가?”

  “어, 어떡해? 유키농 또 쓰러진 거 아냐?”

 

  너무 극단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웃어넘길 수 없는게 문제였다.

 

  “다른 일을 하느라 못 들었을 수도 있어. 몇 번만 더 눌러보자. 만약 그래도 대답이 없으면······.”

 

  하루 짱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겠지.

  휴대전화를 들어보이자 유이가하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자 우리들의 얼굴도 창백해져갔다.

 

  다행히 다섯 번째 호출에서 유키노시타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네.」

 

  꺼져 들어갈 듯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유이가하마가 스피커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하며 외쳤다.

 

  “유키농?! 나 유이야. 괜찮아?”

  「······응. 난 괜찮으니까.」

 

  괜찮으니까?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유키노시타. 그건 이런 상황에서 쓸 말이 아니잖아.

 

  “됐으니까 열어. 지금 올라갈 거야.”

  「······하, 핫 짱?!」

 

  어이쿠야. 그리운 이름인걸.

 

  유이가하마 혼자 왔다고 생각한 거겠지. 여기까지 오는 시간동안 유키노시타도 휴대전화의 착신이력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잡음 섞인 목소리로도 당혹스러움은 충분히 느껴졌다.

 

  「······10분만 기다려주겠니?」

  “안 돼. 지금 열어. 괜찮으니까.”

 

  똑같은 말로 되돌려주는 것이 치사한 앙갚음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서는, 유키노시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대등한 위치에 올라갈 수 없다. 10분은 커녕 1분도 싫다. 어째서 기다려야 돼? 사촌의 집에 들어가는데, 내가 너를 만나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한데?

 

  「······올라오렴.」

 

  유키노시타의 말과 동시에 자동문이 열렸다. 우리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너른 복도에는 몇 개의 문이 줄지어 서있었다. 그중 하나, 문패도 없는 집 앞에 멈춰 초인종을 눌렀다.

 

  몇 초 지나 자물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다른 마찰음이 한 두개가 아닌 듯 싶었다.

 

  묵묵히 기다리자 소리없이,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 길다란 흑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던 평소와 달리 약간이지만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엔 오래된 머리끈 두 개가 나란히 묶여 있었다. 

 

  “들어오렴.”

 

  실내로 발을 들여놓자 희미한 방향제 냄새가 풍겼다. 

 

  유키노시타는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이쪽을 곁눈질했다. 올이 촘촘한 흰 니트는 마른 체구인 유키노시타에겐 조금 큰지 소맷자락 속으로 손이 쏙 가려지고 목은 쇄골까지 들여다보였다. 그 밑에는 발목 길이의 롱스커트를 입고 발에는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정확히 말하면 재회 이후 처음 본 유키노시타의 실내복 차림이었다.

 

  “······여기.”

 

  실내화를 신은 발을 꿈지럭대던 유키노시타가 여분의 슬리퍼를 꺼내 우리 앞에 늘어놓았다. 고맙게 받아신고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방 셋에 욕실과 화장실, 통로 끝에 맞닿은 거실 겸 식당도 눈에 들어왔다. 그 바깥쪽에는 저물어가는 하늘과 신도심의 야경이 펼쳐진 발코니도 보였다. 듣던 대로 쾌적하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3LDK. 행복한 가족이 살기엔 더없이 충분한 공간이었다.

 

  이런 넓은 곳에서, 유키노시타는 혼자 살아왔던 것이다.

 

  “미안해. 손님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 해서.”

 

  아담한 유리 테이블에는 뚜껑 닫힌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다급히 치운 흔적이 역력하지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류철과 함께. 그 중에서도 사가미가 떠넘긴 결재도장은 말라붙은 인주와 함께 가장 돋보였다.

 

  “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

 

  담담한 대답이었다.

 

  “거기 앉으렴.”

  “으, 응······.”

 

  소매 사이로 삐져나온 손가락이 소파를 가리켰지만, 정작 자리를 권한 유키노시타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근처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못 들은척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문득 아래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내려다보자 어정쩡한 자세로 쭈뼛대는 유이가하마와 눈이 마주쳤다. 엉겁결에 앉았는지 양 손은 어색하게 세워진 무릎 위에서 꿈지럭거렸고, 불안한 눈동자는 나와 유키노시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유키노시타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얼굴은 이쪽을 향한 채였지만 그 시선은 훨씬 더 아래에 있었다. 유이가하마는 반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으음, 그게······ 오늘 유키농이 결석했다길래 괜찮은가 해서.”

  “괜찮아.고작 하루 쉬었을 뿐인걸. 학교에 연락도 했고. 히라츠카 선생님께 듣지 못 했니?”

  “들었지만······.”

 

  히라츠카 선생님을 언급하는 순간 잔잔하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일순간 위압적으로 변한 태도에 유이가하마의 목소리도 움츠러들었다. 유키노시타도 실수를 깨달았는지 다소 빠른 목소리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피곤했던 건 사실이지만, 하루 쉰 덕분에 괜찮아졌어. 걱정을 끼쳐버렸구나. 미안해, 유이가하마 양.”

  “앗, 아니, 그럴 것 까지야······. 당연한거구.”

  “그래, 당신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래서 고마워.”

 

  가볍게 고갯짓을 한 유키노시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당신도. 병문안 와준건 기뻐. 하지만 이젠 정말로 괜찮으니까, 돌아······.”

  “밥 안 먹었지?”

  “······뭐?”

 

  질문을 할 거라곤 예상 못 했는지 아니면 그 내용이 뜬금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은 뜨악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아랑곳없이 추가타를 넣었다.

 

  “주방 개수대에 물 한 방울 없더라. 식기도 스폰지도 행주도 하나같이 말라있고. 마지막으로 식탁을 쓴 게 언제야? 냉장고는 자주 들여다보고 있니? 유통기한을 꼼꼼하게 체크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섞여버린다고? 덧붙여 복도도 벽면 가장자리에 먼지가 쌓여 있었어. 거기는 청소기가 닿지 않는 곳이니까. 아마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테니.”

  “당신, 무슨······.”

 

  쉴틈없는 연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유키노시타. 그 혼란스러움을 틈타 발걸음을 내딛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내 사촌과 거리를 좁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유키노시타가 아니었지만, 벽을 등지고 선 그녀에겐 물러설 곳이 없었다.

 

  “쉬라고 했잖아.”

 

  손을 뻗으면 간신히 닿을만큼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췄다. 유키노시타의 시야를 막듯이, 테이블에 남겨진 서류들에 눈이 가지 못 하게.

 

  “어째서 일하고 있는 거야? 몸도 안 좋은데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쉬었어야지. 밥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멍하니 앉아 티비라도 보고, 그러다가 졸리면 낮잠이라도 자고······. 그랬어야지 이게 뭐냐고.”

 

  겁먹게 할 생각은 없었건만 조금 격한 목소리가 나왔나보다. 짜증이나 다름없는 타박에 유키노시타는 침묵했다.

 

  “유키노시타.”

  “······.”

 

  대답은 없었지만, 굴하지 않고 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힘들 땐 말해달라고 했잖아. 나는 네 사촌이니까 언제든지 의지해도 된다고. 물론 네가 보기에는 조금 모자라고, 못미더운 사촌일 수는 있어도······.”

  “틀렸어.”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눈을 맞춘 게 언제였을까?

  유키노시타의 눈동자는 칠흑같은 밤하늘 가운데 환하게 빛나는 달빛처럼,

 

  “반대야. 모자란 사람은 나, 항상 네게 짐만 되었던 사촌이었는걸. 이대로는 또다시 당신을 희생시키고 말 테니까.”
  “희생이라니, 나는 그런······.”

  “아니, 희생이야.”

 

  혹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한 쪽이 손해를 보는 관계는 어디에도 없어. 평범한 사촌간에는 더더욱.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내가 당신에게 전했던 건 호의도 뭣도 아닌 일방적인 어리광, 거절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이기적인 관계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어. 이전처럼 당신에게 족쇄를 채우려 했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듯 유키노시타는 눈을 돌렸지만, 어둠이 넘실거리는 유리벽에는 내부가 비춰질 뿐이었다. 거울 속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키노시타가 불현듯 눈을 감았다.

 

  “당신에게 있어 나는 그저 사촌일 뿐인데, 하치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 따위, 싫어해도 어쩔 수 없는 건데······. 추억을 핑계삼아 당신을 옭아매, 자기 멋대로의 감정을 들이밀었어.”

 

  더없이 무겁고도 자조스런 숨결을 토해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온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 하치만은 혼자서도 잘 하는데, 남에게 의지가 될만큼 앞서 나가는데, 나는 아직도 당신을 의지하잖아. 자꾸만 기대고 또 그걸 당연시하잖아. 이대로 가면 나는 더더욱 핫 짱에게 의지하고 말 거야. 기대고, 집착하고, 전부 떠맡겨버려서, 핫 짱이 상처받는 것조차 당연시 하고 말 거라고. 바로 그 때처럼!”

 

  속사포처럼 쏘아붙인 유키노시타가 입술에 손을 얹었다. 떨리는 음성, 혹은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대등해지고 싶었어. 이제는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 시절처럼 떳떳한 누나로써 하치만 곁에 서려고 했어. 뻔뻔하다는 건 알지만, 하치만이 나를 그렇게 불러줬으니까, 마지막 욕심을 부려보려 했어. 그렇지만······,”

 

  억누르지 못한 물방울은 갸냘픈 손가락 위로 흘러내렸다.

 

  “사실은 알아. 당신이 양보했기에 내가 누나일 수 있었단 걸. 하치만은 상냥하니까, 마지막에는 못 이기는 척 내 억지를 들어주곤 했지. 내가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 핫 짱의 누나로 있기 위해선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소심하고, 겁많고, 그런 주제에 자존심만 높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받기만 하는 공주님이 되는 건 사양이야!”

  “이 바보가.”

  “아얏?!”

  “힛키?!”

  앞뒤에서 터져나온 비명소리가 한데 뒤섞인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창문을 통해 유이가하마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적잖이 놀란듯 했지만 성급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대답 대신 그쪽에서도 보일만큼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픔과 당혹감에 눈물을 글썽이는 유키노시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하, 하치만······?”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나를 올려다보는 유키노시타.

 

  “누가 공주님이야. 이런 울보 아가씨가 세상에 어디 있는데.”

 

  가볍게 웃어주며, 떨리는 손목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정말이지 어린 시절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까. 유치하지, 잘 삐지지, 별 거 아닌 걸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답답해, 언제나 사과하기만 하고. 중요한 일은 절대 말 안 해주잖아. 이 고집쟁이야.”

  “미, 미안해, 정말로······.”

  “뭐, 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

 

  어깨를 틀어 시야를 틔워주었다. 

 

  “우리 마지막 부원씨가 그러더라고. 배려가 지나쳐도 답답하다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의지해주지 않으면, 그것만큼 서운한 것도 없다고? 맞지?”

  “힛키······.”

 

  시선의 정면, 내딛다만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던 유이가하마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괜찮을 것이다. 뜻은 통하고, 무엇보다 유이가하마도 묵인해 주었으니까. 한쪽 눈을 깜빡인 뒤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유키노를 보자 웃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똑같은 선택지를 고르는 우리들의 모습이 우스웠고,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제는 솔직하게 말할게. 남김없이 전부. 들어줄래?”

  

  움찔 몸을 떨면서도, 잡힌 두 손을 빼지 않던 유키 짱은,

 

  “······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말이지. 오랫동안 생각해왔어. 너에 대한 내 감정을, 나 스스로 유키 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가족, 사촌, 친구, 혹은 파트너.

  전부 그럴싸했고, 남에게 설명할 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유키노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준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두려워했던 것이다. 진심을 전하는 것을, 그리고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느껴질 배신감을, 멋대로 강요한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말이다.

 

  거짓말을 그만두게 된 건 얼마 전.

  평소보다 늦게 찾아간 회의실에서 의외의 광경을 보았을 때의 일이다.

  적의에 둘러싸인 유키노를 본 순간 망설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동생?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유키노가 나를 동생으로 생각했듯이 한 때는 남매라는 관계에 만족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뭔가 걸렸어. 그걸로는 설명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고.”

 

  유키노시타가 공격받았을 때 내가 느꼈던 분노는 확실히 필요 이상의 감정이었다.

  가족애일까? 혹은 유키노라는 개인에 대한 이기적인 독점욕일까?

 

  나는 유키노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걸까?”

  어떤 형태로서 유키노의 곁에 있고 싶은 걸까?

 

  고민을 거듭하던 중 친구의 조언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 짱이 그러더라. 내게는 무의식중에 사람을 동생 취급하는 버릇이 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습관이랄까,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었으니까. 챙겨주거나 양보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호의를 전해야 할 지도 몰랐어.”

 

  드세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유미코와 치바의 여동생 코마치다.

  변명은 아니지만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자라면 누구라도 나처럼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유키 짱이 한 말도 맞아. 내가 너를 여동생처럼 생각했던 건 사실이니까. 곁에 있어 달라던 말도 남매간의 연장선이라 여겼는지도 몰라.”

 

  유키노는 빛이 사라진 눈동자를 아래로 떨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부정하려 했던 예감은 적중했다. 그것도 모자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로 실현됐다. 그렇게 생각한 거겠지.

 

  “우리는 사촌이니까, 설령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 해도 쉽사리 이어지기는 힘들겠지. 차라리 현실과 타협해 조금 유별나게 사이좋은 남매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너만 괜찮다면.”

  “나, 는······.”

 

  간신히 토해낸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길듯 처연했다. 의지는 거센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 앞에 금방이라도 삼켜질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유키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상관······.”

  “웃기는 이야기지? 완전히 반대잖아. 우리가 원했던 거랑은.”

 

  나를 놓으려는 손을 끌어당겼다

  하던 말에 열중하느라 깨닫지 못한 것처럼 말을 자르고,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유키노에게 가까이했다. 

 

  그 때와 같은 선택은 하지 않겠다.

  너와 내가 했던 거짓말을 한 번에 부정한다.

 

  “여름축제 때 유키노가 했던 말 기억해? 히키가야와 유키노시타로, 그 시절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했던 말. 틀렸어, 유키노. 내가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니야.”

 

  설령 그랬다 한들 어떤가.

  중요한 것은 지금인 것을.  

  그저 솔직하게 표현하기만 하면 그뿐이다.

 

  “나는 욕심쟁이니까, 전부 원해. 남매도 가족도 사촌도, 그 외의 것도 전부 다. 그 모든 관계로서 너와 함께 지내왔으니까,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아.”

 

  유키노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죽어도 좋았다. 한 번도 상의한 적 없는 나의 이기심이다.

  이제는 조금 다른 욕심을 품어볼까 한다.

  가시밭길 위일지라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해. 사소한 부분에서 엇나가는 건 앞으로도 자주 있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도망치지만 않으면, 끝까지 서로를 마주보고 대화를 나눈다면 해결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걸까?”

  “그럼.”

 

  망설여도 어쩔 수 없다. 번듯한 말 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유키노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걷어내기 위해선, 나를 믿을만한 이유를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볼까? 유키노 누나?”

 

  깜짝 놀란 유키노가 도리질을 했다.

  

  “그, 그만해! 나, 나는,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데?”

  “아니야! 당신이 해준만큼 갚지 못 했어! 아직 당신처럼 되지 못 했으니까······.”

  “응. 정답이야, 유키노.”

  “에?”

 

  수많은 이름 속에서도 가장 우리다웠던 관계. 언제나 그리워했던 추억.

 

  “내가 말한 ‘누나’는 모두를 이끌어주는 맏이도, 유키노시타 가의 우아한 아가씨도 아니었어. 손잡을 수 있고,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볼 수 있는, 가족으로서의 유키 짱이었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웅다웅대던, 어른스럽지 못한 이런 싸움을 유키노와 하고 싶었어.”

 

  좋아한다는 뜻의 영단어 Like에는 상대방과 닮았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서로를 이기려고 투닥거리다가도 금새 역할을 바꾸어 웃음을 터뜨리는, 완벽하게 대등한 관계. 인정하고 좋아했기에 상대방처럼 되고 싶어했던 우리들.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 생각했지만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사전을 뒤져도 와닿는 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장 비슷한 어휘로 대체해 불러왔다. 무분별한 혼용은 어느덧 스스로에게서도 그 의미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내가 너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실망하지 않았어. 유키노는 언제나 노력했고, 최선을 다해 주변에 헌신했으니까. 어릴 적 내가 동경했던 착하고 성실했던 유키 짱인걸. 사촌을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경해. ······내 말이 맞지? 서로 대화를 나누면, 쌓였던 오해도 풀 수 있잖아.” 

 

  조심스레 앞머리를 들어올렸지만 유키노도 거부하지 않았다. 새로이 맺히는 눈물을 닦아주고, 어깨를 끌어당겨 단단히 받쳐준다.

 

  “조바심내지 말고, 앞서가지도 마. 혼자서 어른이 되려 할 필요 없어. 언제든지 의지해도 돼. 나는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둘이서 하나잖아?”

  

  응석을 들어주는게 오빠라면, 마음껏 응석부리는게 남동생이라면, 남매면서 남매가 아닌 우리는 서로의 어리광에 기대도 괜찮을 것이다. 

  그치만 유키노도 말했는걸. 남들보다 부족했던 하치만과 유키노도, 서로의 빈 자리는 채울 수 있었다고. 그렇게 해서야 겨우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었다고.

 

  당연하지. 우리는 서로의 반신이니까.

 

  유키노는 내게 몸을 기대고 울었다. 기쁨과 슬픔, 서러움이 뒤섞인 감정을 시간이 진정시킬 때까지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이네.”

  “뭐가?”

  

  가슴팍에 닿는 숨결이 뜨겁다.

  품속에서 고개를 든 유키 짱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핫 짱에게 혼난 거. 엄마나 언니에게 혼난 적은 많지만, 하치만에게는 처음이야.”

 

  눈가를 훔치고는 그 손으로 아까 전 내가 때렸던 머리를 문지른다.

  가슴이 아팠지만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내 허리를 감싼 유키노의 두 손이 나를 놔주지 않았다. 눈물로 씻겨진 맑은 눈동자가 내게 물었다.

 

  “왜일까? 엄청 상쾌하고, 기분 좋아.”

 

  아아, 이거다.

  유키노시타 유키노가 가끔씩 보여주던 어린애 같은 모습.

  집안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였기에 이해하고, 받아주고, 보살펴줘야만 한다고 멋대로 착각했던 모습들이다. 아프고 두려워도 절대 타인에게는 드러내지 않았던 약함을 내게만 보여주고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유키노는 의지받고 싶었던 거다.

  자신이 의지하는 만큼, 상대에게도 의지가 될 수 있기를. 의지하고, 의지받고, 도와주며, 서로가 잘못되었을 때 바로잡아 줄 수 있기를.

  그런 대등한 관계가 되기를 소망했던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와.

 

  어떤 때는 누나와 남동생으로, 또 어떤 때는 오빠와 여동생으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남매처럼,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처럼.

  생각도, 행동도, 서로에 대한 마음도, 마치 한 몸처럼 가깝기를 바랬다.

  그 정도로 나를 사랑했으니까.

 

  마치 나처럼.

 

  기쁨보다 미안함이 앞선다. 그녀는 항상 나만을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알아주지 못 했다.

  되갚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하나, 하루하루, 지나온 세월의 모든 흔적을 되짚어, 

  그 마음에 보답해 나가야만 한다.

 

  “당연하잖아. 유키 짱은 여동생이니까.”

  “인정할 수 밖에 없구나. 오늘만은 여동생 할게.”

  “오늘만? 앞으로도 쭈욱 내가 오빠라고?”

  대답 대신 유키노는 내 손을 잡았다.

  눈물이 뒤섞여 끈적끈적해진 손바닥에 아랑곳없이 뺨을 비벼온다.

  더없이 기쁜 미소로 짓궂게 대답했다.

 

  “안 돼. 오늘만이야. 내일부터는 다시 내가 누나니까.”

 

  언제나 나를 향했던 예쁜 얼굴.

  누구에게나 당당했던 유키노가 나에게만 보여준 진심.

  이 미소를 원했다. 이 따스함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가득 찰 정도로 받았기에 더는 없어도 괜찮다고 믿었던 사랑.

  진실에는 한도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깨닫고 말았다.

 

  17세의 어느 가을날.

  나는, 우리는, 처음으로 싸움을 했다.

 

  xxx



  “그럼······.”

 

  유키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을 보니 진정한 모양이군. 지금이라면 괜찮겠어.

 

  “여동생은 오빠 말을 들어야겠지?”

  “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유키노에게서 떨어졌다. 애달픈 표정이 가슴 아팠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쉬운 듯 허공에 뻗은 유키노의 손을 그러쥐고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하, 하치만?”

 

  벽에서 떨어진 유키노를 데려간 곳은 소파였다. 거기엔 유키노와 똑같은 표정을 한 유이가하마가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등을 떠밀어 유키노를 마주세웠다. 

 

  “왜, 왜 그래? 힛키?”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꼬는 유이가하마를 가로막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자, 어서 사과해.”

 

  화들짝 놀라는 두 사람.

  유이가하마가 사양하려는 기색을 내보였지만 한 발 앞서 선수를 쳤다.

 

  “유이가하마는 손님이기도 하지만, 친구로서 너를 걱정했기 때문에 여기 온 거야. 하지만 유키노, 너는 어떻게 했지? 대접은 커녕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니? 이 오빠는 너를 그렇게 가르친 기억이 없단다?”

  허리에 손을 얹고 절레절레 고개 흔드는 시늉을 하며, 어휴 한숨을 쉬었다.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뜬다.

 

  “어서.”

  “미, 미안합니다, 유이가하마 양! 예의가 아니었어요!”

  “그만해! 유키농! 사과 안 해두 돼!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라구 했잖아!”

 

  손사래를 치며 일으켜세우려는 유이가하마를 가로막고 유키노시타 옆에 서 고개를 숙였다.

 

  “친구이기 때문에 하는 거야. 미안하다, 유이가하마.”

  “힛키!”

 

  일으켜 세우려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아랫배에 힘을 준채 꿈쩍하지 않았다.

 

  “걱정해준 너에게 민폐를 끼쳤어. 오빠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함께 사과할게. 유키노를 용서해 줬으면 해.”

  “할게! 할테니까! 제발 일어나 줘!”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에 더는 버틸 수 없어 허리를 펴자 울상이 된 얼굴이 보였다. 항상 밝았던 유이가하마가 저런 표정을 하다니. 죄책감이 듬과 동시에 유키노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에 안심했다.

 

  그러니까, 알려줘야만 한다.

 

  “고맙다, 유이가하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유이가하마는 미간을 모으고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기가 차다는 듯 한숨 쉬고는 가슴팍을 퍽 떠밀었다.

 

  “······이런 거 다시는 하지 마. 말해주구 하던가.”

  “미안미안.”

 

  토라진 얼굴을 홱 돌려버렸지만, 그 이상의 질책은 없었다. 이유를 알 리 없는 유키노만이 여전히 겁먹은채 눈치를 살폈다. 

 

  “유키노.”

 

  엄한 오빠를 연기할 생각이었지만,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처럼 연약한 그 모습에 목소리는 저절로 누그러졌다.

 

  “이제 알겠니? 네가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나나 유이가하마만이 아니야. 사키도, 잇시키도, 하타노에 혼모쿠, 시로메구리 선배나 히라츠카 선생님까지 모두 너를 걱정해. 뒤에 남아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여기 올 수 있었어.”

 

  소맷자락을 꼬옥 움켜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호의에 보답하려는 건 좋은 태도야. 받은만큼 돌려주려는 건 고마워할 줄 안다는 거니까. 하지만 유키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해.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명 오해가 생기고 말 테니까. 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윽!”

  “힛키!”

  “······알았어. 이리 와, 유키노.”

 

  끊임없이 사과를 반복하는 유키노는 고장난 녹음기 같았다.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유이가하마가 건네준 티슈를 뽑아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울지마, 뚝. 내가 잘못했어. 아픈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네. 너를 탓하려고 한 말은 아냐. 방금의 지적은 전부 나에게도 해당되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말만 잘하지 실속없는 나보다는 유키노 쪽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괜찮아, 하치만. 위로해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거짓말 아닌데?”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유키노시타. 이 녀석, 진심이잖아? 과로에 지친 회사원은 자신이 현재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더니 딱 그 꼴이다.

 

  “생각해 봐. 방금 내가 말한 사람들 중에 원래부터 알던 사람이 몇 명이나 있어? 절반 이상이 소부고, 그것도 올해 들어서야 알게 된 사람 아냐? 한 달 전까지는 말도 안 섞어본 타인들이 성인군자라서 너를 걱정해주는 건 아닐 거 아냐. 아, 시로메구리 선배는 예외일지도.”

  “힛키?”

  “커흠, 아무튼! 이것도 다 네 평소 행실이 빛을 발한 결과란 거지. 당연하잖아, 유키노가 누군데? 똑똑하지 착하지 배려심 넘치지, 귀엽고 멋지기까지 한 치바 제일의 사촌이잖아?”

  “하, 핫 짱?”

  “가슴을 펴고 당당해져도 돼. 유키노는 할 만큼 했어. 저 문제 많은 문화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유키노의 공로라고.”

 

  막힘없이 줄줄 설명하자 유키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나 혼자서 한 건 아냐.”

  “그거야 그렇지. 우리는 서로가 잘하는 일을 나눠서 했으니까. 축제 때도 말했잖아. 의존이 아니라고, 각자 힘을 합쳐 한 사람 몫을 했을 뿐이라고. 유키노는 자신이 한 말을 거짓말로 만들 셈이야?”

 

  설령 어떤 반론이 돌아온다 해도 논박해줄 자신이 있다. 유키노가 혼자 힘으로 이룩한 성과는 진실이니까. 실제로 존재하는데다 객관적으로 관측되며, 완성된 형태를 갖춘 결과물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고 봐. 내가 보여줄게. 유키노가 여태껏 해온 일이 어떤 건지 모두 앞에 보여줄게.”

  “맞아! 힛키두 나두, 유키농이 혼자가 되게 놔두진 않을 거니까!”

 

  두려울 건 없다. 우리를 욕했던 바보들은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이고, 그들이 틀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바보들에게 이겨봐야 유키노가 없으면 의미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힘내. 언제까지고 내 곁에서 당당히 있어 줘. 그게 누나잖아.”

 

  동생 취급할 때는 언제고 한 순간에 말을 바꾸는 얄팍한 사촌. 그 뻔뻔함에 유키노도 피식 웃었다.

 

  “어련하겠니.”

 

  한 번 터진 웃음은 계속해서 흘러나왔지만 유키노는 막지 않았다.

  입을 가리는 대신, 두 손을 펼쳐 우리에게로 뻗어왔다.

 

  “어엇?”
  “유키농?”

 

  나와 유이가하마 사이에 뛰어든 유키노가 양손으로 우리를 끌어안았다.

  목을 끌어당겨 얼굴을 묻고는 조용히 몸을 떤다.

  맞대어진 뺨을 통해, 두 사람분의 온기와 심장 박동이 전해져 왔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주겠니?”

 

  귓가에 속삭여오는 또렷한 목소리. 

  문득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유이가하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누나 좋을대로.”

  “얼마든지, 유키농!”

 

  창설 이래 최다 인원을 갱신한 봉사부. 

  기념스러운 첫 교외校外 활동이 지금 막을 올렸다.



  Interlude I

 

  “힛키, 전화하구 왔어.”

  

  거실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완전히 저문 해와 소리가 사라진 어둠에 시간이 흘렀음이, 밤이 깊어졌음이 실감났다. 그리고, 더욱 가까워진 거리감도.

 

  “어머니는 뭐라셔?”
  “그냥 그렇지 뭐. 폐 끼치지 말라, 재밌게 잘 놀구 와라, 알잖아?”

  “미안, 그렇게까지 남의 집에서 자본 경험은 없어서.”

  “네네, 그렇겠죠.”

 

  친구 집에서 자는 거야 흔한 일이라고, 문자도 넣었으니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소용 없었다. 힛키도 유키농도 고집불통이라, 이런 건 전화로 해야한다고 막무가내로 등을 떠밀어댔다. 

 

  쫓겨나듯 들어선 복도는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다. 오랫동안 접혀 있던 다리에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자,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억지는 두 사람 나름대로의 배려일지도 모른다는걸.

 

  유키농이 가져온 일거리를 다 함께 해치우는 건 좋았지만, 저녁 식사가 끝나고서도 몇 시간이나 꼼짝 못한 것도 사실이다. 팔도 어깨도 다리도 움직일때마다 삐그덕삐그덕 찌뿌둥하지 않은 곳 하나 없었지만, 그것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니, 나보다 더 심할텐데.

 

  이럴 때 보면 둘이 똑같다니까.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씀씀이는 고맙지만, 동시에 서운하기도 했다. 서둘러 통화를 마친 뒤 거실로 달려갔다. 한 마디 해주려 마음먹었지만, 거실문을 여는 순간 준비한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자 숨이 턱 막혔기 때문이다.

 

  “······유키농 잠들었네.”

  “많이 피곤했을 테니까.”  

 

  힛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잠든 유키농의 얼굴은 정말로 예뻤다. 이슬이 흘러내릴 듯 기다란 속눈썹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 새근새근 편안한 숨소리가 듣기 좋았고, 앳된 이목구비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이 세상 어떤 인형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여자인 내게도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힛키는 어떨까? 

 

  힛키가 여성을 대하는 데 익숙하다는 건 알고 있다. 유미코는 물론이거니와 코마치나 사키, 하루노 언니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미인들이다. 어려서부터 그런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란 만큼 남다른 내성을 갖고 있음은 확실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 뿐일까?

 

  슬쩍 보니 힛키는 상냥한 얼굴로 어깨에 기댄 유키농의 머리를 쓸어올리는 중이었다. 어디로 보나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처럼 흐뭇한 광경이었다. 쓰다듬는 손이 오른손이란 사실만 뺀다면 말이다.

 

  유키농은 힛키의 왼편에 앉아 있으니까, 쓰다듬고자 한다면 왼손을 쓰는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힛키의 왼손은 유키농의 오른손과 깍지를 끼듯 얽혀진 채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누가 먼저 잡았을까? 유키농? 혹시 몰라, 이번엔 힛키일지두.

 

  “사실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시키고 싶지 않았어. 먼저 재울 생각이었는데.”

  “유키농이 받아들일 리 없잖아. 다 같이 하는게 빠르구.”

  “그렇지. 너까지 말려들게 해 버렸네. 미······.”

  “힛키?”
  “······고맙다, 유이가하마.”

  “응, 그거면 돼.”

 

  또 이래. 잠시만 방심하면 사과하려구 한다니까. 아주 입에 붙었어.

  어휴 한숨을 쉬자 힛키는 멋쩍은 듯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큰 소리는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들렸던 걸까? 얼굴을 찌푸린 유키농이 힛키의 목에 이마를 비볐다. 붙잡은 손에 더더욱 힘을 준다.

 

  “어리광쟁이구나.”

 

  여기, 의외로 특등석일지도?

 

  “누구나 이렇게 풀어질 때가 있는 거야.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엄격했으니까. 자기 몸도 안 돌보고 무리하곤 했어. 나는 그것도 몰랐지. 그저 잠이 많은 줄만 알았어.”

 

  대화 중에 곧잘 추억을 떠올리는 건 힛키의 나쁜 버릇이다. 나는 모르니까 대답해주기 곤란한데······. 그래도 그만큼 유키농과 보냈던 시간이 소중하고, 기억에 남았다는 거겠지.

 

  “아냐. 힛키가 생각한 것두 맞을 거야. 유키농은 의외로 잠이 많은 걸 수도 있어. 힛키 옆에서라면.”

  

  그러니까 나는 현재의 이야기를 할게.

  지금부터 추억을 쌓아나갈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유키농두 여자니까? 아마 남자도 비슷할 것 같지만.”

  “이해가 안 되네.”

 

  으음, 뭔가 머릿속에 있는 걸 팟! 하고 설명하는 건 어렵구나.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휙휙 고개를 돌리던 중 소파 옆에 놓여진 쿠션에 시선이 머문다.

 

  “힛키는 그런 거 없어? 베개가 바뀌면 잠을 못 잔다던지?”

  “약간은. 누나도 늘 쓰던 방향제가 없으면 불안하다 했고.”

  “맞아. 누구나 자기 방 침대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잖아. 나에게 딱 맞게 꾸며진 잠자리니까.”

  “그건 그렇지만, 지금이랑 상관이 있어?”

  “그럼, 있지!”

 

  소파를 한 바퀴 돌아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유키농의 어깨를 건드리려 했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힛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깨우려는 거야? 그만해, 유이가하마. 겨우 잠들었는데······.”

  “괜찮아. 조심할게.”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유키농이 반응을 보였다. 아주 잠깐 떨어졌을 뿐인데 민감하게 알아채고는 더욱 강한 힘으로 힛키에게 안긴다. 움켜쥔 손은 아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핫 짱······.”

 

  귓가에 바싹 밀착한 입술이 그 이름을 불렀다.

 

  “봐? 내 말이 맞지?”
  “뭐가 뭔지······.”

 

  힛키는 놀란 감정보다도 유키농이 깨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안도한 모양이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힛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키농에게 있어서 힛키는 그런 존재인 거야. 달콤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함께 누우면  언제까지고 잘 수 있는 커다란 봉제인형인거지. 그런 힛키의 곁이기에 유키농은 잠들 수 있어. 긴장을 풀고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그만큼 힛키를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내가 무슨 안는 베개야?”

  “에이, 그런 거랑은 차원이 다르지. 정말 좋아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거든.”

 

  사실은 힛키도 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솔직하지 못한 친구들을 대신해서라도 이 관계를 표현하고 싶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쭉 곁에 있어 줘. 울리지두 말구. 그럼 내가 용서 안 할 거야.”

  “네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같이 자는 건 안 돼. 아직은 학생이고.”

  “어······, 응, 그건 봐줄게.”

  “뭐야 그게.”

  

  정말 이상해. 관계도 없는 내가 용서니 뭐니 으름장 놓는 것도 이상하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힛키도 이상하다.

  게다가  ‘아직’이라니, 빙빙 돌려 말하는 주제에 진심만은 못 숨긴다니까. 저렇게 서툴면서 어떻게 거짓말쟁이인 척을 한 걸까?

 

  “힛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아까 말이야, 왜 그랬던 거야?”

  궁금증 하나를 해결해 줬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

  힛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답을 고르기 위한 침묵이었다.

  

 

  “내가 아는 힛키는 뭐랄까···. 항상 져준다고 할까, 언제나 양보했지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은 아니었거든. 그래서 조금 의외였어. 다른 사람도 아닌 유키농에게 그럴 줄은······. 틀린 행동은 아니었다구 생각하지만, 조금은 위험했을지두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어째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야? 만에 하나라도 유키농이랑 생각이 달랐다면 어쩔 뻔 했어? 잘못될 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

 

  마음에 담아둔 말을 전부 꺼내는 것은 관계를 파탄시킨다.

  쓴소리를 삼가고, 서러움이 쌓여도 꼭꼭 씹어 삼켜야만 한다고 배워왔다.

  서로의 감정을 부딪쳐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건 동화책에서나 가능하다 여겼다.

  정반대의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섭지. 엄청 두려웠어.”

 

  그렇게 말하며 힛키는 어깨에 드리워진 유키농의 머리카락을 거머쥐었다.

 

  “그치만, 확신했으니까. 유키노도 나만큼이나 이 엇나간 관계를 되돌리고 싶어한다는걸 말이야.”

 

  스윽. 나긋나긋한 손가락이 소중한 보물을 감싸듯 구부러지자, 들어올린 손 끝에는 이제는 색이 바랜 머리끈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우리의 생각은 여전히 같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상대방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봐야 더욱 큰 상처를 줄 뿐이란 것도 깨달았으니까. 믿을래. 설령 괴롭고 슬픈 미래가 기다리고 있대도, 함께 가줄 거라고 믿을래. 유키노가 나를 믿어주니까, 나도 믿을 수 있어. 

 

  어릴 적 유키농이 줬고, 힛키가 거절했던 증표. 이어지지 못 한 관계를 추억하듯, 혹은 다시 이어지리라 믿는 것처럼, 유키농은 단 한 순간도 저 붉은 실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렇게 돌고돌아 이제는 힛키의 손 안에 이어져 있다.

 

  이런 게 운명이 아니면 뭐란 말일까?

 

  “그렇다 해도 사실은 확실히 말한 것도 아냐. 유키노는 내게 모든 걸 맡겼지만, 가장 원했던 대답을 주지 않았어. 기다리겠다 했지만 사실은 유키노가 나를 기다리는 입장이지.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큰소리쳐놓고는 결국 이번에도 애매하게 넘겨 버렸으니. ”

  “······혹시 예전에 했던 약속 때문에?”

  “응. 우리 누나, 유미코와의 일을 마무리짓지 않으면 안 되니까. 화해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반에서 힛키와 유미코가 마주친 장면을 보았다. 평범히 인사하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누었지만 결국 그 자체가 모순이다. 매일같이 안부를 묻는 가족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외동인 나라도 그 정도는 안다.

 

  “어렸을 때 나와 유키노가 따돌림 당한 이야기는 했었지? 이유야 여러가지 있지만,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어. 어린 시절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었지.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정말 바보라서 모든 사람이 적으로 보였거든. 누나조차도 말이야.”

  “그렇구나. 힛키는 어떻게 하고 싶어?”
  “사과해야지. 무릎 꿇고 싹싹 빌 거야. 용서해 달라고.”

  “헉, 그렇게까지? 유미코는 그런 걸로 화 안 낼 거라 생각하는데······.”

  “안 돼. 그런 건 내가 인정 못 해. 누나에게 대드는 동생이라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도, 동생이란 건 원래 이런 거야? 나도 갖고 싶은데 어떡하면 돼?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부탁해 볼까?

 

  “게다가, 만약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 누나만큼 든든한 사람도 없으니까.”

  “신뢰하고 있구나.”

  “응. 초등학생 시절 그 유키노시타 이모에게 대들만큼 강했으니까. 유키노랑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누나 덕분이었어. 언제나 우리 편이었지. ······그런 누나니까,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다시 예전처럼.”

 

  시큰한 콧소리를 내며 눈을 비빈 힛키가 머리카락을 놓았다. 공중에서 나풀거리던 머리끈이 힛키의 가슴팍을 콩콩 때리더니 그 품에 안기듯이 멈추었다. 

 

  “그리고 이 머리끈처럼. 내가 달아준 건 하나였거든. 나머지 한 쪽은 누나가 건네준 거야. “

 

  아련한 눈빛이 다시금 유키농을 향한다.

 

  “유키노는 괜찮다고 했지만, 우리가 걸어갈 길이 편하지는 않을 거야. 호의적인 시선은 기대할 수 없겠지.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 해도 사촌간에 사랑은 쉬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안 그래, 힛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유이가하마와 똑같은 건 아니야. 금기를 범하는 순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조차 손가락질 하게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하다못해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유키노 곁에 있었으면 해. 사 짱도 너도, 그리고 유미코도. ······결국 이것도 다 내 욕심이지만.”

 

  바보다. 정말 바보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많은 것을 주었으면서 한 번도 생색내지 않는다. 되돌려받기는 커녕 조금 더 주지 못했다며 한탄한다. 자기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상대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한다.

 

  이런 사랑은 본 적이 없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헌신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눈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정말로 순수하고 바보같은 아이들이다.

 

  “걱정 마, 유키농이랑두 잘 풀었잖아. 분명 유미코두 같은 생각일 거야. 나도 응원할게.”

  “고마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으음, 여전히 시무룩하잖아. 뭔가 기분을 풀어줄 방법이 없을까?

 

  “아! 아니면 이런 건 어때? 유미코랑 화해할 때까지는 내가 대신 누나 역할 해준다던지?”

  “······네?”

  “힛키에게 있어 누나는 유키농처럼 티격태격하거나, 혹은 유미코나 하루노 언니처럼 기댈 수 있는 사람이지? 후자는 될 수 없지만 전자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유이 누나라구 불러볼래?”

  “싫어.”

  “왜! 쫌생이! 생일도 내가 더 빠르잖아.”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큰일이야. 유이가하마가 평소보다 훨씬 바보같아.”

  “바, 바보?! 기껏 생각해 줬더니!”

  

  붕붕 팔을 저으며 화난 시늉을 한다. 이제보니 남말할 처지가 아니구나. 연기가 이렇게 서툴러서야, 연극 테마가 바뀌어도 배우는 못 하겠네.

  한동안 입을 삐죽이던 힛키가 별안간 큭큭대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내게도 전염되어, 우리는 한동안 소리죽여 웃었다.

 

  “슬슬 정리하자. 시간도 늦었고.”

  “응, 나 졸려. 어디서 자면 될까?”

  힛키는 유키농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틀었다. 거실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고갯를 젓는다.

 

  “안쪽 방······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인의 허락 없이 멋대로 사용하는 건 역시 실례겠지. 유키노도 언제 깨어날 지 모르고. 미안하지만 다른 곳에서 자줄래? 거실을 나가서 바로 옆 방을 쓰면 될 거야. 손님용이랄까 하루 짱이 자고갈 때 쓰는 침실이 있거든.”

  “알았어. 힛키는?”
  “나? 나는······.”

 

  말끝을 흐린 힛키는 바로 앞에서 하는 이야기도 듣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꿈에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유키농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멈춘듯한 정적을 깨고, 결심을 굳힌 듯 올려다본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 ······안 될까?”

 

  치켜뜨기 금지! 애절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거 반칙!

 

  “아하하~, 그렇구나. 응, 그렇지, 맞아. 내가 눈치가 없었네. 이런 분위기면 알아서 빠져줘야 했는데 말야~.”

  “그,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저, 내가 지금 움직이면, 유키노가 깨버리니까······!”

  “오케이, 거기까지~. 이해했어. 완전히 이해했어. 나 머리 좋으니까.”

  “아니야. 넌 지금 절대로 이해 못 했어. 그리고 바보야.”

  “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흥이다! 바보는 자러 갈거야. 그래야지 힛키가 느긋하게 유키농을 독점할 수 있지 않겠어?”

  “뭣?! 너, 너!”

 

  다급히 뻗어오는 손길을 잽싸게 피한 뒤 도망쳤다. 울상이 된 표정으로 씩씩대는 힛키였지만 품에 안은 유키농 때문에 쫓아오지 못 했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거실문에 몸을 숨겼다. 빼꼼 혀를 내밀고, 유치하게 농락한다.

 

  “같이 자는 거, 오늘만은 눈감아줄게. 그래도 너무 꽁냥거리면 안 돼? 힛키두 피곤하잖아~.”

  “유이가하마!”

 

  폭풍이 몰려오기 전에 문을 닫았다. 힛키두 참 잘 받아준다니까.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놀려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스스로 말하기도 뭣하지만, 하루 짱이나 유미코처럼 나에게도 은근히 누나 적성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나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뭐, 괜찮겠지.

  이건 고작 이름일 뿐, 힛키에게 있어서는 친구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어떤 형태가 됐든 저 두 사람과는 잘 지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토록 중요한 자리에 데려왔다는 건 나를 의지한다는 증거.

  마음을 터놓고 숨김없이 보여주는 건, 그만큼 나를 믿기 때문이다.

  그 신뢰야말로  내게 있어 최대한의 보답이었다.

 

  친구, 동급생, 혹은 부활동 동료, 어쩌면 가족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이름에 차이는 없다. 우정도 애정도 같은 뜻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름을 붙일 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그래서 고민해왔던 관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진짜 사랑을 한다.



  Interlude II

  

  꿈을 꾸었다. 

  현실감이 넘쳐 진짜라고 착각할 정도의 꿈을.

  소리도 냄새도 촉감도 모든 게 그 때 같아 언제까지고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이제는 손에 쥘 수 없는 당신을 보았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끝나가는 9월의 아침은 이전보다 서늘했다.

  눈을 뜬 현실에서 나는 판 씨 인형을 껴안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창밖 너머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 속에, 이곳은 가혹하리만치 고요했다. 

 

  커튼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무리에 먼지들이 반짝였다. 막 잠에서 깬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꿈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하치만이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몇 번이고 의지한 주제에 이번에도 받아 줄 거라 생각했어? 도와줄 거라고, 나를 용서해 줄 거라고?

  그런 망상을 꿈꿀 정도로 약해져 버린 거야?

 

  가슴에 안은 판 씨 인형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얼룩처럼 번져간다.

  한 사람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가 준 인형에까지 매달리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껴안지 안고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미안해, 미안해요, 하치만.

  이기적인 나라서, 정말로 미안해······.

 

  “유키노?”
  

  다시 잠들었나? 아니면, 이것도 꿈인 걸까?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두려워하면서도 고개를 들자, 그가 있었다.

 

  “괜찮아? 왜 그래? 혹시 어디가 안 좋은 거야?”

  “핫 짱······.”

  “응. 나 핫 짱이야.”

 

  꿈이 아니다.

  이 냄새, 이 감촉, 이 온기는 분명히 핫 짱이다.

  이전과 그대로의 온기. 나를 안아주는 팔과, 걱정해주는 눈동자.

  꿈에서도 그렸던 하치만이 여기 있었다.

 

  “핫 짱!!!”

  “우앗!”

 

  뒷걸음질 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놀라면서도 밀어내지 않는다.

  단단하게 등을 받친 두 손이 나를 껴안아 준다.

  울음을 그칠 때까지 토닥여 주었다.

  

  “진정했어?”

  “······응."

 

  냉정함을 되찾자 머리가 뜨거워진다.

  아무리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 멍했다 하더라도, 바보같은 짓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바보같은 건, 싫은 기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착각일지라도, 그 덕에 하치만에게 안겼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자신이 있었다.

 

  “후아, 아침부터 뜨겁네.”

 

  유이가하마 양, 있었구나······.

 

  “역시 나는 먼저 돌아가는 게 좋았으려나?”
  “아니야, 틀려! 이건 그런 게 아니니까!”

  “이미 늦었어, 힛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그것도 그렇구나.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닌걸.

  억지를 부린다는 자각은 있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다.

  당신을 멀리했던 바보짓은, 한 번만으로 족하다.

 

  “동감이야. 뭘 그리 허둥대는 거니, 하치만?”

  “유, 유키노?”

 

  당황하는 그에게 팔을 두르고 꼬옥 껴안았다. 바로 앞에 다가온 그에게 눈을 맞추며,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다.

 

  “남동생은 누나꺼잖니? 안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인걸. 내 마음이라구.”

 

  꺼칠꺼칠한 머릿결도, 몇 번을 눌러도 다시 서는 바보털도 그 때 그대로.

  퉁명스러운 척, 그러면서도 쓰다듬기 쉽게 기울여 주는 세심함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알던 하치만이, 내 곁에 있다.

 

  “유키노, 몇 번을 말했지만, 지금은 내가 오······.”

  “누나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생일도 빠······.”

  “누나야.”

  “······진짜 고집쟁이라니까.”

  “어머, 벌써 항복한 거니? 조금쯤은 배짱을 보여줘도 상관없단다?”

 

  그의 키가 더 크기에 이쪽에서 고개 숙일 필요는 없었다. 눈을 맞추면서도 쓰다듬을 수 있는 건 핫 짱만의 특권이었던 셈이다.

 

  “자, 쓰다듬어 보렴.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됐어.”

 

  하지만 내가 아는 한 하치만이 이 특권을 썼던 적은 없다.

  그를 쓰다듬은 적은 많았지만, 그가 나를 쓰다듬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알게 모르게 누나 취급해준 것이다. 언제나 내 얄팍한 자존심을 배려해 주었다.

 

  “치사해.”

 

  불쑥 중얼거린 말은 아마도 입 밖에 낼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싹 밀착해 있는 나조차도 간신히 들을 정도니 유이가하마 양은 눈치채지 못 했겠지. 그게 좀, 아쉬웠다.

 

  치사해? 누가 할 말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당신 쪽이 훨씬 치사했으면서, 지금도 내 마음을 흔들고 놔주질 않으면서.

  쓰다듬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나를 어루만져 주었으면서.

 

  “그럼 내가 쓰다듬을게!”

  “유이가하마 양?······ 읏!”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머리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폴짝폴짝 경쾌한 발걸음으로 뛰어온 유이가하마 양이 반대쪽에서 나를 껴안았다. 중간에 끼어 움직일 수 없는 내게 뺨을 비비며,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가, 갑자기 무슨 일이니?”

  “잘 생각해보니 말이지, 생일로 따지자면 우리 중에선 내가 제일 빠르더라구? 힛키의 누나가 되면 자동적으로 유키농의 언니가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두 안을 거야.”

 

  하치만의 누나? 나의 언니?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데, 깊은 한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또 바보같은 소리를······. 그 이야기는 어제 거절했잖아. 유이가하마까지 그러면 곤란해. 이쪽은 유키노 하나로도 벅차다고.”

  “에이, 치사하게······. 그럼 됐어. 힛키의 누나는 안 할 거니까, 대신 유키농 언니는 시켜 줘.”

  “그건 괜찮아. 부디 잘 부탁해.”

  “응! 고마워! 나 잘 할게!”

  “······당사자를 앞에 두고 뭘 제멋대로 정하고 있는 거니?”

 

  아직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유이가하마 양과, 그런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하치만. 아무래도 내가 잠든 사이 모종의 협약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가 막혔지만, 신기하게도 기분만은 상쾌했다. 

 

  “뭐, 이 이야기는 이제 됐어. 그보다······.”

 

  아무리 그래도 부끄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고등학생 세 명이 아침부터 껴안고 있다니,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내게 둘러진 팔들을 풀었다. 두 사람도 선선히 물러나 준다.

 

  “컷흠. 좋은 아침이야. 당신들이 안 보여서 걱정했단다. 어디 갔었던 거니?”

  “우리? 아아~.”

 

  그러고 보니, 분명 저 쪽은 베란다였을 텐데?

 

  “이불 빨래 널구 왔어.”

  “이불을?”

  “날씨가 참 좋더라구. 미안하지만 세탁기 좀 빌렸다.”

  “그건 상관없지만, 갑자기 왜?”

 

  내 물음에 하치만과 유이가하마 양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재울 곳이 마땅찮아 하루 짱 방에서 재웠는데, 아침에 유이가하마가 그러더라. 침대 가 조금 꺼져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응. 힛키랑 같이 뒤집어 봤는데 반대쪽은 멀쩡했어. 아마 오래되서 내려앉은 걸 거야. 매트리스는 가끔씩 뒤집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엄마가 그랬거든.”

  “뭐, 유키노 혼자서는 힘들었을 테니까. 하는 김에 씌워져 있던 이불도 빨기로 한 거지.”

  “그랬구나. ······있지, 혹시······.”

  

  그 때까지도 품 속에 안고 있던 판 씨와 눈이 마주쳤다.

  틀림없어. 우리 집에서 이 인형을 놔두는 장소는, 그곳밖에 없을 텐데······.

 

  “내가 들어가자고 했어. 유키노의 침대도 똑같은 상태일 것 같았거든.”

  “괜찮아.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야. 그저······, 봤니?”

  “그, 그게······.”

  “봤구나.”

 

  당신이 봤다면 유이가하마 양도 보았겠지. 

  어려서부터 차곡차곡 모아온 컬렉션을, 그가 나에게 선물해준 판씨 인형들을.

 

  “깨우지 그랬니?”

  “너무 푹 자고 있어서 깨우기 미안하더라. 미안.”

  “당신이 미안할 게 뭐 있어. 오히려 내가 고맙지.”

 

  잠든 것도, 일어나지 못한 것도 모두 내 부주의. 두 사람의 배려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끄러운 것도, 이제와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고. 이 건은 넘어가도록 하자.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렸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보다 더욱 가혹한 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글맞은 유이가하마 양의 목소리가 결정타를 꽂았다.

 

  “푹 자긴 했지~. 유키농, 힛키가 조금만 움직여도 끌어안구 놔주지 않았으니까~. 대신 안겨줄 만큼 커다란 인형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유키농이 깨지 않게끔 타이밍에 맞춰 끼워넣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유, 유이가하마?! 그건 비밀로 하기로······!”

  “응? ······헉, 맞다! 으으읍!”

 

  틀렸다. 이번만큼은 정말 부끄러워,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야.

  유키노시타 유키노 최대의 실책.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가 없어

 

  “하, 하루 짱도 참 못 쓰겠네! 여동생이 혼자 살면 자주 와서 도와줘야지. 침대가 내려앉을 때까지 내버려 두고 말이야!”

  “그, 그렇네! 하루 언니가 나빴네!”

  “······언니는 잘못 없어. 내가 안 부른 거니까.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을 이런 일로 오게 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 그럼 나라도 부르지 그랬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자상한 목소리.

  나를 위로하려 필사적이지만, 정작 본인들이 더 당황해서야 어쩌자는 거니? 정말로 웃을 수 밖에 없구나.

 

  “후후후.”

  “유, 유키노? 괜찮아?”

  “그 말대로구나. 당신들이 있었구나. 진작 당신들을 불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슴을 펴고 두 사람을 또렷이 응시한다.

  시야에 비치는 건 사촌과 친구. 올해 여름까지 우리들의 거리감은 타인과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가족같은 친밀함 뿐이다.

  그런 당신들이니까, 더 이상 어리광 부리지 않아.

 

  “우리들은 봉사부잖니. 어디까지나 대등한 관계니까, 앞으로는 종종 부탁할게.”

 

  똑바로 마주보고, 확실히 말할 거야.

 

  “······그래. 그러니까, 사양 말고 팍팍 쓰라고.”

  “나도 마찬가지야, 유키농.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하는 게 나을 테니까!”

 

  하나보단 둘, 둘보단 셋이 낫다는 단순한 진리.

  이토록 간단한 진실을 어째서 잊고 살았을까. 해답은 이미 가슴 속에 있었건만, 겁에 질린 나머지 웅크린 채 후회만을 되풀이했다.

 

  그런 내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던 나에게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내 이기심이 외친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고. 과거에 잠길 시간은 지났다고.

  눈앞에 닥친 현실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 

  그 모든 시간을 친구들과 함께 걸어나가고 싶다.



  xxx

 

  “실례가 많았습니다.”

 

  방과 후, 회의실 앞에 선 유키노가 허리를 굽혔다.

 

  “제 사정 때문에 여러분들께 피해를 끼치고 말았네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았다. 보아하니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지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지 전원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데······. 부담스럽다구요? 궁금한 사람은 나중에 오라고, 다 설명해줄 테니까!

 

  “에이, 뭐 이렇게 딱딱하게 말하세요, 우리 사이에.”

 

  역시 우리 후배님 뿐이다. 눈알만 또록또록 굴려대는 동료들이 어지간히도 답답했는지 잇시키가 당찬 걸음을 옮기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디 뭐 노느라 땡땡이를 친 것도 아니고, 아파서 쉰 거잖아요. 그만큼 수고하셨다는 증거에요. 어서 오세요, 부위원장님.”

  “고마워요, 잇시키 양. 아니, 기록 부장님.”

 

  두 사람이 주고받은 농담 덕에 회의실의 분위기도 누그러졌다. 실행 위원들도 하나 둘 유키노 곁으로 모여들어, 집행부석 주변에는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방해가 되지 않게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휴식을 취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뒤돌아보니 히라츠카 선생님이 서 있었다. 

 

  “수고했다. 잘 마무리지은 모양이구나.”

  “딱히 대단한 일도 안했는데요, 뭐.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에요.”

  “그게 잘했다는 거다. 너는 항상 중요한 말은 빼먹는 버릇이 있어 걱정이었거든. 유키노시타도 기운을 차린 모양이니, 이만하면 합격점을 줘도 되겠어.”

  “······감사합니다.”

 

  상대가 나를 잘 알 때는 버릇 하나하나에 주의하게 되는 법이다. 저렇게 못을 박는데 딴소리를 할 수도 없다. 순순히 감사를 표하자 씨익 미소지은 히라츠카 선생님이 문득 자세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만······.”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이리저리 조작한 뒤 내게 내민다.

 

  “이건 뭐냐? 설명을 듣고 싶구나.”

 

  화면에 표시된 건 실행 위원회의 그룹 채팅방이었다. 시덥잖은 잡담으로 도배될만큼 활발했던 것도 옛말. 구성원들의 의욕이 침체됨에 따라 이제는 불참 신청을 할 때나 쓰는 곳으로 변질되었고, 그조차 최근 유행하는 무단 결근 때문에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한술 더 떠 메세지조차 읽지 않는 사람이 과반을 넘는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문제시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위원회를 관리감독해야할 위원장 사가미가 바로 그 과반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무시하지 못 할 것이다. 

  그도 그럴게, 절대 넘어갈 수 없는 내용일 테니.

 

  부위원장 유키노시타가 각 부서 여러분에게.

 

  금일 16:00 문화제 실행 위원회의 임시 회의를 개최합니다.

  현재까지의 작업 진행도를 참고해 업무 환경을 개편할 예정이니 부디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단, 사전에 공지하지 못한 일정 변경이기에 불참시 불이익은 없습니다. 스케줄 조절이 불가능할 경우 기존 업무를 우선시 해주세요. 부서별로 한 명만 와주셔도 충분합니다. 변경점에 대해서는 차후 공지로 전달하겠습니다.

 

  추신 : 본 회의는 위원장 재가로 소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현대 SNS의 기본 구조는 가장 최근에 온 메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발이 넓은 리얼충들이야 친구 목록도 길겠지. 쉴새없이 쏟아지는 답장 속에 메세지 한 둘 쯤 파묻히는 건 흔한 일이고, 대답하기 싫을 때 사용하는 단골 핑계로도 곧잘 애용된다. 소스는 나.

 

  뒤집어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결국 타이밍.

  사가미가 휴대폰을 열었을 때에 맞춰,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지기만 하면 된다.

  시간순으로 따졌을 때 가장 나중에 갱신된 글이 무조건 보일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니까.

  

  “별 것 아니에요. 즐거운 문화제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보자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네 의도대로 될지 의문이구나. 슬슬 시작인데 인원들도 거의 모이지 않았고.”

  “예상대로입니다. 오히려 좋아요.”

  “허어, 그렇군.”

 

  애초에 제대로 된 인간은 이런 문자를 보내지 않아도 온다. 실제로도 고작 몇 명 뿐이지만 평소보다는 참석자가 늘기는 했다. 최소한의 양심은 남았던 걸까, 아니면 힘싸움에서 떠밀린 패자들일까. 내 마지막 남은 인류애로 전자라 믿어보기로 하자. 

 

  “만약 사가미가 안 온다면?”

  “그럴 경우도 대비해 손을 써두었습니다.”

  “철저하구나. 내가 도와줄 일은 없겠느냐?”

  “아뇨, 선생님은 가만히 계세요. 대놓고 선수를 친 마당에 저희들이 친하다는 게 알려져봐야 좋을 게 없습니다. 기세가 오른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흠, 알았다.”

 

  역시 선생님, 별다른 설명없이 납득해주니 정말 편하다. 남은 건 당사자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군.

  시끄러운 발소리가 복도를 채우더니,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키노시타 양!”

 

  어라, 그 와중에도 다른 반에 들를 여유가 있었나 보네?

 

  사가미는 늘 같이 다니던 여학생 두 명을 양 옆에 낀 채 회의실로 들어섰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세 명 모두 쫄딱 젖은 생쥐 꼴이었다. 여러모로 요란스러운 행차로구만.

 

  “어머, 딱 맞춰 왔구나, 사가미 양.”

 

  유키노가 인사를 건넸지만 아무래도 받아줄 기분이 아닌 듯 했다. 힘들어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뻘겋게 충혈된 얼굴로 유키노를 노려보던 사가미가 품 속에서 휴대폰을 치켜들었다. 가쁜 호흡이 짐승처럼 거칠다.

 

  “······뭐야, 이거?”

  “뭐냐니. 보이는 그대로 회의 소집인데.”

  “지금 장난해?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내 말은 어째서 이 회의가 마치 내 이름으로 소집된 것처럼 적혀 있냐는 거야!”

  “사가미 양이 소집한 건 아니야. 단지 인가를 했을 뿐이지. 분명 그렇게 명시했어.”

  “뭐어? 나는 허락한 적이 없어! 애초에 묻지도 않았으면서······!”
 

  성난 벌떼처럼 쏘아붙이던 사가미가 돌연 숨을 들이키며 멈췄다. 상대방의 손에 들려진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부고의 각인이 새겨진 작은 도장, 유키노는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치켜들었다.

 

  “이상한걸? 위원회 업무에 대해선 자유롭게 해도 된다며, 나에게 이걸 넘겨준 사람은 사가미 양이었잖니?”

  “그, 그건······!”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쭉 자리를 지켜왔던 개근 멤버들이야 직접 봤겠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몇몇에게는 꿈에도 생각 못한 전개였겠지.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듯한 파문이 작지만 확실히 퍼져나갔다.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사가미가 아니다.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한층 강한 어조로 소리 지른다.

 

  “경우가 다르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사안은 나에게 먼저 물어봤어야지! ”

  “필수 참가가 아니니만큼 큰 규모가 되진 않을거라 생각했어. 보다시피 실제로 절반도 채우지 못 했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 그래! 오히려 적을수록 문제 아냐? 실행 위원회의 업무를 모두의 동의 없이 멋대로 바꾸면 안 되는 거잖아?”

  “상관없어.”

  “뭐어?!”

  유키노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칙칙한 의장석 사이에 오롯이 서 있는 자태는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워, 돌계단 틈새에 핀 작은 꽃을 연상케 했다. 열흘 붉은 꽃 없다는 옛말이 무색하게도 언제나 자리를 지켜왔던 꽃. 유키노가 하는 말에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은 지났으니까. 우리들의 문화제가 이도저도 아닌 소꿉놀이로 변질되고 있잖니. 더는 두고보지 않아.”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한 마디에 회의실 안은 쥐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물론 개개인의 선택은 존중해. 실행 위원회 누구라도 동의나 거부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 하지만 사가미 양, 지금까지의 회의에서 바뀐 게 뭐니? 애초에 선택한 게 있기나 했을까? 문화제까지 2주밖에 남지 않은 지금, 우리 학교가 만들어가는 문화제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어. 방향성도, 테마도, 그걸 위한 수단도, 어느 것 하나 결정된 게 없는걸.”

 

  도발적이었던 목소리가 느긋하게 변했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 했다.

 

  “행사하지 않는 권리에 의미는 없어. 마찬가지로 의무 없는 권리도 없지. 나는 분명 업무 환경을 개편할 거라고 메세지를 보냈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이상 동의한 걸로 간주할 수 밖에. 실무는 걱정 마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열심히 해주었으니. 앞으로는 기록 잡무부를 중심으로 위원회를 운영해나갈 예정이야. 물론, 인수인계는 제대로 할 거고.”

 

  갈 곳 잃은 사가미의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했지만,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히라츠카 선생님조차 유키노시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의 실행 위원회는 현실 정치의 구도와 유사했다. 위원회를 의회, 대표자를 차출한 각 학급을 지역구로 치환하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의장은 그저 명목상의 리더일 뿐 철저히 다수결로 운영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사한 점은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위원회에서 어떤 사안들이 오가는지에 대해 일반 학생들이 무관심하다는 점에 있었다.

 

  관심이 없으면 무엇을 해도 신경쓰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즉, 견제가 들어오지 않는다. 견제 없는 권력은 자기 보신을 위해서만 작용되게 마련이고, 다수결은 이기심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다. 좋은게 좋은거라며 힘든 일을 회피하고, 떠넘기고, 잘 해보려 노력한 사람을 시기해 깎아내린다. 공범 의식이 만연한 위원회는 자정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출석률이 적을수록 좋다고 한 이유가 이것이다. 현재의 실행 위원회를 정상화 시키기 위해선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데, 그 개혁 대상이 과반수를 넘는다는 게 문제였으니까. 라인 첫 줄에 박아둔 유키노시타의 이름은 휴대폰을 켜자마자 보였겠지. 아마 대부분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이쪽의 노림수였다.

 

  “정상이 아니구나, 유키노시타······. 이건 직권남용이야. 위원장인 나를 무시하고 멋대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니?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책임을 지게 되겠지. 나, 그리고 사가미 양이.”

  “뭐?”

  “이 도장 자체가 본래 내 손에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이야. 대리 서명은 위원장 선출의 의의를 전면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학교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는 우리 두 사람이 짊어져야 마땅해.”

  “너······.”

 

  말문이 막힌 사가미는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는게 고작이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유키노에게 누군가 힘을 보탰다.

 

  “사가미 양, 유키노시타 양의 말이 맞아. 오히려 유키노시타 양이기에 이 정도 선에서 수습할 수 있었어. 위원장 부재시 대리역을 맡을 수 있는 건 부위원장밖에 없으니까.”

 

  시로메구리 선배, 아무것도 하지 말아달라고 분명 말했는데······.

 

  “나도 그다지 자리를 지키지는 못 했으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두고볼 수만도 없어. 사가미 양, 이건 심각한 문제야. 위원장 자리에 지원했으면 그에 맞는 책임도 질 줄 알아야 해. 네 부재 탓에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힘들었어. 유키노시타 양 뿐만이 아니야. 잇시키 양이나 히키가야 군도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고생했다구.”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사가미의 그룹엔 명백한 변화가 일어났다. 평소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던 친구 두 사람이 사가미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듯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사가미가 모를 리 없다. 움켜쥔 주먹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으니까. 거친 호흡소리가 지나가기를 몇 차례, 침묵하던 사가미는 쉰 듯이 컬컬한 목소리로 불쑥 뇌까렸다.

 

  “아아~, 또 히키가야 군이구나.”

 

  교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땀으로 엉겨붙은 앞머리 사이로 사가미의 눈동자가 빛을 뿜었다. 

 

  “어쩐지, 하야마 군에게서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학부모회 측의 클레임이 이제와서 번복될 리가 없지. 그 웃긴 연극을 다시 시작한다길래 무슨 장난인가 했더니, 이딴 문자나 보내고 말이야.”

 

  사가미는 휴대전화를 꺼내들었지만, 그 시선은 액정 화면이 아닌 이쪽에 고정되었다. 여름은 끝났건만 국어책을 읽는 듯한 중얼거림은 흡사 철지난 호러 영화처럼 섬뜩했다.

 

  “다시 봤어, 히키가야 군. 이것도 저것도 전부 네가 꾸민 일이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 보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네.”

  “사가미, 그게 무슨······.”

  “왜요? 제 말이 틀렸나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해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방식을 유키노시타 양이 떠올렸을 리는 없죠. 하물며 그 유미코는 말할 것도 없구요.”

 

  재차 반박하려는 시로메구리 선배를 유키노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가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코웃음쳤다.

 

  “대단해,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야. 네 누나와 사촌을 위해 일을 이 지경까지 꼬아놓다니.”

  “아직도 네 잘못을 모르겠다는 거야?”

  “너 참 재미있는 소릴 하는구나. 뭘 착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딱히 잘못한 게 없어. 이곳 실행 위원회에서 결정된 안건들은 모두 다수결로 정했으니까. 나 혼자만의 독단이 아니었다 이거야. 그 때는 가만 있었으면서 이제와서 딴소리? 그럼 안 되지, 히키가야.”

 

  사가미의 입가가 일그러졌지만 그것은 미소라기보다 괴상한 비웃음이었다.

 

  “우린 이제 어린아이도 아니잖아, 그치? 고등학생이면 고등학생답게 처신하자구. 아무리 네 주변 사람들이 좋아도 공적인 일에까지 끌고오면 곤란해.”

  “그런 적 없어.”

  “끝까지 시치미 떼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거의 다 히키가야의 인맥이잖아. 잇시키 양도 하타노 군도 메구리 선배도 모두 다.”

 

  보는 눈이 적어지니 거리낄 게 없어졌구나, 언급되지 않은 몇몇에게 이 사실을 알려 자신의 편을 늘리려는 수작이로군. 우리의 관계가 너에겐 약점거리로 보일 테니까.

 

  기세가 오른 사가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얼굴이 음산한 목소리로 도발한다.

 

  “도대체 유키노시타 양이 뭐라고 이 난리를 친 거야?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어? 너희들 정말로 그렇고 그런 관계였니? 어쩐지~, 얌전 빼는 애들이 더 한다니까~. 싫다~, 더러워! 사촌끼리 사귀다니 제정신이야?”

  “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반대야. 사촌이고 남매이니까 도와주는 거라고. 억울한 취급을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
  “하아~, 이성이라곤 쥐뿔도 없으니 대화가 안 되네. 그게 문제라는 거야! 네 주변 사람들이 잘못한 걸 멋대로 억울하다 단정짓고 나대는 거. 공과 사는 구분해줬음 하는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말이 통할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안 했지만, 이거야 생각보다 심각하군. 

  이 녀석은 처음부터 대화를 할 마음이 없었다. 객관적인 상황을 놓고 저울질해봐야 자신이 불리한 걸 아니까. 교양있는 논리 대신 사가미가 선택한 것은 리얼충으로서 갈고 닦아온 기술이었다. 억지든 물타기든 각종 화술을 총동원해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떠넘겨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 정도도 예상 못 할 내가 아니다. 대비책 없이는 선전포고도 보내지 않았다.

  너는 잘못 생각한 거야, 사가미. 여기는 내가 준비한 무대다. 동조해줄 사람 하나 없는 1:1 단판승부의 투기장이라고.

  인맥? 패거리? 다 집어쳐. 여기엔 너랑 나 둘밖에 없는 거야. 뭐가 됐든 오늘 끝장을 볼 거고. 

 

  무엇보다, 궤변은 내가 더 잘해.

 

  “적당히 해주시겠어요?”

 

  걱정 마.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생이나 되서 주먹다짐까진, ······응?

 

  “보기 흉해요, 사가미 선배. 솔직히 더는 들어주기 힘들 지경이에요.”

  “잇시키?”

 

  네가 왜······. 아뿔싸,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는 걸 깜빡했어. 큰일이야, 지금 잇시키가 끼어들었다간······.

 

  “헤에, 히키가야 군 진짜 능력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런 귀여운 애들이 도와주고 말야.”

  “잠깐, 오해다! 잇시키는 아무 상관, ······윽?!”

  “아무 것도 안하긴요~, 이게 다 평소 행실의 차이 아니겠어요? 누구누구씨랑은 다르게 성실하셔서 말이에요~.”

  

  그 착하고 성실한 선배의 발을 밟고 있는 건 어디 사는 누구씨일까요?

  내 어깨에 붙잡은 잇시키는 당기는 힘을 반동삼아 튀어나와서는 사가미의 시선에서 나를 가리듯 버티고 섰다.

 

  “잇시키 양이라고 했었나? 그 말투는 후배로서 어떨까 하는데?”

  “그런가요? 사가미 선배는 선배로서 어떨까 싶네요~.”

  “아? 지금, 뭐라고······?”

  “지금껏 코빼기도 안 비치시던 분이 이제와서 이러는게 웃겨서 그러죠~. 유키노시타 선배는 분명 회의를 하겠다고 했죠?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뭣하면 사가미 선배도 참석하시면 되잖아요. 잘 해보겠다고 하는 일인데 어째서 초를 치는지 모르겠네요~?”

 

  무서워! 이로하스, 무서워! 저 카스트 상위 리얼충을 상대로 한 마디도 밀리지 않아!

 

  “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뭘로 들은 거니! 내 말은 의도가 불순하다 이거야! 실행 위원회는 엄밀히 일이고, 공과 사는 구분해야······.”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건 사가미 선배 아닌가요?”
  “뭐어?”

  “제가 기록 부장으로서 쭉 지켜봤는데요. 여기 있는 동안은 히키가야 선배도 유키노시타 선배도 진지하게 임하셨어요. 업무 분배도 공평하게, ······아니, 어렵고 힘든 일은 죄다 두분이서 떠맡았죠. 이 허술한 위원회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구요. 그렇죠, 여러분?”

 

  씨익 입꼬리를 올린 잇시키가 외쳤다. 예고도 없었지만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은 바로 호응해 주었다.

 

  “물론이야. 서클 통제부도 결원이 많아 곤란한 상황이었거든. 유키노시타 양이 외부 단체 연락을 맡아주지 않았더라면 큰일났을지도 몰라.”

 

  확실히 들리게끔 또박또박 강조하는 혼모쿠.

 

  “관리 쪽도 마찬가지에요. 히키가야 군이 틈틈이 시간을 내어 각종 장소에서 대여한 물품들을 검수해 줬거든요. 덕분이 기한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혼모쿠와 행동을 함께 하던 후지사와 양.

 

  “홍보는······, 말할 필요 있나요? 우리가 다 했는데. 그쪽 출석률이 워낙에 처참해야 말이죠. 포스터 복사부터 게시 장소 확보까지 부부장이랑 부장이 다 했어요. 뭐, 허구한 날 빠지신 분들이 알 리가 없지만요.”

 

  너는 언제나 한 마디가 많아, 하타노. 그래도 잘했다. 그놈의 부부장 호칭만 빼고.

 

  “학부형과의 교섭이나 학교측과의 협의도 모두 유키노시타 양이 도맡아 왔단다. 선생님들 중에는 유키노시타 양이 위원장이라 알고 계신 분도 많아. 나도 히라츠카 선생님도 몇 번이나 도움받았구, 정말 대단해.”

 

  유키노시타도 시로메구리 선배의 포근함에 도움 받았다고 생각하지만요.

 

  한 사람 한 사람 입을 열 때마다 잇시키의 표정이 밝아진 반면 사가미는 마치 시체처럼 창백해져갔다. 두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웠지만, 그럼에도 사가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저항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들 이상해······. 사촌끼리 좋아하다니 정상이 아니잖아. 나만 불편하다고 느끼는 거야? 저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비록 궁지에 몰려 내지른 발악밖에 안 되지만, 저쯤되면 그 끈기만은 인정해줄만 하다. 끈기만. 논점 흐리기라니 초등학생이냐고. 고등학생이면 고등학생답게 처신하자구?

 

  “그게 뭐가 이상한데요?”

 

  한 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잇시키가 선수를 쳤다.

 

  “사촌끼리 좋아하면 어때서요? 피해 본 사람 있어요? 두분이 연애질을 하다 문화제 준비를 소홀히 하기라도 했나요? 아니잖아요. 모두가 인정하듯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잖아요. 그런데 사가미 선배는 도대체 뭐가 불만이어서 선배를 괴롭히는 거죠?”

 

  문제를 회피해 적의를 돌리려는 화법을 잇시키는 용납하지 않았다.

  영악하고 구질구질한 기술을 끝까지 추적하며 응수한다.

 

  “신경 끄시고 놔두세요. 본인들의 감정이 어찌됐든 그건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해야할 일이니까. 제삼자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뭐라고? 이게 듣자듣자 하니까! 니가 뭔데 큰소리······.”

 

  반쯤은 무의식이었다. 높이 치켜든 사가미의 손이 잇시키를 때리려는 듯 보여,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고 말았다. 휘몰아치는 격노에도 불구하고 꽉 움켜쥔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남은 절반의 이성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유키노가 뛰쳐나오리란 건 예상 범위 내.

  내가 화내는만큼 유키노도 화를 낸다. 내가 하려는 행동을 유키노라고 모를 리 없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뛰쳐나온 두 팔이 잇시키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를 위해 화내준 후배를 이제는 우리가 지킬 것이다.

  

  “아, 아으······.”

 

  기세에 질겁한 사가미가 무너져내렸다. 구원을 찾아 방황하던 눈동자가 히라츠카 선생님께 매달린다.

 

  “서, 선생님도 뭐라고 해주세요! 정말 저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응? 나 말이냐?”

 

  어떻게 할까, 흘끗 나를 곁눈질한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히라츠카 선생님은 곧 익살맞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글쎄,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

  “선생님!”

  “유감스럽지만 사촌간 결혼은 일본국 민법에도 보장되어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연애를 금지하는 법은 이 나라 어디에도 없다. 실제 관계가 어떨지는 몰라도, 만에 하나 히키가야와 유키노시타가 사귄다 한들 그걸 막을 권리는 없어.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없지.”

 

  음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 쪽을 향해 한쪽 눈을 깜빡였다.

 

  “뭐, 불순이성교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들이 절도를 지키는 한 학교 측에서 간섭할 일은 없을 거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공포로 변한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하지 못 할 때, 인간은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이성이 사라지고, 갈 곳 없는 분노를 주변에 돌릴 뿐이다.

 

  ······자업자득이라 할지라도, 썩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xxx

 

  어림짐작이지만 사가미는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집단의 리더가 될 수 없음을 알았던 그녀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집단 구성원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 개인은 독립적일지라도 단체가 되었을 때는 필연적인 법칙성이 발생한다. 몰개성화와 경로의존성이 대표적인 예다. 사람들은 집단지성이 구성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향상될 거라 믿지만 실제로는 영악해질 뿐이다. 개성은 거세되고, 목표는 안일해지며, 수단은 정당화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의존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의욕이 사라진 개인은 어떻게 반응할까? 뻔하다. 그들은 관심사는 오직 편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목적 뿐이다. 그 이상의 의무도 책임도 바라지 않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희생하는 것조차 당연시하게 된다. 그러한 집단을 제어하기 위해선 강력한 카리스마로 압도해야하지만, 애석하게도 사가미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녀는 대신 더욱 간단한 무기를 사용했다. 무제한적인 허용이다.

 

  통제를 포기한 사가미는 집단의 이기심이 위험한 수위에 이르도록 부추겼다. 한계에 다다른 욕망은 터지기 직전의 댐과 같아 물길을 내는대로 쓸어버린다. 그 방향키를 쥐는 것만이 사가미의 목표이자 처세술이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카스트 상위층으로서 떠받들여지던 사가미에게 있어 자신의 주장이 연거푸 반박당하는 것은 낯선 상황일 테지. 언제나 다수에 속해있던 자신이 홀로 고립되다니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군중 속에 둘러싸여 그 힘을 이용해왔던 사가미는 집단에서 소외된 인간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복도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가에 서 있던 사가미의 친구, 아니 친구‘였던’ 소녀들이 움찔했지만,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일련의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잠깐 실례해도 될까?”

 

  하야마 하야토였다. 뒤에는 반장도 함께 있었다. 뜻밖의 손님에 사가미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 했고, 다른 사람들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문객을 맞아야할 시로메구리 선배, 심지어 유키노조차도 놀란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어, 괜찮아. 지금 막 이야기가 끝난 참이거든.”

  

  자연히 접객은 내 몫이 되겠군. 애초부터 내 손님이지만.

 

  “그래? 어떻게 됐어?”

  “허가가 났다. 우리들 연극은 종전대로 해도 돼. 물론 원한다면 새로운 걸로 바꿔도 되고.”

  “아니, 그 쪽은 사양할게. 몇 번이고 아이디어를 모아 봤지만 영 쓸만한 게 나오지 않았거든.”

 

  멋쩍게 뒤통수를 긁던 하야마가 뒤에 서 있던 반장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뭐랬어? 히나의 연극,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

  “하야마 군에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 했지만, 정말이었을 줄이야. 어떻게······.”

 

  말끝을 흐린 반장이 문득 이쪽을 돌아보았다. 추켜올린 안경 너머로 야릇한 시선이 느껴진다.

 

  “혹시, 히키가야 군이?”

  “맞아, 하치만이 힘써줬거든.”

  “······어?”

 

  분명 반장에게 한 말이었지만 반응을 보인 것은 사가미였다.

  뻔히 들었으면서도 하야마는 태연하게 대화를 재개했다.

 

  “고마워, 하치만. 솔직히 이 이상 지체되는건 위험했거든. 살짝 빠듯하긴 해도 덕분에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감사는 무슨, 너 고생 하라고 하는건데. 창피 당하기 싫으면 열심히 연습하는 게 좋을걸? NG라도 내는 순간 영상으로 찍어다 손님들에게 팔아먹을 거니까. 하긴 그 쪽이 레어도가 높아서 잘 팔릴지도 모르겠다만.” 

  “오~, 세게 나오는데? 무단 촬영은 불법이라고?”

  “어이어이, 하야토.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려 기록 잡무부 부부장이시다.”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하야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질세라 이쪽도 더욱 크게 웃는다. 서로를 향해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우리를 보며 전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들 하고싶은 말이 많은 표정들이었지만, 다행히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서야 하야마가 사가미를 돌아보았다. 마치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아, 여기 있었구나. 미나미도 우리 반 연극을 위해 힘써준 거지?”

  “어? 아, 아니, 난······.”

  “힘써줘서 고마워. 사실 나도 한 번쯤은 주연배우를 맡아보고 싶었거든. 장르가 좀 그렇긴 하지만, 한 번 뿐인 학창시절이잖아? 놀 거라면 제대로 망가지는게 재밌으니까.”

 

  회의실 가운데로부터 날아온 눈초리 덕에 뒤통수가 얼얼하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가미는 얼른 주제를 바꾸었다.

 

  “그, 그래? 잘 됐네, 축하해······. 그건 그렇고 하야마 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궁금한 거? 뭔데?”
  “히키, ······아니, 하치만 군이랑 아는 사이야?”

 

  하야마와 시선이 마주친다. 과연 무슨 말을 하려나. 아는 사이긴 해도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관계는 아닌데······. 되도록 무난한 선택지를 골라줬음 했지만, 상쾌한 미소를 지은 하야마는 그런 내 바램을 단칼에 배신했다.

 

  “그럼, 알고말고. 가정 환경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거든. 형제랄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야.”

 

  야 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하는 거 봐. 뒷수습하는 건 나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군이니까 뭐라 할 수도 없고······. 

 

  “과연, 그러고 보니 하야마 군은 직장견학 때 히키갸야 군과 같은 조였지?”

  “헤, 헤에······. 그, 그렇구나······.”

 

  나이스 반장! 훌륭한 어시스트였어! 학급의 심부름꾼은 기억력이 남다르구만! 이름은 모르지만 말이야!

 

  “어라? 하지만 그 외에 두 사람이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예리한 질문이었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다. 빠르게 시선을 교환한 하야마는 준비해둔 답변을 꺼내들었다.

 

  “하치만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거든.”

  “이런 성격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하야토가 지나치게 인싸인 거라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교실에서는 아는 척 안 하기로 한 거야.”

 

  나름대로 납득했는지 반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하야마는 반 발짝 뒤로 돌아서 엄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우리는 이만 돌아가볼게. 이 소식을 반에도 알려줘야 하니까.”

  “엉. 그쪽 분위기는 어때?”

  “아주 좋아. 네 귀띔 덕분에 준비는 마쳐뒀거든. 오늘부터 바로 연습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홍보 사이트도 무사해. 미리 알려줘서 고맙다, 히키가야 군. 하마터면 지울 뻔 했어.”

  “그러니까 감사는 됐대도. 애시당초 클레임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던 거야. 오히려 너무 늦은 셈이지.”

  “너는 또······. 아냐, 됐어. 수고해. 언제라도 보러 오고.”

  “그래, 너희들도 수고해라.”

 

  고갯짓을 한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 문 앞에 남은 건 사가미의 그녀의 친구들.

 

  “아, 그, 저희도 가볼게요······.”

  “시, 실례했습니다!”

 

  정정한다. 이제는 사가미 혼자다. 그녀의 곁에 남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가미도 방금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문객의 등장은 예상 외였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카스트 최상층에 위치한 하야마에게는 불리한 상황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자신의 치부는 전부 감춘 뒤 금기를 내세워 설득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는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학교라는 사회에서의 이미지는 훼손시킬 수 있을 터였다.

 

  상대가 하야마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소꿉친구, 그것도 가정 사정이 계기라면 양가 부모님들도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적어도 10년을 넘은 친구 사이에 비밀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하야마도 알고 있었다면? 나와 유키노의 관계를 알면서도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거라면? 어쩌면······, 집안 차원에서도 이미 이야기가 끝난 문제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게임 오버다.

 

  기가 막힐 정도의 왜곡이지만 불행히도 지금의 사가미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섬뜩한 상상이 하야마에게 기대는걸 포기하게 했다. 아군이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은 무엇보다도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이야기를 계속할까, 사가미 양?”

  “히익?!”

 

  남겨진 자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했다. 퀭한 안구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했고, 말라붙은 입술은 염불을 외우듯이 달싹였다. 달려온 열기는 식었건만 계절을 착각한 땀이 전신의 구멍에서 줄줄 흘렀다. 이제는 없는 잔상을 그리듯이, 사가미는 하야마가 떠나간 자리를 그저 하염없이 흘끔거렸다.

 

  “회의는 이제 시작했을 뿐이란다. 원한다면 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는데?”

 

  유키노의 목소리를 평소와 같이 차분했지만, 사가미에게는 저승사자가 내리는 사형 선고일 뿐이었다. 질겁한 표정으로 도리질을 하던 사가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오, 오지 마!”

 

  부서져라 문을 열고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남겨진 사람 가운데 그 뒤를 쫓는 사람은 없었다. 

 

  “후우······. 아슬아슬했지만, 계획대로 잘 끝났구만.”

  

  승률이 높았다고 해도 반쯤 도박이었으니 말이지. 

  사가미가 쥔 카드는 ‘하극상’과 ‘근친애 금기’였다. 어느모로 보나 관습상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었고, 눈치를 보는 다수는 안전성을 선호한다. 머릿수가 많아지면 변수도 증가하는 법, 더욱이 논리가 통할 확률도 줄어든다. 유키노의 승리를 위해선 판 자체를 뒤엎어 유리한 전장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까놓고 말해 우리가 다수가 되는 것이다. 사가미의 궤변을 반박할 수 있었던 것도 대화의 주도권이 이쪽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논리나 이성은 상대를 견제할 수 있어야 유효하며,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진리다. 여차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거센 압박. 상호확증파괴를 내세운 뒤에야 우리는 하고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내부에서의 혁명은 성공했다. 그 최대 공로자는 당연히 유키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내 사촌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흘겼다.

 

  “히키가야 군?”

 

  솔직히 무섭다. 유키노는 곧잘 ‘히키가야 군’이 애칭이라 말하곤 했지만, 방금 나를 부른 목소리엔 그런 낌새는 추호도 찾을 수 없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선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응.”

 

  기회를 줄 테니 이실직고하라는 아내의 눈빛이었다. 어떻게 아냐고? 우리 엄마가 그랬으니까. 역시 유키노시타의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나중에 다 설명할게. 하야마와 있었던 일도, 방금 일도 전부. 그러니 지금은 참아 주면 안 될까? 우선은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비록 사가미를 부르기 위한 구실로 써먹긴 했지만, 위원회 업무의 전면개편은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유키노는 찡그린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작게 한숨쉬었다.

 

  “알았어. 대신 제대로 설명해 줘야해? 당신의 일에 대해선, 전부 알고 싶으니까.”

 

  수줍은 표정으로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아. 꼭 말할게.”

 

    제2의 사가미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지.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아.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테니까.

  결의가 전해졌는지 유키노도 수긍해 주었다. 환한 미소에 세상이 한층 밝아보였다. 

 

  “······선배님들, 여기 회의실이에요.”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뭘 하는건지.”

  “하루 선배, 항상 이런 장면을 보고 계셨던 거군요······.”

 

  부끄러운 현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크흠, 흠. 실례했습니다······.”

 

  유키노는 한 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전원을 돌아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고, 힘차게 선언한다.

 

  “회의를 시작하죠. 한가하게 있을 시간은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 책임자만 바꾸는 정도여서 개편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업무가 분배된 후에는 각자의 일을 했기에 회의실은 이따금 들려오는 이야기소리 외에는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틈을 타 유키노에게 다가갔다. 그럴듯한 종이묶음을 들고, 마치 상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약속했던 대로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고맙게도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백이 끝날 때까지 사각사각 기분 좋은 잡음은 끝없이 이어졌다.

 

 

  xxx

 

  “저기,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요······.”

 

  미간을 찌푸린 사가미가 고개를 숙였다. 벌써 몇 번이나 읽었을 서류를 훑어보더니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흘끗 시계를 보니 어느덧 사가미를 격퇴한 지도 2시간, 단위가 이상한 건 기분 탓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요?”
  “말 그대로야, 사가미 군. 당신의 기획대로 행사를 진행해도 좋아.”

  “네? 아니, 갑자기 왜······.”

  “늦어져서 미안하구나. 설득에 조금 시간이 걸렸거든. 그래도 확실히 매듭을 지어놨으니, 앞으로의 활동에 문제는 없을 거란다.”

 

  정확히는 문제가 생겨도 우리 선에서 쳐낼 거지만 말이지. 정말이지 학부모회의 클레임에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니까. 똑똑한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유키 짱은 진짜로 누나 같았다. 뒷정리를 도와주신 히라츠카 선생님은 교무실로 돌아갔고, 실행 위원들도 각자의 업무를 배당받고 나가버린지 오래다. 퇴근이 아니라 외근이니 착각하지 않도록. 

 

  발로 뛰는 영업직 대신 영광스런 사무직에 당첨된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원체 과로에 찌든 인간군상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칙칙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사가미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갈 곳 잃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항하더니 웬일인지 나를 곁눈질했다.

 

  “그, 갑자기 말씀하셔도······.”

 

  흐으음, 혹시 선배들 앞이라 긴장한 건가? 하긴 이런 경우라면 이성보다는 동성 쪽과 얘기하는 게 편하겠지. 좋아. 좀 도와줘 보기로 할까.

 

  “말하자면 메이드 카페가 부활했다는 거지. 네 꿈을 펼칠 기회라고나 할까? 눈치보지 말고 팍팍 밀어붙여도 상관없다고.”

  “아뇨. 꿈까지는 아니랄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부담스러운데요. 뭐에요, 취향이 그쪽인가요?”

  “아니라고······.”

 

  긴장은 무슨, 말만 잘 하는 구만······. 누가 하타노 친구 아니랄까봐 이 녀석도 보통내기가 아닌데? 방금 전까지의 숫기는 어디 가고 웬 키보드 워리어가 나타났대냐? 

 

  “안되겠다. 하타노, 설명.”

  “저도 모르는데요. 이 기획을 되살린 건 부부장이잖아요. 알아서 하세요.”

 

  옆자리에서 노트북과 씨름하는 하타노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거절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가미는 코웃음치더니 쓰고 있던 안경을 쓰윽 밀어올렸다.

 

  “뭐야, 진짜 취향이 그쪽이었어? 이거 위험한 사람일세.”

  “이것들이 진짜.”

 

  긴장은 유키노 앞에서만 하는 거였냐고······. 당연하지! 누구 사촌인데! 소꿉친구인 나조차도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 했어! 보기보다 눈썰미가 좋은 녀석인걸? 

  내적 친밀감을 마구마구 쌓아올리는데, 별안간 한 칸 건너 책상에 앉아있던 잇시키가 큰 소리를 질렀다.

 

  “이제 못 해!”

 

  서류더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절망 가득한 목소리로 흐느낀다.

 

  “서어어언배애애애~~~.”

  “네네, 선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무리에요. 힘들어요. 못 움직이겠어요. 도와주세요~.”

  “저런, 안 됐구나. 그런데 어쩌지? 선배들이 지금 좀 바빠요, 미안하지만 혼자서 해주지 않으련?”

  “그치만,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단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손가락 정도는 까딱할 수 있을 거라 본다만······. 말해봐야 입만 아플테니 참아야지. 속으로만 말하자. 입은 어떻게 움직이는 건가요, 이로하스 양?

 

  “미안하지만 잠깐 실례하마. 아, 그러고보니 하타노 친구랬나?”

  “그런데요?”
  “그럼 슬슬 돌아가라. 우리가 해 줄 말은 이게 끝이야. 모르는 게 있으면 저 녀석한테 물어보고.”

  “엥? ······뭐, 뭐야 이 태도 변화는?”

  “냅 둬.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꿍시렁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일어섰다. 하타노 친구라니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기획서 쓰는 걸 보아하니 나름 똘똘한 녀석 같고. 무엇보다 진짜로 이 이상은 해줄 말이 없다.

 

  “······것보다 저거 잇시키 아냐? 원래 저런 이미지였나?”

  “격하게 공감이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새로워. 문화충격이라고.”
  “허어, 오래살고 볼 일일세.”

 

  시끄럽네 정말. 얼마나 오래 살았다고 그런 소리니? 잇시키의 진면목을 몰라보다니, 같은 반 친구도 별 거 없구만.

 

  안경맨들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기자 책상에 엎드린 잇시키가 앙증맞게 팔을 저으며 맞아주었다.

 

  “그래, 우리 부장님은 뭐가 힘들어서 울상이실까?”

  “이거에요, 이거! 무대 배치표라구요! 선배가 맡겼으면서!”

  “아하, 배치표구만. 간단하잖아? 조명이나 음향, 필요 기자재를 행사 진행에 맞춰 분배하고 진행 요원을 배치하면 끝나잖니. 아, 간단한 그림도 첨부하고. 체육관 구조야 복잡할 것도 없으니까.”

  “간다~안? 선배 지금 간단이라고 했어요? 싸우자는 거에요?”

  

  잇시키와의 한판 승부인가······, 거 참 볼만하겠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한 살 어린 여후배를 울려먹은 냉혈한이 되던가, 선배가 되서 후배에게 잡아먹힌 호구가 되던가, 이기든 지든 이득이 없잖아. 역시 약삭빨라, 이로하스~.

 

  하기야 이런 관리업무는 행사의 전체 흐름을 결정짓는 일이니만큼 잇시키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낄만도 하다. 누구야? 이런 중요 과제를 잇시키에게 맡긴 사람이? ······나구나! 미안! 여기서 무릎 꿇으면 될까?

 

  “에휴······. 그래, 너는 좀 쉬고 있으렴. 이건 내가 어떻게든 해 보마.”

  “와~, 선배 멋쟁이~. 오늘도 믿음직하시네요. 역시 자전거 통학생은 달라~.”

  “비행기 태우지 마. 나도 죽겠다. 다리는 저리지 어깨는 딱딱하지, 목은 아주 대나무처럼 뻣뻣하다고. 데스크 업무는 혈액순환의 적이라니까. 누워서 하면 안 되나?”

  “마음이 바꼈어요. 하나도 안 멋있어. 아빠 같아요. 아저씨 냄새 나요.”

  “너무한 거 아니니, 내 딸아?”

 

  사람이 일만 하다보면 정신이 풀어진다지만, 이건 숫제 유아퇴행이로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고받는 대화도 벌써 몇 번째일까. 적당히 맞장구를 치는데, 집행부석에 앉아있던 유키노가 불쑥 끼어들었다.

 

  “잇시키 양, 그건 틀렸어. 하치만은 엄마야.”

  “아, 확실히. 이것저것 챙겨주려는 버릇은 딱이네요. 잔소리도 많고.”

  “어이, 뒷말이 많다고. 최소한 시아버지로 해주면 안 되니?”

  “와아~, 대단해~. 진짜 안 어울려.”

  “후후, 동감이구나.”

 

  키득키득 웃던 유키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총히 걸음을 옮긴 유키노가 엎드려 있는 잇시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잠깐 읽어볼 수 있겠니?”

  “그러세요.”

 

  흘러내리는 머리를 목 뒤로 넘긴 뒤 문제의 서류를 훑어보았다.

  방해가 되지 않게 가만히 있는데, 까딱까딱 다리를 젓던 잇시키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아, 그럼 유키노시타 선배 쪽이 아빠군요?”

 

  그 말에 유키노의 표정이 경직됐다.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옷깃을 부여잡듯 팔짱을 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잇시키 양.”
  “네, 네?!”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나와 하치만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야.”

  “······하?”

 

  멋진 미소는 넋을 잃을만큼 아름다웠지만 잇시키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경악한 눈빛이 나와 유키노를 번갈아보았다.

 

  “선배?”
  “네, 선배입니다.”

  “지금 저 말이 무슨 뜻이죠?”

  “뜻이고 자시고 말 그대로야. 나랑 유키노는 사귀는 게 아니니까.”

  “정말이지 부끄러워서 혼나는 줄 알았단다. 멋대로 단정짓는 건 그만둬 주겠니?”

  “······아하, 하하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제일 웃긴 말이었어요.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래?”


  잇시키는 기막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럼에도 유키노의 태도가 같자 미심쩍은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정말로요?”

  “물론이란다.”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부르면서?”
  “원래 사촌끼리는 이름으로 부르는게 자연스럽지 않니?”

  “그렇지만요! 이름으로 부르는게 자연스럽지만요! 하지만 두분은 쭈욱 성으로 불러왔잖아요! 바로 어제, 선배가 자전거도 내버려둔 채 유키노시타 선배의 집에 갔던 그 날까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렇죠?”

 

  이 녀석 주차장까지 체크하고 간 건가. 상대는 프로다. 역시 이로하스(토커). 훤히 꿰뚫고 있구만.

 

  “일이 있었던 건 맞아.”

  “우리 사이에 오해랄까, 해묵은 갈등이 있었거든. 화해하기로 했어.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꿍해있기도 뭐해서.”

  “엥? 그, 그게 다?”

  “나 참, 그 이상 뭘 바란 건데?”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유키노가 쿡쿡 웃더니 들고 있던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화제를 바꿨다.

  “일 이야기로 돌아가도 되겠니?”

  “네? 에에에······.”

 

  단조로운 울림은 딱히 긍정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유키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잇시키 양도 알겠지만, 현재의 위원회는 소수정예야. 부족한 일손을 한 사람이 여러 업무를 겸임하는 것으로 메꾸고 있는 상황이지. 인사 배치를 최적화시키지 않고는 필요한 수요를 전부 감당하는 건 불가능해.”

  “그건 그렇죠.”

 

  설명이 시작되자 멍해있던 잇시키도 진지한 태도로 경청했다. 기특한 후배의 반응에 유키노 또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화제 당일 일정을 살펴볼까? 입장 진행과 통제는 집행부 쪽에서 맡아준다지만, 그쪽도 방문객 접수나 교내 순찰이 있으니 한가하지는 않아. 시로메구리 선배도 MC 역할인만큼 진행에 관련된 나머지는 전부 우리 쪽에서 처리해야만 해.”

 

  그러고보니 대본 외우는게 걱정이라고 울상이셨지. 오늘따라 그립군요, 시로메구리 선배. 좀 전까진 여기 계셨지만요.

 

  “조명은 혼모쿠 군이 맡아주기로 했고 대기실은 후지사와 양이면 문제없겠지. 음향이라면 내가 생각해둔 사람이 있어. 자, 그럼 남은 게 뭘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니까 분명······.”

 

  쫙 편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던 잇시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어라? 그걸로 끝 아닌가요?”

  “일단 기본 정원은 그렇지만, 만일을 위해 한 사람 더 배치해두는게 어떨까 해. 전체 상황을 지켜보며, 문제가 발생할 시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사람.”

  “엣, 그건 혹시? “

  “그래, 적임자는 한 명 뿐이잖니?”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두 사람. 엇? 나?

 

  “잠깐 기다려줘, 유키노. 나도 그날 바빠. 우리 부서 일은 나 혼자 해야한다니까?”

  “개회식 때만 잠깐 도와주면 돼. 본격적인 기록 작업은 그 다음부터 시작이잖니?”

  “그건 그렇지만······.”

  “필수 인원은 말 그대로 최소 인원일 뿐, 불의의 사고라는 게 있을 수 있단다. 예비를 남겨둬야 대처할 수 있지 않겠니? 나는 그 역할을 당신이 해줬으면 해. ······안 될까?”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 없잖아! 치사해!

 

  “······알았어. 하면 되잖아.”

  “후후. 고마워, 하치만.”

 

  협상이 성사되자 유키노는 곧바로 문서화 작업에 돌입했다. 배치표를 반듯하게 펴 담당자들의 이름을 적어나갔다. 보나마나 첫 순서는 나라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잠깐만요!”

 

  도중까지 적던 종이를 잇시키가 빠르게 낚아챘다.

 

  “어째서 제 이름을 적으시는 거에요?! 설마 생각해둔 사람이라는 게?”
  “잇시키 양이란다. 정확히 말하면 전체 총괄도 겸해 주었으면 해.”

  “총괄?! 저, 저는 못해요! 그런 걸 해본 경험도 없구요! 당연히 유키노시타 선배가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구나. 실행 위원장 인사는 사가미 양에게 맡겨야겠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여차하면 내가 대신 하게 될지도 몰라. 거기에 나는 진행 도우미 역할도 겸하고 있으니······.”

 

  하기야 대판 싸운 상대와 협업을 하는 것만큼 불편한 일도 없지. 일은 둘째치고 당장 내일부터 어떤 얼굴로 마주봐야 할지 걱정이다. 뒤에 앉은 안경맨들도 「응? 우리 누나가 또 뭐 했어?」라느니 「알잖아, 평소 하는 거.」 라지를 않나 「아아, ······뭔가 미안.」이라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사가미 브라더, 동정한다. 굳세게 살아가렴.

 

  “그, 그럼 차라리 제가 예비를 맡는 건 어때요? 총괄역 같은 건 선배가 더 잘하실 것 같은데······.”

  “곤란해. 하치만은 잡무가 적격인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요······.”

  유키노시타 양??? 방금 자연스럽게 심한 취급하지 않았니? 잡무가 적격이라니 무슨 뜻이야? 그거야? 워낙 다재다능해서 한 가지 직무에 박아놓기 아깝다는 뜻인가?  

 

  마음 속에서 격한 토론이 이어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깜찍한 아가씨들은 내 처우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유키노는 따스한 미소로 잇시키를 다독였다.

 

  “괜찮아. 잇시키 양은 여태 열심히 해주었잖니. 하치만이 당신을 고른 것도 분명 그런 이유에서였을 거야. 신뢰 없이는 일을 맡기는 것도 불가능한걸.”

 

  감동적이군. 반쯤 노예취급 당했던 방금의 발언만 아니었어도 눈물 세 컵 정도는 흘릴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유키 짱? 의도는 좋지만 은근슬쩍 사람을 혹사시키는 솜씨가 제법인걸요? 점점 히라츠카 선생님을 닮아가는 것 같아 이 오빠는 걱정이란다?

 

  “······선배가요?”

  “그럼. 내 사촌이잖니. 누나로서의 보증이니 믿어주도록 하렴.”

 

  그렇게 말하고는 턱짓으로 이쪽을 가리킨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부정하는 순간 잇시키를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이 치사하다. 진짜, 어째서 나를 놀려먹을 때만 약삭빠른 거냐고!

 

  욱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억지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잇시키는 촉촉한 눈망울을 꿈뻑이며 나를 바라보더니, 빼앗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알았어요. 한 번 해볼게요.”

 

  내민 손에 유키노가 볼펜을 쥐어주었다.

 

  “이제와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정 무리라면 거절해도 된단다?”

  손바닥 뒤집듯 바꾼 태도는 언뜻 농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밀어붙일 땐 언제고 이제와서 그만둬도 된다니 이렇게 모순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놀리는 듯한 언행이 역설적이게도 상대방을 일어서게 한다.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투쟁심, 남에게 질 수 없다는 자존심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원동력이니까.

 

  정말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도발.

  문제의 해결이 아닌 방법을 제시하며, 동시에 그 책임이 스스로 짊어져야 할 무게임을 상기시킨다. 곤경에 처한 사람이 일어설 수 있도록, 자신의 힘으로 결과를 낼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에이, 설마요. 유키노 선배야말로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 말고는 할 사람도 없잖아요?”

 

  어쩌면 잇시키의 평가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얼핏 자식을 몰아넣는 맹수와도 같은 유키노의 방식은, 확실히 세간에서 말하는 ‘아빠’의 방식에 근접해 있었다.

 

  

  xxx

 

  “그럼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눈치 보지 말라곤 했지만 절도는 지키도록.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는 건 우리거든.”

  “그건 즉 안 걸리면 된다는 말이죠?”

  “잘 아는군. 하타노. 들키지만 마.”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미간을 찌푸리는 사가미와 그럴 줄 알았다며 씨익 웃는 하타노. 이것이 쌓아온 신뢰의 차이인가. 어느쪽이든 한심하다며 경멸하는 모양새지만, 거기선 선배의 위엄으로 상쇄시키기로 하자. 

 

  “하치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농담이었습니다.”

  “그거면 돼.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렴.”

 

  그렇게 말한 유키노는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류더미를 간추린 뒤 알맞은 파일에 끼워넣는 작업이다. 얼른 도와주러 가자 이전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로 맞아주었다. 

 

  “유키노 선배, 잠깐 와주시겠어요?”

  잇시키는 좀전부터 유키노를 이름으로 불르고 있다. 유키노 또한 기분나쁜 기색은 아니다. 실제로도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내면의 거리감에 비례하듯 이전보다 좁아져 있었다. 

 

  “무슨 일이니?”

  “이 투표 용지들을 어떻게 할 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잇시키는 자신의 앞에 쌓인 이면지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문화제가 끝날 무렵 발표될 우수상과 지역상 후보들이 적혀 있었다.

 

  “아직은 적지만 집계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늘어날 거에요. 기록도 끝났고 이참에 버려버릴까요?”

 

  유키노가 고개를 저었다.

 

  “행사에 관련한 물건들은 폐회식까지 보존해두는 게 좋을 듯 싶구나. 이후에 쓰일 곳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서류가 섞여들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파쇄해 버리면 돌이킬 수 없잖니?”

  “으으음, 그치만 슬슬 둘만한 곳이 없는데요······.”

  “그렇긴 하지.”

 

  일정한 리듬으로 톡톡 볼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춘다.

 

  “정 안 된다면 우리 집에······.”

  “아니, 내가 맡을게. 사물함에 넣어두지 뭐.”

  “당신이?”

 

  유키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기록 용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그 양을 헤아려보는 듯 했다.

 

  “당신 짐은 어쩌고?”

  “다 빼야지 뭐. 그날그날의 수업에 맞춰 들고 다닐 수 밖에.”

  “무리야. 집계는 문화제 당일까지 이어질 거고 투표 용지도 점점 늘어날 테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2주 동안이나 맡기기에는 당신의 부담이 너무 커.”

  “적어도 네가 고생하는 것보단 낫겠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몇 번이고 옮기는 건 비효율적이야.”

 

  혼잡하기로 이름난 케이요선이다. 출퇴근 인파로 북적이는 만원전철에서 종이박스를 껴안고 낑낑대는 일은 유키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걱정 마.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부담도 아닌걸. 나는 자전거로 통학하니 다소의 짐은 문제없어. 이런 것쯤은 오라버니에게 맡기라고?”

  “으으으······.”

  

  스스로도 흠잡을 데 없는 논리였다고 생각한다. 유키노 또한 꿍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릴 뿐 반박하지 못 했다. 쐐기를 박으려면 지금 뿐이다.

 

  “그렇게 됐으니 잇시키, 나 좀 도와줄래?”

  “네네, 모아서 드리면 되죠? 가방에 넣어 드릴까요?”

  “부탁한다.”

 

  그러모은 종이뭉치를 책상 위에 탁탁 두들겨 귀퉁이를 정돈했다. 클립을 끼워넣고  잽싸게 가방에 넣는다.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유키노의 빈 손에도 선물 하나를 쥐어주었다.

 

  “유키노, 자.”

  “이건?”

  고급스러운 가죽 서류철을 받아든 유키노가 움찔했다.

 

  “정리하다가 발견했어. 네가 쓴 체육대회 기획서잖아? 잃어버리지 않게 챙겨 둬.”

  “······이건 됐어. 이미 끝난 이야기고, 버려도 괜찮아.”

  “에이, 그럼 안 되지.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 ”

  “그렇지만······.”

  “그 때는 내가, 아니 우리가 도와줄게.”

 

  부스럭부스럭 짐을 정리하던 잇시키가 반쯤 감은 눈으로 흘겨보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별말없이 넘어가주는 게 후배님의 좋은 점이다.

 

  “기껏 준비한건데 버리긴 아깝잖아? 열심히 노력한 거니까, 최대한 실현시키고 싶어. 유키노가 실현 불가능한 제안을 꺼냈을 리도 없고.”

  “하치만······.”

  “문화제도 있으니 당장은 어렵겠지. 그래도 분명 이 기획이 빛을 볼 날이 올 거야. 친구 좋은 게 뭐냐 이런 데 써먹는거지. 잇시키도 하타노도 기쁜 마음으로 도와줄 테고.”

  “선배에게 듣는 건 기분 나쁘지만,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네요. 그렇게 하세요, 유키노 선배.”

 

  당사자까지 한 목소리로 거들자 유키노도 도리가 없었다. 

 

  “고마워······.”

  

  서류철을 가슴에 꼭 껴안은 유키노가 대답했다. 

  감동적인 광경에 뒷말은 필요없겠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팔려버린 하타노도 기쁜 마음으로 응원할 것이다. 부디 이 사실을 평생 모르기를 바란다.

 

  “슬슬 돌아갈까?”

  

 불을 끈 뒤 회의실을 나왔다. 푸르렀던 하늘은 저녁 노을로 물들고 있었지만 학교는 아직 떠들썩했다. 여기저기 들어온 불빛에서 새어나오는 활기참이 초가을의 하늘과 좋은 대구를 이루었다.

 

  “벌써부터 야근에 적응시키는 건가, 이 나라의 미래도 밝구만.”

  “보통은 청춘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우리는 아니겠지.”

  “부정할 수가 없네요······.”

 

  속세에 찌든 만담을 나누는데 뒤에서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렸다. 문단속을 마친 유키노가 합류하자, 우리는 함께 그림자가 드리워진 복도를 걸어나갔다.

 

  계단이 보일 무렵 유키노가 말을 꺼냈다.

 

  “잇시키 양,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니? 체육관을 둘러보고 싶은데.”
  “아, 네. 물론이죠.”

 

  체육관이라, 그러고보니 배치표에는 간단한 구조도도 첨부하게 되어 있었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두사람인만큼 일종의 리허설까지 겸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선배는요?”
  “사물함에 들렀다 돌아가야지.”

  “그럼, 여기서 작별이구나. 수고 많았어.”

  “수고는 무슨. 너희들이야말로 고생했지.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라.”

  “우와, 엄마 하치만(ははちまん) 나왔다.”

  “시끄러. 아무튼 난 간다.”

 

  또 이상한 별명이 생겨버렸어······. 아빠에 이어 엄마라니 자웅동체냐고.

  쿡쿡 미소지은 잇시키는 고갯짓을 한 뒤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이 반쯤 사라질 만큼 멀어졌지만 웬일인지 일행은 움직이지 않았다. 뭘 하는가 싶어 곁눈질하자, 유키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붉게 물든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더니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짤막하게 내뱉었다.

 

  “······내일 보자, 핫 짱.”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수줍은 듯 배시시 미소지은 유키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채 도망치듯 달려가 버렸다. 그러나 눈처럼 투명한 목소리는 주인이 떠난 뒤에도 메아리처럼 뇌리를 울렸다.

 

  “······응. 내일 보자, 유키 짱.”

 

  들을 수 없는,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한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마음속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중력을 거스르고 있는 두 발은 신기하리만치 경쾌했다.

 

  익숙한 복도에 들어서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이전 세대와 달리 아무리 문화제라 해도 밤을 새며 준비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밤이 되기까지가 타임 리미트, 꺼지기 직전에 활활 타오르는 촛불처럼 어느 반이든 흥겨운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F반도 그 중 하나였다.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나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빼꼼히 문을 열고 틈새로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풀밭에서 서로 조금 떨어져 앉는 거야. 나는 너를 곁눈질하기만 할 거고, 너도 아무런 말을 하면 안 돼. 말은 오해의 근원이니까.”

 

  어린 왕자와 여우는 그렇게 대화를 거듭한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길들여나간다.

  그럼에도 끝내 이별이 찾아온다.

  마지막으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준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토츠카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에 관객석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어린 왕자······. 나는 네 웃음소리가 좋아······.”

 

  하야마의 대사에는 환호성이 터졌다. 절호조에 이른 관객석과 달리 극의 흐름을 클라이맥스에 치닫는다.

 

  “네 곁을 떠나지 않겠어······.”

 

  마침내 찾아온 이별의 순간. 울적한 배경음이 깔리며 무대가 암전된다.

  한 줄기 스프라이트가 비추었을 때 하야마는 혼자였다.

  「나」의 독백이 흐르는 동안 왠지 모를 고양감에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면 내게 찾아왔을 지도 모를 미래를 눈 앞에 들이미는 느낌이었다. 

 

  그 탓에 문에서 떨어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엇.”

  “아.”

 

  문틈 사이로 노을 빛이 반사되는가 싶더니 익숙한 금색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우리는 거울을 마주본 듯이 동시에 굳어버렸다.

 

  “······오랜만이네, 누나.”

  “······집에서 매일 보면서 뭘.”

  “그도 그런가······. 지금 돌아가는 거야?”

  “아니, 아직. 오늘 연습도 끝났구, 음료수라도 사올까 싶어서······.”

 

  그 말을 끝으로 나도 누나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이곳만이 조용했다. 이따금 어색하게 머리를 꼬는 손짓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있잖아, 사실······.”

  “그렇지 참, 하야토에게 들었어. 우리 연극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건 하치만 덕분이라며?”
  “어?”

 

  이런, 못 들었나? 하긴 주변도 시끄럽고, 너무 작게 말하긴 했다. 

 

  “나 혼자 한 건 아냐. 유키노나 잇시키, 그 밖에도 여러 사람이 도와준 덕분이지. 히라츠카 선생님도 가능한만큼 감싸주셨고.”

  “······역시 그랬구나.”

 

  역시? 

 

  유미코는 고개를 돌려 교실 안을 바라보았다.. 

  메이크업팀은 누가 하야마의 화장을 지울지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구석에 앉은 의상팀은 조용한 편이었다. 연극이 중단된 며칠 동안 제작과정도 멈췄는지 사키는 의상 도안을 끌어안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특유의 험상궂은 표정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응. 이 풍경도 너희가 만든거구. 유키노도 힘냈을 테니까.”

  “······누나?”

  “히나도 감사하고 있어. 물론 나아도. 고마워, 하치만. 이것저것 전부 다.”

 

  이쪽을 향하는 듯 했던 얼굴이 마치 사과를 하는 것처럼 숙여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말문이 막힌 내게 누나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만 음료수 사러 가 볼게. 다들 집에 가야하구, 서둘러야 해서.”

  “으응, ······알았어. 수고해.”

  “······그럼.”

 

  잰걸음으로 멀어지는 유미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연극 대본을 말아쥔 에비나 양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동생 군, 할로할로~. 지금 돌아가는 거야?”

  “그렇네요. 한창 바쁠 시기라서.” 

  “수고했어. 이미 많이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고마워.”

  “별말씀을. 불합리한 사회에 저항해봤을 뿐입니다. 하야마가 말 안 해주던가요?”
  “안 했어, 안 했어. 교실에서 말하긴 그렇잖아? 그런 방식을 원했던 건 아니니까.”

 

  너스레를 떨며 뒷문 바로 앞 좌석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아마도 싸늘하게 식어있을 테지. 

 

  “의외네요. 저라면 이런 좋은 기회는 놓치지 않았을 텐데. 복수 하고 싶지 않나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한순간 에비나 양의 손이 손톱을 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잠시, 먼지를 털듯이 쓸어내렸다.

 

  “그런 방식을 원하는 건 아니잖아? 나도, 히키가야 군도.”

 

  구태여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무의식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곳은 누나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문가에서 떨어진 에비나 양도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동생 군, 역시 연극 해 보지 않을래?”

  “거절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저를 높게 사는지 모르겠네요. 배우는 이미 충분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히키가야 군에게는 재능이 있거든. 그게 좀······, 아까워서 말이야.”

 

  도대체 뭐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애써 눌러삼켰다. 그럼에도 에비나 양은 물은 적 없는 질문에 멋대로 답을 달았다.

  

  “연기라면 전문가잖아?”

 

  역시, 이 사람은 좀 거북하다.



  xxx  

 

  어둠 속에서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의미를 지닌 말들일 테지만 한데 모이면 무의미한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천지가 새카만 어둠에 파묻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있으면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질 단상조차도 지금은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칠흑같은 밤하늘에서도 별빛은 존재한다.

  그 빛에 닿기를 기도하며, 나는 통신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개막 3분 전. 개막 3분 전.”

  

  몇 초 안 되어 귀에 낀 이어폰에서 지지직 잡음이 새어나왔다.

 

  「유키노시타입니다. 각 팀원에게 전달합니다.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보고해주세요.」 

 

  차분한 음성이 지시를 마치자 뚝 하고 통신이 두절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잇달아 잡음이 흘러나왔다.

 

  「조명, 이상 없음.」

  「음향, 문제 없어요!」

  「대기실, 출연자들의 준비가 약간 지연되었습니다. 그래도 공연 시작 전까지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각처에서 흘러나온 정보는 사령탑인 유키노에게로 통합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큐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각자 맡은 곳에서 대기하세요.」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기다릴 뿐.

  정확히 10초를 남기고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10, 9, 8, 7ㅡ.」

 

  문화제 개막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 이 중요한 역할을 어째서인지 실행 위원회의 동료들은 나에게 맡겼다. 아빠에게서 빌려온 아날로그 손목시계 덕에 시간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6,5,4,3,ㅡ.」

 

  그러나 받은 신뢰에는 보답하는 것이 히키가야 가의 철칙.

  확실하게 전해지도록 신중을 기해 토해냈다.

 

  「2.」

 

  마지막은 없다. 이 영광은 모두가 누려야 마땅하니까.

  지금 모두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하나가 있다. 

  다음 순간, 현기증이 날 만큼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너희들, 문화하고 있나~!”

  “우오오오오오!”

 

  무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로메구리 선배의 말에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울려 퍼지는 댄스 뮤직. 일사불란하게 바뀌는 조명 속에, 오프닝 공연이 시작되었다.

 

  「음향실이에요. 이제 곧 노래가 끝납니다.」

 

  잇시키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어는 없어도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는 안다. 이중에 짬이 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알았다. 위원장은 준비 부탁 드립니다.”

 

  분명 제대로 송신되었을 텐데 이상하게 답이 없었다.

 

  “위원장? 어디 있습니까?”

 

  연달아 불러보아도 묵묵부답. 불길한 상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여기서? 지금?

 

  “······유키노시타.”

  “어머. 왜 그러니, 히키가야?”

  그제야 잡음섞인 유키노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폰이 아닌, 바로 뒤에서.

  객석과 무대 사이의 어둠 속에서 쪼그리고 앉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유키 짱의 눈높이는 똑같았다.

 

  “뭐야, 여기 있었어?”

  “응.”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안 들렸던 거야?”
  “그랬니? 미안해, 위원장이라길래 다른 사람을 부르는 줄 알았어.”

  “너 알면서 그러는 거지? 지금은 네가 위원장 대리잖아. 일일이 부르기엔 길어서 줄여 부른 것 뿐이라고.”

  “임의로 줄여 부르는 방식은 오해를 부를 수 있어. 앞으로는 주의해서, 똑바로 부르도록 하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스피커와 객석의 함성, 사방에서 터지는 형형색색의 조명 아래에서도, 유키노의 존재감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히죽히죽 즐거운 듯한 얼굴도 나를 놀리는 목소리도 뚜렷이 전해져왔다.

  

  잠시나마,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부부장, 부위원장, 부부만담은 마이크 끄고 해주시겠어요?」

 

  하타노 이 바보가······. 그런 말을 이어폰으로 하면 어떡해! 물론 우리 쪽이 훨씬 잘못했지만!

  유키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유키노, 너 설마 통신 버튼 누르고 있었어?”

  “······당신도 마찬가지잖니.”

 

  입가에 갖다댄 검지손가락으로 침묵을 요구한 뒤, 목을 가다듬었다.

 

  “······실례. 이후의 스케줄에 변동은 없습니다. 다들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마지막 통신이 끝난 뒤 유키노는 헤드셋을 벗었다. 양손에 꼬옥 움켜쥐고는, 세운 무릎 위에 얼굴을 묻는다.

 

  “실수했어. 긴장을 풀면 안 되는 거였는데······.”



  풀죽은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그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불행히도 이쪽도 기다려줄 시간이 없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유키 짱.”

  

  빼꼼히 고개를 든 유키노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물든 상태였다.

 

  “기운 내. 그나마 아는 사람들밖에 못 들었으니 다행인 거지. 우리가 이런 게 어디 하루이틀이야?”

  

  실제로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을 때의 우리는 꽤 자주 둘만의 세계에 빠지곤 했다. 유키노의 집에 방문할 때 유이가하마를 데려간 것도 반쯤은 그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서였다. 둘이서 대화했다가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반드시 폭주하리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오해는 나중에 풀자. 아니다. 이쪽이 신경쓸 게 뭐 있어. 멋대로 착각하라고 놔 두면 되는거지. 우리는 우리대로,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는 거야. 그게 우리다운 거니까.”

  “응. 알고 있어. 핫 짱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고개를 끄더인 유키노가 얼굴을 슥슥 비비더니, 손에 쥔 헤드셋을 내게 넘겨주었다.

 

  “위원장 인사 다녀올게. 그때까지 맡아 줘.”

  “알았어. 힘내. 긴장하지 말고.”

  “핫 짱.”  

 

  비어버린 손은 떠나지 않고, 내 남은 손을 꼬옥 붙잡았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유키노 누나라구. 이 정도는 간단해.”

 

  짐짓 나무라는 듯한 어조, 그것은 마치 소꿉놀이와도 같아 변함없는 순수함을 드러낸다. 손을 놓은 유키노는 망설임없이 뒤돌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빛 속에서 다시 나타났을 때는 천진난만함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언뜻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타인 앞에서 보여주는 당당한 모습에 비해, 이따금 드러내는 장난기는 옥의 티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어느쪽이든 나이에 맞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성숙함도 순수성도 모두 유키노가 걸어온 삶이 투영된 결과였다. 

 

  전체이자 일부이며, 동시에 진실.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본모습이다.

  나는 그런 유키노 정말로 좋았다.

 

  

  xxx

 

  수천,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별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행복할 것이다.

 

- 어린 왕자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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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와 그녀의 행복을 세 명의 부장이 응원한다.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은 복잡했다.

  어지러이 쌓인 문화제용 비품들, 개중에는 잡동사니를 넘어 무단투기된 쓰레기처럼 보이는 봉투도 적지 않았다. 애저녁에 채워진 층계참 너머 판자며 천막같은 자재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계단은 공사가 중단된 철거현장을 연상케 했다.

 

  그래도 사람이 지나갈 만한 틈새는 존재했다. 

  아니, 만들었다가 정답일까?

  짐승이 지나간 듯 흐트러진 길 끝에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저번에 올라왔을 때 봤던 여분의 책걸상이다. 다만 그 형태는 예전과 달랐다. 반듯하게 쌓여있던 책상은 무너졌고 올려져 있던 의자는 먼지 속을 나뒹굴었다.

 

  용케 부서진 물건은 없는 걸 보니 그 와중에도 이성은 챙긴 모양이다.

 

  문을 열자 높은 하늘이 펼쳐졌다. 고층 특유의 바람이 밀폐된 통로를 향해 밀려들었다. 맞바람 속을 나아가며 계단을 올라오느라 새어나온 땀을 식혔다. 

  

  흔히 하늘과 바다는 똑같이 푸르다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푸름에서 시작해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하얀색에 가까워지는 하늘과 달리, 펼쳐진 바다는 그 깊이만큼 짙었다. 개인적으로는 푸른색보다 군청색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름 같은 건 시각의 차이일 뿐이니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두 푸른색 모두 확고한 개성을 가졌기에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배경으로 삼기에 더할나위 없는 풍경이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끝없이 펼쳐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기준점이 되어줄 존재다. 서로 다른 푸른색 사이에 서 있어도 그 본질을 유지하며, 뒤섞이지 않을만큼 강렬한 개성을 가진 청색.

 

  언제나 이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던 카와사키 사키가 보이지 않았다.

 

  “사 짱?”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뒤돌아섰다. 방금 열었던 문이 이 옥상의 유일한 출입구다. 그 옆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급수탑에 도달한다. 항상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감을 유지해오던 사 짱은 아직도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거기 있지?”

  대답은 없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다. 분명 사 짱은 저기에 있다.

  가족과 혈연, 그 특유의 존재감을 누구보다 잘 느끼는 내가, 사 짱의 생각을 못 읽을 리 없어.

 

  “올라간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다리를 잡았다.

 

  “여.”

 

  뒤돌아 눕거나 최소한 딴청이라도 피울거라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뜨거웠는지 사 짱은 급수탑에 등을 기댄채 앉아 있었다. 새초롬한 눈초리가 따갑다.

  

  “안녕.”

  “······.”

 

  머리만 빼꼼 내밀어 인사했지만 사 짱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대화를 거부하는 낌새는 아니었다. 사 짱은 세상 일에 관심이 약할 뿐 다가오는 사람을 내치는 성격은 못 된다. 아마도 문 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라는 것을 짐작했겠지. 올라오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저 길다란 머리가 나부끼는 걸 놓칠 리도 없다.

 

  붙잡지도, 그러나 내치지도 않는 내 친구.

  한결같은 마음에 감사를 표하며 사다리를 마저 올랐다.

 

  “선크림은 발랐니?”
  “뭐어?”

 

  아차 싶은 표정인 걸 보니 무심코 나온 반응이었나 보다. 경솔한 입을 손으로 가리지만 이미 늦었다. 선택은 좋았지만 묵언시위는 네게 어울리지 않아. 그런 성격도 아니잖아?

 

  “옥상에서 자려면 점심 시간은 피했어야지. 정오는 해가 중천에 떠 있어 그늘이 생기지 않거든. 시간대를 잘못 골랐네.”  

 

  너스레를 떨자 사 짱은 반쯤 뜬 눈으로 노려보며 되받아쳤다.

 

  “바보 아냐? 그렇다고 수업 시간에 여기 올 수는 없잖아. 나보고 땡땡이를 치란 말이야?”
  “거기까진 말 안 했어. 뭣하면 장소를 바꾼다는 선택지도 있고.”

  “됐네요.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아니, 달리 없지.”

 

  마음껏 소리지르기엔 옥상만한 곳이 없긴 하지. 낮의 소리는 위로 향하니까. 태양이 지상을 달굴 때 발생된 지열이 대기와 함께 소리도 굴절시켜 버린다. 낮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밤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이야기다. 

  온 학교에 퍼질만한 소음은 아니어도, 이 주변을 지나던 사람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적어도 바로 아랫층까지 퍼진 건 확실했다. 위치상 가깝다는 이유로 자질구레한 짐들을 쌓아놓은 1학년들이 아무도 얼씬 거리지 않았으니까.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중앙 통로를 올라가는 나를 숨죽여 지켜보던데, 숫제 마왕성을 향해 나아가는 용사를 보는 듯한 동정어린 시선이었다.

 

  “아니면 뭐야? 잔소리라도 하러 온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시치미 떼네.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모를 리 없잖아.”

  “알면 좀 살살하지 그랬어. 사 짱의 발은 흉기야. 기물 파손은 징계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안 부쉈잖아.”

  “그건 그렇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교실을 뛰쳐나간 사 짱을 뒤쫓지 않았더라면 나도 눈치채지 못한 채 넘어갔을 것이다.

 

  물론 눈치채도 넘어갈 거지만.

 

  “자.”

  “응? 엇, 잠시만······!”

 

  다급한 말과는 달리 빈틈없는 손놀림이었다. 내가 던진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낸 사 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폈다.

 

  “······뭐야 이건?”

  “네 점심. 아직 안 먹었잖아?”

  삼각김밥이나 초코소라빵을 사는 건 하수다. 사 짱에게 던져준 건 카스테라와 롤케익, 차가 담긴 페트병이었다. 스위츠는 비닐에 담았다간 모양이 망가질 만큼 부드럽기에 종이나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이중포장을 한다. 일회용품 과다 사용은 경계해야 하지만, 지금은 묵인하기로 하자. 저게 아니었더라면 사 짱의 악력을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

 

  “이건 간식이잖아.”
  “같은 탄수화물이야.”

  “······너 진짜 바보지?”
  “이제 알았어?”

 

  피식 웃어보인 다음 사 짱에게 다가갔다.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에 쥔 맥캔을 땄다. 하늘에 펼쳐진 구름을 쳐다보며 목을 축였다.

 

  느긋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미안.”

 

  불쑥 내밀어진 말에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앞만 바라보며 바람소리에 흘려보냈다. 침묵은 무시가 아니라 상대의 말을 들었다는 증표다. 어렵사리 꺼냈을 친구의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친구와의 대화에 상투적인 리액션은 필요없으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대등한 관계로서 함께 있는 거니까.

  따사로운 햇살 속 평범한 그림자 두 개가 같은 길이로 늘어졌다.

 

  “상황은 어때?”

 

  차를 한 모금 마신 사 짱이 대답했다.

 

  “늘 그렇지 뭐. 회의만 계속할 뿐 딱히 이거다 싶은 대안이 나오질 않아.”

  “원체 까다로운 조건이잖냐. 그럴 만도 하지. 의욕을 잃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거야. 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다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글쎄, 헛돌기만 할 지도 모른다만.”

  “적어도 무력감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것보단 낫겠지.”

 

  사 짱이 숨을 들이키더니 그 소리를 감추듯 페트병을 움켜쥔다.

 

  “의외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래?”

  “응.”

 

  이번엔 내가 커피를 들이킨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사 짱이 입을 열었다.

 

  “유키 짱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었어.

  “거짓말.”

  “진짜로. 없어서 문제지만.”

  “아, 그 쪽인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려주기에 편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사 짱이 고개를 젓더니, 대뜸 핵심을 찔러왔다.

 

  “네가 봤을 땐 뭐가 문제라고 생각해?”

  “일차적인 원인은 학부모회에 있겠지. 하지만 고작해야 외부인이잖아. 학교 전체가 단합해서 강하게 밀고나가면 무시 못할 것도 없어. 그러니 진짜 원흉은 사가미······.”

  “핫 짱.”

 

  이런, 역린을 건드렸나? 방금 전까지 타오르다 간신히 사그라든 화에 불을 붙여버린 건지도. 사가미의 이름은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쪽이 아니야.”

 

  그러나 예상과 달리 평온한 얼굴에선 어떤 노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
  “학급 회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물어본 건 너. 너희들에 대해서야.”

  “야야, 학급회의 같은 거라니······, 하야마가 들으면 울겠다. 그 녀석 엄청 분투하고 있던데.”

  “그건 더더욱 관심없어.”

 

  ‘그 녀석’도 아니고 ‘그거’냐. 사 짱 진짜 가차없네. 그게 사 짱 답긴 하지만.

 

  대화가 엇갈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조금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설마하니 위로하러 와서 위로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사 짱을 걱정했듯 사 짱 또한 나를 걱정해 준다. 자신의 일에는 무신경한 주제에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성격, 그런 뒤틀린 우리들이기에 사이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와 유키노시타의 문제, 인가······.”

  “유키 짱이겠지.”

  “네네.”

 

  선선히 수긍하자 사 짱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우리끼리 있을 땐 거리감을 두지 말라는 의미다. 거짓을 말해도 용납하지 않고, 둘러대도 눈치챌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애칭은 그런 의미였다.

 

  “유키 짱이 나를 의지해 주지 않네.”

 

  입에 담자, 놀랍도록 솔직한 진심이 따라나왔다.

  일견 바보 같아 보이지만, 내게 있어선 중요하고, 또 복잡한 문제임이 틀림없······.

 

  “바보 아냐?”

  “······엥?”

 

  ······었건만, 단 칼에 부정하는 사 짱.

  심지어 반쯤 마신 페트병을 휘둘러 한 대 때리기까지 했다. 

 

  “아얏! 왜 때려!”

  “답답해서 그런다. 또 예전처럼 썩어빠진 눈을 하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시덥잖은 일로 끙끙 앓고 있었니?”

  “시, 시덥잖······. 뭐야, 그게! 이 쪽은 심각한데!”

  “조용히 해.”

  “악!”

 

  페트병까지 장착한 사 짱의 팔에 세 걸음 정도의 거리는 소용없었다. 길다란 리치를 무기로 퍽퍽 내질러 오는 연격. 휘두르는 리듬에 맞춰 페트병 안에 든 녹차가 절묘하게 찰랑거렸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쥔 채 거리를 벌렸다. 눈물을 글썽이며 노려보았지만 사 짱은 상쾌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그만 해, 진짜 아프다고. 사 짱이 휘두르면 둔기 수준이라니까? 이제는 애도 아니잖아······.”

 

  하물며 격투기까지 배웠으니 오죽하랴. 보통 도장에서 관원을 가르칠 때 타인에게 주먹 휘두르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나? 설마 타인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논리? 그러고 보니 예전에 사 짱이 자기가 때리는 건 나뿐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 애가 아니지. 너도, 나도.”

  “······응?”

 

  팔을 걷어내자 시선을 내리깐 사 짱의 얼굴이 보였다. 손 안에 거머쥔 페트병을 만지작거리던 사 짱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쳤다. 고개를 든 사 짱은 동생을 바라볼 때 향하는 따스한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유키 짱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다만 그 음성만큼은 엄격했다.

 

  “나도 다 컸다, 내 일은 나 스스로 할 수 있다, 옆에서 지켜봐 줘야 하는 어린이가 아니니,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아도 된다, 아마 그런 뜻이겠지. 유키 짱이 너를 의지하지 않을 이유는 그것밖에 없어.”

 

  들고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사 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툭툭 치마를 털던 손이 문득 이쪽으로 뻗어온다.

 

  방금 전 아픔이 생각나 반사적으로 피하자, 팔을 거둔 사 짱이 씨익 미소지었다.

 

  “봐, 너도 싫지?”

  “다, 당연히 싫지! 애초에······!”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사 짱이 한 발 빨랐다.

 

  “유키 짱도 그렇지 않을까? 쓰다듬는 건 동생에게나 하는 거잖아. 물론 내가 기억하기로 네가 유키 짱의 머리를 쓰다듬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야.”

 

  예상하지 못한 말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번에 말했지? 너는 은근히 사람을 동생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어? ······내가?”

  “벌써 까먹었단 말야? 연극 일을 떠맡게 된게 누구 때문인데?”

  “······아, 그거 말이구나.”

  “나참, 언제적이라고 기억을 못 해. 그거 말고 뭐가 있다고······.”

 

  그게 말이지, 사 짱. 실은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거든.

 

  남의 취향을 제멋대로 단정짓고, 연하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어왔던 그녀.

  자신을 좋아하니까 연하를 좋아하는 거라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귀납논증을 무모할 정도로 들이밀었던 내 사촌.

  어째서 넘어가 버린 걸까. 보통은 반대 아냐?

  잘못된 논리란 것쯤, 그 때도 알고 있었으면서······.

 

  “······최악이네, 나.”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크흠 헛기침을 한 사 짱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너무 자책하지 마. 너를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

  “사 짱······.”

  “실수할 수도 있는거지 뭐. 너나 유키 짱이나 5년 만에 만난 거잖냐. 너와 나, 우리 모두 그 시절의 거리감밖에 몰라.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은 커졌으니, 이런저런 곳에서 엇나가는 건 당연한 거야.”

 

  격려를 토해내던 입술이 멈추더니 두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느샌가 빨개진 볼을 긁던 사 짱이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뭐, 나도 종종 옛날처럼 너를 대하곤 하니까. 조금 심하게 때린다는 자각은 있어. 그, 미안······.”

  “알면 좀 참아주라. 진짜 아프다고.”

  “뭐, 뭐야! 사람이 기껏 사과했더니!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남들 앞에서 덥석덥석 손 잡던 게 누군데!”

  “그래그래, 나도 미안해.”

 

  분이 풀리지 않는 지 한동안 씩씩 거리던 사 짱은 고개를 홱 돌린 채 주저앉았다. 바로 옆, 몸을 기울이면 어깨가 닿을만큼 가까운 곳에.

 

  “화난 거 아니였어?”

  “화났거든?”

  “그렇구나, 용서해주는 거구나.”

  “화났다니까? 내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응. 확실히 들었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그제야 내 친구는 나를 돌아보았다. 다시금 시선이 마주치자, 어설픈 가면은 벗겨진다. 나와 사 짱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말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너 좋을대로 하면 되지.”

  “생각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말야······. 그랬다간 유키 짱이 화낼지도 몰라서.”

 

  뒷말을 꺼낸 순간 사 짱의 눈동자가 번뜩이는게 느껴졌지만, 그 섬광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시선을 거둔 사 짱은 고개를 돌려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너 좋을대로 해.”

  “그래도 되겠어?”
  “바보 아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곧 정답인걸.”

  “그치만······.”

 

  이미 한 번 그르쳤는걸.

  유키노에게도 사키에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내 잘못된 선택으로 큰 상처를 입혀 버렸다.

  그런 나에게 다시금 무엇을 선택할 권리가 있을까?

  아직, 지나간 과거에도 책임을 다 하지 못한 나에게?

 

  “나는 널 믿어.”

  “······어?”

 

  고개를 들자, 언제나 그랬듯 나를 향하는 따스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나는 널 믿어. 너는 절대로, 절대로 유키 짱에게 나쁜 짓을 할 사람이 못 돼. 설령 네가 상처입더라도 말이야. 알아주지 않아도, 네 봉사가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너는 유키 짱만 좋으면 그만이잖아? 그런 너라면 믿을 수 있어.”

  “······하지만 실패했잖아. 그렇지 않아?”

  “실패? 어째서?”

  “어째서냐니······. 내 독단 때문에 망쳐버렸는걸. 유키 짱만이 아니야. 너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고 말았어.”

  “아, 그건 그랬지.”

  “그래,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툭, 머리카락이 눌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자, 이마 위에 얹혀진 페트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찻물을 투과한 태양빛이 눈 앞에서 넘실거렸다.

 

  “그 이야긴 이걸로 끝내자.”

  “······뭐?”

  “이제와서 떠올린 건데 말야, 나도 그 때 화가 많이 났었거든. 만나면 한 대 쯤 때려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여태까지 까먹고 있었어. 이건 그 한 방.”

 

  뭐야, 대체. 지금껏 수도없이 때렸으면서, 이것보다 더 세게 떄렸던 적도 많았으면서.

  이제와서 그런 빚쟁이같은 말을 해 봤자, 아플리가 없잖아.

  그래, 아플리가 없어, 분명 그럴텐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반 이상의 내용물이 빠져버린 페트병은, 본연의 질량 이상의 무게로 내 머리를 내리눌렀다.

 

  “누구라도 어렸을 땐 실수를 해. 돌이켜 보면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바보같은 짓을 저지르기도 하지. 중요한 건 그 실수를 잊지 않는 거야. 네가 저지른 일, 그 때 했던 생각을 잊지 마. 잘 기억하고, 곱씹어서, 앞으로의 행동에 참고하는 거야. 네가 바라봐야 할 ‘현재’는 아직도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 짱······.”

  “화 좀 내면 어때? 친구끼리 싸울 수도 있는 거지. 어떤 관계든 마찬가지야. 제아무리 잉꼬부부라라도 살면서 한 번도 안 싸울 수는 없어. 그게 사람이냐, 로봇이지.”

  “······사 짱은 항상 말이 하나 많아.”

 

  토라진 척 고개를 젖혀 페트병을 떨쳐냈다. 눌린 머리칼을 정리하는 척 하며 눈가를 닦아낸다. 한 두마디쯤 놀릴 거라 생각했지만, 사 짱은 짐짓 눈치채지 못한 척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이제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돼. 우리들 중에 너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경멸했다면 지금처럼 지내지도 못 했겠지. ······뭐,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지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안다. 아까 전 사 짱이 ‘너희들’에 대한 이야기라며 운을 뗐을 때, 나는 무심코 이 애매하기 짝이없는 대명사를 ‘나와 유키노시타’ 두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한정했다. 같은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범위를 좁힌 셈이었다.

 

  지레짐작이 틀렸음을, 사 짱도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음을 도중이 되서야 깨달았다.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잘못된 인식은 언제부터 무의식 깊은 곳까지 침투한 걸까?

 

  “그러니까, 지금은 눈앞에 일에나 집중하도록 해. 괜히 다른 사람 신경 쓰다 중요한 일을 그르치지 말고. 한 번 더 그랬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그 땐 진짜 절교야.”

  “응, 명심할게. 사 짱도 힘내. 성질은 좀 죽이고.”

  “어쩔 수 없었어. 하루종일 그 녀석 얼굴이 보이는데 화가 안 나고 배겨?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나 스스로를 억누를 수 없게 될 거야.”

 

  우와, 이 무슨 중2병같은 대사야······? 그래도 실제로 강한 사람이 저 말을 입에 담으니 현실감이 장난이 아니다.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사가미는 단숨에 옥상 통로에 널부러진 의자 신세가 되었겠지. 

 

  “그러니까, 그, 뭐냐······.”

  “응?”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단정한 얼굴이 정면을 향한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의아해 그 시선을 따라갔다. 특별할 것 없는 치바의 풍경을 나란히 바라보는데 사 짱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 때도, 지금도. 네 덕분에 참을 수 있어.”

 

  작게 새어나온 목소리는 우렁찬 기합처럼 바뀌었다.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사 짱은, 멋쩍은 듯, 하지만 뿌듯한 듯 배시시 웃었다. 긍정도 부정도 필요없다는 듯 마치 손사래를 치는 것처럼 미소지었다.

 

  “나야말로 고맙지.”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렸다는 핑계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확실히 말했다. 솔직한 감사에 내 친구는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받아주었다.

 

  한껏 저물어간 9월 하늘에, 시원한 바람이 섞여들었다.



  xxx

 

  “그래도 오늘은 좀 쉬어 둬.”

 

  단촐한 식사가 끝난 뒤 사 짱은 남은 포장지를 모아 차곡차곡 접었다. 솜씨좋게 만든 쪽지 두개를 봉투에 담고 통째로 압축한다. 마지막 한 모금의 차를 홀짝인 사 짱이 문득 그런 말을 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쉬라니, 해야할 일에 집중하라고 하지 않았어?”

  “맞긴 한데, 지금 네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

  “얼굴?”
  “거울 좀 봐. 완전히 작년까지의 그 눈이잖아. 몇 대 때리면 돌아올까 싶었는데.”

  “사 짱은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가전제품도 아니고······. 그러고보니 유이가하마도 똑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도 지금처럼 한 대 맞고 대화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이런, 나 울어도 되나?

 

  “그렇지 않았단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란 거겠지. 하기사, 쉽게 풀릴 문제였으면 애시당초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 자신을 몰아붙이란 말은 아냐. 상황에 휘둘려 극단으로 치닫다 보면, 결국 또 바보같은 짓을 되풀이할 테니까. 그게 실수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건······, 맞는 말이군.”

  “그렇지? 그러니까 오늘은 머리 좀 식히는 게 어때? 체력이 있어야 뭐라도 하지.”

 

  생각이 지나쳐 아무것도 행동하지 못 하면 다가오는 태풍에 휩쓸리고 만다. 그 때의 나도 그랬다.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를 스스로 좁혔을 때 아름다웠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났다. 사 짱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망설여진다. 쉬는 건 좋다.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선 이따금 재충전의 시간도 필요하니까. 다만 한 사람이 쉬는 동안 그 부담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유키노시타가 과로하게 된 원인도, 한계에 다다랐음에도 일거리를 놓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도망치는 거나 다름없는,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인 방관이, 고민 끝에 내린 잘못된 선택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선택해야 전부 지켜낼 수 있을까?

 

  “그렇다구요!”

 

  어두운 머릿속에 서광이 비쳤다. 밝은 목소리가 심연 속에 가라앉던 의식을 끄집어낸다.

 

  “저도 카와사키 선배의 말에 동감이에요. 최근 선배의 눈은 엄청 징그럽다니까요?”

  “잇시키?”

 

  목소리는 급수탑에서 몇 걸음 떨어진 돌출부에서 들려왔다. 바닥으로부터 뻗어나온 금속 봉이 아치 모양으로 휘어진 곳, 두 기둥 사이의 좁은 공간에 잇시키 이로하의 황갈색 머리카락은 마치 두더지 잡기의 두더지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왜 여기에······.”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문 여는 소리는 듣지 못 했는데 내가 안 닫았던가? 방금 전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겠지? 남에게 들려줄만큼 자랑스러운 과거사도 아니라고, 하치만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려~!

 

  “큰 소리가 나길래 올라와 봤어요. 1학년 교실이 바로 아랫층이거든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지만 잇시키의 표정에서 미심쩍은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하기사 옥상은 바람 소리도 심하니까 이상할 건 없나. 불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녀석 성격에 방금 전 대화를 듣고도 그냥 넘어갈 리 없고······, 분명 놀려먹었을 테지.

  

  꿈지럭대며 자세를 고치던 잇시키가 상체를 들어올렸다. 돌출부 턱을 짚은 팔로 한쪽 뺨을 괘어, 책상에 엎드린 채 수다를 떠는 여고생 모드에 돌입한다.

 

  “카와사키 선배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응. 부실에서 만난 이후 처음인가?”

  “맞아요~. 아, 그 봉투! 식사 중이셨군요~! 여기서 드실 거라면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바로 달려왔을 텐데.”

  “아니, 나는 네 반을 모르니까.”

  “에에엥? 선배는 알잖아요. 카와사키 선배한테 말 안 해 주신 거에요? 진짜 못쓰겠다니까~.”

 

  천진난만하게 웃는 잇시키에게 사 짱이 맞장구를 쳤다.

 

  “얘가 좀 그렇긴 하지. 눈치가 빠른 녀석이구나? 맘에 들었어.”

  “그야 당연하죠! 선배에 대한 일은 1학년 중에선 제가 제일 전문가니까요!”

  “뭔데 그 이상한 전공은?”

  “한 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란 것쯤, 한 두시간 정도만 붙어 있으면 누구라도 알 거에요.”

  “푸훕, 맞네! 제대로된 전문가야!!”

  

  첫 만남 때도 묘하게 죽이 잘 맞던 두 사람은(그 결과도 폭력이었던 기분이 들지만 일단 넘어가자) 두 번째에도 여전했다. 오래간만의 재회일텐데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사키이로, 의외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농담이고, 아마 상성이 잘 맞았다는 거겠지. 평소의 잇시키는 깜찍발랄한 여고생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의외의 호탕함과 솔직함을 보여주곤 한다. 안심하고 속내를 드러내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똑같은 솔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겉치레가 없는 사 짱은 최고의 언니(맏이)였다.

 

  그래, 그건 좋은데······.

 

  “너희들은 나를 까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니?”
  “그치만, 원래 모르는 사람끼리 대화할 때는 공통된 관심사부터 찾아나가는 거라구요! 마침 그게 선배였을 뿐이죠~.”

  “그 하나뿐인 관심사가 왜 이렇게 부정적인데?”
  “그야, 선배니까? 그쵸, 카와사키 선배?”

  “그렇지. 어릴 때부터 자주 있던 일인데 뭘 이제와서.”

  “자각은 있었구나······.”

 

  어이없다는 양 째려본 뒤 내용물도 없는 맥캔을 입에 댔다. 순순히 항복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잇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재개했다.

 

  “혹시 저 눈빛도 어릴 때부터 그대로였나요?”

  “처음부터 저랬던 건 아니야. 쪼끄마할 때는 제법 봐줄만 했거든. 그럭저럭 인기도 많았고.”

  “에이, 설마요~. 상상이 안 가는데? 소꿉친구라고 두둔하는 건 아니죠?”

  “진짜야. 내가 뭣 땜에 얘를 추켜세워 주겠니? 이 녀석 주변을 봐. 미 짱과 유키 짱······ 흠흠, 유미코도 유키노도 미인이잖니? 이래봬도 혈통만은 타고난 애거든.”

 

  거기까지 말했으면 이미 늦은 거야, 사 짱.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부를 때는 쑥스럽다는 인식은 있구나. 이 경우에는 후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그 애완동물을 설명하는 듯한 말투는 뭐니? 내가 무슨 카마쿠라야?

 

  이 위화감을 잇시키도 알아주길 바랬지만, 교양있는 후배님은 전혀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가족분들도 모두 미인이라 하셨죠?”

  “응. 하루노도 코마치도 미인이지. 아, 코마치는 잘 모르려나? 하치만의······.”

  “여동생분?”

  “맞아. 잘 아네?”

  “에이~, 저번에 부실에서 유이 선배가 말씀하셨잖아요~. 기억하고 있었죠.”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 아직 어리다보니 미인이라기보다 귀여운 이미지지만.”

  “호오호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선배랑 많이 닮았나요?”

 

  진정하자. 같은 공간에 있을 뿐 나는 이 대화에 관심이 없는 거야. 자연스럽게 기척을 숨긴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스텔스 힛키다.

 

  “얘랑? 흐음~.”

 

  또 하나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무시한다.  

  진정해, 마음을 다잡아, 하치만. 여기서 괜히 끼어들었다간 먹잇감이 될 뿐이다. 마음이 평온하면 폭풍우 속에서도 잘 수 있는 법.

  ······사, 살짝만 들어볼까?

  그치만! 코마치의 일인걸! 오빠로서 듣고 싶은걸!

 

  “그야, 당연히 닮았지.”

 

  아싸!!!!! 역시 사 짱은 사람 보는 눈이 확실하다니까! 내 친구다워! 최고야!

  ······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대놓고 기뻐하면 기분 나쁘겠지?. 무심, 무심. 흥분을 가라앉히자. 

 

  “눈이 썩기 전에는 딱 남자 코마치였어.”

  “호오호오.”

 

  표정관리~, 표정관리~.

  

  “성격도 닮았었나요?”

  “글쎄, 코마치가 막내였으니 입장이 달랐다고나 할까. 이 녀석이 천상 오빠 속성이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어.”

  “아, 그건 알 것 같아요. 저도 종종 여동생 취급 당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거든요.”

  “······하?”

  “······엥?”

  “······너한테도 그랬어?”

  “네, 네······. 그런, 데요?”

  

  표정관리! 표정관리!

  뺨에 꽂히는 시선이 아파!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기세라구! 

  삐질삐질 흐르는 땀은 결코 햇살 때문이 아니었지만 닦을 수는 없었다. 사 짱이 한 숨을 쉬자 축축한 목덜미에 메마른 바람 한 줄기가 스쳤다.

 

  “사, 사 짱, 그, 그게······.”

  “어휴,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어느새 후배에게까지······.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이 녀석은 나중에라도 한 대 쥐어박을 테니까.”

  “저, 저는 괜찮아요! 딱히 기분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구요?!”

  

  옆에서 쏘아지는 시선에 가슴에 쓰라렸고,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위안 받는다. 사다리 옆에 자리잡은 탓에 포지션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끼여버렸기 때문이다. 축 쳐진 분위기에 당황스러워하던 잇시키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구조신호를 보내왔다.

 

  “선배는 잘못한 게 없어요. 제가 미숙했을 뿐이니까.”

  

  손잡이를 꼬옥 붙잡고 고개숙인다.

 

  “부장이면서도 선배에게 기댔거든요. 제가 해야할 일도 똑바로 못 해서 늦은 시간까지 선배를 붙잡아두고는 했죠. 선배의 눈이 저렇게 된 건 제 책임이 커요. 1학년이라는 핑계로 어리광을 부리기나 했고, 이런 못 미더운 후배를 상사로 대하는 게 무리인 거죠.”

 

  짙은 그림자는 종종 어른스러운 것으로 착각되곤 한다. 담담히 미소짓는 잇시키의 얼굴도 성숙하다고 부를 수 있을만큼 차분한 모습이었다. 물론 거기에 서린 감정은 그런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장은 커녕 정체다. 자칫 퇴보하기까지 한다.

  잘 해 보려 애써도 번번히 막히는 현실의 벽 앞에,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무너지는 자아自我.

  썩었다며, 징그럽다며 놀려대던 잇시키도 어느새 같은 눈이 되어간다.

   

  “꼴사납죠? 이래서야 정말로 부장 실격이네요.”
  “아니, 넌 부장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두지는 않겠다.

 

  “늦은 시간까지 붙잡아 뒀다고? 아니지, 잇시키. 같이 일한 거야.”

  “선배······.”

  “부장이라고 해서 모든 일을 혼자서 짊어질 필요는 없잖아? 원래부터 함께 했어야할 일을 분담했을 뿐이야. 그러는 너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고? 내 눈이 썩은 게 수면부족 때문이라니, 잇시키 양도 거울을 좀 보는게 좋겠어.”

 

  잇시키가 고개를 들자 가늘게 휜 눈이 일렁거렸다.

 

  “우와, 그게 여자에게 할 말이에요?”

  “부장의 실수를 바로잡는게 부하의 역할이니까.”

  “역시 부부장은 다르네요.”

  “그만해라. 그렇게 부르는 건 하타노밖에 없다고.”

  “어떨까요~.”

 

  뭐, 지금 활동하고 있는 부원도 우리 세 사람 뿐이고, 하타노도 1학년이니까. 잇시키의 부재시 대리인을 맡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부부장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저도 힘내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그래,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됐어.”

  

  말해봐야 들을 녀석도 아니다. 맘대로 하라고 손사래를 치자 잇시키는 고개를 수그린채 몸을 들썩였다. 일견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손은 여전히 사다리를 붙잡은 상태.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을 어깨에 비비고는, 고개를 든다.

 

  “그럼, 오늘의 부장 명령입니다! 선배는 방과 후에 곧장 집으로 귀가하세요. 절대 출석하시면 안 돼요!”

  “엥? 뜬금없이 무슨······.”
  “명령이에요. 부・장・명・령♡”

 

  환한 미소에서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까딱이며 통통 발을 구르는 잇시키는 언제나와 같은 짖굿은 얼굴을 내게 향했다.

  ······아뿔싸, 침울해 보인 것도 연기였던 거야? 이로하스 무서운 아이!

 

  “집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안 가면 위원회 업무는 어떻게 할 건데?”

  “엄밀히 말하면 ‘저희’ 부서 업무는 끝났죠. 문화제 당일까지는 한가하다고 말한 건 선배 아니였나요?”

  “아니, 분명 말했지만······.”

  “어라아~, 이상하다~? 저희 부서는 부장의 명령이 절대적이었을텐데요? 지금 선배의 부장은 누구일까요? ”

  “그, 그건······.”

 

  큰일이다. 완전히 외통수에 몰리고 말았다. 유키노시타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지만 한가하다고 말한 것도 나고, 번번이 부장 명령에 기댄 것도 나였다. 잇시키를 방패삼는 걸 넘어 어떤 의미로는 이용해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핑계를 남발해온 대가가 이것인가, 지금의 내게 있어 부장 명령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설마 딴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무작정 들이닥친 뒤 버틴다던지~ 그런 뻔뻔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어떻게 그걸······, 핫?!”

  “분명히 말씀드리는데요. 만에 하나라도 진짜 오시면, 그 때는······.”

  “그, 그 때는······?”
  “제 직위를 선배에게 양도할 겁니다. 부원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부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기록 잡무부 일도 대강 끝냈으니, 선배에게 떠넘긴 뒤 축구부로 돌아갈 거에요.”

  “이, 잇시키 씨······?!”

 

  어쩐지 주변의 온도가 내려간 느낌인데······? 아, 아하, 여기가 옥상이기 때문이구나? 높은 곳일수록 기온이 낮아지고, 바람도 많이 부니까······. 그럴 리가 있냐!

 

  “농담이에요. 아,직,은, 말이죠~.”

 

  귀여운 얼굴이지만, 가늘게 휜 눈꺼풀은 싸늘한 눈동자를 숨기지 않았다. 만약 내가 잇시키의 명령을 무시하고 실행 위원회에 얼굴을 비친다면, 방금 내건 공약을 진짜로 저지를 기세였다. 

 

  “아, 알았어. 오늘은 쉴게······.”

 

  꼬리를 내리자 잇시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확실히 휴식을 취하세요. 내일도 그런 눈으로 오시면 안 돼요?”

  “아니, 눈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냐.”

  “부장 명령입니다!”

  “억지야······.”

 

  얘 좀 봐, 아무리 부장 명령이 절대적이라지만, 아무데나 갖다 붙인다고 되는 줄 아니? 조만간 날씨까지 바꿀 기세잖아. 네가 맑음 소녀냐고······.

 

  “그렇게 됐으니, 카와사키 선배님?”

  “맡겨 둬. 책임지고 돌려보낼 테니까.”

  “알아주시는군요? 믿음직스러워라~. 역시 선배의 소꿉친구!”

  “순순히 돌아갈 녀석이 아니거든. 내버려 뒀다간 온갖 핑계를 대서라도 남으려 하겠지. 은근히 고집이 강한 녀석이니까.”

  “보나마나 뻔하죠. 문화제 준비에 할당된 시간까지는 방과 후가 아니라느니, 학급 행사를 돕는 건 실행 위원회랑은 무관하니 괜찮다느니 하면서 괜한 일을 떠맡으려 할 게 분명하니까요. 카와사키 선배가 있으니 안심이 되네요!”

 

  퇴로 봉쇄. 영악한 후배와 소꿉친구가 이쪽의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다. 빠져나갈 길 하나 없는 완벽한 포위망이 구축되었다.

 

  그나저나 이 두 사람, 언제부터 눈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된 걸까? 대화의 매개체로 쓰이는 게 주로 나에 대한 불평인 것이 아쉬웠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나쁜 기분도 아니었다.

 

  친구에게 또 다른 친구가 생기는 것, 좋아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지인이 생기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꿈꿔왔던 일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바보같은 장난에도 웃을 수 있는 사이.

  서로가 서로를 대등히 여기기에 유치한 투닥임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관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선배, 왠지 기분 나빠요. 뭐에요 그 눈, 설마 오지 말랬다고 삐지기라도 한 거에요? 일 중독자?”

  “시끄러워. 사축따위 될까보냐. 오랜만에 쉬려니 뭘 해야 할 지 막막해서 그런다.”

  “그거야말로 사축같은 발언인데요······.”

  “컷흠, 신경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보다······,”

 

  운을 떼자 잇시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이제보니 두더지 잡기보다 다른게 생각나는걸. 그 왜, 모 유명 배관공씨가 나오는 게임에서, 토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이빨 달린 꽃 있잖아. 본인 앞에선 죽어도 말 못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네? 뭐가요?”

 

  아차~, 자각이 없었던 거군요. 이로하스 의외로 강해~.

 

  “뭐냐니, 너 지금 사다리에 매달려 있잖아. 팔 안 아픈가 해서.”

  “아하~, 이거 말씀이셨군요.”

  “혹시 어색해서 그러는 거면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사 짱도 딱히 방해라고는 생각 안 하니까.”

  “생각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요,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막상 올라와보니 정리하는 분위기구, 선배들 식사도 끝나신 것 같았거든요. 타이밍이 애매해서 그만.”

  “너야말로 너무 생각했잖아. 점심은 먹었어?”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럼 이야기라도 하면 되지. 다음부터는 물어보지 말고 올라와. 다음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친절도 하셔라~, 그래도 떠드는 사이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 버렸구, 지금은 선배님들이 내려와야 할 것 같은데요?”

  

  불쑥 내민 휴대폰을 들여다보자 과연 잇시키의 말대로였다. 짧은 휴식은 끝을 고하고 일상에 복귀할 시간이 되었다.

 

  “그렇네. 우리도 갈까?”

  “응.”

  “잠깐 기다려주세요, 비켜 드릴테니~.”

 

  금속을 울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잇시키의 몸도 한 칸씩 내려갔다. 세미롱 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 짱을 뒤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힘 내, 사 짱. 이 다음에 영화라도 보러 가자.”

  “웬 영화? 볼 만한 거라도 있어?”

  “글쎄? 나도 몰라.”

  “야······.”

  “뭐라도 나오겠지. 사 짱이 좋은 걸로 하나 골라 놔. 내가 쏠 테니까.”

  “됐네요. 거기까지 얻어먹을 생각은 없어. 그래도 뭐, 괜찮네. 시간 내 볼게.”

 

  수락은 받아냈다. 남은 건 눈앞에 닥친 현재의 문제다. 모든 것이 끝난 뒤 기분 좋게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테인리스 기둥을 잡고 내려간다. 걱정되도 위는 쳐다보지 않는 게 예의다. 사 짱은 옛날부터 이런 데 무심했으니까. 치마를 입고도 거리낌없이 다리를 놀려대는 친구를 둔 이상, 이쪽에서 조심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보다도,

 

  “······왜 그렇게 쳐다 봐?”

  히죽히죽 웃고 계신 후배님이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아뇨, 익숙하다고나 할까, 배려심이 있구나 싶어서.”

  “배려는 무슨, 당연한 거지. 너는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딱히 나쁘게 보는 건 아니에요. 정확히는 판단할 수 없다가 정답이겠죠. 만난 지 얼마되지 않은 터라 선배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서, 그만 보편적인 남자 고등학생의 이미지를 대입해 버렸거든요.”

 

  이런 종류의 선언을 들을 기회는 좀처럼 없다. 상대를 잘 모른다는 것은 친하지 않다는 것과 같으니까. 거리감을 느끼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게 인간관계에 무슨 득이 있으랴.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리얼충들의 이야기.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매달리고, 친구 목록을 늘리는 일에 열중하고, 곁에 있는 사람을 재단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감정이 이성을 앞서는 바보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이다.

 

  외톨이에겐 외톨이만의 기준이 있다.

  

  “타당하구만. 인간은 결국 자기가 본 것들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뭐에요, 갑자기 멋있는 척하구. 기분 나쁜데요.”

  “안심해라, 나도 기분 나빠. 이로하스토커 양이 오늘도 날 쫓아왔다는 사실에.”

  “뭐, 뭐라구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딱히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뜻은 아니다. 감정이 옅다는 건 자존감이 없다는 것과 같다. 화내야 할 때 화내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단지 외톨이가 된 대가로 얻어낸 능력이랄까, 말의 이면을 읽어내는 게 버릇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마주칠 때는 언제나 이로하스 양이 나를 기다리거나 쫓아오지 않았어? 마치 지금처럼 말이야. 이게 스토커가 아니면 뭔데?”

  “아, 아니, 그건······. 소리! 그렇지, 소리에요! 큰 소리가 나서 올라와 봤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인간 관찰에 근거한 행동 예측은, 외톨이가 두 번째로 잘하는 거라고?

 

  “그치만 이로하스는 반에서 밥을 먹지 않잖아?”

  “그러니까, 의미 모를 별명은 그만두······, 네?”

  “친구 없는 외톨이에게 있어 점심시간만큼 괴로운 때도 없거든. 쳐다보는 시선은 기분 나쁘지, 분위기 흐리는 것 같아 신경 쓰이지, 그렇다고 다른 반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지만, 다시 끄집어내긴 껄끄러운 주제다. 당연히 대비책도 준비해 뒀다. 눈에 띄게 침울해진 잇시키를 향해 과장스레 팔을 뻗었다.

 

  “소스는 나.”

  “······에?”

 

  코앞까지 다가온 손에 놀란 잇시키가 한 걸음 물러섰다. 주의를 돌리는 데 성공했으니, 흐름을 가져오는 일만 남았다.

 

  “소부고에 입학한 이래 가장 처음 한 일이 뭔지 아니? 사람이 다니지 않는 장소를 물색해두는 일이었단다? 외톨이의 기본에 충실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잘 써먹고 있다고. 안타깝네.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네게도 이것저것 전수해줄 수 있었을 텐데.”

 

  굳게 쥔 주먹으로 가슴팍을 친다. 작지 않은 통증을 대가로, 과장스러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사 짱이 내려올 때까지 어색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바닥을 짚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잇시키는 초점없는 눈동자를 꿈뻑꿈뻑 깜빡이며 멍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다.

 

  “얘는 또 왜 이래?”

 

  사 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그보다 왜 이렇게 늦었어, 사 짱?”

  “너 내려가는 동안 검색 좀 했거든. 이거 어때? 다음 달에 개봉한다는데?”

  “괜찮은걸? 이 작품 벌써 극장판이 나오는구나. 하긴 인기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만.”

  “그럼, 결정이네.”

 

  고개를 끄덕인 사 짱이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웃고있는 잇시키를 미심쩍게 바라보더니 반대쪽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든다.

 

  “자, 여기. 웃는 건 좋지만, 땀은 좀 닦도록 해.”

  “죄송해요, 카와사키 선배······.”

  “사키로 괜찮아. 매번 길게 부르는 것도 귀찮을 테고.”

  “정말로요?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앞머리를 들추고 이마를 두드리는 잇시키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대체 얼마나 웃은 거야? 그보다 웃을만한 포인트가 있었나? 사 짱도 궁금한 눈치였다.

 

  “헌데 뭐가 그렇게 웃겼어?”
  “그게 말이죠, 사키 선배~.”

 

  어라, 잇시키 양? 그 얼굴은 뭐죠?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를 보는 듯한 얼굴이잖아요. 여고생이 하면 안 되는 표정을 짓고 있다구?

 

  “또 여동생 취급 당했거든요~! 그것도 모자라 후배 취급까지! 자기가 외톨이인걸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 뭘 뻔뻔하게 말하는 거에요? 진짜 웃겨!”

 

  묘하게 뒤섞인 서순이었지만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충분했다. 사 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뭐어? 하치만, 너 또······.”

 

  같은 옥상이기 때문인지 사 짱의 모습은 지난 봄에 마주쳤을 때와 겹쳐 보였다.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긋지긋하다는 듯 노려보는게 다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정말로 때릴 기세라는 것과, 다행인지 불행인지 말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부진 팔을 붙잡은 잇시키가 달콤한 목소리로 사 짱을 달랬다.

 

  “에헤이~. 참아요, 사키 선배!”

 

  병 주고 약 주기냐. 애초에 네가 괜한 말을 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힘껏 노려보자 잇시키는 멋쩍은 듯이 혀를 내밀더니 흠흠 헛기침을 했다.

 

  “과연, 이제야 납득이 가네요. 저렇게 뻔뻔해서야 여자가 꼬일 만도 하죠.”

  “넌 또 무슨 소리야······.”

  “그렇지? 유키 짱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음 꽤나 피곤했을 거야.”

  “여자들의 눈치 싸움이란 피곤하니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사람을 빗대고 있었다. 

  그 녀석의 잘못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쌓인 업보가 많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리얼충은 좀 더, 주변의 시선을 신경써 줬으면 싶은데.

 

  “그래도 폭력은 삼가해 주세요. 여기는 학교니까, 조금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에요.”

  “······하?”

  마음을 읽힌 듯한 착각에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선배님들은 모르시겠지만 지금 요 아래는 난리도 아니에요. 두 분에 대해서 온갖 소문이 퍼지고 있는걸요?”
  “소문?”

  “네! 가장 분분했던 의견은 치정싸움과 결투였어요. 웃음 참느라 혼나는 줄 알았다니까요? 저야 뭐 눈이 썩었다는 말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았지만요~.”

 

  기분좋은 듯 콧소리를 높이던 잇시키가 손가락으로 옥상 출입구를 가리켰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저 문고리가 고장난 건 사키 선배와는 무관한 일이죠?”

  “나, 나는 아무짓도 안 했어! 입학했을 때부터 부숴져 있었다고······.”

  “과연. 하지만 소문은 그렇지 않거든요. 특히나 오늘같은 일이 지속되면 더더욱 악화될지도 몰라요. 조금은 조심하자구요? 한 번 씌워진 이미지는 떨쳐내기 힘드니까요. 저희같은 외톨이들은 더더욱.”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레 말했지만, 진지한 조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하니 이 녀석에게 걱정받을 줄이야.

  

  짐짓 나무라는 척 사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네, 사 짱.”

  “······미안, 반성하고 있어.”

 

  순순한 사과란 걸 알았는지 잇시키도 위로를 건넸다.

 

  “힘 내세요. 어차피 뒤에서 수근거리기나 하지 별 거 있겠어요? 아는 사이도 아닌데 무시하면 그만이죠~.”

  “그래그래, 사 짱이 제일 잘 하는 거잖아. 뭣 하면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고.”

  “핫 짱은 나중에 나 좀 보자.”

  “아니 왜 나만, 말을 꺼낸 건 잇시키인데······!”

  “네네, 거기까지! 친구싸움은 나중에 하세요. 저까지 말려드는 건 사양이니까요!”

 

  중재자처럼 끼어든 잇시키가 나와 사 짱의 어깨를 툭 쳤다. 동작이 멈추는 걸 확인하고는 빙글 몸을 돌린다. 출입구까지 걸음을 옮긴 잇시키가 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저희 셋이 같이 내려갔다간 무슨 오해를 살 지 모르니까요~.”

  “본인만 피해가겠단 거잖아. 약삭빠르네, 약삭빨라.”

  “호호, 무슨 말씀은. 그럼 다음에 뵈어요~.”

  “그래, 잘 가라.”

 

  닫혀가는 문이 바람을 빨아들인 탓에 잇시키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놀라운데.”

 

  인기척이 멀어져가자 사 짱이 입을 열었다.

 

  “제법 닮았잖아. 핫 짱의 친구인 이유를 알 것 같아.”

 

  동감이다.

  언제나 내가 구사했던 자학드립을 다른 사람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하물며 잇시키라니. 하필이라고 해야 할까?

 

  “조만간 애칭으로 불러야 할 지도 모르겠는걸.”

  “그건 좀 참아주라.”

 

  저 녀석 이름은 어떻게 줄여야 할지 난감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나도 늦었단 거겠지.

  약삭빠르면서도 귀엽고 짓궂으면서도 속이 깊다. 그렇기에 미워할 수 없고, 오히려 좋기까지 하다.

  가히 세계 제일의 후배라고 부를 만한 잇시키 앞에서,

  장남이자 장녀인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도 간단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xxx

 

  오늘도 회의는 계속된다.

  다만 전날에 비해서는 한산한 편이었다. 벌써부터 이탈자가 발생했나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학급 행사가 재조정 단계에 들어간 지금 머릿수가 많을 필요는 없다. 회의 진행이라고해봐야 필요 인원은 소수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연극 배우를 포함한 실무진들이 실업자가 된 셈이다. 개중에는 부활동에 소속된 사람도 적지 않을테니 이를 기회삼아 시간을 준 거겠지. 실제로 듬성듬성 생겨난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특유의 상쾌한 미소를 풀파워로 전개한 미남, 하야마 하야토였다.

 

  딱히 주도적으로 논제를 이끌어나간 것은 아니다. 하야마는 의장석에 선 반장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단상 아래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언뜻 보면 제시된 의견에 추임새나 넣는 들러리로 보일 정도다.

 

  당연하다. 그거야말로 하야마의 노림수니까.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뽑아내기 위해 마음놓고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최대 다수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기 위해선, 그만큼 창의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유이가하마는 쏟아지는 의견들을 꼼꼼이 기록하느라 분투중이었고, 유미코는 때때로 불거지는 갈등을 능숙하게 와해시켰다.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황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한 줄기 희망을 잡으려 발버둥친다.

  끼어들 틈은 없겠군. 문제는 시간인가. 너무 늦지 않으면 좋으련만.

 

  책가방을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른 돌아가라는 듯이 쏘아보는 사 짱의 눈총이 따갑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준 뒤 교실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문 바로 앞자리는 비어있었지만, 가방은 걸린 채였다.

  아, 그래, 사가미도 있었지 참.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군. 왜일까나~. 아까부터 계속 하야마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급우들은 모두 교탁을 바라보고 있어, 이쪽을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사가미의 가방을 빼돌려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간 정말로 실행에 옮길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런 짓을 해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둬. 앙갚음을 하는건 자기만족일 뿐이야. 그런 걸로 유키노시타는 기뻐하지 않아.

  그 작은 가슴을 찢어놓았던 치졸한 짓을 네가 해서 어쩌자는 거야?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다. 어쩌면 사가미는 이미 업보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란히 서 있지만 함께할 수 없는 관계, 확연히 그어진 선을 넘어 발을 디딜 수 없음을 애써 부정하는 걸지도 모르지. 교탁 앞에서 과장스럽게 떠들며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그 모습은, 말없이 바쁜 손을 놀리는 유이가하보다도 초라해 보였다.

 

  당연하지. 유이가하마가 누구 친구인데. 어느모로 보나 비교대상이 되지 못 한다. 

 

  의미없는 자기위안을 곱씹으면서, 이번에야말로 교실을 나섰다.



  xxx

 

  자 그럼 어디로 가야할까?

  기세 좋게 나선, 아니 떠밀린 건 좋지만, 막상 이 시간에 나와도 할 일이 없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퇴근이라니 이래도 되는 걸까? 나도 사축이 다 됐다니까.

 

  “오, 하치만. 오늘은 빨리 가는구나.”

  “그러게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죠.”

 

  정문을 서있는 경비원이 인사를 건네왔기에 가볍게 목례했다. 이 또한 얼마전부터 자연스러워진 일과다. 일, 일, 그리고 일.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머지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남아있던 탓에 회의실 단골 멤버들의 이름은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전 교직원들에게 기억되었다. 유키노시타야 원래부터 유명했지만 나머지는 어떨런지. 고교 생활의 1/3을 스파이 뺨치는 은둔생활로 보내온 스텔스 힛키도 이제는 은퇴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잘 생각했다. 사람이 일만 해서는 쓰나. 그것도 아직 어린 학생들인데. 푹 쉬고 멀쩡한 눈으로 보자.”

  “하하하, 수고하세요······.”

 

  또 눈 이야기인가. 원래 이런 말은 친구들이 해줬었는데······. 역시 좀 어색하다. 

  해가 지지 않았는데 교문을 나서는게 어색하다.

  잇시키와 하타노가 곁에 없는 것이 어색하다.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사 짱과 유이가하마와 웃을 수 없는 것이 어색하다.

 

  무엇보다도, 내 사촌과 누이, 유키노나 유미코와는 오늘도 한 번도 대화하지 못했음에도,

  그것을 어색하게 느끼지 않는,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체념해 버린 내가 제일 어색하다.

 

  신호는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교차로를 지나 저마다의 행선지로 달려간다. 자전거를 세우고 고개를 들자 익숙한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이제리아. 

 

  여기도 추억이 많았지. 죽어라 일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일거리를 싸든 채 여기 오곤 했다. 처음 이 얘기를 꺼냈을 때 잇시키의 반응이 굉장했었지. 센스 없다는 둥, 왜 하필 사이제냐는 둥 투덜거렸는데, 사이제가 어때서? 하타노는 만족스러워 했다고?

 

  오랜 시간 죽치고 앉기 위해 드링크바 이용은 필수. 짧은 식사가 끝나면 곧장 서류를 펼쳐 눌러앉았다. 이른바 자의적 추가근무라는 것이다. 반대파였던 잇시키조차 지금은 눈감고도 메뉴판을 암기할 정도가 되었다. 적응이란 무서운 것이로고.

 

  일상이 된 추과근무에, 가족보다 직장 동료와 더 자주 밥을 먹는 생활. 완전히 부모님이잖아. 어느모로 보나 훌륭한 사축이다.

 

  그나저나 배고프네······. 이것도 일종의 조건 반사일까? 생각해 보니 점심도 빵 하나에 커피 하나였고, 당분이 떨어질 타이밍이긴 했다. 휴대폰을 열어 짤막한 문자를 송신했다.

 

  「저녁 먹고 갈게.」

  「알았어. 유키노 언니랑 힘내!」

 

  신속한 답장에 쓴웃음이 나왔다. 코마치는 내 늦은 귀가가 유키노시타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 착각하는 모양이다. 항상 밤늦게 돌아오던 오빠가 언니보다 빨리 오면, 사실은 유키노시타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상상만해도 두려워 몸이 떨렸다.

 

  역시, 얌전히 집에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가끔은 사이제리아의 맛을 느긋하게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이제~ 최고~(最強사이쿄오) 사이 사이쿄오~. 이거 CM송으로 등록해 주지 않으려나?

  어설픈 자작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맞은편 보도에 서 있는 인물에 눈에 들어왔다. 저쪽도 마찬가지인지 손을 흔든다.

 

  “하치만!”

  “사이······ 응?”

 

  내, 내가 말한 사이는 저 분이 아니었는데?

 

  소부 고등학교 체육복 위에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목에는 푹신한 머플러를 두른 토츠카 사이카였다.

  

  신호가 바뀌자, 좌우를 살피고는 이쪽으로 뛰어온다. 땀을 뺐는지 번들거리는 은발이 평소보다 밝아 보였다. 소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손가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안녕, 하치만!”

  “어어, 안녕······.”

 

  이건 또 새롭구만. 평소라면 작별 인사를 나눴을 타이밍인데. 각자의 부활동 탓에 수업을 마친 뒤면 만날 일이 없는 우리들이다. 시내에서 마주친 건 처음이라 색다른 긴장감이 솟아올랐다.

 

  “웬일이야? 오늘은······.”

 

   회의가 있을텐데라고 말하려던 찰나, 종례가 끝난 직후 교실에서 토츠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온 물건에 시선이 꽂혔다. 

  책가방을 걸친 어깨 맞은편에서 균형을 맞추듯 고쳐멘 그것은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보았던 테니스 가방이었다.

 

  “교습이구나.”

 

  그러고 보니 토츠카는 부활동 외에 테니스 스쿨도 다니고 있었지.

  연극이 중단됨에 따라 주연배우였던 토츠카도 다소의 여유가 생겼지만, 그것은 F반의 사정이다. 다른 반은 한창 문화제 준비에 열을 올릴 시기니만큼 테니스부의 출석률도 저조했겠지. 혼자서라도 연습하려는 거구나. 모처럼의 휴가에 쉬고 싶을만도 하건만, 실로 성실한 부장님이다.

 

  하기야, 그런 열정이 있었으니 봉사부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을 테지만.

 

  “맞아. 테니스 스쿨에 가는 길이거든. 잘 아네?”

  “누나 덕분에 말이지.”

 

  한 번 꽂힌 일에는 끝을 모르고 타오르는 유미코에게 격한 스포츠는 상성이 좋았다. 중학교 시절 현 대회에까지 선발된 원동력도 초등학교 시절을 거치며 쌓아올린 실력이었다. 

 

  때때로 옮겨주곤 했던 가방, 그 안에 들어 있었던 라켓도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하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힘차게 팔을 휘두르며 미소짓는 누나는, 내 어린 시절의 몇 없는 긍정적인 추억이다.

 

 그런 유미코가 도와준 것은 동아리를 되살리고자 했던 토츠카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하치만의 폼이 익숙하다고 생각했어. 확실히 유미코 양의 실력은 대단했었지. 어렸을 때 같이 배웠던 거야?”
  “아니, 테니스 스쿨에 다녔던 건 누나와 유키노시타. 나는 그저 따라다니며 몇 번 쳐본 게 다야. 나와 그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토츠카도 알잖아? 그 시합 때도 유키노시타의 체력이 떨어지기 전까진 공 근처에도 못 갔고.”

 

  심판으로 참관했으니만큼 가장 객관적인 시야로 경기를 지켜보았을 터. 유키노와 유미코 두 사람이 보여준 움직임은 토츠카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의 광경을 떠올렸는지 토츠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는 고마웠어. 지금의 테니스부가 있는 것도 그 시합 덕분이야.”

  “과한 칭찬이야. 우리가 한 거라곤 단발성 이벤트에 불과해. 입부 희망자가 늘어났다 한들 테니스부 자체에 매력이 없으면 말짱 꽝이지. 부원들이 유지된 건 토츠카의 힘이라고.”

  “하치만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래도 신세진 건 사실이니까! 봉사부에도 안부 전해줬으면 해.”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

  

 “그러고 보니 하치만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집에 가는 길?”

  “어, 어······. 그렇다만.”

  “그렇구나. 오늘은 좀 이르네. 드문 일인걸?”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 말은 이상하잖아. 고등학생은 원래 이 시간에 하교한다만.”

  “하하하, 그건 그렇지. 앗, 혹시 내가 붙잡아 둔 걸까? 그렇다면 미안한데······.”

  “아냐아냐, 붙잡기는. 밥이라도 먹을까 둘러보고 있던 참이야.”

  “그래? 그럼 같이 먹지 않을래?”
  “뭐, 괜찮겠······ 엥?”

 

  자연스런 합석 권유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토츠카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적극적인 구석이 있군요? 평범한 여고생이라면 데이트 신청으로 착각했을 레벨. 누이들로 인해 다져진 여자(?) 내성이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안 될까?”

 

  치켜뜨기 금지! 머플러로 입 가리기 반칙!

 

  “아, 안 될 거야 없지만, 테니스 스쿨은 어쩌고?”

  “식사 정도는 괜찮아. 늦게까지 열거든.”

  “그, 그래? 토츠카가 괜찮다면야······.”

  “다행이다. 그럼 어디로 갈까?”

  “사이제는······, 아니다. 둘이서 가긴 좀 그렇지? 걸으면서 둘러볼까?”

  “응? 왜? 사이제 맛있잖아. 나는 상관없는데.”

 

  무의식적으로 불끈 주먹을 쥐었다. 봤느냐, 잇시키. 토츠카도 인정했다고. 사이제는 맛있는 곳이야! 호불호를 비율로 따졌을 때 현재 스코어는 3:1, 아니 4:0에 가깝다. 1, 2학년 비율을 따져도 2:2니 그야말로 학년을 초월한 대통합을 이룬 셈이다.

 

  “그, 그래? 그럼 들어가볼까?”

  “응!”

 

  사이카와 함께하는 사이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xxx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안내받자마자 무한리필 드링크 바를 2인분 주문했다. 초이스는 언제나 먹던 마이 세트, 밀라노풍 도리아에 버팔로 윙, 알리오 올리오 한 접시. 딱히 식사 버프가 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스태미나는 확실히 오른다.

 

  참고로 토츠카는 시금치 파스타와 셰프 샐러드를 주문했다. 매번 느끼는거지만 299엔(부가세 포함) 짜리 샐러드에 ‘셰프’라는 이름은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은데······. 물론 가장 과한 건 토마토지만 말이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의아했는지, 능숙한 솜씨로 드레싱을 하던 토츠카가 소스통을 내려놓았다.

 

  “응? 왜 그래, 하치만?”

  

  솔직히 별 생각이 없다고나 할까, 잠시 혼자만의 세계에 갔었다는 게 정답이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 싶어 느낀 점을 그대로 말했다.

 

  “의외로 소식파구나 싶어서.

  

  토츠카의 도시락은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야채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운동부인데 고기가 땡기지 않는 걸까? 땀으로 손실된 염분을 보충하고 싶을만도 한데 말이야.

 

  “그래? 내게는 이 정도가 적당한데.”

  멋쩍게 웃은 토츠카가 포크를 들더니 파스타를 콕콕 찔렀다. 

 

  “예전부터 입이 짧다는 말은 많이 들었거든. 역시, 남자애가 이러는 건 좀 이상할까?”
  

  접시 속을 응시하던 토츠카가 넌지시 물어왔다. 면발을 둘둘 감아대는 움직임이 공연히 어색해 보였다.

 

  “이상할 게 뭐 있어. 체질이란 건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

 

  체질 뿐만이 아니다. 성격도 취향도, 사고방식도 모두 다르다. 피를 나눈 쌍둥이조차 다른 점이 있고, 똑같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의외의 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치면 나야말로 문제지. 편식은 심하지, 이 나이 먹고 토마토도 못 먹지, 라멘은 또 얼마나 자주 먹는데? 모르긴 몰라도 혈당도 위험한 수준일걸? 자랑은 아니지만 가끔 물보다 맥스 커피를 자주 마시는 날도 있을 정도니까.”

  “그, 그 정도야?”

  “어엉. 이것 때문에 어린 시절 유키노시타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데. 그래도 누나에 비하면 나았어. 그쪽은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날아왔거든. 그런데도 못 고쳤잖아? 토츠카는 평범한 편인 거야.”

 

  엣헴 가슴을 펴자 토츠카가 피식 웃었다. 

 

  “뭔가, 부러운걸.”

  “부러워? 뭐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부끄러운듯이 뺨을 붉힌다.

 

  “무엇인가를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거.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즐거웠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거. 하치만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나에게? 혹시 누나와 유키노시타를 말하는 거야?”

  “응. 옛날 이야기를 하는 하치만은 무척 즐거워 보이거든. 유키노시타 양이나 유미코 양 이야기를 할 땐 언제나 웃고 있어. 테니스 시합 때의 세 사람도 그랬는걸.”

 

  그럴 리가. 테니스 시합 당시 내가 품고 있던 감정은 토츠카의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테니스복을 입은 유미코와 유키노, 반대편 네트에 서 있던 하야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휩쓸려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그저 연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외동이라 테니스를 같이 할 사람이 없었거든. 가끔은 형제 있는 사람이 부럽기도 해. 나도 누나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모르는 소리. 그런 건 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일 뿐이야. 누나란 남동생을 골려먹을 생각밖에 안 하는 몹쓸 생물이라고.”

  “아하하, 남매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슬프지만 사실이야.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정해져버린 상하관계가 한평생 자신을 옭아맨다. 자연스럽게 놀림받는 건 기본에 조금만 심기를 거슬려도 응징이 날아오고, 각종 잔심부름도 떠맡긴다. 불합리한 대우에도 묵묵히 참는 것이 남동생으로 태어난 자의 숙명인 것이다.

 

  참고로 여동생이라고 다를 건 없다. 오빠 취급이나 해주면 다행이다. 오히려 틈만 나면 자신이 누나인 것처럼 구는 여동생도 있다. 결코 특정 인물을 지칭할 의도는 아니지만, 코마치가 아니라는 것만은 밝혀두겠다.

 

  그러니까 분명, 그 둘도 다를 건 없었을 텐데······.

  즐거워 보였다고? 내가? 유키노와 유미코가?

  토츠카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튀김옷을 포크로 찍자 끈적한 기름이 배어나왔다. 입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데 토츠카가 별안간 손뼉을 쳤다.

 

  “그렇지, 전해줄 물건이 있었는데.”

  “전해줄 물건?”

 

  나란히 세워둔 가방에 손을 뻗은 토츠카가 한 권의 책을 꺼내 이쪽으로 내밀었다.

 

  “늦게 돌려줘서 미안해. 완전히 잊고 있었어.”

  

  어린 왕자.

  연기 경험이 없는 토츠카를 위해 일전에 빌려주었던 책이다. 손에 쥐자 퍼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도 깜빡했으니 신경쓰지 마. 잘 읽는 책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원작도 동화의 분위기가 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특히나 어린이용에 가까운 판본이다. 문체가 쉬운데다 두께가 얇아 내가 어렸을 당시에는 입문용 도서로 추천되곤 했었다.  한 손에 쏘옥 들어오는 크기도 어린 시절엔 컸을 테지. 너덜너덜해 질때가지 읽었던 책에는 과거의 자신이 묻힌 손때가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팔랑팔랑 휘날리는 종이들 속에 익숙한 활자가 보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 몽롱한, 그러나 분명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기묘한 법칙성이 존재했다.

 

  “이건······?”

 

  하단에 적힌 페이지 번호를 둘러싼 동그라미가,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남기고 간 빵조각처럼 다섯 페이지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 그건 나도 신경 쓰였어. 책을 받았을 때부터 표시가 되어 있던데?”

 

  원래부터 이랬나? 아니, 기계로 찍어낸 원이 삐뚤빼뚤할 리가 없다.

  활자 미스? 정확히 다섯 페이지 간격으로? 이 또한 가능성이 희박하다. 

  무엇보다, 표시가 있는 페이지마다 정확히 반대쪽 지점에 잉크 자국이 묻혀져 있었다. 볼펜 따위로 급하게 그린 뒤 마르기도 전에 책을 넘긴 것이다. 

 

  불현듯 오래전 기억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되살아났다.

 

  “내가 그려둔 거야.”

  “하치만이?”

  “어. 한 12년쯤 되었으려나. 그 때 읽었던 책이거든.”

 

  그래, 그런 시절도 있었지.

 

  “내게는 누나 외에도 여동생이 한 명 있어. 코마치라고, 나보다 두 살 어리니 당시에는 완전히 갓난아기였는데, 우리집은 맞벌이라 부모가 집을 비울 때가 많거든. 육아휴가가 끝난 뒤로 동생을 보살피는 건 내 역할이 됐지.”

  “그렇구나······. 응? 유미코 양은?”

  “하기야 했지만, 비율상으론 내가 많았다고나 할까. 우리 누나는 그때도 친구가 많았으니까. 떠넘긴 셈이지.”

  “하치만, 그건······.”

 

  토츠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농담이야. 나도 누나에게 맡긴 일이 있었으니까. 그 때는 우리집에서 개를 키웠었거든. 부모님도 집에 없고 나는 코마치를 봐야하니 그 녀석을 산책시켜줄 사람이 없잖아? 집에 두면 코마치를 돌보는 데도 방해가 되니까, 체력이 좋은 누나가 맡아준 거지. 원래부터 함께 했어야할 일을 분담했던 거야.”

  “휴우, 그랬구나. ······어라? 그런데 이 이야기가 책에 그려진 표시랑 관계가 있어?”

  “있지. 코마치를 돌보는 건 내 몫이었다고 했지? 아기는 잠이 많아서 낮잠을 자는 동안은 할 일이 없거든.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코마치 옆에서 떨어질 수는 없잖아?”

 

  새근새근 잠든 코마치의 얼굴, 정말 귀여웠지.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는데, 아빠의 심정이란 이런 걸까?

 

  “잠에서 깨면 울어버리니까 TV도 못 봤어. 전화기는 진작에 1층에 갖다놨었지. 휴대폰도 없는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 아기 침대 옆에서 책이나 읽는 수밖에. 독서야 그때부터 좋아했으니 내게도 마음에 드는 일이었지만······.”

  “······만?”

  “······나,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거기에 빠지는 버릇이 있단 말이지. 한 번 독서를 시작하면 바로 옆에서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열중하곤 했어. 코마치에게 일이 생겼을 때 눈치채지 못 하면 안 돼잖아? 강제로 정신이 들게끔 일정 간격마다 표시를 해 둔 거야. 이 동그라미가 보일 때마다 코마치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고.”

 

  이렇게 보면 사소한 일이지만, 어린 시절의 내게는 중대한 고민이었다. 동시에 어린 아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해결책이기도 했다. 

 

  “대단하지 않아? 어린아이의 머리에서 이런 발상이 나오다니 말이야. 그 때부터 똑똑했거든, 내 사촌은.”
  “엇? 그건, 설마······.”

  “맞아. 유키노가 알려준 방법이야.”

 

  고민을 거듭하던 내게 답을 찾아준 사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잊을 수 없는 그 모든 기억 속에서도, 내게 손을 내밀고 웃던 미소가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음속에 품은 감정이 형태를 갖춘 시기는 모른다. 그러나 씨앗을 뿌렸다면 분명 그때였을 것이다.

  혼자서 지키던 작은 방에, 눈부신 빛이 찾아왔다.

 

  “내가 처음으로 유키노에게 빌려준 책이기도 했어. 아니다. 도중부터 같이 읽었으니 빌려줬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네. 유키노는 이미, 그것도 원서로 읽은 적이 있던 모양이지만.”

  “원서라면 영어? 대단하다, 유키노시타 양······.”

  “그렇지, 대단하지······.”

 

  그 당시 생일이 지나지 않았던 유키노는 4살이었다. 고작 4살. 일본어를 읽기에도 이른 나이에, 어린이용 동화라 할지라도 원서로 책을 읽었던 내 사촌.

  그 모습이 5살이었던 내게 어떤 식으로 보였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다른 집 아이였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게 있어 대단하다라는 짤막한 단어는 그녀를 평하기에 너무도 차갑게 느껴졌다.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내게 있어 첫 친구였고, 코마치에게 있어 또 한 명의 누나였으니까. 

  

  “고마워, 토츠카.”

 

  

  색이 바랜 표지를 손으로 쓸었다. 오래된 책에는 과거의 자신과 함께 소중한 사람이 묻힌 시간 또한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바로 어제일처럼 되새길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정말로 소중한 추억들.

  

  “응? 뭐가? 책을 빌려준 건 하치만이잖아.”

  “그거랑은 상관이 없다고나 할까······, 아니, 토츠카랑 만난 덕에 이 책을 펼칠 수 있었으니 아주 상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힘겹게 이어보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그럴듯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꿎은 뒷머리를 긁어보아도, 머릿속엔 오로지 한 마디 뿐.

 

  “······솔직히 말할게.”

 

  허리를 쭉 펴고 숨을 골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츠카와 시선을 마주본다.

 

  “덕분에 결심을 굳힐 수 있었어. 오늘 토츠카를 만나지 못 했더라면,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거야. 그 점에 감사를 표하고 싶어.”

 

  밑도 끝도 없는 일방적인 감사, 다소 생뚱맞기 까지 한 논리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억지스러웠다. 그러나 토츠카는 한동안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도움이 됐다니 기뻐.”

 

  아이같은 얼굴에 멋진 미소가 걸렸다.

 

  “하치만이 뭔가를 고민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최근 얼굴 보기 힘들만큼 바빠진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닌가 했는데······. 맞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티 났나?

  “단순한 피로 때문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부분이 많았는걸. 실행 위원회 일이 바쁜 거라면 하치만은 조금 더 다른 반응을 보여줬을 거야. 불평을 한다든지, 피할 방법을 찾는다던지.”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프군.”

  “그렇지? 거기다, ······내가 오해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가미 양은 언제나 우리 반에 있었고.”

 

  사가미의 이름이 나온 순간 움찔했다. 찰나의 순간에도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그랬다는 듯이 토츠카가 한숨을 쉬었다.

 

  “분명 사가미 양은 실행 위원장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았구나.”

  “······.”

  “그래도 단순한 다툼 정도였다면 하치만이 이렇게나 고민하지는 않았겠지. 나는 몰라도 유이가하마 양이나 카와사키 양에게까지 숨기지는 않았을 거야.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어도, 그 중 하나인 건 확실하지만 말이야.”

 

  순순히 인정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에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맞아. 그러니 결판을 지어보려고. 토츠카가 저번에 해 준 충고도 있고.”

  “충고?”

  

  항상 외톨이라고 자부해 왔다. 가족과 친척, 그로부터 이어진 소꿉친구를 제외하고, 히키가야 하치만이라는 개인을 좋아해 다가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문득 멈춰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였다.

  사실은 나만 그렇게 생각했음을, 먼저 다가와주는 친구가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나를 생각해 주고, 쓰디쓴 조언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떠오르는 얼굴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게는 내 생각이 가장 중요해. 주변의 시선을 신경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거야.”

 

  새학기가 시작된 날, 갑작스럽게 바뀐 유키노시타와의 거리감에 헤매던 내게 토츠카가 해줬던 조언이다.

  컴컴한 안개속 깊숙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말은, 이 때를 위해 웅크리고 있었던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서 솟아올랐다.

 

  “······기억해 줬구나.”

 

  약간이지만 목이 메인듯한 목소리는 음식 때문이 아니겠지. 토츠카의 주문은 기름기가 쫙 빠진 웰빙 식단이었으니까. 

 

  “잊는 게 이상한 거지.”

 

  돌이켜보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토츠카 사이카는 옳았다.

  누나도, 여동생도, 가족도, 친구도

  그 모든 사람과 함께해온 추억을, 나는 정말로 좋아한다.

 

  xxx

 

  인스턴트 메신저인 디스코드는 자동 접속 기능을 지원한다. 사용자가 컴퓨터를 켤 때 메신저에 로그인 되고, 친구 목록에 등록된 사람들에게 표시되는 방식이다. 대화방을 열지 않는 한 상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라인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즉, 매일 같은 시간대에 컴퓨터 앞에 앉는 친구를 만나고자 한다면 약속은 필요 없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잇시키, 시간 되냐?」

 

  온라인 상태인걸 나타내는 초록색 불빛. 이제는 익숙해진 이름을 보자마자 메세지를 보냈다.

  즉각 답장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묵묵부답. 전문을 작성중일 때 나타나는 말줄임표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성급했나? 전원 스위치를 누른 채 다른 일을 하러 갔을지도. 어쩌면 가족 중 누군가가 잇시키의 컴퓨터를 사용중일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야심한 밤 후배랑 대화하기 위해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을 선배를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오해하지 말라고 몇 마디 덧붙이려던 그 순간, 별안간 띠로링 띠로링 연결음이 들려왔다. 허겁지겁 헤드셋을 걸치자 깜찍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물론 가능하죠! 선배의 후배 이로하 짱인걸요!”

 

  볼륨, 줄여놨어야 했는데······.

 

  “······어, 어라? 선배? 아무 반응도 안 해주시면 제가 쑥스러운데요······. 아, 혹시 여동생 이로하 쪽이 좋았던 거에요?”
  “아냐, 아니라고! 너무 뜬금없어서 할 말을 잃었을 뿐이야. 귀도 아프고.”

  “뭐야, 그런 거였군요~.”

 

  뭘 납득했는지 흠흠 추임새를 넣는 잇시키였지만, 안타깝게도 태클을 걸 상황이 아니었다. 유리를 긁는 듯한 이명이 귓전을 때려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히히, 죄송해요, 헤드셋을 연결하는 데 시간이 걸렸거든요. 기다리시는 동안 심심하실 것 같아서, 그만?”

  “그만은 무슨. 고막이라도 터졌으면 어쩔 뻔 했어? 아직도 울린다니까?”

  “그러니까 사과드렸잖아요. 선배도 참, 엄살도~. ······헛! 뭔가요, 설마 꼬시는 거에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으니 책임도 져야 한다니 의외로 자연스러운 흐름에다가 그럴듯한 논리라 순간 혹할 뻔 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저는 선배를 이성으로 본 적도 없거니와 선배에게는 책임을 질 상대가 따로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아, 그래.”

 

 중간부터 볼륨을 줄였기에 데미지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귀에 밀착된 헤드셋에서 나온 목소리를 못 들었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잇시키가 하고자 했던 말은 가슴속에 확실히 내리꽂혔다.

 

  “아무튼 시간이 된다니 다행이다.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뭐든 물어보세요. 개인정보나 비밀번호, 보증 권유만 아니면 다 들어드릴게요.”

  “아니, 그건 좀 곤란한데.”

  “엇?! 진짜에요? 선배는 저의 재산이 목적이신가요?”

  “너는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안 그래도 좋은 목소리에 연기력까지 좋다니, 이 무슨 악마의 재능이란 말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쉴새없이 몰아칠 때의 잇시키는 무섭다. 자칫 분위기에 휩쓸려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실토하게 될 것 같단 말이지.

 

  “뭐긴요, 믿음직한 부하······ 선배님이죠!”

  “다 들렸다, 이 녀석아.”

 

  그래도, 장난인 걸 아니까 웃어 넘긴다.

  이 농담이 잇시키 나름대로의 배려란 것을 모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건만, 고작 문자 몇 자로 알아준 것이다.

  어렵사리 꺼낸 말이란 것을,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봉사부에 메일이 와서 말이야.”

  “호오호오.”

  “의뢰인의 교우관계에 트러블이 있는 모양이야. 애매한 사이였던 친구가 있는데, 이런저런 일이 있어 사이가 틀어졌다는군.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라 상담을 하고 싶다는데 내가 뭐 이런 걸 알아야 말이지.알다시피 유키노시타가 지금 누굴 신경쓸 상황이 아니잖냐. 되도록 이쪽 선에서 처리하고 싶은데. ”

  “헤에.”

  “잇시키에게 의견을 구하고 싶어. 물론 의뢰인의 신변이 노출되지 않게끔 일부 내용을 다듬어서 들려줄 거지만.”

  “흠흠.”

  “······어때, 들어줄 수 있을까?”

 

  후배에게 기대는 선배는 한심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이건 외부 교류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한다면 노력으로 달성하는 게 베스트겠지. 원래 사람의 능력은 제각각 다르다는 게 자명한 이치다. 그중에서도 경험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잇시키라고 경험이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 외부인의 입장에서 들려주는 의견이다. 기록 잡무부 일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부탁하는 것이니 문제될 것은 없겠지. 비록 여러 부분에서 양심에 찔리지만 말이다.

 

  “싫어요♡.”
  “오오, 다행이다. 그래서······, 네?”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잇시키는 당차게 선언했다.

 

  “헛소리 하지 마시고 순순히 털어 놓으시죠?”

 

  전선을 타고 전해지는 목소리만으로도 시리도록 차가운 냉소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일반통화여서 다행이다. 영상통화였으면 하치만 그대로 졸도했을 거야.

 

  “무, 무슨 말이니, 잇시키 양? 무슨 근거로······.”

  “선배.”

  “네, 선배입니다.”

  “그거 선배 이야기죠?”

  “아니, 그러니까 의뢰인······.”

  “거짓말 하는 사람은 안 도와줄 거니까요.”

  “······네, 제 이야기입니다.”

 

  훤히 꿰뚫어보였다는 생각에 의식하지 않아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잇시키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쉰다.

 

  “하야마 선배군요.”

  

  무엇을 숨기랴.

 

  “응.”

  “유키노시타 선배도 엮여 있구요.”

  “응.”

  “카와······, 사키 선배와 유미코 선배도 관련된 일이죠?”

  “응.”

  “하지만 그분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구요.”

  “······응.”

 

  최대한 소리를 줄이면 옆방까지 들리지는 않겠지.

  밖에서 통화를 하는 것도 고려해 보았지만, 심야의 주택가는 밀담을 나누기에는 부적합하다. 이웃에 민폐가 될 뿐더러 데이터 사용량도 감당할 수 없다. 무엇보다 지금도 피곤할 게 분명한 잇시키가 잠들어 버렸다간 모든게 허사가 되어 버린다.

 

  “뭐, 말이 그렇단 거지 강요는 하지 않아요. 내키지 않으시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돼요. 개인의 사정이고, 선배의 과거니까요.”

  “잇시키······.”

  “핑계를 댄 것도 용서해 드릴게요. 이해할 수 있어요. 분명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지만요······.  선배.”

  “응······.”

  “앞으로는 속이지 말아주세요. 어떤 이야기를 하셔도 비웃지 않을 테니까. 거짓말은 유키노시타 선배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유키노시타 이야기를 꺼내는 건 치사하다니까.

  절대로 부정할 수 없잖아. 안 할 거지만.

 

  “미안, 솔직하게 말할게.”

 

  의자를 끌어당겨 자세를 바로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마음을 다잡는다.

  친구를 제외한 타인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말이다. 스스로도 직시할 수 없어 외면해왔던 과거였다.

 

  과거는 지나가야 한다. 앞으로의 인생에 끌고가선 안 된다.

  잇시키 이로하라는 인물이 ‘타인’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내게 한 발짝 다가왔듯이

  끈질기게 움켜쥐었던 아집을 버리고, 

  이제 더는 눈을 돌리지 않겠다.



  Interlude 

 

  이건 사기다.

  일방적인 떼쓰기에, 불공정한 정보 거래.

  그저 입을 다물었을 뿐이라는 알량한 거짓말을 나를 믿어준 사람을 기만한 거나 다름없다.

  자각은 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말소리가 멎자 책상 위에 놓인 전자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 하나에 0 두 개, 단조롭기 그지없는 직선은 이미 지나온 시간이 아닌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생각보다는 짧았네. 

  새벽 특유의 감성 탓인지, 대답할 말을 고르기에 앞서 떠오른 것은 지극히 단순한 감상이었다.

  

  “잇시키?”

 

  이크, 선배를 방치해버렸어.

 

  “네네, 듣고 있어요. 끝인가요?”

  “어어, 그렇다만······. 뭔가 예상했던 반응이랑 다른데······.”

 

  불만인지 다행인지 알쏭달쏭하다는 반응인 선배. 그럴만도 한가.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말한 적도, 말하려고 생각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괜시리 진지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일테고, 선배가 걱정한 것도 그 부분이겠지.

 

  그런데도 내게는 말해줬구나. 정말이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안도와 동시에 이런 사람을 속였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어때?”

  “글쎄요,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면 돼. 사건에 엮여있는 사람이 아닌 제삼자의 의견이 듣고싶은 거니까. 아무래도 자기 일이 되다보면 이런저런 감정이 섞여들어서······.”

  “그러시다면야.”

  

  정신 차리자, 이로하. 지금부터가 중요해. 클라이맥스가 머지 않았어.

  네 역할은 조력자. 주인공(히어로)을 돕는 조연이야.

  주인공(히로인)이 나오기 전에 무대를 엎어버릴 수는 없잖아.  

 

  “우선은 말이죠.”

 

  흠흠,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이 헛기침을 하자, 미세한 잡음 속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보기에 이 문제는 옳고 그름을 나눌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분명 있어요.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구요.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딱히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요? 초등학생이었잖아요, 다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모두가 잘했다, 혹은 잘못했다 같은 초등학교식 해결법으로 퉁칠 마음도 없으니까요. 단지 한 번쯤은 다양한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는 거죠.”

 

  부드러운 침묵이 뒷말을 재촉했다.

 

  “제가 요 반년간 축구부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말이죠. 하야마 선배는 기본적으로 현재를 유지하려는 욕구가 강해요. 문제가 생기면 피하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해결하지려 들지도 않아요.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부정도 안 하죠.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그건 마치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를 무시한 채 억지로 뚜껑을 닫은 기계와 같아요. 압력이 쌓여 터지기까지,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에서 같이 있을 수 없는 모서리들이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는 거죠. ”

 

  한 호흡 쉬며 반응을 살폈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선배가 바라는 건 무턱대고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달라는 10대 특유의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반대로?”

  “네. 문제가 생기면 피하지는 않고, 갈등이 생기면 중재역을 도맡고,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하야마 하야토 말이에요.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고 언제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니 주변의 분위기는 언제나 화기애애할 수 밖에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 좋잖아요? 비록 연기라 해도, 만들어진 이야기란 걸 알고 있대도 말이죠. 그런 점에서 하야마 선배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이상주의자라 할 수 있죠.”

 

 이번의 침묵은 이전과는 달랐다.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지만 이 평가를 부정할 수 없다는 건 선배도 알고 있었다.

 

  “물론 이상론은 이상론,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고 거기까지 부정하는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상주의자가 한 명 쯤 있어도 나쁠 건 없죠. 정말로 하야마 선배의 방식이 문제 투성이였다면, 지금까지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축구부나 F반, 그 외의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런 선배니까, 이 다음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선배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는 거에요. ······제 말이 맞죠?”

 

  조심스레 확인하자, 예상대로 선배는 순순히 수긍했다.

 

  “맞아. 지적해줘서 고마워. 네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확 트인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뭔데요?”

  “하야마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 약속을 잡아줬으면 해.”

 

  응, 여기까지도 예상대로. 선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목적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기뻐해야 하려나?

  잘 모르겠다.

 

  “싫어요.”

 

  그러니까, 최소한 후회가 남지 않도록, 확실히 말할 것이다.

 

  “······그래. 하긴 이런 일을 남에게 부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미안했다. 방금 한 말은 잊어······.”

  “뭘 멋대로 단념하시는 거에요. 끝까지 들으세요. 제 말은, 조건 없이는 싫다는 뜻이었다구요.”

  “조건?”

 

  대답을 고르며 뒷일을 생각해 본다. 놀라겠지? 의외라고 생각할까? 최소한 이런 좋은 후배를 두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해줬으면 좋을텐데.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선배란 사실을, 저 둔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조금은 깨달아 줬으면 한다.

 

  “사과 금지.”

  “······엥?”

  “보나마나 하야마 선배에게 굽히고 들어갈 생각이죠? 척 보면, 아니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요. 유키노시타 선배를 도우려면 제대로 마주봐야 하는데 유미코 선배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잖아요? 이유야 여럿 있겟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하야마 선배를 대하기 껄끄럽다는 것이겠고.”

  “으윽, 그거야, 그렇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상황은 악화만 되고, 원래부터 꼬였던 관계는 개선될 희망이 안 보이고,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내가 잘못했나?’ ‘혹시 모든 게 내 잘못이었던 걸까?’ ······틀려요?”

  “이, 이로하스 양? 방금 나 흉내낸 거니? 하나도 안 어울리는데?”

  “틀리냐구요.”

  “······틀리지는 않아. 정답이야.”

  “진짜 못쓰겠다니까~.”

 

  그럼 처음부터 인정하시라구요. 꼭 여러 번 말하게 한다니까. 이로하스는 또 뭐야. 요즘들어 은근슬쩍 자주 부르는데, 저는 그 별명을 애칭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까 말이죠?

 

  마이크에 입술을 밀착하고 한숨을 쉬었다. 볼륨 낮춘 거 다 알아요. 선배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으니까. 지금 중요한 말을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집중해 주세요.

 

  “있잖아요, 선배? 머리는 그렇게 쉽게 숙이는 게 아니에요. 그 정수리 위에 얹어진 무게는 선배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선배의 친구들, 동료들, 곁에 있어준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바보로 만들지 말란 말이에요.”

 

  낯뜨거운 소릴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뭐 하는 거야, 이로하. 니가 무슨 만화 캐릭터도 아니고, 언제부터 동료와의 유대같은 걸 큰소리로 외쳐대는 아이였니? 

 

  불행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억누르지 못한 웃음소리가 헤드셋을 통해 흘러들었다. 아아, 좋은 분위기 다 망쳤어.

 

  “그것도 부장 명령이야?”

  “무, 물론이죠. 부장 명령이에요!”

  “그렇구나~. 푸흡, 미안, 갑자기 사레가······, 후훗, 큭큭······.”

  “······못 참을 거면 대놓고 질러버리지 그래요?”

  “하하하하하하하!”

  “이 선배가 진짜!”

 

  난 몰라. 여기까지 와서 이게 뭐야. 바보! 멍청이! 이로하!

  선배도 선배다. 방금은 감동 먹어야 할 타이밍 아니었나요?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어디 덧나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잇시키. 신세졌다. 네가 알려준 길은 절대로 잊지 않을게.”

  “네?”

 

  침착한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뭐야, 왜 갑자기.

  어째서, 지금 그건?

 

  “서, 선배? 방금 뭐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힘찬 목소리가 대꾸했다.

 

  “나도 잇시키와 같은 생각이거든. 모두가 어렸다고나 할까, 사실은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5년 전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시비를 가릴 마음도 없고.”

  “네? 아니, 하지만 방금 정답이라고······.”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사실이니까. 오늘 오후······, 아니, 날짜가 바뀌었으니 어제인가. 이런저런 조언을 들었거든. 상담을 청하면 들어주고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멋진 친구들 덕분이지. 나도 참 운도 좋다니까.”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싶을 만큼 능청스런 목소리.

  교정에서 만났을 때처럼 이 쪽의 마음을 훤히 꿰뚫는 듯 약삭빠른 태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저, 못다한 이야기에 마무리를 짓고 싶을 뿐이야.”

 

  한 치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신뢰가 나를 향한다.

  눈부신 호의에 이번에도 길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내가 원했고, 선배에게도 조언했던 일이건만,

  어째서인지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알았어요. 하야마 선배에게는 제가 연락해 둘게요.”

  “고맙다. 이 은혜는 다음에 꼭 갚을게.”

  “네네, 그 땐 잘 부탁드려요~. 그나저나 슬슬 졸린데,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늦은 밤 붙잡아 둬서 미안했다. 푹 쉬어!”

  “그럼 이만, ······안녕히 주무세요.”

 

  통화를 종료하고 전원을 껐다. 이 메신저는 컴퓨터로 무엇을 하고 있으면 죄다 선배에게 알려주니 곤란하다. 진짜로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왠지 모르게 예감은 있었지만.

 

  ······누가 누구보고 스토커라는 거야. 선배가 훨씬 치사하잖아.

  제가 안 들어왔으면 어쩔 뻔 했어요? 자는 것도 모르고 밤새 기다릴 셈이었나요?

  아니면 하룻밤 잠을 설치는 정도는, 기다리는 축에도 못 낀다는 건가요?

  피로를 풀라고 준 휴가인데 의미가 없어져 버렸잖아. 진짜 성가신 선배라니까.

 

  맞다. 성가시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자신을 거리낌없이 던져버리는 점이 성가시다.

  언제나 남을 배려해 왔기에 스스로의 감정에 몸을 맡기길 두려워한다.

  다투는 것, 싸우는 것, 그러다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흔한 일인데, 그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어 버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진흙을 뒤집어 쓴다.

  주변 사람 모두에게 헌신하면서, 책임만은 혼자 짊어지려고 떼를 써댄다.

 

  호의를 건네면 곱절로 돌아오고, 장난스레 던진 악의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치사하고, 바보같고, 그러면서도 순수한 내 선배는,

  틀림없이, 세상에서 제일 약삭빠른 남자일 것이다.



xxx

 

  전날과 달리 중앙계단의 최상층은 한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난잡하게 널부러져 있던 물품들이 계단 양 끝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자 탁 트인 중앙은 확실히 길처럼 보였다. 우리 가엾은 1학년들은 사 짱의 난동을 학교 시설을 책임감있게 쓰라는 쓴소리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니면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도 모르지만.

 

  푸른 도화지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문을 연 옥상에는 어제와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지. ‘어제와 같은’ 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수천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태양이 떴다 할지라도 말이다.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다른 하늘일 테니까.

 

  그 증거로 탁 트인 옥상 위에는 두 개의 태양이 공존했다. 늦여름이 남기고 간 열기가 아스팔트를 데우는 와중에도, 하야마 하야토의 멋드러진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왔구나.”

  “어.”

 

  인사라고 하기도 뭣한 짤막한 한 마디에 하야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로하에게 들었어. 일단 나오긴 했지만, 정말로 괜찮을까?”

  “괜찮아. 라고할까, 여기밖에 없었어.”

 

  고착상태에 빠진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애매한 관계에 매듭을 짓는 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부딪칠 문제라면, 계기가 생긴 지금 해치우는게 바람직하겠지. 별말없이 나온 걸 보면 저쪽도 같은 생각인 듯 싶고.

 

  문제는 가급적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1:1로 진행해야만 하는 대화에, 그 상대방이 하야마 하야토라는 점에 있었다.

 

  “최대한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곳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통행이 없는 곳, 실수로라도 들어갈 수 없는 곳, 학교 어디에 있든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 그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곳은 옥상밖에 없었어. 여기는 엄연히 출입금지거든.”

  “장소는 이해해. 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약속시간을 방과 후로 잡았는지에 대해서야. 점심시간 쪽이 더 낫지 않았나 싶은데.”

 

  그 선택지를 검토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실현 불가능이라 판단했을 뿐.

 

  “피차 다른 의미로 눈에 띄는 몸이잖냐. 그 하야마 하야토가 평소에 존재감도 없던 히키타니 뭐시기랑 함께 옥상을 올라간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겠어? 쓸데없는 위험부담은 사양이거든. 에비나 양이 알면 무슨 말을 할 지도 두렵고.”

  “그건······, 확실히 그렇지. 핑계가 들통나게 될 테니까.”

  “내가 걱정하는 건 그 쪽이 아니지만······, 뭐 됐어.”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옥상 바로 아래층에 존재하는1학년 교실이다. 인적이 드문 곳이 있다 한들 거기까지 가는데 있어 하야마 하야토라는 존재가 목격되지 않을 리 없다. 그늘 속에서도 태양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특별한 존재는 어디서나 눈에 띄기 마련이다.

 

  상사의 명령으로 인해 조기 출근이 허락되지 않는 나와 학급과 축구부 양쪽에 핑계를 대서 잠깐의 여유를 만들어낸 하야마. 

  우리 두 사람이 유일하게 맞출 수 있는 시간대는 지금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간신히 건져낸 화제가 사라진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의미없는 잡담을 조금 더 이어나가고 싶었는지, 하야마는 끝내도 될 이야기를 한 번 더 연장시켰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다른 학생을 본 적이 없는데, ······뭘 한 거야?”

  “실례네. 나는 그 정도로 능력있는 녀석이 아냐. 내가 말한다고 1학년들이 들어줄 것 같냐?”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힘차게 답변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과 동시에, 진실이 섞인 거짓이기도 했다.

 

  “아, 어쩌면 내가 어제 여기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음침한 2학년 선배가 들락거린다고 소문이라도 난 게 아닐까? 히키가야 균이라도 옮기면 곤란하잖아? ” 

 

  그리고 이것이 그 두 번째 이유.

 

  베스트 플레이스도 특별동도 봉인 된 상황에서 옥상을 사용하는 건 불가피하다. 하지만 점심시간이라면 사 짱의 동선과 겹칠 가능성이 있다. 나 이상으로 하야마를 싫어하는 사키다. 자신의 영역에 불청객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리 없고, 그런 사 짱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허나 수업이 끝난 직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문화제 준비에 착수하기에 앞서 이런저런 논의를 거치는 몇 분의 시간이 생겨난다. 유동인구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타이밍이며 동시에 사 짱의 발을 확실히 묶어둘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여기에 몇 가지 소문만 흘려둔다면 더더욱 중앙 계단은 무인지대가 된다.

 

  잇시키가 부탁을 들어줘서 천만다행이었다. 

  얄팍하기 짝이없는 속임수였지만, 하야마가 어제의 일을 모른다면 이만큼 확실한 핑계도 없을테지. 

  

  “너는, 아직도······.”

  

  역시, 하야마의 귀에 들어갔다면 구태여 물어보지도 않았을 터. 기가 차다는듯이 노려보는 그 태도야말로 내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마음같아서는 마주 노려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시한 잡담 속 언뜻언뜻 내비치는 속내를 꼬투리 삼아 의미없는 말다툼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렇게 흐지부지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이쪽은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하야마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야?”

  “어. 엄청 중요해.”

  “······.”

 

  무거운 침묵에 이쪽의 긴장도 상승한다.

  아마 하야마는 과거를 들추는 걸 원하지 않을 테지. 그러나 잊고 싶었던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자리를 마련한 것도, 말을 꺼낸 것도 나지만, 유쾌한 감정은 조금도 섞여있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하야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치바 마을에서, 네가 말했던 Y가 누구냐?”

  “······뭐?”

 

  언제나 단정한 얼굴만 보여주는 하야마에게는 이런 아이같은 표정 쪽이 유니크할지도. 사진을 찍는다면 고가에 팔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 팔 거지만.

 

  “똑똑히 들었으니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마. 관심있는 여자애의 이야기를 할 때 나도 깨어 있었으니까. 토베가 물었을 때 너는 분명 그렇게 말했어.”

 

  만약 이 녀석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물어봐야 할까.

  어디를 건드리고, 무엇을 제시해야 진심을 끌어낼 수 있을까?

  선택지는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서로가 뻔히 보이는 거리임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못 본 척 흘려보낸 우리다. 그 점에서 나와 하야마는 동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자문해 보았다.

  너 스스로가 궁금한 건 무엇이냐고.

 

  가슴 속에 막힌 응어리를 쏘아보내듯 던진 질문.

  예상과 전혀 달랐던 해답은, 유치하리만치 단순한 의문이었다.

 

  “이니셜에 Y가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얼렁뚱땅 넘어갈 속셈이었겠지만 내게는 안 통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유키노냐 유미코냐? 설마 유이가하마는 아닐테고.”

 

  하야마는 대답 대신 지그시 시선을 맞춰왔다. 맞바람을 맞은 탓에 눈이 따가웠지만,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한숨을 쉰 하야마가 의미 모를 미소를 흘렸다.

 

  “대답을 들려주면 어떡할래?”

  “뭐?”
  “둘 중 하나라면, 어느 한 쪽을 고른다면, 내게 줄 수 있어?”

 

  시원시원한 얼굴에서도 눈빛만은 한없이 진지했다. 장난스럽게 비틀어진 입가와 대비되는 엄숙함이 묻어나온다. 의도야 어찌됐든 나름의 고민 끝에 내뱉은 말임은 확실했다.

 

  그 고민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단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을 뿐.

  이런 건방진 질문에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니, 절대 못 주지.”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에도 하야마 또한 표정을 바꾸지 않아, 졸지에 서로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청춘 드라마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굳이 가능성이 높은 쪽을 따지자면 유미코려나? 너도 알다시피 우리 누나는 오랫동안 너를 좋아해 왔으니 말이야.”

 

  의식하지 않아도 안면 근육이 긴장된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얼굴은 어린 시절 사진 찍기를 지독히도 어색해하던 소년처럼 경직된 상태겠지.

 

  “하지만 나는 인정 못 해. 우리 누나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좋아해 왔는지를 아니까. 가장 가까이 있었음에도 보답받지 못 했어. 돌아봐주지 않는 남자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면서도 짜증 한 번 낸 적 없지. 그 욱하는 성격의 누나가 말이야.”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동생들을 챙겨왔던 유미코는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했다. 가족을 향한 친애를 이성을 향한 연모보다 우선시했고 그 사랑은 연적이나 다름없던 유키노에게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짜증은 커녕, 언제나 곁에서 지켜줬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굴 좋아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 뒀어. 한 마디 불만도 없이. 오직 유키노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하야마는 유키노를 좋아했다. 천성적으로 자신감이 넘쳐 사람을 대하는게 익숙했던 소년은 마음에 든 여자아이에게 당당하게 다가섰다. 초등학생 시절의 하야마는 호감을 드러낸다는 행위가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 작은 실수는 유미코를 포함한 모두를 상처입히게 된다.

 

  인기인이었던 하야마에게 호의를 품은 여자아이는 많았다. 그녀들이 보기에 유키노는 이해가 불가능한 생물이었다. 하야마의 스스럼없는 호의를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친구를 내치지 못했던 유키노는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도 마음이 가까워지는 건 허락받지 못한 추종자들이 유키노를 적대시한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고립되었을 때 처음으로 맛보았던 세상의 적의.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던 시련은 순수했던 마음을 마모시켰고, 종국엔 엇갈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찾았다.

  우리를, 아니 유키노를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착하고 여린 내 사촌을 괴롭혀 울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고장나버린 마음은 분풀이를 할 희생양을 찾아 헤맸다.

 

  “그 땐 몰랐지. 어리석었던 거야. 누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저버린 적이 없었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혼자 착각해서는 심술이나 부리고 있었으니.”

  

  하야마의 곁에 있는 누나가 미웠다.

  첫사랑에 들떠 좋아하는 남자와 같은 색으로 바꿔버린 머리가 싫었다.

  우리를 배척하고 적대시했던 그룹에서 태연하게 어울리는 누나를 볼 때마다 추악한 감정이 가슴을 채웠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고, 누나의 잘못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그럼 도대체 누굴 미워해야 하는지,

  이제껏 해온 고민이 전부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어,

  이유없는 분노를 끝없이 되새김질하며 버텼다.

  증오를 말뚝삼아 다잡아 왔던 거다.

 

  “언젠가는 전해야겠지.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할 날이 올 거야.”

 

  마지막으로 누나와 눈을 맞춘 게 언제쯤일까. 그로부터 5년을 거짓된 남매로 살아왔다. 찔리는 게 있어 화도 못 내고, 그러면서도 가슴 속 앙금은 사라지지 않아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에게 단 한 번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 모든 시간을 묵묵히 견뎌준 유미코와, 곁에서 지켜봐준 코마치.

  이제와서 두 사람을 볼 낯짝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래도, 그건 나와 누나 사이에 풀어야 할 문제. 누나가 아직 나를 동생으로 불러주는 한, 나는 틀림없는 누나의 동생이야. 그러니 너만은 인정 못 해.”

 

  자격 없는 동생에게도 오기는 있다.

  나를 때려도 되는게 가족 뿐인 것처럼, 누나나 코마치, 모두에게 입힌 상처도 만회할 거다. 평생을 바쳐서라도 기꺼이 갚아나갈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

  우리 누나를 상처입힌 사람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뜨거운 혈액이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들자, 불끈 쥔 주먹은 또 하나의 심장처럼 느껴졌다. 터질듯한 가슴에 벅차오르는 건 살아있는 사람의 감정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일체의 미동도 없이 하야마를 노려보았다.

 

  하야마는 뚫어질듯 쏘아보는 시선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그럼 유키노시타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

 

  가슴은 뜨겁게, 그러나 머리는 차갑게. 그 속에서,

 

  “당연히 안 되지.”

 

  지금껏 보지못한 자의식이 본능처럼 튀어나왔다.

  이성도 감성도 본능도 한데 합쳐져 거대한 파도가 된다.

  너무 늦었다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고

  모든 ‘나’가 부르짖는 감정이, 솔직한 진실이 흘러넘쳤다.



  xxx

 

  근래에 들어 이상한 날은 많았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유별난 날이다.

  이야기를 하고자 하야마를 불러낸 건 생각대로였다. 보통 같으면 화해를 해야할 시점이고 본래 의도도 그랬을 터. 하지만 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대의 속을 긁어대는 말뿐이었다. 우리는 싸우러 여기 온 걸까?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는 거지? 어째서 나도 하야마도, 옆구리를 부여잡은채 실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황이 이쯤되자 두 가지 의미로 걱정되었다. 과로에 지쳐 정신이 이상해졌다가 1번, ‘이대로면 아래층까지 들리는거 아냐?’가 2번이다. 참고로 후자 쪽이 더 무섭다.

 

  소리가 잦아들자 하야마가 눈가를 훔쳤다.

 

  “그럼 말이야. 하루노 누나는 어때?”

  “······엥?”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놀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안다. 아까 전 하야마와 같은 표정일 테니.

 

  “Y가 이름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유키노시타의 Y.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하루노 누나일지도 모르잖아.”

 

  그도 그런가. 유키노시타 이모 성격상 첫째는 무조건 데릴사위로 들일 것 같고. 하루 짱이 결혼한대도 성이 바뀔 일은 없겠지. 우와, 누군지 몰라도 남편 될 사람이 고생 꽤나 하겠는걸? 하루 짱도 한 성격하니까, 받아줄만한 남자를 만날 수 있으려나?

 

  ······아니, 이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미안, 잊어 줘.”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하야마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네. 농담이래도 할 말이 있지, 그 유키노시타 이모의 사위라니. ······으음? 어라?

 

  이거, 혹시 남 걱정 할 때가 아닌······.

 

  “하치만”

  “느압?! 어, 어? 왜?”

 

  화들짝 대꾸하느라 그가 나를 이름으로 불렀단 사실을 눈치채는게 늦었다.

  뭐라할 새도 없이 하야마가 말을 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앨범을 펼쳐보기라도 한 듯 아련한 눈길로.

 

  “공의존이란 걸 알고 있어?”

 

  단어 자체의 의미는 알고 있다. 자신과 특정한 상대가 서로의 관계에 의존하고, 또 그 관계에 얽매여 있는 상황에 중독된 상태를 규정하는 말이다. 관련 분야의 책에서 보았기 때문이지만, 그에 앞서 유키노시타 또한 비슷한 말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둘이서 하나라는, 오래된 특촬물의 대사가 플래시백된다.

 

  “의존 중독, 특정한 상대와의 관계에 마음을 기대는 상황이지.”

  “그 말대로야.”

 

  확실히 나와 유키노시타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촌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제나 서로를 우선시했고, 자신보다 상대의 고통에 아파했다. 어디를 가도 함께했고 잠시라도 떨어지면 불안해했던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반신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왜?”

 

  규탄하기 위해 꺼낸 말인가 싶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시선을 돌려 햇살이 내리쬐는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런 인간이었던 것 같거든.”

 

  사진에 담긴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듯이, 하야마는 그렇게 말했다.

 

  “유키노시타를 좋아했던 건 사실이야.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 이름이 유키노를 가리키고 있음은 확실했다.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곧이어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하야마가 구태여 유키노시타라는 성을 입에 담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종의 이유, 어쩌면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생각이 바뀐 건, 유키노시타에게 고백하는 너의 모습을 보았을 때.”

 

  다시 마주본 하야마의 얼굴은 치바 마을에서 봤을 때와 닮아 있었다. 한 때는 기분나쁜 동정이라 여겼던 눈빛도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너희 두 사람이 서로를 아낀다는 건 알았어. 거기에 끼지 못한 내가 겉돈다는 자각도 있었지. 하지만 당시의 나는 어렸다고나 할까, 착각을 해서 말이야. 타인과 거리를 두고 지내온 너희들이기에, 함께 지내온 사촌에게 정을 쏟는 거라고 여겼거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억지였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떼를 쓰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하야마가 동정했던 건 자기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력하면 될 거라 생각했어. 끊임없이 구애하면 돌아봐줄 거라 생각했어. 네가 맡고있는 ‘오빠’ 역할을 대신한다면 유키노시타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잇는다.

 

  “마지막까지, 너에게 거절당한 뒤에도, 유키노시타의 마음은 변하지 않더라고. ······마치 너처럼.”

 

  귀띔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 날 나와 헤어진 후 유키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뻔했다. 누나나 코마치, 사 짱이 보여준 태도, 혹은 당일 찾아왔던 하루 짱이 보여준 보기드문 분노에서, 상황이 어땠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질게 끊어내려했던 영혼이 아직 이어져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울고있는 유키 짱의 얼굴은 재회하기까지의 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떠올랐다. 

 

  굳게 쥔 주먹을 자신에게 향하려 해도, 벌조차 되지 않는 추악한 자기만족일 뿐이다.

  사 짱에게 맞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했던 건 그래서였다. 누군가 나를 벌해줬으면 했다.

  그럼에도, 지난 5년 동안, 누나에게는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

 

  “이제와서 말하는 거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 우리 집과 유키노시타 가문 사이에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렇다고 해도 스치듯이 농담처럼 건넨 말이라, 확실한 보증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알아. 유키노시타 이모는 너를 꽤 마음에 들어했으니까.”

 

  시치고산 날에 첫만남이라니 그런 올드한 이벤트가 우연이었을리가. 이모 나름대로의 깜짝 선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카와사키 양의 말이 맞았구나.”

 

  사 짱은 무슨 말을 했을까? 거기에 의식이 미치자 문득 평소에 하야마를 대하는 사 짱의 태도가 신경쓰였다.

 

  우리의 관계가 찢어진 날, 엄밀히 말해 가해자는 나고 하야마는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 짱이 보여주는 반응은 정반대다. 살갑게, 이전과 같은 우정으로 나를 대하는 사 짱은 하야마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필요 이상의 적대감을 표출해왔다.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땐 뛸듯이 기뻤어. 유키노시타가 내 약혼녀라니 날아갈 것 같았지. 학교에서, 혹은 집안 교류를 통해 알게된 유키노시타가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도 개의치 않았어.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책을 좋아하고 외출을 싫어하는 취향도, 하나부터 열까지 정반대였지만 아가씨로 자라왔으니 어쩔 수 없는거라 납득했어. 함께 지내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유도하다 보면 유키노시타도 바뀔 거라고 멋대로 믿었어. ······구역질나는 이기심이지.”

 

  나직이 한숨을 내쉰 하야마가 말을 이었다.

 

  “결국 모든 게 끝난 뒤에야 깨달았지. 나는 한 번도 유키노시타의 주체성을 존중하지 않았다는걸. 바라본 것도 바랬던 것도 외모 뿐, 착하고 순진한 약혼녀가 되어주길 바랬던 거야.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강요했어. 제 손으로 불구덩이 속에 던져넣은 유키노시타를 구하는 히어로 역할에 도취되었었지. 어째서 유키노시타가 나에게 의지해주지 않았는가를 내내 고민해 왔지만, 이제는 알아. 전제조건부터가 틀려먹었단 걸. 그저 의지받는게 좋았던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거지. ‘어째서 의지하지 않느냐’고 묻는 시점에서, 친구는 커녕 사람을 대하는 태도조차 아니었는데······. ”

 

  처연한 얼굴로 고개 숙인 하야마에게 섣불리 말을 걸 수 없었다. 위로를 해야할까, 신랄하게 비꼬아야 할까? 하야마 입장에선 후자 쪽이 마음 편할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비난은 이쪽의 뒷맛이 켕겼다.

 

  대답 없는 나를 묵묵히 기다리던 하야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 두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이제는 좋아할 자격도 없고. ······그리고.”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고개 숙인다.

 

  “미안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미안해. 내 알량한 자존심과 망상 때문에 너희들을 상처입혔어. 모든 책임을 떠맡은 너를 돕기는 커녕, 네 가장 소중한 사람마저 뺏으려 했어. 정말, ······미안하다.”

 

  

  이것이 올바른 결말일까?

  나는 정말로 하야마에게 사과를 듣기를 원했던 걸까?

  모르겠다.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과거를 파헤쳐 현재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알 수 없다.

 

  칼라를 풀어헤쳐도 가슴팍의 답담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온몸이 뜨겁다. 가슴 깊은 곳에서 쓴물이 역류해 숨을 쉬기 버거웠다. 

  크게 심호흡하자 시원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이제 됐어.”

  

  하야마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뭐?”

  “됐어. 괜찮다고. 네 사과를 받아들일게.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자. 뭐, 네 방식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으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지만, 생각에 따라가지 못하는지 하야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애매한 신음소리였다.

 

  “이렇게까지 질질 끌 이야기도 아니었잖아? 친구끼리 다투는 건 흔한 일이지. 성격이나 가치관이 다르다는 건 흔해빠지다 못해 지겨운 레퍼토리라고. 애들도 아니고 언제까지고 삐진 채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걸로 퉁치자는 거야.”

  “······너는, 또······.”
  “물론, 맨입으로는 안 되지.”

  “······어?”

  

  뭘 그렇게 놀라? 간단히 넘어갈 줄 알았냐? 네가 아직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사람과 사람이 싸웠을 때 양비론을 내세우는 건 악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최악은 한 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 피해자가 받은 상처를 없었던 사실로 간주해 강요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죄악이었다.

  

  공동체의 평화? 엿이나 먹으라지. 피해를 본 사람이 명확한데 어떻게 넘어가라는 거야. 할만큼 했고, 더 이상 눈치따위 보지 않아. 남들 시선을 의식하느라 상처입은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을 거라고.

 

  진짜 피해자였으며 지금도 그 짐을 짊어지고 있는 내 사촌, 유키노시타 유키노.

  진정으로 마주봐야할 그녀를, 이제는 놓지 않을 것이다.

 

  굳은 결심을 하야마에게 말하려고 한 그 때였다.

  별안간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옥상의 기류가 바뀐다.

 

  “힛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유이가하마였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옆구리를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유이가하마? 무슨 일이야?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길······.”

 

  거기까지 말했을 때, 문득 아래로 숙인 당고머리 너머에 한 소녀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옥상 통로로 쏟아지는 맞바람에 황갈색 머리가 흔들린다. 실행 위원회 회의실에 있어야할 잇시키 이로하였다.

 

  왜 지금? 어째서 여기에? 잇시키야 그렇다치고 유이가하마는 어떻게?

  갑작스러운 사태에 뒤죽박죽인 된 머리는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멈춰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하야마도, 심지어 잇시키조차 비슷한 상황인 듯 했다.

  유일하게 움직인 사람은 유이가하마였다.

 

  “유키농이 쓰러졌대!”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

  정전이 일어났을 때 비상 전력이 가동되듯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회의실에 들어온 뒤였고,

  내 사촌이 지켜왔던 빈 자리엔 굳은 표정의 히라츠카 선생님이 서 계셨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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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가미 미나미는 스스로 만든 무대 위에서 춤춘다.



  호흡이 가빴다. 쿵쾅거리는 심장에 맞춰 수축하던 혈관도 사그라든지 오래. 납덩이같은 다리는 오래전에 통제를 벗어나, 그저 지면을 밟는 감촉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불과했다. 고통에 익숙해져버린 뇌는 그저 단순한 추측만을 되풀이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최근의 일상을 되짚었다.

 

  그러나 아무리 돌이켜봐도 책상 위에 앉아있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수업이 마치면 실행 위원회로 간다. 기록 잡무부 좌석에 자리잡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일들과 씨름한다. 분류, 분담, 구체화, 경계조차 알 수 없는 일을 끝내기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야속한 하교 종이 울리면 미련 없이 가방을 쌌다. 주저할 시간조차 아까웠으니까.

 

  집에 돌아가, 코마치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감사를 전한 뒤, 방안에 틀어박혀 남은 일을 처리했다. 그러면 시간이 빨리 갔다. 누구보다 성실한 부장님이 전화를 걸 때까지, 초조함 없이 기다릴 수 있었다. 

  나의 부장님으로부터의 전화는 끝내 한 번도 걸려오지 않았지만.

 

  데스크 업무는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팽팽하게 당기는 허벅지와, 금방이라도 쥐가 날듯 딱딱해진 종아리에 의식이 미치자 문득 얼마 전 주물러 줬던 엄마의 다리가 생각났다.

  정말 그 말대로다.

  하지만 쉴 수는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계단에, 길지 않은 복도다. 고작 이 정도에 우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연상으로서, 오기로라도 버티지 않으면 안 됐다.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회의실 근처에 학생 몇 명이 문 앞에 달라붙어서 안쪽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가장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던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낌새로 보아 애초부터 회의실이 아닌 이쪽 모퉁이를 주시하던 모양이었다. 

 

  “늦었어요.”

  “최대한 빨리 온 거다만······.”

 

  기록을 쟀으면 운동부 수준은 나왔을 거라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있었더라면 적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

 

  단호하게 말을 자르더니 코웃음을 친다. 추켜올린 안경 너머 날카로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비난하듯이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고, 동정하듯이 찌푸린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뭐······, 보나마나 부장이 의도한 것이겠지만요.”

 

  어쩌면, 자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인데?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냐?”

  “······직접 보시는 게 낫겠죠.”

 

  제 할말만 하더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문을 향해 다가간 녀석이 헛기침을 하자, 문가에 선 학생들이 파리떼가 흩어지듯 떨어져 나갔다.

 

  “부부장.”

  “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부장을 도와줄 생각이라면, 들어가지 않는 게 맞아요. 솔직히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지도 않았구요.”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자기가 불러놓구선······. 목구멍까지 비집고 올라온 그 말은 눈 앞의 광경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앞서 서 있던 학생들이 열어둔 좁은 문틈. 그러나 건너편을 못 볼만큼 작은 틈은 아니었다 너무도 익숙한 황갈색 머리를 놓칠 정도로, 그녀와 함께 해온 시간이 짧지도 않았다.

 

  “이대로 가면 부장이 무너질 것 같거든요. ······선택은 선배에게 맡기겠습니다.”



  xxx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아요. 불만이 있으시면 사양말고 알려 달라고. 문제가 있으면 고칠 거구, 오해가 있는 거라면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 테니까······.”

  “아아~, 또 저 소리야. 잇시키 양, 우린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회의실 문과 인접해 있는 기록 잡무부 좌석, 익숙한 얼굴의 소녀들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럼 대체······.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제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나요?”

  “그거야 그거.”

  “바로 그 태도가 문제라고.”

  “본인은 모르는 거야? 진짜 답답하다니까.”

  마치 한 사람처럼 이어지는 말들. 짤막한 대사로는 끌어내기 어려운 감정도 시선과 말투, 제스처로 보충한다. 그 연결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녀들이 뿜어내는 적의는 멀찍이 떨어진 내게도 또렷이 전해져 왔다.

 

  “태도라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에 맞서는 잇시키는 초라했다. 붉게 물든 얼굴 위 갈곳 잃은 시선이 흔들렸고, 치맛자락을 붙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꾸만 작아지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불안하게 들렸다. 

 

  그 모습이 공격측의 기세에 불을 지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 잇시키 양?”

 

  눈짓을 주고받더니, 안경을 쓴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당신 말야, 부원들을 너무 막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

 

  당혹감 어린 표정에 순간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1학년이고, 기대하던 문화제니까, 의욕이 있는 건 알겠는데 말야. 이런 건 모두가 함께 즐겨야 의미가 있는 거라고.”

  “맞아맞아.”

 

  머리핀으로 앞머리를 고정한 소녀가 이어 받았다.

 

  “기록 잡무부는 당일에만 힘들지 지금 시점에서 바쁠 부서는 아니잖아. 쉬엄쉬엄 하면 어디가 덧나? 결석자가 많은 다른 부서조차 잘 돌아가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일이 많은 거야? 하나 끝내기 무섭게 다음 일, 또 그 다음 일을 들이밀고, 이제는 못 참겠다고.”

 

  이번만은 쉬이 넘기기 어려웠는지, 잇시키가 반론을 펼쳤다.

 

  “그렇지 않아요. 기록 업무가 문화제 기간에 집중되어 있는 건 맞지만, 행사 당일 차질없이 일을 진행하기 위해선 여러 준비가 필요하다구요. 힘드시더라도 지금 끝내놔야,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할 수 있어서······.”

  “그건 즉,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란 얘기지?”

 

  운동부 느낌의 포니테일이 잇시키의 말을 잘랐다.

 

  “그럼 물어볼게. 우리 부서의 업무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된 거야?”

  “확답을 드릴 수는 없어요. 저도 처음이고, 진행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여유를 두고 진행해, 실행 위원회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또 이야기가 되돌아갔어. 그 말이 아니잖아, 잇시키.”

  “······네?”

 

  어이어이, ‘양’은 어디갔어. 갑자기 호칭을 떼 버리는 거냐.

 

  “에이~, 뭘 그렇게 경계하고 그래. 같은 부서로 얼굴 보고 지낸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게다가 우리, 동갑이구.”

  “그건, 그렇지만······.”

  “잇시키 양은 분명 C반이었지? 하타노 군이랑 같은. 옆반이라서 잘 알거든.”

  “네······, 그런데 사사키 양,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어울린다고나 할까~, 이해가 된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흘끔 시선을 돌리자, 한층 어두워진 하타노의 얼굴이 보였다. 걸쭉한 공기 속 뿌득 이 가는 소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잇시키, 모든 사람이 너처럼 열의를 가진 건 아니야. 우리라고 한가해서 매일 출석하는 줄 아니? 나도 그렇지만 선배들도 바쁜 사람이거든? 친구들도 있고, 약속이 있을 수도 있는거고, 학급 행사에도 참여하고 싶단 말이야. 그걸 희생하고 여기에 와 주는 거라고.”

 

  사사키 양의 말에 맞장구치듯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대를 맨 후배에 후방에서 지원하는 선배인가, 나무랄 데 없는 포지션, 그림으로 그린듯한 조직사회의 표본이었다. 

 

  “희생이라니······ 저는 그럴 의도가······.”

  “그럼, 잇시키 양의 의도는 뭔데?”

 

  두루뭉술하던 공세에 변화가 나타났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궁금해서~. 잇시키 양도 친구가 있을테고, 축구부 매니저도 맡고 있잖아. 여러모로 바쁘신 분일텐데, 가만 보면 제일 빨리 출근해서 가장 늦게까지 일한단 말이지. 그렇게까지 하면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는건가 해서~.”

 

  억지스러운 논리였다. 그러나 붕 뜬 듯한 주체없는 말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아, 설마.”

 

  움찔 몸을 떤 상대를 바라보는 눈매가 날카롭게 휘었다. 미끼를 문 사냥감에 거침없는 추격이 이어졌다.

 

  “늘상 붙어있던 그 ‘선배’를 노리는 거야?”

  “어머어머, 진짜로? 그렇게 안 봤는데 보통이 아니네. 축구부까지 들어갔으니 분명 하야마 군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포기하는 게 좋지 않아? 그 선배 근처의 여자들을 보라고. 무리야 무리.”

 

  원진을 짜듯 모이더니 머리를 맞대고 웃는다. 적의 어린 비웃음이 어깨 너머로 흘러 나와, 잇시키의 갸날픈 몸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그에 맞서는 잇시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전매특허인 속사포 반격으로 응수할 생각인가. 그렇지만 이건,

 

  “그런 거······, 아니에요. 애초에 저는, 선배에게······.”

 

  기세좋게 터져나오던 말은 무언가에 막히듯 수그러들었다. 목이 메이는지 캑캑거리는 숨소리를 내뱉던 잇시키는 잘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감정이 새어나와 버린 거다.

  갑작스런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켜, 해야할 말을 못 하게 만들었다.

  

  회의실 안에는 몇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은 철저히 외부인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따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뿐, 다른 부서의 일에 참견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말리려 드는 사람은 없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처형대의 군중처럼 보였겠지만 말이다.

  잇시키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여자들의 조소 소리가 기세를 더해갔다. 잇시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개입해 말려야만 한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힘을 주어 열려던 그 순간,

  

  “그만하세요.”

 

  비좁은 문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한쪽 구석,

  집행부석에 앉아있던 유키노시타가 돌연 끼어들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걸음을 옮긴 그녀는 기록 잡무부 의자 사이를 서슴없이 내딛었다. 잇시키 앞에 버티고 서 가리듯이 팔을 뻗은 그 모습은, 마치 상처입은 동물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았다.

 

  “모두가 있는 회의실입니다. 이 이상 소란을 피우는 건 자제해 주세요. 부서 내의 문제는 부원끼리 대화로 풀어야 할 일이지, 감정을 앞세워봐야 득이 될 게 없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정식으로 건의를 올려주세요. 집행부 차원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키노시타가 흘끗 자신이 일어선 자리를 곁눈질했다. 

  부위원장 자리가 비어 있는 건 당연, 그러나 그 밖에 어떤 자리에도 사람은 없었다.

  회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의장석의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유일한 중재자인 집행부장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학생회장과 선생은 안 올 겁니다.”

 

  옆에 서 있던 하타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손님이 왔거든요.”

  “내빈 접대야 집행부에게 위임했다지만 히라츠카 선생님까지? 하필 지금······.”

  “그러게요. 방문객이야 늘상 있는 일이지만, 예고도 없이 찾아온 건 처음이에요. 최악의 타이밍이네요.”

 

  동감이다. 사가미조차 빠진 지금 실행 위원회의 최선임자는 유키노시타다. 바꿔 말하면, 세 명 중 한 명만 돌아와도 최종 결정권은 양도될 수 있었다. 부위원장이란 어디까지나 위원장의 그늘이지 통솔권을 가진 직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미묘하면서도 어정쩡한 위치였다.

 

  “소문을 말하면 그림자가 비친다더니.”

  

  유키노시타의 몸이 움찔 떨렸다. 또다시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못 듣고 지나치기가 어려울 정도였음에도 혼잣말임을 주장할 생각인지, 소녀들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굶주린 사냥꾼들이 겁도없이 뛰어든 순진한 아가씨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들의 다음 타겟이 유키노시타임은 명백했다.

 

  “유키노시타 양도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에요.”

 

  부위원장으로 부르지 않는 건 회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 그건 핑계다. 

  명예도 권력도 없는 중간 관리직 따위, 애초부터 존중할 생각이 없었던 거다.

 

  “친한 사이라고 감싸는 건 남들 보기에 좋지 않답니다?”

  “무슨 이야기죠?”

  “어머, 다 알면서 시치미를.”

 

  약자는 옳다. 강자는 그르다. 허울뿐인 직위라면 더더욱 편하다. 마음껏 왜곡하고, 내키는대로 내뱉고 끌어내려도 반격당할 위험이 없을 테니까.

  쿡쿡 웃던 머리핀 소녀가 잇시키를 가리켰다.

 

  “유키노시타 양의 부활동에 찾아갔을 때 저 아이도 있었잖아요. 우리들을 쫓아낼 때도 저 아이에게는 그러지 않았죠? 잇시키 양이나 우리나, 거기 찾아간 용건은 같았을 텐데 말이에요.”

 

  소녀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짚이는 구석이 없지도 않았다. 

  지구의 책장에 접속한 것처럼, 몇 가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잘 닦인 의자, 의뢰가 없는 손님, 그리고,

 

  「대단한 일은 아니야.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평소보다 적었던, 몇 사람분의 홍차가 덜어져 있던 찻주전자.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내 사촌은 어째서 말을 해주지 않았던 걸까?

  유키노도 나처럼 잊었던 걸까? 유키노가? 유키노시타가? 총명하고 빈틈 없기로 정평이 나 있는 내 사촌, 그 유키노시타 유키노가?

 

  “아, 아니에요!”

 

  평소의 침착함은 자취를 감추고, 떨리는 목소리는 다급함을 드러낸다.

 

  “당신들을 내보낸 이유는 방문의 목적이 사적이었기 때문이에요. 봉사부는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부활동이지 휴게 공간이 아닙니다. 의뢰가 아닌 일은 도울 수 없고, 의뢰라 할지라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하치만을 만나고 싶은 거라면 해당 교실을 찾아 가는게 빠르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두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선 유키노시타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나도 힘이 들어간 나머지 핏기 하나 없는 손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사후경직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더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안경 소녀가 되받아쳤다. 천천히 고개를 꺾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려 미소짓는다.

 

  “어째서 그 날 잇시키 양은 봉사부에 남은 거야? 우리랑 저 아이가 무엇이 다른데?”

 

  일그러진 입가 사이로, 적의를 표현하듯 하얀 송곳니를 드러냈다.

 

  “잇시키 양은······.”

 

  순간, 말해야 할 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혹여나 다른 오해를 사게 될 지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녀들과 맞서는 상대방은 찰나의 망설임을 넘겨줄 만큼 무르지 않았고, 새파랗게 질린 잇시키에게는 상황을 타개할 힘이 없었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눈앞의 사람이라도 구하자.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소중한 사람을 져버리는 형태로 되돌아올 지라도.

  유키노시타는 그런 성격이었다.

 

  “하치만에게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 날로부터 수일 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있었고, 서로간에 안면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원 개인의 독단적인 행위였지만, 어쨌든 잇시키 양은 엄연히 손님으로 온 것입니다. 견학을 맡기기 위해 하치만을 기다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어요.”

 

  수없이 반복해왔기에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날, 부실에 들어간 나를 향해 유키노시타는 곤란한 의사를 전해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에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방문 목적을 알아낼 것을 넌지시 내게 부탁해왔다.

 

  평소와 다른 행동은 티가 나는 법이다. 

  내 사촌은 거짓이 섞인 진실을 입에 담고 있었다.

  

  다만 그 논리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상대방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길쭉한 혀로 입술을 핥은 안경 소녀가 돌아보았다. 그 뜻을 알아차린 포니테일이 과장스럽게 손뼉을 쳤다.

 

  “아하! 그랬던 거였군요! 어쩐지~, 첫 미팅 때부터 함께 들어 오는게 평범한 관계는 아니다 싶었거든요~. 세 사람은 예전부터 친한 사이셨군요~.”

 

  요란스러운 호들갑도 잠시 뿐, 동그란 눈동자가 간격을 좁힌 눈꺼풀에 찌그러졌다. 너무도 좁힌 나머지 감은 모양새가 된 눈을 치켜뜬 소녀가 별안간 고개를 쳐들었다. 날카로운 창이 적을 겨누듯, 빳빳한 턱끝을 잇시키에게 향한다.

 

  “설마하니 사촌에게도 점수를 따놨을 줄은, 잇시키도 고단수라니까요?”

  “무슨 이야기죠?”

  “에이, 아시면서~.”

 

  다수의 악의에는 정도가 없는 법이다.

  논리나 합리를 갖추지 못한 억지, 궤변투성이 떼쓰기에 불과하다.

  방금 전까지의 적의가 무색하게도 그녀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실행 위원회도 그럴 의도로 들어온 것 아닌가요? 같은 부 소속이면 자연스럽게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업무 시간 내내 붙어 있거나 귀가를 같이 해도 어색하지 않죠. 뭣하면 점심 시간도 가능할 테구요. 일이라는데 누가 뭐라할 수 있겠어요?”

  “······무슨!”

 

  겉치레도 예의도 사라졌다. 존댓말은 원래 용도를 망각한 채 철저히 상대를 비꼬기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선배도 유키노시타니까 완장 하나쯤은 가만히 있어도 굴러 들어오지 않겠어요? 몰랐던 척 받으면 그만이죠. 솔직히 저희 입장에서야 고맙긴 하지만, 여자들 입장에서는 자리 하나를 뺏겼다고 생각할 걸요? 우리 부서를 노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보충역조차 하타노에게 빼앗겨 버렸으니.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출석률과 상관이 없지는 않을 거에요.”

 

  얼굴도 모르던 그녀들이 유키노시타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 리 없다.

  우리 세 사람이 같은 부서에 들기 위해 짜냈던 가위바위보 전략도 눈치채지 못 했을 것이다.

  다만 그녀들의 말처럼,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기 전부터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지금의 억측에도 최소한의 심증은 있을 터였다.

  사실관계 따위, 그녀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교대하듯 들어선 헤어핀 소녀가 팔짱을 끼더니, 짐짓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내 입장에서 유키노시타 양의 생각을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야. 나도 2학년이고 귀가 있으니까, 이래저래 들은 게 있거든. 얼마전까지만 해도 떠들썩 했잖아? 유키노시타 양과 히키가야 군이 사귄다는 소문 말이야.”

  “아, 맞아요! 1학년들 사이에서도 화제였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야. 3학년은 하루노 선배를 직접 본 세대니까, 그 동생에게도 기대가 컸거든.”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애완동물 샵에 앵무새를 떠올리게 했다. 짧게 혀를 찬 헤어핀 소녀가 말을 이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사촌이었을 줄이야, 첫날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랬던지! 이해해. 부정하고 싶었을 거야. 멋대로 퍼지는 스캔들이란 무섭지. 이쪽은 그럴 생각도 없는데,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둥 사귄다는 둥 멋대로 떠들어대는 건 짜증나잖아? 하물며 그게 사촌이라니! 우리 학교 애들도 너무한다니까~, 진짜 끔찍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소녀는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배를 부여잡고 깔깔깔 웃어대더니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냐, 나는 그런게, 나는, 하치만을······.”

 

  유키노시타가 대꾸하려 했으나 튀어나온 손이 그 말을 막았다.

 

  “아, 오해하지는 말아 줘. 딱히 유키노시타 양이나 히키가야 군을 나쁘게 말하는 건 아냐. 단지 공과 사는 구분하자는 이야기지.”

  “······어?”

  “결국 그거잖아? 소문을 떨쳐내고 싶은 유키노시타 양과, 선배랑 가까워지고 싶은 잇시키 양. 두 사람의 이해 관계가 맞았다는 거지.”

  “무슨······.”

  “실행 위원회는 모든 학급의 학생이 모이니까 말을 퍼뜨리는 데는 여기만한 데가 없잖아? 사촌이란 사실을 밝히고, 히키가야 선배에게도 여자친구가 생기면 자연히 유키노시타 양의 소문도 종식되겠지. 잇시키 양을 도와주는 이유로는 충분하잖아?”

 

  이런 상황은 낯이 익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떠올라 눈 앞의 광경에 겹쳐진다.

  잔설내린 눈밭 위에 서 있는 듯한 냉기가 온몸을 타고 솟아오른다.

 

  “설마, 몰랐다고 생각하셨어요?”
  “당신들이 친한 사이란 건 모두가 알고 있단다. 그렇게 붙어 다녔으면서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했니?”

  “1학년이 그렇게 일을 잘 할 리가 없잖아요. 분명 사전에 알려준 거겠죠. 히키가야 선배도 도왔을 테고.”

 

  얄팍한 자의식이 자신이 본 것만을 진실이라 멋대로 단정짓는다.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에게는 그걸로 좋다. 자기들끼리 웃고 넘어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커져버린 자의식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져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동조하고, 동화하고, 수긍하지 않는 자는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배제해 버린다.

  집단을 삼켜버린 의식이 사그라들 때까지, 빈 껍데기같은 공허만이 남을 때까지.

  

  “기록 잡무부에 일감을 몰아줄 수록, 히키가야 선배와 잇시키 양이 같이 있는 시간은 길어진다. 그럼 자연히 유키노시타 양도 이득을 본다. 내 말이 틀려?”

  “아니에요. 당신들은 오해를 하고 있어요. 나는, 우리는, 그런 게······.”

  “아, 또 우리래. 근데 그거 알아요? 이 계획에서 히키가야 선배는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다는 거, 선배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에?”

  “그렇잖아요. 일감을 몰아주고 기한을 독촉할수록 잇시키 양은 히키가야 선배를 의지하겠죠. 유키노시타 양이야 소문을 떨쳐낼 수 있으니 좋은 일이겠지만, 히키가야 선배는 또다른 스캔들이 생길지도 모른다구요? 선배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나요? 선배가 누굴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요? 없잖아요.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은 잇시키 양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유키노시타 양과 잇시키 양의 이기심 때문에 억지로 일을 맡고 있는 거라면, 그만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과거가 증명하듯, 진실이 섞인 거짓은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에 질이 나빴다.

 

  “맞아맞아. 히키가야 군이 불쌍해.”

  “저희들도 같은 처지라 알 수 있어요. 두 사람 사이에 끼여 등 터지는 입장이라구요.”

  “부위원장이 잡무부를 편애한다고 얼마나 눈총 받는데요. 우리는 우리대로 일이 많아서 힘든데······. 봐요, 회의 시작 시간인데 절반도 안 왔어요. 문화제까지 앞으로 3주, 기간이야 많이 남았지만 이래서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요?”

 

  다른 부서가 지적을 받은 건 자업자득이다. 긴 준비기간에 긴장감이 풀려 안일하게 행동한 게 원인이었다. 효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유키노시타는 타성에 젖은 위원회를 바꾸고자 했을 뿐이다. 부위원장으로서 업무의 방향성을 잡아주고, 해결책 마련을 위해 기반자료를 준비, 개선사항을 정리해 문서화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다른 부서의 일을 대신 떠맡기까지 했는데······.

  편애라고? 저조한 출석률의 원인조차 모조리 유키노시타에게 떠넘긴다고?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멈춰버린 시야에는 오로지 유키노시타의 모습만이 비춰졌다.

 

  말없이 고개 숙인 내 사촌은 미동도 하지 않은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보다못한 잇시키가 한 걸음 내디뎠다. 억지로 비빈 눈가는 퉁퉁 불어 있었고 두 뺨은 마치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붉었다. 울음섞인 목소리를 힘겹게 토해내려 한 그 때,

 

  유키노시타가 고개 숙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멈칫한 잇시키, 그 볼 위로, 무심코 흘러나온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 합니다······.”

 

  겨우 들을 수 있었던 한 마디.

  꺼져 들어갈듯 희미한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지만,

  습기찬 숨결에 새어나온 후회를 가릴 수는 없었다.

 

  “모두 제 잘못이에요. 부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 하지 못 했습니다. 제가······.”

  “유키노시타!”

 

  더는 들을 수 없어, 소리를 질러 다음 말을 막았다.

  문을 열기 전 언뜻 보았던, 피가 날 정도로 깨문 입술이 아른거렸다.

  바보, 멍청이, 하치만!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왜 가만히 있었어! 왜 아무것도 안 했냐고! 진작 움직였어야지 이 쓸모없는 놈아!

  유키노시타가 사과를 하는 것만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았어야지!

 

  “선배······?”

  “히, 히키가야 군?!”

  “히키가야 선배?!”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유키노시타에게 달려갔다.

  끌어안듯이 어깨를 부여잡고 고개 들려는 유키노시타를 멈춰 세운다.

  울고 있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울고 있다면 가려줘야 한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내 사촌이, 나 같은 걸 지키려다 상처 입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유키노시타의 약한 모습을, 저들에게 드러내선 안 된다.

  울고 있지 않다면, 울게 해줘야 한다. 내 사촌은 울보지만 우는 법을 모른다. 서러움도 울분도 가슴속에 감춰둔채 삭이기만 할 뿐, 언제나 강하게 살 것을 강요받은 유키노시타 가의 차녀였다.

  모순되어 있대도 좋아.

  욕을 먹어도 상관없어. 맞아도 싸지. 겁쟁이인 나를 경멸한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야.

  그렇지만 그건 나중에 치를 죄값.

  나는, 유키노를 이렇게 만든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어.

 

  위협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빠드득 이 가는 소리로 먼저 나왔다. 유키노의 어깨에 올린 손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돌려 노려보았다. 씩씩거리는 숨결 속 짐승같이 으르렁 대는 소리가 삐져나온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니들이 지금······.”

  “히키가야 군.”

 

   급하게 들이킨 숨이 목구멍에서 밀려나오던 날숨과 엉겨붙는다. 역류한 공기가 목젖을 건드려 사레가 들린듯한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내 소맷부리를 움켜쥔 자그마한 손이 그 모든 고통을 잊게 했다.

 

  “유키노시타, 괜찮아?”

 

  고개를 든 그녀는 언뜻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투명한 빛을 뿜었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듯한 그 눈은 내가 좋아했던 유키노의 눈동자였다. 아득한 밤하늘 아래, 칠흑처럼 컴컴했던 세상에서 나를 비춰준 유일한 달빛이었다.

 

  “난 괜찮아. 신경쓰지 마.”

  “아니, 어떻게 그래.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넌······.”

  “빨리 왔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눈꺼풀을 떨구며,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는 유키노시타. 그만해,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슬픈 듯한 얼굴로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고.

 

  “그녀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실행 위원회의 피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일거리를 밀어붙였고,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 했어. 교섭에 실패해 분배하지 못한 일거리는, 잡무부라는 핑계로 너희들에게 떠넘겼지.”

 

  아니야, 네 지시는 정확했어. 목표는 명확했고, 무리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떠넘겨? 누가?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남들이 미루고 방치한 일까지 떠맡아, 누구보다 바쁘게 일한 사람은 유키노시타잖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상황에서도 성과를 낸 것도, 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텐데······.

무엇 하나, 네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는데······.

 

  변명은 태산처럼 많았지만, 그 어떤 것도 입으로 나와주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 나는, 애초에 부위원장의 재목이 아니었던 거야.”

  “유키노시타!”

 

  어째서, 어째서······.

  대체 왜 그렇게, 혼자서 다 짊어지려 하는 거냐구!

 

  “놔 줘, 히키가야 군.”

  

  끝내 유키노시타는 내 눈을 마주봐주지 않았다. 몸을 비틀어 내 품을 빠져나가더니 담담한 손길로 매무새를 정돈했다. 반듯이 편 등과 꼿꼿한 다리, 언제나처럼 늠름하던 유키노시타는, 줄기가 꺾여버린 꽃처럼 고개 숙였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히키가야 군도 나쁜 뜻은 없었을 거에요. 방금 도착해 지금의 상황을 오해했나 봅니다. 다시 한 번 사과 드립니다.”

 

  무어라 말하려 해도, 손을 잡고 일으키려 해도, 유키노시타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뒷모습은 결연한 의지로 우리들을 막아섰다.

  거부하고 있었다.

 

  “아, 알았다면 됐어요. 딱히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도 아니었고······.”

  “히키가야 선배도, 저희는 어디까지나 좋은 뜻에서 말한 거니까, 오해 하지 말아주세요!”

  “응응! 다 잘 되자고 하는 거니까, 그렇지?”

 

  그 입 닥쳐.

  내 앞에서 그 역겨운 혓바닥을 놀리지 마.

  제발 사라지란 말이야.

 

  “윽?!”

 

  터져 나오려던 울분은 격통에 가로막혔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충격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시선을 내리자 내딛은 발을 밟고 있는 유키노시타의 실내화가 보였다.

 

  “조금, 머리를 식히도록 하죠.”

 

  유키노시타가 뒤돌아보지 않았기에, 그 말이 나에게 하는 말이란 것을 깨닫는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인원도 부족하고 하니 오늘 회의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주신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부서별로 한 명씩 현재 진행 상황을 적어 제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간략하게라도 괜찮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집행부석으로 돌아가 버렸다. 회의실 안팎에 서 있던 실행 위원들은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하면서도 지시에 따라 주었다. 이런 분위기에 이런 출석률, 억지로 회의를 열어봐야 의미가 없다. 유키노시타의 제안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한 명씩 다가가 쪽지를 건넨다. 유키노시타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준 실행 위원들도 다소 미안한 얼굴로 인사해 주었다.

 

  어색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방금 전의 말다툼을 상기시켰다.

 

  “저기······, 우리도 내야 하지 않아?”

  “우리 부서 일을 가장 잘 아는 건 너희들이니까······.”

 

  낯짝도 두껍네. 이런 상황에서 말을 걸 수 있다니.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유키노시타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속이 뒤틀리는 감각을 꾹 참고, 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죠? 여기는 저희가 맡을 테니 여러분은 먼저 돌아가 보세요.”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됐으니까 가 봐요. 잇시키나 유키노시타와는 마주보기 껄끄러울 텐데요.”

  “응, 그건 그런데······.”

  “히키가야 선배는 안 가나요?”

  “맞아. 한 사람만 남으면 되잖아. 괜찮다면 같이······.”

  “나? 나는······.”

 

  유키노시타,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줘.

  나는 참을만큼 참았어.

 

  “잇시키를 도와줘야지. 서툴고 부족한 1학년이니까, 실수를 할 수도 있잖아? 선배가 되서 후배에게만 떠넘긴 채 돌아가면 기분이 찜찜하거든.”

 

  때때로 사람은 거울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표정을 알 수 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한데 모아놓은 듯이 어둡고,  호감을 품은 사람조차 쉬이 다가가지 못 할 만큼 험악하고, 세상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처럼 썩어있던 눈동자.

  분명 지금, 그런 눈을 하고 있을 것이다.

 

  “히익?!”
  “서, 선배······.”

  “아, 알았단다. 우린 이만 가 볼게. 이, 잇시키 양을 부탁해!”

 

  가방을 둘러멘 소녀들은 부리나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스스로도 놀랄만큼의 분노를 담아, 닿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들이 사라진 문을 노려보았다.

  아는 거라곤 학년과 성 뿐, 풀네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매일같이 만나는 같은 부서 동료에 불과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말이다.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네요. 저 사람들에게 저는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가 봐요.”

 

  바로 옆까지 다가온 하타노가 시니컬하게 뇌까렸다. 너무도 명백한 진실이었기에 긍정도 부정도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마지막 순서는 이름 모를 남학생이었다. 고개를 뻗어 복도를 살피고 뒤돌아보더니 다시 한 번 회의실을 둘러본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 숙이더니 살며시 문을 닫는다.

 

  “아는 사이세요?”
  “그냥 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겠지. 그보다,”

 

  고개를 돌리자 하타노의 시선도 따라왔다. 우리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바로 뒤에 서 있던 잇시키가 몸을 뒤틀었다. 조심스레 올려다보는 시선에 눈을 맞출 수 없어, 고개를 떨군 채 겨우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어.”

 

  잇시키에게만 하는 사과는 아니었다. 유키노시타도 하타노도, 이 부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야할 말이다. 나를 믿고 의지하던, 도움을 청한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다. 배신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었다.

 

  유키노시타에게서 시선을 돌려 잇시키를 바라본 건 우연이었다.

  벌을 받아도 상관없고, 오히려 원하는 바였건만,

  무엇이 두려워 피해버린 것일까?

 

  “왜 선배가 사과하세요?”

  “어?”

 

  정정한다. 나는 눈앞에 있는 잇시키조차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악덕 상사이자 귀신 부장에, 이따금 속물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깜찍한 후배인 잇시키 이로하는,

  무슨 말을 하냐는 양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시에 맞춰 와 달라고 부탁한 건 저였잖아요. 선배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빨리 끼어들었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 아냐.”

  “글쎄요. 언젠가는 터졌을 일 아닐까요? 괜히 어정쩡하게 관계를 유지해봐야 폭탄 돌리기밖에 안 되고, 이쯤에서 터뜨리는 게 좋았을지도 몰라요.”

 

  어깨를 으쓱하며,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시원스레 되받아친다.

 

  “어차피 있어봐야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 아닙니까. 제발로 돌아가 준 게 다행인거죠. 좋게 생각하자구요.”

  “뭐, 거기에 대해선 동감이지만.”

 

  하타노의 말에 반사적으로 맞장구가 튀어나왔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나도 참 단순하네.

 

  “저는 선배가 와주신 것만으로도 기뻐요. 선배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저희는······.”

 

  잇시키가 말을 흐리자 자연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뒷발을 쭉 빼서 시선을 돌리자, 시야의 양쪽 끄트머리에 기록 잡무부와 집행부가 동시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눈은 각기 다른 방향을 비추었지만,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건 같은 사람이었다.

 

  “과대평가라고······.”

 

  대답은 했지만 어떻게 말을 풀어나가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타노가 도와달라고 부탁한 부장은 틀림없이 잇시키다. 다만, 내게는 훨씬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부장이 한 명 더 있었다.

  봉사부 부장, 유키노시타 유키노.

  뜻밖에도 그녀는 아무일 없었다는 양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위원들이 주고 간 정보를 검토하는 걸까?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건 쪽지만이 아니었다.

 

  휴대전화?

  그순간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려퍼졌다. 각자의 주머니, 혹은 가방에서 새어나온 멜로디가 유키노시타의 책상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진동에 섞여 하모니를 이룬다.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손을 뻗어 화면에 표시된 내용을 확인한다.

 

  「오늘 미팅은 생략입니다. 회의실에 가셔도 아무도 없으니, 괜한 발걸음 하시는 분이 없으셨으면 해서요~. 대신 내일은 꼭 참석해 주세요! 중대 발표가 있거든요!」

 

  시로메구리 선배가 만든 실행 위원회 단체 채팅방.

  다소 경박한 메세지의 좌상단, 선명하게 표시된 이름은 사가미 미나미였다.

 

  “거참, 아무래도 저희 모두 다 투명인간 취급인 거 같은데요?”

 

  미간을 찌푸린 하타노가 혀를 찼다. 동감이다. 괜한 발걸음이라니,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보나마나 쓸데없는 일이겠죠?”
  “중대 발표고 뭐고 평소에나 잘했으면 말이나 않지.”

  “우와, 읽음 표시 뜨는 거 봐. 출석은 안 하면서 채팅방은 또 잘 읽네.”

  “몇 명이나 봤는지는 알아도, 누가 봤는지는 특정할 수 없으니까.”

 

  한 번 내뱉기 시작한 불만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원래라면 그저 허공으로 사라졌을 혼잣말이 맞장구를 양분삼아 성장해간다. 빈 코트에서 혼자 공을 날리는 것과, 맞받아칠 상대가 있는 것, 어느 쪽이 효율이 좋을 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는 무력했다.

  상대는 다수였고, 사람의 감정을 상대하는 데 익숙한 프로들이었다. 한 번 잡은 꼬투리는 놓아주지 않았고 규칙도 매너도 무시한 채 선공권을 가져갔다.

  

  패색이 짙어져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관중이 많아봐야 교체 선수는 될 수 없어.

 

  “확인한 모양이구나.”

 

  얼굴은 이쪽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훨씬 더 아래에 있었다. 

 

  “유키노시타가 알려준 거야?”

  “그래. 내가 보고했어.”

  “뭐라고 하던데?”
  “알겠다고, 사정이 있어 불참하려던 참에 잘 됐다고, 했어.”
  “그게 무슨······, 아니, 됐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그것보다도 유키노시타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갈 사람은 가도 항상 마지막까지 회의실을 지키던 유키노시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책상 위에 올린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은 종이뭉치를 탁탁 내리쳐 고정하고, 파일에 끼운 채로 책가방에 집어넣었다.

 

  “유키노시타?”
  “일이 바빠서 먼저 실례할게. 문단속을 부탁해.”

  “어, 벌써?” 

  “보고를 받은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어. 올 사람도 없고, 특이사항이 있으면 라인으로 전할 거야.”

 

  가방끈을 둘러 매며 자리에서 일어선 유키노시타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문득, 시선이 마주친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당신들은 천천히 내도 상관없단다. 여태까지 잘해주었고 하치만도 있으니까, 내가 봐줄 필요는 없겠지.”

  믿어주는 말조차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중으로만 보내주렴. 라인이나 메일 어느 쪽이든 괜찮아. 그럼, 부탁할게.”

  “유키노시타······.”

 

  불러보아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쓸쓸한 표정으로 미소지은 유키노시타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사뿐히 미끄러지는 실내화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가 보세요.”

 

  어깨에 닿는 감촉에 내려다보자, 자그마한 주먹이 닿아 있었다. 그것이 잇시키의 손이란 걸 깨닫을 찰나, 우악스런 손길에 퍽퍽 떠밀렸다.

 

  “자, 잠깐만! 그럼 너는······!”

  “지금 제 걱정을 할 때인가요? 이야기를 하려면 지금밖에 없어요. 여기야 원래부터 왕래가 적었고, 오늘은 이제 아무도 오지 않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아직 이른 시간이니 다른 학생들과 마주칠 수도 있구요. 이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유키노시타 선배가 계단으로 가기 전에 서두르세요.”

  “그치만······.”

 

  확실히 이대로는 유키노시타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따라잡는다 한들 이야기를 들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거절한 태도로 보아 분명 내가 따라오는 걸 바라지는 않을 테지.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에 남아 잇시키를 도와주는 쪽이 올바르지 않을까?

  어느 쪽도 구할 수 없고, 무엇을 골라도 후회할 거라면,

  최소한, 지금 이순간만이라도, 아무도 상처입지 않는 선택지를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잇시키는 그렇게 도망치려는 나를 용납하지 않았다.

 

  “빨리 가라니까요? 선배는 이번에도 늦을 생각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딨어, 이 치사한 후배님이.

 

  “미안, 먼저 가마. 뒷일은 부탁한다.”

  “우와, 뜬금없이 멋진 대사 하는 거 봐. 짜증나네.”
  “부탁이라뇨. 원래부터 제가 해야할 일인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부원과, 드물게도 솔직한 부장의 배웅.

  두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가방끈을 고쳐 맸다. 마지막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여준 뒤,   

  유키노시타가 그랬듯, 뒤돌아보는 일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xxx

 

  “······괜찮겠어?”

  “뭐가 말이죠?”

 

  되물어 왔지만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긴 커녕 그 어색한 미소조차 거두지 않는다. 보여주어야 할 사람, 강한 척 해야 할 그 사람은 이미 나가 버렸건만, 잇시키는 배웅한 자세 그대로 두 사람이 나가버린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안 쫓아가도 되겠냐는 말이야.”

  “제가 왜 쫓아가야 하는데요?”

  “아니, 그, 뭐냐······.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없어요, 없어. 다 전했으니까.”

 

  그럼 그 소름끼치는 미소는 그만둬 주지 않겠어? 방금 전 눈물 흘리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딴판이라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태연해 보이는 게 더 수상해, 로봇을 상대하는 거 같아 엄청 무서운데요.

 

  “보고서 쓰는 거, 부부장에게 도와 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안 돼요.”

  “어째서. 지금까지는 자주 부탁해 왔잖아.”

  “그렇기 때문이에요.”

 

  짤막한 대꾸에 눈치채지 못 했는데, 비음 섞인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한 음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과장 섞어 말하자면 호러 무비에서나 나올 법한 노이즈 낀 저음이라고나 할까? 소리없이 돌아가는 고개는 올빼미를 떠올리게 했고, 무미건조한 미소가 이쪽을 향할 때까지 황갈색 머리카락은 흔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무섭다.

 

  “선배는 이미 할 만큼 했어요.”

  “부부장인 건 부정하지 않는구나.”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선배’라고만 호칭할 때는 그 사람밖에 없다. 보통명사라기 보다 고유명사에 가까웠다. 영어로 하면 The가 붙는, 유일한 무언가 말이다.

 

  “설마요. 기여도로 따지면 선배야말로 부장이죠. 알고 있잖아요?”
  “글쎄······.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른 거 아니겠어? 그 사람은 뭐랄까, 참모 스타일인 거지. 뒤에서 뭔가 꾸미고 조종하는 건 잘 해도, 앞에서 사람들에게 뭐라 할 스타일은 못 돼. 인간관찰이 특기라느니 말만 번듯하지 자기가 얼마나 인기 많은지도 모르잖아.”

  “풉.”

 

  로봇처럼 무미건조한 미소에 변화가 생겼다. 배를 부여잡고 고개 숙인 잇시키가 웃기 시작했다. 진심인 웃음소리는 의외로 호탕하구나. 그저 내 앞에서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리가 없지는 않네요.”

  “그렇지?”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구요. 방금 전 그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저라고 다를 건 없어요. 사람 다루는 것도 못 하고, 그 분들의 행동력을 과소평가했죠. 완패에요. 완전히 져버렸어요.”

 

  잠깐의 미소가 사그라든 자리에 씁쓸한 후회가 피어 올랐다.

 

  “······기회였을지도 몰라. 눈 딱감고 의지했으면 그 사람은 떠나지 않았을 거야. 부위원장이 나갔을 때 바로 나가지 않은 것도, 분명 네가 걱정되었기 때문일 테고. 어째서 등을 떠민 거야?”

  “당신은 도대체 저를 뭘로 보시는 건가요?”
  “······약삭빠른 후배 포지션?”
  “뭐야 이 바보는.”

 

  쯧 혀를 차더니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차, 차라리 기계같은 미소가 나았어. 여고생 무서워······.

 

  “아, 그래서 선배를 불러온 건가요? 당신도 좀 전의 바보들처럼, 제가 선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뭐야, 아냐? 그럼 뭔데?”

  “글쎄요.”

 

  눈꺼풀을 내리깔더니, 쓸쓸한 어조로 덧붙인다.

 

  “존경, 일까요·····?”

 

  자연스럽게 움직인 시선은 집행부석을 훑고 지나갔다. 오늘 유일하게 사람이 앉아, 아직까지도 그 온기가 남아있을 부위원장석을 또렷이 응시한다. 

 

  “하지만, 만약 유키노시타 선배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추억을 더듬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였다.

 

  “역시, 등을 밀어준 건 정답이었어.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 또 그렇게 됐을 거니까.”

  “뭐?”
  “자기도 울고 싶으면서, 사실 가장 상처 받은 건 본인이면서,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주려고 했겠지. 남아있는 게 없다는 것쯤, 스스로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잇시키 씨?”

 

  이름을 불러보아도 나직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끊이지 않았다. 조금 촉촉해 보이는 눈동자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 머나먼 곳을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나까지 여동생 취급을 당할 줄이야. 선배는 대체 얼마나 연하를 좋아하는 거야······.”

 

   목이 메이듯 잦아드는 목소리는 어떤 의미론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불쑥 고개를 든 잇시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참는 건가? 그러나 그 표정에 슬픈 기색은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 하죠.”

 

  이쪽을 돌아본 잇시키는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얼굴을 덮은 가면 위로 하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솟아오른다.

  

  역시, 그 사람을 대할 때와는 태도가 다르다.

  선배는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다면 언제부터 눈치챈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부류의 인간이 그리도 간단히 마음을 터 놓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구태여 지적하는 것도 멋없는 것 같아, 짐짓 불만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던 사람 어디 갔어? 기껏 도와 줬더니 이러기야? ”

  “선배만 부르고 빠진 주제에 도와주기는 무슨. 끼어들지도 못했던 겁쟁이가 말이 많네요. 그 여자들이 그렇게나 무서웠나요?”

  “제기랄, 가위바위보 이기는 게 아니였어. 괜히 여자들에게 찍히고 사방에서 눈총받고······. 나도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게 아니란 말이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잖아요. 남들 다 즐기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외톨이가 끼어들어 봐야 서로가 피곤해질 뿐이거든요?”

  “신랄하구만. 남말 할 처지냐?”

  “읏······.”

  “게다가 뭐, 정 뻘쭘하면 그 녀석 도와주지 뭐. 일손 비는 곳 하나쯤은 있을 거니까. ······그렇겠지?”

  “낸들 아나요. 그 메이드 카페인가 뭔가 하는 그거 말이죠? 우리반도 진짜 이상하다니까. 학창 시절 다시 오지 않을 추억을 웬 오타쿠 컨텐츠로 물들이다니.”

  “거 말 좀······.”

  “됐고, 존댓말로 해줄 때 빨리 일하세요. 유키노시타 선배는 분명 바쁠 테니, 수정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수밖에 없어요. 하는 김에 내일 있을 회의도 준비해 둡시다. 다 할때까지 집에 못 가니 그런 줄 알구요.”

  “젠장!!!”

 

  심기 불편한 부장에게 반항한 댓가는 참혹했다.

  어깨에 올려진 손은 작았지만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살의를 방불케 했다. 목을 조르는 듯한 착각에 숨이 가빠, 칼라 근처의 단추를 풀어헤쳤다. 잇시키는 그것을 순순히 앉아 일을 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나 보다. 의자를 끌고 곁에 다가오더니 가방 속에서 서류를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몇 개야 이거? 이걸 혼자 했다고?

 

  “이쪽은 선배가 도와주셨으니 괜찮을 거에요. ······아마.”

 

  늘어놓은 서류의 칠, 팔할 되는 분량을 끌어 한쪽 구석에 밀어두었다.

 

  “저것들은 나중에 해도 돼요. 급한 일들은 이쪽. 원래라면 오늘 확인을 받을 생각이었지만······.”

 

  들이 쉬던 숨이 멈추더니, 조그마한 입술 사이로 호오오 조용한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한숨이 되지 않게 호흡을 가다듬은 잇시키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짝 쳤다.

 

  “어쩔 수 없죠. 꿩대신 닭이라고.”

  “어이.”

  “당신도 일단은 잡무부고, 생각이 없는 타입은 아니니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스스로가 한 일을 평가하는 건 아무래도 잘 안 되더라고요. 타인의 시각에서 의견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하는 주제에 이게 무슨 무례한 태도냐고. 말만 존댓말이지 두들겨 맞는 기분인데? 그나마 채용 이유 쪽은 호의적으로 들리지만, 저쯤되면 칭찬인지 욕인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나로 괜찮겠어?”

  도망칠 수 있으면 좋고, 실패해도 책임은 안 질 거다. 그런 포석을 깔 생각이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떠넘길 생각은 없으니까. 책임은 부장인 제가 져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모종의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결연한 눈빛을 보자, 그런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 뭐, 사람이 없는데 어쩌겠냐. 마음대로 부려먹어라.”

  “든든해라~. 오늘은 잘 부탁해요?”

 

  역시, 여고생은 무섭다.    



xxx

 

  회의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억누르며 발소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인기척 없는 복도를 달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을 저울질 했다.

 

  아래로 가면 십중팔구 신발장이다. 문화제 준비 기간이어도 하교 중인 학생은 있을 거고, 비품 구입 따위로 들락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실행 위원들과 맞닥뜨릴 지도 모르지. 적지 않은 구경꾼들 탓에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퍼졌을 것이다. 

 

  유키노시타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 언제나 당당하지만, 이목이 쏠리는 일은 거북해하는 그녀다. 그 점을 잘 알기에 하교 시간까지는 남을 거라 생각했다. 한가하다는 핑계로 일을 뺏어, 그 어깨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는데······. 안일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유키노시타와의 거리는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틀린 선택지를 고르면 안 된다. 그래,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만약 위로 간다면? 4층까지 올라가 구름다리를 거치면 부실이 있는 특별동으로 갈 수 있다. 학급 행사가 중심이 되는만큼 동아리들의 집합소인 특별관도 평소보다는 조용할 것이다. 숨을 돌리거나 사람의 눈을 피하기에 거기만큼 적합한 장소는 없었다.

 

  태연해 보여도 믿지 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에 속아선 안 돼.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해. 약한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는 고집쟁이를 믿어선 안 돼.

  그런 일을 겪은 유키노의 속이,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잖아.

 

  “유키노······시타.”

  “······.”

 

  내 사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멀기는 커녕 모퉁이 하나를 사이에 둔 같은 층이었다. 계단 앞에 서 있던 유키노시타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층계참을 꺾어 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길을 눈으로 쫒으며.

 

  “······왜 왔니. 부탁은 어쩌고?”

 

  몹시도 조용한 목소리는 집중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를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행동에 깨닫고 말았다.

  유키노시타는 지금, 소용돌이치는 격한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잇시키에게 맡겼다. 원래부터 부장은 그 녀석이였고, 나는 좀 쉬어도 되잖냐.”

  “거짓말이네. 당신답지 않아.”

 

  단호한 부정에 말문이 막혔다. 뒤돌아 서 있는 그녀가 이쪽이 볼 수 있을 리 없건만,  마음 속 깊은 곳을 훤히 꿰뚫어 보인 듯한 착각에 휩싸여 유키노시타에게서 시선을 떨구었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도와줬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해. 잇시키 양은 우수한 아이지만, 아직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터인데······. 무책임한 행동을 했어.”

 

  떨리는 팔을 부여잡더니 천천히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에 겁이나, 무심코 변명하는 듯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건 유키노시타도 알잖아.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잇시키에게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안 돼. 지금 내가 도와주는 건 악영향만 미칠 뿐이야. 하면 되는 아이니까, 여기서부터는 믿고 맡겨서······.”

 

  도중부터 남의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은 의식의 밑바닥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왔다. 섬뜩하면서도 묘하게 낯익은 위화감이 솟아오른다. 나는 제대로 하고 있었을까? 그날 밤 하루 짱이 털어놓았던 말은, 어쩌면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언니가 아는 사실을 동생은 모를 거라 어째서 단정지었던 걸까?

 

  “······그래. 그래서 따라왔구나.”

 

  나를 향한 유키노의 얼굴을 보며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음을 깨달았다.

 

  “당신에게 있어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기다려, 그건 오해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변변치 못한 모습을 보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어.”

  “아냐! 내 말 좀 들어 줘, 유키노시타!”

  “히키가야 군.”

  “······어?”

 

  이 타이밍에 성으로 부른 것에 섭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채 고집을 부리는 사촌에게 답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부시게 웃는 미소가, 요 며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미소가 지금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유키노시타······.”

  “지적을 듣고서야 깨달았어. 지금껏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내 행동이 당신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 지도.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는게 정답이겠지. 당신은 언제나 받아 주니까. 불합리한 억지를 들이밀어도 언제나 불만 한 마디 없이 받아 주니까. ······그런 당신의 상냥함을 이용해 왔던 거야. 옛날처럼 말이야.”

  “아냐, 아니라고······. 그건, 틀렸······.”

  “틀리지 않아.”

 

  유리알같이 예쁘던 눈동자는 죽은 사람의 눈처럼 참혹했다. 반듯한 이목구비도 자랑스럽던 머리칼도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분위기가 나빠진 것도 당신이 고생하는 것도 모두 내 잘못이야.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실행 위원장 직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런 사태가 되지는 않았겠지. 모든 책임은 내가 받았어야 했는데······. 내가 부족한 탓에, 또다시 당신에게 짐을 씌워 버리고 말았구나.”

 

  대꾸할 틈도 없이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도와주지 마. 하치만은 이제 쉬어도 돼. 할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것을 해주었으니까. 당신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오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야.”

 

  조금 전 내가 한 말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 올 줄은 몰랐다. 제 꾀에 빠진 꼴이 되어 어떠한 궤변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생각은 언어로 고정되는 순간 왜곡되고 입 밖에 내뱉는 순간 뒤틀린다. 

  전하려 하는 마음은 옳고, 분명 진실일 터이건만, 말로서 표현하고자 할 때는 어김없이 거짓이 되곤 했다.

  가족같은 유키 짱과도 이 모양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었던 유키 짱과도 이렇게나 어긋난다. 

    

   “여기서부턴 내 몫, 유키노시타 유키노가 해야할 일이야. 걱정은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 나는 누나니까.”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말로 해도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말들.

  온전히 전해지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듯 발버둥 쳤다.

 

  “믿을 수 없다느니 이용해 왔다느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가 유키노시타를 도와주는 건 당연했던 거야. 누나와 남동생이어도 그건 똑같은 거잖아.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나는 모르겠어. 어째서 나를 밀어내는지, 왜 이 모든 일을 유키노시타가 책임져야 하는 지 도저히 모르겠다구······.”

 

  감정에 휩싸여 쏟아붓는 말을 유키노시타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 자애로운 미소를 보고 있자니 콧김을 씩씩거리며 칭얼거리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유키 짱의 입버릇처럼 정말로 나 자신이 동생이 된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 거야?”

 

  내가 진정될 때까지 유키노시타는 끈기있게 기다려 주었다.

  생각을 곱씹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유키노시타는 담담히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아마도······, 서로의 생각이 달랐다는 거겠지.”



  xxx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문득, 오래된 추억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 친구들과 나란히 누워 함께 잤을 때의 일이다.

  괜시리 들떠 잠이오지 않는 밤이면 이렇게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그날 있었던 일, 함께 봤던 특촬물의 감상회, 내일은 어디로 놀러갈까 등 아이다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소재가 떨어질 때까지 잠들지 못한 날은 착한 아이가 되긴 그른 날. 어디선가 꺼낸 라이트를 위로 비추어, 서로의 손으로 그림자 놀이를 하고는 했다.

 

  개는 코마치의 주특기였다. 키워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울음소리를 기가 막히게 잘 따라하던 내 동생.

  사 짱의 그것은 늑대로 간주되었다. 길고 가느다란 사 짱의 손가락은 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멋들어진 그림자를 만들어 냈으니까.

  팔찌와 수염이 필요한 고양이는 엄밀히 말하면 사도였지만, 우리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다. 진지하게 몰입해 최고의 고양이를 만드려는 유키노가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맡았던 건 여우.

  라이트를 드는 역할을 도맡았기에 한손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동물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것이 불만이었던 적은 없다.

  내가 만든 무대 위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일루미네이션처럼 아름다웠다. 희미한 조명 아래 미소짓는 얼굴이 좋았고, 부모님에게 들킬세라 소리죽여 웃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고개를 돌려 왼편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잠자리에 들 때면 언제나 비어있던 자리. 어느샌가 유키 짱의 지정석이 되어 있던 그 자리였다.

  

  거기엔 이제 아무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한 침대에 네 명씩이나 끼여 자던 시절은 지났다. 성장에 비례해 작아져버린 침대는 이제는 고작 두 명 정도가 한계였다. 일곱 아이들로 떠들썩하던 히키가야 가는 어느덧 어정쩡하게 커버린 세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족처럼 친하던 사람들도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 채, 남매처럼 컸던 유키 짱도 내 곁에 없다.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쓸데없는 상념이 나를 놓아 주지 않는다. 그리운 추억은 방심하는 순간 봇물이 터지듯 가슴에 밀려들었다. 어두컴컴한 어둠 속 축 늘어진 팔다리에는 빳빳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저녁밥이 뭐였더라? 먹는둥 마는둥 거실을 나왔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코마치에게는 나중에 사과해 두자. 누나도 있었던가?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 있었어도 아무 말도 안 했을 텐데······.

 

  불현듯 들려온 알람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시곗바늘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하, 잠이 안 온 건 그래서였군. 일거리가 끊이지 않은 탓에 최근 날짜가 바뀌기 전에 잠든 적이 없다. 어느새 과로가 당연해진 걸까, 몸에 밴 습관이란 무섭다니까.  

 

  잇시키인가?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마감 1시간 전에 라인을 보내다니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구만. 그러나 들여다본 휴대폰에는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히키가야 군, 잠깐 괜찮니?」

 

  학생회장인 시로메구리 메구리였다. 

 

  「엇, 네. 무슨 일이시죠?」

 

  전송 버튼을 누르고서야 아차 싶었다. 문자가 오자마자 답장이라니, 이래서야 마치 내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 같잖아? 그치만 딱히 바쁜 일은 없고, 괜시리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고······.

 

  하지만 상대가 누군가. 소부고 최강의 치유 캐릭터 메구메구 메구링.

  시로메구리 선배는 21세기 여고생과는 억만광년 떨어진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다행이야~! 자고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메세지를 보낸지 정확히 7초만에 즉답이 왔다. 확인-분석-대응의 3단 프로세스를 건너뛰어도 초당 3글자는 쓸 수 있어야 이 속도가 나온다. 사고방식과 별개로 스킬만은 확실히 여고생이었다.

 

  요즘 여자들은 이 정도가 기본인 걸까? 그러고 보니 유미코나 코마치도 타자 속도가 빨랐지. 유이가하마는 말할 것도 없고, 사 짱은 한 손으로도 불편함없이 메세지를 보내곤 했다. 유키노시타는······, 개인차가 있다는 걸로 해두자.

 

  「미안한데, 전화로 얘기해도 될까?」

  

  하늘하늘 느긋한 메구링 보이스를 떠올려 보았다. 자판으로 치는 쪽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 앞에서 할 수는 없는 말이다. 선선히 수긍하자, 녹색 화면은 음성 통화로 전환되었다.

 

  “흠흠, 밤늦게 실례가 많습니다. 건강하신지요?”

  “네? ······아! 네, 네. 그렇습니다만······.”

 

  듣도 보도 못한 첫인사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흠흠은 또 뭐에요? 목을 가다듬을 거라면 통화가 연결되기 전에 했어야죠. 소꿉장난 같은 멘트도 그렇고, 설마 기대 하셨던 건가? 나도 맞춰줘야 하나?

 

  “그, 그 쪽은 건강하신가요?”

  “물론입니다~,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핫 짱」.”

  “푸핫!”

 

  옛날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의외의 인물에게서 튀어나온 이름에 사레가 들렸다. 

 

  “무, 무슨 일이에요, 시로메구리 선배?”

  “「메구 짱」으로도 괜찮은데?”

  “아뇨, 그건 역시 좀 어렵다고나 할까.”

  “푸훕.”

 

  콜록거리는 재채기를 눌러참고 간신히 대꾸한 말이었건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건 야속한 웃음소리였다.

 

  “역시 히키가야 군은 착실하구나! 하루 선배가 말한 대로야. 메구 짱으로 불리는게 쉽지 않겠는걸~.”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민망했는지 시로메구리 선배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미안해. 혹시 화났어?”
  “설마요. 그냥 좀 뜻밖이어서······.”

  “미안미안. 내가 조금 들떴었나 봐. 요 며칠간은 눈코뜰새 없이 바빴거든. 히키가야 군이랑 얘기하는 게 오랜만이라 긴장이 풀렸지 뭐야~?”

 

  그러고 보니 최근 얼굴 보기가 힘들긴 했다. 시로메구리 선배랑 대화하는 게 며칠 만이지?

 

  “수험생이니 어쩔 수 없죠. 입시 준비에 학생회장에 위원회 업무도 맡아 주시고 계시니까요.”

  “음, 딱히 그것 때문은 아냐. 나는 추천입학이라 입시에 영향은 없구, 이 시기의 학생회 업무는 문화제에 집중되어 있으니 사실상 같은 일이나 마찬가지거든.”

 

  호오, 추천 입학이라. 학생회장이 되면 그런 메리트도 생기는구나. 그러고보니 코마치도 학생회 소속이었지 아마? 그 녀석도 슬슬 입시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인데, 여태 말이 없는 걸 보면 중학교에는 그런 제도가 없는 건가?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서 알아봐야겠는걸?

 

  “히키가야 군?”

  “느앗, 넵, 죄송합니다! 듣고 있어요.”

 

  위험해, 학생회라는 키워드 하나로 여동생 생각에 빠져버리다니, 이래서야 시스콘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잖아? 아니, 딱히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 중인 시로메구리 선배에게 예의가 아니니까.

 

  생각해 보자, 무슨 이야기 중이였더라? 그러니까 분명······.

 

  “어라?”

 

  잠깐만.

 

  “시로메구리 선배, 분명 오늘도 자리를 비우셨죠?”
  “맞아. 손님이 왔었거든. 내빈 접객도 집행부의 일이니까.”

 

  확실히 내빈도 ‘방문객’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 시로메구리 선배가 응대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치만 그게 그 정도로 바쁜 일인가? 집행부가 맡은 일은 그것 밖에 없었을 텐데······.

 

  “제법 높으신 분이 오셨나 보네요. 히라츠카 선생님도 함께 가신 모양인데.”

  “아, 그건······.”

  “······생각해 보면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었죠. 그러고보니 방금 전 ‘며칠간’ 눈코뜰새 없이 바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공기가 빨려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주변의 잡음이 살짝 커졌다. 수화기 너머 멀리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티내지 않으려고 휴대폰에서 귀를 떼 버렸구나. 정말이지 숨기는 것 하나는 서툰 선배님이다.

 

  “실은 말이지.”

 

  포근함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지함은 확실히 전해졌다.

 

  “문화제에 관련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시는 분들이 많아.”

  “학부모들이군요.”
  “맞아. 어떻게 그걸······.”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걱정해, 괜한 참견을 하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으니까요.”

 

  시로메구리 선배가 피식 웃었다.

  

  “히키가야 군네 집도 그래?”
  “글쎄요, 오히려 정반대가 아닌가 싶네요. 저희 어머니가 꽤나 선진적이라.”

  “우와~, 부러워라. 히키가야 군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꼭 만나뵙고 싶은걸?”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일이 바빠서 자식들에게 신경쓸 틈이 없었던 거니까요.”

  “그만큼 너희들을 믿었다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요. 하기야 안 바쁜 사람이 어딨겠어요. 저희 집은 가뜩이나 대가족이니 부모님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죠.”

 

  믿었다기 보다 믿을 수 밖에 없었다가 정답일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자식 셋을 키우는 건 노력의 문제가 아니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첫 아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이상의 아이를 갖는 건 온전히 부모의 권리였기에, 현실과 타협했다면 코마치는 태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님은 우리 세 남매를 낳기로 결정했고, 당신들의 젊음을 희생한 대가로 길러주었다. 같이 있어주지 못한 시간을 미안해 했기에 자식들의 일에 참견할 때면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하곤 하셨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부모도 많으니까요.”

  

  평소에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필요할 때만 간섭하는 그릇된 애정.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본능일 텐데,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말이 맞을지도. 맞아. 몇몇 학부형들이 찾아 오셨어. 학급 행사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였지.”

  “학급 행사인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불만을?”

  “일부 학급의 테마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전해 오셨어. 선정적이거나 불량스러운 기획이 있는 것 같다고, 나아가 사전에 학교 차원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게 유감스럽다고도······.”

 

  억지였다. 학부모 입장에서야 하나뿐인 자식일지 모르나 학교의 입장에선 수많은 학생 중 한 명일 뿐이다. 아무리 학생회장이라도 전교의 모든 반을 신경쓰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문화제는 학생들의 행사가 아닌가. 학생이 주인이 되고 학생이 즐길 수 있는, 학생 스스로가 즐겨야만 하는 축제.

 

  “요컨대 학생답지 않다는 거군요.”

 

  비슷한 질문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청춘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철썩같이 믿는 부류들에게 신물이 났다.

  청소년에게는 청소년의 나름의 생각이 있고, 각자의 개성과 가치관이 존재한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기준만을 들이미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문화제 당일까지는 아직 3주나 남았는데,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간 걸까요?”

 

  3주면 결과물이 구체화되기에는 이른 시기다.

  모두가 단합하는 행사에 들떠 무심코 가족에게 말한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데 멋지다거나, 누군가 바보같은 짓을 해 웃었다거나, 나는 이런 역할을 맡았으니 그 날 꼭 보러 오라거나.

  하지만 가족간의 거리가 그 정도로 친밀한 가정이라면 자식이 하는 일에 부모가 간섭할 것 같지는 않았다. 불만이 있더라도 학교에 찾아올 정도로 극성을 떨지는 않았겠지.

 

  분명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몇몇 학급이 홍보 사이트를 만든 모양이야.”

  “······홍보 사이트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침대 옆 벽면을 쳐다보았다. 저 벽 하나를 넘으면 누나의 방이다.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게 유미코는 아직 깨어있는 듯 했다. 

 

  아, 그래. 자정이 되려면 조금 남았구나. 오늘은 아직 오늘이었다.

 

  “왜 그래, 히키가야 군? 뭔가 아는 게 있어?”
  “아뇨. 아무것도······. 그래서, 그 홍보 사이트란 건?”

  “그렇게 거창한 건 아냐. 간단한 학급 소개나 제작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첨부한 정도였어. 그, 뭐더라? 브······, 브······.”

  “브이로그요?”

  “아, 그래 그거! 이야, 요즘 아이들은 대단하구나! SNS 정도는 우리 때도 했으니 상정 내였지만, 설마 홈페이지까지 만들었을 줄이야!”

 

  그런 슬픈 말은 그만두세요, 시로메구리 선배. 선배랑 저희는 고작 1년 차이밖에 안 나니까요. 히라츠카 선생님이 들으면 울어버릴 거에요?  

  

  다만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만은 확실했다.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문화제는 교내 행사인 첫 날과 외부에 공개되는 둘째 날로 나뉘어진다. 그렇다 한들 재학생 입장에서야 매일같이 보던 얼굴들인데 무슨 감흥이 있겠는가. 소속된 반의 상연물이 최우선인 그들이 남의 반 매상에 공헌해줄 이유는 없었다. 본방 전날의 리허설, 그 정도가 교내 행사에 대한 재학생들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에비나 양의 제안도 그런 맥락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주 고객층이 외부인이라면 인터넷을 통한 홍보가 효율적이다. 꼭 그럴 의도가 아니더라도 타인과 더불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두근거리는 경험이 된다. 현재가 과거가 되었을 때 다시금 돌이켜볼 수 있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욕망, 그것을 충족시키기에 기존의 SNS는 턱없이 부족했겠지. 매체의 발전이 사람의 욕망과 함께하는 한 이런 형태가 되는 건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뭐든 접하는 게 빠른 세대이니만큼 반에 한둘쯤 컴퓨터 전문가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없으면 또 어떤가. 조잡하게나마 만드는 게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며 그렇기에 진실될 것이다. 중요한건 그럴듯한 결과가 아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온 과정이니까.

 

  그러나 한두 학급 정도였으면 집행부가 이렇게까지 바쁘지는 않을 터. 유행과 허영, 경쟁의식에 민감한 고등학생들의 생태야 뻔하다. 보나마나 어느 한 반이 시작한 일이 경쟁을 붙여버린 거겠지. 도대체 어떤 녀석이야? 고작 이틀 하고 땡인 문화제에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인 게.

 

  “처음 시작한 게 아마, 1학년 C반이었던가?”

  뜨아아, 그거 잇시키네 반이잖아. 왜 하필 그 녀석들이냐고.

 

  “가장 지적이 많이 들어온 것도 그곳이였어. 뭐라고 했더라, 메이······드? 카페라고 했던 거 같은데. 다과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그, 그러게요.”

 

  음료보다는 서비스를 파는 직종이니까요. 그보다 메이드의 참뜻(?)을 모르다니 시로메구리 선배는 얼마나 순수한 거야. 설마 빅토리아 시대의 하녀라는 사전적 의미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유키노시타의 전매특허인데.

 

  ······오늘은 묘하게 생각이 다른데로 새는구만.

 

  “사이트의 홍보 문구도 괜찮았고, 딱히 불안한 부분은 못 찾았단 말이지. 제복이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딱히 선정적인 의상도 아니었는데······.”

  “기획서도 확인해 보셨나요?”

  “응. 그 쪽도 딱히 문제는 없었어.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요컨대 테마 찻집 같은 거지?”

  “그, 그렇죠 뭐······, 비슷할 거에요!”

 

  선배이자 연상의 여성에게 메이드 카페의 정의를 설명하라니, 신종 고문이야? 

 

  “혹시 예전 문화제에서는 이런 게 없었나요?”

 

  아무리 그래도 직접 말할 용기는 없어 우회적인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소부고라고 해서 인재(?)가 없었겠는가. 용기 넘치는 선구자를 기대했건만, 시로메구리 선배의 답변은 냉혹했다.

 

  “응, 없었는데? 적어도 내가 재학중일 때는 보지 못 했어.”

 

  이래서 명문고 범생이들은 안 된다니까! 청춘을 불태우는 문화제에 점잔이나 빼고 말이야! 가끔은 바보처럼 놀 줄도 알아야지! 하루 짱처럼!

 

  현실 도피를 시도했지만, 헛소리를 했다는 자괴감과 자리에 없는 사촌 누나를 팔아먹은 미안함만이 남을 뿐이었다.

 

  “나는 본 적이 없지만, 다른 학교의 문화제에선 꽤나 자주 나오는 컨셉이라고 했어. 사진 자료도 첨부되어 있었거든.”

 

  쓸데없이 기합이 들어간데다,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친절함.

  더 볼 것도 없이 동류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녀석은 외톨이다. 그것도 굉장히 높은 레벨.

 

  같은 외톨이여도 잇시키 같은 부류는 아니겠지. 튀고 싶어하는 여고생처럼 보여도 의외로 눈치가 좋은 녀석이다. 독특하다~ 던가, 재미있네~, 라는 말에 현혹되지 않는, 관심과 비웃음을 구분할 능력은 갖춘 아이였다.

 

  그럼 누구지? 하타노인가? 걔도 그다지 뭔가를 나서서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아니 그보다 두 사람은 실행 위원이잖아. 학급 행사에 참여할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망했다. 모르겠어. 1학년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 둘 뿐인데.

 

  “메뉴도 꼼꼼하게 준비했더라구. 일반적인 차나 커피 외에도 ‘인스턴트 커피’라고 당당히 적어 놓은 것도 재밌더라. 진짜 가게가 아니니 그런 뻔뻔함도 농담이 된다나?”

  “재료값도 줄일 수 있을테고 말이죠.”

 

  우스꽝스러운 웃음 포인트, 의미없는 지출을 최대한 배제하는 선택과 집중.

 

  “과자같은건 집에서 구워 오고, 케이크 종류는 전날에 만들어둔 걸 판 뒤 남는 건 먹으면 된대. 당일날 대여할 냉장고 외에 거의 모든 예산은 의상에 집중하 모양이더라고.”

 

  에비나 양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땅을 쳤겠군. 「메이드 카페라니!」 - 「1학년에도 이런 인재가!」 - 「질 수 없지, 우리는 집사 카페다!」 3단 콤보가 작렬했을 게 틀림없다. 맛있어져라~ 라며 제복 위에다 라떼 아트를 그리는 위험한 카페가 탄생했을 것 같지만.

 

  “컨셉도 구체적이고 효율도 좋고, 번거로운 장비가 필요하지도 않아. 우리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단 말이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솔직히 나조차도 설득당할 것 같았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만 봤을 때 지적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결국 트집이다. 문제는 부모 쪽이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라면 대략 80년대 전후 태생일까. 장년층 특유의 엄격한 잣대를 갖춤과 동시에 각종 대중매체에 친숙한 세대이기도 했다. 메이드 카페가 뭔지 알거나, 몰라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애지중지 키운 소중한 딸이 웬 코스프레 차림으로 아양을 떤다고 생각했다면 거부감을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것이 문화제라는 사실을 잊었다면 말이다.

 

  고등학생들을 얼마나 만만하게 보는 거야. 외설은 커녕 조금이라도 섣부른 짓을 했다간 C반 여자애들이 가만 있지 않았을 거라고. 이 계획을 입안한 녀석도 그 정도 사리분별은 가능할 거고, 여차하면 학생 차원에서 제지하면 된다. 그러라고 있는 학생회고,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실행 위원회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일단은 알겠다고 말씀드리고 조치를 약속드리긴 했지만, 그 이상은 우리도 막막해. 히라츠카 선생님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으신 것 같고······.”

 

  학교측도 곤란하겠지. 근거가 무엇이든 불만을 표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학부모의 존재란 그런 것이고, 거기에 일개 학생회장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젠 한계야······.”

 

  전화를 받았을 때 묘하게 들떠 보였던 건 이것 때문이였구나.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만큼 답답한 일도 없으니까. 속내를 털어놓고, 답답함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3년간의 학생회 활동으로 잔뼈가 굵은 시로메구리 선배다. 유능하지 않고서야 2년 연임을 불가능하고, 그 기간동안 이런저런 트러블이 적지는 않았겠지. 그런 사람이 이토록 고생하는 데에서, 작금의 사태가 보통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경쟁이라도 하듯 입김을 행사하려 드는 학부모들.

  문득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하나가 시작한 일이 불씨가 된다. 뒤쳐질 수 없다는 조급함이 기름을 붓는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과열된 경쟁은 목적없는 들불이 되어 애꿎은 벌판으로 번져 나간다.

 

  그렇다면 최초의 불을 지핀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다.

  

  “시로메구리 선배.”

  “응? 왜, 히키가야 군?”

  “실례가 될 지도 모르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뭔데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게!”

 

  기뻐보이는 듯한 목소리로 시로메구리 선배는 대답했다.

  묻지도 않고 들어주고, 망설이지 않고 받아준다.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해준다. 

  스스로가 지쳤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동생처럼 아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응응! 말해줘!”

 

  이토록 착한 사람이 하루 짱의 지인이란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렇기에, 이 이상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의 실행 위원회에서 누가 무엇을 말하든, 설령 그것이 잘못되었다 생각할 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세요.”

    “······네?”

 

  

  xxx

 

  이튿날 시작된 회의는 사가미의 주도 하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극도로 미미한 진척 사항에 현상유지라는 이름의 도돌이표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전날과 확연히 달라진 태도가 이상했는지 몇몇 인원이 눈치를 살폈지만 유키노시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부위원장이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시로메구리 선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유키노시타를 살폈지만, 그녀는 회의가 끝날때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 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무어라 귓속말을 하자 사슴같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 그리고 어제 라인으로 알려드린 전달사항 말인데요.”

 

  부랴부랴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눈으로 쫓던 사가미가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현재 다수의 학급이 여러 방식을 통해 학급 행사를 홍보하고 있어요. SNS나 지역 내 커뮤니티를 이용한 소통은 방문객 분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고 그것이 문화제의 홍보로 이어지기에 학교 측에서도 암묵적으로 인정해 왔습니다.”

 

  정중한 문체였으나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꼭 미리 외워둔 대사를 장난스럽게 읊조리는 것 같았다.

 

  “······만.”

 

  부자연스럽게 끊긴 호흡에 긴장감이 고조된다.

 

  “최근 몇몇 반에서 자작 홈페이지를 개설한 모양입니다. SNS 계정을 개설해 사이트와 연동하고, 구성원의 사진이나 촬영된 영상을 업로드하는 식으로 말이죠. 듣기로는 하루에 한번 꼴로 영상이 올라오는 반도 있다더군요.”

 

  하기야 홈페이지 하나 덜렁 만들었다고 해서 방문객들이 제발로 찾아오지는 않았겠지. 홍보 사이트가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선 검증된 마케팅 수단을 총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세 줄 이상은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많은 사진들을 배치하고, 링크를 따든 리트윗을 하든 최대한 많은 공간에 노출시킨다. 말 그대로 홍보를 위한 홍보인 셈이다.

 

  “선생님들께도 여쭤 봤지만 이런 방식으로 행사를 진행한 사례는 이전 문화제에서는 없었다는 듯 해요. 홍보에 관한 명문화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난감하다고 하시더군요.”

 

  찬찬히 회의실을 둘러보던 사가미가 헛기침을 했다. 그 행위는 목이 타서라기보다 지금부터 언급할 내용에 주관성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의 홍보는 기존과 달리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됩니다. 본인의 동의가 있었더라도 실존 인물의 사진이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건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거든요. 자극적인 방향으로 과열될 경우 학부모를 포함한 외부인 분들이 보기에도 좋지 못 하고, 학교, 나아가 우리들 실행 위원회가 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어요.”

 

  학교라는 모호한 집단이 접속사 하나에 실행 위원회로 탈바꿈했다. 

  이름도 성별도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 너무도 간단한 단어에 매몰되었다.

  

  복수임에도 때때로 단수로 느껴지는 복수 1인칭 대명사, 우리.
  이 단어가 말하는 1인칭은,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학생답지 않은 주제를 선정한 학급도 있어 적지 않은 학부형들이 우려를 보내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즐길 수 있는 문화제도 물론 좋죠. 하지만 외부의 반대와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면서까지 강행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나면 그것은 해당 학급만의 문제가 아닌, 저희들 모두의 문제가 될 테니까요.”

 

    제각각 맞물리지 못하는 톱니를 억지로 끼워놓은 공작품처럼, 일치할래야 일치할 수 없는 여러 의미가 ‘우리’라는 단어 속에 묶여 있었다.

  충돌이 일어나면 약한 쪽이 부러진다. 마모된 개개인은 이름없는 부품이 되고, 그 과정에서 받는 상처는 당연한 대가로 취급되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소속감을 강요한다. 버려진 파편 조각이 되고 싶지 않기에 필사적으로 동조하는 걸지도 모른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이란, 언제나 이처럼 잔혹했다.

 

  “구체적인 반명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모쪼록 마찰없는 방향으로 진행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내용은 여러분의 반에도 전달해 주세요. 그것만 하시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업무도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으니 오늘은 쉬는 걸로 하죠.”

 

  마지막까지 깔끔한 마무리에 박수가 쏟아졌다.

  소리가 잦아들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한 때였다. 모두의 주목을 모으듯 사가미가 손뼉을 쳤다.

 

  “아참, 잊을 뻔 했네~. 1학년 C반 대표와 히키가야 군은 잠깐 남아주세요. 따로 할 말이 있거든요.”

 

  구체적인 반명은 언급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나? 왜 아주 이번 회의도 교내 스피커로 생방송하지 그랬니? 심지어 나는 이름으로 부르는구나. 2학년 F반 대표로 부르자니 너도 F반인게 생각나 찝찝했던 모양이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의자를 밀고 일어서자 전원이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회의실을 나선 실행위원들도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한 번씩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속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유키노시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회의실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전날보다 훨씬 수척해 보이는 유키노시타는 금방이라도 감길 듯한 힘없는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갸냘픈 몸은 입고 있는 교복의 무게조차 버거운 것처럼 보였다.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거부할 걸 알면서도 유키노시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문제 없어.”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유키노시타는, 할 말은 그걸로 끝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회의실에서 일하기는 그른 것 같구나. 당신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사가미 양이 문을 닫아버릴 것 같으니.”

 

  언질을 받았나? 아니면 말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판단한 걸까? 체념한 듯한 미소에 덜컥 겁이 나 유키노시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유, 유키노시타도 쉬는 게 어때?”

 

  돌아보지 않고 눈을 감는다. 떨리는 눈꺼풀은 한 번 긴장을 놓으면 그대로 잠에 빠질 것 같았고, 그 사실을 아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건 안 돼.”

  다시 뜬 두 눈동자는 감기 전보다 충혈 돼 있었다.

 

  “전달사항은 전해야지. 우리 반은 문제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확신이 없어. 실행 위원회 기간동안은 급우들과 대화한 적이 거의 없거든. 사실은, 그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해.”

  “유키노시타, 그건······.”

  “알아. 딱히 자책을 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실행 위원 이전에 J반 학생이기도 하니까,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할 뿐이야.”

 

  말을 마친 유키노시타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도 아마, 오늘도 안 되겠지. 그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위원회 업무도 쌓여 있으니, 이것부터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럼 이만, 구태여 말하지 않는 뒷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작별을 전하고도 한동안 자리에 선 그대로 나를 올려다본다.

  붙잡지 못하는 나와, 떠나지 않는 유키노시타. 천일의 밤보다 더딘 침묵이 찰나의 순간 지나갔다.

 

  그런 우리 사이에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반에는 내가 전해둘게.”

 

  낯선 저음이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틀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우리 옆에는 건장한 남학생 한 명이 서 있었다.

 

  “먼저 가 봐, 유키노시타 양.”

  “혼모쿠 군? 그렇지만······.”

  “됐대도. 반 아이들도 원하지 않을 거야. 다들 유키노시타 양을 걱정하고 있거든.”

 

  말을 맺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목소리와 달리 밤색 눈동자는 낯이 익었다.

 

  “오랜만이네, 히키가야. 아, 이야기 하는 건 처음인가? 학기 초에 우리 반에 오는 모습을 멀리서 본 게 다니까.”

  “······아, 맞다, 넌······!”

  “기억해 주는구나. 혼모쿠 마키토라고 해. 유키노시타 양과 같은 J반이지.”

 

  그렇지 참, 국제교양과 2학년에는 남학생이 한 명 있었지. 유키노시타를 찾느라 J반을 방문하던 시절 대략 1/3 확률로 교실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남녀 1명씩 차출되는 게 실행 위원회의 원칙이니 이 녀석은 피할 길이 없었겠구나. 본인은 다행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일은 내게 맡겨 줘. 이후로도 반과 접촉할 일이 있으면 내가 전담할게.”

 

  나까지 바라보며 말하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없이 든든한 지원이었다. 그러나 유키노시타는 난색을 표했다.

 

  “그럴 수는 없어. 실행 위원회는 반의 대표, 동등한 의무를 짊어진 사람들이야. 한 사람은 일하고 한 사람은 쉬다니 공평하지 않아.”

 

  십대 소녀가 말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답변이었다. 동시에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원칙론이기도 했다.

 

  “그건 아니지. 유키노시타 양은 부위원장으로서 실행 위원회 전체를 총괄하고 있어. 그에 비해 나는 서클 통제부의 일원일 뿐이야. 일개 부원의 업무량 따위 부위원장에 비하면 없는거나 다름없지. 이 정도 잡무는 내가 하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해.”

 

  유키노시타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자, 잇시키에게서 일거리를 빼앗을 때 자주 써먹던 변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효과는 확실했다.

 

  “그, 그건······.”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할 말에 고심하는 유키노시타. 그 틈을 놓칠세라 혼모쿠가 나를 향해 눈짓을 했다. 과연, 그런 거라면 도와야지! 기회를 잡은 우리는 쉴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그렇게 해, 유키노시타. 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써먹는 거지.”

  “암암, 써먹을 수 있는 건 팍팍 쓰는게 맞지.”

  “아참 그러고보니, 너 저번에 서클 통제부 일 대신 해준 것도 있지 않아? ”

  “우리 부서, 꽤나 설렁설렁 하는 분위기가 강하니까. 내가 부장이기만 했어도 이런 식으로 일하진 않았을 텐데······. 그 건에 대해선 내가 대신 사과할게. 미안합니다, 유키노시타 양.”

  “들었지? 그렇댄다. 고민할 거 뭐 있어. 빚 갚는 셈 치고 받아주면 되잖아.”

  “다, 당신들······. 굉장히 친해 보이는구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유키노시타는 그럼에도 내키지 않는 듯 고민하더니 잠시 후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 말한다면야······.”

  “응, 잘 생각했어.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 혼자 갈 수 있겠어? 용건이 빨리 끝난다면 데려다 줄 수도 있는데, 아니다. 하루 짱을 부르는 게 좋을까?”

  “아, 아냐, 됐어! 혼자갈 수 있으니까······.”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힘들 땐 말해야 한다? 친구는 좋은 거지만, 사촌은 더 좋은 거니까!”

  “······됐어. 하, ······당신도 바쁠 텐데, 마음 써주지 않아도 돼······.”

 

  시선을 피한 채 목례한 유키노시타는, 여전히 묵직한 책가방을 둘러멘 채 회의실을 나갔다.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일부러 그런 거야?”

  나란히 문을 바라보던 혼모쿠가 입을 열었다.

 

  “응. 안 그랬으면 저 녀석, 학교에 남아서라도 일하려고 했을 거야.”

  “과연, 과하다 싶은 조건을 먼저 제시한 뒤 차선책을 고르게 유도한 거구나.”

  “부탁의 기술이지. 원래대로였으면 이런 뻔한 수에 낚일 녀석이 아닌데.”

  “그만큼 피곤한 상태일 테니까, 그럴만도 해.”

 

  방금 전까지 이름도 모르던 사이란 게 실감이 안 날 만큼 편안한 대화였다.

 

  “고맙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감사받을 만한 일은 안 했어. 효율적인 건 사실이고.”

  “글쎄, 네가 없었더라면 대화의 시작조차 못 했을 것 같거든.”

  “설마.”

 

  어쩌면 친해 보인다던 유키노시타의 말은 정답이었는 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이 녀석과는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빚은 꼭 갚을게.”

  “아니, 그래선 제자리걸음 이잖아.”

  “뭐 어때? 아무튼 너도 빨리 가 봐. 어떻게 받은 허가인데, 내 사촌 맘 바뀌면 그 땐 나도 모르니까.”

  “그래, 히키가야 너도 수고해라.”

 

  대부분의 실행 위원이 빠져나간 회의실 문가에는 안경을 낀 여학생 한 명이 서 있었다. 혼모쿠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발을 맞춘 여학생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회의실을 나섰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회의실은 적막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조용해진 공간을 채우려는 듯한 요란스러운 합창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의장석에 앉은 사가미는 친구 두 명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실행 위원회가 시작된 첫 날 함께 앉아있던 그 여학생들이다. 따로 얘기 하자고 말한 것치곤 순순히 돌려보낼 기색이 아니었다.

 

  “슬슬 가자.”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일어선 잇시키는 조금 전 유키노시타가 나갔던 회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열려있는 문 너머로는 맞은편을 막고 있는 벽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호박색 눈동자는 불가능한 각도로 꺾어 이미 멀어졌을 내 사촌을 쫓고 있었다.

 

  “유키노시타 선배, 집에 가서도 일 할 생각이겠죠?”

  “그렇겠지······. 그래도 집에서는 다소 편한 상태로 할 수 있을 테고······.”

 

  말을 하면서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납득하지 못하는 핑계로 나 자신을 속여봐야 상황을 바뀌지 않고 유키노시타를 도울 수도 없다. 구차한 자기위안에 역겨운 감정이 치솟아 입술을 깨물었다. 

 

  “유키노시타······.”

  “선배······.”

  “순조롭게 진척되기는 개뿔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하타노의 목소리는 혼잣말이라기엔 다소 컸다. 설령 들리지 않았다 해도 조용한 회의실 안이니만큼 무언가 말을 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것이다. 흘끔 이쪽을 돌아본 사가미는 깜빡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참, 그렇지~. 불러놓고 말도 안 하고 있었네~. 이제 와도 돼!”

 

  구불거리는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두들겼다. 사가미의 눈짓에 친구 두 명이 슬쩍 물러서는 걸 보고서야 그것이 다가오라는 의미였음을 깨달았다. 

 

  “어라? 나는 분명 두 사람만 불렀던 것 같은데?”

 

  집행부석 앞에 나란히 서자 사가미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그 날카로운 시선이 끝에 선 하타노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상관없지 않나요. 어차피 저희 반 이야기 같은데. 저도 잇시키랑 같은 C반이니까 문제 없어요.”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타노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아하, 같은 반이었구나~. 그럼 괜찮지~.”

  “됐고, 저희들은 바쁘니까 빨리 말해 주시죠. 용건이 뭔가요?”

 

  사가미는 순간적으로 눈매를 꿈틀했지만 곧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눈동자 속을 번뜩이며 스쳐간 적의는 확실히 보였다.

 

  “저거 심하지 않아?”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선배한테 할 태도는 아니네. 게다가 위원장인데.”

 

  사가미의 친구들도 만만치 않았다. 정면으로 내뱉는 비난들은 이제는 뒷담이라는 표현조차 궁색했다.

 

  “하하하, 내가 너무 기다리게 한 모양이구나. 그럼그럼, 다들 바쁠 테니까.”

 

  짐짓 이해한다는 듯한 음성이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다려준 덕택에 나올만한 말은 다 나온 뒤였으니까.

 

  “미안, 사가미. 하타노도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내가 미숙했던 탓에 요즘 계속 무리 시켰거든. 조금 예민한 상태라서.”

  “무······?!”

  “선······?!”
  “이야~, 내가 이런 걸 맡아 봤어야 말이지. 선배로서 부끄럽구만.”

 

  뒤질세라 말을 끊고 턱을 잡아당겨 사가미에게 사과한다. 배신자를 바라보는 아연한 시선이 옆쪽에서 쏟아져 왔지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라.”

  “에이~, 딱히 화난 건 아니라고? 그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여럿이서 일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 아니겠어?”

  알았으니까 본론을 말해. 너랑 화해하고 싶어서 고개 숙인 줄 알아? 빨리 끝내달라는 뜻이었다고.

 

  고요한 분노가 전해졌는지 잇시키와 하타노는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사가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미소지을 뿐이었다.

 

  “자 그럼, 너희들을 부른 이유 말인데.”

 

  옆에 있던 업무용 노트북은 내버려둔 채 휴대폰을 두드리던 사가미는 거기에 표시된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화면에 표시된 건 일반적인 형식의 소개 페이지였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특색있는 레이아웃은 인터넷 깊숙한 곳을 뒤진 티가 났다. 보편성을 거부한채 개성을 추구했지만, 그러면서도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박힌 문구는 폰트부터 글자 크기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인 감각으로 어우러져 있어 제작자의 열정이 느껴졌다. 깔끔하다 못해 휑하다 싶을 정도의 단조로움이 걸렸지만, 모바일 화면으로 보았을 때 커다란 흠은 되지 못 한다. 길어봐야 일주일 남짓이었던 제작기간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걸 보여준 사가미의 얼굴은 조금도 호의적인 기색이 아니었다.

 

  “메이드 카페라. 확실히 어떤 의미로는 문화제의 단골 이벤트이긴 하지.”

 

  필름 모양의 아이콘을 터치해 새로운 페이지를 띄운다.

 

  “그래도 말이지, 이건 좀 그렇지 않아?”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짤막한 소개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어디서 빌려왔는지 그럴듯한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아이 몇 명이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다. 사가미가 볼륨을 올려두었기에, 그 음성은 조용한 회의실을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으엑, 뭐야 저거?”

  “보는 내가 다 창피하네.”

 

  그러니까 쟤네는 대체 무슨 역할이냐고? 만담에 츳코미 역할이냐? 두 명이나 있을 필요 있습니까? 그러나 사가미는 친구들의 불평이 언제 끝날 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되받아쳤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장될만한 직종은 아니지. 요즘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잖아, 안 그래? 감정노동이나 성착취 같은 거, 여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좀 불편하단 말이지~.”

 

  원론적인 부분에서는 동감이다. 사가미의 말이 현대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기꺼이 동조할 의양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수단에 불과하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우리 세대도 이런데 부모님 나이대는 더하지 않겠어? 너희들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지금 이것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당장 시정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기세라고. 지금이야 단순한 클레임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더 큰 수단을 써서 부딪쳐 올 거야. 그럼 안 되잖아? 문제가 공론화되었을 때 가장 곤란한 건 너희들이니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 속에 끊임없이 포지션을 바꾼다. 주체성은 흔들리고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는 와중에 사가미는 어느새 거대한 날개 밑에 붙어 있었다. 흡사 대형 어류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빨판 상어를 연상케 했다.

 

  “긴 말은 하지 않을게. 기획서 제출 마감은 아직 남았으니, 너희 반의 테마를 수정하도록 해.”

 

  냉혹하고도 일방적인 선고였다. 

 

  “그런······, 벌써 준비가 한창인데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셔도 곤란해요! 적어도 완전 취소가 아니라 일부분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가면······.”

  “어머, 무슨 뜻인지 못 알아 들었니? 그렇게 말해줬는데?”

 

  잇시키의 항변을 사가미가 가로막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말투였지만 그 음성과 눈빛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의미심장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이제는 확실히 보였다.

 

  “그게 안 되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 아냐? 바보야 너?”

  “후배는 말이지, 선배가 말하는 대로 예 하고 들으면 되는 거라고?”

  “아쉬운 건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너희 반 떄문에 전체 문화제에 피해를 끼치게 둘 수는 없거든. 그게 위원장의 일이니까.”

 

  책임을 요구받았을 때는 침묵한 채 적의 편에 섰던 위원장이, 이제는 그 힘을 무기삼아 자신이 잘랐던 꼬리를 내려찍는다. 빌려온 논리에 같잖은 심리학까지 곁들인 그들은 절대자라도 되는 양 채찍과 당근을 휘둘러댔다.

 

  이곳은 저들의 무대이자 처형대였고 도살장이었다.

  함정을 파놓은 채 보란듯이 초대한 것이다.

  발을 디딘 이상 우리에게 승산은 없었다.

 

  “어떻게, 이해했으려나?”

 

  잇시키도 하타노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상대가 겨눈 칼끝이 턱 밑까지 와 있다는 사실보다도 상대의 손에 쥐여진 인질이 자신들만이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섣부른 행동은 C반 전체에 피해를 끼친다. 원하지 않는 자리에 떠밀려 온 그들에게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왜 부른 거냐?”

 

  기록 잡무부로서 부르지 않았단 게 확실해진 지금, 잇시키가 앞장 설 이유는 사라졌다. 한 걸음 다가가자 사가미의 친구들은 움찔거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한 채 사가미의 앞에 버티고 섰다.

 

  이 위치라면 잇시키와 하타노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만 봐라. 쪽팔리게 후배들 괴롭히지도 말고, 니 친구들도 끼어들지 못하게.

  여기엔 너랑 나밖에 없는 거야. 

 

  “워워, 성질도 급해라. 물론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 부른 거겠지? 딱히 쟤네들한테만 한 말은 아니라고?”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사가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눈은 내게 고정돼 있었건만 조금도 느려지지 않은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겨댔다.

 

  “이거, 알려나?”

 

  고개는 바로한채 눈동자만 움직여 바라보자, 사가미의 휴대폰 액정은 전혀 다른 홈페이지로 바뀌어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어두운 배경이었다. 모니터에 비친 화상은 픽셀로 이루어진 그림임과 동시에 전기를 통해 방출되는 빛이기도 하다. 최근 몇몇 웹사이트가 시력 보호를 위해 어두운 화면을 제공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 사이트의 색배치는 그러한 저자극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 속에 섞여 있는 붉은색이 눈을 찌른다. 영악한 레이아웃은 시선이 흐르는 길목에 강렬한 이미지를 배치해 두었다. 서점의 BL 코너와 달리 숨길 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노골적인 선전은 긴자의 밤거리를 연상케 했다. 빛무리는 화려했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워, 우연히 흘러들어온 방문객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양처럼 샛노란 컬러가 군데군데 들어가 있어,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마치 안개 낀 골목의 가로등처럼 비추고 있었다.

 

  검은색에 노란색 조합이라니, 철도 건널목의 차단봉이냐고.

 

  “소부고 문화제, 2학년 F반 일동, 연극 「어린뮤」.”

 

  결국 제목에까지 박아넣었구나, 저놈의 어린뮤. 

  하기야 에비나 양도 완고한 면이 있어서 자신의 예술이 침범당하는 건 용납하지 않았겠지. 사이트 제작팀 구하는거야 그렇다쳐도 그 고집을 들어주는 게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용케도 하루만에 만들었군. 진짜 대단하다니까.

 

  고생이 많았겠구나, 누나도. 어제는 제대로 잤을까?

 

  “짚이는 게 없어?”

  “왜 나한테 묻는데?”

  “그야, 전부 히키가야 군과 친한 사람들이니까?”

 

  상대의 크기를 가늠해 먹을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시선은 익숙했다. 나를 들여다보는 사가미도 그러한 파충류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숱하게 겪었던 그 것보다는 작았다. 뱀에는 미치지 못 하는 도마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새끼 도마뱀이었다.

 

   “유미코 양은 히키가야 군과 남매지, 에비나 양은 그런 유미코 양의 친구고. 유이하고는 여름 축제도 같이 가는 사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카와사키 양도 있었던가?”

 

  재잘재잘 떠들던 사가미가 의견을 구하듯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에? 진짜로? 저런 애가?”
  “믿을 수 없네. 뭐야 그거,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그렇지?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늘 혼자 있길래 그런 쪽인가 생각했더니 여간내기가 아니더라구~. 실은 급이 되는 사람하고만 논다거나~, 막 이래~!”

 

  연극의 대본은 얘네가 쓰는 게 좋았을 것 같다. 그것도 아니면 창작소설 공모전에라도 응모해 보던가. 인과관계는 철저히 무시한 채 본인들 기준에서나 그럴듯한 논리를 내뱉을 뿐이니 입상은 무리겠지만 말이야. 

 

  “되도않는 농담은 그만두고, 본론을 말해.”

 

  피곤함 탓도 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도 들어주기 힘든 말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읏······.”

 

  짧은 신음이 들린 듯 한 건 착각이었을까? 어쩌면 사가미의 친구가 내뱉은 말일지도 모른다. 여고생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비슷하게 들리니까, 이렇게 한 사람처럼 입을 모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알았어. 그 말인 즉 히키가야 군은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거구나?”
  “할 말이고 자시고 나는 모르는 일이야. 실행 위원은 반 행사에 끼기 힘든 거 너도 알잖아.”

  “어떠려나~? 뭐,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기야 너는 학급 일에 참견할 때가 더 열정적이이긴 했었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것이 오늘의 본론이로군. 놀라우만치 익숙한 단어 선택에 헛웃음마저 배어나왔다. 이런 말을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있나?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다니까.

 

  “F반의 행사 기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 네가 가서 전해 줄래?”
  

  사가미가 내민 건 에비나 양의 이름으로 제출된 행사 기획서였다. 결재도장 란은 비어 있었다.

 

  “어째서? 문제라도 있냐?”

  “방금 전까지 내가 한 말 뭘로 들은 거니? 클레임이 들어왔다니까?”
  “그거야 학부모들 생각이지. 관계자도 아닌 사람들의 의견따위 무슨 상관인데? 고작 외부인의 불만 때문에 멀쩡한 행사를 취소하자는 거야?”
  “당연히 상관이 있지. 문화제는 엄연히 행정 업무야. 비즈니스같은 거라고. 작게는 교외 서클부터 시작해 지역내 여러 단체와 협력해서 꾸려나가는 행사지.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못 들은 척 한다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냐고? 그거에 비하면 학부모는 외부인도 아냐. 그분들과의 마찰은 피해야만 해.”

 

  시로메구리 선배가 나갔을 때 이런 일이 생길거란 예감은 들었다. 공교롭게도 히키가야 가는 방음이 취약한 집이기에 옆방의 소리를 완전히 막아주지 못 한다. 확실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어도 대화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주제로 이야기하는지 짐작할 정도는 되었다. 어젯밤 유미코의 방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평소의 재잘거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관계자라 해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이러실까, 히키가야 군도 알 텐데? 에비나 양의 일처리 방식 말이야. 본인이 싫다는 데도 못 본 척, 사정 봐주지 않고 있는대로 끌어 쓰잖아. 거기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해 본 적은 있냐고? ”

 

  자리에 앉은 사가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턱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책상 앞에 서 있어 올려다볼 수 없는 나를 시야에서 깔아뭉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해도,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이런 식의 일방적인 통보는 잘못됐어. 적어도······!”

  “적어도 뭐? 공식 의제로 회의에 올리기라도 하게? 아까도 말했지 않았나? 공론화 되었을 때 가장 곤란한 건 너희들이라고?”

  “······.”

 

  만약, 만약 정말로 사가미가 이 문제를 회의에 올리면 승산이 있을까?

  있을 리가 없다. 자신에게 튈 불똥을 피하려는 사람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던 수많은 학생들을 보지 않았는가. 설령 용기있는 몇몇이 힘을 보태준다 하더라도 결과가 바뀔 일은 없겠지. 

 

  왜냐하면, 이건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라는 단어는 한 번 맛을 보면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그만큼 무서운 마약이었다.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전하든 말든 그건 니 자유지만 나는 그 서류에 도장 찍을 생각이 없어. 아니면 정식 공문으로 전달하는 게 좋겠니? 위원회 차원에서 경고를 내리면 너희 누나 표정이 볼 만 하겠지?”

  “그만!!!”

 

  실행 위원 글자가 새겨진 명패가 펄쩍 뛰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목재 합판에서 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소리였지만 신기하게도 움켜쥔 주먹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잠깐의 순간에도 이성을 부여잡았단 사실에 안도했고, 동시에 혐오했다. 내리쳐야 할 곳은 조금 더 앞에 있건만, 피를 나눈 누이를 건드렸음에도 저 파렴치한 인간을 때리지 못 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뻔질나게 교실을 드나들었던 사가미가 몰랐을 리 없다. 칠판에 적힌 유미코의 이름을, 그 위에 적힌 담당 역할을. 

  곤란하다는 게 그런 뜻이였냐? 애초부터 내가 아닌 그쪽을 노렸던 거였냐?

 

  분노는 고비를 넘기고도 가라앉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격통이 손이 아닌 가슴 깊은 곳에 퍼져 나갔다.

 

  “······뭐, 뭐어~, 나도 너희 누나는 건드릴 생각 없어~.”

 

  의자 채로 물러난 사가미가 대꾸했다. 바퀴를 밀었던 발은 있어야 할 곳에 닿지 못한 채 바닥 위 허공에 멈춰있었다.

 

  “그래, 너희 누나는 말이지······.”

 

  그것도 잠시, 내리지 못한 발을 더욱 높게 들어올리더니 반대쪽 무릎을 감아 다리를 꼰다.

 

  “하지만 결론은 똑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난처해지는 건 네 친구들이지. 그렇게 되기 전에 바꾸라는 거야. 오히려 내쪽에서 기회를 주는 거라고?”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이 책상 위로 뻗어왔다. 흡사 어두운 구멍 속에서 튀어나온 악마가 내 손을 잡아 끌려는 것처럼 보여, 거기에 닿을세라 황급히 손을 뺐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내려친 곳에 기획서가 깔려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 완전히 구겨졌잖아. 뭐, 어차피 버릴 거니까 상관 없지만.”

 

  킥킥대던 미소를 거둔 사가미는 마치 넘어진 아이를 털어주는 어머니같은 표정을 지었다. 구겨진 종이를 억지로 펼 때 나는 와그작 소리가 귓가를 찌른다. 움푹 패인 자국이 선명한 서류를 내게 건넸다.

 

  “그래도 돌려는 줘야겠지?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해. 그럼 잘 부탁해, 히키가야 군!”

 

  조소로 일그러진 입가를 숨기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사가미는 하고 싶은 말만을 내뱉었다.

 

  xxx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줬으면 해.”

 

  꼬깃꼬깃한 서류를 쥔 채 교실에 들어선 시점에서, 눈썰미 좋은 지인들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생각은 없었지만. 그저 담담히, 무능하기 짝이없는 패잔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무것도 못 했다고, 모든 걸 빼앗겼노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일 먼저 뛰쳐나간 사람은 사키였다. 그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유미코도 달려나갔다. 어느 쪽을 쫓아가야 할 지 알 수 없어 망설이는 내게 유이가하마가 다가왔다. 호되게 혼냈는지 따스한 말로 격려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좌우지간 등을 밀어줬던 것만은 확실하다. 덕분에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누나를 붙잡는 건 에비나 양이 해줄 것을 믿고 그녀와 함께 나란히 달렸다.

 

  도착한 곳은 예상 외로 신발장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가미의 경로를 예측한 걸까, 아니면 사냥꾼 특유의 본능이 발동한 걸까.

  막 현관을 나서려던 참이었는지 사가미는 신발을 신은 채 문 앞에 서 있었고, 디딤대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광경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표면적인 인원수는 정반대였지만 사실 그리 다를 것도 없었다.

 

  “어머? 히키가야 군이 말해주지 않았어? 

 

  등지고 선 문에서 쏟아져 나온 역광 탓에 사가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슴푸레한 그림자 속에서도 희번덕 거리는 안광만큼은 소름끼칠 정도로 뚜렷했다.

 

  “아니, 분명 들었어.”

 

  도착한 이후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누나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찰랑거리는 금발이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반사한 덕분에 사가미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아는 단지 납득하고 싶은 거야. 어째서 히나의 연극을 취소해야 하는지, 이제와서 이러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 말이야.”

 

  앞으로 내딛은 발은 디딤대 끝을 밟고 있어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 맨발로 걸어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유미코는 서 있었다.

 

  “으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으니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거라고, 그거. 「히나」의 연극 말이야.”

  “뭐?”

 

  코웃음을 친 사가미가 팔짱을 꼈다. 화려한 빛 속에 표정을 숨긴 그녀는 두 다리를 벌린 채 버티고 섰다.

 

  “있지, 유미코 양? 문화제란 건 말야, 모두의 축제라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즐기지 않으면 안 돼. 그런데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건 뭐야? 연극? 음습하기 짝이 없는 부녀자 대잔치가 아니라? 설마~.”

 

  어깨동무를 하듯이 손을 얹자 사가미의 친구들도 폭소를 터뜨렸다.

 

  “맞아, 홍보 사이트는 나도 봤어! 어린뮤라니 그게 무슨, 풉, 푸후훕······.”

  “프랑스인들이 울겠다~. 저런 건 단속감이야~, 풍기문란이라고~!”

 

  짜맞춘 것처럼 완벽한 웃음소리는 칠판 긁는 소리처럼 거슬렸다. 웃음은 전염된다지만 신발장에 선 지인들은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이 괴상한 구도가 의아했는지 지나가는 학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멈춰선 채 이 쪽을 돌아보았다.

 

  “이것들이 진짜!”

  “안 돼!”

 

  가장 멀리 있던 구경꾼조차 겁을 먹고 한 걸음 물러났을 것이다. 현관을 가득 메운 사 짱의 목소리에는 그만한 박력이 있었다. 

 

  “이거 놔!”

  “기다려, 제발 가만 있어, 카와사키!”

 

  사 짱치곤 많이 참았어. 여기에 온 순간부터 줄곧 너를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어째서? 왜 말리는 거야? 저 꼴을 보고도 화가 안나? 너는 분하지도 않아?”

  

  나를 돌아본 사 짱의 눈동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에 젖어 있었다. 흡사 귀신과도 같은 형상은 낄낄대던 사가미조차 다물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게 보이는 건 지인이 받은 모욕에 분노해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하는 친구의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안 돼. 놓아줄 수 없어.

  사 짱은 신발도 신지 않았으니까. 이대로 너를 놓쳐버리면 네 발은 더러워지고 말 거야.

 

  “제발, 사키······.”

  “너······.”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다. 격투기를 배운 사 짱이 진심을 내는 순간 나같은 건 순식간에 밀쳐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왔기에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놓지 않는다.

  사키가 내 손을 잡고 있는 한은.

  자신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약한 친구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젠장.”

 

  어깨 위로 들어올린 팔을 신경질적으로 끌어내린다. 꽉 붙든 나머지 구겨져버린 소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주변인들의 반응은 아랑곳없이 나를 돌아본 사 짱은 갈 곳 없는 분노를 속으로 삼켰다.  

 

  “······미안하다.”

 

  고개 숙인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수도 없이 반복했던 한 마디 뿐이었다.

 

  “어휴, 깜짝 놀랐네~.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 어제까지만 해도 교실 안에선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아, 설마 카와사키 양도 그쪽이야?”

 

  정신을 차린 사가미는 턱에 얹은 손을 매만지더니 한껏 고개를 꺾었다.

 

  “여름 축제 때부터 수상하더라니, 그 때도 히키가야 군을 만나러 온 거였구나. 같이 데려온 건 동생이었지? 남매들끼리도 알고 지내니만큼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니겠는걸?”

  

  입술을 깨문 사 짱이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놓아주지 않느냐고, 저 말을 듣고도 참아야 하냐고 물기어린 눈빛으로 전해온다. 그럼에도 놓아주지 않고 더욱 힘주어 끌어당겼다. 앞뒤로 서 있던 서로의 위치가 역전될 때까지 사 짱은 저항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사가미는 뻘쭘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쳤다. 팔짱을 꼈을 때 가려지는 팔꿈치 안쪽에서 감춰져 있던 휴대폰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사 짱이 주먹을 휘둘렀다면, 제 분을 이기지 못해 폭언을 퍼붓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을 게 틀림없다.

  짧은 순간 들린 혀 차는 소리가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시간을 조금 줬으면 해.”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린 건 에비나 양이었다. 평온을 넘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내가 그것을 알아차린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에비나!”

 

  오늘 처음으로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요 몇 달 사이 처음으로 유미코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에게 있어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고였기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굳어버렸다.

 

  “이미 연극 준비는 시작됐고 역할 분담도 끝마친 상태야. 어젯밤부터는 홍보 사이트도 운영되고 있어. 다들 열심히 도와줬거든. 지금 이 순간에도 힘써주고 있고. ”

 

  사가미가 콧방귀를 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불가능하단 말이야. 극의 내용을 수정하고자 한다면 시간이 걸려. 아예 다른 걸로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3주나 남았잖아. 그렇게 열심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친구들은 어떡하고? 믿고 따라와준 우리 반 아이들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포기시키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어. 거기에 경고까지 받았잖아.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그들의 눈밖에 나서는 안 된다, 이걸 납득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야만 해. 운이 좋아도 일주일, 나쁘면 그 이상도 걸릴 거야.”

  “윽······.

  

  무미건조한 음성에 천하의 사가미도 기가 눌린 모양이었다. 끙끙 앓는소리를 토해낸 사가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알았어. 그건 니들이 알아서 해. 단, 트집 잡을 만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돼. 확실한 결과물이 아닌 한 결재 도장은 절대로 찍어주지 않을 거야..”

  “응, 고마워. 그거면 충분해.”

 

  허가를 받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싱긋 미소짓는 에비나 양과 한숨쉬는 사가미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찜찜한 듯 연신 미간을 좁히던 사가미는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친구들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남겨진 사람들 사이 껄끄러운 침묵이 피어올랐다. 대화를 재개한 건 이번에도 에비나 양이었다.

 

  “하하, 한 방 먹었네. 이거 큰일인걸.”

 

  그 모습을 조심스럽게 곁눈질하는 사키와 유미코. 머리색도 관계성도 제각각인 그들이지만, 함께 일해온 친구를 걱정하는 따스한 눈길은 친자매처럼 닮아 있었다.

 

  “외부에서 클레임이 걸려왔다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분들도 넓게 보면 문화제의 손님이잖아? BL이 양지로 나오기에는 아직 좀 일렀나 봐.”

  “에비나······.”

  “이상할 것도 없나, 원래부터 좁아터진 장르니까. 최근엔 서점가에서도 잘 보이고, 취향을 드러내는 데도 거리낌이 없으니, 조금 독특한 걸 좋아하는구나 하며 이해해 줄 것 같았거든. 좀 더 많은 사람이 즐겨줬으면 해서, 내 나름대로 순화시키려 노력했는데······. 금기는 금기였어.”

 

  일그러진 입가가 더는 미소로 보이지 않았고, 웃는 얼굴은 지독하게 씁쓸했다.

 

  “미안해, 유미코. 모처럼 홈페이지도 만들어줬는데, 쓸모 없게 돼 버렸네.”

  “······히나가 왜 사과 해. 나아가 괜한 짓을 해서 이렇게 된 건데······.”

  “에이, 그건 아니지~. 만들라고 지시한 사람은 나였는걸! 책임을 져도 내가 져야 마땅한 거지!”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에비나 양이 손수건을 꺼냈다.

 

  “뭘 이런 걸로 울고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데. 유미코 진짜 여리다니까~.”

  “······시끄러워.”

  “아, 그러고보니, 내쪽에서 유미코를 닦아주는 건 처음인가? 항상 고생하고 계셨군요? 신세가 많았습니다~.”

 

  장난스레 놀리면서도 세심하게 닦아준다. 어르고 달래는 부모로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대등한 친구로서의 손길이었다. 

 

  “아아~, 얼굴 엉망이네. 교실에 돌아가기 전에 화장실부터 들려야겠어.”

  “응······.”

  “뭐, 유미코는 생얼이어도 귀엽지만! 지금은 뭐랄까, 판다같거든!”

  “뭐야 그게······.”

 

  응, 얼룩덜룩 번진 눈화장 하며 날카로운 눈초리가 판 씨 같아. 유키노가 보면 좋아하겠는걸. 거짓말이지만. 울고있는 유미코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을 지도 모른다. 사 짱처럼 말이다.

 

  “사키사키도!”

  “······뭐어?”
  “모처럼 의상 맡아줬는데 미안해! 우리 연극, 끝나버렸어!”

  “야, 너는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그치만, 유미코가 우리 몫까지 울어주잖아? 그러니 우리는 웃어야지! 쳐지지 말고!”

 

  기가 찬 듯 한숨을 내쉰 사 짱이 못 이기는 척 인상을 폈다. 웃음이라기보단 쓴웃음에 가까운 게 문제였지만. 어린 시절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얼굴 좀 펴라고 핀잔을 줘도 어색함은 가시지 않았지. 그런 역할은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말이야.

 

  “히키가야 군도 고마워.”

  “어? 나?”

  “응. 실행 위원회 일도 바쁠 텐데, 우리 때문에 폐를 끼쳐 버렸네. 고생 많았어.”

  “아니, 하지만······.”

  “이제부턴 우리가 알아서 할게. 히키가야 군도 얼른 돌아가 봐.”

 

  돌아가라고? 어디로? 실행 위원회로? 그치만 사가미가 나온 걸로 보아 회의실 문은 닫혀 있을 텐데. 잇시키 쪽도 바쁘면 바빴지 이것보다 사정이 좋지는 않을 테고······.

  내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제안은 고민한 필요도 없이 받아들였을 텐데. 모두가 즐거운 세상에서 억지 웃음 지을 필요도, 거북함을 누른 채 구석에 쳐박혀 있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발을 떼지 못 하는 걸까?

 

  우연인지 그렇지 않으면 혈육끼리의 모종의 정인지,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은 유미코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어깨를 붙잡힌 탓에 반쯤 에비나 양에게 안겨있던 유미코는 티없이 맑은 눈동자로 나를 비췄다.

  

  “누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동급생? 남동생? 그것도 아니면 가족으로서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럽고, 또 무엇을 말해야 이상하지 않을까?

  

  아니지.

  너도 알잖아, 하치만.

  지금 그 생각이 가장 이상해.

 

  “······누나도 힘내.”

  “으응······.”

  “너무 상심하지 마, 에비나 양의 말마따나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유미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고개 숙여 화답하면서 문득 자문해 보았다. 방금의 행위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인사, 제스처? 단순한 맞장구?

 

  인간관찰의 핵심은 자기객관화다.

  나我를 없애고, 자애自愛를 없애고,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주변을 바라본다.

  마치 꿈을 꾸듯이 말이다. 주관성을 배제한채 현실에서 유리되면 사물의 본질이 보이게 마련이다.

 

  틀렸어. 너는 지금 시선을 피한 거야. 네 누이처럼 말이야.

 

  “이만 가볼게.”

  “응, ······잘 가.”

 

  말은 고개를 돌렸을 때만 매끄럽게 나왔다. 서로가 서로를 부담스러워 할 때는 이별이 달게 느껴지는 법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건만, 목꺾인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등졌다.

 

  xxx

 

  이튿날.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평소라면 문화제 준비에 열을 올렸을 방과 후에도 F반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옆반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이 복도를 거쳐 들어오는 탓에 그 침울함은 배가 되었다.

 

  에비나 양은 반 친구들을 향해 고개 숙인 뒤,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노라 선언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급우들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여론은 나쁘지 않았다. 자리에 돌아간 에비나 양을 향해 몇몇 학생들이 위로를 건넸고, 어째서 연극을 취소해야 하냐는 질문이 여기저기서 빗발쳤다. 회의를 주관하던 반장도, 함께 서 있던 하야마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마 말할 수 없었을 테지.

  여기서 떠들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고, F반의 의견 따위 저 높은 하늘 위에서 굽어살피는 귀하신 분들에게 닿지 못 한다고.

 

   ‘우리’가 정한 연극이 부정 당한 시점에서 선택지는 사라졌다. 저들이 바라는 건 단순하다. 학생다움. 미풍양속이니 뭐니하는 고리타분한 기준 아래 실체도 없는 잣대를 들이밀었다. 자아도취나 다름없는 도덕적 우월감이 다양성을 악이라 간주한다. 취미는 부정되고, 쾌락은 탄압받으며, 권리는 짓밟혀 버렸다. 사람人이라는 글자에서 나타나듯,  약자를 깔아뭉개 디딤돌로 삼는 행위를 어른들은 안정이라 부른다.

 

  “일단 휴식하자. 다들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어.”

 

  하야마가 급히 진화작업에 나섰다. 과열된 회의는 증기기관과 같아, 한도를 넘어서기 전에 멈추지 않으면 터져버리고 만다. 문제는 배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뒤로 미루는 행위였으나 하야마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불안한 듯 눈치를 살피는 토츠카, 착잡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는 사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유미코와 그런 친구를 걱정스레 토닥여주는 유이가하마 시야에 들어온다.

 

  그 모든 광경이 눈에 밟혀 견딜 수 없었다.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가려던 그 때였다.

 

  “수고했어, 하야마 군!”

 

  간드러진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좀 전에도 멋지더라~. 역시 대단해!”

  “아, 사가미구나. 고마워.”

 

  목소리는 산뜻했지만 얼굴 위에 떠오른 피곤은 감추지 못 했다. 갑작스레 자신의 자리로 찾아온 사가미가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역시 우리 반은 하야마 군이 없으면 안 된다니까! 방금 회의도 거진 하야마 군이 이끌고 간 거나 마찬가지구, 이제는 누가 반장인지 모르겠는걸?”

 

  야야, 아무리 그래도 교실에서 할 말이 아니잖냐······. 지금 반장이 애처로울 정도로 고개 숙이고 있다고?

 

  “그건 아냐.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나는 그저 보조 역할을 맡았을 뿐이야. 회의도 아직 성과라고 할 만한 게 없고······.”

  “겸손도 하셔라~, 하야마 군도 참 쓸데없는 부담을 진다니까~.”

  “······아무튼, 솔직히 말해 나도 불안해. 워낙에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한 상황이야.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하는 거고, 사가미도 도와주면 고맙겠어.”

  “물론 그래야지~.”

 

  한 박자 늦은 반응이 마음에 걸렸지만 사가미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대신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허리를 굽혀 얼굴을 들이밀었다. 책상 반 개 정도 간격까지 거리를 좁힌 사가미가 한쪽 손을 입가에 갖다댔다.

 

  “그래도 말이지, 연극이 취소된 건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 아닐까?”

  “······무슨 말이야?”

  “에이~, 그 때 한 말 있잖아~. 우리 둘이서.”

   

  동급생이라 하기엔 가까웠지만, 귓속말을 나누기엔 먼 거리.

  전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이곳 소부고에서 하야마의 곁에 파고드는 여학생이 주목을 모으지 않을 리가 없다.

  문가에 선 나에게조차 들릴 정도로 컸던 사가미의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말아쥔 손은 종이컵이 아닌 확성기였던 셈이다.

 

  “하야마 군이 그랬지? 연기하는 게 쉽지는 않다고. 갑작스럽게 맡은 주연 자리는 거부권도 없구, 매일같이 남아서 연습하느라 부활동 횟수도 줄였다고 했잖아. 물론 에비나 양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테고, 동원된 사람들 중에 자기 스케줄 없는 사람이 어딨겠냐만, 그래도 하야마 군은 다르지. 주장인걸.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지. 양쪽 모두를 동시에 챙기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던 거야.”

 

  사가미의 말은 노골적으로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란듯 쳐다보는 시선에 동급생들의 시선이 포개진다. 쏟아지는 주목 속에 에비나 양은 눈을 감았다. 반박도 없이, 최소한의 자기변호도 하지 않은채 침묵을 고수했다.

 

  때때로 사람은 거울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표정을 알 수 있다.

  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곳에 분노하며,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을 친구라 부른다면, 분명 그 표정조차 닮아 있겠지.

  다만 이상하게도 하나가 많았다.

  교실에 퍼진 몇 개의 거울 속 의외의 인물을 찾아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어금니를 깨문 채 두 눈을 치켜뜬 하야마 하야토의 얼굴이었다.

  한기가 들만큼 매서운 목소리에 교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으, 응?”

 

  험악한 음성은 평소의 하야마와 거리가 멀었다. 너무도 이질적인 탓에 정말로 본인이 한 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당사자인 사가미도 마찬가지였는지, 쉴새없이 껌뻑거리는 두 눈은 막다른 길에 몰린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그쯤되면 물러설 만도 하건만 하야마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떨리는 몸을 몇 발짝 물린 사가미가 더듬더듬 대꾸했다.

 

  “그, 그게······. 어제 있잖아, 기억 안나? 그, 매점 뒤에서······.”

 

  매점 뒤? 토츠카와 만났을 때의 일인가? 그러고 보니 그 때 사가미가 왔었다고 했는데······.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군.

 

  조금 전 사가미는 둘이서 만났다는 사실을 힌트처럼 뿌렸다. 아니, 힌트라는 미명하에 단둘이 만난 사실을 동급생들에게 과시했다. 모두가 사랑하는 하야마 하야토와, ‘그 때’ 라고만 해도 통하는 비밀스러운 관계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밑천이 뻔히 드러나는 블러핑이었다.

  하야마는 사가미와 나눈 대화를 바로 떠올리지 못 했다. 바로 어제였음에도 말이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하야마에게 있어 그 대화는 일상에서 스쳐지나가는 의미없는 잡담이나 다름 없었다.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는 기쁨, 서로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기대를 품은 시점에, 얄궂게도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단 걸 알게 된다면······.

 

  세상에 그것만큼 비참하고, 우스운 농담이 어디 있을까?

 

  “아하, 그 때 이야기구나.”

 

  부릅뜬 눈이 풀어지고 흘러나온 목소리엔 웃음기가 서렸다. 살기마저 방불케한 중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그야 연극 연습은 힘들지.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는데다 뭐하나 처음 접하는 것 투성이였으니까. 한 두마디쯤 푸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이었지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어.”

  “어, 어어······?”

  “거기에 거부권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로 하기 싫었거나 불가능할 정도의 연습을 강요받았다면 분명히 거절했을 거야. 아무리 학급 행사라 해도 개인이 거기까지 희생할 필요는 없으니까. 축구부도 마찬가지, 원래 운동부는 문화제 기간에 활동량을 줄이는 게 관례거든. 부활동도 좋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만 문화제에 참가하지 못 하는 것도 그렇잖아? 주변 학교들도 사정은 비슷하고, 대회까지도 시간이 있으니 잠시 쉰다해도 문제는 없고.”

 

  하야마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짓더니, 옆에 있던 토베의 어깨를 툭 쳤다.

 

  “안 그래, 토베?”

  “어······ 어어! 그렇지! 암암! 휴식기랄까, 비시즌 같은 거걸랑!”

  “잠깐, 그럼 안돼잖아. 학급 행사를 도우라는 취지지 쉬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아, 아니 뭐랄까 평소에 운동하던 거에 비하면 쉬는 거나 마찬가지랄까~, 그런 뜻으로 한 말이거든!”

  “뭐야, 그게. 그렇게 말하면 내가 평소에 엄하게 굴리는 것 같잖아~.”

 

  하야마가 토베의 머리를 찌르더니 장난스럽게 헝클어댔다. 우스꽝스럽게 팔을 휘젓는 토베 덕에 이곳저곳에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교실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음은 물론이다.

 

  제법인데, 역시 하야마다. 분위기 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자, 그럼 회의를 재개하자.” 

 

  힘차게 일어선 하야마가 교실을 가로지르더니 맨 앞 두 번째 줄에서 멈춰섰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반은 앞으로 나가고 있어! 뒤쳐지지 않으려면 힘내야지!”

 

  반장의 어깨에 손을 얹고 힘찬 손길로 일으켜세운다. 그대로 등을 밀어 교탁 앞에 데려가서는 떨리는 손바닥에 분필을 쥐어주었다.

 

  “다같이 생각해 보자.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보면 뭐라도 나올 테니까.”

 

  터져나오는 환호성, 저마다 팔을 치켜든 학생들이 그 말에 동조했다. 거기에 고무되었는지 주저하던 반장도 팔을 들었다. 불끈 쥔 주먹과 기합 들어간 목소리에 F반의 분위기는 하늘로 날아갈 듯 솟구쳤다.

 

  그 속에서 미소짓지 않는 사람은 사가미 뿐이었다.

  억지스레 끌어올린 입꼬리는 껄끄러운 속내를 숨기지 못 한다. 

  그러면서도 교실을 나가지 않은 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갈 거지만 말이야.

  도망치는 게 아니다. 여기 있어봐야 도움이 안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일은 따로 있고,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좌절할 시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가장 절망해야할 이들이 일어섰는데 주저 앉아 있어서 되겠는가. 하물며 이 변화를 주도한 건 저 녀석이다.

 

  저 녀석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

  마음을 굳게 먹고, 조용히 뒷문을 나섰다.



  xxx



  1층으로 내려와 안뜰로 이어지는 통로를 향했다. 어제 내렸던 비가 습기를 남기고 간 탓에 후덥지근했고, 아스팔트 위로 흐물흐물 올라오는 아지랑이가 얼마 남지 않은 늦더위를 실감케 했다. 시간도 때울 겸 갈증을 달래기 위한 생명수를 사러 왔을 뿐, ······이었는데.

 

  “부부장은 이거였죠?”

 

  어째서인지 하타노가 있었다.

  양손에 하나씩 맥캔을 움켜쥔 채.

  그 중 하나를 내게 던지더니 남은 캔을 따서 벌컥 들이킨다.

 

  “으엑, 달아. 언제나 이런 걸 마시는 거에요?”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말하지. 너도 익숙해지면 이것만 찾게 될 거다.”

  “설명만 들으면 마약이잖아······.”

 

  피식 웃어보이고는 건네받은 맥캔을 땄다. 본의 아니게 얻어먹는 셈이 되었지만 이미 받은 물건을 어쩌랴. 필로티 그늘 아래 나란히 서서 말없이 맥캔을 홀짝였다.

 

  손에 쥔 무게가 반 정도 줄었을 무렵, 시계를 보자 위원회 업무까지는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기세 좋게 뛰쳐나온 건 좋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일렀던 셈이다.

 

  “오늘도 정시출근인가요?”

 

  불쑥 중얼거리더니 또다시 맥캔에 입을 갖다대는 하타노.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그 모습은 방금 전 한 말이 혼잣말임을 주장하는 듯 했다. 대답해야할 의무는 없었지만 말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야지.”

  

  나도 나라고 생각한다.

 

  잇시키가 어떤 의도에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안다. 이제는 효력이 다했단 사실도 알고 있다. 어떤 까닭인지 내게 호의를 품은 여자들이 있었고, 둔감한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 했다. 어긋난 관계성은 자꾸만 헛돌아 위원회 업무에도 영향을 끼쳤고, 나를 사랑해준 유키노시타 또한 상처입히고 말았다. 잇시키는 후배로서, 부장으로서, 한 사람의 친구로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못나고 어리석은 나를 대신해 담판을 지으려 했고, 본래라면 내가 맞아야 했을 역풍에 휩쓸려 버렸다.

 

  불평 한 마디쯤 할 법도 하건만 내색 한 번 없이 등을 밀어주었던 잇시키가, 아직도 나를 선배라고 불러준다.

  그렇게 불린 이상 내게도 오기가 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척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철회되지 않는 이상 잇시키의 말은 절대적이다. 설령 시효가 지난 명령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

  

  “바보야. 바보가 있어······.”

  

  시끄럽네. 너도 켕기는 게 있으니까 여기서 서성이는 거 아냐?

  한 마디쯤 반박하려다 그만두었다. 입에 담는 것은 멋이 없으니까. 대꾸가 없자 하타노는 반작용을 상실한 용수철처럼 뻘쭘하게 입맛을 다셨다. 손에 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부부장, 잇시키랑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아마 이것이 본론이었으리라.

  다소 생뚱맞은 질문이었지만 묘하게 납득은 갔다. 

 

  “아니, 위원회 소집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사이다만.”

  “예전에 만난 적은요?”

  “없어. 왜?”

  “아뇨······, 친해 보인다 싶어서요.”

 

  친하다라······. 미묘한 표현이구만.

 

  “하기야 이상해 보일만도 하겠네. 학년도 다르지, 부활동이 같은 것도 아니지, 어느모로 보나 나같은 녀석과 접점이 생길 이미지는 아니니까.”

  “아니,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요······. 근데 부정할 수는 없네.”

  “뭐, 대외적인 이미지가 그렇단 말이지만.”

  “네?”

 

  하타노에게라면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 녀석은 잇시키의 동급생이고, 폼으로 우리와 함께 일한 게 아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잃어버렸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고 했던가. 한 배를 탄 동료이며 서로의 약점을 맡길 수 있는 동지였다.

 

  “잇시키, 친구 없지?”

  “······.”

  “대답할 필요는 없어. 그 반응 만으로 충분하니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글쎄, 처음부터일까? 만난 순간 감이 오더라고. 아, 이 녀석은 외톨이구나. 의례적인 인사나 필요할 때 뭉치는 ‘지인’은 있어도, 진정한 ‘친구’는 한 사람도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마치 거울을 보듯 빼닮아 있었기에.

  쭈그리고 앉은 나를 내려다보던 소녀의 눈에서 어울리지 않는 그림자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남 일 같지 않았거든.”

 

  대화가 통한다는 건 서로의 가치관에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사람과의 사귐에 서툰 내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잇시키를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나와 잇시키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호의적인 감정이 있다 한들 그건 그냥······. 뭐라 해야 하지? 동질감?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네.”

  “애초에 거기까지 의심한 적도 없는데 말이죠.”

  “시끄러. 가만 있어 보라고, 그러니까, 음······.”

 

  그래, 역시 이 말밖에 없어. 조금 쑥스럽지만.

 

  “남매애······ 같은 걸지도. 어떻게 보면 나는 그 녀석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우와, 말하고 나니 진짜 쪽팔리잖아. 깬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다.

 

  “남매, 말이군요······.”

  “······그렇지.”

 

  징그럽다고 경멸당할 줄 알았건만, 하타노의 눈빛은 정반대였다. 안경 탓인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지면을 지긋이 노려보는 시선이 개미를 관찰하는 과학자 같았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모습에 결심을 굳혔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를 막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저쪽의 상황을 알려주지 않을래?”

 

  해야할 일은, 이쪽의 진심을 부딪치는 것 뿐.

  호의에는 호의로, 적의에는 적의로, 마치 거울처럼 되돌려준다.

  한없이 진지한 그 마음에 말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를 위해 상처받는 것 또한 사양이다.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그걸······?”

  “마시지도 않는 음료수를 두 개나 사는 이유는 뻔하지. 첫 번째는 줄 사람이 있을 때고, 두 번쨰는 그 사람을 붙들어 둬야 할 때. 동질감을 노려서 시선을 돌린다는 발상은 좋았지만, 연기를 할 거면 조금 더 주의깊게 하는 게 좋아. 이런 소소한 디테일이 몰입을 깨부수는 거니까. 소스는 나, 그리고 우리 반.”

  

  추가로 시선 처리도. 정곡을 찔리자마자 뒤를 돌아보면 안 되지. 의식하지 못 했겠지만 그런 행동이야말로 상대의 추측에 확신을 실어준다고.

 

  “안 돼요.”

  “너무하네.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같은 부서 동료잖아.”
  “바로 그렇기 때문이에요. ······이건 우리 반 문제니까요.”

 

  아하, 그쪽이었군. 잇시키가 상대하고 있는 건 같은 C반의 동급생인가 본데.

 

  “너네 반도 고생이 많구나.”
  “무슨 말을 하셔도 여긴 못 지나갑니다. 돌아가 주세요.”

  “그건 싫은데.”

  “부부장!”

  “어이쿠, 그렇게 큰 소리치다 들켜도 나는 모른다? 너도 알잖아.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올 사람은 없다는 거. 너네 반 녀석들도 그걸 노린 거겠지.”

  “윽, 이런 치사한······.”

  “뭐, 걱정마라. 앞으로 나갈 생각도 없으니까.”

  “하? ······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동전을 아슬아슬하게 받은 탓에 하타노의 안경이 흘러내렸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재밌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흐른다. 놀릴 수 있는 시간도, 기다릴 수 있는 시간도 사라졌다.

 

  발소리에 놀란 하타노가 화들짝 몸을 돌렸다.

 

  “그러게 말했잖냐, 큰 소리 치면 들킨다고.”

  “젠장,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잇시키는 안 보이네. 조금 있다 나오려나.”

  “무슨 태평한······. 아, 저기······.”

 

  필로티 기둥 사이 한구석에서 일련의 여학생들이 쏟아져나왔다. 멈춰 선 우리를 흘긋거리더니 가까운 계단을 통해 걸음을 옮긴다. 행렬의 맨끝, 일행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있던 잇시키가 우리를 보고 멈춰섰다.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입술이 한숨을 쉬었다.

 

  “오셨네요, 선배.”

  “어, 수고했다.”

 

  터벅터벅 다가오더니 뒷짐을 지고 올려다본다.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황갈색 머리는 단정했고 새초롬한 눈동자에 부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웬 일이세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이 하타노에게 옮겨갔다.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아직 회의 시간도 안 됐잖냐. 우연히 만난 김에 끌고 왔을 뿐이야.”

  “끌고와요? 선배가 하타노 군을?”

  “어. 맥캔을 전도하려 했거든. 겸사겸사 선배 행세도 좀 하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후배에게 한턱 쏴 보겠냐?”

 

  선배 노릇 하는 겸 맥캔 전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맥캔을 홍보하는 게 메인이라는 뜻을 전한다. 반쯤 남은 캔을 들어올리자, 하타노는 화들짝 숨을 들이키더니 들고있던 자신의 캔과 동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잘 가라, 내 500엔. 좋은 주인을 만나 행복하렴.

 

  “너도 마실래? 피곤할 때는 이것만한 게 없는데.”

 

  다단계 사기꾼처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음료수를 사주는 것 정도는 선후배간에 자연스러운 일이고, 시커먼 남자 둘이 인적 없는 교정에 서 있던 이유로는 충분했을 터이다. 잇시키도 납득했는지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뭐에요 그게~, 바보같아.”

 

 아이처럼 순수하게 미소짓는다. 바닥에 떨어진 공이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튀어오르는 듯, 잇시키의 웃음도 기세를 더해갔다.

 

  ““잇시키······?””

 

  저러다 호흡 곤란으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무렵, 눈가를 훔친 잇시키가 고개를 들었다. 잰걸음으로 달려와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잘 마실게요!”

 

  손에 쥔 맥캔을 낚아채더니, 말릴 새도 없이 쭉 들이킨다.

 

  “뭣?!”

  “야, 너······!”

  “으엑, 달아. 선배는 이런 걸 어떻게 마시는 거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단 맛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귀엽잖아요?’ 라며 너스레를 떨거나, ‘그렇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대신 다른 걸로 사주세요!’ 라며 철벽을 치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택지는 많았지만, 잇시키는 그 모든 예상을 빗나갔다. 신기하리만치 깔끔하게도 누군가의 대답과 닮아 있었다.

  

  “응?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묻더니 손에 쥔 캔을 콰직 우그러뜨렸다.


  “아, 아니······. 없는데······.” 

  “후후, 그럼 됐어요. 아, 하타노 군, 캔은 저 주세요. 같이 버려 드릴게요.”

  “어, 어······. 고마워······.”

 

  극심한 공포에 굴복한 하타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캔을 넘겨주었다. 먼젓번과 달리 내용물이 남아있던 캔이 시커먼 액체를 흩날렸다. 그 처참한 덩어리를 쓰레기통에 던져놓은 잇시키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닦았다. 

 

  “뭘 이 정도로, 슬슬 갈까요. 회의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앞서 걸어나가는 잇시키를 뒤따르며 쓰레기통을 곁눈질했다. 누르지 못할 압력에 터져버린 용기는 캔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흡사 피보라와도 같은 얼룩이 쓰레기 봉투 곳곳에 스며든다. 곧 있으면 개미들이 몰려들겠군.

 

  “선배.”

  “느?! 앗, 넵!”

 

  갑작스레 멈춰 선 잇시키가 나를 부르는 바람에, 더듬거리는 경어로 대답하고 말았다. 딴생각 하는 거 들켰으려나? 아니, 딱히 업무 시간도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든 내 마음이잖아.

 

  찰나의 불만은 속으로 삼켰을 뿐 겉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딱히 잇시키가 무서워서는 아니다. 뒤돌아본 눈동자에서, 언제나와 같이 당찬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도대체 뭐가?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잇시키의 시선이 멀어져간다.

 

  “아, 그리고 하타노 군도.”

  “······나는 왜 덤 취급이야.”

  “그야······, 하타노 군이니까?”
  “심하네. 아무리 나라도 그런 취급을 받으면 발끈한다고?”
  “그런가요?”

 

  그런가요가 뭐야, 그런가요가. 그런 거, 당연한 거잖아.

  시선을 거둔 잇시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렇네요. 부당한 취급을 받으면 누구라도 발끈하죠.

   그러니까 우리도 반격 하자구요. 당하기만 해선 분하잖아요?”

 

  평온했던 호흡은 갈라졌고, 굳게 쥔 주먹은 흔들렸지만, 당당하게 편 등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언제나 작아보였던 어깨가 더없이 듬직했고, 떡 버티고 선 다리는 주변의 돌기둥보다 단단해 보였다.

 

  돌아보자, 쭉 뻗은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켜올린 하타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 뜻대로.”

  “우린 그저 따를 뿐이야.”

 

  기록 잡무부의 원칙은 하나.

  부장은 특별하며, 명령은 절대적이다.

 

  xxx

 

  회의실은 한산했다. 

 

  아마도 어제 회의에서 사가미가 했던 말 때문이겠지. 평소라면 업무에 대해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았을 사가미가 이례적으로 소집했던 회의다. 이런 변화는 모종의 메세지로 해석되기 쉬웠다. 

 

  실행 위원회는 이름만 거창할 뿐 어디까지나 임시기구고, 서로 얼굴도 처음보는 학생집단에 불과하다. 몇몇 사항이 누락된다 해도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친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합치되지 못한 연합, 조별과제가 언제나 실패한다는 사실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에 반해 학급 행사는 책임 소재가 명확하다. 실행 위원들은 각자의 반에서 차출된 인원이므로 실권 여부에 상관없이 반의 대표라는 직함이 씌워져 있다. 권위 없는 위원장일지라도 엄연히 상관인 사가미에게 거역하기란 어렵다. 대의명분이 완벽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뜬금없이 난입한 학부모 세력은 마치 외부 감사기구라도 되는 양 목을 조여왔고, 눈치 빠른 사가미는 그들이 제공한 명분을 등에 업고 총공세를 펼쳐왔다. 연대책임과 공개처형이 조직 통제의 효과적인 수단임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했다.

 

  “어째 더 없어졌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항상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여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기록 잡무부는 나와 잇시키, 하타노 세 사람이 전부였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부서의 출석률이 전체 위원회 가운데 1위라는 것이다.

  

  수뇌부 좌석엔 유키노시타 뿐이였고, 각 부서별 출석률도 한 두명을 넘기지 못했다. 참담한 광경에 아연해하던 잇시키가 입을 열었다.

 

  “위원장은요?”

  “아마 안 올걸. 그보다 왜 나한테 묻니?”

  “그야, 위원장이랑 선배는 같은 반이니까요.”

  “과연.”

 

  얘들이 사가미를 위원장으로 부르는 이유를 슬슬 알 것 같다. 직책명으로 부르면 선배님이라 안 불러도 되잖아. 뭐야? 설마 나를 부부장으로 부르는 것도 그것 때문인가?

 

  “여, 왔구나.”

 

  우리를 발견한 혼모쿠가 인사를 건넸다.

 

  “솔직히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좀 봐주라. 너희들까지 없으면 진짜 끝이니까.”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감을 처리하기에 지금 인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석한 인원들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 했는지 업무의 윤곽을 잡지못해 헤매고 있는 인원도 보였다. 

 

  우왕좌왕의 끝에서 그들이 찾아간 사람은 결국 유키노시타였다. 부위원장 자리까지 갔지만, 뻑뻑한 눈을 비비며 연신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 했다. 갈 곳 잃은 눈동자는 결재를 받지 못한 채 쌓여있는 서류 더미에 못박혔다. 그 때마다 유키노시타는 일어섰고, 귀중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실행 위원들 또한 명확한 지시에 감사를 표했고, 그에 앞서는 미안함을 전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리에 돌아가는 학생들을 향해 유키노시타가 미소지었다.

 

  “잇시키, 제안이 있는데······.”

  “우연이네요. 저도 마침 제안이 있었거든요.”

 

  한 걸음 물러선 잇시키가 나와 하타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부장으로부터 부원에게 긴급 명령입니다. 현 시간부로 기록 잡무부는 기존 업무를 정지하고 부위원장을 지원합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어차피 남은 일도 없어요. 어제 다 해치웠으니까. 얼마나 지옥같았는지······.”

  “하타노 군?”

  “험험. 아무튼, 본래 기록 잡무부의 본업은 행사 당일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제반 작업은 마쳐두었습니다. 마음 편히 과로해 보자구요!”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하타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너희들······.”

 

  기쁨은 입이 아닌 눈으로도 표출된다. 긴장을 놓는 순간 터져나올 것 같은 감정을 눈꺼풀 뒤에 억눌렀다.

 

  아직은 아냐. 울어도 내가 먼저 울어선 안 돼. 내게는 밀어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고맙다.”

 

  감사를 전한 뒤 교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인기척에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들었다. 굳었던 얼굴 근육이 일순간 파르르 흔들렸다.

 

  “도와주러 왔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유키노시타가 입술을 깨문다.

 

  “괜찮다고 했잖니.”

 

  물론 알고 있다. 유키노시타가 내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나라는 개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고집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꺾기 어렵다. 무엇보다 내가 바라지 않는다. 겁쟁이니까.

 

  그렇기에 힘을 빌렸다.

  논리도 명분도 모조리 빌렸다. 나를 보내기 위해 희생해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댔다. 그렇게 겨우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부장 명령이거든.”

  “부장? ······잇시키 양이?”

 

  한 때 그 단어는 유키노시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를 막아세운 언령言霊을 걷어내기 위해 다른 언령을 빌려온다. 부장 명령은 부장 명령으로만 상쇄할 수 있는 법이다.

 

  “‘기록 잡무부’의 ‘기록’에 관련된 일은 모조리 끝냈다. 애초부터 우리 부서는 문화제 당일이 바쁘지, 그 전에는 대체로 한가하다고. 한가하다 못해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나 할까? 기왕 출근했는데 자리만 지키고 앉아선 눈치 보이잖냐. 뭐라도 일을 달라 이거지. ‘잡무’ 부니까.”

 

  유키노시타가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기에, 뒤돌아 보지 않아도 잇시키와 하타노가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눈동자가 삽시간에 휘둥그레졌다.

 

  “무슨, 당신들!”

 

  나를 비집고 나타난 두 사람이 유키노시타의 책상에서 서류더미를 낚아채갔다.

 

  “이건 저희가 맡을게요, 유키노시타 선배!”

  “두 분은 느긋이 대화하시길!”

 

  느긋이 대화하기는 개뿔, 한 마디가 많다고, 하타노. 무진장 부끄럽잖아.

  황급히 일어선 유키노시타가 제자리에 멈췄다. 가만히 있는 내가 자신을 막아서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눈싸움도 잠시, 한숨을 쉰 유키노시타가 입을 열려한 때였다.

  수뇌부석 한쪽 끝에 위치한 회의실 문을 누군가가 밀어젖혔다.

 

  “유키노시타 양, 있어?”

 

  들어온 사람은 사가미였다. 머리칼과 교복은 땀에 젖어 번들거렸고 옆구리를 부여잡은 팔이 쉴새없이 오르내렸다. 

 

  유키노시타 있냐고? 요근래 들었던 말 중에 제일 웃긴 코미디로군. 유키노시타는 언제나 있었어. 누구랑 다르게 말야.

 

  “사가미 양? 어쩐 일로······.”
  “미안, 지금 좀 급해서! 일단 이거!”

 

  거칠게 대화를 끊더니 유키노시타의 가슴팍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듯이 떠넘겼다.

 

  “이건······.”

  “결재 도장이야!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오늘은 못 올 것 같거든? 이거 줄테니 유키노시타 양이 알아서 찍어 줘!”

 

  다급한 기색으로 쏘아붙이는 사가미는 모종의 절박함마저 감돌았다. 누가 보면 집에 우환이라도 생긴 줄 알 겠네. 가방만 들고 왔어도 완벽했을텐데 말이야. 그말인 즉슨 이 녀석은 다시 반으로 돌아간다는 소리지. 바쁘다는 일이 도대체 뭔데? 못 올 거 같다고? 이미 왔잖아? 지금부터 출근해 일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 했다. 얼마없는 실행 위원회 멤버들은 하나같이 차가운 눈초리로 사가미를 흘겨보았다. 유키노시타도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한숨을 쉬며 도장을 받았다.

 

  “오늘만 맡아둘게. 내일은 꼭 오도록 해.”

  “고마워! 유키노시타 양이 유능해서 다행이야, 믿고 맏길 수 있다니까~! 아참, 1학년 C반과 2학년 F반에 관한 사안은 보류해 두고, 먼저 나에게 연락을 줬으면 해. 그것만 지켜주면 다른 건 다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거침없이 쏟아붓는 와중에도 특정 단락에서 향해지는 시선 처리, 명백히 나를 바라보며 휘젓는 제스처와 표정 연기는 프로 랩퍼를 방불케 했다. 나같은 떨거지를 신경쓰다니, 사가미 양은 어지간히도 한가한가 봐? 

 

  말해봐야 뭣 하랴, 입만 아픈 것을. 유키노시타도 이런 심정이었구나.

  씁쓸한 동질감을 곱씹으며 유키노시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용한 교실을 메운 소리는 전혀 다른 곳에서 터져나왔다.

 

  “에엥~? 그럼 안 돼지, 사가미! 너 바보 아냐?”

 

  잇시키???

  너무도 의외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행 위원들도 일제히 기록 잡무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처럼.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한 건 사가미였잖아! 본인이 주도해서 밀고 나가야지 남한테 넘겨주면 어떡해? 사가미도 참 답답하다니까~.”

  “자, 잠깐, 잇시키 양?”

 

  그리고 못 보던 거울이 하나 더.

  언제부터 있었는지 잇시키 앞에는 한 남학생이 서 있었다.

  하타노와 세트처럼 보이는 안경을 쓴 채,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식은땀을 훔친다.

 

  “잇시키 양, 부탁이야! 지금은 안 돼! 조금만 있다가 말해 줘!”

  “그, 그래. 잇시키 양. 지금은 조금······.”

  “안 돼. 어딜 도망가려고? 하타노 군은 일이나 하세요.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니까.”

  “아니, 하타노에겐 높임말 쓰면서 왜 나만 반말로······.”

  “하타노 군은 같은 부서 동료이므로 예의를 갖추는 것 뿐이야. 사가미는 나랑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애시당초 너도 반말하면서 뭘.”

  “그건, 그렇지만······.”

 

  구원의 손길은 잘려나가고 도주로는 봉쇄된다. 남학생을 몰아넣은 잇시키는 더욱 기세를 올렸다.

 

  “아무튼, 우리 반의 행사 테마를 정한 건 사가미相模니까 끝까지 책임져. 이제와서 내뺄 생각 말고. 메이드 카페 못 하면 어때? 뭣하면 일반 카페로 전환한 뒤 그 옷 그대로 유니폼으로 삼던가. 서류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냐? 하여간 생각이 굳었다니까, 이 스모相撲.”

  “스, 스모?”

  “안 되겠다. 비실비실해서 그것도 안 되겠어. 교실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된다고 땀 흘리는 거야? 냄새 나. 저리 떨어져. 할 말은 끝났으니 얼른 교실로 돌아가 버려.”

  “너무해, 기껏 불러서 왔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남학생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졌다. 비실비실 좀비처럼 어기적대는 걸음으로 교실을 나가자, 하타노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 앉은 잇시키는 콧노래를 부르며 업무를 재개했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불편한 적막이 감돌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사가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 잇시키 양?”

  “네~, 무슨 일이시죠, 위원장?”

 

  아, 역시. 직책명으로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 저······. 방금 꽤나 불손한, 아니 넘어가기 힘든 말을 들었는데?”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위원장?”
  “서류만 고친다고 문제가 없는 게 아니야. 문제는 의상이니까. 그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앗, 듣고 계셨어요~. 물론 농담이죠~. 알잖아요, 사가미~. 엄청 답답하게 구는거~.”

  “읏?!”

  “저렇게 밀어줘야 뭐라도 하지, 안 그럼 아무것도 못 할 걸요? 아, 방금 제가 말한 건 신경쓰지 마세요. 우리 반 여자아이들, 엄청 기 세거든요. 학급 회의 단계에서 기각될 거에요~.”

  “그, 그렇구나······.”

 

  보아하니 방금 전 남학생은 사가미의 동생이었던 모양이다. 누나 쪽을 ‘위원장’으로 부르면 남매를 구별할 수 있다는 명분 하에, 꼬박꼬박 사가미의 이름을 들먹여댔다.

 

  “그, 그럼. 난 돌아가 볼게. 이만 수고해······.”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위. 원. 장~!”

 

  무서워, 이게 잇시키가 말한 반격인가? 보는 내가 짜부라질 것 같잖아.

  한 번 기세에 밀린 사가미는 도망치듯 교실을 떴다. 그것만으로도 회의실의 분위기는 누그러졌고, 먹구름이 걷힌 듯 한결 밝아 보이기까지 했다.

  

  적의 퇴각이 확인되자 잇시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끝냈는지 잘 정리된 서류를 내밀었다.

 

  “부위원장! 이거 끝났어요! 확인하시고 결재 부탁 드립니다!”

  “그, 그래. 고마워······.”

 

  당황스러움도 잠시, 업무에 임하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유키노시타는 잇시키에게 받아든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지켜보는데 소매를 잡아당기는 감촉이 느껴졌다.

 

  “선배, 저 잘했죠?”

  “어어, 그래. ······좀 심한 게 아닌가 한다만. 그 녀석, 울 것 같았다고?”

  “뭐에요? 같은 반이라고 편 들어주는 거에요? 그렇게 안 봤는데.”

  “오해다. 내가 말한 건 동생 쪽 사가미야.”

  “아 그쪽이구나~. 괜찮을 거에요. 하타노 군이 따라갔으니 알아서 설명해 주겠죠.”

  “너 진짜 가차없구나······.”

  “그렇지도 않아요. 사정을 들었을 때 기뻐하는 건 사가미 군 쪽일걸요? 그 사람 자기 누나를 엄청 싫어하니까.”

  “아, 하긴.”

 

  저런 누나가 있으면 인생이 고단하긴 하겠네.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 하드 모드인 거잖아, 어휴 끔찍해라. 내 주변의 ‘누나’들이란 전부 착한 사람 뿐이었는데, 진짜 운이 좋다니까.

 

  그래, 나는 운이 좋았어. 단지 내가 걷어찼을 뿐이지.

 

  “선배.”

  “응? 왜······. 으헉?!”

  옆구리를 쥐어박는 주먹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작고 가벼운 펀치는 아프다기보다 간지러웠다. 주의를 돌릴 목적이었는지, 꼴사나운 반응이 재밌었는지, 잇시키는 소악마같은 미소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뭘 멀뚱멀뚱 서 있어요. 딴 생각 할 시간 있으면 가서 일이나 하세요.”

  “야, 너······.”

  “부장 명령이랍니다♡?”

  “······네네.”

 

  작은 손에 떠밀려 앞으로 나아간다. 그 끝에는 유키노시타가 있었다.

 

  “일, 가져가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유키노시타는 여전히 얼굴을 서류에 묻은 채였다. 다만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시선에 따라 아주 약간 고개가 흔들린 것도 같았다. 기회를 놓칠세라 잽싸게 서류를 덜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럴 의도가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서류에 집중하던 유키노시타에게, 내 말은 처음부터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확인하기가 무서웠기에 대답을 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골랐다.

  

  그것이 익숙했으니까.

  내가 아는 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이것이 스스로조차 속이는 기만에 불과하다면?

  한 번 저지른 죄는 영혼에 새겨져 이따금 모습을 드러냈다.

  이따금 떠오르는 불안이 출처없는 의혹을 부채질한다.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엇나감은 알지만, 어디서 엇나가는 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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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와사키 사키는 부끄러운 비밀을 폭로당한다.



  자정의 심야

  하치만과 이로하의 라인

   

  「선배, 주무세요?」

  「아니, 왜?」

  「우왓, 깜짝이야. 어째서 즉답하시는 거에요? 답장 너무 빠르잖아요.

    아, 혹시 귀여운 후배의 연락을 기다리고 계셨다던가?」

  「바보냐. 외톨이에게 있어 휴대폰은 시계같은 거라고. 소리내며 떨리는데 들여다 보는게 당연하지. 일부러 바쁜 척 몇 분 있다 답장하는 짓은 못 한 단 말이다.」

  「네네, 그러시겠죠. 보나마나 유키노시타 선배를 기다리고 계셨겠지만요.」

  「이만 잔다. 너도 잘 자라.」

  「우와앗! 죄송해요! 잠깐만요! 가지 말아주세요, 선배!」

  「대체 뭔데······.」

  「업무 상담이에요.」

  「아직 붙잡고 있었냐?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서툴러서 늦어진 거구, 부장이라 도망칠 수도 없구,

  저희 부서의 일정이 저 때문에 늦어지는건 싫단 말이에요.」

  「에휴, 알았다. 혹시 집에 컴퓨터 있니?」

  「아, 네. 노트북이라면 있는데요.」

  「카메라 달려있을테니 잘 됐네. 나머지는 영상통화로 이야기하자. 스카이프 쓸 수 있냐? 디스코드도 상관없다만.」

  「뭐, 뭐에요, 갑자기?! 목소리만으론 안 되나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건가요? 너무 대담하잖아요! 저 지금 무지 편한 차림인데······.」

  「됐으니까 빨리 켜. 라인은 메신저로만 쓰고, 사진 자료같은 건 그쪽으로 보낼 테니까. 지금부터 시작하면 2시 전에는 끝낼 수 있을 거야. 얼른 자야지.」

  「······감사합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부장님이 고생하시는데 부원이 놀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죠? 그럼 부담없이 업혀 가도록 할까요?」

  「그래그래, 각오하는 게 좋아. 시간제한이 있는만큼 속성으로 때려박아줄 테니까.」

  「으아앙, 선배!!!」

 

xxx

 

  문화제를 한 달 앞둔 학교는 어수선했다.

 

  오늘부터 문화제 준비를 위한 방과 후 교실 잔류가 허용된다. 예년에 비해 늦어진 일정이 기대감을 부추겼는지 어느 반 할 것 없이 달아올랐고, 교실에 넣지 못한 상자들은 복도까지 밀려나 어지러이 쌓여있었다. 덕분에 학생들은 묘기를 부리듯 비좁은 틈새를 지나다녀야 했다. 

 

  무얼 만드려 하는지는 재료만 봐도 아는 법, 컨셉이 겹치는지 벌써부터 옆반과 기싸움을 벌이는 학급도 나타났다. 하긴 카페 같은게 붙어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시너지 효과는 커녕 공멸이다. 상호확증 파괴다.

 

  그러나 때로는 독보적인 컨셉이 해가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여기는 2학년 F반, 교탁 앞에 선 하야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스태프와 배역을 정하도록 하자. 각본은 히나가 맡는 걸로 하고, 나머지는······.”

 

  필요한 역할을 칠판에 써내려간다.

 

  감독 : 에비나 히나

  연출 : 에비나 히나

  각본 : 에비나 히나

 

  나머지는 무슨······, 1인 제작사냐? 에비나 양의 특기는 분신술이었습니까? 

 

  제작 진행 : 유이가하마 유이

 

  제작 진행이라······, 제작 진행이란 뭘까? 연기에 관한 부분은 에비나 양이 전담할 거 같고, 중재나 매니지먼트에 관련된 일이려나? 그런 거라면 유이가하마가 적격이긴 하지. 인맥으로 뽑은 인선은 아닌 셈이다.

 

  광고 홍보 : 히키가야 유미코

 

  ······그래, 뭐. 누나는 언제나 친구가 많았으니까.

  거창한 홍보도 필요 없다. 그저 반에서 연극을 한다고 말 한 마디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래, 그저 한 마디만으로도.

 

  출연진이 전부 남자이다 보니 각종 지원 업무는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배치된다. 연극은 시각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는 예술. 의상 코디나 메이크는 여자 쪽이 맡아주는게 믿음직스럽겠지. 소품 제작 정도는 남자들도 돕겠지만, ······아니, 이번만큼은 도와주고 싶다가 정답일지도.

 

  “자, 그럼, 맡고 싶은 배역이 있는 사람?”

 

  그래,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배우다. 여자는 쓰지 않겠다는 기이한 작품론을 가지신 감독님 덕분에, 반의 모든 남학생이 후보에 올라버렸다. 카부키냐고. 

 

  교실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에비나 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부(腐)후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지옥의 캐스팅 권을 거머쥔 독재자, 에비나 양은 왕년의 삭제 성애자같은 손놀림으로 분필을 놀려나가기 시작했다. 오오, 통재라. 오세느=트리니.

  칠판에 이름이 적혀질 때마다 터져나오는 비명소리, 아직 40초 안 지났다고? 사신도 사과도 노트도 없지만 그 무엇보다 강한 저주가 그곳에 있었다.

 

  조연이 채워지고 곧이어 메인 캐스팅 발표가 이어졌다.

 

  어린 왕자 : 하야마 하야토

 

  “꺄아아~!!!”

 

  얼어붙은 하야마와 대조적으로 여자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메이크업 담당을 미리 정해놔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경쟁이 엄청 치열했겠는걸? 이 정도라면 다른 반의 반응은 볼 것도 없겠군.

 

  자아, 그럼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

 

  강 건너 불구경처럼 쳐다보는데 에비나 양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멈춘다.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랐다.

 

  비행사(나) : 히키가(比企)

 

  “꺄아······!”

  “잠깐 스토옵!!!”

 

  마지막 글자가 새겨지기 전 에비나 양의 손에서 분필을 빼았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내게 놀랐는지 몇몇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은 긴급상황이니까!

 

  “칫, 그냥 이름만 적을걸 그랬나, 그 쪽이 빨랐을텐데······.”

  “역시 제 이름을 적으려 한 거였군요?”

  “맞아. 아, 딱히 사가미 양 때문은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히키가야 군이 적격이었을 뿐이니까.”

  “하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훔치며 부정해 보았지만 에비나 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빛이 반사된 안경이 눈을 가리니 히죽히죽 웃는 입이 더욱 위험하게 보인다. 주위를 둘러싼 여학생들의 반응도 미묘, 불안한 듯 칠판을 곁눈질하며, 드문드문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아하, 그거군. 그녀들이 생각한 히키가야比企谷는 유미코였던 게 틀림없다. 어릴 때부터 남녀 가릴 것 없이 인기가 좋았던 누나다. 2학년 F반, 아니, 전교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인 하야마와 유미코, 두 사람이 주연을 맡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흥행은 보장되겠지. 모름지기 주인공은 관객 동원력이 있는 사람을 캐스팅해야 하는 법이다. 원래 맡기로 했던 ‘홍보’ 또한 누나가 출연했다면 자연히 달성되었을 것이다.

 

  흥행을 위해서라면 다소의 고증은 희생할 수 있는 법. 아멜리아 에어하트 컨셉으로 20세기 여자 조종사를 내세운다면 그 또한 수요가 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파격적인 재해석을 가미한다면 금발에 더해 다소 멍한 구석이 있는 누나는 어린 왕자 역할도 소화할 수 있었다.

 

  즉, 저 아이들은 유미코가 주연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왕과 여왕을 도와 그들을 꾸미고 돋보이는 역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환호했고, 에비나 양이 지목한 사람이 나란 걸 알았을 때 실망했다. 그리고 내가 그 역할을 거부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들이 보고 싶었던 건 언제나 빛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

 

  상상하자니 소름이 돋았다.

  그런 미래가 실현되지 않았음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저는 못 해요.”

  “뭐? 어째서?! 그치만 그치만, 하야x하치는 얇은 책에선 머스트 바이라고?! 아니, 머스트 게이라고!”

 

  대체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은? 문화제에서 사욕을 채우는 건 안 된다구요?

 

  “아니, 그게······ 저는 실행 위원이니까요······.”

  “그, 그래. 연습도 해야하니 히키가야는 힘들 것 같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전체적인 구성을 재검토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야마의 시선은 그런 뜻을 포함하고 있는 듯 했다. 바란 적 없는 도움이지만 이미 받아 버렸으니 써먹을 수 밖에. 입을 다물고 부정하지만 않으면 되니, 까짓거 간단한 일이다.

 

  일리 있는 변론에 에비나 양도 수긍한듯 했다. 그러나 무언가 아쉬운듯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옆에 있던 분필을 집어 들었다.

 

  “할 수 없지.”

 

  고개를 돌리기 전 잠깐 마주친 눈동자는 지극히 평온했다.

 

  어린 왕자 : 토츠카

  비행사(나) : 하야마

 

  “응? 내, 내가 주인공 역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토츠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자신이 뽑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몹시도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여운 모습에 나는 위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미안, 토츠카! 이번만은 에비나 양의 선택에 찬성이야!

 

  “엄청 어려워 보이는데······. 내가 해도 괜찮을까?”

  “무슨 소리야! 토츠카야 말로 적임자라고 생각해!”

  “그, 그래······? 연극은 해본 적 없어서, 그다지 자신은 없는데······.”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문화제고, 진지한 연기가 필요한 자리도 아니니까. 괜찮다면 원작을 읽어볼래? 원한다면 빌려줄 수 있는데.”

  “정말? 고마워.”

 

  취미가 독서여서 다행이다.

  토츠카의 눈부신 미소를 바라보며, 인생에서 두 번째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책 읽을 시간도 없을테고 말이지. 

  

  “내쪽이 오히려 고맙지. 토츠카의 연극이라니 돈 주고도 못 누릴 호사라고.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좀! 하치만은 과장이 심하다니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정말 그대로다. 만일 이 연극이 토츠카 사이카의 단독주연이었다면 엑스트라라도 기꺼이 맡았을텐데······.  애매한 입장은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았다.

 

  그 때 하야마가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아, 배우들 모이래. 나 가볼게, 하치만!”

  “그래, 수고해라.”

 

  미팅 장소는 칠판 앞이었다. 손수 선발한 출연진 앞에 우뚝 버티고 선 에비나 양은 작품 방향성에 대한 열정적인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데, 그거 굳이 칠판에 적을 필요가 있는 겁니까? 뭐 부끄러움은 배우들 몫이겠지만요!

 

  “토츠카에겐 미안하지만, 실행 위원회로 도망친 건 신의 한수였단 말이지······.”

  “그것 때문이었냐!”

  “컥, 유이가하마?!”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싶더라니 바로 뒤에 유이가하마가 서 있었다. 손에 쥔 노트로 보아 진행 스케줄을 짜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로 사람을 때려도 되니?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야? 가하마 스파이 진짜 무섭다니까.

 

  “참~, 그럼 안 되잖아, 힛키! 실행 위원회는 유키농을 도와주러 들어갔던 거 아니였어?”

  “엄밀히 말하면 시로메구리 선배를 위해서지. 의뢰를 받았잖냐.”

  “또 말 돌린다니까~.”

  

  양손을 허리에 얹고 한숨을 내쉬는 유이가하마는 아이를 혼내는 엄마를 연상케 했다. 때묻지 않은 성격에 너무 어린 나이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꾹 참고, 유이가하마의 귀에 입을 갖다댔다.

 

  “좀 봐주라. 안 그래도 유키노시타가 주목받고 있는데, 도와주러 들어갔다고 어떻게 말하냐?”

  “앗, 그런 거였어?! 미, 미안해!”

 

  어머, 이 아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 버렸잖아? 물론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진실이 섞인 거짓말이란 역시 무섭네. 죄책감이 들 정도야.

 

  “우우······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미안해, 힛키······.”

  “이 정도 가지고 뭘. 이제부터라도 조심해 주면 됐어. 부실에서라면 몰라도, 교실에선 때리지 말기. 큰 소리 치는 것도 금지. 주목받는 건 싫으니까.”

  “아, 알았어! ······뭔가 나, 어린애 취급 받고 있지 않아?”

  “아, 들켰다.”

  “좀! 힛키!”

 

  방금 한 말이 무색하게도 우아앙 달려든 유이가하마는 그 작은 주먹을 연신 내 어깨에 두드려댔다. 매번 느끼는건데 유이가하마는 힘이 약하구나. 사브레에게 휘둘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응?”

 

  파닥파닥 허공을 가로지르던 손이 멈춘다.

 

  “그럼 지금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왜 아직 여기 있어?”

  “회의 시작까지는 시간이 있어서.”

  “항상 빨리 가더니 웬일루? 유키농이 보구 싶지 않아?”

  “네 안에서 나는 어떤 이미지냐······.”

  “그야······, 이거 말해도 돼?”

  “······아니, 무서우니까 그만 둬.”

 

  뭔지는 몰라도 공공장소에서 하면 안 될 말이 나올 것 같으니까.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얼른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유이가하마, 내 얼굴 어때?”

  “엣?! 어, 어떠냐니······.”

 

  기분 나쁘다니 눈이 썩었다는 즉답이 나올거라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유이가하마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아 그러고보니 썩었다는 말을 듣지 않은 지도 꽤 됐구나. 이 경우 단순히 유이가하마가 착할 뿐이겠지만.

 

  “부담없이 말해줘도 돼. 그냥 어떻게 보이는지 듣고 싶을 뿐이니까.”

  “가, 갑자기 말해도 당황스럽다구······ 그, 잘 생겼다구 생각하는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뒷부분은 확실히 들렸다. 고개를 홱 돌린 유이가하마가 흘끗흘끗 이쪽을 곁눈질했다. 당황스러운 건 이쪽이라고, 갑자기 웬 칭찬이야? 그렇게까지 배려해줄 필요는 없는데.


  “······고마워. 그래도 내가 물어본 건 그런 게 아니라, 평소랑 다른 게 있느냐는 의미였는데.”

  “어? ······으읏?! 그, 그런 건  빨리 말하라구! 이 바보야!”

  “크헉!”

 

  짧고 빠르게 명치를 치고 빠지는 일격. 둥그런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거리를 좁혀 왔다. 유이가하마 양, 무의식 상태에선 굉장한 펀치를 구사하시는군요. 히라츠카 선생님의 영향인가······. 주목받기 싫댔지, 완전범죄를 하란 말은 아니었는데······.

 

  “어, 그러구 보니······ 힛키, 눈이 좀 퀭하지 않아? 거의 예전과 비슷할지두.”

  “이 경우엔 방금 전 네게 맞은 충격 탓이 크다고 본다만.”

  “아, 아냐! 잘 생각해 보니 때리기 전에두 그랬는걸! ······아, 혹시 몸이 안 좋아? 어떡해? 많이 아팠어?!”

 

  화내다 걱정하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가하마 양이다. 그대로 화난 척 밀고 나가도 됐을텐데, 정말 손해보고 사는 녀석이라니까. 이 이상 걱정 시키기도 뭐하니, 잽싸게 털어놔 버리자.

 

  “실은 말야, 내가 속한 부서에 잇시키도 들어와 있는데, 그 녀석이 그만 부장이 되어버렸지 뭐야. 못 하겠다고 징징대는걸 어르고 달래주던게 상담이 되어버렸고, 도와주겠다고 약속까지 해 버려서······. 어제도 밤늦게까지 통화하다보니 힘들어 죽겠다. 와이파이 만세, 라인은 좋은 문명······.”

 

  마지막은 뭐야? 다잉 메세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도 적잖이 놀란듯 했다.

 

  “이로하 짱, 어느새······.”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놀랐어. 1학년이 부장이라니 뭐가 뭔지······.”

  “힛키랑 라인을 교환하다니, 이건 신기록일지두!”

  “그 쪽이냐!”

 

  나랑 연락 튼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이야? 신비주의 아이돌이냐고.

  부릅 뜬 눈으로 항의를 보내자 유이가하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치만 힛키는 은근히 둔하달까, 이런 데는 무심한 구석이 있으니까. 힛키 쪽에서 나서진 않았을 거 아냐. 연락처 교환, 이로하 짱이 먼저 꺼낸 말이지?”

  “잇시키가 부장이 되었으니, 부서 동료들과 연락망을 만들었을 뿐이야.”

  “푸흡, 이번에도 그랬구나~.”

  “······이번에도?”

  무엇을 납득했는지, 팔짱을 낀 유이가하마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괜찮을 지두 모르겠어. 조건이 좋아!”

  “조건?”

  “응! 연락처두 알구, 같은 부서 동료라면 따로 만나도 어색하지 않으니까! 잘 됐네, 힛키! 열심히 해!”

  “어, 어어······. 뭐 그렇지······.”

 

  유이가하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시선은 자연히  교실 앞을 비추었다. 에비나 양의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야마 하야토의 특징적인 금발은 너무도 쉽게 시야에 들어왔다.

 

  보이는 것 뒤통수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북했다.

  아니, 어떤 의미로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이쪽을 쳐다보았다면 나는 또다시 고개를 돌렸거나,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을 테니.

 

  “아무튼, 이런 얼굴로 유키노시타를 보려니 껄끄러워서. 보나마나 엄청 잔소리 들을 게 뻔하니······.”

  “하긴, 유키농이라면 분명 걱정할 거야. 힛키 엄청 좋아하니까.”

  “······뒷말은 필요없는데.”

 

  킥킥 웃음을 참던 유이가하마가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 이로하 짱, 부장이라구 했지?”

  “엉? 어어······, 부장이야. 잡무부지만.”

  “그건 높은 사람?”
  “글쎄다. 가위바위보로 뽑힌거라 애매한데.”

 

  하필 거기서 져버리다니 운도 없지. 실행 위원회에서도 유일한 1학년 부장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임시 기구, 그 중에서도 잡무부 부장이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명목상 상급자일 뿐 새파란 1학년이 선배들을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고, 잇시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두 대단하다. 나라면 진작에 그만뒀을 텐데.”

  “단순히 거부권이 없었을 뿐이야. 네가 그 녀석 우는 소리를 들어봤어야 하는데, 받아주는 입장에서는 엄청 고역이라고?”

  “그, 그 정도야?”

  “어. 차라리 내가 부장을 할 걸 후회할 정도로.”

  “푸훗.”

  “······뭐야, 왜 웃어?”

  “아니, 힛키는 다정하구나 싶어서. 이로하 짱두 그걸 아니까 의지하는 거 아닐까?”

  “설마.” 

 

  잇시키에게 있어 푸념을 늘어놓을 사람이 나밖에 없었을 뿐이다.

  

   아무리 느슨한 조직이라도 암묵적인 규칙은 존재한다. 어쩌면 결속력이 약할수록 원칙에 기댄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파편화된 개인이 같은 공간에 모였을 뿐이기에, 신뢰는 커녕 소속감조차 희미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전장, 그것이 현재 실행 위원회의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른 행동은 오해를 사기 쉽다. 권위는 어쨌든 잇시키는 한 부서의 부장이었고 유키노시타는 부위원장이다. 살갑게 대화하는 순간 공적인 자리에서 친목질을 하는 걸로 비춰질 위험이 있다. 업무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사소한 불평조차 아웃이겠지.

 

  “그보다 너, 일해야 하는 거 아냐?”

  “아, 맞다! 유미코랑 같이 있었는데······, 아.”

 

  생각하기도 전에 눈이 가고 마는 건 슬픈 본능이다. 설령 휴일의 라라포트 광장이라도 할지라도 한 눈에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니까.

 

  “어, 그게, 으아아······.”

 

  입을 가린채 우왕좌왕하는 유이가하마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금발의 세로 롤이 보였다.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 유미코는 멍하니 입을 벌린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하네.”

  “······응, 너도.”

 

  생각해보면 누나와 이렇게 마주본게 얼마만일까? 언젠가 코마치가 말하길,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설령 인사를 나눈다 한들 ‘대화’를 하는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 우리는 대화를 한 게 아니다. 대화는 커녕 이제는 마주보는 것 조차 어설프기만 하다.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아하하······, 미안, 유미코, 갑자기 뛰쳐나가서······. 지금 갈 테니까!”

  

  상황을 수습한 유이가하마가 나와 유미코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게서 유미코를 가리는 건지, 혹은 유미코에게서 나를 가리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유이가하마가 떠나자 또다시 혼자가 된 나, 스스로도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언제는 안 그랬나? 훈련받은 외톨이는 어디 간 거야? 친구 몇 명 생겼다고 이제와서 외로움이라니, 답지 않은 짓에도 정도가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담당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비품 상자를 들고오는 학생도 눈에 띄였고, 자리를 펴고 앉아 무언가 만들기 시작한 그룹도 있었다. 왁자지껄 시끄럽고, 바보같은 일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교실, 그야말로 청춘의 한 장면이다.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피식 나오는 웃음을 눌러삼킨채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이르긴 해도 설렁설렁 걸어가면 회의 시작에 맞춰 들어갈 수 있겠지. 누구에게도 의식되지 않도록 소리죽여 교실을 나섰다.

 

xxx

 

  몇 번째인지 모를 정례 미팅이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처음엔 우왕좌왕 어색한 업무에 혼란스러워 했던 실행 위원회도 며칠이 지난 사이 가닥을 잡은 느낌이었다. 집행부로서도 문화제 준비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오늘부터 시작해 주에 한 번, 정례 미팅이 있는 월요일에는 부서별 진척 상황 보고를 시행하게 되었다.

 

  “말씀드렸던 예정의 70%를 소화했고, 포스터 제작도 반쯤 완료된 상태입니다.”

 

  첫 번째 타자로 지명된 홍보부장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발표를 마쳤다. 대략적인 수치를 제시했으니 할 말은 다했다는 생각이겠지. 그러나 유키노시타의 표정은 냉담했다.

 

  “그래서는 너무 늦습니다. 문화제까지는 한 달, 손님들이 스케줄을 조정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 시점에서 이미 준비가 끝났어야 합니다. 게시 장소 확보와 홈페이지 공고는 끝났나요?”

  “아직입니다만······.”

  “서둘러 주세요. 우리 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과 그 학부형들은 홈페이지를 자주 체크할 테니까요.”

  “네, 네에.”

 

  홍보부장이 기죽은 표정으로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다음, 서클 통제는요?”
  “······네. 현재까지 참가 의사를 밝힌 서클은 열 곳입니다.”

  “그건 교내 서클 수만을 말하는 건가요? 지역 내의 다른 단체에 의사를 타진해 보았습니까? 과거에 참여했던 단체에 연락을 취해보세요. 스테이지 할당, 관객 추산과 스태프 내역, 공연 시간표 제출도 아직입니다.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네.”

 

  서클 통제부의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진다. 적당히 넘어가려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는 부위원장 덕에, 보고와 지시는 명백히 서로의 비중이 역전되어 있었다. 잇따른 순서에도 그러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기록 잡무.”

 

  유키노시타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태도는 지극히 사무적이었고 딱딱한 목소리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한껏 들뜬 듯 하늘하늘한 기록 부장(잡무 부장은 폼이 안 살기에,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의 목소리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스케줄 표는 오늘 중으로 제출하도록 할게요. 기자재 신청은 조금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교외 서클 등에서 촬영 장비 지원을 요청할 경우도 대비해야 하거든요. 서클 통제부 쪽에서 참가 명단이 확보되는 즉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무색하게도, 책상 아래로 내린 잇시키의 손을 떨리고 있었다. 양손 가득 꼬옥 붙잡은 대본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과연, 알겠습니다.”

 

  여태까지와 다른 반응에 유키노시타도 뜻밖인 듯 했다. 잇시키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찬찬히 움직여 나를 향하더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한눈에 간파하다니, 역시 유키노시타.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 쑥스럽구만.

 

  “이상으로 각 부서별 보고는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생각에 주위의 긴장도 다소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키노시타는 회의를 끝낼 마음이 없었다.

 

  “······만.”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가미 위원장?”

 

  회의 시작 선언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위원장, 사가미는 내내 들여다보던 손톱에서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응? 좋지 않나요? 그대로 진행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아니, 하지만······.”

  “이야, 역시 유키노시타 양이네요~. 부위원장을 맡아줘서 살았다니까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회의실을 돌아보며 건넨 말이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미묘하기만 했다.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을 뿐 호응하는 기색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가미는 꿋꿋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위원장······.”

  “어떻게, 이제 마무리를 지으면 될까요?”

  “······아직, 방문객 접수 업무를 할당하지 못 했습니다만······.”

  “아, 그건 우리가 할게. 유키노시타 양.”

 

  보다못한 시로메구리 선배가 구원의 손길을 건넸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이 건은 학생회에 일임하도록 할게요. 일반 방문객 접수는 보건 위생부 담당이군요······. 사전에 리스트를 업데이트해, 위생부와 협력해서 처리해 주십시오.”

  “응, 알았어.”

 

  시로메구리 선배가 수락하자 유키노시타도 안심한 기색이었다. 말없이 사가미를 향해 눈짓을 보낸다.

 

  “그럼, 마무리를 할게요. 각자 유키노시타 양의 말대로 열심히 해 주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형식적인 멘트에 형식적인 박수가 울려퍼지려던 찰나, 그것을 자르듯 사가미가 덧붙였다.

  

  “아, 그래도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너무 빡빡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 지금까지 유키노시타가 한 말을 뭘로 들었니?

 

  “사가미 양,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일정을 앞당겨 진행해온 건 여유를 두기 위해서······.”

 

  유키노시타도 당황했는지 반박하는 목소리에는 다급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사가미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녀의 두 눈은 바로 옆자리의 유키노시타가 아닌, 회의실에 둘러앉은 실행 위원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이면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부위원장의 걱정은 알겠지만 올해는 체육 대회도 없구, 일정을 다소 넉넉하게 진행하셔도 문제 없다고 봐요. 실행 위원도 결국 학생, 저희들부터 즐거워야 남들도 즐거운 문화제를 만들 수 있을 테구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만······, 미심쩍은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잇는다.

 

  “문화제라 하면 역시 학급 행사죠! 방문객들의 관심사도 그쪽에 집중되어 있을테고, 여러분들의 반도 지금쯤 준비가 한창일 거라 생각해요. 우리만 끼지 못하는 거, 아쉽지 않나요? 실행 위원회 업무는 지금 페이스로 유지하되 양쪽 모두 참가한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어떠신지?”

  

  시로메구리 선배의 표정은 복잡했다. 나와 유키노시타, 사가미를 바라보더니, 교실 구석에 앉아있는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시선을 보냈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있는 히라츠카 선생님도 지금의 상황에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닌 듯 했다.

 

  한편 실행 위원들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서로를 마주보았지만, 애초부터 그들에게 있어 사가미의 제안은 고민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터져나온 박수소리가 이윽고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것으로 오늘 미팅은 종료되었다.

  

  실행 위원들이 저마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리를 떴다.

  일시에 풀린 긴장과 거기서 비롯된 소란이, 담아두었던 속내를 새어나가게 한다.

  모두들 하나같이 유키노시타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호의적인 반응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형식만을 빌린 반어법.

  누가 위원장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양반이다. 적어도 칭찬으로 해석할 여지라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너무 깐깐하다느니 고압적이라느니, 일거리만 잔뜩 늘었다라는 말은, 변명의 여지없는 불만이었다.

 

  개인의 악의가 집단 속에 가려지면 희석될거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폐쇄된 관계 속에서 모두가 조금씩 내뿜는 독기는 결국 그 농도만 짙어질 뿐이다.

 

  유키노시타도 알고 있겠지. 아니, 대놓고 들으라는듯 떠벌리는데 눈치채지 못 하는 게 이상할 것이다. 공식적인 항의도 아닌 단순한 중얼거림은, 거꾸로 공식적인 수단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빈정거림 따위, 당사자가 부정하면 증거조차 남지 않는다.

  설령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공개적인 비난이어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받는 피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더욱 질이 나빴다.

 

  사가미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회의실을 나섰다.

  그에 반해 유키노시타는 처리해야할 서류들 속에 파묻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쪽에 눈살이 찌푸렸는지는 뻔한 일이다.

 

  “다들 너무들 하시네요.”

  “······ 그러게나 말이다.”

 

  기록 부장, 잇시키 이로하가 속삭였다.

  어중이떠중이 잡무 부서에, 1학년 부장이다. 애매하게 많은 인원수에 비해 업무 내용은 불분명하고,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유키노시타의 질책을 듣지 않은 부서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해 유키노시타에게 가세해 봤자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겠지.

  힘을 보태주긴 커녕 역효과만 났을 게 분명하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맡은 일을 차질없이 진행해 그 어깨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xxx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사가미의 선언이 이어진 지 며칠 후, 하나둘씩 위원회를 빼먹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30분 정도 지각하거나 사전에 연락한 결석이라 큰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도 부서에 따라 사정이 다르다. 일거리 대부분이 문화제 당일에 편중된 보건 위생과 기록 잡무부는 결석자가 늘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서클, 홍보, 회계부는 바쁜 시기에 구멍에 생겨 난감한 기색이었다. 

 

  가끔은 난감함을 넘어서, 무언가 불만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올 때도 있었다.

 

  이해한다. 지금의 상황은 나조차 이해가 안 가니까. 어째서 기록 잡무부는 결석자가 한 명도 없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다들 이렇게까지 의욕적인 거야? 배부른 고민처럼 들리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히키가야 군은 어디 중학교 출신이야? 나는 근처의 공립인데.”

  “하하, 우연이네. 이런데서 동창을 만날 줄은. ······그래서 말인데, 부탁한 포스터 복사는······.”

  “실레합니다! 히키가야 선배, 비품실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모르겠는데,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거 아까도 설명해 줬잖아.”

  “에헤헤, 까먹었어요. 천천~히 설명해 주세요.”

  “아니 너······.”

  “잠깐 실례할게, 히키가야 군. 대여한 장비의 검수를 해두고 싶어. 창고까지 동행해 줄 수 있을까?”

  “어, 제가 지금 자리를 비우기 힘든 상황이라······.”

  “선배로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히키가야 군이 꼭 같이 가 줬으면 해. 안 될까?”

  “아니, 저기······.”

  “히키가야 군,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는데?!”

  “그게······.”

  “히키가야 선배!”

  “아······.”

 

  탕.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나를 둘러싼 여자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회의실 안, 얼마 남지않은 실행 위원들의 시선이 기록 잡무부의 부장석에 집중된다. 화제의 당사자 잇시키 이로하는 어디선가 날라온 무거운 서류철 더미를 앞에 둔 채 차가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어지러이 흩어진 모양새는 얌전히 내려놓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차라리 집어던졌다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사토 선배?”

  “응? 나, 나?! ······왜?”

  “포스터 사본은 제 앞으로 제출해 주시겠어요? 마침 제 일이 끝난 참이니, 분류 작업은 이쪽에서 하도록 할게요.”

  “아, 그, 그게 아직 작업이 안 끝나서······.”

  “아하~ 그러시구나~. 괜찮아요, 오늘까지만 제출해주시면 되니까. 열심히 해 주세요?”

  “그, 그래······.”

  “그리고, 사사키 양?”
  “왜, 왜 불러, 잇시키 양?”

  “비품실 담당자 전화번호라면 홈페이지에 나와 있을 거에요~. 뿐만 아니라 교내 내선 전화라면 기기 옆에 연락처 리스트가 붙여져 있을 거랍니다~. 참고해 주세요?”

  “으, 으응. 알았어······.”

  “그리고······ 키노시타 선배였던가요?”

  “그, 그래. 무슨 일일까?”
  “장비 검수라면 어제 끝내뒀습니다. 다른 쪽 일을 도와주시겠어요?”

  “어? 어제?”

  “네~!”

  “······분명 인수받은 시간은 꽤 늦은 오후 였을텐데?”

  “받은 시점에서 검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문제가 생겨도 저희쪽 책임이 될 지 모르고, 저와 선배가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선배?”
  “네, 거기계신 히키가야 선배요!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 아무것도.”

  “그렇군요. 자, 좀 더 힘내도록 하죠! 빨리 끝낼수록 퇴근도 빨라지니까요! 잡담은 나중에 부탁드려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엔 힘이 있었고 막힘없는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다. 아쉬운 듯 자리를 뜨는 부원을 향해 생글생글 미소를 보내는 잇시키. 그야말로 승자의 여유, 원 턴 쓰리 킬이다. 낯빛 하나 안 바뀌고 전학년을 격침시키다니, 대단하구만.

 

  “······뭘 그렇게 보세요?”

  “아니, 잇시키도 성장했구나 싶어서.”

 

  팔자에도 없는 부장직을 떠맡아 울상으로 매달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 진짜로 엊그제였지 참. 아무튼, 그랬던 잇시키가 어느새 이런 어엿한 부장이 되다니, 묘한 감동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잇시키는 차가운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뭐에요, 선배 노릇인가요? 방금전까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헤벌레 하던 남자에게 듣고 싶지는 않은데다 애초에 선배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으니 이제 와서 그러셔도 전혀 기쁘지 않아요 하다못해 때와 장소는 가려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선배에게 악의는 없는데다 여러모로 도와주시는 건 사실이니 일방적으로 화낼 수 없는 것도 짜증나구요 죄송합니다!”

  “그, 그래. 뭔가 미안하다······.”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더니 헉헉 숨을 고르는 잇시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말빨 하나는 타고난 후배님이다. 혀가 꼬일만도 하건만 또박또박한 발음하며 의외로 정확한 인터네이션, 의외로 부장직에 걸맞는 인재일지도 모르겠는걸.  

 

  “정말이지, 선배가 똑부러지게 거절하지 않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요. 좀 더 행동에 주의해 주세요.”

  “야, 거절하라니······. 같은 부서끼리 어떻게 그러냐? 귀찮아도 일인데······.”

  “일? 선배, 방금 저분들이 건넨 말이 업무상 대화였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어? 어, 그런데······. 뭐야, 아냐?”

  “······남친분이 이래서야, 유키노시타 선배도 큰일이겠네요.”

  “그러니까 남자친구 아니라고.” 

  “네네, 그러시겠죠.”

 

  최근 잇시키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까칠해져가는 기분이 든다. 잘못 생각했나? 권력을 잡으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잇시키도 그런 아이였을지도······. 다르게 보면 선후배간의 거리감이 좁혀져, 허물없는 사이로 변화하고 있는 증거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됐으니까 선배도 일하세요.”

  “일? 무슨 일? 시키는 일은 다 했는데?”
  “그러니 저 좀 도와달라는 말씀이죠. 확인해 주셨으면 하는게 있어요.”

 

  결심하자마자 이렇게 나오기냐. 조금만 더 너를 믿을 수 있게 해줘.

 

  “하아······. 이번엔 뭔데?”

  “스케줄 표에요. 일단 인원별 체크는 다 마쳤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내민 종이에는 기록 잡무부 인원의 이름과 업무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알아보기 쉬운 도표 형식에, 수정한 자국 없는 깔끔한 글씨. 비워둔 칸은 있을지언정 지금 단계에서 적을 수 있는 내용은 빠뜨림없이 모두 적었다. 잇시키는 이 한 장의 완성본을 위해 몇 장이나 되는 초고를 다듬었을까?

 

  “군데군데 빈틈이 너무 많아요. 제출 기한을 미루면 안 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내로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잘했어.”

  “그러니까요~. 정말 제가 봐도, ······네?”

  “힘냈구나.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업무 초기는 일도 일이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어려운 시기거든. 개시 초기의 혼란에 다른 부서의 협조도 미적지근했을텐데, 용케도 이만큼 정리해 냈구나. 내가 부장이었어도 이렇게는 못 했을 거야.”

  “서, 선배 뭐 잘 못 먹었어요? 갑자기 웬 칭찬이래?”

 

  얘도 참 칭찬 받을 줄을 몰라요. 순수한 의미로 말하는 건줄 아니? 너를 구워삶아 부장직을 유지시켜 잡음없이 문화제를 끝내기 위함이지. 나도 참 칭찬할 줄 모르는구나. 솔직하지 못한 건 피차일반인가.

 

  “아무튼 걱정 마라. 나머진 내가 어떻게든 해 보마.”

  “아뇨, 그건 좀. 안그래도 저, 선배에게 엄청 의지하고 있는데······.”

  “오오, 기특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선배 안에서 전 도대체 어떤 이미지에요?”

  “글쎄다, 남자 이용해먹는 귀신 부장일까. 은근슬쩍 내게 떠넘기고 잽싸게 퇴근하려는 속셈인줄 알았거든.”

  “이 선배가 진짜!”

 

  오늘도 이어지는 후배 놀리기, 최근 시작한 새로운 취미 활동을 즐기던 중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방금의 대화에서 보듯 나와 잇시키는 종종 허물없는 농담(?)까지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우리 두 사람이 알게 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작해야 몇 일, 방금 전 나를 찾아왔던 여학생들과도 큰 차이는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히키가야 하치만은 낯가림이 심하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서툰데다 자연스럽게 끼어들지도 못 하고, 리얼충들의 사고방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혐오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그러던 내가 잇시키에게만은 무르다.

  거리낌없이 다가오는 잇시키에게 가까운 거리감을 허락하고 있었다.

  첫만남부터 꺼리낌 없이 속내를 파헤쳤고, 가식이며 낯가림따윈 일찌감치 벗어던졌던 우리다. 어쩌면 은연중에 그것을 강요했기에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발견해 반가웠던 건지도 모른다.

 

 귀납논증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확실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괜찮겠어? 본의 아니게 깐깐한 부장 역을 시켜버린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잡무부가 배정받은 구역은 회의실 문 바로 앞 좌석이었다. 조금 전 잇시키에게 쫓겨난 여학생 몇 명이 한쪽 끝 모퉁이에 모여 있었다. 얼핏 머리를 맞대고 회의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도할 정도로 낮춘 목소리 하며 흘끗흘끗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됐어요. 딱히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당한 업무지시 였다구요?”

  “그래도 그 뭐냐, 여자들 사이는 좀 복잡하잖냐······. 1학년도 있었다고? 혹시라도 걔가 너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어차피 모르는 사이인데요 뭘. 잃을 인망도 없구요.”

  “아서라, 지나고 보면 그렇지도 않아.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거든.”

  “선배, 말투가 늙은이 같아요.”

  “너 그거 자충수인 거 알지? 너랑 나는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우와, 유치해라~.”

 

  별 수 없지. 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히키가야 하치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숫기없는 외톨이였고 주변의 인식을 바꿀만한 힘이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일 뿐이다. 그래, 일이나 하자, 마차 끄는 말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스케줄 표를 들여다 보았을 때였다. 잠깐, 스케줄?

 

  “그러고 보니 축구부는? 얼굴 안 비춰도 괜찮아?”
  “그게 말이죠. 시간 조정에 대해 하야마 선배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시더라고요? 문화제 기간 동안은 연습 빈도도 줄일테니 실행 위원을 우선하라고.”

  “허어, 그렇다 해도 일이 없지는 않을텐데······. 다른 매니저들이 뭐라 안 하던?”
  “에이~, 그 반대죠. 축구부 매니저라 해 봐야 하야마 선배를 노리고 들어온 사람들밖에 없는걸요. 경쟁자는 줄어들 수록 유리하잖아요.”

  “아······ 하긴, 그렇군.”

 

  여전하구만. 초등학교 때부터 사람들을 몰고다녔던 하야마다.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 패거리들이, 서로를 얼마나 견제했는지 알았을 것 같진 않지만.

 

  그건 그렇고 곤란하게 되었네. 잇시키가 축구부 업무에서 손을 떼버리면 하야마의 일을 상담하기 어려워지는데······.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좋을까?

 

  “저기말야, 잇시키.”

  “네?”
  “딱히 오늘이 아니어도 되는데, 너 혹시 시간······.”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던 잇시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깨닫기도 전,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즐거워 보이는 모양이구나, 히키가야 군.”

 

  불쑥 나타난 유키노시타가 잡무부 책상에 서류더미를 내려놓았다. 길다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가 싶더니 칠흑 속에 드러난 환한 미소가 눈앞에 다가온다. 아, 이건 그거다. 지금의 ‘히키가야 군’은, 눈속임이니 애칭이니 평소에 부르던 것과는 달라. 유키노시타, 지금 굉장히 언짢아하고 있어.

 

  “업무 공간인 회의실에서 시덥잖은 농담은 그만두렴. 당신이 연하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조금은 절도를 지키는 게 어떻겠니?”

 

  이게 무슨······, 말만 들으면 쓰레기잖아. 유키노시타가 가리키는게 내가 아니었더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맞장구 쳤을 것이다.

 

  “억울하다, 유키노시타. 난 일 하고 있어. 슬프게도 말이지.”

  “연하를 좋아하는 건 부정하지 않는구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유키노시타답지 않은걸. 무슨 근거로 내가 연하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거야 간단해. 당신은 평소 나를 여동생 취급하잖니? 그거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야.”

 

  의기양양한 얼굴로 단언하는 유키노시타. 그러니까 즉, 내가 널 여동생 취급(취급이 아니라, 정말로 생일이 빠른 거지만)하는 이유가 정말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논리 비약이잖아. 귀납논증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라고.

 

  얼른 대꾸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유키노시타는 기분좋은 얼굴로 쿡쿡 웃었다. 그 미소를 깨고 싶지 않아, 반박할 마음도 사라지고 말았다. 방긋방긋 웃는 유키노시타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나, 묘한 대치 상태는 기다리다 지친 잇시키가 끼어들 때까지 이어졌다.

 

  “어······ 저기, 유키노시타 선배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볼 일이 있어서 나가려던 참에 잡무부가 소란스러워 와 봤단다. 생각보다는 잘 해나가는 모양이구나. 안심했어.”

  

  미소를 거두지 않은채 잇시키를 돌아보는 유키노시타. 나와 마찬가지로 유키노시타 또한 요 며칠 사이 잇시키와의 거리감을 몰라보게 좁혀왔다. 친근한데다 솔직하고, 가르치는 대로 쏙쏙 배우는 후배를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위치가 위치다보니 회의실에서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유키노시타가 가지고 온 서류 덕에 언뜻 봐서는 높으신 분들이 일정을 논의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유키노시타가 가져온 일감, 혹시 내가 맡아야 하는 걸까? 슬슬 쉬고 싶은데······.

 

  “아뇨 그렇지는······. 솔직히 제가 한 일은 딱히 없어요. 업무 분담도 일정 조정도 전부 선배가 맡아 주셨고, 전 그저 부원들에게 전달만 했을 뿐인걸요.”

  “자신감을 가지렴. 잇시키 양은 1학년이고 경험도 부족하잖니. 히키가야 군이 선배로서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야.”

 

  여자들끼리의 대화가 시작된 것 같아, 무심코 유키노시타가 가져온 서류 하나를 꺼내 읽어보았다. 우와, 뭐야 이거, 각 부서별 업무 내용과 대응 메뉴얼? 참고 기록이 5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런걸 고작 며칠 사이에?

 

  “게다가 이미 부장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고 있는걸.”

  “네? 제가요?”
  “그래. 부원들을 통제하고 지시를 내리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다. 대신 해 줄 수도 없고 대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야. 기록 잡무부는 업무의 범위가 불분명하다는 특성상 정확하게 일감을 배분하기 어려운 부서이기도 해. 잇시키 양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어.”
  “······선배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후후, 우리는 사촌이니까.”

  “어떠려나요~? 선배는 종종 친구라고 하시던데. 애초에 사촌끼리 친구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요?”

  “그런 사촌도 있는 거야.”

 

  두 번째 서류엔 지역 내 사설 동아리와 각 단체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연락처와 접촉 일자, 교섭 내용까지 첨부 된 상태로. 치바 시내를 다 뒤진 수준이잖아, 이런 건 서클 통제부의 관할 아니었어? 어째서 이걸 유키노시타가······. 결원이 생긴 부서는 집행부가 메꿔줬다고 들었지만, 이건 혼자 다 한 수준이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주렴. 당분간은 하치만을 부탁할게.”

  “묘하게 물건을 맡기는 듯한 말투시네요. 저는 물품보관소가 아니라구요?”
  “어머,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구나. 어떤 의미로 하치만은 내 거라고 할 수 있으니까.”

  “우와, 이젠 숨기지도 않으셔~.”

  “당신도 동생이 있다면 알게 될 거란다. 모든 남동생은 누나의 소유물이거든.”

  “네네, 그러시겠죠~. ······그나저나 선배는 뭐 하세요?”

  세 번째 서류, 고급스러운 감색 서류철에 싸인 그것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물건이었다. 가죽 커버를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선배?”  

  “히키가야 군?”

 

  고개를 들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옅은 우유색 파우더에 가볍게 바른 립글로즈, 그러나 그늘진 눈과 푸석푸석한 입술을 숨길 수는 없었다. 수면부족인건 나나 잇시키도 마찬가지지만, 유키노시타의 얼굴은 질적으로 달랐다. 이 녀석, 잠을 자기는 한 건가? 

 

  애초에 유키노시타가 화장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타고난 피부를 꾸준한 세안과 케어용품으로 유지해왔을 뿐, 꾸미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유키노시타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그런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수없이 봐 왔던 네 얼굴을, 이제와서 착각할 거 같냐고?

 

  “유키노시타, 너, 언제부터 이런 일을······?”

 

  들고있던 서류를 상대가 볼 수 있게끔 거꾸로 돌려 내밀었다. 학교 지정 양식을 철저히 준수한 문서는 ‘하계 체육대회 기획서’라는 제목이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유키노시타가 흠칫 숨을 들이키더니, 비밀을 파헤쳐진 아이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멋대로 본 건 미안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 기획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건, 유키노시타 너도 마찬가지니까.

 

  “······열람해도 좋다고, 말한 적 없는데.”

  

  투명한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끝내 유키노시타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여기까지 와서도 화제를 피하는 그녀에게 울컥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니, 그렇지만, 기획서라니······.”

 

  최대한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다른 사람도 있는 회의실이다. 가뜩이나 민감한 화제인 체육 대회를 큰 소리로 떠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 눈치빠른 잇시키가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서, 서류더미를 만지는 척 우리를 가려주었다.

 

  “이런 건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안 그래도 일이 많았을 텐데, 어째서······.”

  “아니야, 그건 틀렸어.”

  “뭐?”

 

  단호히 말을 끊은 유키노시타가 심호흡을 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타이르는 것 같았다.

 

  “물론 체육 대회는 모두가 함께 진행해야 마땅해.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알릴 수는 없었어. 개최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가능성도 높지 않아. 문화제 준비로 바쁜 학교를 이런 일로 동요시킬 수는 없는걸.”

 

  일리 있는 말이었다. 문화제 실행 위원회란 말 그대로 문화제를 위한 임시 기구다. 학생회라면 모를까 체육 대회를 의제로 올리기에는 장소도, 시기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런게 아니다.

 

  “그래, 그건 이해해. 하지만 유키노시타는 부위원장이잖아. 이렇게 많은 일을 병행하면서 체육 대회까지 준비하는건 무리라고.”

  “상관없어. 무리라 할지라도 해야하는 일이니까.”

  “어째서?”

  “······당신도 알잖아. 대회가 취소된 건 어머니 탓이야. 우리 집안의 일로 학교에 폐를 끼쳤으니, 내게도 책임이 있어. 이 일은 나 혼자 짊어지지 않으면 안 돼”

 

  응어리를 토해내느라 상처입은 목은 감정을 추스리려는 듯 떨렸고 양팔에 감싸인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하게 보였다.

 

  “그런, ······설령 그렇다 해도, 널 돕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못 돼. 유키노시타가 말만 해 줬더라면 내가······.”

  “그래서야.”

  그러나 결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확실한 부정을 전해왔다.

 

  “내가 도와 달라고 했으면 하치만은 두말않고 도와줬겠지. 그래선 안 돼. 난 다르잖아. 나는 후배가 아니잖아.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게 옳은 일이야.”

  “유키노시타······.”
  “걱정해준 건 고마워. 그치만 이번엔 마음만 받을게. 걱정 마. 나는 누나잖아. 혼자서도 할 수 있어. 폐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린 나를 유키노시타는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살짝 내민 손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중간에서 멈춘다. 스르르 내려가던 손은 내가 아닌 서류 뭉치를 집어들었다.

 

  “그럼 이만, 용건이 있어서 먼저 실례할게.”

  “장소라도······ 알려주면 안 돼?”
  

  겨우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간신히 얼굴을 들자, 옅은 미소를 띈 유키노시타와 눈이 마주쳤다.

 

  “교무실이야. 늦어질 경우 거기서 귀가할 생각이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돌아가도록 하렴.”

  “······그래.”

  “아, 그리고, 잇시키 양?”

  “네, 네!”

  “혹시 나를 찾는 사람이 있거든 외근으로 설명해 주지 않을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휴대폰을 쓸 수 없을 것 같거든..”

  “네······, 그거야 쉽지만요······.”

  “후후, 고마워.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이, 나머지 서류들을 사가미 양에게 전해줬음 하는데······.”

 

  드르륵 소리와 함께 유키노시타의 말도 끊겼다. 어쩌면 눈이 먼저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이랑 나간 뒤 줄곧 자리를 비웠던 사가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절묘한 타이밍에 회의실로 들어섰다.

 

  “응? 왜 그래? 빤히 쳐다보구······, 아, 혹시 내가 방해한 거야? 미안해서 어쩌지? 모처럼 사촌끼리 이야기 하구 있는데 끼어들었네~. 잡무부 자리를 창가 쪽으로 옮기는 게 좋을려나~?”

 

  두서없는 이야기는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본인도 딱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이야기 도중에도 쉴새없이 깨물어 먹는 하드 바와, 건들건들 흔들리는 비닐봉투가 눈에 띄였다. 오래도 자릴 비우더니, 매점이라도 갔다 온 건가? 거참 태평한 녀석일세.

 

  “사가미 양, 마침 잘 왔어.”

 

  유키노시타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나는 지금부터 일이 있어 교무실에 가려고 해. 늦어지면 거기서 귀가할 예정이야.”

  “그렇구나~, 수고해~.”

 

  성의없는 대답이었지만 유키노시타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잡무부 자리에 올려둔 서류더미를 가리켰다.


  “저번의 회의를 참고해 만든 피드백 자료야. 기존 문화제의 기록을 참조해, 내가 생각한 문제점과 나름대로의 개선사항을 정리해 두었어. 가장 시급했던 지역 단체와의 접촉도 일단락 되었으니, 앞으로의 업무에 반영해 주었으면 해.”

  “역시 유키노시타 양은 대단하구나~! 고마워! 각 부서에는 내가 전달해 줄게~!”

  “······그래, 부탁해.”

 

  응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사가미는 방금 한 말이 무색하게도 곧장 위원장석으로 달려가 버렸다. 조용하던 회의실에 돌을 던진 듯한 파문이 일었다. 얼마 없는 인원이 하나 둘 교실 앞으로 모이더니, 사가미가 건네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눈을 흘기는데 옆에 있던 유키노시타가 중얼거렸다.

 

  “······하긴, 빠진 사람도 많으니, 모두가 함께 있을 때 전달하는 게 낫겠지.”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과연 언제쯤 전달되려나?  

  그렇게 맞장구 칠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을 유키노시타다.

  부위원장으로서 항상 사가미의 곁을 지켰던 그녀가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면,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겠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준다면 그것을 입으로 내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심코 건드린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 뿐이다.

 

  문득 아까 들춰보았던 체육 대회 기획서가 떠올랐다. 

  유키노시타가 설명해준 이유는 구구절절 옳았고, 논리에 어긋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유키노시타였어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뭔가가 걸렸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턱 막힌 답답함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놓치고 있는게 있다는 불안감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두 사람도 수고하렴.”

  “아, 유키노시타 선배두요······. 힘내세요.”

  “······잘 가라.”

 

  고개를 까딱인 유키노시타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xxx

 

  또다른 날의 심야

  하치만과 이로하의 영상 통화



  「안녕.」

  「아, 안녕하세요. 오늘도 먼저 들어와 계셨네요.」

  「우리 집 컴퓨터는 연식이 있거든. 부팅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 먼저 켜놨을 뿐이야. 밤에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유키노시타 선배는 아직도 연락 안 하시나요?」

  「왜 거기서 유키노시타가 나오는건데.」

  「그야, 선배가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 아냐. 개학하고 나서 부터는 뜸해지기도 했고, 매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어. 그저 조금 친한 사촌인 거지.」

  「선배.」

  「왜?」

  「유키노시타 선배 말이죠, 조금 아이같은 구석이 있죠?」

  「엉?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뜬금없네.」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끔 진실을 숨길 때는 있지만요.」

  「듣는 입장에선 어느 쪽이든 슬플 것 같다만.」

  「뭘 모르시네요. 반대로 형태가 같아도 의미가 다른 말도 있다구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잘 아실 텐데요. 예를 들어 볼까요? 유키노시타 선배가 선배를 부를 때 어떤 말로 부르나요? 성이나 이름이 아닌 2인칭으로요.」

  「······당신貴方, 이지. 그치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잖아.」

  「푸훕.」

  「왜 웃어?」

  「그거 알아요? 유키노시타 선배가 선배를 부를 때는 말투부터 달라요. 선배를 부르는 ‘당신’은 특별하다구요. 분명, 저나 다른 사람을 부를 때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을 거에요.」

  「너무 억지스러운데······. 그냥 친하다 보니 그렇게 들리는 게 아닐까?」

  「틀린 말은 아니죠. 그만큼 선배가 소중하니까 대화를 할 때도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걸 테니까요. 조금 솔직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요.」

  「······일이나 하자.」

  「거봐요, 선배도 똑같아. 누가 사촌 아니랄까봐, 둘이 참 닮았다니까~.」



xxx

 

  한 주가 지난 첫날, 종례를 마치고 교실을 나서려던 때 휴대폰이 울렸다 요즘 내 시계는 쉬는 날이 없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바일 게임 알람 정도가 전부였는데. 아마존의 배송 알림인가, 그게 아니면 광고 문자? 그러나 화면에 표시된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라인 메세지였다.

 

  「선배, 오늘부터는 회의 시작 직전까지 기다렸다 들어오세요. 1분이라도 빨리 오시면 안 돼요? 꼭이요!」

 

  이름보다 내용을 먼저 확인하는 건 외톨이의 슬픈 버릇이다. 연락이 올만한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효율을 중시하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최근에는 좀 달라졌만, 몸에 밴 습관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건 무슨 말일까?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이야 한 명 뿐이지만, 어줍잖은 스팸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

  「선배가 빨리 올수록 저희 부서에 민폐가 됩니다. 부장 명령이에요.」

  「우와~, 우리 부장님 가차 없구만.」

  「아, 그렇다고 지각하시진 마시구요. 마음 같아서는 제 선에서 감싸 드리고 싶지만 유키노시타 선배도 있으니까요.」

   「······우리 부장님 가차 없구만. 일단 알았다.」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기록 잡무부는 언제부터 하치만 금지 구역이 된 걸까? 평일 아침 소부선의 여성전용칸도 아니고······. 그러나 법은 멀고 상사는 가까운 법. 장작더미를 짊어진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라 한들 부장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소스는 나, 그리고 훌륭한 사축이 될 거라 예언해 준 하루 짱.

 

  그래도 짚이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잇시키는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고약한 후배지만 괜한 말을 할 아이는 아니다. 언뜻 보기에 불합리한 이 명령도 분명 그녀 나름대로의 계획이 숨겨져 있겠지. 그래, 나는 착한 선배니까, 결코 권력이 무서워서는 아니라고? 잇시키가 읽은 것을 확인한 후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잔뜩 낀 구름 탓에 교실은 평소보다 어둡게 보였다. 하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밝았고 십대 특유의 열정은 어제와 다름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게 아냐~! 사업가가 넥타이를 풀 때는 좀 더 고뇌에 찬 느낌으로! 도대체 뭘 위한 정장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정. 저건 열정이 아냐, 발정이지. 에비나 양은 도대체 무슨 연극을 만들고 싶은 걸까? 

 

  에비나 양의 연기 지도는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박력이 있었다. 뭣하면 구름이 피뢰침을 피해 2학년 F반에 직접 링크될 정도. 학원도시로 치면 레벨 3 정도는 될 것이다. 에비나는 에비나는······, 그만두자, 진심으로 소름끼쳤다.

 

  그러나 모든 남자가 그런 식으로 구박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극진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기,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아직 멀었어!”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하야마 옆에 달라붙은 여자들은 메이크업이 한창이었다. 이름도 모를 화장품들을 종류별로 늘어놓은게 흡사 뷰티샵을 연상케 했다. 이마부터 입술에 이르기까지 연신 보드라운 터치가 이어지는 그 모습은 흡사 얼굴 위에서 두더지 잡기 게임이 펼쳐진 형국이었다.

 

  어라, 사가미도 있네. 쟤는 또 언제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대? 뭐 실행 위원회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만······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구만. 저 열정을 본업에서도 발휘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나참, 남자 얼굴이 뭐가 그리 좋다고 야단들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토츠카, 피부 진짜 곱다.”

  “그러게, 분장하는 보람이 있다니까.”

  

  옳소! 누구야 너, 말 잘했어! 이야~, 토츠스킨의 진가를 알아보다니 안목이 높은걸? 이런 인재가 우리 반에 있다니 소부고의 미래는 밝구나!

 

  “저, 저기······ 연습이니까 너무 공들일 필요는······.”

 

  토츠카가 조심스럽게 난색을 표했지만 그 귀여움은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메이크도 연습해야 된다고!”

  “맞아! 문화제 당일까지! 매일매일!”

 

  바로 그거야! 하루하루 조금씩 다른 기법을 시도해! 모든 건 문화제 당일을 위해서, 최고의 토츠카를 만드는 거야! 너희들의 손으로!

 

  “으, 으응······. 하, 하긴. 연습은 중요하니까.”

 

  인형 신세가 되어 꼼짝없이 몸을 맡긴 토츠카는 이따금 그 갸냘픈 눈길로 동료 배우들을 훔쳐보았다. 아, 맞다. 토베와 오오오카는 달랑 5분만에 끝내버렸지. 자기만 대우받는게 미안해 움츠러든 모양이다. 우리 토츠카 진짜 착하다니까~.

 

  괜시리 콧등이 시큰해져 고개를 돌리는데,  뜻밖에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유미코가 서 있었다. 분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에비나, 잠깐만 와 봐!”

  “네엥~!”

 

   어라? 출연진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토츠카와 하야마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고, 심지어 엑스트라 중에선 예를 표하듯 유미코를 향해 합장을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니들도 고생이 많구나······.

 

  “사진은 어쩔 거야? 포스터라도 만들어야 되는 거 아냐?””

  에비나 양이 성큼성큼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좋은 생각이야, 유미코! 이런 꽃미남 뮤지컬은 배우 사진을 올리고 나서부터가 가장 빠르게 입소문이 도니까. 꾸준히 캐스팅 정보를 흘려주는 게 중요해. 포스터는 물론 인터넷까지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동원해 버리자고! 아무렴, 어린뮤의 캐스팅은 완벽! 치바인들에게도 틀림없이 먹힐 거야!”

 

  그놈의 어린뮤······. 아직 포기하지 않았구나. 그리고 치바인을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부녀자가 그렇게 많을 리 없어. ······그렇겠지?

 

  “그럼 교내용 포스터 몇 장 뽑구, 인터넷이라······. SNS 정도면 되려나?”

  “글쎄, 조금 부족한데 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홍보용 사이트도 만들었음 하는 욕심이 있어. 어떻게 안 될까?”

  “뭐어?! 갑자기? 곤란해. 나아, 그런 쪽으론 젬병이니까······.”

 

  하긴 우리 누나는 컴맹이랄까, 스마트폰은 이외의 전자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학생 시절, 드물게도 정시 퇴근에 성공한 아빠는 집에 돌아올 무렵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내용물은 최신식 컴퓨터 한 대였고, 놓을 위치는 우리 남매가 정하게 했다. 늘 그랬듯이 누이들에게 양보할 생각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휴대폰이 있는데 이런 걸 왜 써.’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묻던 누나와 코마치. 그 때의 나는 여러모로 암울했던 시기였기에, 만일 무안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아빠를 보지 못 했더라면 아무말 없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나름 필사적으로 항변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IT시대고, 컴퓨터를 다루는 것도 스펙이 되는 세상이니까, 후일을 대비해 워드 프로세서 정도는 배워두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몰라몰라, 오빠가 해주면 되잖아. 코마치 책상은 지금도 좁다구. 저거 놓을 자리는 없어.’

  ‘그래, 하치만. 누나는 동생을 믿고 있다고? 저건 네 방에 놓도록 해.’

 

  ······언제나 곁에 있어줄 수는 없다고, 혹시 모르니 배워 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때도 누나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떠맡은 컴퓨터는 지금도 내 책상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누이들 나름대로의 양보였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의미없는 일이다.

 

  믿음 같은 거, 일방적인 강요일 뿐인데.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그 때 에비나 양이 느닷없는 폭탄을 투하했다.

 

  “아, 히키타니 군도 있었구나! 마침 잘 됐네, 유미코! 남동생 씨에게 부탁해보는 건 어때? 이런 거 빠삭할 거 같은데?”

  “뭣······!”

  

  갑작스럽게 무슨······. 그러나 에비나 양은 반론할 틈을 주지 않았다. 유미코의 팔을 꼬옥 붙들고는 거리를 좁혀왔다.

 

  “안녕하신가, 남동생 군! 실행 위원회가 많이 한가한가 봐? 사가미 양도 있는 걸 보니.”

  “아직 시간이 남았을 뿐이에요. 빨리 가 봤자 일해야 하니까요. 조기출근은 하지 않는게 신념이라서.”

  “하하! 여전히 재밌네~! 난 또, 자네가 드디어 BL의 세계에 관심이 생겼나 했지!”

 

  이 여자 서슴없이 BL이라고 말했어! 이젠 이 연극의 정체성에 대해 숨길 생각도 없구나!

 

  “허나 배우는 확정 되었다네. 아쉽게도 말이야. 그대 오늘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찾는다면 내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줌세. 그대의 누나를 도와 내 작품을 널리 알릴 기회를 주겠다 이 말이지. 어떤가? 구미가 당기지 않은가?”

 

  뜬금없는 셰익스피어 말투가 시작되었다. 왜 이래, 당신의 어린뮤 뭐시기는 정통이라곤 한 톨도 없는 사심 덩어리잖아. 아무리 꼬드겨도 넘어갈 생각은 없다고.

 

  “아뇨, 저는 지금······.”

  “안 돼, 에비나. 하치만은 지금 실행 위원을 맡고 있으니까.”

 

  그 말에 에비나 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나도 놀랐다.

  태연한 사람은 누나 뿐이었다.

 

  “어지간히 바쁜가 보더라구. 유키노도 거기서 일하는데, 실행 위원이 된 뒤로는 얼굴 한 번 못 봤지 뭐야. 매일밤 둘이서 일 하느라 엄청 늦게까지 깨어있곤 해. 유키노도 그렇지만, 내 동생도 엄청 똑똑하거든? 그런 두 사람이 끙끙대는 거 보면,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미묘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하치만에게는 시키지 마. 숨돌릴 틈도 없이 일하는 건 불쌍하잖아.”

 

  말을 마친 유미코는 대화를 끝낼 제스처를 취했다. 한 걸음 물러서더니 짤막하게 덧붙였다.

 

  “열심히 해, 하치만. 그래도 잠을 꼭 챙겨 자고.”

  “어, 응······. 그래······.”

  “그리구 홍보용 사이트, 랬나? 한 번 알아는 볼게. 우리 반 남자애들에게 물어보면 되려나? 배우들은 빼고 말이야.”

  “그래주면 좋겠지만······, 알았어. 고마워, 유미코.”

  “뭘.”

 

  길다란 금발은 흐릿한 전등 아래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유미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에비나 양이 팔을 콕콕 찔러왔다.

 

  “아쉬워라. 너희 남매의 듀오, 꽤나 기대했는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죠.”

  “그치만 그런 건 재미없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팔짱을 낀 에비나 양이 한숨을 쉬었다. 아래위로 훑고 지나가는 시선에 나무라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이제 어떡할 거야? 진짜 안 도와줄 생각?”
  “뭐,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만······.”

 

  이쪽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구요, 도와준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요.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따지셔도 곤란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꿍시렁 거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보내오는 러브콜 뒤에 숨겨진 의도를 짐작 못할 바도 아니다. 쓸데없는 오지랖에, 손발을 맞출 수 없는 애드립, 원인도 과정도 엉망진창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 마음만은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넘어가는 것도 그렇죠? 몇 번이고 권해 주셨는데 조금쯤은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응? 성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에비나 양은 얼떨떨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마음속은 온통 이 만만치 않은 독재자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생각 뿐이었다.

 

  “비어있는 자리가 있을까요? 배우가 아닌, 지원팀 쪽에.”

  “빈 자리? 빈 자리라면······ 어디 보자.”

 

  어느새 옮겨 적었는지 에비나 양은 칠판에 써진 역할분담표와 똑같은 내용의 종이를 들고 있었다. 거침없이 훑는 듯 하면서도 드문드문 원본을 쳐다보는게, 혹시라도 있을 오차를 점검하는 기색이었다. 일처리 솜씨만큼은 빈틈 없다니까.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지만 않았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각본은 이미 완성, 예산 분배도 유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구, 연기 지도는 내가 볼 테니 남은 건 소품 제작 정도네. 이거라면 원래부터 남자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는데······.”

  

  펜대를 돌리며 중얼거리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온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겁니까? 왜 자꾸 내 이름을 적으려는 거야, 그 종이는 죽음의 노트에서 찢어왔나요?

 

  “헤에, 생각보다 본격적이네요. 예산은 괜찮으신지?”

  “아마도? 메이크나 의상은 여자들이 맡아줄 테니 있는 걸로 채우면 되고······.”

 

  여기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

  확신을 가지고 승부수를 던졌다.

 

  “아뇨,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응? 어째서?”
  “메이크 쪽이야 문제 없겠죠. 특수한 분장이 필요한 연극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의상은 어떨런지, ‘왕자’와 ‘비행사’의 옷을 사복으로 충당하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만.”

 

  손가락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던 펜이 멈추더니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라? 생각해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왕자는 대체할 수 없는데? 이왕 토츠카 군이 맡아줬으니, 최고의 비주얼을 준비하지 않으면······.”

 

  호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걸?

  남은 건 시간과 예산, 그리고 기술자의 여부인가. 딱히 동굴에서 원자로를 만들지는 않을 거지만.

 

  퍼뜩 고개를 든 에비나 양이 교실 가운데를 돌아보았다.

 

  “유이!”

  “응? 왜 그래, 히나?”

  “의상 말인데, 대여할 수 있을까?”

  “뭐어? 엄청 빠듯할 거 같은데······. 우리 예산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라구. 가능함 의상보단 다른 데다 돈을 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랄까······.”

 

  유이가하마가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공책에 뭔가를 써넣었다. 호오, 신은 그녀에게 요리의 재능을 앗아간 대신 계산의 재능을 주셨단 말인가. 계량컵 놔두고 밀가루 들이붓던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역시 에비나 양이 믿고 맡길만 하구나.

 

  “안 되겠어. 아무리 계산해두 적자야. 마이너스라구.”

 

  오옷! 적자라는 단어까지 알다니, 주부로서의 가하마 양은 레벨이 높은 건지도 모른다. 요리는 빼고, 그건 글렀어. 중요하니까 두 번 말했다.

 

  “주연 배우만이라도 안 돼?”

  “한 두 벌 빌리는 게 더 손해일걸? 더럽히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끄응, 하긴 그렇지······. 옷에 신경 쓰는 순간 내가 꿈꾸는 자연스러운 BL이······.”

 

  어이, 에비나 양. 방금 뭐랬어요? 전연령 등급은 포기한 거에요?

 

  “이렇게 된 이상, 있는 걸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치만 그래선 내 어린뮤가!”

 

  제발 문화제 출품작에 이상한 약칭 만들지 마세요. 그런 건 이케부쿠로에나 있는 거지, 여긴 치바라구요?

 

  그래도 지금까지는 예상대로다. 이 일을 해결하기에 딱 어울리는 사람을 알고 있거든. 여기까지 온 이상, 그 녀석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에비나 양, 에비나 양.”

  “응? 뭔데, 히키타니 군?”

  “사키사키 어때요? 제가 보증하건데 믿을만 할걸요?”

  “호오, 사키사키라?”

 

  고등학생이 부르기에는 유치한 이름, 그 점이 오히려 모종의 암호처럼 느껴졌다. 내 의도를 이해한 에비나 양은 계속해 보라는 양 귀를 쫑긋 세웠다. 순조로운 협조에 힘입어, 길고 긴 협상은 철통같은 보안 속 막을 내렸다.

 

  턱을 괜 포즈로 창밖을 바라보던 사 짱은 우리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갑작스런 불청객에 당황했는지, 미간을 좁힌 사 짱이 나와 에비나 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뭐야?”

  “어때요? 제 말이 맞죠?”

  “호오호오, 확실히. 이 머리끈, 봉제선도 깔끔하고 색 배합도 괜찮은걸? 이게 정말 수재라고?”

  “몇 개 더 있어요. 입고 있는 교복도 보기와 다르게 개조가 들어간 물건이랍니다?”

  “이런 인재가 곁에 있을 줄이야. 이거야 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이렸다?”

 

  끈적한 시선에 겁먹었는지 사 짱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어깨를 붙잡아 도로 앉혔다.

 

  “사 짱.”

  “뭐, 뭔데?”

 

  우리들만의 호칭으로 불러 버렸지만, 누나 친구 앞에서까지 숨길 필요는 없겠지.

  허리를 굽혀 앉아있는 사 짱과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부터 할 말은 퍼져나가서 좋을 게 없으니, 될 수 있는 한 밀착한 상태에서 전하는게 바람직하다. 나와 사 짱, 에비나 양의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입가에 손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솔직히 말해. 가면라이더 코스프레, 해본 적 있지?”

  “뭣?! 너, 그, 그걸 어떻게?!”

 

  급하게 거리를 벌린 탓에 푸른빛 감도는 포니테일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더 볼 것도 없군. 사 짱의 이런 솔직한 성격, 나는 참 좋아해.

 

  “누군진 말 못 하겠지만 믿을 만한 정보원이 그러더라고. 중학교 진학할 때쯤 누나가 재봉 용품에 손대기 시작했다고 말야.”

  “타이시, 집에 가면 죽었어······.”

  “뭐, 나쁜 취미도 아니고, 잠자코 있으면 장갑이나 목도리라도 떨어질 테니 탓 짱도 괜찮다고 생각했대. 실제로도 섭섭지 않게 챙겨준 모양이지만······.”

  “우와앗! 그만해!”

 

  붉게 물든 얼굴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손사래 치는 사 짱은 정말 귀여웠다. 듬직한 맏누나라 티가 안 날 뿐이지, 이 녀석도 은근히 방어력이 약하단 말이지. 곁에 앉은 에비나 양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사복 코스프레야 그렇다 쳐도, 라이더 수트를 직접 만드는 건 난이도가 높지 않아? 탓 짱도 그건 좀 깼다는 모양인데······.”

  “핫 짱!”

  “아무리 그래도 FRP까지 건드리다니 너무 심했어······.”

  “히키타니 군, FRP가 뭐야?”

  “섬유강화 플라스틱의 약자에요. 촬영용으로 쓰이는 수트는 보통 그걸로 만들거든요.”

  “헤에, 엄청 대단해 보이는데?”

  “대단한 거 맞죠. 가격으로 보나 난이도로 보나 집에서 다룰만한 물건은 절대 아니에요. 겉모양 만이라면 라에더 자켓을 사서 개조하는 게 싸게 먹힐걸요? 오토바이도 없으니 낭비인건 마찬가지지만요.”

  “이젠 몰라······.”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숨겨버린 사 짱, 그 머리에서 김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과연, 히키타니 군이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손뼉을 친 에비나 양이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양팔 사이로 눈만 빼꼼 내민 사 짱이 미심쩍은 눈길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죠? 어지간한 건 만들 수 있을 거에요. 수제라면 원하는 디자인도 반영할 수 있을테니 완성도도 높아지겠죠.”

  “내구성은 어떨까? 격렬하게 움직인다던지, 얼룩이 묻는다던지 하는 경우는?”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이 사람······. 괜찮아요. 특촬물이란 건 그 특성상 격렬한 움직임이 많아서, 튼튼함은 생명이라고요.”

  

  제작자 성격상 360도 발차기는 기본 옵션이나 다름없다. 그거야말로 전문분야인 셈이다.

 

  “좋아, 카와사키 양! 너로 정했다! 의상, 잘 부탁해용!”

  “뭐, 뭣? 잠깐만, 이게 무슨······.”

  “아, 에비나 양. 분필 여기요.”

  “땡큐, 히키타니 군~!”

  “잠깐······!”

 

  고맙긴 뭘요. 며칠 전 그쪽한테서 뺏은 분필인데·····. 요근래 바빠서 정신이 없다보니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잊고 살았다. 빨래 담당이던 코마치가 발견해주지 못 했다면 내 교복은 얄짤없이 표백당했을 것이다. 후에엥~, 이게 고등학생이 할 말이야? 소부고는 노동법을 준수하라!

 

  에비나 양은 붙잡을 새도 없이 칠판으로 달려가 버렸다. ‘의상 담당’ 칸의 가장 높은 곳에 사 짱의 이름이 새겨진다. 한순간 취업이 결정 되어버린 내 친구, 카와사키 사키는 블랙기업에 팔려간 집요정같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무슨 속셈이야?”

  “좀 해 줘, 사 짱. 나중에 갚을 테니까.”

  “갚고 자시고, 남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왜 해.”

  “에비나 양은 괜찮아. 부녀자는 비밀 엄수에 민감하거든.”

  “뭐야, 그게.”

 

  어처구니 없다는 듯 툴툴댄 사 짱이 꿈지럭거리며 자세를 바꾸었다. 고개를 돌려 한쪽 얼굴을 드러내더니 책상 위에 올려둔 팔을 베개 삼아 뺨을 기댔다.

 

  “너 말야, 은근히 사람을 동생 취급하는 거 알아?”

  “금시초문인데.”

  “지금도 봐. 내가 혼자 있는게 안쓰러우니까 도와준 거잖아. 답지 않는 짓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의상 때문에 곤란하다길래 사 짱 생각이 났을 뿐이야. 그럴 생각은 없었어.”

  “어떠려나~.”

 

  딴청을 피우듯 중얼거리고는 머리카락 한 올을 붙잡아 손가락에 꼬았다. 창문 밖 먼 곳을 바라보던 사 짱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뭐, 이번에는 넘어가 줄게. 핫 짱 치고는 괜찮았거든.”

  “고마워.”

  “······저기 말야, 고맙다고 할 사람은 니가 아니거든?”
  “그럼 누군데?”
  “몰라, 내 알 바야?”
  “하긴 그렇지?”

 

  사 짱이 미소지었다. 나도 웃고 말았다. 누군가 듣고 있다면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지 못한 사과와 감사.

  그러나 우리는 소꿉친구였다.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기에, 말하지 않아도, 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럼, 난 가 볼게.”
  “어, 수고해라.”

  “사 짱도. 의상팀 애들 너무 겁주지 말고.”

  “신경 꺼.”

 

  사 짱이 재봉을 시작한 중학교 시기. 그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탓 짱도 짐작가는 바가 있기에 말해줬을 것이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사람은 무언가에 몰두하는 동안 다른 일을 잊을 수 있으니까. 

  언제나 나를 지켜봐주고 남몰래 지켜줬던 사 짱은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동생 취급한다고 했지만 그건 틀렸어.

  어떤 의미로 나는 널 누나처럼 생각했을 지도 몰라.

  과거에 잃어버린 누군가를 대신해, 너에게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감사를 전하며, 뒤돌아보는 일 없이 교실을 나섰다.



xxx

 

  비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한다. 빛이 비춰지지 않는 어둠, 습도로 인해 상승하는 불쾌지수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피해는 역시 야외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사실 아닐까 

 

  비가 오는 날은 외출을 삼가게 된다. 약속을 취소하거나 장보기를 단념한다, 그리고 저녁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거지. 목욕을 한 뒤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옷하며 찰박거리는 신발,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없을 테니까.

 

  요컨대, 자유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무엇보다 싫은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한 때 신세졌던 베스트 플레이스는 무리, 같은 이유로 옥상도 제외된다. 실내를 떠돌아다녀도 문화제 준비가 한창인 학교에서 비어 있는 교실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 봉사부 부실은 처음부터 논외다. 회의실과 정반대 방향인 것도 있지만, 부실의 열쇠는 부장인 유키노시타만이 다룰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바쁜 내 사촌을 이런 일로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1층으로 내려와 안뜰로 이어지는 통로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뽑은 맥스커피를 홀짝이며 비 내리는 교정을 감상하는데 문득 그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여학생인 듯 했다.

 

  “아, 하치만!”

  “토츠카?”

 

  어이쿠 이런 실례. 여학생보다 피부가 고우신 토츠카였습니다! 어린 왕자님은 치바에서 무엇을 찾고 계시는가요?

 

  “어라? 실행 위원회는 어떻게 됐어? 슬슬 시작할 때 아냐?”

  “맞긴 한데 아직 5분 남았거든. 빨리 가면 혼나. 귀신 부장에게.”

  “그, 그래? 특이하네······.”

 

  참고로 늦게 가도 혼난다. 얼음의 여왕인 봉사부 부장에게. 어느 쪽 부장도 거스를 수 없기에 아슬아슬한 곳에서 밸런스를 지켜야 하는 처량한 신세다. 뭐야 이건. 

 

  “토츠카는 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라고는 차마 묻지 못 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메이크업에 어깨에 살짝 걸친 망토, 그것도 모자라 머리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작은 왕관까지 씌워져 있었다. 그만 둬! 소부고 학생들을 전멸시킬 셈이냐! 홍보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아, 그게 말이지. 에비나 양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으니 배우들도 조금 쉬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 다들 더워하는 것 같아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왔어.”

 

  그렇다면 내가 사 짱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쯤 교실을 나서고 있었겠구나. 토츠카가 손목에 걸친 매점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아아, 아이의 첫 심부름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린뮤 따위 때려치우고 토츠카의 일상 비디오를 촬영하는건 어떨까? BL보다는 건전할 것 같은데······. 트루먼 쇼의 표절 논란에 휩싸이겠지만.

 

  “그러냐, 배우들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네.”

  “응. 하치만 덕분이야, 고마워.”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에비나 양을 부른 건 누나였다. 친구와 친구 동생 사이 애매한 입장에 끼어버린 에비나 양이 오지랖 넓은 부녀자를 연기했을 뿐이다. 나 스스로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심지어 토츠카가 맡고 있는 역할조차 내가 떠넘긴 거나 다름없었다.

 

  토츠카도 부장이고, 정말 좋아하는 테니스를 할 시간도 줄었을텐데······. 연극 연습이 아니었더라면 테니스 스쿨에서 뜨거운 땀방울을 흘리고 있을 터였다. 서운한게 당연했고, 미움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전혀 안 그래. 우리반 남자애들이랑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야. 연극은 정말 대단해!”

 

  그러나 토츠카의 얼굴에서 그런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아 그리구 나, 연기도 칭찬받았어. 하치만이 빌려준 책 덕분에.”

  “······아, 그랬지 참. 하지만 그건······.”

  “잘 읽고 있어.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빌릴 수 있을까? 틈나는대로 보고 있지만, 에비나 양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조금 더 연구해봐야 될 것 같아.”

  “······물론이지.”

  

  몇 번을 읽는다 해도 에비나 양의 기대에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내가 빌려준 책은 ‘어린 왕자’지 ‘어린뮤’가 아니다. 분류로 치면 서양 고전과 오토메 문학 정도의 차이. 애초에 저 연극은 문학 역사에 대한 도전이라고.

  

  그래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어려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은 토츠카다. 자신이 우대 받는 만큼 조연 배우들이 소외받고 있음을 알아차린 거겠지. 배려하고, 이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들과 나아가려고 한다. 단체 생활의 분위기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단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표현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덤으로 손에 쥔 봉투가 2개인 것도.

 

  “그나저나 혼자 나온 거야?”
  “아니, 하야마 군도 같이 와 줬는데······.”

 

  9월이라곤 해도 아직은 무더운 날씨다. 그 녀석 성격상 이런 종류의 심부름을 토츠카 혼자 보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걸까? 먼저 돌아갔을 리는 없는데.

 

  “실은 사가미 양도 같이 왔거든.”

  “사가미가?”

 

  문득 실행 위원회가 발족된 날의 회의실에서 사가미와 친구들이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응.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먼저 나왔어.”

 

  동급생들은 업무에 바빠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다. 더군다나 이 비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목이 말라도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나갈 마음 따위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주연 배우 두 사람이 심부름을 자처한다?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 따라 나온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가미가 하야마를 좋아하는 거라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사가미도 10대고, 연애에 꿈이 많은 청소년이다. 일과 사랑 중에 사랑을 고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해해 줄 수 밖에, ‘이제 곧 회의 시작인데 위원장이 뭘 하고 있는 거야?’ 라던지, ‘하기사 지각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티도 안 날걸? 아무도 눈치 못 챈 상태로 회의 끝나 버릴지도?’ 라던가, 그런 쫌생이같은 뒷담은 안 할 것이다.

 

  “아, 같이 가려고 그러는 거야? 두 사람이라면 매점 쪽에 있는데.”

  

  설마. 나는 너처럼 착한 사람이 못 돼. 친해질 수 없다고 못 박은 사람과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친해지지 못 하지.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 사탕 무더기에서 처음 꺼낸 사탕이 쓴 맛이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탕도 쓸 거라 지레짐작해 아무 것도 붙잡지 못 하는 어리석은 어린애거든.

 

  “아니,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사가미도 회의 시작 시간은 숙지하고 있을테니 지금쯤 올라가 있을 거야.”

 

  정말로 그랬다면 사가미와 헤어진 하야마가 모습을 드러냈겠지만 말이야.

 

  “붙잡아서 미안하다. 아이스크림 녹을라, 얼른 가 봐.”

  “그렇네. 안녕, 하치만. 실행 위원회 열심히 해!”

 

  토츠카가 떠나가는 걸 확인하고, 손에 쥔 커피캔을 움켜쥐었다.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는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습기를 먹은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목덜미에 맺힌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비가 싫었다.

  체육 대회를 앗아간 비가 싫었다. 짊어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안겨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 비가 싫었다.

  덥기만 한 데다 불쾌지수도 높아, 괜시리 짜증이 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런 날은 일찌감치 집에 가, 에어컨 켜진 방에서 책이나 읽었으면.

 

  차라리 눈이 왔더라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연스레 미소지을 수 있는 눈이 내렸더라면. 그러나 잔설내린 눈밭에서의 기억은 잊을 만 하면 떠올라 나를 괴롭혔고,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올 겨울이 와도 웃을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져 층계참에 멈추어 섰다. 한 줄짜리 짤막한 메세지였기에 오래된 버릇이 나왔음을 다 읽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 했다. 그러나 이번의 발신인은 잇시키가 아니었다.

 

  「부부장, 급한 일이. 지금 당장 회의실로. 」

  

  인사도 설명도 없는,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 그것도 그거지만, 나를 ‘부부장’으로 부르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우리 부서는 잇시키 부장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고 그렇게나 말했거늘, 참으로 말을 들어먹지 않는 후배님이시다.

 

  그런 녀석이 나를 불렀다는 건, 필시 보통 일은 아니겠지.

  멈춘 다리를 놀려 계단을 뛰어 올랐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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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메구리 메구리는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다.



  실행 위원회는 당일부터 시작된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둘러메고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사전에 공지받은 회의실로 걸음을 옮기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내 뒤를 따라왔다.

  

  “힛키! 잠깐 기다려!”

  “유이가하마?”

 

  돌아보자, 무릎을 부여잡은채 가쁜숨을 몰아쉬는 유이가하마의 모습이 보였다. 수그린 고개 위로 흔들리는 갈색의 당고머리, 그 아래에 드러난 예쁜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다행이다. 안 늦어서······.”

  “무슨 일이야? 이렇게 급하게.”

  “응, 그게 나, 힛키에게 조금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부탁이라, 굳이 이렇게 내 뒤를 쫓아왔다는 건 교실에서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이란 거겠지. 초조한 기색으로 눈치를 살피는 유이가하마를 위쪽 층계참으로 데려갔다. 하교 시간대인 지금이라면 구태여 계단을 올라올 학생은 없을 터. 안심시킬 요량으로 가볍게 되물어보았다.

 

  “부탁?”

  “응······. 힛키가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유이가하마를 보며, 내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에 관한 일이야.”
  

  유이가하마가 말하는 ‘두 사람’이란, 필시 나와 유키노시타를 가리키는 것이겠지.

 

  따지고보면 내가 먼저 꺼냈어야 했던 말이다. 유키노시타가 겪었던 상처를 끄집어냈고, 아무 연관이 없는 유이가하마를 말려들게 했다. 스스로 해결했어야 할 문제에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도움을 요청한 주제에 어물쩍 도망치다니, 한심함에도 정도가 있어야 했다.

 

  “미안하다. 나, 큰소리 친 주제에 아무것도 한 게 없네.”

 

  면목이 없어 고개 숙이는 나를 부드럽게 막아서는 감촉이 있었다.

 

  “좀! 또 고개 숙이려고 했지!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라니까!”

 

  시선을 들자, 유이가하마의 가느다란 손이 내 이마를 받치고 있었다.

 

  “유키농두 그랬잖아. 고개 숙이는 건 그 날이 마지막이라구. 힛키는 유키농의 말을 헛되게 할 셈이야?”

  “······그렇네. 그래도 이건 개인적인 거야. 내가 잘못한 거니까······.”

  “사과도 금지. 힛키는 아무 잘못 안 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잖아?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라면 처음부터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야. 이런 건 서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살며시 머리를 떠난 손이 어깨를 두드린다. 분명 동갑일 터인 유이가하마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말야, 내가 좀 생각해봤는데······.”

 

  흠흠 헛기침을 한 유이가하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더니 한 발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로하 짱의 힘을 빌려 보는 건 어떨까?”

  “잇시키의?”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묻자,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로하 짱은 축구부라구 했잖아. 매니저란 거, 스케줄을 조정하는 역할 맞지?”

  “뭐, 그렇지.”

  “그렇단 말은 하야토 군의 부활동 일정두 이로하 짱이 맡구 있는 거네?”

  “그야······ 기본적으로는 그렇겠지만······.”

  

  마주친 손바닥을 위로 눈을 빛낸다.

 

  “그럼 말야, 이로하 짱에게 부탁하면 하야토 군과 접촉할 기회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야마와, 말이지······.”

  지금까지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되짚어보았다. 유이가하마가 제시한 방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을 뿐이다.

 

  내 시선을 눈치챈 유이가하마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교실은 다른 사람의 눈도 많구, 유미코나 하야토 군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잖아? 힛키두 유미코두 서로를 피하는 느낌이구, 지금도 잠깐 화장실 갔다 온다는 핑계로 나온건데, 유미코 엄청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걸. 내가 억지로 붙여봤자 분명 눈치챌 거야. ”

 

  역시 알고 있었나. 유미코가 봉사부를 들락거렸던 얼마되지 않는 짧은 기간은 유이가하마도 함께였으니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문화제 준비가 시작되면 더더욱 기회가 없어질 거야. 나랑 유미코는 히나의 연극을 도와줘야 하니까. 힛키는 실행 위원이니 만날 기회도 줄어들 거구. 그렇다면 차라리 하야토 군과 먼저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때?”

  “일리는 있다만, 연극을 돕는 건 하야마도 마찬가지 아냐?”

  “달라. 문화제라구 해두 모든 부활동이 정지되진 않잖아. 상연물을 올리거나 전시하는 부도 있구, 하야토 군은 부장이니까 그쪽도 신경쓸 거라 생각해. 실행 위원회에서 힛키가 무슨 역할을 맡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 번은 마주치지 않겠어?”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유이가하마에게서 이런 제안이 나올 줄이야······. 아니, 교우관계가 넓은 유이가하마이기에 가능했던 걸까? 단체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이 아이를 떠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힛키가 원한다면, 하야토 군이랑은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거야. 아니, 오히려 지금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

 

  과연, 잇시키에게서 하야마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자는 거구나. 녀석과 단둘이 대화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의 눈을 최대한 피할 필요가 있으니까. 대략적인 방문 시기만 알아낼 수 있어도 훨씬 유리한 판을 짤 수 있겠지.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런데 잇시키가 순순히 협력해 줄까?”

  “으음, 그건 나두 걱정이야. 그래두 이로하 짱, 힛키 좋아하는 거 같구, 친구로서 부탁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

  “······네?”

 

  가하마 양, 지금 뭐라고······?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나랑 잇시키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야.”

  “웅? 그럴 리가? 부실에서 엄청 사이좋아 보였는걸? 힛키가 모르는 사람이랑 스스럼없이 대화할 리가 없잖아.”

  “아니, 그건 뭐라고 할까······ 저 쪽도 사양이 없다보니 나도 모르게 흥이 올랐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때를 포함해 고작 두 번 만난 게 다야.”

  “에이~ 쑥스러워하기는. ······진짜루?”

  “어, 진짜로.”

  “······믿을 수 없어.”

 

  그건 동감. 얼마없는 친구 중에서도 틀림없는 최단기록이다. 게다가 나 스스로 만들어낸 첫 번째 지인이기도 했다. 최초라느니 유일이라느니 붙일만한 수식어는 많지만, 슬퍼지기만 뿐이니 그만두기로 하자.

 

  “괘, 괜찮아! 만난 기간은 중요하지 않은걸! 아, 그래! 내가 친구라고 했을 때 이로하 짱두 딱히 부정하진 않았잖아! 문제 없을 거야!”

 

  그러고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긍정이라기보다 약삭빠른 게 아닌가 한다만.

 

  “으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영 내키지 않는걸.”

  “어, 어떻게 안 될까?”

  “원래라면 남에게 의지해도 될 만한 일이 아니잖냐. 나와 누나, 하야마의 개인적인 문제니까. 사실은 유이가하마에게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어.”

  “힛키······.”

  “물론 유이가하마에게 받은 도움은 고맙게 여기고 있어. 누나의 친구라서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야. 하지만 어쨌든, 유이가하마는 누나의 친구였잖아. 그에 반해 잇시키에게 있어 나는 고작해야 두어 번 만난 선배일 뿐이지. 다짜고짜 이런 부탁이라니 받는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울 거라 생각해.”

 

  타인을 위한 대가없는 선의, 봉사활동은 언제나 미담으로 간주되어 왔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유별난 일이라는 의미도 된다. 자기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 인간의 본능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본능을 거부하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가 평범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뇌하는 사람을 지나치지 못 하는 유키노시타나, 친구의 일을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서는 유이가하마가 특이한 것이다. 타고난 천성, 혹은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마음가짐이겠지. 착한 성격 탓에 손해를 본 적도 많았을 것이다. 베풀었던 선의가 돌아오지 않음에 좌절한 적도 많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올바르게 나아갔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들은 진정한 「봉사부」였으니까.

 

  못난 사람은 나뿐이었다. 자신의 문제임에도 눈을 돌린채, 언제나 미루고, 도망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유키노시에게 준 상처도, 유이가하마에게 떠맡겨 버린 짐도 갚지 못한 주제에, 문제를 외면한채 시간만 보낸 사람은 히키가야 하치만 뿐이었다.

 

  그렇기에, 또다른 타인을 끌어들여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내게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애초에······ 설령 친구라 한들 무작정 기대는 건······.”

  “괜찮아.”
  

  그러나 유이가하마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친구니까 괜찮은 거야. 서로 의지하는건 당연한 거잖아. 이로하 짱이라면 괜찮을거라 생각해.”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음······ 글쎄? 그냥 감이랄까?”

  “아니, 그럼 안되잖아······.”

  “그치만 이로하 짱두 힛키에게 기대고 있는걸. 바라는 게 있으니까 부실까지 찾아온 거라구 생각해. 그럼 쌤쌤이잖아.”

 

  천역덕스러운 대꾸는 할 말을 잃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렇지. 유이가하마는 언제나 주변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타입이었지. 바꿔 말하면 타인을 잘 헤아리고, 감정 변화에 민감하다는 의미도 된다. 높은 인간관찰은 대인관계에 있어 필수 스킬이니까.

 

  “······도와준 만큼 나를 도우라니, 악덕 사채꾼 같은 논리구만.”

  “또 삐딱한 소리 한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힘껏 볼을 부풀리던 유이가하마가 칫칫 손가락을 흔든다.

 

  “힛키, 내가 처음 봉사부에 찾아갔을 때 기억해? 그 때의 힛키는 나랑 유미코, 유키농에게 음료수를 사 줬어. 뚜껑도 따 주구, 빨대도 꽂아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줬지. 힛키는 그 때 우리들에게 돈을 받았어?”

  “······아니, 안 받았지.”

  “그거야. 힛키는 유키농을 좋아하구 유미코두 좋아해. 그래서 유미코의 친구인 나에게두 공짜로 음료수를 사다준 거야. 겉으론 툴툴거렸지만, 속으론 우리를 친구라 생각했던 거니까.”

 

  근거라고 하기엔 너무도 얄팍한, 터무니 없는 논리 비약. 그러나 그 힘찬 목소리는 반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속는셈 치구 한 번 부탁해 봐. 이로하 짱이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도도 안 하고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잖아?”

 

  양손을 허리 뒤에 모은 유이가하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고······. 단, 기회가 된다면이야. 학년도 다르고 난 그 녀석 반도 모르니까, 저쪽에서 먼저 찾아오지 않는 이상 묻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

  “그건 그렇네. 부활동도 한동안 쉴테구. 이로하 짱, 어째서인지 우리반은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야. 몰래 접촉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

  “그렇지······. 문화제 준비는 1학년도 마찬가지일테고······, 힛키, 이로하 짱 연락처 몰라?”

  “왜 알 거라 생각하는데······.”

  “모, 모르면 됐구······. 아무튼! 힛키도 동의한 걸로 알고 있을 테니까!”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걸음을 옮기려던 유이가하마가 우뚝 멈추더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조심스레 뻗은 손이 시야에 다가오기도 잠시, 씨익 미소지은 유이가하마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머리는 유키농 꺼니까.”

  “······무거운 소리 하지 마.”
  “에헤헤, 그치만 사실인걸. 당분간은 같이 있을 시간도 줄어들겠구나. 나는 반에서 힘낼테니, 힛키두 실행 위원회 열심히 해!”

  “그래, 고맙다. 너도 힘내라.”

  화끈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걷기 시작하는데 등 뒤에 선 유이가하마가 크게 소리쳤다.

 

  “유키농을 부탁해! 이로하 짱에게도 꼭 물어보구!”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너는 네 엄마냐? 아니, 우리 부모님은 언제나 바쁘셨으니 저렇게 세세하게 날 챙겨주는 건 누나의 역할이었다. 딱히 온기를 그리워할 나이도 아니건만, 착하디 착한 내 친구는 오늘도 꿋꿋이 나를 걱정해준다.

 

  저 얼굴을 봐서라도 스스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 유이가하마는 친구지 누나가 아니다. 언제까지고 의지해선 안 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유미코와 하야마, 두 사람과의 결착은 내가 지어야만 하니까.

 

  그렇다 해도 하필이면 잇시키인가······. 막막하네. 학년도 다르고, 설령 잇시키의 반을 안다고 해도 후배의 교실에 다짜고짜 찾아갈 낯짝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토커로 낙인 찍히는 미래밖에 없잖아······. 차라리 저쪽에서 찾아와 주지 않으려나?

 

  궁시렁거리는 사이 어느덧 주위가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 버렸네. 얼마전까지의 나였더라면 외톨이로서의 행동원리에 따라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아슬아슬한 시간대를 노렸겠지만, 유키노시타와 함께 하기로 한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하니까 말이지. 절대 흥이 올랐다던가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다. 

 

  철지난 츤데레 흉내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늦어!”

  

  아래층 벽에 기대어 서서 나를 올려다보는 맑은 눈동자. 양손은 깍지낀 상태로 허리 뒤에 내리고, 살짝 고개 숙여 이쪽을 올려다본다. 연분홍빛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매가 휘어진다.

 

  “늦어요, 선배! 여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포인트 낮다구요?”

 

  화창한 가을 햇살 아래 단풍잎처럼 빛나는 황갈색 머리.

  잇시키 이로하는 약삭빠르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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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을 착각한 냉기가 다리 밑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째서 잇시키가 여기 있는거지? 늦었다고? 기다리게 했다고? 내 후배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하, 그래, 그거군. 평소 교내에서의 행동범위가 한정적이었던 탓에 나도 모르는 사이 봉사부에 와 버린 모양이다. 부실이라고 해서 잇시키가 있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는게 자연스러웠다.

  

  그러자 뒤쪽에서 이쪽을 향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치만? 뭘 하고 있는 거니? 계단 가운데에 서 있고.”

  “오오, 유키노시타!”

 

  보라고! 유키노시타도 오지 않았는가! 자랑은 아니지만 행동 패턴만은 꼭 닮은 우리다. 똑똑한 내 사촌도 무심결에 나온 본능에는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마침 잘 왔어! 이야, 습관이란 무섭네. 설마 특별관과 본관을 헷갈릴 줄이야~.”

  “미안,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당신, 괜찮은 거 맞니?”

  “문제없어. 나는 지금 지극히 냉철한 상태다, 유키노시타. 자, 얼른 회의실로 가자!”

  “회의실은 여기······ 잠깐, 하치만?!”

 

  말이 끝나기 전에 황급히 유키노시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안 들려, 아무것도 못 들었어! 실행 위원회 회의실이 여기일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잇시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떡 버티고 있을 수 있냐고!

 

  현실을 부정하고자 귀를 막으려 했지만, 유키노시타의 손을 잡고 있는 탓에 한쪽밖에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어딜 가세요, 선배~!”

 

  계단을 때리는 실내화 소리는 어떤 공포 영화보다 무서웠다. 나와 유키노시타, 두 사람밖에 없는 계단에 말이다. 그 덕에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이 깜찍한 후배가 누구를 부르고 있는지 명확해졌다.

 

  “이거 놔! 제발 놔 줘! 장난이라면 웃어 넘길 수 있지만, 이건 진짜 스토커잖아! 진심으로 무섭다고!!”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선배! 스토커라뇨!”

  “무서워, 이로하스 무서워! 우연을 가장해 접근하더니 부실까지 따라오고, 부활동이 쉬니까 이젠 실행 위원회까지 쫓아오는 거야? 농담이 아니잖아! 진짜 범죄잖아!”

  “아니라니까요?! 아, 아니······ 아주 틀린 건 아닌데요······!”

  “우와아아아아아악! 본인이 인정했어! 진짜 스토커였어!!!!!!”

  “아아아아아 아니에요! 방금 건 실수!! 말이 헛나왔다구요!!! 부탁이니까 제발 소리 지르지 마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말 할 거야! 온 교내에 다 퍼뜨려 버릴 거라고! 모두의 힘을 빌려서라도 잇시키 널 내 주변에 못 오게 하겠어!”

  “안돼요오오오!!!”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지르며 도망치려는 나와, 그런 내 팔을 필사적으로 끌어당기는 잇시키. 옆에서 보면 꽁트가 따로 없겠지만, 나는 더없이 진지했다.

 

  “안 되긴 뭐가! 부탁이에요! 제발 놔 주세요! 저는 아무 매력도 없어요! 되다 만 미남에 어정쩡한 성적에 적극성도 없는,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라구요!”

  “갑자기 자기비하를 하셔도 곤란해요! 게다가 그거, 잘 들어보면 딱히 나쁜 조건도 아니잖아요!”

  “또야! 또 본심이 나왔어! 스토커 양 진짜 무서워! 방금 한 말 어디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거야?! 흑심이야? 콩깍지가 씐 거야? 부탁이야, 소부고엔 나 말고 좋은 남자도 많다구! 제발 진정한 사랑을 찾아 줘!”

  “안 되겠어, 이 사람 도저히 말을 들어먹질 않아······. 유키노시타 선배도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주세요!”

 

  오오, 그래. 말 잘했다, 잇시키. 여기선 유키노시타에게 판단을 맡기도록 하자. 공정한데다 거짓말을 못 하는 유키노시타라면 어느 쪽이 나쁜지 깔끔한 판단을 내려줄 터.

 

  지목을 받은 유키노시타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죄를 선고하는 판사처럼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불의에 맞서 타협하지 않는 유키노시타답다.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스토커에게 설교라도 해줄 생각이겠지. 좋아, 유키 짱! 해 버려! 길을 잘못든 후배를 처벌하고, 그 따뜻한 미소로 나를 치유해 주렴!

 

  그러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유키노시타의 손은 비어있는 반대쪽 어깨에 내려앉았다.

 

  “하치만, 방금 한 말은 심했어. 취소해.”

  “유키노시타?! 너까지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주 큰 실언을 했지. 하치만이 매력이 없을 리가 없잖니. 이토록 다정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내 짧은 인생에서도 당신밖에 없었어. 정말이지 내게는 과분한 사촌이야.”

 

  ······응?

  유키농,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농?

 

   “얼굴도 그래. 되다만 미남이라니, 당신은 좀 더 자신의 외모에 자신을 가질 필요가 있어. 애시당초 유키노시타의 핏줄을 이은 당신이 매력적이지 않을 리가 없잖니? 사촌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당신은 잘생겼어.”

  “유, 유키노시타?!”

  “외모도 미남,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양보해 줘. 다정함에 응석부려도 어디까지고 받아 줘. 이런 당신을 그 누가 싫어할 수 있겠어? 좋아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도 그럴게, 하치만은 예전부터 여자아이들에겐 인기가 많았으니까. ”

 

  이마를 갖다대자 한 쌍의 붉은 리본이 어깨 위에서 흔들거렸다. 팔에 휘감겨오는 검은 머리카락 속에 리본보다 붉은 얼굴을 감춘다. 내 어깨에 몸을 기대온 유키노시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걸······. 내가 가장 먼저였는데.”

 

  약삭빠를 정도로 순수한 응석이었다.

  언제나 어른스러운 유키노시타가, 아주 가끔씩 보여주는 아이같은 모습. 내게만 보여주는 솔직한 모습이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 둬, 유키노시타. 너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다고. 게다가 나는 스토커랑 친해질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스토커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보다 뭐에요 방금 그 대사는! 꽁냥인가요?! 알콩달콩한 모습을 제 눈앞에서 과시할 속셈인가요?! 선배 무서워! 유키노시타 선배도 약삭빨라!”

  “네가 할 말이냐······.”

  “그치만! 방금 하신 말씀대로면 마치 제가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요! 관심은 무슨! 요만큼도 흥미 없다구요! 그렇 거 안 하셔도 제가 선배에게 손댈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없어요”

 

  예상한대로, 슬쩍 던진 도발에 잇시키는 확실히 부정해 주었다. 떠들썩한 대답에 정신을 차렸는지 유키노시타가 내게서 떨어졌다. 고개를 돌린채 매무새를 정돈하던 내 사촌은 잠시 뒤 새침한 얼굴을 이쪽으로 향했다.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잇시키 양의 기준에는 하치만이 부족하다는 걸까? 납득이 안 돼. 어떻게 끌리지 않을 수 있지? 사촌인 내가 봐도 하치만은 완벽 그 자체인데.”

  “으아, 이 사람들 진짜 짜증나! 성가셔! 귀찮아 죽겠어!”

 

  본의는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잇시키에게 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유키노시타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브라콘도 정도가 있다고! 사촌 사이에도 적용될 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부끄러우니 그만 둬 줬으면 하는데······.

 

  “으음······, 저기, 얘들아?”

  “엇, 시로메구리 선배?”

 

  포근한 목소리에 자동으로 시선이 갔다. 잇시키의 뒤쪽, 계단 아래의 모퉁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시로메구리 선배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그게······, 계속 있었는데······.”

 

  으아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치만! 방금 그 말은 여러 사람이 모여있을 때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말이잖아! 「뭐야, 저 녀석도 있었어? 전혀 몰랐는데.」라거나, 「지각이냐, 히키타니?」라던가. 악의가 없었다 할지라도 당사자 입장에선 이것만큼 기분 나쁜 말도 없는데······. 

 

  “죄송합니다. 잇시키 쪽을 보지 않으려 하다보니 미처 눈치채지 못 했어요.”

  “잠깐, 선배? 제 취급 너무 심하지 않아요?!”

  “아하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괜찮아, 히키가야 군. 신경쓰지 마.”

  “메구리 선배마저?!”

  시로메구리 선배도 꽤나 하는걸? 포근한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충격도 배가 된다. 모퉁이 너머 복도 쪽을 바라보던 시로메구리 선배가 난처한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건 조금 그렇지? 회의실도 코앞이구, 다른 애들도 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첫날부터 민폐를 끼쳐 버렸네요······. 그, 많이 시끄러웠나요?”

  “으음~, 뭐 이 정도 거리니까, 아직은 괜찮을 거라 생각해. 내용까지는 거의 안 들렸구, 내가 눈치챈 것도 히키가야 군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거든.”

  “그런가요? 다행이다······.”

  “아하하, 일단 들어와. 회의도 곧 시작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시로메구리 선배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드르륵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의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잖아? 아까 전의 대화 정말로 들린 건 아니겠지?

 

  “그, 뭐냐, 미안하다······.”

  “네? ······아, 아뇨, 저야말로······.”

  “진짜로 퍼뜨릴 생각은 없었어. 만에 하나 이 일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내 탓인 걸로 해 줘. 틀린 말도 아니니까.”

  “······뭔가요, 그거. 방금 전까진 그렇게 기세등등 해 놓구선······. 선배 진짜 쉬운 남자네요.”

  “냅 둬.”

 

  그럼 갈까? 눈짓으로 그렇게 묻자 유키노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시작하기도 전에 이게 무슨 난리냐······. 축 늘어진 다리를 터덜터덜 움직여 모퉁이를 도는데 잇시키가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유키노시타의 맞은편에서 나란히 걷는다.

 

  “아직 용건이 남았니? 우린 지금부터 일이 있어서 바쁜데.”

  “같이 가죠. 저도 실행 위원이니까요.”

  “······정말로? 농담이 아니었어?”

  “어머나, 농담이라고 생각하셨나요? 그건 유감이네요~.”

  

  한 쪽 눈을 찡긋한 잇시키가 턱짓으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온 이상 거짓말은 아니겠지. 이 녀석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니까.

 

  “히키가야.”

  “알고 있어, 유키노시타. 단지 좀······.”

  “사람 많은 곳, 아직도 힘드니?”

  “이런 건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어휴······, 당신도 참.”

 

  시로메구리 선배가 나올 정도의 소란이었잖냐. 아무리 그래도 지금 타이밍에 뻔뻔히 들어갈 용기는 없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문득 오른편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자, 희고 가느다란 유키노시타의 손이 내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맞잡고 깍지를 끼듯 휘감아온다. 정면을 바라보는 유키 짱이 장난스럽게 나를 곁눈질했다.

 

  “뭐가 힘들어. 누나가 곁에 있잖아.”

  “······몇 번이나 말했지만, 지금은 내 나이가 더······.”

  “어휴, 어제 한 말을 벌써 까먹은 거니? 칠칠맞지 못한 동생이구나.”

  “큭,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가지고······.”

 

  히죽히죽 웃는 내 사촌 너무 얄미워. 뭐가 얄밉냐면, 저렇게 나를 놀려대는데도, 미워할 수가 없다는 게 제일 치사해.

 

  “······이게 무슨 바보같은 대화야.”

 

  한탄조로 끼어든 잇시키는 진심으로 깬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됐어요. 선배님들이 그런 사이란 건 잘 알았으니까, 얼른 들어가자구요. 여기 계속 서 있는 것도 그렇잖아요?”

  “엇, 잠깐만!”

 

  말릴 새도 없이 문을 열더니, 성큼성큼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잇시키. 그래도 그 작은 등이 가림막이 되어준 덕분에 유키노시타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제멋대로 문을 열어버린 건 잇시키지만 말이야. 

 

  실내는 일반적인 교실의 두 배 가량 되는 넓이에 비치되어 있는 책상과 의자도 제법 고급스러웠다. 임시로 문패를 바꿨을 뿐, 평소에는 교직원 회의실로 쓰이는 공간인 모양이다. 문이 열렸을 땐 분명 소란스러운 분위기였건만, 지금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 뿐, 앉아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와, 엄청 주목 받고 있네요.”

  “뭐, 유키노시타니까.”

  “네네, 그러시겠죠.”

  

  정말이라니까. 어려서부터 미인에 똑부러졌던 내 사촌이다. 주목을 모으는 건 초등학교 때부터 당연했던 일, 유키노시타랑 같이 다니려면 이 정도쯤은 익숙해져야 한다고. 나도 아직 멀었지만!

 

  그러나 잇시키는 관심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흐음, 저기에 앉자는 거니? 의외로 괜찮구나. 의장석으로부터의 거리도 적당하고, 맨 뒷자리로부터도 떨어져 있어 리얼충들 사이에 끼일 염려도 없다. 이 정도라면 합격점이군. 

 

  “근데 너 우리랑 같이 앉아도 되냐?”
  “뭐 어때요. 딱히 학년별로 앉으란 말도 없었고.”

  

  흐음, 딱히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같은 반 실행 위원이랑 함께하지 않아도 되냐는 말이었지만, 괜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외양과는 달리 앉는 자리조차 외톨이의 정석에 충실한 잇시키다.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겠지.

 

  비워져 있는 세 자리 중 가장 먼 자리는 잇시키가 앉았다. 남은 좌석은 두 개. 가운데 자리를 비워두는 게 좋겠지? 영화관 좌석도 코마치가 가운데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곁을 스쳐지나간 유키노시타가 내가 앉으려던 자리를 선점해 버렸다.

 

  ······아하, 그거구나! 유키노시타의 입장에 보면 잇시키는 지인의 지인에 불과하니까. 처음부터 가까이 앉는 건 부담이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네, 공통 지인이 가운데 앉는 건 합리적인 포지션이니까 말이야. 그래, 두 사람 사이에 앉는 데에는 그 정도 이유면 충분할 것이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 시선은, 조금 따갑지만 말이다.

 

 

xxx

 

  기술의 발전에는 예로부터 양면성이 존재해 왔다.

  인간의 업무를 돕고 몸을 편하게 해주는 이로움이 있는가 하면, 실업난이나 인권침해 등 기계에 밀려버린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도태되었고

  누군가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간단히 말하겠다. Line은 민폐다. 인류악이다.

 

  “히키가야 군, 다 됐니?”

  “엇, 네, 지금 끝났습니다.”

 

  상대방의 이름이 뜨는 것을 확인한 후 들고 있던 기기를 돌려주었다. 친구 목록이 두 자릿수가 되다니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군. 한 분은 선생님에다 가족친지의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긴 해도, 오랜 세월 외톨이로 살아온 내게는 포켓몬 도감을 채우는 것보다 대단한 업적이었다.

 

  “학생회 업무에 메신저를 쓸 줄은 몰랐거든요. 조금 의외였던지라······.”

  “응, 그랬던가? 중학교 때도 비슷했던 것 같은데?”

  “하하하······."

 

  요즘 10대들이 조숙한 거라구요. 학기초만 되도 학급별 채팅방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썩하지 않습니까? 현실과 달리 참여 목록에 내 이름이 뜨니만큼 못 본 척 하거나 도망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들어가지 않는 게 상책, 온갖 핑계를 대며 거절해 왔는데, 그 기록이 오늘 깨지게 될 줄이야.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확인을 마친 시로메구리 선배는 다음 자리로 이동했다. 창가쪽 인원부터 시작한 라인 교환 작업, 회의실 안을 한 바퀴 도는 장대한 일정도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뿐사뿐 나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반대편 손에 쥐어진 기기를 내려다보았다. 나른한 표정의 고양이가 고롱고롱 졸고있는 배경화면. 코마치 녀석, 사진은 언제 또 보내준 거래? 쓴웃음을 지으며 옆자리에 앉은 유키노시타에게 휴대전화를 넘겨주었다.

 

  “······이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조심스럽게 받아든 두 손과 달리, 불만이 가득한 뚱한 표정.

 

  “과연 그랬을까? 유키노시타는 예전부터 기계를 다루는 데는 서툴렀으니까. 라인 계정을 만들어준 것도 하루 짱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 이야기야. 지금은 다르다구.”

  “카메라 설정도 못 했으면서. 알려줘도 헤맸잖아. ‘접근허가라니 무슨 뜻이니?’ 라고 몇 번이나 묻고 말이야.”

  “바, 바보 취급하지 말렴! 당신의 설명이 부족했던 것 뿐이야!”

 

  양볼을 부풀린 유키노시타가 책상 아래로 콕콕 다리를 찔러왔다.

 

  “애시당초, 친구추가는 ID 교환으로 하는 것 아니니? 어째서 이, QR? 코드란걸 쓸 필요가 있는 거니?”
  “아, 그거 말이지. 악용될 우려가 있어 미성년자의 ID 교환은 막아놨다더라. 법적으로 성인이신 유키노시타라 한들 완전한 어른은 아니란 말이지.”

  “납득할 수 없어······.”

 

 험한 세상이니까 말이다. 그보다 QR코드가 뭔지 모르는 유키노시타가 신기한 거라고. 

 

  “이럴 때 정도는 오빠한테 맡기라고.”

 

  허벅지에 닿는 감각에 의지해 유키노시타의 손을 붙들었다. 빠져나가려는 손을 가볍게 쥐고 도리질을 치듯 저었다. 이게 낚시였다면 월척이겠지. 수면, 아니 책상 아래에서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는데, 문득 반대쪽 다리에서도 입질이 오는게 느껴졌다.

 

  이건 또 뭐야? 슬쩍 왼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소매 밑으로 삐져나온 손가락이 모이를 쪼는 새처럼 허벅지를 눌러오는데······, 잇시키 양? 왜 중지로 찌르고 계신 거죠? 일부러 그러시는 건가요?

 

  “선배님들, 사랑싸움은 끝난 후에 해주세요.”

  “읏?!”

 

  고개를 수그린 유키노시타가 맞잡았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귀가 그 윤기있는 검은색 사이에 유난히 붉게 보였다.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안 그래도 소문이 자자한데, 돌이킬 수 없게 되버려도 저는 몰라요?”

 

  어디까지나 미소를 유지한채 잇시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시선은 흔들림없이 정면을 바라보며 입술조차 크게 벌어지지 않는다.

 

  “배려 고맙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을 거야.”

  “뭐, 아직까지는, 이지만요.”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우리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각 반마다 할당된 실행 위원은 남녀 1명씩이다. ‘이성’ 친구에 대해 관대하지 않는 한 데면데면한 관계가 보통일 것이다. 체념인지 그저 따분한 건지는 몰라도 무료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단체 채팅방은 시로메구리 선배 나름의 예방책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소속감을 주고자 한 것이겠지. 도주 방지 대책으로서도 탁월할 테고 말이야.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생각도 가치관도, 행동양식도 저마다 다르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존재감을 뽐내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지 사가미는 다른 반 여자아이 두 명과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루카랑 윳코는 여자 농구부지? 부활동 바쁘지 않아? 어쩌다 오게 된 거야?”

  “일단은 가위바위보로 걸리긴 했는데, 반쯤은 눈치도 있었어.”

  “눈치? 왜?”
  “체육대회가 갑자기 취소됐잖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다들 난리도 아니였어.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그럼 그만큼 문화제를 열심히 하자!’ 뭐 이런 분위기가 되어 있더라고.”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만한 문제였나 싶어 허탈하기도 했고, 짜증도 났고······. 그래서 이참에 나와 버린 거야. 웃는 얼굴로 같이 있으려니 배알이 꼬이더라고.”

  “아, 그거 알 것 같아.”

 

  제딴엔 목소리를 낮춘다고 한 것 같지만, 맞은편에 앉은 내가 듣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짜증과 뒷담, 유행어로 이루어진 삼중주. 자리에 없는 사람을 거름으로 삼아 각종 은어로 촉진시킨 증오가 거기에 있었다.

 

  잠자코 듣고 있지만 다른 학생들 생각도 비슷한 듯 했다. 암묵적인 공감, 적어도 이견이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반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끼리 모종의 동질감 같은걸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는 미나미는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여기 있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모처럼 하야마 군과 같은 반인데 이런 이벤트를 놓치면 아깝지 않아?”

  뜻밖의 이름에 유키노시타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후후후, 그렇게 생각해? 이쪽도 전략이 있다 이거야~.”

  “어? 뭔데뭔데? 말해주면 안 돼?”

  “미안 윳코, 그치만 밝혀버리면 의미가 없잖아? 그편이 실패했을 때 부담도 적구.”
  “아하하, 그게 뭐야, 웃겨!”

  거기까지 밝힌 시점에서 숨기는 의미가 있나 싶네.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는 게 좋을텐데.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학생회장님도 듣고 있으려나? 흘긋 시선을 주니, 시로메구리 선배는 교실 앞에 서서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누르는가 싶더니, 동시에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꺼내든 화면엔 수십 명이 모인 그룹 채팅방이 표시되어 있었다.

 

  ······우와,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인사말들을 올리기 시작하잖아? 뭐야 이거? 나도 해야해? 인사라면 현실에서 해달라고. 이런 쪽 지식은 없단 말이다.

 

  “잇시키, 우리도 뭐라고 써야하는 거 아닐까?”

  “글쎄요, 대충 ‘잘 부탁드립니다~.’ 한 마디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오래 볼 사람들도 아니고.”

  “우와, 이로하스 영악해.”

  “······그 호칭은 또 뭔데요?”

  “뭐긴, 이로하 스토커의 줄임말이지.”

  “나중에 두고봐요, 선배♡”

 

  가늘게 휘어진 눈초리로 꺄릉 웃음소리를 내는 잇시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잇시키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이 녀석도 제법 외톨이 기질이 다분하다니까. 알면서도 물어본 내 잘못이로군.

 

  그래, 이쪽이 신경써야할 건 따로 있다. 참가자 목록에 훑어내리자 한 번에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오오, 용케도 혼자 들어왔구나. 장하다, 장해.

 

  “······뭐니?”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유키노시타가 삐딱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아니, 대견하구나 싶어서.”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니? 바보 취급은 됐다고 했을텐데?”

  “바보 취급한 적은 없어. 잘 하고 못 하는 건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오히려 미숙한 분야라도 겁먹지 않고 언제나 도전하는 유키노시타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딱히 그 정도는······. 과대평가야.”

  “뭐, 내 생각이 그렇단 거야. 그래도 오빠 입장에서는 미묘하구만. 여동생의 성장은 기쁜 일이지만, 챙겨줄 필요가 없어지다니 그건 그거대로 씁쓸한 기분이고.”

  “······나중에 두고 봐. 누나를 놀린 죗값, 톡톡히 치르게 해줄 테니까.”

 

  일 분도 안 된 사이 두 여성에게 최후통첩을 받고 말았다. 으음, 뭐가 문제였던 거지? 업보가 쌓일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음음, 좋아. 모두 들어왔구, 이제 집행부 아이들만 오면······.”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뗀 시로메구리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얼거림의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학생회장의 시선은 좌중을 침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인쇄물을 품에 안은채 줄줄이 들어오는 학생들. 아항, 저 사람들이 시로메구리 선배가 말한 집행부, 학생회 임원들인가 보군. 그러나 뒤에 들어본 사람은 뜻밖이었다.

 

  “히라츠카 선생님?”

 

  왼편에 앉아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잇시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될 만큼 의아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회의실을 둘러보던 히라츠카 선생님도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챈 듯 했다. 한쪽 눈을 깜빡여 윙크를 보내시고는 의자를 빼 회의실 구석에 자리잡았다. 어제도 바빠 보이시더니 실행 위원회 고문직까지 떠맡으신 겁니까······. 어른이란 정말 힘든 거군요.  

 

  집행부 인원들이 들고있던 서류를 나눠주었다. 전원에게 배부되었음을 확인한 시로메구리 선배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것을 신호로 모두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럼, 문화제 실행 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학생회장인 시로메구리 메구리에요. 여러분의 도움에 힘입어 올해에도 문화제를 개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무랄데 없는 소개였지만 회의실의 반응은 썰렁했다. 쓴웃음을 지은 시로메구리 선배가 한쪽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다 함께 잘해보도록 하죠! 오오!”

  “오오!”

 

  이제는 한물 간, 청춘 스포츠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구호. 그러나 학생회 임원들은 열렬한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그에 이끌리듯 회의실에 앉은 학생들도 하나둘 소극적인 박수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그럼 곧바로 실행 위원장 선출에 들어가도록 할게요.”

 

  그 말에 회의실이 술렁였다.

  그럴 만도 하지. 나조차도 전날에 귀띔을 받지 않았더라면 실행 위원장은 학생회장이 겸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애물단지 신세가 되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 이들은, 그저 시키는 일만 하루하루 해나갈 생각이었을 테니까.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매년 문화제 실행 위원장은 2학년이 맡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자, 혹시 하고 싶은 사람?”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개개인의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의 고요, 인원수에 맞지 않는 어색한 적막이 회의실을 채웠다.

 

  “딱히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 선생님들도 도와주실 거고, 나를 비롯한 학생회 임원들도 전력으로 서포트 할 거야. 의욕있고 성실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환영입니다!”

 

  어째 멘트가 아르바이트 구인 광고 같지 않나요? 의도는 알겠지만 더욱 수상쩍어 보이는군요. 설명을 이어가는 시로메구리 선배는 이따금 불안한 시선을 이쪽으로 보내왔다. 정확히는 내 옆자리, 유키노시타 유키노를. 

 

  예상대로 지원자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이대로라면 내 사촌이 실행 위원장 자리를 떠맡게 된다는 의미다.  유키노시타는 분명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제자리걸음이 계속될 경우 두고 보지는 못 하겠지. 그렇기에 시로메구리 선배는 미안함을, 지원자가 나오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키노시타는 눈을 감은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의미한 시간 끝에 다가올 결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저어.”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공기의 흐름이 정적을 깬 소녀에게로 흘러든다.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사가미가 손을 들고 있었다. 기분탓인지 질문을 하던 도중 이쪽을 바라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학생회장인 선배를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응! 뭐든 물어 봐!”

  “감사합니다. 그럼······.”

 

  뜸을 들였지만 목을 가다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말을 고른다기보다 주위의 반응을 살피는 느낌이었다.

 

  “체육대회가 취소되었다고 들었는데요, 그쪽은 이제 정말로 가망이 없는 건가요?”

 

  적막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 아는가.

  모두의 호흡이 동시에 멎으면 조용해질 거라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정적도 있는 법이다.

 

  “어, 어라? 체육대회?”

  “네. 담임 선생님께 듣긴 했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요. 일 년에 한 번 있는 소중한 행사인데, 한 마디 말로 납득하는 것도 뭐랄까, 좀 그렇잖아요?”

 

  그 단어 선택에 위화감, 아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회의실에 앉은 모두의 시선이 사가미의 시선에 겹쳐진다. 말없이, 그저 암묵적인 눈빛으로 동조하며 시로메구리 선배를 재촉했다.

 

  “응······. 지금으로선 그래.”

  “어째서요?”

  “일정에 조금 문제가 생겼거든. 우리측에서도 노력하고 있지만, 올해는 아마 개최하기 힘들 것 같아.”

 

  탁 트인 상석은 마치 교수대처럼 보였고, 좌우로 나란히 앉아있는 학생들은 처형을 구경하는 군중처럼 보였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으나 호의적인 분위기는 눈꼽만큼도 없다. 그건 네 사정이지, 네가 잘 했어야지, 우리들의 체육대회를 돌려 줘, 그런 무언의 야유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미안해, 기대했을 텐데. 학생회장으로서 면목이 없어.”

 

  움켜쥔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학부모회의 개입을 숨긴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밝히게 되면, 학교 측이 외압에 굴복해 학생들을 버린 것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시로메구리 선배가 모든 책임을 질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학생회는 단지 그 사이에 끼였을 뿐, 처음부터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 했으니까.

 

  차라리 말해버렸더라면, 털어놓았더라면 편해졌을 텐데.

  지금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적의를 외부로 돌려, 그들과 규합할 수 있었을 텐데.

  학생회장으로서, 선배로서, 시로메구리 메구리는 지지 않아도 될 책임을 떠맡았다.

  증오를 뒤집어쓸걸 알면서도, 미움받는 역을 자청했다.

  그것이 선배로서, 어른으로서의 책임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럼 그만큼 힘내서, 취소된 체육대회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즐거운 문화제를 만들 수 밖에요!”

 

  사가미의 힘찬 선언에 분위기가 누그러들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의미로 달아올랐다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좌우로 천천히, 마치 뱀처럼 주변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빛을 뿜었다.

 

  “그럼 말이죠, 지원자가 없다면 제가 실행 위원장을 맡아도 될까요?”
  “응? 정말로?”

  “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이런 일에 시간 뺏길 바에야 조금이라도 빨리 결정하는 게 낫지 싶어서요.”

 

  지원 동기로서는 다소 엇나간 감이 있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딱히 불만이 없는 눈치였다. 어차피 누가 되도 상관없는 위원장 자리다. 그들 입장에서도 빨리 정해버리는 게 이득일 테고, 자발적인 지원자를 마다할 이유도 없을 테지. 시로메구리 선배도 안도한 기색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그럼 자기소개를 부탁해도 될까?”

 

  지목받은 사가미는 마지막까지 신중했다. 성급하게 일어서지 않고 숨을 고르더니 주목이 모아지는걸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2학년 F반 사가미 미나미에요. 예전부터 이런 일에 흥미가 있기도 했고, 경험은 없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두 함께 즐거운 문화제를 만들 수 있다면 기쁠 거에요!”

 

  한바탕 박수소리가 울려 퍼진 뒤 사가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양옆에 앉은 친구들과 꺄아꺄아 호들갑을 떠는 그 모습은 방금 전에 보여준 당당한 선언과는 거리가 있었다. 평범한 인간관계에서 진지한 모습은 일견 폼을 잡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튀어나온 돌과도 같다. 그것을 잘 아기에 정을 맞기 전 둥글둥글한 모습을 어필해 스스로를 감추는 것이다. 그야말로 능숙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이었다.

 

 음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시로메구리 선배가 화이트보드에 「실행 위원장 : 사가미」 라고 써넣었다. 서기에게 손짓해 인쇄물 한 장을 건네받더니 또다시 무언가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럼 이제부터 담당 업무를 정하겠습니다. 의사록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놨으니 읽어보세요. 5분 후에 희망자를 받도록 할게요.”

  

  선전 홍보, 클럽 통제, 물품 관리, 보건 위생, 회계 감사, 기록 잡무······. 아항, 저것이 나머지 직책명인가 보군. 빼곡히 적힌 목록은 실행 위원장을 제외하면 공석이었다. 그렇다 한들 경쟁률이란 게 있으니 원하는 곳을 들어가리란 보장은 없지만.

 

  어디 보자, 어디가 가장 꿀을 빨 수 있으려나?

  “히키가야?”

  “죄송합니다. 제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걸까?”

 

  아뿔싸······. 유키노시타에게 갑자기 불리는 바람에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털어놓고 말았다. 성으로 불리면 아무래도 공적인 느낌이랄까 혼나는 뉘앙스로 들릴 때가 있단 말이지. 내가 먼저 제안하긴 했지만, 의외의 부작용이 있는걸?

 

  “뭐, 열심히 할 생각이라면 괜찮겠지. 당신은 성실하니까.”

  “그러니까 과대평가가 심하대도.”

 

  후훗 미소지은 유키노시타가 프린트를 펼쳐들더니, 의자를 당겨 내 옆에 붙어 앉았다. 

 

  가까워······.

 

  자신이 가진 의사록을 함께 보자는 의미겠지만, 나도 받았으니까 그럴 필요 없는데······. 익숙한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여 여러 의미로 집중할 수 없다. 쑥스러운 나머지 의자를 살짝 빼 왼쪽으로 빠지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거기엔 선객이 있었다.

 

  “선배, 저 이런 거 처음인데요, 어디가 제일 편할까요?”

  미처 고개를 돌리기 전에 잇시키의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체중을 실었는지 어깨에 올려놓은 작은 손의 감촉이 신경쓰이는 데다, 말을 할 때마다 내뱉는 뜨뜻한 숨결이 가슴팍에 닿는다. 유키노시타의 의사록을 보려는 모양인데, 네 것도 있잖아? 다들 왜 이렇게 내 사촌을 좋아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런게 있겠냐?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아니니?”
  “뭐 어때요. 다들 비슷한 생각일 테구, 이왕 할 거라면 쉬운 일을 고르는게 합리적이잖아요.” 

  “이런이런, 사고방식이 썩은 후배님이시구만. 잘 들어, 잇시키.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어. 어떤 직무라도 그 나름의 책임과 고충이 있기 마련이야. 애초에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거든.”

  “우와······, 웬일로 멋진 말을 하나 했더니, 끝이 썩었어······.”

 

  남 말 할 처지에요? 반쯤 감은 눈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유키노시타에게 지명당하기 전까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싹수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 후배님이시다. 양심이 아프다고~.

 

  그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에 앉은 미소녀 두 분은 진지한 표정으로 프린트에 써진 내용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이거, 유키노시타와 성으로 부르는 의미가 있는 걸까?

 

  “의외로 종류가 많네요. 이름만 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사양하지 말고 물어보렴. 나랑 히키가야가 성심껏 알려줄 테니.”

  “아뇨, 그건 좀 다른 의미로 불안해서······. 유키노시타 선배는 어느 쪽을 지원할 생각이세요?”

  “어디든 상관없어. 히키가야와 함께 할 수만 있으면.”

  “······혹시 그것 때문에 위원장 자리를 사양하신 건 아니죠?”

  “무, 무슨?! 잇시키 양! 그런 말은 삼가도록 하렴!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네 목소리가 더 크다구······. 평소 의젓한 유키노시타의 보기 드문 당황한 모습이 신기했던 걸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 일은 빨리 해치워 버리는게 좋을 것 같다.

 

  “소거법으로 가자. 정신이 힘든 일과 몸이 힘든 일, 어느 쪽이 좋냐?”
  “뭔가요, 그 선택지? 양쪽 다 내키지 않는데요······.”

  “굳이 말하자면 정신 쪽이 좋겠어. 나, 체력만큼은 자신이 없으니까.”

  “그럼 물품 관리와 선전 홍보는 제외로군.”

  “그보다 정신이 힘든 일이란 게 도대체 뭔가요? 상상이 안 가는데요?”
  “간단해. 사람 상대하는 일이다. 우리들이 가장 못 하는 일이지.”

  “왜 저까지 세트 취급인 거죠?”
  “그렇구나. 확실히 우리들은 그런 쪽에는 서투니까.”

  “유키노시타 선배까지?!”
  “클럽 통제도 제외인가.”

 

  그보다 결국 어느쪽도 꽝이잖아. 물어본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설령 잇시키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좋다한들 클럽 통제는 무리야.”

  “네? 어째서요?”
  “어째서긴. 너는 축구부 매니저를 맡고 있잖냐. 문화제 준비 기간이라고 해도 실행 위원과 부활동을 양립하기는 힘들거야. 게다가, 특정 부에 소속된 네가 이 역할을 맡을 경우 불만이 생길 우려도 있어. 너무 위험해.”

 

  부활동도 결국 사람이 모인 곳, 형태가 어떻든 분명한 인간관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수평적인 관계를 구축하려 한들 선배와 후배, 부장과 일반 부원이 존재한다면 필연적인 상하관계도 구축되어 있겠지. 그걸 외부인이, 그것도 임시 기구에 불과한 문화제 실행 위원회가 통제한다? 마찰이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오히려 열의를 가질수록 배척받을 위험이 있다. 하물며 다른 부라니, 차별대우를 한다는 잡음이 나오기에 그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불만을 가진 세력에겐 그만큼 만만한 꼬투리도 없을 테니까. 

 

  다른 걸 떠나서, 이런 역할을 잇시키에게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일뿐, 개인적인 의견을 잇시키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었다. 너무 단호하게 나간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잇시키의 표정을 살폈지만, 내 후배는 예상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라움인지 당혹감인지 모를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신기하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 뭔데?”
  “아, 아뇨······. 의외로 세심하게 생각해 주시는구나 싶어서요······.”

 

  얘도 참, 내가 뭘 했다고 놀라는 거래? 우리 히키가야 집안(에서 놀았던 멤버들)은 다들 이 정도가 보통이란다? 그나저나 이 표현 괜찮네. 친구 다음으로 애용해야겠어.

 

  “그럼 다음은 회계 감사인데, 유키······.”

  “히키가야도 올 거니?”

  “······아니, 나에겐 무리야.”

  “그럼 나도 싫어.”

 

  생긋 웃은 유키노시타가 볼펜을 꺼내더니, 회계 감사라고 적힌 글자 위에 직직 덧칠을 했다. ······내 의사록에. 

 

  왜 이럴 때만 제 종이를 쓰는 겁니까? 반박하면 너도 이렇게 만들어줄 거라고 협박하는 건가요? 왠지 모르게 잇시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진짜 무섭네! 그리고 귀찮아, 이 두 사람!

 

  “그럼 남은건······.”

  “기록 잡무부 뿐이군.”

  “보건 위생은 왜 빼세요?”
  “책임질 일은 하기 싫거든.”

  “아, 그건 저도 동감. 이건 제끼죠.”

  “······책임과 고충, 누가 말했던 거였지?”

 

  흡사 얼음의 여왕과도 같은 차디찬 시선이 바로 옆에서 느껴졌지만, 잇시키는 눈치채지 못한듯 보였다. 유키노시타와의 사이에 앉은 내가 가림막이 되어줬기 때문일까, 주머니에서 꺼낸 볼펜을 찰칵거리던 잇시키는 콧노래를 부르며 ‘보건 위생’을 지워나갔다. ······이번에도 내 의사록에.

 

  뭐야 이거? 유행?

 

  “결정이네요. 그래도 모두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지원율에 따라 다르겠지. 가위바위보 자신 있냐?”

  “확률에 기반한 게임에 자신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니?”

  “유이가하마에게 이겼을 땐 엄청 좋아했으면서.”

  “그, 그런 적 없단다! 근거도 없이 꾸며대는 건 그만두는 게 좋아!”

 

  얼굴을 붉힌 유키노시타가 동동 발을 굴렸다. 책상 밑으로 손을 뻗어 허벅지를 콩콩 두드려온다. 전혀 아프지 않다구요, 이게. 

 

  “이거야, 이래서 불안했는데······. 잠시만 방심하면 또 이런다니까······.”

 

  까닥 모를 불만이 옆에서 들려왔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다들 결정을 내렸으려나?”

  

  포근포근한 목소리가 주목을 이끌었다.

 

  “사가미 양, 진행 부탁할게.”

  “네? 제가요?”
  “응, 이제부터는 위원장이 해야 할 일이니까.”

  “하하, 갑작스럽네요. 잘 할 수 있으려나~.”

 

  시로메구리 선배의 손짓에 사가미는 너스레를 떨며 부응했다. 학생회 멤버들 속에 섞이는 형태로 앉더니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는다.

 

  역시 카스트 최상층은 다르구나. 하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내가 신경쓸 일은 내 사촌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 뿐이니까.



  xxx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리는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달아오른 부서 배정은 의외로 치열한 접전 끝에 막을 내렸다. 기록 잡무부의 경쟁률이 그렇게 높을 줄이야. 맨 마지막 순서였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유키노시타와 잇시키가 손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런 것치곤 여학생의 비율도 높았던 것 같지만, 유키노시타는 여자들에게도 인기있는 타입이니까 납득할 만 하다.

 

  가위바위보를 위해 모이기 전 유키노시타가 우리들을 불러세웠다. 머리를 맞대고 전달한 지시사항은 단 하나, 모두가 보자기를 낼 것. 전원이 같은 수를 낸다면 이기든 지든 떨어질 일은 없다는 계산이었다. 역시 내 사촌이야. 승부의 방향이 이상한 것은 신경쓰면 지는 거다.

 

  우연인지, 그게 아니면 처음에는 바위를 내는 순진한 사람이 많았던 건지, 운 좋게도 우리는 전원 기록 잡무부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진 사람들의 시무룩한 눈빛이 인상깊었는데, 왜 그랬던 걸까? 여기서 떨어졌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실행 위원장이 알아서 빈 자리에 넣어줄 거라구?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기록 잡무부는 배정 순서 최후미에다 ‘잡무’라는 특성상 의욕을 가지기 힘든 일이다. 그럴 터인데, 어째서인지 첫인사를 나누는 자리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1학년 C반 잇시키 이로하에요! 선배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오오오!”

  “2학년 J반 유키노시타 유키노입니다.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오오오오오!!!”

  “2학년 F반 히키가야 하치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꺄아아!!!”

 

  꺄아아? 좀비 영화에 흔히 나오는 비명 소리냐? 너무한 거 아냐? 저거 보라고, 유키노시타도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있잖아. 지켜주는 거야? 진짜 천사라니까.

 

  “유키노시타 선배도 고생이겠네요.”

  

  슬그머니 다가온 잇시키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게. 똑바로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저렇게 신경써주는데 폐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야.”

  “아뇨. 그럴수록 더 악화될 것 같다고나 할까······.”

  “응? 뭐라고 했니, 잇시키?”
  “······유키노시타 선배도 고생이겠다고요.”

 

  왜 했던 말을 또 하는 걸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거니? 그렇담 어쩔 수 없지.

 

  자기소개가 끝나고 남은 건 부장 선출 뿐이었다. 몇몇 인원이 제안을 건넸지만 유키노시타는 이번에도 겸손히 사양의 뜻을 표했다. 하긴, 잡무 부장이라니 폼이 안 나긴 하지. 짊어지지 않아도 될 책임에 일만 많아질 뿐이다. 나로서도 유키노시타가 그런 일을 맡는 건 바라지 않았다.

 

  ······사실은 안다. 부장 자리를 권유한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유키노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들이 바라보는 건 유키노시타雪ノ下였지 유키노雪乃가 아니었다. 3년 전 개최된, 소부고 역대 최고의 흥행을 이루었던 문화제. 그 실행 위원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유키노시타 하루노의 모습을 그 동생인 유키노에게 투영하고 있을 뿐이다.

 

  짊어지지 않아도 될 책임, 전해야 할 대상이 잘못된 기대.

  그런 제멋대로의 이상을 내 사촌에게 강요하지 말란 말이야.

 

  그 때 잠자코 지켜보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시로메구리, 부위원장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네? 그거라면······. 딱히 어려운 자리도 아니니 제가 맡을 생각인데요.”

  “그럼 안 되지. 너는 지금 3학년이지 않느냐. 너무 많은 짐을 질 필요는 없다.”

  “아, 아뇨. 그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난 히라츠카 선생님이 의장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로메구리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자애로운 눈길로 내려다본다. 

 

  “언제까지고 지켜봐줄 수는 없는 거다. 떠나야할 사람은 떠나야 하니까.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무대는 그들에게 맡기도록 해라.”

 

  뭐야 저 대사 멋지잖아. 그런 소년 만화같은 말을 현실에서 해도 되는 겁니까? 되고 말고요! 히라츠카 선생님 멋쟁이!

 

  시로메구리 선배도 납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잠깐 주목해 줄래?”

  

  전원의 시선이 모이자 시로메구리 선배는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부위원장을 선출하려고 해요. 이미 담당이 정해진 사람도 있겠지만 잠시 보류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죄송해요.”

 

  뜻밖의 말에 회의실이 술렁였고, 사람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경쟁에 밀린 사람은 혹여나 빈자리가 생길까 눈을 빛냈고, 원하던 부서에 들어간 사람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시로메구리 선배를 바라보았다.

 

  부위원장이란 직함은 그럴듯해도 실제 포지션은 애매하게 그지없는 자리다. 중간관리직의 특성상 위아래로 치이기 십상인데 반해 권한은 미미. 기껏해야 회의 보조, 혹은 위원장 부재시의 연락수단 정도의 역할이 고작이겠지. 

 

  가장 최악인 점은 어제까지 얼굴도 모르던 사람을 위원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점이다. 카스트 상위층인 사가미라면 얼굴 정도는 알려져 있겠지만, 그렇다 한들 부담스럽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아니, 오히려 리얼충 상사와 부대껴야 하니 어떤 의미로는 최악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시로메구리 선배라고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린 시로메구리 선배. 어정쩡한 침묵이 다시금 회의실을 채우려하던 그 때,

 

  “저기~, 실례지만요~.”

 

  묘하게 명랑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사가미 양?”

  “부위원장, 제가 직접 지명해도 될까요?”

  “어, 어라? 직접? 글쎄, 본인이 괜찮다면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사가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모아지는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리를 벗어나 교실 가운데로 걸어가는 사가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숨죽인채 사가미의 동향을 지켜보았다. 아니, 지켜본다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마다 시선을 피한채,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부위원장 자리다. 그러나 시로메구리 선배가 말했듯이 딱히 어려운 자리도 아니다.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지만 그것은 원칙적인 이야기일 뿐, 어느 집단에나 분위기란 게 있기 마련이다. 위원장인 사가미가 직접 나섰다는 명분을 지명받지 못한 행운아들이 놓칠 리가 없다. 

 

  불만을 품어봐야 당사자의 사정일 뿐,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한 사람 정도야 오차니까. 사라져도 상관없는 버림패니까.

  타인을 희생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걸 마다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의 완성이다.

 

  “히키가야.”

 

  사형선고와 같이 차디찬 목소리가 그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이곳에 유미코는 없었으니까.

 

  언제 왔는지, 사가미는 내 자리 바로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당황한 나머지 이상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그것이 재미있었는지 사가미는 자신의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웬 존댓말이래? 우리 같은 반이잖아! 웃겨!”

  “아니······, 너······.”

  “아, ‘군’을 붙였어야 했던 거려나? 그치만 우린 같은반이잖아, 그치?”

 

  왜 두 번이나 말하는 거야? 같은반인걸 강조해서 어쩌려고······. 

  무어라 대꾸하려 했지만, 그 전에 끼어든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하······, 히키가야는 안 돼!”

 

  유키노시타 씨, ‘하’까지 나온 시점에서 다시 말하려 해도 늦었어요······. 게다가 뭐에요, 소매를 부여잡고 끌어당겨서는. 그야말로 인형을 뺏기기 싫어 끌어안는 어린아이 같잖아요.

 

  “그 쪽은 분명 유키노시타 양이었지?”

 

  사가미의 눈가가 가늘어지더니 묘한 빛이 번뜩였다.

  흡사 뱀처럼 끈적끈적한 시선이 유키노시타를 훑어내린다.


  “그 소문, 사실이었구나? 유키노시타 양과 히키가야 군이 사귀고 있다는 거.”

  “잠깐, 사가미, 오해다. 우리는 그런 게······!”

  “에이~, 이제와서 뭘 그래~. 두 사람은회의실에 올 때도 같이 들어왔지? 아까부터 찰싹 붙어서는 내내 함께 있었잖아~. 하긴, 연인 사이면 이름으로 부르는 게 당연한 거니까.”

 

  생글생글 받아치는 음성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악센트가 섞여 있었다. 분명 나를 보고 말하고 있을 목소리는 서라운드 스피커처럼 회의실 곳곳에 퍼져나갔다. 사람과 사람, 앉아있는 모두의 귀에 부딪쳐 반사되고, 꺼림칙한 술렁임이 되어 되돌아온다.

 

  그것을 눈치챈 유키노시타가 잡고있던 소매를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그 말은 틀렸어, 사가미 양.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야.”

  “그럼 뭔데?”
  “······사촌이야.”

  꼿꼿이 편 등과 반대로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은 떨리고 있었다.

  문득, 어렸을 적 유키노시타를 업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 떠올렸다.

  그 무엇보다 유키노시타를 상처입혔던 말을, 유키노시타가 직접 하게 만들어버렸다.

 

  “헤에~.”

 

  감정하듯, 혹은 비교하듯, 사가미는 나와 유키노시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순간, 마치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작은 틈새로 나타난 혀가 입술을 핥고 사라졌다.

 

  “그럼 말야, 유키노시타 양이 해주지 않을래?”
  “······뭐?”
  “이야~, 잘 생각해보니까 말이지~, 내가 위원장인데 히키가야 군이 부위원장이면 수뇌부 두 사람이 같은 반이 되는 거잖아? 모양새도 좀 그렇구, 우리 F반에 관련된 업무도 편애하게 될 것 같거든~.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안 그래?”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가미의 기술을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적절한 농담은 사람들을 웃기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게 만든다. 급조된 위원회는 어느덧 이 새로운 상사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 유키노시타 양은 그 하루노 선배의 동생이잖아. 엄청 적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모두들 알죠? 3년 전 있었던 소부고 최대의 문화제. 3학년 선배님들은 물론 1학년이나 2학년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도 거기에 있었거든요. 문화제는 외부에 개방된 행사, 지역주민부터 시작해 미래에 입학할 수많은 후배들이 이곳 소부고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몸을 돌린 사가미가 버티고 선 덕분에 사람들을 향하고 있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어둡고 흐릿한 그녀의 뒷모습 뿐이었다.

 

  유키노시타를 상대로 걸었던 말은 어느덧 대상을 옮겨갔고, 당사자인 사가미조차 유키노시타를 쳐다보지 않는다.

 

  “엄청 감동이었어요. 출품작들도 멋졌고, 반마다 준비한 이벤트도 재밌었어요. 친절한 선배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미소짓고 있어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저는 말이죠, 그런 축제를 만들고 싶어요. 부족할지라도, 하루노 선배만큼 될 수 없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 여기 앉아계신 분들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축제. 그런 문화제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가미가 고개를 돌리자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눈을 찔렀다. 비춰진 빛이 역광이 되어 유키노시타를 내려다보는 사가미의 표정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컨데,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화제를 만들기 위해선 유키노시타 양의 힘이 필요해. 부디,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래?’

 

  높고도 밝은 곳에서 내려온 부탁은 정중했고 어떤 의미로 거룩한 인상마저 주었다. 지금 이 순간 회의실에 있는 모두에게 있어 사가미는 훌륭한 위원장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심장악술 만은 높게 평가할 만 했다.

 

  그러나 그 뿐이다.

  이건 순수한 동경도 선의도 아니다. 의욕이나 협동, 건전한 경쟁과도 거리가 멀다.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는데, 무엇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뭘 다 안다는 듯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어떻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 순간 ‘우리’ 속으로 숨어버린 처세술에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너무도 간단히 자신을 지운다, 인과관계를 흐린채 집단의 힘을 빌리고, 그런 주제에 책임 소재는 불분명하게 만들어 버린다.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봐 왔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

 

  “나는······, 난······.”

 

  아아, 틀렸다.

  완전히 함정에 빠져버렸다.

  명분도 이유도 없는 감정에 묻혀버렸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려 한들 악화될 것이다.

  숭고한 이상에 거역한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의 완성이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범위.

  역설적이게도 선택지가 없던 우리에게 있어

  할 수 있는 말이란, 그게 전부였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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