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시티아_제르카시

카테고리

자작 팬픽 (31)
역내청 (31)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5.6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공지사항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밝은 거리에서 히키가야 유미코는 겉돌고 있다.



  이튿날 아침 봉사부 회의가 소집되었다. 

  장소는 지난밤 만났던 자판기 코너. 조식이 시작되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있어 1층에 내려오는 학생이 없다는 이유였다. 아침준비로 분주한 틈을 타 남몰래 빠져나올 수 있다는 부가적인 효과도 있었다.

 

  무리를 해서까지 서두르는 까닭은,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반이 다른 유키노로서는 개입할 기회가 없었고 타이밍이 맞았을 때는 히라츠카 선생님께 걸려버렸다. 라인을 통한 접촉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다. 의사소통에 제한이 걸리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유이가 가장 요주의인 인물과 같은방을 쓴다는 게 문제다.

 

  무언가를 꾸민다는 걸 들켜버린다면, 어느 쪽이든 큰일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이제부터 가게 될 곳을 생각한다면, 그 전에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방침을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한 번 더 확인할게. 토베 군과 에비나 양을 하치만이 생각해둔 포인트로 유도, 거리를 유지한 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동행하며, 변수가 발생할 경우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것. 이 정도로 되겠니?”

  “어. 그래주면 고맙겠어.”

 

  솔직히 그 이상은 뭘 더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눈에 띄지 않던 내가 괜히 참견해봐야 역효과겠지. 계획을 세우고 점검하는 일이야말로 적성에 맞는다. 남은 건 어떤 유도책을 사용하느냐인데.

 

  “그걸루 될까?”

  

  봉사부의 최종병기, 만능 커뮤니케이터 가하마 씨께서는 어쩐지 낮은 신음을 끙끙 흘리고 계셨다.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은데······.”

  “불안한 건 이해해. 그래도 이건 연애 문제니까, 결국 당사자들에게 달린 문제잖아? 제삼자인 우리가 나서기에는 위험부담이 커. 자칫하면 에비나 양이 눈치챌 지도 모르고. 안타깝지만 여기서는······.”

  “토베 군에게 맡기는 게 최선일 거야.”

 

  뜸을 들인 틈을 놓치지 않고 유키노가 말을 받았다. 확신이 가득한 어조였지만 유이는 안심이 되지 않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토베도 생각이 있으면 섣부른 짓은 안 하겠지.”

  “그래. 봉사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립을 보조하는 거니까. 그건 우리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현 시점에서 생각해야할 과제는 어떻게 그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떼어놓느냐겠지.”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달리 믿을 사람이 없어서······. 부탁할게. 누나랑 하야마를 어떻게든 데려와줬으면 해.”

  “으응······, 그거야 뭐, 할 수 있겠는데······.

 

  한쪽으로 꺾인 당고머리가 반대편으로 젖혀지기를 수차례, 새초름한 눈초리가 이쪽을 응시한다.

 

  “힛키가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나? 뭐가?”

  “으으응, 아니. 암것두 아냐~.”

 

  알 수 없는 소리를 남기고는 소파에 앉은채 상체를 폈다. 내 어깨 뒤 계단이 위치한 방향을 훑어보던 유이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손바닥을 쳤다.

 

  “아참, 근데 그럼 유키농네 조원들에게두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리끼리만 정해두 괜찮아?”

 

  느슨하긴 해도 엄연히 단체활동, 갈등이 생기기 쉬운 여행지 선택을 독단적으로 정해도 되느냐는 물음이다. 집단의 안정을 추구하는 유이다운 발언이었다. 유키노는 부드럽게 웃으며 빠뜨린 설명을 보충했다.

 

  “문제 없어. 오늘의 행선지에 관해서 전권을 위임 받았거든. 어디를 가든 뒤따라갈테니, 느긋한 시간 보내라고 격려해 주더구나.”

  “어? 그건 즉······.”

  “그래. 가이드를 부탁받았단다.”

 

  가이드는 좀 아닌 것 같은데······. 하긴, 관광지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풀어놓은 뒤 어물쩍 사라졌다 돌아갈때 쯤 나타나는 건 비슷한가? 어찌나 배려심이 깊은지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다.

 

  “느긋하게라니 좀 그런데? 이쪽은 일하는 중인데 말이야.”

  “어쩔 수 없잖니. 의뢰 내용에 대해서 발설할 수는 없었는걸.”

  “그야 그렇지만, 유키노네 급우들에게 오해를 산 것 같아 껄끄러워서.”

  “후후,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라? 유키노가 어쩐지, 굉장히 귀엽고도 가슴 철렁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덧붙이자면, 오늘 우리 반의 절반 이상이 동행하기로 했어.”

  “뭐, 뭐라고?!”

  “안심해. 아는 체는 하지 않을 거야. 어디까지나 J반 차원에서의 단체행동이라고 입을 맞출 거니까.”

 

  기차 내에서 만난 얼굴들이 스쳐지나간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질문공세를 퍼붓던 소녀들. 그 소악마들이 우리를 따라온다고?

 

  “자, 잠깐 기다려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눈에 띄는게 아닐까?”

  “오히려 좋지 않겠니? 수학여행 중에 동선이 겹치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야. 같은 소부고 학생들이 주변에 보일수록 위화감도 옅어질 거라 보는데?”

  “그, 그건······.”

 

  분하지만 일리가 있다. 오전 중에 들러야할 포인트는 분명 유명 관광지지만 10대 학생의 비율은 적은 곳이다. 수학여행 중에 들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한 장소, 그러나 J반 학생들이 함께해 준다면 구실을 만들기 쉽다. 유키노의 노림수는 이것이겠지.

 

  “우리쪽에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는게 내 의견이야. 유이가하마 양, 당신은 어떠니?”

  “엇, 나, 나?!”

  “그래. 그들을 데려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똑같이 입을 벌린채 멍해있던 유이도 화들짝 놀라며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유이가하마 양은 탐탁치 않은 모양이구나.”

  “아니아니, 충분해!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근데 말야, 유키농.”

 

  말을 끊고 힐끔, 이쪽을 곁눈질한다. 그 동작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얼 도와줬으면 하는지 깨닫는다.

 

  “이제와서랄까, 조금 새삼스럽긴 한데······.”

  “부담 가지기 말고 말해 주렴. 나와 유이가하마 양 사이잖니.”

  “······응. 고마워.”

 

  유키노는 알고 있을까? 

  자각없이 내뱉은 티끌없는 격려가, 이후의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지어 버렸다는 것을.

 

  “있지. 이제 슬슬,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해.”

  “······.”

 

  경청하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유키노. 입술은 떨어지지 않고, 갈곳 잃은 눈동자만이 방금 들은 말을 해석하려 움직인다. 

 

  순간이 일생처럼 느리고 지척에 있는 그녀가 밤하늘의 달처럼 멀어, 이대로 영영 닿지 못한 채 비껴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나뿐만 아닌, 하치만도 함께야.”

 

  그 거리에 매듭을 묶듯, 유키노는 떨리는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유이가하마 양과 나, 하치만은 동등한 관계잖니. 우리 세 사람에게는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가 존재해. 같은 부활동을 하는 동료만이 아닌 등을 맞길 수 있는 친구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일지언정 수줍게 물든 뺨은 가리지 않는다. 꼿꼿이 얼굴은 든 유키노는 언제나와 같이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먼저 말을 꺼내줘서 고마워. 정말로 기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당신에게도 내가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나는 이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고 싶어.”

 

  우리는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풉. 푸하하하! 너무 귀엽잖아 유키농~.”

  “그치? 귀엽지? 누구 사촌인데~.”

  “무, 무슨······!”

 

    갈피를 잡지 못 하는 유키노를 보자 더욱 참을 수 없다. 어떻게 웃지 않는단 말인가. 꾸밈없는 올곧음은 더없이 한결같아 그 진실됨이 감탄하고 만다.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을 보여주는 너에게, 언제나 그랬듯 다시금 반한 내가 있다.

 

  좀 봐 줘, 유키노. 얼마나 나를 흔들어야 성이 풀리는 거야?

 

  “내가 말했지? 유이유이가 말하면 단칼이라고.”

  “에이, 그거랑 이건 다르지. 나는 있는 그대루 말했다 뭐.”

  “세세한 건 넘어가.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는 건 사실이잖아.”

  “그건 그래. 힛키 말대루야. 역시 유키농에 대한 건 제일 잘 알아.”

 

 소꿉친구란 이름은 폼이 아니니까 말이지. 몇 년을 봐왔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다. 유키농 검정이 있다면 출제위원을 맡는것도 가능한 수준일걸?

 

  “······설명을 요구해도 될까?”

 

 그러니 지금은 장난을 쳐서는 안 되겠지.

 권위자로써 난이도를 매긴다면 최하다. 낮게 내려깐 저음은 누가 들어도 심통이 난 목소리니까. 대화에서 소외되어 따돌려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완고한 모습조차 사랑스럽지만, 좌우지간 지금은 진지하게 임해야 할 때였다.

 

  “걱정할 필요없어.”

 

  시선을 맞추고 말한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마치 어제는 비가 내렸어 따위의 사소한 잡담을 건네는 어조로.

 

  “이쪽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거든.”

  “끝내다니, 무엇을?”
  “유키노가 했던 말 그대로. 사실, 우리도 기다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설마.”

 

  내 사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라움이 가득한 그 웅덩이에는 서서히 차오르는 기쁨만이 가득해, 멋대로 앞선나간 행위에의 배신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치, 유이?”

  “응. 에헤헤, 나는 힛키라는 별명이 입에 맞지만 말야. 그래서, 유키농도 그대로 부르고 싶은데······.”

  

  힐끗거리는 시선이 오래된 추억을 상기시켰다. 지난 봄 부실을 방문했을 무렵의, ‘누나의 친구’로 다시 만났던 유이가하마를. 주위에 맞추는 버릇을 고치라고 일갈했던 유키노시타를 말이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도망치려 했던 모습은 이제 없다. 차가운 달빛에 벼려지고 따뜻한 햇살 아래 담금질된 소녀는 눈부신 성장을 보여주었다. 모나지도 엇나가지도 않은채 한결같은 호의를 전해준다.

 

  지나온 과거와의 재회이자 선택할 수 있었던 현재, 나와 유키노에게 유이가하마 유이는 그렇게 비춰졌다. 익숙하지 않은 거리감에 당황하면서도 밀어내지 못 했고, 때로는 한 번 포기해버린 미래를 꿈꾸기도 하면서. 우리들은 털어놓을 수 없는 기억을 투영해 왔다. 

 

  서서히, ‘친구’로서 동화된 것이다.

 

  “그렇게 하렴.”

 

  사람은 이기적이다. 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면서도,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지 못 한다. 관심도 없을뿐더러 두려워하기까지 해, 주어야 할 때 주지 못하고 후회한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니 상처받을 일도 없을 거라 되뇌이면서.

 

  “저, 정말로? 정말, 그래도 돼?”

  “물론이야. 나는 허언은 하지 않아. 그건 당신······ 유이도 잘 아는 사실이잖니?”

  “유키농!”

 

  궤변이지.

  외톨이이기에 떳떳한 게 아니라, 외톨이이기에 잘못을 지적해줄 사람이 없는 것 뿐이니까.

  비판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몸을 숨긴다. 이기적인 사람만이 타인을 배려하는 척 가면을 쓴다.

 

  둘이 되고, 셋이 되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면.

  느릴지언정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도 알지 못 한채.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작렬하는 태양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여름은 끝났다.

  쓰라린 교훈도 소중한 인연도, 서늘함 속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xxx

 

  둘째 날은 그룹별 행동이 진행된다. 교사가 동행하는 단체관광과는 달리 정해진 조와 함께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부푼 기대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 학생들이 속출, 밤늦게까지 소란스럽던 복도는 부스스한 머리의 꼬맹이들이 가득 채웠다.

 

  다만 야근에 찌든 부모님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젊은 피가 피로를 몰아준 덕분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밝은 얼굴로 뛰어다닌다. 왁자지껄한 단체식당은 행선지를 향한 정보가 날아다녔고 세면장은 샴푸 cf를 방불케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초등학생이냐고. 다들 너무 흥분했잖아.

 

  그 틈바구니 속에서 스텔스 힛키를 발동. 후딱후딱 준비를 끝마치고, 친구들과 합류해 1층으로 내려온 것이 지금에 이른다.

 

  “아직은 한산하네.”

  “모두가 준비되야 출발할 수 있을 테니까.”

  “저쪽에서 기다리자구.”

 

  회담 장소로 썼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사키와 사이카에게 양해를 구한 뒤 상황을 살피자, 잠시 뒤 예정대로 J반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안면이 익은 여학생이 이쪽을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

 

  “히키가야 씨, 빨려 나오셨네요?”

  “이 정도는 보통이죠.”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대답을 들은 소녀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입을 가리는데······?

 

  “그렇구나. 보통이시구나~.”

  “히키가야 씨도 참, 솔직하시다니까.”

  “오늘 하루, 두분 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네? 저기, 잠깐······.”

 

  붙잡을 새도 없이 몸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 장소로 이동한다. 무리에 합류한 뒤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는 모습은 거대한 물고기떼 연상케 했다. 거대한 단일개체가 짓는 능글맞은 미소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설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눈치챈 건가?

  유키노가 의뢰 내용을 발설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협력자를 포섭한 이상 일정 부분의 정보 공유는 불가피하다. 대략적인 스케줄과 함께 하야마 그룹과 동행한다는 사실도 전달되었을 터. 남녀 한 쌍을 특정 장소로 데려가는 일을 연애에 민감한 여고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했다. 

 

  하는 수 없군. 나중에 따로 주의를 주는 수밖에.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 정중히 부탁한다면 알아줄 것이다.

 

  “누구야? 아는 사람?”

  “그 정도는 아니고. 유키노네 조원들이야.”

  “아하.”

 

  그것보다도 즐거운 시간은 뭐야? 두분이면 나랑 유키노를 말하는 거 맞지? 그야 물론 유키노와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지만, 오늘은 동행인이 많다구.

 

  응? 잠깐,

  ······동행인?

 

  “아차, 그러고보니 깜빡하고 있었네. 오늘 어디로 갈지에 대해, 사키랑 사이카에게는 말해주지 않았지.”

  “응. 물어볼까 했는데 하치만이 너무 바쁜 것 같아서.”

  “언제 말해주나 기다리고 있었지. 참 빨리도 알아차린다.”

  “미안미안.”

  

  면목이 없네. 이 두 사람에게 가장 먼저 말했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의뢰 수행에 말려들게 하고, 거짓을 섞은 걸로 모자라 잠시 잊어버리기까지. 이래저래 업보가 쌓여가는구나.

 

  “괜찮아. 오늘도 다른 조랑 동행하는 거지? 우리 걱정은 말고 하치만이 가고 싶은데로 해.”

  “나야 뭐 여행에 대해 문외한이고, 이런 건 핫 짱이 더 잘 알겠지.”

  “고마워.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어디로 갈지 설명할게.”

 

  오늘의 목적지는 두 곳.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군데씩 들르게 되며, 그 가운데 최소 반나절 동안은 J반 학생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전달했다. 상황을 보아 유키노가 합류할 것이며 사실상 같은 조처럼 움직인다는 것도 함께.

 

  첫 번째 목적지에 대해 설명할 때 묵묵히 듣고 있던 사키가 제동을 걸었다.

 

  “쿠라마 산을 오른다고? 힘들지 않겠어? 이틀 연속으로 등산이라니, 유키 짱이 무리하는 것 같은데.”

  

  동감이야, 사 짱.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도 살짝 걷는 코스인데, 체력이 없는 유키노는 두 말할 것도 없겠지. 매력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마지막까지 고민했었다. 덕분에 나조차도 찜찜한 구실을 몇 가지 준비할 수 있었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나름의 장점도 있어. 초입까지는 전철로 이동할 수 있는 점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등산로가 낮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편하다는 모양이야. 어차피 정상까지 가기 전 키부네 신사 쪽으로 빠질 거라 그리 오래 걸을 일도 없을 거고.

  “그래? 어느 정도 걸리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여행기에 따르면 사진 찍으며 느긋하게 돌아다녀도 두 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댔어. 거기에 생각해 봐. 지금 막 단풍철이니 경치도 끝내주겠지? 우거진 단풍 사이로 교토를 내려다보면 분명 이나리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멋진 풍경이 나올거라고. 높은 곳일수록 관광객도 적을 테니 오히려 유키노에게 딱 맞는 여행지가 아닐까?”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완벽한 논리였다. 어째 거래처 앞에서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비지니스맨이 된 것 같군. 안 돼. 점점 아빠의 테크를 타고 있잖아? 정녕 사축의 늪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건가?

 

  “일리 있네. 확실히 유키노는 좋아하겠어. 그래, 좋아는 하겠는데······.”

  “응? 뭔가 문제 있어?”

  “문제라고 할까, 토츠카는 알지?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

  “으응, 아마 나와 같다고 생각해.”

 

  쓴웃음을 짓는 사이카가 고개를 돌리던 그 때, 날카로운 공격이 파고들었다.

 

  “그거 말야, ‘핫 짱이 가고싶은 곳’이 아니라, ‘유키 짱이 좋아할 곳’ 이잖아.”

  “윽?! 아, 아니야! 그냥 우연히 겹쳤을 뿐이고, 유키노가 좋은 곳은 나도 좋으니까······.

  “가고 싶은데로 고르랬더니 데이트 코스를 정해놨네, 아아~. 그래서 아까, 유키 짱네 조원들이 그런 말을 한 거구나.”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결론을 내린 사 짱이 흠흠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로비를 둘러보며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인영을 하나하나 시야에 넣었다.

 

  “과연, J반이 모인 것도 그 때문이었군. ······다행이네. 유키 짱, 사랑받고 있구나.”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따뜻한 눈빛이었다. 누군가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대개 험악한 분위기가 뒤따랐으니까. 책속에 적힌 글귀는 정체되어 있었고 얄팍한 지식은 도움이 되지 못 했다. 캄캄한 어둠이 늪처럼 조여왔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우리를 끌어당겨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게 해준 것이 사키였다. 사람 사귀는 게 서툰 건 마찬가지였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우리와 달랐던 친구.

 

   불의에 맞설 수 있을만큼 상냥했고,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만큼 용감했다. 목을 긁으며 으르렁대 우리가 받을 적의를 되받아쳐주었다. 그림자들 사이에 안전지대를 만들어 줬다. 

 

  “응. 다들 괜찮은 사람들이더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얘는. 나는 유키 짱 걱정은 안 해. 문제를 일으키는 건 항상 핫 짱이지.”
  “그도 그렇네.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걱정해주라.”

  “아니, 거기서 긍정하면 안 되지. 언제나 삐딱하게 굴던 심보는 어디 갔어?”

  기가 막힌 듯 혀를 찬 소리가,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웃음소리가 되었다. 그런 나와 사키를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던 사이카가 이윽고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흠흠, 두 사람 다 이제 진정해..”

  “그래야겠네. 마지막 손님들도 도착한 것 같으니.”

 

  통로 쪽에 소란이 일고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야마와 토베, 누나와 에비나 양. 남남여여 네 사람을 선두로한 행렬의 끝에는 의외의 조합이 눈에 띄였다.

 

  반듯하게 빗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유키노와, 그런 유키노가 사랑스럽다는 듯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유이. 한눈에 봐도 명백히 평소보다 가까워진 거리였다.

 

  “유이가하마, 뭔가 엄청 신나 보인다만.”

  “뭐, 뭐어. 유키노시타 양은 다른 반이니까, 어색하지 않도록 풀어주는 게 아닐까?”

 

  아니야. 틀렸어, 사이카. 저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게 맞아. 유키노랑 호칭을 변경한 것 때문에 평소 이상으로 텐션이 올라간 게 분명해. 

 

  “······괜찮으려나?”

 

  그러게. 아니, 좋은 게 좋은 거지만 말이야. 유키노와 친하게 지내주는 건 더할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다. 토베와 에비나 양을 무사히 데려온 걸로 보아 내가 알려준 구실도 잘 먹힌 모양이고. 방금 전 내가 둘러댔던 핑계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내용이었으니, 사키가 설득당한 시점에서 저쪽의 성공률도 높다고는 생각했었다.

 

  “왜 그래, 핫 짱? 질투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는 그저 조금만 더 남들 눈을 신경 써줬음 싶음 것 뿐이라고.”

  “아니 그건 이쪽이······. 됐다, 말을 말래.”
  

  신음을 흘리며 눈을 흘기더니 한숨을 내쉰다. 끊긴 뒷말이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보지는 말자. 뭔지는 몰라도 맞는 것보단 나을 테니.

 

  “그나저나,”

 

  합류하러 가는 길에, 사 짱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

 

  담담히 바라본 시선이 기념품 가게를 가리킨 채 고개를 돌린 유미코와, 그 뒤를 따라가는 유키노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 될 건 없지.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유이와는 친구, 누나와는 사촌 관계다. 뿐만 아니라 문화제 시기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은 경험도 있다. 당시 F반의 연극이 무사히 상영된 데에는 유키노의 힘이 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귀빈 대접까지는 아니어도 호의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

 

  물론, 내 친구의 질문이 어떤 의도였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잘 알기에, 지금은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도, 사키에게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도.

  여하간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xxx

 

  출발시간이 늦어진 게 오히려 호조였을까. 직접 타 본 교토 시민의 발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한산했다. 버스는 지난밤 히라츠카 선생님과 택시로 이동했던 길을 그대로 달려 타카라가이케 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정말로 카오리와 만났다는 말이니?”

  “응! 아마두 유키농네랑 아슬아슬하게 엇갈린 것 같아. 입장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출구 쪽에서 나오더라구! ”

 

  개찰구에서 표를 사 나오는데 먼저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의 표정이 어둡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키노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 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그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눈 앞에서 놓쳐버리고 말았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는 유키노를 유이가 달랜다.

 

  “유키농의 잘못이 아니야. 우리두 운이 좋아서 발견하게 된 거구.”

  “그렇겠지. 그래도 카 짱, 만나고 싶었는데······.”

 

  아쉬울 만도 하지. 오리모토 카오리는 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중에서도 나와 유키노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였으니까.

 

  어쩔 줄 몰라하는 유이가 구조를 요청했다. 유키노의 손을 꼬옥 쥐고, 찌릿찌릿 눈빛을 전파삼아 장문의 메세지를 보내온다. 할 수 없네. 장소가 좀 걸리긴 해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되는 거겠지.

 

  “유키노, 기운내.”

  “하치만······.”

  “전화번호도 받아놨으니 유키노에게도 알려줄게. 치바에 가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돌아가면 바로 약속을 잡을 테니까.”

 

  살며시 놓아준 유이에게서 유키노를 건네받아, 비어있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의 수학여행을 즐기자구. 어때?”

 

  전화를 해볼까도 싶었지만 카이힌 고등학교가 오늘을 쉬는지 확실치 않다. 카오리도 하루쯤 피로를 풀 시간이 필요할 테지. 기쁜 얼굴로 재회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좋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유키노 또한 굳세게 아쉬움을 눌러삼켰다. 표정을 가다듬고, 언제나와 같은 당당한 눈빛을 던져온다.

 

  “단지, 즐기는 것만으로는 안 돼. 할 일은 제대로 할 것, 알고 있지?”

  “물론이지.”

  “그래.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아졌을지도 모르겠구나.”

 

  응. 역시 이해하고 있어. 역시 내 사촌.

  흠흠 고개를 끄덕이던 유키노가 문득 감싸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눈썹이 일순 가늘게 휘었다.

  어라?

 

  “왜 그래?”

  “아니, 좀······.”

  왠일인지 분명히 말을 하지 않고 얼버무린다. 입을 꾹 다물고 깍지 낀 손가락만을 내려본 채. 이런 적은 거의 없는데······.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우악스런 손길이 등을 팍 쳤다.

 

  “아파?! 무슨 짓이야!”

  “그쯤 해라. 아침으로 먹은 빵이 소화되기도 전에 올라오겠어.”

  “내가 뭘 어쨌다고!”

  “잘못을 모른다는 게 더 열받아.”

 

  한 대 더 맞았다. 사 짱 진짜 나빠. 왜 나만 때리는 건데? 그야 유키노에게 그랬더라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맞서 싸웠겠지만.

 

  “그,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사키 짱?”

  “맞아. 다른 사람들도 이동한 것 같고, 우리도 슬슬 들어가야 해.”

 

 그러고보니 하야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개찰구 너머 저멀리에 몇 명의 J반 학생들이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다. 이런, 열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

 

  “서두르자.”
  

  전광판에 새겨진 숫자에 쫓겨 우리는 개찰구를 통과했다. 승강장에 들어섰을 무렵 선로를 타고 흘러드는 굉음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그 속에서 이쪽을 또렷이 응시하는 유미코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벌리고 있던 입이 질끈 닫히고, 이윽고 머리카락이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전철에 타는 누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쫓았다.

 

  “힛키, 우리도 가야지!”

  “엇, 그, 그래!”

  

  한 칸 떨어진 문으로 들어서 문가 옆자리에 앉았다. 전과 비슷하게 유이가 중심이 되어 하야마네와 우리가 양 옆에 자리한 구도다. 끄트머리에 앉은 누나를 시작으로 에비나 양과 하야마, 토베네가 줄지어 앉았고 이쪽은 유키노와 나, 사키와 사이카 순으로 위치해 있다. 맞은편과 주위엔 J반 학생들로 채워져 얼추 수학여행의 분위기를 갖춰져 있었다.

 

  “근데 넌 이쪽에 있어도 되냐?”

 

  누나를 곁눈질하며 물어보자 유이도 목소리를 낮춰 응수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일단은 같이 앉아 있구, 또 사키 짱두 여기 있으니까.”

 

  요컨대 전담마크란 건가. 같은 조원이라곤 해도 원래부터 친구였던 세 명과 달리 사 짱은 아무래도 어색함이 있을 테니까. 붕 뜨지 않게 챙겨주려면 지금같은 상황에선 유이가 제격이긴 하다. 

 

  흠흠 고개를 끄덕이는데 별안간 가운데 앉아있던 유키노가 내 옷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왜?”
  “하치만, 저기 봐봐.”

 

  진지한 눈빛으로 출입구 위에 붙어 있는 전철 노선도를 가리킨다.

 

  “여기, 타카라가이케구나.”

  

  역명을 기억하려는듯 또박또박 중얼거린 유키노가 말을 이었다.

 

  “에이잔 전철은 이 역을 기점으로 두 개의 노선으로 갈라지는 거네.”

  “맞아. 우리가 가야할 곳은 쿠라마 선. 빨간색 라인을 따라가면 돼.”

  “빨간색이란 말이지?”

 

  종착역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려는지 팔을 드는 유키노. 소매에서 뻗어나온 손이 차내에 부착된 그림을 가리키다, 멈췄다.

  

  “다음 역이······, 하치만마에(八幡前)?”

  

  ······뭐, 예상은 했지만.

 

  “본선을 따라 갔어도 미야케하치만(三宅八幡) 역이구나. 후후, 어디를 선택해도 하치만이야.”

  “유, 유키노?”

  심상치 않다. 조용히 입을 가리지만 얼마 못 가 새어나오는 웃음소리. 쿡쿡 즐겁게 미소지은 유키노가 허공에 뻗은 손을 거둬들였다. 품이 아닌 내 얼굴 위로.

 

  한쪽 뺨을 부여잡아 가볍게 돌려, 정면으로 마주본다.

 

  “말 그대로구나. 나는 지금, 하치만의 앞(八幡の前하치만노마에)에 있어.”

 

  ······우와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응, 그렇지.

  ······사 짱이 했던 말, 이젠 좀 알 것 같기도.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유키노!

 

  사위가 침묵했다. 이제는 익숙해졌을 유이조차도, 충격에 물든 동공이 쌀알처럼 작아져 있다. 옆과 뒤는 볼 필요도 없겠지만, 얼어붙은 정적에도 아랑곳없이 유키노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 맞춰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럼 난······.”

  뺨을 문지르는 조그마한 손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살며시 머리 위로 가져온다.

 

  “유키(짱)의 아래(雪の下유키노시타).”

 

  돌아오는 건 잠깐의 고요.

  잠깐 뒤에 터져나오는 소리없는 아우성.

  유이나 사 짱, 혹은 사이카조차 무어라 말한 느낌이 들지만 들리지 않는다.

  내리꽂히는 시선이 희미해짐과 동시에 의식이 붕 떠, 오로지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후후. 뭐니 그게? 어설픈 말장난이구나. 당연하지만.”

  

  정말로 그 말대로다.

  이유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정말로 당연한 일이니까.

 

  xxx

 

  그런 의미(?)에서 장난은 여기까지. 비교적, 아니 100% 정도는 진심이었지만 말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본 목적을 잊지도, 잊을 생각도 없으니까. 일 하자. 이것 참 의욕이 팍팍 떨어지는 울림이로고.

 

  선로는 깜깜한 터널을 지나 골짜기 사이로 진입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풍경도 변했지만 그것은 울창한 수목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와······.”
  “심한데.”

  “엉망진창이구나.”

 

  2년 전 전국을 강타한 태풍이 남기고 간 상흔은 여전히 깊어, 사방 천지의 잡목 중 성한 나무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여기만이면 몰라도 전 일본이 요 모양이잖냐. 수 년 내에 수습하는 건 어려울 거야.”

  “어쩌면 일부러 수습하지 않는 걸지도. 이렇게 많은 나무 하나하나를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잖니. 어쩌면 자연 그대로 놔두는게 정답일지도 모르지. 앞으로 십여 년은 쭈욱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이런 때에도 분석을 하다니 역시 유키노답다. 

  그 때 아리송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유이가 손을 들었다.

 

  “엇, 그럼 치바 마을은? 8월에 갔을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당연하잖아. 치바는 무적이니까.”

  “그런 이유로?!”

  “그보다 치바 마을은 군마현에 있었는데······.”

  “농담은 그만 두렴, 하치만. 정말, 짓궂다니까.”

 

  두 번째로 말하는 거지만 비교적, 아니 100% 정도는 진심이다.

 

  “아마 산맥 사이에 끼여있던 덕분에 영향을 덜 받은 걸 거야. 캠핑장이니만큼 재난 상황에서의 메뉴얼도 갖춰져 있을 테고. 그렇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부분 뿐, 조금만 길을 벗어나면 여기랑 다를 것도 없었단다.”

  “에? 유키농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 그건······.”

 

  예리한 가하마 씨의 일격에 당황하는 유키노는, 얼른 받아채지 못한채 자꾸만 이쪽을 바라보며 시간을 끌었다.

  길을 잃어버렸다고 솔직히 말하자니 걱정을 끼치게 되고, 핑계를 대며 물러나자니 오래된 성격이 발목을 잡는다. 실언은 할지언정 허언은 내뱉지 않는 내 사촌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태. 그야말로 진퇴양난.

  

  “아, 그거? 별 거 아냐. 담력시험 코스를 점검하러 돌아다니다 만났는데, 그 때 유키노가 샛길을 발견했거든.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는게 아무래도 버려진 등산로 같더라고. 폐쇄작업을 거들어 줬어.”

  “앗, 글쿠나! 둘 다 고생 많았네~.”

 

  유키노를 발견한 곳은 폐쇄된 금줄 너머였고 그 뒤 곧장 헤어졌다. 내가 막은 곳은 샛길이 아니라 예정되었던 올바른 길이다. 거짓투성이 증언이었지만 당시 그 곳에 있었던 사람은 우리 둘 뿐, 의구심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아, 한 명 있군. 우리 고집쟁이 아가씨 말이지.

 

  “고생은. 나는 그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인걸. 직접 걸어다니며 샛길을 찾아낸 건 유키노였어. 그렇지?”
  “그건, 맞지만······.”

  

  무릎 위에서 움켜쥔 손에 힘을 주더니, 악력이 모자라다 싶었는지 이번엔 손톱을 세워 콕콕 찌른다. 한탄과 원망, 한 방 먹었다는 분함을 한가득 담은 눈을 치켜떠, 아래쪽에서 지그시 노려보았다.

 

  후후, 어때? 거짓이 섞인 진실도 제법 쓸만한 구석이 있지?

 

  그 때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던 하야마가 불쑥 중얼거렸다.

 

  “치바마을, 인가.”

  

  초목의 흔적이 터널처럼 드리운 그늘 속에 그 음성은 또렷이 울려퍼졌다.

  그러자 마치 자다 깬듯 갈라진 목소리로 토베가 외쳤다.

 

  “엇, 글치! 그러고보니 전에도 산에 간 적이 있었구나. 이야~, 시간 참 빠르네. 벌써 두 달이나 지나부렸어~.”

  “나도 기억나. 그 때는 참 더웠지~. 지금은 아침저녁은 제법 쌀쌀하지만!”

 

  에비나 양이 호응하자 토베의 입은 귀에 걸렸고, 오오오카와 야마토처럼 사정을 모르는 멤버들도 호기심을 보였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우리의 의뢰인. 그 옆에서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에비나 양이 뭔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 그 때 유미코가 쓰고 있던 밀짚 모자, 그거 참 잘 어울렸는데 말이야~.”

  “어?”

  “그 왜, 전날에 쇼핑가서 산 물건 있잖아?”

  가슴 앞에 든 두 손을 크기를 묘사하려는 것처럼 넓게 벌렸다.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신난 듯 말을 이어나가지만, 걸쳐진 안경 사이로 한순간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아아, 그거?”
  “응. 평소랑은 스타일이 달라서,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어.”
  “별 건 아냐. 그냥······, 분위기 좀 내보려고 한 거지.”

 

  머리카락 한줌을 꼬아 뱅뱅 돌리던 누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모로 보나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가 없는 모습에 에비나 양도 멋쩍은듯 입맛을 다셨다.

  

  따분한 듯 보이기도 했고, 이틀 연속 이어진 등산에 진절머리가 난 듯 비춰지기도 했다. 어쩌면 단순히 심심해서 였는지도 모르지만 어느쪽이 됐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왕의 기분은 아랫방향으로 스며들기 마련이다.

 

  티를 내지 않는건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쌓아온 눈치 덕분이겠지. 평소보다는 조금 목소리를 낮춘 토베는 소재를 짜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거리가 있는데다 누나가 앉은 곳이 끄트머리인 덕에 여기서 봤을 때는 얼핏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사키는 그렇다치고 사이카조차도 아무런 위화감을 못 느끼고 있었으니까.

 

  한쪽은 가라앉고, 한쪽은 상승한다. 이질적인 두 그룹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본질과 다른 형태를 취했다.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깨져버릴 듯 아슬아슬 한 균형 속에, 작은 산골마을에 접어든 전철이 종착지를 알렸다.

  

 

  xxx

 

  쿠라마 산의 초입은 역으로부터 시작된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인상깊은 텐구상을 지난 뒤 작은 상점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출발점에 다다른다. 이끼 묻은 돌계단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줄지어 선 등불들이 붉은색 실처럼 길을 구분짓는다.

 

  “설마하니 입장료를 받을 줄은 몰랐는걸.”

  “뭐, 명소니까 말이지.”

 

  명승지의 이름값도 있지만, 이 근방은 예로부터 교토 귀족들의 유서깊은 피서지였다. 지금 걷고 있는 발판도 수없이 많은 발자취를 아로새긴 반석이겠지. 틈새에 깃든 옛날 이야기들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발이 편하다는 사실만이 마음에 들 따름이다.

 

  구경에 심취하면서도 J반 아이들은 본분을 잊지 않았다.앞장서서 걷는 하야마 그룹의 주위로 자연스레 거리를 벌리며 포진한다. 그 틈바구니에 섞여 나와 유키노도 각자의 조원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불상과 분사, 비석들을 지나치자 풍경이 일변했다.

  쿠라마가 자랑하는 첫 번째 장소, 유키由岐 신사의 3그루 거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핫 짱, 여긴 뭐야?”
  “유키 신사.”
  “······설마, 아니지?”

  “절대 아냐, 안심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목적지를 고를 리 없잖아. 내게 있어 유키 짱은 하나뿐인걸.

  그보다 방금 구체적인 언급은 하나도 없었는데도 사 짱이랑 말이 통했지? 그건 좀 기분 좋네.

 

  “히야~.”

  “엄청 커~.”

 

  하나하나  남자 고교생 3명이 팔을 이어도 끌어안을 수 없는 둘레였다. 어느 것 하나 모자람없이 수직으로 뻗은 기둥이 만들어내는 응달, 초가지붕처럼 엮여진 단풍잎과 오랜 기억을 간직한 산들바람이 옛 도시의 정취를 재현한다. 

 

  “하야토 군! 사진 한 번 찍고 가자!”

  “그럴까? 어디, 통행에 방해가 안 되려면 이쪽이 좋겠군.”
  “허어, 나무가 너무 커서 카메라에 안 들어오는데? 다같이 찍을 수 있으려나?”
  “정 안 되면 몇 명씩 나눠 찍지 뭐.”

 

  정말이지 리얼충들이란 금방 소란을 피워댄다니까. 모처럼 정갈한 장소에 왔으니 조금 더 분위기를 즐겨주면 좋으련만. 신역이 번화가처럼 시끄러워져 버렸다.

 

  하기사, 저런 것도 본인들 나름의 즐기는 방식이라면 간섭할 권리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조용히 묻혀가는 것 외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니까. 본질은 단순하다. 수년간 익은 버릇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니, 다들 그렇게 타협하며 사는 것이겠지.

 

  그건 제쳐두고, 우리 의뢰인은 뭘 하고 있으려나? 엇? 토베가 결심에 가득찬 눈으로 에비나 양에게 다가가는데?

 

  “에, 에비나 양! 괜찮으면 같이······.”

 

  오오! 잘한다! 조금 성급한 감이 있지만 타이밍적으로는 아주 좋아! 그래, 조금만 더 어색함을 빼고 천천히 다가가면······!


  “왔습니다!”

 

  ······뇌내꽃밭인 BL녀가 오시겠지.

  망했네.

 

  “유이도 참, 웬일로 산 같은 델 가자고 강권하더니, 이런 야릇한 명소를 알고 있었던 거네!”
  “나, 나?!”

 

  화들짝 놀란 유이가 이쪽을 돌아본다. 억울함을 피력하는 절박한 표정과 더불어, 혹여라도 저 말이 진짜냐며 진위를 촉구하는 눈빛.

  어떡해,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왜냐하면 나도 딱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거든.

 

  “우뚝 솟은 세 개의 나무, 그것은 삼라만상의 상징. 남성 여성 중성의 모든 성性향을 포괄하고, 공, 수, 역전도 허용되는 이상세계. 하지만 그 굵고 기운찬 자태는 그야말로 세계의 뿌리이기도 하지.”

 

  ······네?

 

  “그 크기를 가늠해보려 하나의 기둥을 둘러싼 셋이라, 둘러싸? 과연. 전세와 내세의 가운데에 있는 이곳 현세에서, 우리는 그저 쾌락이 이끄는 데로 끌려갈 뿐이란 건가······. 깨달음도 없이, 아니, 바로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좁고 불가사의한 진리의 문을 기운이 넘치는 튼튼한 독고저(바주라)로 오입하는 고행길! 우햐! 그 격렬함에 내 태장세계가 만다라해버려!”

 

  급진적이다 못해 파격적인 교의해석이다. 아니 파계다. 이단이다. 전국시대였으면 엔랴쿠지 절기둥에 묶여 화형당했을 거라고? 무슨 창의적인 음담패설을 하는 거야, 이 여자는!

 

  “에비나, 그만.”

  “우갹?!”

  “나 참, 또 남들에게 폐 끼 치고 있었니? 못 쓰겠네 증말.”

 

  그 한마디에 제석천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육욕이 꺼졌다. 해탈이니 열반같은 고상한 수단이 아닌,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폭력 앞에서.

 

  “너는 입다물고 있는 편이 귀엽다니까.”

 

  통통 머리를 두드린 손날을 거두어들여 손수건을 꺼냈다. 번뇌가 흘러넘치다 못해(?) 강을 이룬 얼굴을 닦아주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말리는게 늦었네.”

  “······엇? 나, 나?!”
  “그럼 너 말고 누가 있는데? 아, 잠깐, 에비나 가만 있어 봐.”

 

  뜻밖의 사과에 당황한 토베에도 아랑곳없이 꼼꼼하게 손을 놀린다. 토베 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의 시선이 쏠린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기색으로.

 

  안경을 벗은 채 얌전히 얼굴을 맡기고 있던 에비나 양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고마워. 유미코도 찍을래? 기념 사진.”

  “찍지 뭐. 여기까지 왔는데. 못 할 것도 없구.”

 

  접은 손수건을 넣고 머리를 넘긴다. 안경을 고쳐쓴 에비나 양이 어깨를 으쓱하며 발을 맞췄다. 

 

  “하야토, 찍었어?”
  “아니, 아직.”
  “그럼 좀 기다릴게.”
  “······그래.”

 

  수긍한 하야마가 카메라를 들자, 뒤쳐져 있던 토베도 헐레벌떡 합류한다. 사진 촬영이 재개되자 유미코는 휴대전화를 꺼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걸 보니 아마도 전면카메라를 거울삼아 비춰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래.”

 

  유려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에 찔러놓고, 이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유이는 어떡할래?”

  “웅? 나, 나?!”

  가하마 씨, 당황하는 건 이해하지만, 좀 더 반응의 레퍼토리를 늘려주세요. 방금 전에도 똑같이 했던 말이잖아. 토베랑 마찬가지라고.

 

  “으음, 좀만 이따 가두 돼? 아! 싫은 건 아니구! 따로 몇 장 찍구 싶어서······.”

  “얘는. 뭘 그리 허둥대니?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 거지.”
  “허, 허둥대기는! 좀만 기다려 줘! 빨리 갈 테니까!”

  “괜찮아. 어차피 하야토가 끝날 때까진 대기구, 천천히 하고 와도 돼.”

  “으, 응······.”

 

  손사래를 친 누나가 근처의 그늘로 이동했다. 밑동과 허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뒷짐을 진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숨을 내쉴때마다 움직이는 목 아래, 타고 흘러내린 금발이 새어들어온 햇빛을 반사했다.

 

  에비나 양도 뒤를 따랐다. 그늘 아래에 발을 디디다가 마지막으로 주변 경치를 둘러보려는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금새 멈췄고 숨길 생각도 없는 노골적인 눈이 이쪽을 바라보며 씰룩거린다. 잠시 뒤, 가늘어진 눈꺼풀이 차츰차츰 가늘어지더니 이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얼버무렸다.

 

  역시 알고 있었나.

 

  유치한 치킨 게임이 시작된 마냥 한동안 눈을 떼지 못 했다. 그러는 사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유이가 슬그머니 내 곁에 다가왔다.

 

  “······힛키, 내가 너무 티냈던 걸까?”

  “아니, 평범했는데.”

 

  애초에 싸운 것도 아니고, 목적지가 겹치는 정도의 우연에 까칠하게 반응할 것도 못 된다. 유이가 가고 싶어한 장소에 친구인 유키노가 동행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치만! 아, 유이가하마 양도 왔네! 우리도 같이 사진 찍자!”
  “어어······. 뭐, 너무 신경쓰지 마. 진척이 없는 건 아쉽지만, 토베에게도 기회가 있겠지.”

  “우웅, 힛키가 그렇다면야······. 지금 갈게, 사이 짱!”

 

  이상할 것도, 트집잡을 거리도 없다.

  분명 그럴 터였다.

 

  xxx

 

  빽빽한 삼림은 강한 재해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단단한 뿌리는 지면을 고정시키고 한데모인 가지는 거센 비바람을 분산시킨다. 살아남은 거목은 떳떳이 고개를 든채 하늘을 떠받쳤고 쓰러진 잔해는 게으른 아침안개에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순환하는 숲길을 붉은 단풍이 물들이는 풍경.

  그 가운데로 뻗은 정돈된 등산로를 걸어나간다.

  자연과 섞이지 않는 인간의 길에서, 우리는 쇠퇴의 계절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예쁘다~!”

  “그 말대로야. 시기를 잘 맞춰 왔어.”
  “적당히 시원하니 덥지도 않구, 돌아다니기 딱 좋아.”
  “원래는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말이지. 여름이었으면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거야.”

 

  덥고 습한 계곡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동한다라,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수학여행이 늦춰져서 참 다행이야. 모기도 없고.

 

  탁 트인 본전의 정원같은 마당을 거닐며 가을바람을 만끽했다. 속세를 떠난 것만으로 이렇게 텐션이 오르다니 외톨이 성향 어디 안 간다니까. 자연에서도 먹히는 스텔스 힛키, 나조차도 두려울 지경이로군.

  

  무시무시한 존재감 지우기를 통해 정원을 가로질렀다. 제아무리 마음을 씻어낸다 해도 근심걱정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건 현황 파악을 위해서다. 그래, 그건 좋은데, 기껏 살펴보러 왔건만 토베는 여전히 죽을 쑤고 있는 중이었다.

 

  “에, 에비······.”  

  “앗, 유미코, 거기 앉으면 안 돼! 그 난간 허술해서 위험하다구!”

  “진짜네. 고마워, 히나.”

  “괜찮아? 힘들면 좀 더 쉬었다 갈래?”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항상 붙어다니던 세 사람 중 유이가 빠져버리니 에비나 양과 누나가 떨어지질 않는다. 위험한데. 저래서야 끼어들 틈이 없잖아.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고.

 

  “뭐 하냐, 토베! 빨리 오라고!”
  “이거 봐, 진짜 종이야! 얼른 쳐보자!”

  “으, 응······.”

 

  어쩔 수 없이. 작전 변경이다. 그렇게 결심을 굳힌채 뒤돌아섰다.

  본전으로 복귀해 손짓을 해, 쪼르르 달려온 유이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니 아무래도 토베 혼자서는 역부족일 것 같아. 유이가 좀 힘을 써줬으면 하는데.”

  “웅, 완벽히 이해했어!
  

  완벽히 이해했다는 건 플래그잖아. 지금 상황에선 가장 불안한 말이라고.

 

  “유미코랑 히나를 떨어뜨려 놓음 되는거지?”

  “일단은 그래. 너무 티나게는 하지 말고.”

  “알았어. 조심할게!”

  

  고개를 끄덕인 유이가 붕붕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굉장히 자신만만한 모습이지만, 영 불안이 가시질 않는 건 어째서일까······.

 

  “어머, 인왕님이 여기 계시네.”

  “우왓, 깜짝이야.”

 

  유키노가 바로 옆에 있었다. 언제 온 거래?

 

  “후후, 너무 긴장했잖니.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면 새들도 놀라 달아나겠구나.”

  “유, 유키노?”

  “당신은 조금 진정하는 편이 좋겠어.”

 

  그, 그렇게 다가오시면 진정은 커녕 역효과입니다만?!

  좋은 향기 위험해! 가슴팍에 닿는 손가락이 아득해!

 

  “걱정 마, 핫 짱.”

 

  꿈을 꾸듯 몽환적인 목소리와 눈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조급해하면 될 일도 안 돼. 그건 충분히 알고 있지?”
  “그야, 알지만······.”

  “그렇다면 믿어 주렴. 유이는 우리들의 친구잖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적어도 이쪽보다는 나을 거란다.”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신뢰가 거기 있었다.

 

  “······나는 딱히 믿지 못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오히려 반대라고? 기요미즈데라에서의 일도 큰 도움이 됬고, 솔직히 감탄하고 있어.”

  “그럼 됐잖니. 아니면, 뭔가 다른 걱정거리라도 있는걸까?’

  “······아뇨, 없습니다.”

  “그래?”

 

  은은한 미소를 띤 유키노는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웃으렴.”

  “······네?”

  “웃으렴. 이건 명령이야.”

 

  양 손으로 뺨을 부여잡고 쭉쭉 늘려댄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얼굴을, 찌푸리지 말아 줘.”

 

  ······이런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가을을 타나? 봄을 탄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애초에 고작 계절의 변화에 이렇게까지 들뜰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환절기에 얼굴이 빨개져봤자 감기 정도고, 그 정도로 어수룩할 유키노도 아닐 터인데.

 

  ······그래도, 이런 뜨거움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마는 나는, 이미 어찌할 수도 없이 옳아버린 것이겠지.

 

  “이러면 돼?”
  “응, 완벽해.”
  “그렇게까지야. 슬슬 돌아갈까?”

  “먼저 가 있으렴. 나는 잠시 조원들에게 돌아가 볼게.”

 

  그런가. 지금의 유키노는 어디까지나 J반에 소속으로서 동행하는 거니까 그쪽도 신경써 줘야 하겠지. 의심을 피한다는 목적도 분명 있지만, 하나의 집단에 소속된 이상 동료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니까. 오빠로서도 바라마지않는 일이다.

 

  “후후, 뭐니 그 얼굴은? 누나랑 떨어지는게 불안하다는 표정이구나. ”
  “우연이네. 나도 딱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체력이라던지 붙임성이라던지 이것저것 떠오르는게 많아서, 유키노를 혼자 보내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하치만, 내가······.”

  “동생이지?”

  “누나야.”

 

  지긋이 노려보기도 잠시, 부풀린 뺨에 바람이 빠지더니 쿡쿡 웃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자. 물론 질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이런 것도 승부로 치는 거냐고. 뭐, 알았어. 그래도 정말 조심해. 오늘은 꽤나 걸어야 되니까.”

  “걱정 고마워. 당신도 조심하렴. 그럼······.”

 

  이만, 고개를 끄덕인 유키노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조원들과 합류했다.

  어디, 그럼 나도 돌아가 보실까?

 

    “오셨구만. 이 상습 꽁냥범.”

  

  딱히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돌아오자마자 이런 대접은 너무하지 않아?

  그보다 보고 있었던 거야?

 

  “알고 있었으면 말을 걸지 그랬어?”

  “됐네요. 데이트 중에 방해했다가 무슨 소릴 들으려고.”

  “안 했거든?”
  “했어. 누가봐도 확실해.”

 

  능글맞은 미소를 띄우며 비꼬기도 잠시, 표정을 굳힌 사키가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 신경도 좀 써라. 명색이 같은 조원인데, 토츠카가 얼마나 널 기다렸는지 알아?”
  “알지. 그 점에 대해선 반성하고 있어. 그래서 사이카는 지금 어디에?”
  “하아, 그게 말야······.”

 

  고개를 돌리며 질렸다는 투로 한숨을 쉰다. 반쯤 감은 시선이 맞은편으로 이어진 정원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 녀석이 데려갔어.”

  “그 녀석?”

  “······하야마. 웬일인지 혼자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라고. 말 섞기 싫어서 떨어져 있었는데, 둘이 잠시 이야기를 하더니 동행하겠다고 하더라. 거절할 명분도 없어서 보내줬어.”

  명분 문제보다는 말섞기가 싫었던 게 아닌가 하는데······. 생각으로만 삼키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말자. 또 맞기는 싫으니까. 쓸데없는 분란은 피하는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그래, 그건 분명 그 녀석도 잘 알 텐데 말이야. 하야마 쪽에서 먼저 동행을 제안했다라? 흐음, 이건 어쩌면······.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네가 방치하니까 토츠카가 심심해하는 거 아냐.”

  

  한심하다는 투로 매섭게 흘겨본다. 이것 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그렇네. 뭐 어차피 같이 움직이게 될 텐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모처럼의 여행인데 그쪽이랑 어울리는게 사이카 입장에서는 즐거울 수도 있고.”

  “웬일이래?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거 아냐?”

  “그렇다기 보단, 음······. 유이 같은 타입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려나? 사이카도 누구든지 잘 어울리는 타입이잖아?”

  “거야 그렇지만.”

 

  눈치도 빠르고, 항상 주변을 배려하고 있다. 그 마음씀씀이에 몇 번이고 의지해왔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당분간은 둘이서 다녀야겠네.”
  “그러게.”

  “우리도 움직일까? 저쪽도 대충 정리하는 모양새고.”
  “응, 가자.”

 

  느슨하게 이어진 행렬의 맨끝을 사키와 나란히 걸었다. 담벼락을 따라 걷고 공터를 지나 원초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오랜 숲속에 놓여진 새하얀 돌계단이 지기 시작한 잎사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요하고 고고한, 고즈넉한 분위기에 흠뻑 빠지며

  신기하게 드러난 뿌리길을 지나, 사라져버린 잔해에 발을 디뎠다.

 

  “심각하구만.”
  “그러게.”

 

  잘라진 나무 밑둥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그곳은 공사판을 방불케 했다. 지난 태풍에 완파되어버린 신사가 남겨놓은 건 썩어가는 울타리와 바닥석 일부, 그리고 사용될 일 없는 우물이 전부였다. 약식으로 쳐놓은 금줄로 다가가, 이제는 실체를 잃어버린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오스기 권현사大杉権現社라.”
  “삼杉나무로 유명한 곳이었나 본데, 아이러니 하구만.”

 

  허리가 부러지는 건 예사에 숫제 뿌리까지 뽑혀버린 잔해를 둘러본다. 

  본디 일본이 원산지인 이 나무는 곧고 울창하게 뻗는 성질 덕분에 사랑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화로웠고, 영원토록 푸르를 숲처럼 보였겠지. 

 

  하늘을 가려버릴 만큼 높았기에 그 아래에는 햇볕이 들지 않는 것도,

  거대한 기둥을 받치는 뿌리가 터무니없을만큼 약한 것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기대하고만 얕은 매듭에, 현재와 미래를 함께 묶어버린 것이다.

 

  못 본 척 지나치려 했던 균열은, 너무도 확실한 형태로서 과거가 되었다.

 

  “사 짱, 여기서 특촬물을 찍는다면 어떨 것 같아?"

  “갑자기? 뜬금없네.”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던 사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것 같은데? 조금 좁긴 해도 길도 험하지 않고 시야도 좋아. 근처에 계곡도 있어 다양한 구도가 가능할 것 같아."

  “아, 알겠다. 튕겨져 나간다던가 해서 화면이 전환될 때 말이지?” 

  “응. 그런 건 접근성이 좋은 편이 품이 덜 드니까. 다만 먼저 이 나무들부터 치워야겠지."

 

  발치에 놓인 잔가지를 툭툭 차며 한 곳으로 정리한다. 카메라를 놓을 위치와 촬영 구도, 그로 인해 요구될 공간을 가늠해 보듯이.

 

  “그렇네. 배경이 이래서야 몰입을 유지하기는 힘들테니."

  "잘만 이용하면 그렇지도 않지만. 캐릭터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반작용이 필요하거든. 훌륭한 액션에는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리액션도 중요한 법이니까.”

  “예를 들면?”

  “음, 어디 보자······.”

 

  지면에 드러누운 거목에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이건 어떨까? 주인공에게 라이벌이 있는데, 그 녀석에게는 누구라도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는 강한 필살기가 있는 거야. 극의 긴장감을 위해서라면 그 기술을 임팩트있게 묘사할 필요가 있겠지.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효과적으로.”

 

  갈등과 다툼, 주인공을 가로막는 시련으로 압도적인 강적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요는 그것을 얼마만큼 구체적인 형태로서 표현할 수 있는가에 달렸겠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한 방에 끝내선 안 돼. 클리이막스에서 싱겁게 끝내는 것만큼 기대를 배신하는 전개도 없으니까.치고받는 난타전 속에서 긴장감을 끌어낼 수 있어야 실력있는 제작자라 할 수 있어.”

  “어려운 일이네. 한 방만 맞아도 KO이니 유효타를 허용할 수는 없고, 그러면서도 개연성을 챙겨야 하다니.”

 

  쫓는 쪽은 정말로 맞춰선 안 되고, 피하는 쪽은 절대적인 열세에서도 과정에 대한 설득력을 나타내야 한다. 모순투성이의 장기전에, 안일하게 임해서는 이도저도 살리지 못할 게 뻔한 불공정 난제다.

 

  “그 지루함을 중화시키는게 연출이지.”

 

  지면에 누운 기둥 위에 폴짝 올라선다. 시원하게 뻗은 두 다리는 울퉁불퉁한 발판 위에서도 흔들림 없이 멋지게 주인을 뽐내주었다.

 

  “연출?”

  “주먹을 내지른 충격에 주위 환경이 파괴된다던지, 직격만은 피했지만 충격파에 휘말려 날아가 버린다던지. 특히나 이런 환경에서는 잘만 이용한다면 CG 없이도 그럴듯한 시각적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시각적 효과라, 잘 이해가 가지 않는걸?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키는 볼을 긁으며 쓴웃음을 짓더니 수평으로 놓인 뿌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예를 들면 말이지.”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외나무 다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뿐한 스텝으로 전진했다. 끄트머리 옆에 놓인 작은 나무 옆에 서 왼발의 뒤꿈치를 올리는가 싶더니ㅡ,

 

  “이런 것 처럼.”

 

  다음 순간, 족히 갑절은 살았을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동작이 보이지 않았어. 시작과 끝의 발동작, 거기에 잘려진 단면을 참고삼아 휘둘러졌을 궤적을 상상했을 뿐. 한 발 늦은 파쇄음이 이제서야 들려왔고, 황갈색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와중에도 사 짱의 발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나무란 말이지, 속이 썩으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죽은 거나 다름 없거든.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살짝 치는 것만으로 화려하게 부숴져. 안전에 조금만 유의한다면 슈트 액터가 다칠 일은 없을 거야. 펀치력이 어떻니 킥력이 몇 톤이니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눈으로 보여주는게 확 와닿지 않아?”

 

  어, 응. 엄청 와닿네.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멀쩡한 나무를 박살나는 사 짱의 물리력에. 평소엔 정말, 어어어엄청 힘조절을 해 주는 거였구나······. 맨몸으로도 이 정도라니, 내 소꿉친구는 사실 괴인이나 개조인간이 아닐까? 

 

  “아무래도 나와 사 짱은 가치기준이 다른 것 같아······.”

  “뭔 소리래?”
  “아, 아무 것도······.”

 

  이쪽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무섭다. 흡사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한 기분. 사 짱이랑 친구여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이 쌓이고 쌓여 시청자의 몰입을 돕는다는 이야기구나. 싸움의 초반은 다소 정리된 등산로에서 찍고, 격화되기 시작한 뒤부턴 이런 곳으로 옮기면 되고.”

  “바로 그거야. 역시 핫 짱은 이해가 빨라서 좋다니까.”

 

  사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내 어깨를 쳤다. 조금 얼얼하지만 괜찮아.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것이 애정표현이란걸 실감할 수 있으니까.

 

  “엇차.”

 

  훌쩍 지면에 착지한 사키가 무릎을 툭툭 털고는, 저멀리 사진찍기에 한창인 하야마 그룹에 시선을 던졌다.

 

  “핫 짱도 사진 찍을래?”
  “됐어. 귀찮아.”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사라져버린 터는 흔해빠진 숲속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내부가 썩어버린 나무는 돌이킬 수 없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언제 갈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젠가나 마찬가지다. 한 달, 두 달, 운이 좋으면 몇 년 정도는 버틸지 몰라도, 결국엔 쓰러져 박살나버릴 운명.

 

  하지만 흉물스럽지는 않았다.

  썩어 문드러져, 원본을 알 수 없을만큼 풍화되어도 이곳에 있을 테니까. 먼저 쓰러진 고목은 대지의 양분이 되어 비바람이 할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상흔이 아물 때까지, 다시금 서로의 일부로서 함께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뒷짐을 진 사키가 앞서거니 걸어가기 시작했다.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는게 아무래도 오랜만에 주고받은 특촬물 대화에 제법 흥이 오른 기색이었다. 

 

  “이 다음은 하산이야?”
  “그래. 쭉 내려가는 일만 남았어.”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약간 아쉬운걸?”
  “나중이 되면 그렇지도 않을거야.”

  “왜?”

 

  흔히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말한다. 기억이란 불안정해서 나아간 세월에 반비례해 퇴색되는 거라고. 시간의 흐름을 되짚어나갈 때 참고로 할 표지판을 만들어두는 거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반만.

  정말로 강렬한 사건은 몸에 익힌 자전거와 같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쳐둔다면 말이다.

  이정표가 아닌,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나’를 시간의 길목에 남겨두고 오는 거니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성숙해져도, 기억을 마주하게 된 순간 그 때처럼 유치해지고 만다.

 

  좋든 싫든 그렇게 되는 것이다.

 

  “두고 보면 알 거야.”

 

  그러니 모쪼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xxx



  시냇물과 단풍, 찻집의 청명함이 어우러진 거리를 둘러본 우리는 키부네구치 역으로 돌아갔다. 이곳까지 데려다준 에이잔 전철을 타고 종점 데마치야나기까지 이동한다. 흐음, 뭔가 낯이 익은 이름인걸? 야나기, 야나기라? 모르겠네.

 

  거기서 케이한 본선으로 환승, 산조 역까지 이동 후 다시 토자이선으로 갈아탄다. 

  버스 쪽이 조금 더 싸게 먹히지만 환승이 번거로운데다 길이 막힐 경우의 이동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많은 인원, 그중에서도 J반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는 만큼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게 바람직할 것이다.

 

  종착지 우즈마사텐진가와 역에서 내린 뒤에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란덴에 탑승한다. 두 정거장 뿐이지만 공도의 자동차와 나란히 달리는 노면전차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유키노와 유이에게 신호를 보낸다. 엇박자로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J반 아이들이 바람잡이를 하는 틈에, 하야마 그룹을 무사히 하차시키는 데 성공했다.

 

  “우즈마사쿄류지?” 

  “핫 짱, 여긴 뭐가 있어?”

 

  가늘게 눈을 뜬 사키가 물었다. 곁에 선 사이카도 알쏭달쏭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크흑, 뭐야 저 귀여움. 그야말로 외계에 불시착한 어린 왕자다.

 

  “거의 다 왔으니까 일단 출발하자. 궁금한 건 그 때까지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구.”  

  “뭐야, 그게? 수상한데.”

  “엄청 즐거운 곳이야. 믿어 줘.”

  “난 믿어. 하치만이 말한 거라면.”

 

  사이카의 선의가 눈부시다. 어찌나 밝은지 사키조차도 어깨를 으쓱하며 수긍의 뜻을 보였다. ‘재미없기만 해봐라. 그냥-’ 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들린 것도 같지만 못 들은 걸로 하자. 아니,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위치 정보가 그려진 약도를 전송하자, 유키노의 조원 중 가장 활달했던 안경 소녀가 반응을 보였다.

 

  “좋아! 이 쪽이야! 나만 믿고 따라오라구!”

  과하리만치 큰 소리로 외치고는 척척 걸음을 옮긴다. 나머지 일행도 꺄아꺄아 흥을 돋구며 뒤를 쫓았다. 언뜻 난잡하게 뒤따라가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뒤쫓는 이가 놓칠 일 없도록 치밀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리를 지은 여고생은 무섭지. 어디서 저런 가공할 만한 행동력이 나오는 걸까?

 

  “뭐가 있긴 있나 본데?”

  “유이, 정말 여기야?

  “웅! 엄청 유명한 데야! 우리두 빨리 가자!”

 

  혼자서도 잘하는 우리 가하마 씨는 더 대단해!

  역시 전직 스파이 가하마스 양이다. 천연덕 스러운 얼굴로 친구들을 이끄는 폼이 예사롭지 않아. 마치 돈까스를 미끼삼아 아이를 치과로 데려가는 부모 그 자체. 저 처세술만큼은 몇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겠지. 마음 속으로 찬사를 보내며 이번에도 후미를 자청했다. 

 

  선두에는 J반과 동행하는 유키노, 중간에는 유이. 봉사부 세 명이 일행의 전체를 감싸는 포지션이다. 서로의 사각을 빈틈없이 메꾸며 마침내 큰길가로 접어들었다.

 

  교토의 건축물은 높이가 낮다. 뿐만 아니라 가게의 간판도 색상이 통일돼 있다. 전통보존의 차원에서 이런저런 제한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거를 재현한 거대한 관문도, 널찍하고 각진 입구도 지척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그야말로 느닷없이 나타난 모양새가 되었다.

 

  “토에이, 우즈마사 영화마을?”
  “영화 마을이면 세트장 같은 건가?”

  “맞아. 어서 들어가자. 표는 내가 사올게.”

 

  매표소를 향해 나아가자 눈치빠른 토베가 따라붙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왠지 모르게 이런 역할은 도맡아 할 이미지지만. 

 

  “어때? 잘 되가는 느낌이 들어?”

 

  인접한 창구에서 계산을 하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건다. 왕년의 첩보물 주인공이 된 느낌. 

  그리고 대개 극의 중반에 나오는 이런 장면은 꼬여가는 상황을 알려주는 클리셰였지.

 

  “으윽, 그게 말여~, 나름대로 노력해 보고는 있는데, 어째 평소보다 더 얘기를 못 하는 느낌이 들걸랑? 어떡하지?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나?””

 

  고민을 거듭해봐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흔히 저지르는 악수悪手. 이건 말려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해. 여기서 실수했다간 되돌릴 수 없어. 누나 쪽은 유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자연스럽게, 재밌는 추억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가도록 해.”

  “말은 쉽단 말이지······. 스승님, 뭔가 임팩트있는 방법은 없어? 단숨에 여심을 사로잡는다던지, 뭐 그런거!”

 

  있겠냐, 그런 게?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이 세상 누구도 사랑 문제 따위로 고민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물어볼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나라고 해본 줄 알아? 연애 경험 제로인 하치만에게 더 이상의 조언은 무리입니다!

 

  “······귀신의 집 같은 건 있다만.”

  “오옷! 그거 좋네! 어제의 그 태내 체험관? 에서도 제법 진전이 있었거든~. 깜깜한 곳을 단둘이 걷다 보면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좋아, 그걸로 하자!”

 

  아무리봐도 헛물 들이키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마음의 거리란게 뭔지는 몰라도 그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에비나 양이 누나랑 붙어다닐 리가 없지. 이성으로서의 호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티켓 구매 정도는 따라와주지 않아으려나? 뭐, 난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힘내라!

 

  학생 요금으로 계산을 마친 뒤 토베와 갈라졌다. 표를 나눠받은 하야마 일행이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 사키와 사이카에게 돌아갔다.

 

  “고마워, 하치만.”

  “빨리 갔다 왔네. 얼마였어?”

  “얼마 안 했어. 어서 들어가자.”

 

  잽싸게 발을 돌렸지만, 한 발 앞선 사키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얼마였냐니까?”

 

  아아,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인터넷 예약을 하지 않은 게 발목을 잡다니. 이런 건 눈치채지 못 하게 해치웠어야 했는데.

  

  “핫 짱, 빨리 말해.”

  “······1400엔.”

  “뭐어?!”

 

  사실대로 실토하자 사키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덤으로 사이카도. 허겁지겁 지갑을 꺼내려는건 간신히 저지했지만 다음 순간 단단한 두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말이 돼?! 엄청 비싸잖아! 1400엔이 뭐가 ‘얼마 안 했어’야?!”
  “서, 성인 요금보단 1000엔 싸. 1인분 기준으로는 2끼 분 식사값이라구.”

  “장난해? 천 엔이면 이틀은 먹을 수 있거든?” 

  “어? 그게 문제야?”
  

  동생들 반찬은 성대하게 만들면서 본인은 얼마나 절식하고 계신 겁니까, 카와사키 양? 이 건에 대해서는 추후에 진중히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내 친구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 그만 해. 두 사람 다.”

  

  사이카가 끼어들어 중재한 덕분에 나와 사 짱의 물리적 충돌은 막을 내렸다. ‘물리적’으로만. 가차없이 쏘아지는 안광이 오금을 저리게 했지만, 지지 않으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한 두푼도 아닌 티켓값을 어물쩍 넘어가려 하다니, 용서 못 해.”

  “오해야. 내가 쏘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한 적 없어. 잘 기억해뒀다가 다같이 계산할 생각이었다고.”

  “흥, 또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이번에도 말도 없이 죄다 떠맡으려고?”

  “아니라니까!”

  “모두 그만!”

  작지만 또렷한 사자후가 내리꽂혔다. 

 

  “정말, 다 같이 놀러왔는데 싸우면 못 써.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매너 위반이야.”

  “아니, 그치만 이 녀석이······.”

  “카와사키 양은 하치만을 믿지 않아?”
  “그,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신뢰한다면 먼저 해명할 기회를 줘. 잘잘못은 그 때 가려도 늦지 않아.”

 

  순진하고 앳되보이던 평소와는 다르다. 점심 시간의 테니스 코트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힘찬 함성이었다. 갈등을 중재하는 것은 익숙한 듯 늠름하게 대처하는 사이카에게 사키도 한 발 물러서 주었다.

 

  “하치만.”

  운동부 주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이카는 내가 알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말이지. 사실대로 말하면 안 들어가겠다고 할 까봐 걱정이 됐어. 보다시피 가격이 좀 나가니까, 그렇다고 사 짱만 빼고 가는 건 절대로 싫었거든. 어제 아침 아빠한테 용돈을 좀 받았는데, 나야 뭐 쓸 데도 없잖아? 그래서 그 뭐냐, ······보태주고 싶었어.”

  

  거짓말이 들킨 건 괜찮다. 구질구질한 변명도 상관없다. 그러나 금전적인 문제에서 동정받았다는 생각만큼은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 아닌, 돈과 친구 사이에서 친구를 고른 내 이기심이, 허술한 거짓말과 함께 숨겨지기를 빌었을 뿐이다.

 

  “뭐야,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됐잖아. 이 정도는 알아서 낼 수 있는데······.”

  “내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니까. 나에게도 공돈이구, 다같이 시간을 보내는 데 쓸 수 있다면 아깝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니? 진짜로 핫 짱은, 잠시만 방심해도 믿을 수 없는 짓을 한다니까.”

  “응, 미안해.”

  한숨을 내쉰 사키가 이마를 쓸어넘겼다.

 

  “됐어. 더 말해서 뭐해. 이미 화도 다 풀렸는걸.”

  “사 짱······!”
  “그러니 나중에 계산하자. 1400엔이랬지? 치바에 가서 갚을 테니까.”

  “아니 그건 좀 넘어가 주라고.”

 

  하다못해 ‘다음에는 내가 쏠게~!’ 정도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구. 두루뭉술한 기약 뿐이라면 여차저차하는 틈에 잊게 만들 수 있으니까. 아, 틀렸어.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해 버렸어. 분명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져 있을 거야.

 

  “진짜 못 말린다니까.”
  “누가 할 소린데.”

 

  한동안 서로를 쏘아본 우리는 거의 동시에 실소를 머금었다. 어깨에 힘을 빼고, 화해의 초석이 되어준 친구에게 고개를 돌린다.

 

  “고마워 사이카. 이번에는 여러모로 신세를 지네.”

  “그러게 말야. 넌 좀 반성해야 해. 나도 나지만 토츠카에게도 민폐라고.”

  “아니, 거기선 같이 사과해 줘야지, 사 짱.”

  “어림 없네요. 괜한 짓 한 건 너야, 핫 짱.”

  “푸흡, 이제야 평소의 두 사람으로 돌아왔구나.”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다투지는 않는데, 뭐, 사이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한차례의 위기를 넘긴 우리는 곧장 영화 마을로 입장했다. 들어서자마자 최근 유행하는 모 다이쇼 시대 캐릭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거 시작부터 강렬한 환영식이군요.

 

  “잠깐, 어디로 가는 거야?”

  “하치만, 세트장은 요 앞쪽인데?”
  “후후후.”

 

  사이카는 티켓에 동봉된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는 타입, 사키는 무작정 부딪쳐보는 타입이로군. 어느 쪽이 좋다고 딱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후자 쪽이 편했다.

 

  “내가 언제 세트장에 간다고 말했지?”
  “뭐, 뭐라고?!”

 

  AIBO도 울고 갈 훌륭한 리액션이다. 하지만 사 짱, 너는 모르고 있어. 이 다음 시작될 깜짝 쇼를 알게 되면, 분명 지금처럼 장난스러운 태도는 못 하게 될걸?

 

  “일단 따라와 보라구!”

  입구 바로 앞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심드렁하던 사키의 눈이 점점 커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소리친다.

 

  “하, 하하하, 햣?!”

  놀라던지 이름을 부르던지 둘 중 하나만 해 줘. 그야말로 학교 앞 구멍가게의 막과자 아이스크림만 먹던 아이가, 처음으로 베스킨 라빈스에 들어간 듯한 반응이었다.

 

  그럴 만 한지. 왜냐하면, 그도 그럴게 사 짱은,

 

  “이, 이게 뭐야?! 어? 여기 있는 거 전부······ 이래도 돼? 라이더잖아! 슈퍼전대잖아! 어떡해! 꺄아아아아아!”

 

  자타가 공인하는, 치바 제일의 특촬물 덕후니까.

  

  “나이트! 사소드! 제로노스! 하하하! 2호 라이더만 갖다 놓은 거야? 그럼 카리스가 2호인걸 인정했다는 거네! 역시 토에이야!”

 

  헤이세이 라이더는 전부 섭렵. 심지어 태어나기 전에 방영되었던 것도 꿰고 있다. 높은 CG로 구성된 최신 시리즈를 먼저 접한 나로서는 솔직히 잘도 옛날 화면에 몰입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사 짱은 진심이었다.

  

  “엄청 커! 역시 쇼와 라이더는 대접이 다르구나. 이것도 시간내서 봐야 하려나? 거대 흉상도 있어! 끝내준다!”

 

  그뿐이랴. 철지난 염가 DVD부터 DX드라이버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싸게 나온 물건은 악착같이 수집해왔지. 사키의 방 사진을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30대 독신남의 서재인줄 알 정도. 얼마 전에도 변신완구를 두른 케이카가 깜찍하게 손을 치켜든 사진이 전송됐는데······. 카와사키 가의 영재교육은 무시무시하구만.

 

  “우, 우와······.”
  “사이카는 처음 보지? 사 짱의 저런 모습.”

  “으응, ······좀 의외야.”

  

  차마 부정하지는 못한 사이카가 멋쩍은듯 그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데려온 나조차도 얼떨떨하다.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 표현은 보기 드문데, 거의 산책 나온 비글 수준의 에너지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나?

 

  어라? 지금 이쪽을 봤어.

  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데?

  사, 사 짱?

 

  “핫 짱, 사랑해!”

  “크허억!”

 

  베어허그, 통칭 곰 껴안기를 알고 있는가.

  곰이 사냥감을 조이듯이 상대를 끌어안아 허리를 압박하는 기술이다.

  물론 현실의 곰은 강하다. 절대적이 물리력이 있는 한 잡기술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리고 그건 사키에게도 통용되는 법칙이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나 보여주려구 데려온 거야? 아아, 이제 알겠어. 그래서 쿠라마에서의 일이 아쉽지 않을 거라구 한 거구나? 정말 고마워! 나 너무 기뻐서 죽을 것 같아!”

 

  사, 사 짱, 나도 죽을 것 같아. 갈비뼈 골절이나 질식사 같은걸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끼여들어도 아랑곳없이 꼬옥 껴안은 채 뺨을 비벼온다. 잘 재봉된 헤어 슈슈가 시야에 흔들렸고 어깨 위로 올려진 얼굴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귓가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아까 너무 심하게 말했지?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힘껏 밀어내는 노력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잔혹하리만치 순수한 호의였다.

  하는 수 없이,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 사키의 등을 감싸안았다.

 

  “생일 축하해, 사 짱.”
  “······어?”
  “조금 늦었지만, 내 나름대로의 서프라이즈 선물이야.”

 

  조금 더 가까워진 얼굴에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걸 느낄 수 있다. 자그마한 틈에 숨통이 트인 것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를 말을 전부 내뱉는다.

 

  “사 짱의 생일은 월요일이었잖아. 중간고사가 시작된 날이라 전후로 시간을 잡을 수 없었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마침 이 곳을 발견해서 와 봤는데,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그럼, 용돈을 쓰겠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지.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사 짱이 갚을 필요는 없어.”

  “······뭐야, 그게.”

 

  어깨에 얼굴을 묻더니 또다시 끌어안는다. 끄아악, 하치만 죽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고, 그저 사키의 등을 토닥이는게 고작이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주마등 탓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뒤 나를 붙잡는 팔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 짱, 저기 봐.”

 

  약간이지만 빨갛게 물든 눈동자가 올라오더니, 구름 속에 숨듯 황급히 소매에 비벼댔다. 그거 제 교복입니다만?

  손짓으로 가리킨 곳을 곁눈질한 눈이 또다시 급변했다.

 

  “저건······.”

  “특촬 히어로 연표. 그 말인 즉슨, 쇼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작품에 이 안에 전시되어 있다는 뜻이지.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응응, 엄청 재밌을 것 같아.”
  “그럼 가 봐.”

  “하치만은?”
  “물론 나도 가지. 그래도 이런 감상에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니까. 시간도 많고, 느긋하게 둘러보자.” 

  “······고마워.”

 

  한 걸음 물러서 매무새를 정돈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이쪽을 돌아본 사키는 한쪽 눈을 찡긋 깜빡인 빠른 걸음으로 입구에 들어갔다.

 

  살았어. 살아남았어······. 반갑다 산소야! 오랜만이야 세상아!

 

  “하치만은 여전하구나.”

 

  일상과의 재회에 기뻐하는 나를 내내 지켜보던 사이카가 반겨주었다.

 

  “하핫, 그렇지도 않아. 항상 이런 식이면 내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해. 지금도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구.”

  “표 한 장 사준 거 가지고 뭘.”

  “그것말고도, 전부 다.”

 

  특이할 것 없는 미소였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진지했다.

 

  “······미안하네. 이번 여행에서는 이래저래 폐만 끼치고.”
  “신경 쓰지 마. 내가 원해서 돕는건데 뭐.”

  

  말로 하지 않아도 알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표현해야 하는 것이 있다.

  아니, 아마도 반대일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전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빠짐없이 말해야만 한다.

 

  “······그렇구나. 그럼, 끝까지 폐를 끼쳐도 될까?”

 

  미안함과 고마움, 호의와 동경, 그 이상의 모든 것들이,

 

  “응! 마음껏 의지해 줘!”

  전부,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둘 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으앗, 깜짝이야.”

  “어서 와, 유키노시타 양.”

 

  유키농 언제 왔농? 요즘 너무 신출귀몰한 거 아니니? 오빠의 심장이 요즘 여러 방면에서 수난이란다? 그나저나 여기에는 왜?

 

  “세트장을 둘러보다 떨어져 나왔어. 뒤따라오던 급우가 내게, 하치만이 2층으로 올라갔다고 알려주었거든.”

 

  마음을 읽혔다는 사실보다도 찾아온 경위에 공포를 느낀다.

  마치 바람피는 남편을 추적하는 듯한 광범위 네트워크.

  딱히 켕기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다, 다른 조원들은?”

  “같이 가자고 권해도 사양했어. 아마 다들 특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야.”

  

  그, 그런가? 하긴 이쪽 계열은 마이너랄까, 어렸을 때 거쳐가는 관문같은 느낌이고, 진짜로 인기 있는 건 세트장 쪽에 있을 테니까. 말하고 나니 슬프네. 히라츠카 선생님이 있었더라면 좋은 동료가 되어줬을텐데.

 

  “유키노시타 양은 좋아해?”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좋아해. 어렸을 때는 다같이 모여서 보고는 했단다. 항상 주말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어.”
  “근사하네. 그렇구나~. 아, 하치만, 나도 먼저 가도 될까?”
  

  뭐, 뭐라고?!

 

  “어째서?!”
  “으응, 아마 유키노시타 양네 조원들이랑 같은 이유일거라 생각하는데······.”

  “여, 역시 내키지 않았던 거야?”
  “아냐아냐, 그렇진 않아. 음~, 아!”

  

  대답을 망설이던 사이카가 손에 쥔 지도를 내밀었다. 순서가 반대 아닌가?

 

  “여기, 귀신의 집! 나 이런 거 좋아하거든!”

  “그런 거라면, 이후에 함께 이동해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카와사키 양은 이런 거 무서워하잖아. 여기서는 각자 따로 즐기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

  “그건, 맞는 말이지만.”

 

  사 짱이라면 폐장 시간까지 여기에 둬도 안 질리겠지. 어차피 동행할 수 없다면 여유가 있을 때 나눠서 행동하자는 거구나. 아무렴,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건 중요한 문제니까.

 

  “알았어. 조금 있다 만나자, 사이카.”

  “응. 나중에 만나. 유키노시타 양도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고마워.”

 

  손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키노가 말했다.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응, 분명 알고 있어. 유키노처럼.”

  “어머, 눈치채고 있었니?”
  “그렇게 티나게 도와주는데 모를 리가.”

 

  쿠라마에서는 굉장했었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나간 느낌이 들었지만 장단을 맞춰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100%는 진심이었다고 해도. 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하치만의 계획대로 흘러갔을까?”
  “글쎄. 아직은 몰라.”

  “그래,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겠구나.”

  “기다려야지.”

 

  떠들썩한 아랫층과 대비되는 적막이 사위를 물들인다.

  할 일은 잊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 온 수학여행을 전부 반납할 기세로 임할 생각은 없다. 자기희생은 더 이상 안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래, 그건 유키노도 안다. 알 터인데······.

 

  “유키노.”
  “뭐니?”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별로.”

 

  그럼 왜 제 소매를 잡고 계시는 건가요?

 

  팁 한 가지. 여자아이가 ‘별로’라고 말할 때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죽을 각오로 머리를 굴려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사키가 하치만을 껴안고, 하치만이 등을 토닥여 줄 때부터?”
  “아아, 그건 그거다. 레슬링 경기에서의 탭 같은 거야. 숨을 쉴 수가 없었거든.”
  “알아. 사 짱, 힘 세니까.”

 

  어라? 이게 아닌가? 아니, 하지만 분명······.”

  “유키노.”

  “뭐니?”

  “혹시······ 부러웠던 거야?”

 

  움찔하는 유키노. 한쪽 팔을 부여잡고는 숨을 고른다.

  

  “그런 거 아냐.”

  “딱히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방식이 좀 과격해서 그렇지 사키 나름의 애정 표현이니까. 안아 달라고 하면 해줄걸? 유키노니까 조금 더 힘조절을 해서······.”

  “아니라니까.”

 

  엥? 아니면 대체 뭐야?

 

  “그런 게 아니야. 사 짱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건 잘 아는걸. 우리 사이의 약속도 아직 유효하고······.”

  “무슨 말이야?”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깨닫지 못 했니?”

 

  갈피를 못 잡는 내게, 애달픈 시선을 보내던 유키노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억지로 끌어안으면, 받아주는 건가 싶어서······.”

 

  ······유키노시타 씨, 제대로 들렸다구요?

 

  아아, 그런가.

  그런 뜻이었나.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겠구나.”

  “······응.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너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나쳐왔던 무수히 많은 신호들을,

  애매한 상태로 지나쳐버린, 우리들의 거리감을.

 

  “후후후, 또 표정이 굳어버렸구나. 오늘은 좋은 날이잖니? 웃어 주렴.”

  “이렇게?”

  “그래. 자, 얼른 가자. 오랜만이라 그런지 나도 기대되기 시작했단다.”

 

  미루지 않고 확실히, 매듭을 지을 테니까.



  xxx

 

  식사를 마친 직후 밖으로 나섰다. 이른 저녁의 호텔은 식지 않은 열기가 들끓어 어디를 가든 사람과 마주친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며 사진을 공유하는 학생들은 평안한 헤이안의 숲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게 시무룩한 토베를 보자마자 한낮의 전말을 알아버렸다고, 거북해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밤공기도 쐴겸 거리를 걷다 시야에 들어온 편의점에 들어갔다.

  용무는, 그렇군. 밥도 먹었으니 카페인을 채워볼까. 식후 커피는 불로장생약이니까.

  진열대 사이를 지나 냉장고 문고리로 손을 뻗는데, 불쑥 튀어나온 손과 부딪치고 말았다.

 

  “앗.”

 

  아무래도 히키가야 가는 죠스타 가문 뺨치는 혈연인 모양이었다.

  무슨 우연인지 유미코가 거기 있었다.

 

  “누나?

  “······하치만?”

 

  그새 갈아입었는지 허술하다 싶을 만큼 단촐한 차림새였다. 방금 말린 머리카락이 얇은 가디건 위로 흘러내린 앞에 반사적으로 거두어들인 손이 허공을 방황했다.

 

  “머, 먼저 사.”

  “아니, 누나 먼저.”
  “나아는, 괜찮으니까······.”

  “아니, 나도 딱히······.”

 

  말을 이어갈 수 없어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한 걸음 물러선 유미코가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천천히 진열장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무슨 말을 꺼냈어야 했을까?

 

  “없더라, ······맥스 커피.”

  “어어.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 알고 있었구나.”

 

  꾹 다문 입술이, 기분 탓인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하치만은 예전부터 똑똑했으니까. 챙겨주지 않아도, 사실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아이였지.”

 

  혼잣말처럼 되뇌이고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맥캔은 없지만, 다른 거라도 괜찮다면 하나 사 줄게.”
  “아냐, 그렇게까지 마시고 싶은 건 아니구.”

  “여기까지 왔으면서? 됐으니까 기다려 봐.”

  “······나는,”

 

  입에 담으려는 그 때, 덜컹거리는 쇳소리가 뒷말을 막았다.

 

  “응, 이거라면 괜찮을 거야.”

  

  파이프를 문 인상적인 아저씨가 그려진 척 봐도 강렬한 디자인의 음료수를 건네받았다. 카페모카라면 확실히 이중에서는 가장 달달한 커피일 것이다. 커피맛 음료가 아닌, 진짜 커피.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계산부터 해야지.”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눈으로 좆았다. 휘황찬란한 브랜드 로고와 태평한 BGM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시장바닥 한가운데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가늠할 수 없는 공포에 몸이 굳었다.

 

  “자, 받아.”

  “······고마워.”

  “이 정도 가지고 뭘.”

 

  갈색의 액체를 머금었지만, 그 맛은 대뇌까지 올라오지 못 했다.

 

  “누나.”

  “응?”

  “오늘은 즐거웠어?”

  

  가게 구석에서 들려오는 전자레인지의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응, 즐거웠어.”

  “그래?”

  “하치만은?”
  “뭐, 나도.”

 

  그리 크지도 않은 병을 홀짝이며, 나란히 선 자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이 없는 깜깜한 밤거리를.

  알루미늄이 구겨지는 소리가 자명종처럼 깨우기 전까지.

 

  “먼저 돌아갈게.”

  “바래다 줄까?”
  “얘는, 바로 코앞인데.”

 

  씨익 웃어보인 누나가 돌아섰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자동문이 열렸을 때, 마지막으로 이쪽에 시선을 던졌다.

 

  “잘 자.”

  “······누나도 잘 자.”

 

  어둠 속에 멀어져가는 그 등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Posted by 시티아_제르카시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